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83화 (83/91)

-83-

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부터 어둠은 독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응시하는 영혼들을 보노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고독에 휩싸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괴로움이 무게를 지니고 가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때, 보이는 한 줄기의 빛은 해윤의 목소리였다.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빛을 담아 가인에게 다가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 정도쯤은 내가 부술 수 있다구.

그러니까 그렇게 한숨 쉬지 마. 네가 괴로워하는 거, 나한테 정말 힘든 일이니까."

해윤은 자세를 잡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다리를 쭉 내뻗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문짝이 날아갔다.

다시 빛이 들어왔다.

해윤의 얼굴이 보인다.

해윤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가인을 보고 있었다.

"어때? 나랑 같이 있으니까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지?"

가인이 웃었다.

"응, 정말 문제 될 게 없네."

둘은 얼른 지하실 밖으로 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벨린은 아직 정원을 손질하는 중이다.

해윤이 손바닥을 편 채 공중을 향해 손을 뻗고는 무슨 주문인가를 중얼거렸다.

"일단 이 안에서 들리는 소음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결계를 쳤어.

벨린 아주머니가 듣지 못하도록."

"잘했어!"

가인이 엄지를 번쩍 들어 해윤을 추켜 세워줬더니 해윤은 좋다고 헤실거렸다.

둘은 곡괭이와 도끼를 들어 부엌의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벽은 생각보다 두껍지 않게 만들어져 있었기에 쉽게 부술 수 있었다.

쾅쾅하고 내찍을 때마다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뒤로 또 하나의 나무 벽이 나타났다.

가인과 해윤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좀 더 빠르게 나무 벽을 부수었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놀란 나무벽은 제대로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형편없이 조각이 났다.

그렇게 10분쯤 가격하자 나무벽 뒤로 텅빈 공간이 나타났다.

"있다!"

해윤과 가인이 동시에 외쳤다.

"들어가자!"

한 사람씩 들어가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안은 어두웠기 때문에 둘은 일단 안을 밝힐 만한 물건을 찾아야했다.

하지만 주위에 등불이나 촛불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해윤이 먼저 구멍 안으로 다리를 밀어넣으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둠은 너에게 무서운 거겠지. 하지만 가인아, 나도 귀신이 보이지 않아서 불안해.

그래도 네가 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는 거야.

너도 나를 믿고 용기를 내줘. 네게 보이는 무서운 것들은 전부 내가 막아줄 테니까."

해윤이 자신 있는 눈빛으로 가인을 쳐다봤다.

가인은 몹시 두려웠지만 그 눈빛 하나에 기대를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 해윤아."

숨겨진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다행히 부엌 쪽으로 부서진 구멍에서 빛이 들어왔기에 희미하게나마 실내를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인은 들어오는 순간, 숨도 못 쉴 정도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 어두운 공간에 들어찬 끔찍한 악의와 괴로운 영혼의 절규,

그리고 묶여서 고통 받는 영혼들의 모습이 가인을 온몸을 옭아매었다.

가인은 뜨고 있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이 감기지 않는다.

부들부들 떠는 가인의 손을 해윤이 꽉 잡아주었지만 그래도 가인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두려움이 이성의 판단을 흐트러뜨려 놓았다.

'도망치고 싶어!'

가인은 간절하게 생각했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가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인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이곳에 오기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상한 섬, 인어, 해적, 난폭한 왕, 지하수로, 유괴범, 아이들의 영혼, 흡혈귀, 마녀, 차희의 죽음…

그래, 차희의 죽음.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사건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떠올리지 않아도 가슴이 아픈…

만약 차희의 영혼이 이런 곳에 묶여있다면 가인은 어떻게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고통을 받는 영혼들이 전부 차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무섭고 힘들어도 구해내야만 할, 그런 영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든 힘을 내어야 한다는 투지에 불탔다.

손에 닿아있는 해윤의 손을 꽉 잡았다.

"해윤아. 지금 여기에 영혼이 너무 많아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영혼들이 가로막아서 바닥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야.

살인범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아, 그거라면 난 대충 알겠는데?"

해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응?"

"넌 영혼 때문에 안 보일지 몰라도 난 영혼이 안 보이니까 물건들이 확실하게 보이거든.

텅 비어있는 공간에 딱 하나, 낡은 시계가 떨어져 있네. 저게 살인범의 물건이었던 게 아닐까?"

"뭣이야! 그걸 왜 이제야 말해줘!"

가인이 발끈했다.

"그야… 네가 숨도 쉬지 않고 있어서 건드리면 위험하겠다 싶었거든."

"아무튼 그거일 거야. 얼른 그걸 부셔버리자."

"부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영혼이 많이 있다고 했지?"

"응?"

"영혼들이 묶여서 움직이지 못하는 거라면 내가 가까이 갔을 때 많이 위험할 텐데…

모수 소멸될지도 몰라."

"이런…"

가인은 난감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매여있는 영혼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인과 해윤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고 때문에 눈빛으로 가인에게 무언가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괜찮대."

"응?"

"영원히 이렇게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낫다고…

자기들 몇 명이 희생되어 모두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괜찮다고…

아무리 살인범에게 묶여있었다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괜찮으니까 제발 더 이상 살인을 안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하고 있어."

"그렇다면…"

해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 해윤으로서는 영혼들의 괴로움이 얼마나 짙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해윤은 가인보다 좀 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부셔볼까?"

해윤이 막 발을 떼었을 때, 부엌 쪽에서 벨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부엌이 왜 이렇게… 앗! 두 분 다 그 안에 계신 건가요? 여긴 왜 이렇게 된 거죠?"

둘은 퍼뜩 놀라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벨린이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들어오시면 안 돼요!"

가인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벨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안으로 내디뎠다.

"해윤아, 빨리!"

가인이 해윤의 팔을 밀어내자 해윤은 빠르게 달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계를 잡았다.

순간적으로 떨어진 해윤과 가인.

살인범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영혼들의 중앙에 안전하게 서서 가인과 해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살인범은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영혼들에게 명령을 했다.

"가서 죽여라!"

영혼들은 해윤에게는 손댈 수 없었지만 가인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들은 흉기를 휘두르며 가인을 향해 덤벼들었고 가인은 해윤이 막 집어든 시계를 쳐다봤다.

'저것만 부수면!'

하지만 늦을 것 같다.

아마 시계를 부수기 전에 영혼들이 휘두르는 흉기가 가슴에 박힐 것이다.

도끼 하나가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임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머리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중에 가장 커다란 생각은,

'아, 그래도 만족스러운 생애였어.'

라는 생각이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서 즐거운 여행을 했다.

어찌 만족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도끼가 박혀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살며시 감고 있던 눈을 뜬 가인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음에 놀라 숨을 훅 들이마셨다.

가인의 얼굴 바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 벨린의 얼굴.

그 곱고 기품 있는 하얀 얼굴 위로 붉은 피 한 줄기 흘러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그리고 분명, 믿을 수 없게도…

벨린은 웃고 있었다.

"아주머니!"

콰직-

그 순간, 해윤이 시계를 부수었다.

무언가 변하리라 예상했건만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살인범의 영혼은 건재했고, 영혼들도 여전히 살인범에게 조종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영혼들이 또 다시 도끼를 휘둘렀지만 이번에는 가인에게도, 벨린에게도 맞지 않았다.

가인이 도끼를 피하는 대신 풀썩 쓰러지는 벨린을 받아 드는 것과 동시에

해윤이 가인을 확 끌어안은 것이다.

"어째서…"

벨린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그리고 벨린의 영혼은, 이 집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렇듯 살인범에게 종속되어 버렸다.

벨린의 손에도 흉측한 무기가 하나 들렸고, 벨린 역시 그들을 죽이기 위해 덤볐다.

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에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절규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어째서냐구!"

"아직도 있어? 시계를 부수었는데도?"

가인이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지? 그럼 저 살인범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단 말이야? 결국 내 힘으로 전부를 소멸시키는 방법밖에 없나?"

"크크크크큭…"

혼란에 빠진 가인의 귀에 껄끄러운 웃음소리가 닿았다.

가인은 고개를 번쩍 들어 웃음소리가 들린 곳을 노려봤다.

살인범이 영혼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와 가인의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악의와 살의, 욕망이 뒤범벅된 살인범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검푸른, 괴상스러운 돌기들이 얼굴 전체에 나 있어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징그러웠다.

해윤은 가인이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어 가인의 눈동자가 향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으아! 안 보이는 거 정말 짜증나!"

해윤이 가슴을 팡팡 치며 외쳤다.

"가만히…"

가인이 오른팔을 들어 해윤을 진정시켰다.

눈은 살인범에게서 떼지 않은 채였다.

"혹시 내 물건을 없애면 나의 힘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살인범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좋아. 네놈들은 보아하니 괴상한 힘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아주 쓸모 있겠어.

지금 내게 복종을 맹세한다면 너희들을 귀하게 써주지. 어때? 나의 수족으로 들어오는 게?"

"이런 짓을 해서… 너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 거지?"

가인이 이를 부드득 갈며 물었다.

"어떤 이득이냐니…"

살인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자, 여기 이곳에서 내 힘을 이기지 못해 나에게 복종하며 괴로워하는 자들의 영혼을 보라구."

"……"

살인범의 입술 끝이 틀어올라갔다.

흉측하게 웃으며 살인범이 말했다.

"재미있잖아."

"이… 이 개새끼!"

가인은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에게 영혼을 물리칠 힘이 전혀 없다는 것조차 잊은 채

살인범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 돼!"

해윤이 다급하게 가인의 팔을 잡을 때였다.

갑자기 집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가인을 해윤이 얼른 받쳐들었다.

살인범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힘으로 결계를 쳐놓은 집에 물리적인 힘이 가해질 리가 없는데 집이 진동했기 때문이다.

가인은 자신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집안으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그 느낌만큼은 해윤마저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해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뭐야? 뭐가 들어오는 거야? 살인범이 뭔가 불러낸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정말… 이건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도저히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그런…"

가인의 이가 위아래로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무리 해윤이 가까이 있다고 하지만 견딜 수 없을 크기의 공포가 가인을 짓누르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것은 해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이렇게까지 공포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가인을 꽉 끌어안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해윤의 눈에는 그 강한 기운을 가진 존재가 보이지 않았지만,

가인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형체가 불분명한 검은 그림자.

분명 살인범이 불러낸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살인범은 공포에 질린 듯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가인과 해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살인범을 향해 다가갔다.

검은 그림자에 닿은 영혼들이 사르르 녹듯이 사라졌는데,

그것은 해윤의 몸에 닿을 때처럼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식을 위한 곳으로 떠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었다.

"설마 저건…"

가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뭔데? 뭔데?"

"사신(死神 : 죽은 자를 데리고 가는 귀신)이 아닐까?"

"사신?"

"모르겠어,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나도 처음 봐, 저런 건…"

"왜?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데?"

"저 검은 그림자에 닿은 영혼들은 어디론가 스르르 사라지고, 살인범은 공포에 질려서 계속 도망치고 있어.

사신은 아주 여유롭게 다가가는데도 살인범은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 벗어나질 못해.

사신이 완전히 살인범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

"하아… 그럼 저게 우리한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거지?"

"우리가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를 데려가지는 않겠지."

이 집에 살인범이 수많은 영혼들을 담아 걸어놓은 주술은

사신이 살인범의 영혼을 찾지 못하게 했다.

살인범의 영혼은 흉악했기에 사신이 일부러 나서서 수거를 해야했지만

사신은 그 영혼을 찾을 수 없어서 늘 집 주위를 배회할 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윤이 시계를 파괴하는 순간, 살인범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집 주위를 둘러싼 결계는 사라졌고,

사신은 살인범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독하리만큼 잔인했던 살인범의 영혼이 가야할 곳은 딱 한 군데로 정해져 있었다.

영원히 자신이 남에게 준 고통의 수 백 배의 고통을 받아내야 하는 곳.

살인범은 그곳으로 가게 되어있었다.

천천히 살인범을 놀리듯 따라다니던 사신은 살인범의 겁에 질린 표정을 보는 재미도 사라졌는지,

살인범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사신의 손에서 뻗어나가는 강한 힘에 가인은 저도 모르게 해윤의 손을 꽉 잡았다.

해윤은 가인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가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그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인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사신의 존재감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사신이 뻗은 힘에 닿는 순간, 살인범은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사신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 영혼을 부려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살인범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신에게 붙잡힐 줄은 몰랐다.

가인은 눈을 크게 뜨고 사신을 노려봤다.

'우리들에게도 오면 어쩌지?'

하지만 사신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스르륵 모습을 감췄다.

온몸을 짓누르던 공포가 사라지자 가인은 다리에 힘이 빠져 풀썩 주저앉았다.

"뭐야? 어떻게 됐어?"

해윤이 물었다.

"사신이 살인범을 없앴어. 데리고 간 것 같아."

"그럼 다른 영혼들은 다 풀려난 거야? 사라졌어?"

"아니."

가인이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신의 몸에 닿은 영혼들은 사라졌지만 몇 명의 영혼들은 아직 집안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붙잡는 속박이 없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져 있던 흉기는 사라지고, 억눌렸던 그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죽은 자 특유의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가인은 마냥 잘 됐다고 웃을 수만은 없었다.

벨린이 죽은 것이다.

가인이 입술을 깨물며 이미 죽어버린 벨린의 손을 잡았다.

벨린의 손은 차게 식어있었다.

"미안해요. 당신을 구해야하는데… 구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해윤의 표정도 침울하게 변했다.

이 집에 걸린 저주를 없애는 것도 목적이기는 했지만 벨린을 구하는 것도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벨린이 눈앞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한숨을 내쉬는데, 가인의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길이 있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벨린이다.

벨린의 옆에는 하이진과 그녀의 남편이 서 있었다.

벨린은 미소 짓고 있었다.

"슬퍼하지 말아요."

"아주머니…"

"난 여러분 덕분에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쁜데,

날 이렇게 기쁘게 해준 두 분이 슬퍼하면 마음이 아파요."

"맞아요, 오빠. 우리를 도와줘서 고마워요."

"하이진…"

"정말 고맙습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영혼들이 가인과 해윤을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영문을 몰라 가인을 쳐다보는 해윤에게, 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모두… 고맙대…"

"아…"

"모두… 행복한 듯이 웃고 있어."

"그래."

해윤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잘 한 거지? 잘 한 거 맞는 거지?"

"응."

해윤이 벨린의 시체를 번쩍 안아들었다.

"우리 정말 잘한 거 맞아."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가인의 눈에는 더 이상 집을 둘러싼 검은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가인도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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