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74화 (7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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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애들은?"

채민이 물었다.

"오는 길에 뿔뿔이 흩어졌어. 작은 사고가 있었거든."

"다들… 무사해?"

"응. 무사할 거야. 분명히."

우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그들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무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이 순간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빨리 이곳에 빠져나가고 싶겠지만, 해야할 일이 하나 남아있어."

"응. 같이 하자."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채민을, 우준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우준의 시선을 고스란히 한 몸에 받은 채민이 얼굴을 붉혔다.

"왜, 왜에?"

"왜냐고 안 물어봐?"

채민이 싱긋 웃었다.

"네가 뭘 하든, 나는 널 믿어. 그러니까 네가 하겠다고 한다면 난 그걸 따를 거고,

네가 도와달라고 한다면 내 모든 힘을 다해서 도와줄 거야."

우준은 말없이 채민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성안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사랑해."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언제나 하던 말인 듯, 일상적인 말을 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그 말을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정말 사랑한다, 채민아."

하지만 다시 한 번 우준의 목소리가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채민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기조차 힘들어진 것이다.

우뚝 멈춰 서자 우준도 걸음을 멈추고 채민을 돌아봤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뛴다.

아니, 어쩌면 이미 터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심장의 고동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세차게 뛰어대서, 숨도 쉬지 못하고 우준을 쳐다봤다.

사랑고백을 받는 건 기쁜 일인데, 어째서 이토록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무슨 말이든 해야하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하지? 뭐라고 해야 좋은 걸까?'

'혹시 거짓말은 아닐까? 우준이가 농담 삼아서 한 말인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반응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치고 지나가던 의심의 덩어리들은 우준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순간

깨끗하게 사라지고, 우준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정만이 남겨졌다.

그래서 채민 역시 우준마냥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우준만큼이나 단조롭고 일상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나도."

녹색 마법사처럼 검은 마법사도 성에 마법을 걸어둔 건지, 겉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넓었다.

게다가 구불구불한 미로처럼 되어있어서 길을 찾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들은 한동안 성안을 헤매고 다녔고, 성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지만 검은 마법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빛을 잃고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우준은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이곳에서의 일을 끝내고 동료들을 찾으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래 있다가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각이 될까봐 걱정이 됐다.

게다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위장은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배고프지?"

우준의 질문에 채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배고파서 쓰러지겠어. 으에…"

"흠…"

"우리 얼른 검은 마법사를 찾아서 속박의 반지를 깨부수자. 그리고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채민이 쾌활하게 말했다.

"곰이든, 멧돼지든 잡아다주면 내가 가죽을 벗겨서 요리해줄게.

사실 난 지금 산채로 집어삼킬 수 있는 기분이긴 하지만…"

우준은 한결 밝아진 채민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 내가 멧돼지 잡아줄게."

"야, 야. 나도 도울게! 나도 배고프다고!"

그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준과 채민은 반가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강전이 서 있었다.

"강전아!"

"으아! 진짜 배고파 죽겠네. 배에서 떨어져서 아주 죽는 줄 알았어. 다른 애들은 어디 갔냐?"

강전이 배를 슥슥 문지르며 다가왔다.

"다른 애들은 아직 못 찾았어."

우준이 담담히 대꾸했다.

"야, 그럼 얼른 나가자. 애들 찾아야지."

"그래."

"가자, 가자."

강전이 성급하게 말하며 가까이 왔을 때, 우준이 갑자기 스웨인을 빼들고 강전에게 달려들었다.

채민이 우준을 말리기도 전에, 우준은 강전의 멱살을 잡아 밀어붙이고

스웨인의 날카로운 끝 부분을 강전의 눈동자에 정확히 겨누었다.

종이 한 장 차이날 정도로 가까이에 다가온 칼날을 응시하는 강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꿀꺽-

강전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채민에게까지 들렸다.

강전은 히스테리컬하게 웃으며 물었다.

"하하하… 야, 야. 이런 장난은 별로 재미없는데? 이 과격한 녀석."

"죽이고 싶진 않다."

우준이 경고하듯 말했다.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싶진 않아."

"그래, 누가 죽이래? 멧돼지 잡는 게 싫었으면 그냥 내가 잡을게. 하하…"

"우준아…"

채민이 다가와서 우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우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의 아래에 깔린 강전을 쏘아봤다.

강전은 눈동자도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 누워있었다.

그 순간 스웨인이 허공으로 높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강전을 향해 빠르게 내리꽂혔다.

"꺄앗!"

채민이 낮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퍼억-

스웨인이 꽂히는 소리에 채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은 채로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나타난 우준이 사실은 검은 마법사의 계략으로 만들어낸 인형이고,

강전이 진짜 강전일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런 거라면 자신은 강전이 죽임을 당하는데도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믿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무는데 우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약속은 지킨 건가?"

그 말에 채민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스웨인은 강전의 목이나 심장이 아닌 강전의 손에 꽂혀 있었다.

아니, 강전의 검지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조각난 반지가 흩어져 있었는데, 강전의 표정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일그러져서

채민은 깜짝 놀랐다.

우준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강전에게서 떨어졌고,

우준이 떨어져나가자마자 강전은 벌떡 일어났는데,

채민은 강전이 서서히 모습을 바꾸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강전의 노란 머리가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얼굴은 파리한 검은 마법사의 얼굴로,

옷 역시 검은 옷으로 점점 바뀌었다.

강전이야 말로 검은 마법사가 변신을 했었던 것이다.

"속박의 반지를 깨뜨리다니…"

검은 마법사의 목소리가 분노로 인해 거칠게 갈라졌다.

탁한 음성 속에 묘한 마찰음이 섞이고 있었다.

우준은 인상을 찡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끝도 없을 것만 같이 넓게 느껴졌던 성은 이제 평범한 성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조금 더 초라하고 어두운 성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내 힘의 근원을 없애다니…"

쩌어어억-

이번엔 묘한 잡음이 좀 더 확실하게 들렸다.

분명 성에서 들리는 소리다.

'설마…'

우준은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성을 이루고 있는 돌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이런…'

우준의 표정이 난감하게 변하는 것을 본 검은 마법사는 꼴 좋다는 표정으로 차게 웃었다.

"내 힘을 없앤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검은 마법사의 주위에 검은 영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채민은 그것들이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검은 영들은 오히려 검은 마법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검은 영에 둘러싸인 검은 마법사는 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비명소리가 듣기 싫어서 채민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검은 영들은 이제껏 검은 마법사에게 속박되어 원치 않는 일들을 하던 영들로,

속박이 깨지고 검은 마법사가 힘을 잃게 되자 복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인이랑 해윤이가 있었으면 저 영들을 더 평화롭게 해방시켜 줬을 텐데…"

채민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채민의 팔을 잡았다.

아직도 한 손에 스웨인을 든 상태였기에, 채민은 또 다른 적이 남았을 거라 생각하고는

인어의 검을 빼내어 손에 잡았다.

"얼른 이 성에서 나가야 돼."

우지끈- 쿵-

우준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성을 이루고 있던 돌과 나무 조각들이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막 채민의 위로 떨어지려는 돌을, 우준이 스웨인을 휘둘러 베었다.

브리엔이 없는 지금, 이런 위험한 곳에서 채민의 불행은 치명적이 될 것이다.

우준은 어떻게든 채민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사방을 살폈다.

채민은 채민 나름대로 우준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인어의 검을 다잡았다.

스웨인과 인어의 검이 번갈아 오가며 자신의 주인에게 위협이 될 돌과 나무들을 베었지만,

파편이 떨어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고,

성 밖으로 나가기까지는 꽤 많은 거리가 남아있었다.

쿠웅- 쿵-

수많은 파편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준은 성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민 역시 이제 성이 얼마 안 가서 무너져내려 자신들을 덮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준은 스웨인을 다잡았다.

채민은 인어의 검을 다잡았다.

우준은 스웨인을 있는 힘껏 쥐고 속으로 외쳤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떻게든 채민이를 살려야 돼! 나의 검, 비야.

원한다면 나의 목숨이라도 줄 수 있으니 반드시 채민이를 살려. 어떻게든 채민이를 구해줘!'

채민은 인어의 검을 있는 힘껏 쥐고 속으로 외쳤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떻게든 우준이를 살려야 돼. 인어의 검아.

이번에는 부탁이야. 원한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으니, 반드시 우준이를 살려줘.

어떻게든 우준이를 살려야 돼!'

쿠아아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무방비 상태의 두 사람의 위로 성이 무너져 내렸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수북한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먼지가 차츰 잦아들고,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때쯤 되었을 때,

그곳에는 무너진 성의 파편 뿐, 살아있는 생물이라고는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준이 검은 마법사의 성으로 간 후에 앉지도 않고 문 앞에 서서 기다리던 녹색 마법사는

속박이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을 죄고 있던,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사라졌다.

날 때부터 영혼과 육체를 묶어놓았던 속박의 주술이 풀리자

녹색 마법사는 더없는 상쾌함을 느꼈다.

언제나 뿌옇게만 보였던 잿빛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새파랗다는 것을,

먹구름처럼 검게만 보였던 구름이 만지고 싶을 정도로 하얗다는 것을,

무채색의 산과 들이 사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녹색 마법사는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집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상쾌한 공기가 폐에 가득 들어찼다.

녹색 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흙과 풀과 꽃을 만졌다.

손에 닿는 느낌이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손가락 끝으로도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듯, 녹색 마법사는 흙 위에 가만히 손을 댄 채로 한참을 있었다.

녹색 마법사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눈물을 흘리는 행위조차 이토록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녹색 마법사는

검은 마법사의 성, 우준이 있는 그곳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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