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79화 (7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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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앞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늙은 신관이

아까의 그 미친 계집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

입을 헤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굳어버렸다.

이윽고 한 사람이 한숨을 내쉬자, 여기저기서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

리현이 외쳤다.

"잘 봐둬. 여기 이 사람, 당신들이 존경하는 사람이지?

이 사람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이곳을 떠나서 저쪽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

지금 당장!"

"도대체 신관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는 거냐?"

한 남자가 물었다.

이제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리현은 마음이 급해졌다.

"빌어먹을! 제발 말 좀 들으라구! 당신들이 손해볼 거 없잖아!

내 말 듣고 저쪽에 있는 저 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그리고 몇 시간만 기다려.

그러다가 화산이 폭발하지 않으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고,

화산이 폭발하면 당신들은 목숨을 건지는 거라구!

어려운 일도 아닌데 대체 왜들 그렇게 따지고 드는 거야? 응?"

발을 동동 구르며 외치자 사람들은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리현의 절실한 눈빛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 나는 여길 떠날래요."

아이를 안고 서 있던 여자가 중얼거리자,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여자의 팔을 잡았다.

"당신, 그게 무슨 소리야? 신관님을 버리겠다는 거야?"

"우리… 목숨이 더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생각해 보면, 저 애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저렇게 절실한 것을 보면 이유가 있을 거라구요.

난 왠지 저 애를 믿고 싶어요.

만약 폭발하지 않으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되지요."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에게서 딸을 받아 들었다.

"엄마, 우리도 산에 올라가자. 응? 저 누나, 진짜인 것 같아.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맞아요, 어머니. 우리 잠깐 피해 있어요."

"우리도 산에 올라갈까? 폭발 안 하면 다시 내려오면 되니까…"

"어차피 손해볼 것도 없는데, 나도 여길 떠나야겠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신전을 떠날 준비를 했다.

한 사람, 두 사람씩 신전 앞을 떠나기 시작했다.

몇 몇 사람들은 미련이 남은 듯 잠시 머물러 있었지만, 대부분이 서둘러 떠나는 것을 보고는

결국 그들의 뒤를 따랐다.

신관들은 사람들이 떠나는 모습을 절망적으로 지켜봤다.

신관들은 더 이상 사람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자신들도 리현의 이상한 능력을 몸소 체험한 데다가, 리현과 비인의 간절한 눈빛에

이끌려 버린 것이다.

리현은 신관의 목을 겨누고 있던 도이넨을 떼었다.

늙은 신관이 뭔가를 묻는 눈으로 리현을 쳐다봤다.

리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도망치잖아. 당신들도 도망쳐."

"우린 남아서 신전을 지켜야 돼."

"도망치세요."

비인이 늙은 신관의 팔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신전은 무너지면 다시 지으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죽으면 신전을 다시 짓고

신전에 머물 신관들이 없어져요."

"흥… 어차피 우리들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에 찬성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저들 중에 대부분은 당신들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있어.

단지 저들은 도피할 곳을 찾는 거야. 도피할 곳마저 없으면 너무 힘이 드니까,

당신들에게 기대를 거라구. 당신들은 계속 살아서 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줘야지.

자, 앞으로 나서서 저들을 인도해. 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

화산은 폭발할 거야. 내 친구가 보는 미래는 아주 정확해.

화산이 폭발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면 당신들은 많은 것을 잃은, 이곳을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에게 평안을 줘.

그리고 다시 신전을 짓는 거야. 신전을 다시 짓다 보면 일거리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일거리가 생길 거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높이 올라가는 신전을 보며 희망을 찾겠지.

그거면 된 거 아냐? 뭘 더 바래?"

늙은 신관은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비인과 리현을 쳐다봤다.

그들의 눈동자는 거짓이 없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로 뭉쳐 있었다.

"그렇군. 그래, 그렇군."

늙은 신관이 한 손을 올리며 자신을 따르는 신관들에게 외쳤다.

"자, 여러분! 우리 모두 이곳을 떠나 사람들을 인도합시다.

인간이 재앙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늙은 신관의 위력은 컸다.

신관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늙은 신관의 뒤를 따라 사람들을 향해 나아갔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신관들이 움직이자 같이 따라서 움직였다.

그들이 모두 떠나는 것을 확인한 비인과 리현은 서로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이것 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잖아."

비인이 웃었다.

"응, 맞아."

"네 능력은 정말 최고야. 네 능력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게 됐어."

"아직 화산이 폭발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뭐…"

쿠르르르릉-

갑자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리현이 웃으며 비인을 쳐다봤다.

"결단코 폭발할 것 같은데? 저놈의 화산은."

"하하…"

"자, 우리도 도망가자. 난 이런 곳에서 화산재를 뒤집어쓰고 죽긴 싫다구!"

"그래, 뛰자!"

둘은 손을 꼭 붙잡았다.

따스한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함께였다.

둘은 함께였기에 흔들리는 땅의 진동도, 들려오는 굉음도 두렵지 않았다.

화산이 폭발한 것은, 그들이 모두 산꼭대기에 도착했을 때였다.

콰르릉거리는 굉음, 엄청난 진동과 함께, 그토록 평화로워 보이던 산의 꼭대기 부분에서

불꽃의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붉은 불덩이가 튀어 오르고 검은 재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흘러내리는 용암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있었던 넓은 마을을 뒤덮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들이 있었던 마을이 붉은 강물에 뒤덮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공포와 안도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리현과 비인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저곳에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리현과 비인은 영웅이 되었다.

모두 리현과 비인에게 다가와 감사인사를 했다.

신관들 역시 자신들의 권위를 잊은 채로 리현과 비인에게 굽신거렸다.

리현이 웃었다.

"우린 해냈어, 비인아."

"응, 해냈어."

"너와 내 힘이 사람들을 살렸어. 이것 봐. 네가 살린 생명이 이렇게 많아."

리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비인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응, 정말… 정말 아름답다."

비인의 눈에는 리현이 아름답게 보였다.

너무도 아름답고 강해서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리현이 빛났다.

"정말 아름답다."

긴장이 풀린 사람들은 산 위에서 잠을 청했다.

늙은 신관도 사람들의 틈에 섞여 잠을 잤다.

리현과 비인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늙은 신관은 꿈을 꾸었다.

실로 오랜만에 꾸는 생생한 꿈.

늙은 신관은 자신이 지금 미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곱 명의 소년, 소녀가 보였다.

그들 중에는 신관이 잘 아는 얼굴도 있었다.

리현과 비인이었다.

그들은 어느 거대한 성 앞에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의 목적지인 듯 했다.

그곳에 다다른 그들은 기뻐하지만 결국 좌절한다.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을 갖지 못한 채로 절망하여 울부짖다가 한 명, 한 명 쓰러져

결국 모두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을 응시하는 차가운 눈동자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신의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숨이 턱 막히도록 아름다운 한 소년의 것.

신은 말한다.

"어차피 너희들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 헛고생을 했군."

그 때, 신관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무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를 짓지만, 곧 신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여행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예언이다.

신관은 얼른 자신이 본 것을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곤히 자는 그들을 깨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에 좌절이 될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오랜만에 보게 된 미래가 이토록 절망스러운 것이란 말인가."

자신과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낸 두 영웅의 말로가 너무도 비참함에 소름이 끼쳤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갈 듯한 그들의 미래가 그토록 암울함에 가슴이 아팠다.

화산은 이제 거의 분출을 멈추고 가고 있었다.

느린 속도로 흘러 내려가는, 끈적이는 붉은 용암을 보며 늙은 신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화산 폭발이 멈추었을 때, 리현과 비인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늙은 신관은 망설이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러분. 혹시 괜찮으시다면 우리가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에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신관의 태도는 아주 정중해졌다.

"죄송합니다. 우리는 가야할 곳이 있어서요."

"실은… 제가 아주 오랜만에 진짜 미래를 보고 왔습니다. 여러분의 미래였습니다."

"우리의 미래요?"

"네. 여러분은… 이런 말을 하기는 너무 죄송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목적한 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생명을 잃게 됩니다.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하고…"

"아…"

"그러니 그곳으로 가지 말고 우리와 함께 있으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능력이 뛰어나니까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고, 그만큼 대우를 받게 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칭송하고 여러분을 편히 모시기 위해 힘을 쓸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에게도 훨씬 좋지 않을까요?"

리현이 비인을 쳐다봤다.

"어때? 망설여져?"

비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리현이 다시 늙은 신관을 쳐다봤다.

리현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살짝 올라간 눈매는 즐겁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혹시 꿈에 몇 명이 보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일행 일곱, 그리고 신과 너무도 아름다운 한 소년. 이렇게 아홉이었습니다."

"와아. 다행이다. 다들 무사하구나."

리현은 정말 기분 좋게 말했다.

신관은 리현의 태도에 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됐어요. 우리가 목적을 이룰 수 있든 없든,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든 살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어쨌든 우리는 그 녀석들이랑 같이 있는 게 즐겁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게 아니에요."

비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얻은 게 많아요. 벅찰 정도로 많아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은 이유는… 신관님이 꿈에서 본 그 아이들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고,

그 아이들과 다시 한 번 웃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거면 됐어요."

이 얼마나 소박한 꿈이란 말인가.

신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신관은 너무 오래도록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을 이 어린 아이들이 가르쳐준 것이다.

돈이나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 두 어린 영웅이 알려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늙은 신관이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리현과 비인도 고개를 숙여 답했다.

"우리의 힘으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감사 인사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여행이 평안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전이 재건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위안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리현이 명랑하게 말했다.

리현과 비인이 서로를 마주봤다.

"정말 괜찮겠어?"

비인이 웃었다.

"그러는, 너는?"

"하하. 난 애들 살아있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

얼른 다시 애들 만나고 싶어."

"응, 나도 그래. 그게 가장 평안하고 가장 행복한 길인 것 같거든."

"자, 그럼 우리 갈까?"

"그래, 가자."

두 사람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자루 하나 달랑 매고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들의 가는 길에 축복을 빌며 그들을 배웅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두 어린 영웅은 홀연히 그곳을 떠나갔다.

후일담이지만, 몇 년 후 재건이 된 거대한 신전의 입구에는 두 남녀의 조각상이 세워지게 된다.

약간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소녀와 단정한 생김새를 가진 소년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차림새에

자루 하나를 매고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데,

사람들 사이에는 이 조각상 앞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강한 믿음이 퍼지게 된다.

사람들은 그 조각상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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