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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곳에 누워있던 해윤과 가인.
처음에는 비인과 리현처럼 한동안 우왕좌왕하지만 결국 어디로든 가야할 것 같아서
숲에 난 길을 따라 걸어가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수중에 있는 것이라고는 무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배가 고팠지만 먹을 게 없어서
나무에 있는 과일 몇 개를 따서 배를 채웠다.
독이 있을지도 몰랐는데 그들은 거침없었다.
"위액이 포화 상태라서 독도 중화될 거다."
해윤이 너무 당당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도한 마을은 아무런 특징 없는 평화로운 마을로 보였다.
하지만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가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마을 어딘가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끈적거릴 것 같은 검은 기운은 마을의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해윤아. 우리 여기 말고, 다른 마을로 가자."
"엥? 왜? 다음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너… 저거 안 보여?"
가인이 검은 기운을 가리켰지만 해윤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뭔데?"
"아주 기분 나쁜 게 있는 것 같아, 이 마을엔… 게다가… 여기저기서 기웃거리는 영혼들이 느껴져."
"아하하하하.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어. 이 낭군님만 믿어라."
해윤이 웃으며 가인의 어깨에 팔을 걸쳤는데, 해윤의 키가 가인보다 좀 작았기 때문에
약간 버거워 보였다.
"나랑 같이 있으면 영혼들은 너에게 다가오지 못해."
"다가오지 못하더라도… 보는 것도 싫어. 정말 끔찍하다구."
"그럼 눈을 감아. 내가 번쩍 안아들고 걸어줄게."
"그건 더 싫어. 정말로 끔찍해."
가인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훗. 부끄러워 하기는…"
해윤이 씩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가자, 가인아. 두려워할 것 없어. 내가 너와 함께야."
해윤의 목소리와 그 눈빛이 너무 믿음직스러웠기에 가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해윤의 뒤를 따랐다.
마을 구석구석에서 영혼이 보이기는 했지만, 해윤의 말대로 그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한 번씩 쳐다봤지만 이렇다저렇다하며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으아, 배고파서 미치겠네."
해윤의 하얗고 섬세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닌게 아니라, 오랫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고 과일만 먹은 그들은
너무 배가 고파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무기라도 팔아야겠다는 생각에 무기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길 저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를 보았다.
30대 중후반의 나이로 보이는 그녀는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겨 뒤에서 쪽을 진 헤어스타일이었는데,
잔머리 하나 없이 깨끗하게 넘긴 머리 모양새가 결벽증에 가까운 그녀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어느 귀한 집의 안방 마님 같은 생김새였는데,
이상하게도 팔에 어린 여자 아이 인형을 안고 있었다.
집에 있는 딸에게 가져다 주기 위해 들고 가는 게 아니라,
마치 그 인형이 자기 딸이라도 되는 듯 품에 보듬어 안고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해윤에게는 어떻게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뒤로 펼쳐진 검은 기운을 볼 수 있는 가인에게는
그녀의 모습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해윤의 팔을 잡았다.
"아가야, 우리 딸. 아빠가 어디에 갔는지 아니? 아빠는 잠깐 일을 하러 갔단다.
곧 있으면 네게 줄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오실 거야."
소곤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걸어오는 여자가 제발 자신들을 보지 않고
그대로 스쳐서 지나가기만을, 가인은 정말이지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뚝-
가인과 해윤의 앞에, 여자가 멈춰선 것이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 가인과 해윤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각자의 일을 하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돌아봤다.
가인은 으스스한 적의를 느끼며 해윤에게 좀 더 바짝 다가갔다.
"가인아."
해윤이 진지하게 말했다.
"으응?"
"너무 가까이 오지 마라. 흥분된다."
"닥쳐, 이 변태."
가인이 잡고 있던 해윤의 팔을 세게 꼬집으며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가 방긋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가 얼마나 순수하고 기품이 있던지,
가인은 순간 그녀에게 "엄마"라고 부를 뻔했다.
해윤도 마찬가지인지 얼굴을 살짝 붉히고 그녀를 쳐다봤다.
"여행객들이신가요?"
목소리 또한 차분했다.
방금 전까지 신들린 듯 인형에게 말을 걸던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 네에…"
"혹시 묵을 곳이 있으신가요?"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가인은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호의"뿐이었다.
"아니요. 안 그래도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하하."
속도 모르는 해윤이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인은 진심으로 해윤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어쩜 저리도 생각이 없는지…
"그렇다면 두 분을 저희 집에 초대해도 될까요? 남편이 일을 하러 멀리 떠나서 지금 딸과 단 둘이 있거든요.
여자 둘이 있는 밤은 조금 적적하기도 하고, 집이 너무 넓어서 외롭기도 하구요.
오시면 맛있는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드릴게요."
"아니, 이거… 너무 감사해서… 하하하하."
이번에도 해윤은 넉살 좋게 대꾸했고, 가인은 정말 진심으로 해윤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그런데 집이…?"
"저쪽에 있는 저택에 살고 있답니다. 요새 장미가 필 때라서 정원이 아주 예뻐요.
전 그 저택의 안주인인 벨린이라고 합니다. 얘는 우리 딸애인 하이진이예요."
벨린이 들고 있던 인형을 앞으로 살짝 내밀어 그들에게 소개시켰다.
가인은 이쯤 됐으면 해윤이 정신차리고 벨린이 미친 여자라는 것을 자각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윤은…
"하하하. 안녕, 하이진. 너 정말 예쁘구나."
…라는 소리나 짓껄이고 있는 게 아닌가.
가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해윤의 뒤통수를 갈기기 위해 손을 올렸을 때,
마을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다가와서 가인과 해윤의 팔을 잡았다.
"하하하. 너희들, 이제야 도착했구나? 내가 니들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도착했으면 얼른 집으로 오지 않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아는 사람이 있나?
가인과 해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자신들에게 아는 척을 하는 남자를 돌아봤다.
그는 스물 너댓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키가 크고 호쾌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흐트러진 갈색 고수머리와 같은 색의 눈동자가 참으로 매력적인 남자였다.
"자자. 얼른 집으로 가자. 어머니께서 저녁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셔. 오느라고 피곤했지?"
가인과 해윤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의문 부호가 수십 개는 날아다니고 있었다.
"누……"
"아, 형! 너무 오랜만이라서 몰라봤어. 길이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 우리 둘만 온 건 처음이잖아.
어렸을 적에 와보고 안 왔으니까… 오래 기다렸지?"
해윤은 그에게 누구냐고 물으려 했지만 가인이 얼른 해윤의 말을 가로챘다.
벨린의 미소가 상큼하던 눅눅하던 간에, 뒤에 있는 검은 기운만큼은 사양하고 싶었고,
분명 벨린이 저택이 있다며 가리킨 곳은 검은 기운이 번지는 중심인 것 같았기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가인의 뜻을 알아챈 해윤이 씩 웃었다.
"오랜만이야, 형."
"자, 자. 가자. 벨린 아주머니. 이 애들, 내 사촌 동생들이에요.
얘들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 이 동네가 우리 동네인지 몰랐나 봐요."
"아아, 그래요."
벨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쉽네요. 오늘 저녁은 조금 북적거릴까 싶어서 기대했는데…"
"하하하하. 죄송합니다. 그럼 들어가 보세요."
"네, 좋은 시간 보내요."
벨린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갔다.
하이진이라는 인형에게 말을 걸며…
벨린이 멀리 갈 때까지 해윤과 가인, 그리고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서서 벨린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윤이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은 누구세요?"
남자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해윤과 가인을 쳐다봤다.
"아아. 내 이름은 워렌. 26년 전 이 마을에서 태어나 한 번도 마을을 떠난 적이 없고,
배움에 뜻이 없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꽃가게를 운영하고 있지.
이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 꽃가게 운영은 평탄하고,
부모님과의 사이도 아주 좋아. 얼마 전에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와 헤어져서 지금은 솔로.
앞으로 3개월 간은 자중하는 마음으로 혼자 보내다가 새로운 여자를 만날 예정 중.
좋아하는 음식은 요젠잎에 절인 소리새 구이. 취미는 노래 부르기, 특기는 꽃과의 대화.
한 달 수입은 비밀!"
해윤과 가인이 입을 쩍 벌렸다.
"정말… 자세한 설명이군요."
"자, 니들도 니들 소개."
"형처럼 해야 돼요?"
"그럼 좋고, 아니어도 좋고."
"좋았어. 그렇다면 난 내 식으로 하겠어요."
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이 또 무슨 바보짓을 하려고…'
아니나 다를까. 해윤은 주머니에 구겨넣었던 검은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착 두르더니
두 손을 입 앞에 두고 한동안 비트박스를 해댔다.
푸푸푸풉풉풉 푸푸풉풉풉-
이 세계에 비트박스 같은 것은 없는지, 워렌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윤을 구경했다.
비트박스를 멈춘 해윤은 갑자기 힙합을 추기 시작하더니,
여러 가지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인 후에 랩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내, 내, 내 이름은 조해윤. 나이는 열 일곱. 엄마에게 태어나 아빠에겐 맞았지.
이상한 능력 있어 강할 줄 알았건만, 사실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맞았지.
그러다가 몇 대 맞고 집을 뛰쳐나왔지. 정말로? 아니, 거짓말. 쫓겨나 버렸지.
여기저기 방황하다, 여기까지 흘러왔지. 못 만날 줄 알았던 이상형을 만나서.
이상형이 누군데? 바, 바, 바, 바로 네 앞에 있잖아. 바로 이곳에!"
그러면서 가리킨 것이 가인이다.
웃으며 해윤을 구경하는 워렌과 달리, 무표정하게 해윤을 지켜보던 가인이
한 손으로 해윤의 머리를 퍼억 때린 후에 워렌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형. 구해줘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놈이랑 같은 17살이구요.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같이 여행을 하던 중에 친구들이랑 떨어져서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중간에 사고가 있었거든요."
"그래? 그래서 몰골이 그렇게 초라했구만."
워렌이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형은 실례되는 말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군요."
"응. 그런 말 자주 듣지."
워렌이 씩 웃었다.
"사고를 당해서 친구들이랑 떨어진 거라면 수중에 가진 것도 별로 없겠군.
따라와. 우리 집에 방 남으니까 재워줄게. 저녁 식사 후에는 벨린 아주머니한테 얽힌 이야기도 해주지.
아주 무시무시한 이야기니까 바짝 긴장하고들 있어."
깨끗하게 씻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었더니 무척 노곤했지만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밖으로 나와 집 앞에 있는 정원으로 갔다.
정원은 집보다 더 넓었는데, 각종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워렌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가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원 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아, 워렌의 어머니가 가져다 준 요젠차를 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다른 애들은 무사할까?"
가인이 걱정스레 중얼거리자 해윤이 웃었다.
"다들 무사할 거야. 네 눈에 그 애들의 영혼이 보이지 않았잖아.
만약 걔들이 죽었다면 너에게 와서 자기 죽었다는 것 정도는 알리지 않겠어?"
"역시 그렇겠지?"
"응응.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해윤의 쾌활함이 전염됐는지 가인은 무겁던 마음이 좀 나아졌다.
곧 워렌이 나와서 그들과 합류했다.
"자, 내가 저 저택과 벨린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일단 이야기는 수 십 년 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그 때로 돌아가야 돼.
거진 100년 정도 전의 일인데… 저 집에서 일가족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