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콜록…"
우준이 눈을 떴을 땐, 해가 뜨고 있을 때였다.
질 때와 마찬가지의 붉은 빛이 강물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콜록…"
우준은 물을 뱉어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잔잔한 강물, 자갈이 깔려 있는 강변, 강변에서 이어지는 숲,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검은 성.
동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몸에 힘이 없었지만 벌떡 일어났다.
"콜록… 콜록…"
허리를 더듬어 스웨인이 잘 매달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동료들을 찾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동료들의 옷이나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우준과 함께 온 동료들 따위는 없었다는 듯,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준은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안 돼…"
그래도 다시 힘을 줘서 일어나려 애썼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돼."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검은 성이 채민을 데려간 검은 마법사가 사는 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고… 다른 애들을 찾으면 되는 거야."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려는 자신에게 당부했다.
"그 녀석들, 아무도 죽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절망하면 안 돼."
우준은 자신에게 확답을 얻으려는 듯 중얼거렸다.
"채민이를 구해야 돼."
겨우 일어났다.
"최강전! 초비인! 차가인! 조해윤! 소리현!"
힘 있게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한 번 강변을 둘러보며 동료들의 흔적을 찾아본 우준은
더 지체되기 전에 채민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검은 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몰랐는데 동료를 의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다니던 동료들이 없다는 공백이 너무 커서 우준은 숨이 막혔다.
공간이 너무 넓었다.
답답해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홀로 숲길을 걸어갔다.
"제길…"
자꾸 욕설만 튀어나왔다.
"난 약해."
슬펐다.
"난 아직 어려. 나도 니들이랑 같아. 난 그냥 평범한 17살의 남자애일 뿐이야."
그들이 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우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나 지금 불안하다."
검은 성이 눈 앞에 보였다.
"정말 불안하다."
새까만 성은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을 자랑하며 기세좋게 서 있었다.
어느 누구의 입장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굳게 닫힌 성문과 굳건히 세워진 높은 성벽은
온몸으로 우준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준은 성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성이 가까워질 때마다 공기는 점점 무겁게 우준을 짓눌렀다.
하지만 우준은 비틀거리지도, 멈추지도 않고 성을 똑바로 노려보며 걸어갔다.
"불안하지만 채민이를 구할게. 그러니까 니들도 살아남아라. 날 불안하게 하지 마. 다시 만나자."
성문에 도착한 우준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열리지 않을 줄 알았던 문은, 우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열리는 성문 틈으로 성까지 이어진 숲을 확인한 우준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숲은, 마치 처음에 떨어졌던 섬의 나무처럼 기분 나빠 보이는 나무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섬에 들어온 기분이군."
망설이지 않고 성벽 안으로 들어온 우준은 스웨인을 빼들며 중얼거렸다.
성문이 열릴 때부터 성벽 안에 존재하고 있는 무수한 위험인자들을 느꼈다.
그들은 기척도 내지 않았지만, 소리 없는 움직임과 우준을 향한 강렬한 살기를 우준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군."
혼자서 전부 당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많은 존재가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적당한 때를 노리며 우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준은 매서운 눈길로 숲을 한 번 둘러보고는, 성을 향해 이어진 길로 걸음을 옮겼다.
쉬익-
뭔가가 날아오자 우준은 무의식적으로 스웨인을 뻗어 그것을 쳐서 떨어뜨렸다.
날카로운 나이프.
우준은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를 돌아봤다.
"숨어있지 말고 나와!"
우준의 외침이 숲에 가득 울렸다.
그 순간, 나무 사이에 숨어있던 수많은 무리들이 우준을 향해 덤벼들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놈에게 검을 휘두르려던 우준은 멈칫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놈이 휘두른 쇠갈퀴가 우준의 머리카락 끝을 예리하게 베어냈다.
"사람?"
흉악한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줄 알았던 우준은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에 상당한 당혹감을 느꼈다.
우준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은 뭔가에 조종을 당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우준은 더더욱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스웨인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서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뒤에 있던 놈 하나가 우준을 향해 덤볐다.
우준은 빠르게 몸을 틀었지만 놈의 칼은 우준의 허리를 날카롭게 베었다.
뚝뚝-
깊이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욱씬거리는 허리를 손으로 한 번 만진 우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적들은 어떻게든 우준을 죽이기 위해 덤벼들었고, 우준이 아무리 재빠르게 피한다고는 하지만
그들 모두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성 근처에 다다랐을 때, 우준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다리, 팔, 얼굴…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우준은 스웨인을 휘두르지 못했다.
팔에 철근이라도 매단 듯, 너무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아직도 앞에는 몇 명의 적들이 우준을 죽이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혼자이기 때문에 우준은 마음껏 자신의 절망감과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차희의 죽음은 우준에게 커다란 고통이었다.
아마 이들을 죽인다면, 이들을 아는 누군가도 우준이 느꼈던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우준은 도무지 싸울 수가 없었다.
또 한 놈이 우준을 향해 덤볐다.
놈의 공격을 피하던 우준은 바로 옆에서 달려드는 놈을 보지 못했다.
그의 공격을 피하기엔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놈의 칼에 목이 베일 것이다.
우준의 육체는 우준의 이성과는 달리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마음대로 팔을 움직였고,
스웨인은 덮쳐오는 놈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냈다.
촤악-
놈의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내뿜어져 나왔다.
우준은 놈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놈의 피는 따뜻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우준은 이를 악물고 스웨인을 휘두르며 외쳤다.
"비야!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지?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몇 놈을 죽여도 상관없다고 했지?"
괴로운 절규가 흘러내렸다.
"그런데 어쩌지?"
앞을 막고 있던 마지막 한 놈을 베어낸 우준은 스웨인을 잡은 팔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스웨인에서, 옷에서, 얼굴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괴롭다… 난 너무 괴로워…"
일그러진 얼굴로 성문을 밀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성문은 어렵지 않게 열렸다.
뒤에서, 아직 살아남은 놈들이 우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포자기한 듯 힘겨워 보이는 우준은 죽이기에 딱 좋은 상태였다.
가장 앞서서 달려오던 놈의 칼이 우준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육중한 철문이 그대로 닫혀 버렸고,
뻗어져 나온 놈의 칼은 철문 사이에 끼어 두동강이 났다.
쩔그렁-
부러진 칼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성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지만
우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준의 얼굴에는 또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긴 스웨인을 질질 끌며 걸어갔다.
스웨인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끌려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우준아."
귀에 익은 목소리에, 우준은 고개를 들었다.
채민이 서 있었다.
조금도 다치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채민을 발견하고도
우준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준의 눈동자는 광기를 띠고 형형이 타올랐다.
"우준아. 역시 날 구하러 와줬구나. 고마워, 기다리고 있었……"
채민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바닥에 닿아있던 스웨인이 공중에 가늘고 둥근 선을 그으며 채민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채민의 목이 바닥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보면서도, 우준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떨어진 채민의 얼굴에서 유난히 큰 두 눈이 원망스러운 듯 우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준은 채민의 머리를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다.
성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그 때, 우준의 앞에 검은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검은 옷을 휘감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마법사는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잔인하군. 자기의 동료를 가차없이 죽이다니… 그 계집을 구하러 온 거 아니었나?"
우준이 웃었다.
광기에 절여진 우준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안도할 상대를 만난 듯, 원래의 잠잠하고 고용한 눈동자가 되어 검은 마법사를 응시했다.
검은 마법사는 들고 있는 검은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보아하니 힘 꽤나 쓰는 모양이군. 네놈을 나의 마력의 원천으로 사용해주마.
너 같이 강한 놈을 사용하면 나의 마력도 상당히 강해질 테니까."
우준은 미소를 지은 채 검은 마법사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다가오지 맛!"
검은 마법사가 당황하며 외쳤지만 우준은 멈추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어미를 보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어미에게만 달려가듯,
우준도 검은 마법사만 응시하며 걸어갔다.
"죽어랏!"
검은 마법사의 지팡이 끝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작은 불꽃은 끝이 날카롭게 변해, 우준의 심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지만 우준은 피하지 않았다.
불꽃은 우준의 몸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도대체… 넌…"
"채민아."
우준의 입에서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마법사의 눈이 경악과 안도, 기쁨에 뒤섞여 크게 뜨였다.
우준이 검은 마법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만 하고 가자. 너 그 모습 안 어울린다."
"우준아…"
검은 마법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검은 마법사는 머리끝에서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투욱-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자신의 모습을 되찾은 채민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채민의 손을 꽉 잡은 우준은, 그 따스함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
'역시… 이 애들로 인해 위안을 받는 건 나였어.'
우준이 어렵지 않게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검은 마법사는 한 가지 묘책을 세웠다.
동료들끼리 서로 죽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게 아마도 가장 큰 충격을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검은 마법사는 채민을 자신의 모습으로 바꾸고 손에 가짜 마법 지팡이를 들려줬다.
"아마 이 정도쯤이면 놈은 널 보자마자 죽여버리겠지.
자기의 칼에 목이 잘려나간 네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걸 보면, 놈이 얼마나 큰 혼란에 빠질까?
훗. 생각만 해도 즐겁군."
검은 마법사의 얼굴에는 잔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채민은 겁먹은 표정으로 검은 마법사를 쳐다봤지만, 그런 채민의 눈빛조차 검은 마법사로 변한 지금은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눈빛으로 보일 뿐이었다.
검은 마법사는 검지로 채민의 이마를 꾹 눌렀다.
채민은 자신이 검은 마법사의 마법에 걸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몸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온몸이 뇌의 신호를 거부했다.
조종 당하는 인형.
'꼭두각시 인형의 느낌이 이런 걸까?'
입술을 깨물고 싶어도,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어느 것 하나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이 없었다.
우준을 보는 순간, 우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자기 대신에 우준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가는 채민의 인형을 보며 "우준아, 그건 내가 아냐!"라고 외치고 싶었다.
혹시라도 우준이 그 인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서늘한 표정으로, 광기에 찌든 눈빛으로 채민의 인형을 가차없이 베어버리는 우준을 보며,
채민은 오싹함을 느끼기보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우준의 손에 죽는 게 낫다.
우준이 죽게 되느니, 우준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게 아냐.'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우준을 보며 채민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난 지금 우준이의 손에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우준이의 손에 죽을 수는 없어.
만약 내가 우준이의 손에 죽는다면… 우준이가 괴로워할 거야.
자기 목숨을 잃은 것보다 더 괴로워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난… 지금 우준이 손에 죽으면 안 돼!'
마음과는 달리 뻗어나가는 마법의 지팡이.
그 끝에 불꽃이 맺히는 걸 보았다.
채민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그 힘이 약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때문에 원래는 강하게 뻗어나갔어야 할 불꽃이 작은 조각이 되어 우준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우준이 다정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채민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