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늦은 시간임에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전은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 운영되기 때문이었다.
역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은 신전 앞.
많은 사람들이 신전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아예 자리를 펴고 누워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리현과 비인이 신전 앞까지 달려가는 동안, 그들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전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듯 다급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저 산이 폭발하는 거지?"
리현이 신전 뒤에 위치한 높은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확실히 그것은 화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꼭대기까지 우거진 나무들은 설령 그 산이 화산이라 하더라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예 죽어버린 화산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인은 혹시 리현이 자기의 말을 의심할까 봐 걱정했지만,
리현의 얼굴에선 조금도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 어서 사람들에게 알리자!"
리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비인과 리현은 신전 앞에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몇 몇 사람들이 두 사람을 제지하려고 했다.
"새치기하지 말아요."
"우리도 급하다구요."
"차례를 기다려요."
하지만 둘은 그들의 저지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신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란스러움에 깨어난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몹시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들의 잠을 방해한 데다가 새치기까지 했으니 미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리현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서서 사람들을 한 번 쭉 돌아봤다.
매서운 눈동자가 달빛에 빛났다.
사람들은 그녀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들처럼 신전에 의탁할 것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이 아니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신념에 찬 그녀의 눈동자가 그것을 알려준다.
옆에서 리현을 보고 있던 비인조차도 리현의 강한 눈빛이 놀라웠다.
리현이 다른 여자들보다 더 당당하고 거침없는 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리현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세요!"
리현의 외침은 어두운 밤공기를 타고 멀리까지 퍼졌다.
고요하게 잠들어 있던 공기가 몸부림치며 마을 안으로 뻗어나갔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세요! 곧 화산이 폭발합니다! 화산이 폭발해서 이 마을이 뒤덮이게 된다구요!
얼른 이곳을 벗어나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쳐요!"
리현의 외침에 사람들이 동요했다.
화산이라니… 여기 어디에 화산이 있단 말인가.
그들의 시선이 신전 뒤에 있는 높은 산에 닿았지만 그들은 곧 헛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옮겼다.
저 산은 절대로 화산이 아니다.
저 산이 폭발한 적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어떻게 저렇게 평화로워 보이는 산이 화산일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색이 없자, 리현은 초조해졌다.
"다들 뭐 하는 거예요? 얼른 이곳을 벗어나란 말이에요! 먼 곳으로 도망치라구요! 안 그러면 다 죽어요!"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맨 앞에 있던 남자가 크게 외쳤다.
"화산이라니? 여기에 화산이 어디에 있어? 당장 닥치고 저리 꺼지지 못해?"
"맞아, 맞아. 왜 이 밤중에 야단이야? 미치려면 곱게 미치던지…"
"거기 옆에 남자. 그 계집의 일행인 것 같은데 좀 말리지 그래? 응?"
"미친 거 치유 받으러 왔으면 뒤에 가서 줄이나 서라구!"
사람들이 너도나도 시끄럽게 외쳐댔기에 리현의 외침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다.
리현은 크게 외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지금껏 비인은 재난을 보고 왔을 때마다 이렇게 외쳤을 것이고, 이런 야유를 들었을 것이다.
스윽 비인을 쳐다봤더니 비인은 주먹을 꽉 쥐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리현을 보고 있었다.
리현은 괜찮다는 듯 비인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아, 빌어먹을! 당신들, 내 말 안 들려? 화산이 폭발한다구! 화산 폭발해서 당신들 다 죽는단 말이야!"
휘익-
어떤 여자가 던진 그릇 하나가 리현을 향해 날아왔지만,
리현은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챘다.
그릇을 세게 잡고 사람들을 노려봤다.
사람들은 리현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옆에 있던 쓰레기를 던지기 시작했다.
비인이 리현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그만! 그만 하세요!"
잠시 쓰레기 세례가 멈췄다.
비인은 사람들을 향해 간절히 말했다.
"정말입니다. 난… 미래를 볼 때가 있어요. 분명 이 마을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저기 뒤에 있는 저 화산이 폭발해서 마을의 집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갔어요.
지금 여러분이 이곳에서 도망치면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제발 도망치세요. 네?"
비인의 목소리는 몹시 간절하고 진실했기 때문에, 몇 몇 사람들은 비인의 말에 조금 동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신전 안에 있던 병사들이 달려나와 두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리현은 도이넨의 끝을 잡으며 그들을 노려봤다.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대참사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리현이 중얼거렸다.
사실 믿어주지 않는 인간들, 그냥 버리고 도망치면 그걸로 땡이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고 죄책감에 시달릴 것도 아니다.
할 만큼은 했으니까.
그럼에도 리현이 쉬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비인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비인이 가지고 있는 그 능력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 그 능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는지,
그것을 비인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신전 안에 있던 신관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색의 긴 가운을 입은 그들 중에는 흰 수염이 길게 늘어져 영화에서나 보던 마법사 같은 이도 있었고,
생각보다 훨씬 젊은, 고작해야 리현보다 너댓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일곱 명의 신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오오!"하는 탄성을 지르며 신관에게 절했다.
병사들 역시 고개를 조아리며 신관들의 앞에서 살짝 비켜섰다.
일곱 명의 신관은 리현과 비인 앞에 멈춰 섰다.
리현과 비인은 조금도 정중한 기색 없이 신관을 노려봤다.
신관은 그런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양미간을 좁혔지만 그래도 리현과 비인은 꿈쩍하지 않았다.
"당장 신관님들께 절하지 못할까!"
병사 중의 한 명이 외쳤다.
리현은 신관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잘 들어둬, 신관 나리. 내 몸에는 저주가 걸려 있어. 이 저주를 풀어줄 수 있다면 당신에게 절 따위는
수 백 번이라도 할 수 있어. 풀 수 있겠어?"
리현의 거친 질문에 신관들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로서는 리현에게 걸려있는 저주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대답을 모색할 필요는 없어.
내게 걸린 저주를 풀 재주가 없다면, 당장 사람들을 이곳에서 나가게 해.
몇 시간 후면 화산이 폭발해. 화산 폭발하면? 니들도, 저 인간들도 다 죽어.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지? 니들도 죽고 싶지 않을 거 아냐. 그러니까 당장 이곳을 떠나!"
리현이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신관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예지의 능력이 뛰어나 가장 추대를 받는 늙은 신관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어린 리현의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에 몹시 화가 났지만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분노를 삭히며 말했다.
"대체 그대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기에 이토록 소란을 일으키는 건가?"
"내가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당신 대단한 신관이라면서? 그러면 내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정도는 맞춰야 하는 거 아냐?"
"말이 너무 거칠군. 우리 신전에 볼일이 있어서 온 거라면 우리가 그대의 문제를 봐주겠네."
"말했잖아! 당신들에게는 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구.
일단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라구!"
"저 산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화로운 산이라네. 어찌 저 산이 폭발을 하겠는가."
늙은 신관이 설득조로 차분하게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리현에게서 신전 뒤에 있는 산으로 옮겨졌다.
신관의 말대로 산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약간의 불안이 떠올랐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불안이 깨끗이 사라졌다.
"재앙이라는 게 왜 재앙인 줄 알아? 인간이 안일할 때에 덮쳐 오기 때문에 재앙인 거야.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닥치지 않아.
지금 당신들이 내 말을 듣고 이곳에서 떠난다면 화산 폭발은 당신들에게 그저 "큰일날 뻔한 일"이 되겠지.
하지만 안일하게 이곳에서 평화 운운하고 있다가는 정말로 "재앙"이 닥치게 될 거야.
어쩔 거야? 계속 이렇게 여기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앙?"
리현은 사람들이 신관의 말에 끌려 안도하자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신관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작은 버러지가 윙윙거린다는 듯한, 약간은 귀찮다는 얼굴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이 자들을 묶어서 신전 안으로 데리고 가라. 안에서 이야기를 해보아야겠구나."
말투는 고상했지만,
순간적으로 신관의 눈빛을 읽은 리현은 신관이 자신들을 곱게 다루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챘다.
지금은 사람들이 앞에 있어서 신관다운 품격 있는 모습을 유지해야 했기에
정중한 자세로 임했지만, 사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새로이 나타나 자신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인물에 대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병사들은 신관의 말에 따라 밧줄로 그들을 묶으러 다가섰다.
처음에 리현은 다들 베어버리고 비인과 둘이 도망칠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자신들을 쳐다보는 수많은 무리들과 눈이 마주치자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들 중에는 죽기에는 아까운 어린 아이도 있었고, 가족들도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참지 않고 두 사람만 살 길을 꾀한다면,
구할 수 있었던 저 생명들이 모두 빛을 잃게 될 것이다.
리현은 입술을 깨물며 도이넨의 날카로운 한쪽 끝 부분을 몰래 손에 쥐었다.
병사들은 리현과 비인이 반항하지 않을까에 대해서만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리현이 도이넨을 손에 숨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리현과 비인은 반항하지 않고 밧줄에 묶였다.
묶이기 전, 비인이 리현의 눈치를 살피자 리현은 싱긋 웃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서 비인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신전 안은 축구 경기장보다 넓었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신전의 중앙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무늬가 새겨진 대리석이 있었고,
가장 안쪽에는 천장까지 닿는 높이의 커다란 신상이 서 있었다.
대리석 기둥도 전부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 있었고, 벽면마다 섬세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리현과 비인은 화려한 신전 안을 두리번거릴 여유조차 없었다.
언제 화산이 폭발할지 몰라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늙은 신관과 그를 따르는 신관들이 신상 앞의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가 서서
리현과 비인을 내려다 봤다.
늙은 신관이 손짓하자 병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리현은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 뒤로 묶인 손을 살짝 움직여
도이넨의 끝을 밧줄에 닿게 했다.
"미래를 봤단 말인가?"
늙은 신관이 입을 열었다.
"그래, 봤어."
"어떻게 봤지? 신이 보여주셨나? 아니면 꿈에서 봤는가?"
"신 따위는 내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아요."
비인이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곳에 가서 보고 왔습니다. 미래에 가서."
신관들이 놀라워하며 자기들끼리 뭔가를 수군거렸다.
"직접 보고 오다니! 거짓말 마라!"
한 젊은 신관이 외쳤다.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은 신의 음성으로 미래를 예언하시거나 꿈으로 보여주실 때뿐이다.
직접 가서 봤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신의 음성이 들리거나 꿈으로 미래를 보여주는 건 가능한 일이고,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오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란 말입니까?"
"당연하지!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미래에 갈 수 없어!"
"……"
비인은 말없이 젊은 신관을 응시했다.
그들은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지 알 수 없는, 행색도 초라한 어린것들이 자신들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지 못할 만큼 가까운 미래에 화산 폭발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친다는 것은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당신들이랑 미래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시간 없어.
당장 나가서 사람들에게 말해. 이곳을 떠나라구.
안 그러면 당신들의 그 잘난 오만 덕분에 저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게 돼!"
"잘난 오만이라니…"
"아냐? 당신들, 지금 제대로 된 예언도 하지 못하면서 예언하는 척 하는 거잖아.
당신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신은 이미 당신들에게 미래를 알려주지도, 남을 치료할 능력을 주지도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남들에게 섬김을 받는다는 매혹적인 행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거짓 예언과 거짓 축복, 거짓 치유를 하면서 이곳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돈을 벌어먹으며 호강하고 있는 거잖아."
"그, 그, 그게 무슨…"
신관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리현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너무 정확하게 집어내서 두려워? 거기, 제일 늙은 신관.
당신은 젊을 적에만 해도 진짜로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지.
진짜 예언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당신이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순간,
신은 당신을 버렸어. 안 그래? 당신의 거짓 예언으로 인해서 망해버린 사람들이
당신을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내 귀에는 들리는데… 시끄러울 정도로 말이야.
그리고 그 옆에 당신. 당신의 거짓 치유 능력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당신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그런데도 당신은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니…
당신 등에 붙은 영혼의 절규가 들리지 않아? 난 들리는데?"
신관들의 얼굴색이 붉은 색에서 푸른 색으로 변했다.
리현은 너무도 정확하게 그들의 마음과 과거를 읽어내고 있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들은 리현을 노려봤다.
"왜? 지금 당장 내 목을 쳐서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게 하고 싶어?
그런데 내 목을 쳤다가 진짜로 신의 분노를 사게 될까 봐 망설이는 거야?
뭐, 어쨌든 이 빌어먹을 능력도 신으로 인한 거니까 신이 주신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들.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볍지 않아.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거란 말이야!"
투둑-
리현의 팔을 단단히 묶고 있던 밧줄이 도이넨에 의해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리현은 당황한 신관들과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빠르게 움직여
비인의 밧줄을 풀어주고는, 신관들을 향해 뛰어 올랐다.
그리고 가장 앞에 있던, 늙은 신관을 잡아 그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시, 신관님!"
모두 당황하여 신관을 쳐다봤다.
"내 뜻을 따라주지 않겠다면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지.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걸어. 죽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주지."
"나, 날 죽이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러는 건가?"
"신이 버린 당신을 죽여봐야, 나에게 해가 될 건 아무 것도 없어.
난 이곳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어.
당신 한 명 더 죽인다고 해서 내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건 아니야."
비인은 리현의 옆으로 다가가 리현을 엄호했다.
날카롭게 빛나는 비인의 눈동자가 자신들을 향하자, 신관들과 병사들은
감히 늙은 신관을 구해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움찔하며 물러섰다.
"비인아. 어디로 가야 화산의 피해를 입지 않을까?"
"화산 왼쪽에 있는, 화산보다 좀 더 높은 산의 꼭대기."
"오케이."
리현은 늙은 신관의 목을 겨눈 채로 사람들이 있는 신전 앞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