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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굴로 들어가는 거냐? 그냥 땅 파보면 되는 거 아냐? 여긴 좁아서 땅 파기도 힘들 텐데…"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낮기 때문에 허리를 굽힌 불편한 자세로 강전이 물었다.
"멍청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니까."
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명했다.
"생각해 봐. 그 날 밤이 되면 놈은 소인들이 사는 마을과 숲의 땅 아래쪽에서 움직인다고 했어.
그리고 소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고… 그렇다는 건 동굴의 깊숙한 곳과 놈이 사는 곳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 아니겠어? 그러니까 놈이 소인들의 눈에 띄지 않고 제물을 가져가는 거겠지.
그리고 놈은 거대하다고 했으니까 굳이 우리가 땅을 파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을지도 몰라."
"그래, 그래. 너 조낸 잘나서 조낸 좋겠다."
"응, 잘나서 조낸 좋네."
"만날 잘난 척은… 흥. 귀염성 없는 기집애."
동굴 안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그들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몸을 한껏 움츠리고 딱 달라붙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장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레미얼을 위한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우준 일행이 전부 들어갈 만큼 넓지는 않았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우준이 스웨인을 뽑아들고 동굴의 여기저기를 찔러보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각자의 무기를 다잡고 어떤 괴물과 맞딱뜨리던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준비하지 않고 동굴에 들어온 터라, 레미얼의 처소에 준비되어 있는
작은 등불의 빛에 의존하고 있었다.
작은 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유난히 창백한 해윤과 브리엔의 모습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어줬다.
브리엔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섭도록 아름답다면,
입가를 약간 틀어 올린 해윤의 얼굴은 소름이 쫙쫙 끼치도록 오싹했다.
"너… 입가의 그 웃음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이런 데서 보니까 정말 무서워 죽겠다."
강전의 말에 해윤이 껄껄껄 웃었다.
"사내 녀석이 이까짓 일로 겁 먹기는! 걱정하지 마! 난 최강의 귀신 쫓는 사나이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네 얼굴이 귀신 같다는 거다, 이 허여멀건 녀석아."
그 때, 우준이 돌아보며 말했다.
"찾았다."
우준은 스웨인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깊숙이 들어간 곳을 발로 퍽퍽 밟았다.
흙은 그리 두텁지 않게 덮여 있었던지 발길질 몇 번에 아래로 폭싹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커다란 구멍만이 남아있었다.
소인의 마을에 들어오는 입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 두 셋쯤은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구멍이었다.
"이 정도 구멍으로 다니는 놈이라면 꽤 크겠는데?"
"소인들이 물리칠 엄두도 못 냈던 게 이해가 돼. 나도 혼자서 소인의 마을을 짓뭉갤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보다 큰 녀석에게는 더 쉬운 일일 거 아냐."
"일단 들어가 볼까?"
여행을 하는 중에 아무리 큰 사건에 많이 휘말렸다고 해도 싸움 전에는 언제나 긴장이 됐다.
그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동굴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별로 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동굴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빠른 걸음으로 10분을 걸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등불이 꺼질 것 같아."
궁여지책으로 레미얼이 있던 곳에 놓여있던 작은 등불을 가지고 오긴 했지만
그것도 힘을 다하여 불안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불을 붙일 수 있는 차희도 없거니와, 차희가 있다 한들, 불을 태울만한 물건이 없었다.
"아, 맞다. 죠니 아저씨가 만들어준 황금 알약. 그거 먹자. 그거 먹으면 어둠 속에서도 꽤 잘 보일 것 같은데…"
"아, 그렇구나. 그리고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리현이 들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고 속을 뒤적거려 약병을 꺼냈다.
약병에서 희미하게 황금색 빛이 번져 나와 주위를 밝혀주었다.
"이거 쓸만한데? 이걸로도 충분히 길을 밝힐 수 있겠어."
가인의 말에 해윤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나의 미모로도 충분히 이곳을 밝힐 수 있어."
"저놈의 자뻑."
리현이 한숨을 내쉬며 일행에게 하나씩 알약을 건네주었다.
리현의 짐작대로, 알약을 먹으니 눈이 확 트여서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잘 보이게 되었다.
게다가 청각과 촉각도 예민해져서 작은 소리도 들릴 뿐만 아니라
공기의 흐름에도 온몸이 반응을 했다.
리현이 다시 자루를 둘러매는 것을 본 우준은 모두 준비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등불이 꺼질까 봐 조심하지 않아도 됐기에 그들은 거침없이 달려나갈 수 있었다.
동굴이 넓어서 여기저기 부딪힐 염려도 없었다.
하지만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어디선가 풍겨오는 악취와
발에 걸리는 해골 때문에 그들은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0년 동안 잠을 자다가 밤중에 깨어나 젊은 처녀를 데리고 가서 먹어버리는 괴물이라…
음흉한 녀석이군."
해윤은 징그럽지도 않은지, 해골을 집어들고 여기저기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숨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가인은 어떤 괴물이 나타날지 몰라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해윤이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불안이 확 날아가 버렸다.
이상하게도 해윤이 옆에 있으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어떤 기술을 사용하는지 모르니 단번에 해치워야 돼. 녀석이 눈을 뜨기 전에."
"하지만… 그건 무리일 것 같네."
우준이 말했다.
"응?"
"숨소리가 바뀌었어. 놈은… 우리가 왔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어!"
우준은 스웨인을 앞으로 뻗으며 일행의 앞을 막고 섰다.
언제나 같은 구도.
적이 등장하면 가장 앞에 서는 것은 우준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우준의 옆에 브리엔이 서 있었던 것이다.
스윽- 스윽-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확실히 들렸다.
거대한 무언가가 여유 있게 몸을 움직여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쉭쉭거리는,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썩은내를 풍기며 우준 일행을 숨막히게 만들었다.
"진짜 여기서 나가면 원 없이 토해버려야지."
강전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모두 강전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들과 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있는 커브 길에 커다란 발 하나가 불쑥 나타났고,
곧 그들과 싸우게 될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놀라우리만큼 거대한…
"두더지잖아!"
두더지였다.
그랬다.
깊은 땅속에서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오랜 세월을 살게 된 두더지는
이상한 힘을 얻게 되고 점점 커져서 인간보다 더 큰 덩치를 갖게 된 것이었다.
두더지는 10년 동안 이어져야만 만족할 수 있는, 자신의 깊은 단잠을 방해한 우준 일행에게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흉측한 까만 코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콧김이 푹푹 새어나왔다.
"끄워어어어."
두더지가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동굴 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 소리에 부딪힌 돌 몇 개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이런… 동굴 무너지기 전에 얼른 죽이고 나가야겠네."
해윤이 가인을 감싸며 말했다.
그 때, 분노한 괴물 두더지가 그들을 향해 입을 쩍 벌렸고,
그 모습에서 위험을 느낀 우준은 옆으로 몸을 날려 브리엔을 밀어내며 외쳤다.
"피햇!"
괴물 두더지의 입에서 동굴 안을 가득 채울만한 거대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바짝바짝 타는 열기와 악취에 그들은 뜨거움보다도 구역질 때문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다들 괜찮아?"
"응, 괜찮아."
다행히 일행은 불이 닿기 전, 동굴 구석으로 모두 피한 터였다.
"아, 진짜 뭐얏! 이 세계는 오래 살기만 하면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 거냐?"
강전이 투덜대며 그슬린 머리카락을 툭툭 털었다.
브리엔이 피식 웃으며 아직까지도 자신을 벽에 밀착시킨 우준을 밀어내고 일어났다.
"그거… 날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냐?"
그 순간, 괴물 두더지는 다시 한 번 불을 뿜으려는 듯 입을 쩍 벌렸고,
우준이 브리엔을 구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지만
브리엔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괴물 두더지의 입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안 돼!"
일행은 절망적으로 외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길이 딱 멈춰버린 것이다.
브리엔의 앞에 안 보이는 방패라도 있는 듯, 불길은 그 앞에서 일렁이며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브리엔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가만히 서서 두더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말했잖아. 난 강해. 소인 따위나 괴롭히며 사는 두더지의 힘이 내게 위험을 가져올 리가 없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
하지만 사실 브리엔은 험악하게 몸부림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달래지 못해 쩔쩔매는 상태였다.
우준은 분명 브리엔이 죽지 않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닥쳤을 때, 우준은 브리엔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불길이 자신을 덮치려고 하는데도 브리엔을 자신의 뒤에 두고 피하지 않았다.
우준이 책임감 때문에 자기가 데리고 온 원래 세계의 동료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브리엔 자신도 그 동료들 가운데 끼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어쩐지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묘한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주머니 속에 있는 브리엔의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쥐어졌다.
"난 니들을 도울 생각 없어. 알아서 저 두더지를 죽여라."
"뭐야? 지금도 도와주고 있잖아?"
"흥. 지금은 그냥 여기에 서 있는 것뿐이다."
강전이 일어나서 브리엔의 뒤로 다가와 브리엔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쨌든… 고맙다, 브리엔."
그 순간 브리엔은, 고맙다는 말은 누구에게 들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기분 좋은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이번엔 내가 한 번 해볼까?"
강전이 파직파직 전기를 뿜어내며 브리엔의 옆에 섰다.
"어떻게 하게?"
"불이 앞을 가렸는데 우리가 저 놈 목을 베어낼 방법은 없잖아.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우리도 이쪽에서 뭔가를 쏴보내는 거지."
"전기를 보내게?"
"응. 실전에서는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지만 하나 몰래 개발한 기술이 하나 있거든."
강전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검의 주위로 시퍼런 전기가 파식거리며 일어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강전의 뒤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강전이 실수라도 저지를까 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높이 치켜들었던 검을 두더지를 향해 내뻗고는
큰소리로 기합을 내뿜었다.
그러자 검을 휘감고 있던 전기가 괴물 두더지를 향해 직선으로 뻗어나갔고
그 끝이 괴물 두더지에게 닿아 괴물 두더지의 온몸에 감기기 시작했다.
파시직-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타는 냄새가 섞였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일순간 딱 끊겼다.
그리고 그들은 전기가 흘러 사지를 떨며 쓰러진 거대한 괴물 두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괴물 두더지가 쓰러진 후에도 강전은 꽤 오랫동안 전기를 흘려보냈다.
브리엔이 옆에 있어서 저주의 힘이 억눌린 상태였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큰 힘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강전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던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업그레이드한 강전의 능력을 넋을 잃고 구경하던 리현이 정신을 차리고는 괴물 두더지를 향해
도이넨을 날려보냈다.
날카로운 도이네는 정확하게 괴물 두더지의 눈에 꽂혀 뒤통수를 뚫고 나왔다.
세게 힘을 주어 도이넨을 뽑아낸 리현은 강전을 향해 말했다.
"머리통을 날렸으니 확실히 죽었을 거야. 이제 그만 힘써."
비틀-
리현의 말을 듣자마자 강전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이것 좀 먹어."
리현은 자루 안에서 말린 과일과 고기 몇 조각을 꺼내 강전의 입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
"으에엑. 열심히 일한 나를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니냐?"
"그럼 씹어서 넘겨주랴?"
"사양한다, 사양해."
강전이 킬킬대며 고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굉장하다, 너."
우준이 괴물 두더지에게 다가가 죽은 것을 확인하는 동안, 가인이 강전에게 말했다.
"언제 그런 실력을 키운 거야?"
"우준이 녀석만 영웅 행세하는 꼴 못 보겠어서, 미친 듯이 연습 좀 했다.
으아. 그런데 이거 더럽게 힘드네."
하지만 그들은 강전이 "영웅 행세" 때문이 아니라, 혼자서 애쓰는 우준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죽었다. 어서 돌아가자. 한 시가 급해."
우준은 서두르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채민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던 길을 돌아서 나가기 시작했다.
동굴 앞에는 소인들과 레미얼이 우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땅이 심하게 흔들려서 우준 일행이 괴물 두더지에게 당해버리고,
분노한 괴물 두더지가 자신들의 마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크게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우준 일행이 동굴에서 모습을 나타내자, 소인들은 우준 일행이 괴물 두더지를 물리쳤다는 걸 깨닫고는
다들 승리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우준 일행에게 다가갔다.
"어이. 너무 다가오지 말라구. 잘못해서 밟아버릴지도 모르니까."
아직까지도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강전이 비틀거리며 말하자,
소인들은 일제히 멈춰서 조금 뒤로 물러났다.
"약속대로 물리쳤습니다. 그놈이 여러분을 괴롭히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비인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소인들은 다시 한 번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몇 명이 우준 일행을 자신들의 축제에 초대하려 했지만, 우준 일행은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레미얼은 짙은 녹색 눈동자로 우준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가자, 레미얼."
"어디에?"
기뻐하는 소인들과 달리, 레미얼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어디라니? 네 집에 돌아가야지."
"하지만 우리 집은 여기인걸."
"여기에 오기 전에는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잖아."
"하지만…"
어린 나이에 소인들에게 납치되어 온 레미얼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없다는 공포로 울었지만, 레미얼을 떠받들며 잘해주는 소인들에 의해서
조금씩 잊혀져 갔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얼마나 좋은데… 이 사람들은 나한테 정말 잘해준단 말이야.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을 다 가져다 줘.
난 여기에 있고 싶어."
마지막 말은 울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크게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얼굴이었기에 우준 일행은 몹시 난감해져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때, 해윤이 레미얼의 앞으로 걸어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레미얼을 응시했다.
"너… 정말 할아버지한테 가고 싶지 않아?"
"몰라. 잘 기억도 안 나. 누군지 모르겠어."
콩-
해윤이 레미얼의 머리를 쥐어박자, 일행은 입을 쩍 벌렸다.
안 그래도 울 것 같은 애를 때리다니…
아니나 다를까.
레미얼의 입가가 조금씩 씰룩거리는가 싶더니, 레미얼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앙! 왜 때려! 왜 때려!"
"아파?"
"아파! 아프단 말이야!"
"뚝 그쳐!"
해윤이 버럭 소리를 쳤다.
깜짝 놀란 레미얼은 울음을 멈추고 해윤을 쳐다봤다.
갑자기 울음을 멈춘 레미얼이 어깨를 들썩이며 딸꾹질을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가인이 해윤을 말리려고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해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가 뭐가 아파? 사랑하는 널 잃고 집에서 기다리는 할아버지 마음은 더 아파!
널 위해 가꾼 정원, 널 위해 정원에 만들어둔 그네, 널 위한 장난감,
네 할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사준 예쁜 침대! 그런 거 기억 안 나?
널 사랑하고, 널 안아주는 할아버지보다 맛있는 거 많이 주는 여기가 더 좋아? 응?"
"히잉… 히잉…"
레미얼이 훌쩍거렸다.
"할아버지가 가끔 태워줬을 배, 넓은 강가. 그런 게 생각이 안 난단 말이야?"
"우에에에엥! 화내지 마아. 할아버지한테 다 이를 거야. 흐에에엥…"
레미얼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해윤이 레미얼을 번쩍 안아들며 말했다.
"그래. 나랑 같이 할아버지한테 가서 할아버지한테 이르자.
가서 내가 너한테 소리 지르고 너 때렸다고 다 일러."
"흐엥흐엥… 다 이를 거야."
"그래, 그래."
"할아부지이이이…"
훌쩍이는 레미얼을 안아들고, 그들은 소인의 마을로 들어왔던 길을 따라 원래의 입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인들의 마을이 사람들에게 걸려 짓밟히는 일이 없도록
흙으로 잘 덮고 덩굴과 나뭇잎으로 가려놓은 후 노인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노인은 오두막 앞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해윤의 품에 안긴 레미얼을 발견하고는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달려와 레미얼을 안아들었다.
"오오, 레미얼. 레미얼. 우리 아가. 이제야 이 할애비 품으로 돌아왔구나. 내 예쁜 아기."
"할아부지. 할아부지. 이이이잉."
눈물이 범벅된 노인과 손녀의 감동적인 재회를 보며, 우준 일행은 어쩐지 벅찬 감동을 느꼈다.
자신들에게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게, 정말이지 몹시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