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72화 (7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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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우준 일행에게 아예 배를 주면서 말했다.

"내 목숨보다 귀한 손녀를 구해왔는데 뭔들 못 주겠나.

이 배가 필요하다면 가지고 가게. 배는 또 만들면 되니까."

일행은 아주 감사하며 배를 받았다.

그다지 크진 않지만 10명 정도는 충분히 태울 수 있는 크기였고,

빠른 물살에 쉽게 부서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게 생겼다.

모두가 배에 올라탈 때까지 브리엔은 물끄러미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 속에 드는 여러 가지 생각, 그리고 그 생각으로부터 피어나는 불안을 잠재울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있으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이제 슬슬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우준이 배에 올라타고 브리엔을 돌아봤다.

"브리엔. 가자."

우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브리엔은 자신의 결심이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우준이 가자고 하면 가야할 것 같고, 우준이 멈추라고 하면 멈춰야 할 것 같다.

우준의 목소리에는 그런 마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리엔이 우준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은

우준 일행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었다.

우준 일행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기분,

부정하고 싶은 이 기분을 정리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껏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버티고 섰냐? 그렇게 폼 잡지 않아도 조낸 멋있으니까 얼른 타."

해윤이 킬킬대며 말했다.

브리엔은 해윤처럼 거리낄 것 없이 킬킬거리며 웃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배울 수 있을까? 아니면 이대로 끝일까?'

브리엔의 앞에는 여전히 두 개의 갈림길이 놓여있었다.

우준 일행을 배신하고 영원한 안식을 얻느냐, 우준 일행을 선택하고 영원한 고독을 맛보느냐.

브리엔은 자신의 마음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잠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이윽고 브리엔이 입을 열었다.

붉은 입술이 내뱉은 언어는 하나하나가 음악과도 같았다.

"응? 어디? 배고프냐, 너? 여자 피라도 빨아먹게?"

강전을 보며, 브리엔은 살짝 웃었지만 너무도 짧았기에 아무도 브리엔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좋았다.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희들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해주지는 못 해. 너희들은 곧 죽고 난 또 다시 외톨이가 되겠지.'

"그냥… 근처에 온 김에 이런저런 볼일."

"기다릴게."

"아니. 먼저 가라. 니들이 어디에 있던, 난 찾을 수 있으니까."

"오오!"

해윤이 웃었다.

"그 말 조낸 멋있는데? 오싹오싹하다. 가인아. 네가 어디에 있던, 난 널 찾을 수 있어."

"저리 가, 스토커."

가인이 해윤을 밀어내며 브리엔을 쳐다봤다.

"정말 괜찮겠어?"

이런 어리석음이 좋다.

브리엔은 한없이 강하고, 브리엔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건 이 세계에 없음에도

약한 자기 자신들보다 브리엔을 걱정해주는, 이런 어리석음이 좋다.

"응, 괜찮아."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리현이 불안한 듯 브리엔에게 물었다.

브리엔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지만, 리현은 브리엔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브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우울한 표정인지 모르겠군.

게다가 난 어차피 너네 세계에 살지도 않아. 니들이 니들 세계로 돌아가면 어차피 나랑 니들은……"

브리엔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배에서 뛰어내린 우준이 브리엔을 꽉 끌어안은 것이다.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고 눈을 크게 떴다.

우준의 향기가 코 끝에 전해지자 브리엔은 눈을 감고,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우준의 따뜻함을 느꼈다.

"꼭 돌아와. 다시 만나자."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우준의 목소리.

그래서 브리엔은 대답했다.

"그래."

브리엔은 우준들이 탄 배가 멀어질 때까지 강변에 서서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못 박힌 듯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크나 큰 상실감과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브리엔을 짓눌렀다.

언제나 혼자였고,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간 것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견딜 수 없는지, 브리엔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깊은 한숨이 바람에 섞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우준들에게 돌아가 그들과 같은 배를 타고 터무니없는 농담을 하며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

그래, 즐기고 싶었다.

그들에게 이 여행이 어떤지는 몰라도, 브리엔은 즐거웠다.

"빌어먹을…"

브리엔은 박쥐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파란 하늘은 브리엔에게 조금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진 거지?"

따뜻한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 손에 잡힐 듯한 새하얀 뭉게구름도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정말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진 거지?"

일행은 말없이 배를 몰았다.

브리엔은 강하고, 이 세계의 어느 누구도 브리엔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동안 브리엔은 혼자서 잘 지내왔고

그건 아마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브리엔의 말대로 자신들은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브리엔은 이 세계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언젠가 그들의 앞에 놓이게 될 정해진 이별에 대해, 그들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듯 끝까지 함께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아파."

가인이 중얼거렸다.

"브리엔을 혼자 남겨 두고 와서 가슴이 아파."

"난 생각도 못 했어. 우리랑 브리엔이랑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그리고 설령 같은 세계에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일찍 죽고 브리엔은 또 다시 혼자 남겨지리라는 걸."

"아니, 브리엔은 혼자가 아니야."

우준이 말했다.

"브리엔에게는 성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아…"

"우리가 우리의 세계로 돌아가도, 브리엔은 이곳에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야."

"그렇겠지."

그러면서도 그들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노를 젓는 일은 체력을 꽤나 소모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번갈아 노를 저었다.

물살이 세지 않았기 때문에 배는 심한 요동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강이 붉게 물들었다.

주홍빛 강물은 마지막 남은 햇살 조각을 담아 반짝반짝 빛났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해가 지고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찰방이는 물소리만이 고요함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감청빛 어두운 하늘에는 떨어질 만큼 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아직 강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정말 강이 맞긴 맞나? 바다 아냐?"

지금까지 노를 젓다가 가인에게 넘긴 강전이 뱃전에 등을 기대고 목을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물이 안 짜던데? 강이겠지."

"이 세계는 짜지 않은 바다가 있을지도 모르잖냐."

"어쨌든 브리엔의 말로는 우리가 가야할 곳이 강의 끄트머리에 있다고 했으니까…"

비인이 지도를 펼쳐들었다.

"대충 이쯤이 아닐까 싶어."

지도에 나와있는 넓은 강의 건너편에는 숲이 있었는데, 그 숲의 중간쯤 되는 부분을 비인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차피 우리가 가야할, 신이 사는 곳도 이 강을 건너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우리는 맞게 가고 있는 거야."

"채민이가 무사해야 할 텐데…"

리현이 팔을 배 밖으로 뻗어 강물을 찰방거렸다.

"무사할 거야. 무사해야지."

가인이 불안한 듯 대꾸했다.

"어? 강이 점점 좁아지고 있어."

해윤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배가 조금 흔들렸지만 뒤집힐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 자신들이 나아가는 방향을 쳐다봤다.

확실히 강이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끝도 없을 것만 같던 강이었는데 멀리나마 나무와 땅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 바다는 아니었구만."

강전이 말했다.

"그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겠다. 더 힘내서 노를 젓자.

물 위에서 생활하는 건 정말 내 취향이 아니거덩."

해윤은 가인이 들고 있는 노를 빼앗아 들고 힘있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강이 좁아지면서 물의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기에, 배는 처음보다 속력이 붙었다.

신나서 노를 젓던 그들은 물살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배가 빨라진 이유가 단지 자신들이 열심히 노를 젓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배가 빨라진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준이었다.

"잠깐! 노를 멈춰!"

우준이 다급하게 외치자 노를 젓던 해윤과 비인이 움직임을 멈추고 우준을 쳐다봤다.

곧 그들은 우준의 대답을 듣지 않고도 우준이 왜 노를 멈추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노를 젓지 않았음에도 배는 엄청난 속도로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얼른 배를 옆으로 붙여야겠는데?"

비인이 당황하며 말했다.

육중한 굉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마… 폭포가 있는 건 아니겠지?"

해윤이 한 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그 설마가 맞았다.

그들의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폭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야! 얼른 배를 멈추자!"

강전이 당황하며 외쳤고 해윤과 비인은 지금까지 저었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지만

물살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우준이 해윤에게서 노를 빼앗아 강바닥에 내리 꽂으려고 했지만

빠른 물살 때문에 노가 부러졌다.

"야, 야… 우리 어떻게 해?"

강전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우준을 쳐다봤다.

우준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주위를 둘러봤다.

잡을 수 있는 나뭇가지라도 있으면 좋으려만 가까운 곳에 그들을 구원해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안 되는데… 난 물에 빠지면 안 되는데…"

브리엔도 없는 지금, 흥분한 상태의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올 전기의 힘을 걱정한 강전이

엄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배는 점점 더 빨리 급류에 휘말려 내려갔다.

"안 되겠다! 조금이라도 멀리 있는 게 낫겠지. 어쨌든 니들 잘 살아남아라! 나도 살아남을게!"

"뭐?"

"바이바이!"

벌떡 일어난 강전은 동료들을 향해 빙긋 미소를 보이고는,

그들이 잡을 새도 없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강전아!"

리현이 손을 뻗으며 외쳤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강전의 모습은 금세 그들 앞에서 사라졌다.

"강전아! 야, 이 새끼야!"

해윤이 절규하며 같이 강물로 뛰어들려 했지만, 가인이 해윤의 팔을 잡았다.

"안 돼, 해윤아. 뛰어들지 마."

가인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해윤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인의 뒤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가인의 배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넌 놓치지 않아. 절대 넌 그냥 놔두지 않을 거다."

그 순간, 배는 폭포의 끝에 다다랐고, 끝도 없을 것만 같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떨어져 내리는 엄청난 양의 물은 아무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들의 배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물에 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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