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81화 (81/91)

-81-

"저 집에서 일가족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

워렌은 잠시 말을 끊고 해윤과 가인을 쳐다봤다.

가인은 뒤가 으스스한 느낌을 받았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마을 한 편에서 솟아 올라오는 검은 기운은 계속 일렁이고 있었다.

"부유하고 단란한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정신 나간 살인범이 저 집에 침입한 거야.

뭐, 이상한 사상을 가지고 이상한 악마 같은 것을 섬기는 살인범이었는데,

사람을 많이 죽인 걸로 유명해. 소문으로는 수 백 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

그 살인범은 자기가 죽인 사람들은 죽어서도 자기의 종으로 살게 된다고 믿고 있었대.

저 집에 침입한 살인범은 하룻밤 새에 그 집에 살고 있던 가족들을 전부 다 죽여버려.

아마 아이가 세 명이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중년의 부부가 살고 있었을 거야.

남편은 죽기 전에 살인범과 혈투를 벌렸고, 소란스러운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찾아온 사람들 몇 명이

살인범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죽였지만, 남편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결국 죽고 말았어.

일가족 전체가 몇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죽어버린 거지.

무시무시한 일은 그 후부터 일어났어. 그 사건이 있은 후로 한 몇 년 간은 사람들이 저 저택을 사지 않았지.

하지만 워낙 아름다운 저택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소문을 가라앉아,

다른 가족이 저 집을 사서 들어왔어.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어두운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가인과 해윤은 집중해서 워렌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고 검지를 세운 워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며칠은 잠잠했지.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일가족 전부가 시체로 발견이 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이야.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저 저택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 가족이 며칠 째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아무도 저택으로

그들을 찾으러 가지는 않았대. 그런데 썩는 냄새가 너무 심해서 결국 마을 사람들 몇 명이

무장을 하고 찾아갔나 봐. 그랬더니 각 방에서 이미 썩어버린 시체가 그들을 맞이했대.

목이 찢겨 나가거나 머리가 깨져서 죽은 시체가 많았는데,

그 수법이 몇 년 전에 죽은 살인범의 수법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

모두 비명을 지르며 그 집에서 뛰쳐나왔고, 다른 마을에서 찾아온 병사들에 의해 시체는 수거되고

저택은 다시 빈집이 되었지. 하지만 저 저택에 이상한 마력이 걸려 있는 건지,

채 소문이 가시기도 전에 다른 가족이 이사해 왔고, 그 가족들은 또 며칠 후에 같은 수법으로

죽어나갔어. 처음에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의심을 받아서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몰래 지켜봤는데,

살인이 일어나는 날 밤, 우리 마을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간 사람이 없어.

그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간 사람도 없대. 그렇다면 대체 누가 살인을 저지른 걸까?"

싸늘한 바람이 그들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괴기스러운 밤이다.

하늘마저도 검붉은 핏빛으로 물든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저 저택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죽여 자신의 제물로 삼았지.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 역시도 저 저택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

어릴 적에 저택에서 죽임을 당한 일가족의 시체가 실려나가는 걸 우연히 보게 됐는데…

정말 끔찍한 몰골이었지. 지금도 가끔 그 모습이 꿈에 나타나서 날 괴롭게 해."

"그런데… 왜 안 부순 거예요? 집을 없애 버리면 되잖아요."

가인의 질문에 워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도 써봤지. 진작에 써봤을 거야. 하지만 저 집은 이상하게도 자신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들의 적의를 잘 읽어내서, 집을 부수려고 사람들이 다가오면 어마어마한 힘으로

사람들을 밀어내거나 상처를 입혀. 벨린 아주머니네 가족이 이사오기 전에도 한 번

저 집을 부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뼈가 부러졌고, 한 사람은 목이 부러져서 죽었어.

멀리서 기름을 붓고 불을 던져도 소용이 없어. 타질 않아. 무언가 이상한 힘이

저택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워렌은 목이 마른지, 잠시 말을 멈추고 요젠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동안 가인은 눈을 돌려 저택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여전히 끈적거리는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가인은 금방이라도 그 검은 기운이 이쪽으로 뻗어나올 것만 같아서 무서웠지만

검은 기운은 그곳에만 머물러 있을 뿐, 더 먼 곳까지 뻗어나가지는 않았다.

"걱정할 거 없어."

가인의 두려움을 읽은 해윤이 가인의 무릎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박령은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가 보기엔 살인범이 그곳에서 죽어 지박령이 된 것 같네.

그것도 아주 더러운 지박령. 어쨌든 저 집 밖으로는 나올 수 없을 테니까

이쪽까지 올까 봐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으응…"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목을 쉰 워렌이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잿빛 연기가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벨린 아주머니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5년 전의 일이야.

올 때는 가족들과 함께였지. 잘 생긴 남편과 귀여운 9살짜리 딸이 있었어.

우리는 당연히 저 저택을 사면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그들은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저 저택을 원했고 결국은 자기들 뜻을 이루게 되지.

늘 그렇듯 처음 며칠은 괜찮았어. 그들 가족은 아주 화목했고, 딸인 하이진은 명랑한 아이로

종종 벨린 아주머니 손을 붙잡고 우리 가게에 놀러와서 꽃구경을 하다가 가곤 했지.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어. 그 애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난 몇 번이나 벨린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하이진을 설득하려고 했지.

다른 좋은 집을 구하라면서 다른 마을의 집들도 알아봐 주고 말이야. 하지만 결국은…"

잘 생긴 워렌의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워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끔찍했어. 정말 끔찍했지."

가인과 해윤도 덩달아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워렌의 목소리가 너무 괴로워서 그들 역시 쓴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 날, 벨린 아주머니가 혼자서 우리 가게에 찾아오셨길래 하이진은 왜 안 왔느냐고 물었더니,

팔에 안고 있는 인형을 가리키면서 말하는 거야.

'여기에 있잖아요. 우리 하이진.'

난 뭔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았지. 그러고 보니, 그 날 아침에는 출근하는 남편도 보이지 않았거든.

하지만 난 두려웠어. 어릴 적에 봤던 그 끔찍한 시체들. 아직까지도 날 괴롭히는 그 시체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날 두렵게 만들었어. 난 그냥 모르는 채 하고 넘어갔지.

그런데 죄책감이 너무 커서 오래 견딜 수가 없어라. 다음 날, 나는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저택으로 찾아갔어.

벨린 아주머니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우리를 맞이했고, 우리는 볼 수 있었어.

거실에 끔찍한 몰골로 죽어있는 남편과 아이를…

우리는 경악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벨린 아주머니는 마치 그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을

하는 거야. 우리에게 차를 내온다며 부산을 떨고, 인형에게 하이진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일단 그 저택에서 도망을 나와 성에 신고를 했고 성에서는 사람을 보내 시체를 거두어 갔어.

원래 그 저택에 들어가면 모두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검사를 안 하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벨린 아주머니만 살아남아서 모두 벨린 아주머니를 의심했지.

그래서 성에서 벨린 아주머니를 잡아갔는데, 다음 날이 되니까 벨린 아주머니는 돌아와 있었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을을 배회했지. 하이진이라고 이름을 붙인 인형을 안고서 말이야.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잡혀갈 때마다 벨린 아주머니는 다시 돌아오고,

결국 병사들도 벨린 아주머리를 포기했지. 벨린 아주머니에게도 집의 저주가 걸렸다고 생각한 거야.

그 후에 벨린 아주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행객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여행객의 행방을 알 수 없지. 내가 물어보면 아주머니는

'오늘 아침 일찍 떠났어요.'

라고 대답을 하는데, 그건 믿을 수 없는 말이야. 난 우리 마을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

동트기 전에 일어나거든. 여행객이라면 동이 튼 후에 떠나는 법이잖아.

간혹 동트기 전에 서둘러 떠나는 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모두가 동트기 전에 하나 같이들 떠난다는 게 이상하잖아.

그래서 우리는 깨달았지. 집이 벨린 아주머니를 남겨둔 이유는, 여행객들을 유인해서 잡아먹기 위해서라고."

가인이 부르르 떨었다.

"슬픈 이야기네요."

해윤이 말했다.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슬픈 이야기지. 난 마을을 배회하는 벨린 아주머니를 보면 무섭기보다는 가슴이 아파.

벨린 아주머니는 정말로 남편이 일하러 떠나고, 인형이 하이진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거야.

돌아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면서 대답하지 않는 딸에게 계속 말을 거는 거지.

죽을 때까지 저 일이 반복될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안타깝다.

저택에서부터 죽은 사람들의 슬픈 절규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워렌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자, 자. 얼른 들어가서 자라. 니들 많이 졸리겠다. 눈에 졸음이 가득하네.

나도 내일 새벽엔 일어나야 하거든. 아침은 식탁에 준비해 놓을 테니까 일어나면 아침 먹고,

내가 보고 싶어진다면 바로 건너편에 있는 꽃집으로 와. 난 낮에는 그곳에 있으니까.

혹시 자다가 무서워서 못 자겠으면 내 방으로 건너와도 좋고.

형아가 자장가 부르면서 재워줄게."

"사양할게요."

워렌이 키득거리며 먼저 집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인은 저택이 있는 곳을 한 번 더 쳐다보고 워렌과 해윤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슬프고 어두운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몹시 피곤했는지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잠이 들었다.

깊이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잠이 깼다.

번쩍 눈을 떠보니 어린 여자아이가 공중에 떠서 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이기에 가인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아니, 여자아이의 모습이 평범한 여자아이와 같았기 때문에 무섭지 않은 것이리라.

언제 가인의 침대로 기어들어 온 건지, 곤히 잠든 해윤이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가인 쪽으로 돌아누웠다.

"오빠가 보였어요."

"넌… 설마… 하이진?"

하이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 여기엔… 어떻게?"

"온통 깜깜했는데 멀리서 빛이 보였어요. 도와줄 사람이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선하고 강한 힘이 우리에게까지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아빠가 그 사람의 신경을 다른 데 쏠리게 한 틈을 타서

이곳으로 왔어요. 아마 그 사람이 곧 내가 사라진 걸 알아챌 거예요. 얼른 이야기하고 돌아가야 해요."

"무, 무슨 얘긴데?"

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가 우리 엄마를 옭아매고 있어요. 우리 엄마는 그를 평생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우리 엄마를 저택에서 빼내주세요."

"아니, 그게 아니야."

가인이 고개를 저었다.

"네?"

"너네 엄마만 빼내는 문제가 아니야. 그 저택, 그것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너와 너의 아빠까지 구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돼?"

"그건 무리예요."

하이진이 괴롭게 웃었다.

가인은 저토록 어린 하이진이 저런 쓴웃음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무리 아니야! 그런 표정으로 웃지 않게 해줄게. 어린애들은 더 밝고 명랑하게 웃어야 돼!

그러니까 말해줘. 어떻게 해야 돼? 뭐가 문제인 거야?"

"우리들은 모두 그에게 얽매여 있어요.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자신의 부하로 부려요.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사람을 죽여야 돼요. 그를 없애려면 그의 혼이 깃……… 꺄아아악!"

갑자기 하이진이 비명을 질러대자, 가인은 화들짝 놀라 하이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하이진에게 손이 닿기 전, 하이진은 어마어마한 힘에 끌리듯

무서운 속도로 어딘가로 끌려가 버렸다.

가인은 지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어서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춘 채로

하이진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이진은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자신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오로지 엄마 걱정만을 하는 착한 아이였다.

엄마를 구하기 위해 고통을 무릅쓰고 가인을 찾아오는 용기까지 가진 아이였다.

'그 작은 아이도 그렇게 용기를 내는데… 내가 무섭다고 피할 수는 없어.'

가인은 두려움보다 하이진을 저렇게 만든 살인범에 대한 분노가 더 커졌다.

일어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서둘러야 했다.

하이진이 당할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었다.

"해윤아. 해윤아."

가인이 해윤을 흔들었다.

"으아… 아침이냐, 벌써? 그런데 왜 내 눈에는 캄캄하게 보이지? 내 눈이 멀었나?"

해윤이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에 보이는 해윤의 입술이 유난히 빨갛게 보였다.

해윤은 하품을 하며 가인을 쳐다봤다.

"왜? 내가 굿나잇 키스를 안 해준 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냐? 그것 때문에 잠 못 자고 있었어?"

"미친 소리 그만 지껄이고 얼른 옷 입어. 해야할 일이 생겼어."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해윤에게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해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가인의 설명을 들었다.

"약간의 도움이 필요하겠는걸. 우리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야."

"도움이라니… 영적인 문제니까 우리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다른 사람들이 갔다가 죽으면 어쩌려구?"

"굉장히 용감해졌네?"

해윤이 놀랍다는 듯 말하자 가인이 얼굴을 붉혔다.

"그야… 그 애가… 너무 불쌍하니까 그렇지. 그 애를 그렇게 만들고 나서 그 애 엄마까지 이용해 먹는

살인범이라는 놈을 진짜 없애버리고 싶다구."

"뭐, 그건 내가 해줄게. 내 힘이면 뭐라도 다 없앨 수 있으니까."

가인이 웃었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네가 없었으면 이런 건 엄두도 못 냈을 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없었으면 하이진이라는 애의 부탁조차 듣지 못하고 그대로 이 마을을 지나쳤을걸."

둘은 마주보고 씩 웃은 후에 워렌의 방으로 찾아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워렌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오… 귀여운 고양이들이 이 밤중엔 웬일이지? 역시 무서워서 엉아의 자장가가 필요했던 건가?"

"자장가는 필요없구요. 도움이 필요해요."

"도움?"

"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에에? 무슨 일을 벌리려는 건데?"

"저 집을 부숴 버릴 거예요."

"뭐어?"

워렌은 잠이 확 달아나서 앞에 서 있는 두 소년을 쳐다봤다.

핏기 없는 하얀 얼굴에 유난히 빨간 입술을 가진, 도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어딘지 주책이 난무하는 해윤과

곱상하고 청순한 얼굴이라서 큰 키가 아니었으면 여자라고 믿어버렸을 가인이

불타는 눈으로 워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담긴 결의가 너무도 확고해서, 워렌은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인지 궁금했다.

좀 전에 저택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그들은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자다말고 갑자기 뛰어와서 저택을 부수러 간다는 말을 하다니…

혹시 저택의 망령이 쓰인 게 아닌가 싶어서 자세히 얼굴을 살펴봤더니 가인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귀신에 쓰인 거 아니에요. 우린 멀쩡해요. 설명이 필요하다면 설명을 할게요."

"그래? 그렇다면 어디 그 설명이라는 것 좀 들어보자."

워렌이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했다.

"형은 마을에서 인덕이 있어요?"

가인이 들어가기 전에 물었다.

"인덕이라니?"

"형이 도움을 청하면 이 밤중에 뛰어나와서 도와줄 사람들이 있어요?"

"후우. 그거야 당연하지. 이래봬도 꽤 인기인이라구, 나는."

"다행이네요. 그럼 형한테만 설명을 하면 모든 게 다 되는 거군요?"

"그래, 그래. 들어보고 그럴 듯하다 싶으면 누구의 도움이라도 얻어주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고 꽁꽁 묶어서 방에 가둬뒀다가 아침이 되면

마을 밖 먼 곳에 던져버릴 거야. 우리 마을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가인이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래요, 그럼 설명할게요."

"응, 해봐."

워렌은 의자를 끌어다가 가인을 마주보고 앉았고, 해윤은 가인의 보디가드라도 되는 양

가인이 앉아있는 옆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사실 우리는 영능력이라는 게 있어요."

"영능력?"

"네. 저는 영혼과 접할 수 있어요. 영혼을 볼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죠.

그래서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 마을 한구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리고 여기, 해윤이는 영혼을 퇴치하는 능력이 있어요."

"아…"

워렌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능력, 말로만 들어봤는데… 진짜 있는 거구나."

"사실은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어쨌든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고,

우리들은 다른 해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었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겁이 많아서 무서운 일은 피하고 싶었어요."

워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잠을 자는데 누군가 저를 찾아왔어요. 어린 아이였죠. 전 그 애가 바로 하이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하이진은 죽었잖아. 난 그 애의 시체가 실려나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네, 맞아요. 하이진은 죽었어요."

가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절 찾아온 건 그 애의 영혼이에요."

"아…"

"저 집에 있는 살인범의 영혼에 종속되어서 쉬어야할 곳으로 떠나지도 못하고

죽은 후에도 계속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나 봐요.

아마 저 집에서 죽어간 사람들 전부, 영혼의 상태로 저 집에 묶여 괴롭게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살인범의 악령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행자들을 하나씩 끌어 모으기 위해

벨린 아주머니를 살려둔 거예요. 그녀를 이용해서 여행자들을 집으로 끌어들이려구요.

시간이 지나 희생자가 많아질수록 살인범은 점점 더 많은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됐겠지요.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조차도 부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워렌은 믿을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가인의 설명을 들었다.

"그 애는 그 집에서 빠져나오면 자신이 무척 괴로워질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오직 자기의 어머니를 위해 날 찾아왔어요. 우리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 애가 본 희망의 빛이었겠지요.

그 애가 말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끌려가는 걸

이 두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 애는 무척 괴로워 보였지만…"

가인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마지막까지 날 신뢰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어요. 난 도저히… 그 애의 믿음을 져버릴 수가 없어요.

어차피 나와 관계도 없는 애, 나랑 해윤이가 그냥 떠나면 그걸로 그만이겠지만…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많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만약 우리의 힘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우리의 힘을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고 싶어요. 그래요, 어쩌면 이건 나 자신을 위한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가인이 워렌을 응시했다.

"도와주세요, 형. 우리가 그 애를 도울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도록…"

워렌은 깊은 감동을 받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좋아!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니들을 도우면 벨린 아주머니가 정신을 차릴 수 있고,

하이진이 평온하게 쉴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저 빌어먹을 저택의 저주가 사라지고 말이야."

"맞아요, 바로 그거죠. 이 형, 말 잘 통하시네."

해윤이 씩 웃었다.

"그래서, 내가 도울 일이 뭐지? 같이 쳐들어갈 사람들을 불러모아줄까?"

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저택에 들어가는 건 우리 둘로 충분해요.

저 저택의 구조를 알아다주세요. 자세한 청사진, 그러니까 저 집의 구조가 그려져 있는

건축 설계도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저곳에서 무언가를 찾아야 하거든요."

"흠… 워낙 지어진지 오래 된 집이라서 좀 힘들겠지만… 어디선가 구할 수 있겠지.

여기서 좀 쉬면서 기다리고 있어. 반드시 구해다줄게."

워렌이 대충 옷을 걸치고 나간 후에, 해윤이 가인을 쳐다봤다.

가인은 결의에 찬 시선을 창 밖에 두고 있었다.

"안 무서워?"

해윤이 질문에 가인이 웃으며 해윤을 돌아봤다.

창 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빛나는 가인의 얼굴이 너무도 매혹적이라서,

해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있잖아. 어떤 일이 있어도 날 지켜줄 거래매."

"그, 그야 당연하지!"

어지간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해윤이지만, 가인의 부드러운 미소에는 한껏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응, 그러니까 안 무서워. 넌 세계 최고의 영능력자잖아.

처음이야. 내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본 건…"

해윤이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검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늘어졌다.

"응, 나도야. 내 능력이 이렇게 쓸모 있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볼 수 없어서 아무 쓸모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이 힘으로 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다니…"

"즐겁다, 같이 싸울 수 있어서. 끔찍한 귀신과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수 있다니…"

"응. 난 너랑 키스하고 싶다."

"그놈의 장난만 하는 주둥아리를 밟아주겠어. 반드시."

"하하하하."

창문으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올 무렵, 워렌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워렌의 손에는 둥글게 말린 종이가 들려 있었다.

"구해왔다. 마을 사람들이 호의적이야. 저택 때문에 하도 골머리를 앓아서 긴가민가하면서도

희망을 걸어보고 싶나봐. 다들 발벗고 나서서 지도를 찾아줬어."

해윤이 지도를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형. 자, 가인아. 준비 됐지?"

"응. 어서 가자."

"어? 딴 건 필요없냐? 아침이라도 먹고 가."

"흉측한 꼴 보면 다 올라올 거예요. 살인범 먼저 없애고 나서 먹을게요. 맛있는 걸로 부탁해요."

"아, 그래도… 지도라도 보고 가야지."

"가면서 볼게요."

가인이 웃으며 일어났다.

가인과 해윤의 표정은 큰 싸움을 앞둔 사람이라기보다는, 아주 즐거운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처럼

밝아서 워렌은 조금 놀랐다.

가인과 해윤이 신나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워렌은 중얼거렸다.

"저 애들이라면… 분명 저택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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