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저택으로 향하던 길에, 이른 아침부터 마을을 배회하는 벨린과 마주쳤다.
벨린은 어제와 같이 고상한 차림새를 하고, 한 팔에 안은 인형에게 말을 걸며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인은 더 이상 벨린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악령에 사로잡혀 원치 않은 일을 하는 벨린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들을 발견한 벨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간밤에는 편히 쉬셨나요?"
"네. 아주머니는요?"
"저도 아주 잘 잤답니다. 오늘은 장미꽃이 활짝 피었어요. 빨간색 꽃잎에 매달린 이슬이 얼마나 예쁘던지…
우리 하이진이 새벽부터 꽃을 보고 싶다고 야단이어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밖에 나오고 말았지요.
아침 식사는 하셨나요?"
"아니요, 아직… 혹시 괜찮다면, 아주머니 댁에서 하이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벨린의 표정이 환해졌다.
"물론이지요. 정말 환영이에요. 우리 하이진도 좋다고 하네요.
안 그래도 산책을 나오기 전에 맛있는 빵을 구워놨어요. 어제 신선한 치즈를 배달 받았구요.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게요. 어서 오세요."
벨린은 정말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그들보다 한 걸음 앞서서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저택 가까이 갈수록, 저택이 내뱉는 끈적한 악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인은 조금 긴장해서 해윤을 흘끗 쳐다봤지만,
해윤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저택은 아름다웠다.
주위를 둘러싼 검은 기운만 아니라면 말이다.
마을에 있는 집들 중에 가장 크고 아름답게 지어진 저택의 넓은 정원에는,
벨린의 말대로 빨간 장미꽃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워렌의 정원 이상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걸어 들어가면 삼층으로 지어 올린,
중세풍의 저택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계단과 기둥은 흰색 대리석이었고,
지붕은 짙은 푸른색으로 올려져 있었다.
아치형의 커다란 창문 안쪽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는 하늘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저택을 한결 푸근해 보이도록 했다.
검은 기운만 아니라면 말이다.
해윤의 눈에 저택은 더없이 완벽한 꿈의 주거지로 보였지만
가인의 눈에는 하나하나 다 거슬리게만 보였다.
저택 곳곳에 숨어 있는 영혼들의 기운이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는데,
영혼들마다 전부 슬픔의 절규를 분출하고 있었기에
가인은 당장이라도 토악질을 해대고 싶을 만큼 더러운 기분이었다.
겨우 구역질을 참아내며 벨린과 해윤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로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편안한 소파에 앉았고, 벨린이 나가자 얼른 가까이 앉았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하지?"
"그 살인범의 물건을 찾는 게 우선이 아닐까 싶은데…"
"그것만 찾아서 없애버리면 되겠지?"
"응."
"있잖아, 해윤아. 잘 들어둬."
"응. 네 목소리라면 언제든 귀담아 듣고 있어. 네 목소리는 음악 같으니까."
진지하게 말하는 해윤을 싹 무시한 가인이 말했다.
"지금 이곳에 굉장히 많은 영혼이 있어."
"그래?"
해윤이 놀랍다는 듯 주위를 둘러봤지만 해윤의 눈에 영혼이 보일 턱이 없었다.
해윤은 자신을 향한 살의조차도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네 뒤에도 있고, 내 뒤에도 있어. 내 옆에도 있고… 저 좁은 문틈으로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만 해도 수십 개야. 게다가 손에는 아직까지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이랑 도끼를 들고 있어.
어린애도 있고, 노인도 있고, 청년도 있고, 우리 나이 또래 애들도 있고, 중년의 남녀도 있어.
아마 여기서 살해된 가족들이겠지."
"역시 영혼이 모두 붙잡혀 있었던 건가?"
"다들 무섭게 눈을 빛내고 있지만, 난 그들의 마음이 느껴져."
가인의 얼굴은 아까부터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어. 죄 없는 사람을 또 죽여야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자기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음에 답답해해.
이렇게 괴롭게 영원히 잡혀 있느니, 차라리 이 세상에서 아예 없는 존재가 되어버려도
상관없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어. 다들… 사실은 굉장히 선량한 사람들이야."
"내가… 어떻게 해줄까?"
"모두… 퇴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살인범을 없애서 저들이 편안히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 죽음 뒤의 삶이 너무 끔찍했으니까, 이제 다들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해윤이 웃었다.
"뭐, 좋아. 살인범에게 부림을 받을 정도의 영혼이면 내 근처에는 얼씬도 못할 거야.
도끼를 휘둘러도, 칼을 찔러 넣어도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할 거야.
그런데 하나 주의할 게 있어."
"뭔데?"
"절대로 내 힘을 의심하지 마."
"……?"
"저들이 도끼를 휘둘러도, 네 심장에 칼을 찌르려고 해도, 마치 저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반응을 보이지 마. 그냥 내 힘을 믿어. 나랑 있으면 그 어떤 짓도 할 수 없을 테니까 나의 힘을 믿어.
네가 내 힘을 의심하는 순간, 네 주위를 감싸고 있던 내 힘이 약해질 거야.
네가 내 힘을 믿어야 그 힘이 믿음과 반응해서 더 강해져.
그러니까… 날 의심하지 마."
가인이 해윤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응. 널 의심하지 않을게."
"좋았어. 그렇다면 사랑의 키스 한 번."
"이 집에서 나가면 죽도록 때려줄게."
"입술로?"
"미친 새끼."
가인이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내 생각에, 살인범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물건은 집안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아주 잘 감춰져 있겠지. 집안을 전부 둘러보자."
"그래."
해윤도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 벨린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침이 준비 됐어요. 어서 이리로 오세요."
가인이 곤란한 듯 해윤을 쳐다봤다.
해윤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아침 먹기 전에, 집안을 좀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집안을요?"
"네. 집이 너무 예뻐서 한 번 둘러보고 싶어요. 제가 나중에 돈 좀 많이 벌면 예쁜 집을 지어서
살고 싶은데, 이 집이 딱 제가 원하던 그런 집이거든요. 꼭 좀 보고 싶습니다."
해윤이 간절하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자, 벨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얼마든지 구경하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괜찮다면 얘랑 둘이서 좀 둘러보고 싶은데… 원래 예술가적인 무언가를 얻으려면
외롭게 다니면서 혼자 추구하는 게 좋거든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가인은 생각했다.
"응,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난 그럼 정원을 손질하고 있을게요.
식사 생각이 나면 불러요."
"네! 감사합니다."
해윤이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벨린은 정중하게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를 하고는 정원으로 향했다.
벨린이 나가는 것을 본 해윤이 가인을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어때?"
"미친 것 같아."
가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야, 야. 그냥 솔직하게 멋있다고 말해도 돼."
"그래, 그러니까 솔직하게 미친 것 같다구."
"흥, 솔직하지 못하긴."
"난 내가 굉장히 정직한 애라고 생각해."
둘은 잡담을 나누며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마땅히 살인범의 물건일 만한 것을 찾지도,
그것을 감추어두었을 만한 장소를 찾지도 못했다.
저택의 설계도를 펴서 살펴봐도 숨겨진 장소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걷는 내내, 그들을 공격하는 영혼들이 많았지만 가인은 해윤을 믿고 있었기에
그들의 공격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둘의 주위로 쳐진 해윤의 힘 덕분에, 영혼들이 휘두르는 칼이나 도끼는 그들의 몸에 닿지 못하고
퉁겨져 나갔다.
가인은 새삼 해윤의 능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해윤이 특별히 방어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단지 해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혼들은 사족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가인이 자신을 쳐다본다는 걸 느낀 해윤이 빙긋 웃었다.
"왜? 내가 너무 잘 생겼냐? 새삼 반했어?"
"응."
가인이 살풋이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하다, 정말. 반했어."
솔직한 대답에 해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하하하하… 뭐, 이런 걸로 다… 하하하하하."
"너도 쑥스러워할 줄 아는, 인간의 감정을 가진 애였구나."
"난 원래 쑥스러움을 잘 타는 순진한 남자거든?"
"됐거든?"
걸어가던 가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해윤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크게 떴다.
가인의 앞을 막아선 영혼은 간밤에 가인을 찾아왔던 하이진이었던 것이다.
하이진의 옆에는 그녀의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은 손에 칼을 쥐고 있었는데, 몹시 괴로워 보여서 가인도 너무나 괴로워졌다.
가인의 눈에 눈물이 고이자, 해윤이 당황하며 가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가인아. 진정하고 생각해. 네가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슬픔은 곧 기쁨으로 바뀔 거야.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어. 그러니까 가인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안 그러면 위험해져."
"응."
가인이 억지로 웃었다.
"응, 나 괜찮아. 난 저들이 불쌍하지 않아."
하지만 하이진이 칼을 휘두르며 가인에게 덤벼드는 순간, 가인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고,
칼은 가인의 팔에 깊숙이 박혀 상처를 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가인의 팔이 찢겨 피가 흐르는 것을 본 해윤은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하다가 아무 쪽으로나 팔을 휘둘렀다.
해윤의 팔에 맞은 하이진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해윤은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 힘에 맞선 하이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이진의 아버지는 하이진을 보살피고 싶은 듯 보였지만 뭔가에 홀린 듯 둘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역시 해윤이 휘두르는 힘에 맞아서 멀리 나가떨어졌다.
"잠깐! 잠깐, 해윤아!"
영혼들이 해윤의 힘에 반응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것을 본 가인이 해윤의 팔을 잡았지만,
해윤으로서는 그만 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가인에게 영혼이 덤벼든다면 방금과 같은 상처가 또 다시 생길 수도 있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혼들이 해윤의 힘에 부딪혀 멀리 나가떨어지거나 서서히 사라져갔다.
슬픈 듯, 조금은 기쁜 듯 사라지는 영혼들의 모습이 가인의 가슴을 짓이겨 놓았다.
가인은 해윤을 꽉 끌어안으며 외쳤다.
"이제 그만!"
"괜찮냐?"
움직임을 멈춘 해윤이 가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물었다.
"응?"
"너 팔, 그거 괜찮냐?"
"아아…"
잠시 잊고 있던, 아무 것도 아닌 고통.
이 세계로 온 후에 우준과 채민이 언제나 심하게 다쳤던 것에 비해,
가인 자신은 크게 다친 적이 없다.
팔이 조금 베여서 피가 나는 것 정도는 우준과 채민이 겪어왔던 고통에 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미안하다."
해윤이 괴롭게 중얼거렸다.
"내가 좀 더 제대로 지켰어야 했는데… 미안해."
가인은 말없이 해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소르르 흘러내렸다.
"네가 있기 때문에 팔 하나로 끝난 거야. 너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걸. 바보."
가인이 설계도를 펼쳤다.
"사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생각됐던 게 있어."
해윤도 정신을 차리고 가인에게 바짝 붙어 설계도를 내려다 봤다.
가인이 설계도의 부엌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말이야."
"응."
"설계도에 나온 부엌이랑 이 집의 부엌의 크기가 달라."
"그래?"
"응. 확실해.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숨겨진 공간이 있는 게 아닐까?"
"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찾냐? 부숴야 하나?"
"그래야지, 뭐."
"살인범이 가만히 있겠냐?"
가인이 씩 웃었다.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후아. 그럼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해야하는 건가?"
"어쨌든 한 번 부딪혀 봐야겠지?"
창 밖으로 정원이 보인다.
정원에선 벨린이 인형을 의자에 앉혀두고 장미 넝쿨을 손질하느라 바빴다.
"아주머니가 들어오기 전에 끝내자."
"오케이."
두 사람은 부엌의 벽을 부술 것이 없나 집안을 좀 둘러봤다.
다행히도 지하실에 있는 창고에 커다란 도끼와 곡괭이가 세워져 있었다.
끝부분에 거뭇한 것이 묻어 있는 것을 본 가인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망설이지 않고 곡괭이를 집어들었다.
"설마 그 끝에 말라붙어 있는 건 피인가?"
"글쎄다… 얼른 가자."
가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지하실 계단으로 먼저 올라갔다.
두 사람이 지하실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였다.
바람도 없는데 갑자기 지하실 문이 콰앙-하고 코 앞에서 닫혔다.
해윤이 빨리 가인을 끌어당기지 않았더라면 문에 제대로 부딪쳤을 것이다.
문이 닫힐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빛을 비출 만한 것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은 두 사람은
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