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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준과 채민은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분명 성이 무너져 내렸는데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위에 성에서 무너져내린 파편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어떻게… 된 거지?"
채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우준으로서도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검은 마법사의 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
우준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기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둘은 모르고 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구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순간,
스웨인과 인어의 검의 힘이 맞부딪쳤다.
강력한 힘의 파동이 주위에 흐르는 공기의 흐름을 바꾸었고,
바뀐 공기의 흐름은 공간마저 바꾸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다른 안전한 장소로 옮겨진 곳이다.
"어쨌든… 살아난 거네."
우준이 채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채민이 배시시 웃었다.
"응, 우리 살아났어."
함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이라니.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계속 웃음만 흘렸다.
그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우준이랑 채민이다!"
흥분한 듯한 그 목소리에 둘은 고개를 돌렸다.
리현과 비인, 해윤과 가인이 둘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우아!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비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우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준은 비인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채민은 리현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채민이도 무사히 구해냈네. 네가 잘 구해낼 줄 알았어."
"응, 왠지 채민이는 우준이가 구할 것 같았거든."
"너네는 계속 같이 있었던 거야?"
채민의 질문에 리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나랑 비인이랑 떨어지고, 가인이랑 해윤이랑 떨어졌었어.
우리도 각자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을 겪었거든.
한동안 비인이가 유체이탈을 해도 너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못 찾았는데,
우리 일을 해결하고 나니까 가인이랑 해윤이가 보이더라구.
그래서 두 사람 만나고, 바로 너네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지."
"강전이는?"
"그게… 아무튼 여기서 설명할 시간이 없어. 가면서 설명해줄 테니까 얼른 강전이 데리러 가자."
리현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가인과 해윤이 먼저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하고,
리현과 비인이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했다.
우준도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하고 나자 비인이 말했다.
"강전이는 지금 어느 나라의 성에 있는데…"
"무사해?"
"응. 무사해. 무사할 뿐만이 아니라, 그게…"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뒷말을 얼버무리는 비인 대신, 리현이 버럭하며 말했다.
"그 자식이 글쎄, 공주의 남편이 되어있대!"
"뭐어?"
"어떤 예쁘장한 공주의 남편이 되어서 호의호식하고 있단다.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말이야.
아무튼 그 자식 붙잡아서 싸대기 좀 두어 대 날려줘야겠어."
"어떻게 된 일인데? 정말로 강전이가 그 공주가 좋아서 결혼을 한 거라면
그냥 놔두는 게 더 나은 거 아냐?"
"그게 아니니까 문제지."
리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인이 설명했다.
"뭔가 좀 이상해. 뭔가에 쓰인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자의에 의해서 결혼을 한 느낌은 아니었어.
난 리현이처럼 남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으니까 자세히는 모르겠고…
아무튼 가서 강전이를 만나야 할 것 같아.
진짜 공주가 좋아서 결혼한 거라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많이 멀어?"
우준이 물었다.
"아니, 별로 멀진 않아. 대신 강의 상류쪽으로 좀 거슬러 올라가야 돼.
우리가 가려는 신의 성이랑은 멀어지겠지만… 강전이를 만나는 게 우선이니까."
"그래."
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현과 비인의 뒤를 따랐다.
묵묵히 걸어가는 우준의 귀에, 거울의 요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요 …
신은 언제나처럼 편안한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앉아
거울에 비치는 우준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소리 없이 나타나는군."
문득 신이 입을 열었다.
신의 옆에는 브리엔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지?"
"저 애들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낼 때부터…"
"꽤나 오랫동안 있었는데도 내가 눈치 못 채다니… 역시 굉장하군."
"당신이지?"
"응? 뭐가?"
신은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거울 안의 우준 일행은 강전이 있는 곳을 향해 바삐 걸어가는 중이었다.
브리엔도 거울을 한 번 슬쩍 쳐다봤다가 신을 노려봤다.
차갑고 서늘한 눈동자.
신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그 눈동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기에
더더욱 거울에 집중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박차희. 그 애의 마음을 건드려 그 애가 질투에 미치도록 하고,
결국은 불을 질렀다는 누명을 씌워 죽인 것이 바로 당신이지?"
"하하하. 역시 예리한데?"
"그 애들을 무사히 당신 곁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그 따위 짓을 하는 거지?"
"재미있으니까."
브리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앞에 있는 신의 목을 물어뜯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신이 자신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아니, 그 따위 것 때문이 아니다.
저주를 풀기 위해 여행을 하는 우준 일행.
그들이 이곳에 당도했을 때, 자신들의 저주를 풀어줄 신이 이미 죽어버린 후라면
그들은 좌절할 것이다.
그래서 브리엔은 신을 죽이지 못하고 주먹만 꽉 쥐었다.
"왜 그렇게 분노하는 거지?"
"……"
"너에게서 분노의 기운을 느끼는 건 처음이군. 아니, 감정이라는 것을 느껴보는 것이 처음이야.
언제나 얼음 같은 어둠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너도 인간이라는 건가? 아니면 저들과 함께 다니면서 인간의 감정이라도 깨닫게 된 거야?"
"닥쳐! 난 그딴 거 안 키우니까!"
"크크크큭. 그렇겠지. 피의 아들 브리엔이 인간의 감정 따위의 미천한 것을 키울 리가 없지. 안 그래?"
"네 목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거슬려. 입 닥쳐."
"그래, 그렇게 차갑게 말해야 브리엔답지."
"……"
즐거운 듯 걸어가는 우준 일행을 본다.
그들은 언제나 유쾌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저주가 걸려 있는데도, 그들은 언제나 웃고 장난치고,
그리고 서로를 믿는다.
너무도 깊은 애정을 담아 서로를 쳐다본다.
심지어, 자신들과 다른 브리엔을 향한 눈빛조차도 가슴이 아릴 정도로 다정해서
브리엔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코끝이 찡해지는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다시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
이제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
브리엔은 간절히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난 저들을 다시 데리러 가지. 네 앞에 데리고 오면 되는 거지?"
"아니, 이제 그럴 필요 없어."
"뭐?"
"왜 그렇게 실망한 표정이지? 저들과 여행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저렇게 웃고 떠들면서 즐기고 싶은 거야?"
"그게 무슨…"
신이 차갑게 웃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넌 영원히 살잖아. 저들도 어차피 곧 있으면 죽어서 썩어 없어질 몸을 가지고 있어.
너와 나처럼 영원한 시간이 약속된 게 아니라구."
"난 저딴 놈들이랑 여행을 함께 하고 싶은 생각 없어!"
"그래? 그럼 잘 됐군. 가만히 앉아서 저들이 자기들 힘으로 이곳에 오는 걸 지켜보자구.
지켜보는 것도 꽤나 쏠쏠한 재미거든."
"……"
"저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난 너와 한 약속을 지키겠어.
너에게 죽음을 선물해주지."
신의 그 말은 족쇄처럼 브리엔의 발목을 붙들었다.
브리엔은 이제 그만 죽고 싶었기 때문에 신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거울 안에서 우준 일행이 웃고 있다.
그걸 지켜보는 브리엔은, 어쩐지 좀 울고 싶었다.
"강전이랑 접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강전이 있는 나라에 도착한 우준 일행은 우선 방을 잡고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강전이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했지?"
해윤이 물었다.
"응, 확실히… 평소에 알고 있던 모습이랑은 많이 달랐어."
"그렇다면 역시…"
해윤이 짐짓 심각하게 말하자, 다들 좋은 해결 방법이 있는 줄 알고
기대에 찬 눈으로 해윤을 쳐다봤다.
해윤은 진지하게 말했다.
"다 죽여버리는 수밖에 없나?"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생자를 내지 않고 강전이랑 접촉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잖아."
해윤이 씩 웃었다.
"또 장난하면 엉덩이를 걷어차 버린다."
리현이 경고했다.
"장난하려는 게 아니야. 나도 이 상황을 몹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구."
"어떤 방법인데?"
"강전이는 지금 공주의 남편이라면서. 성안 사람. 성안에 있는 인물에게 접촉하려면 우리도 성안 사람이
되는 게 가장 쉬운 방법 아니겠어?"
"하지만 이 나라 사람도 아닌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성안 사람이 돼?"
"위장해야지. 일거리를 찾으러 온 것처럼 해서 말이야."
"엥?"
모두 해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우준만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못 봤냐?"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해윤이,
붉은 입술이 가늘게 올려 웃으며 검지를 치켜세웠다.
"때마침 성안에서 커다란 파티를 열어서, 손님들의 시중을 들어줄 시녀를 구하는 공고가 붙어 있었잖아."
"그게 뭘 어…… 아!"
리현도 알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시녀로 위장 잠입을 하자구. 커다란 파티라면 분명 강전이도 나타날 테니까
그만큼 접촉하기도 쉬울 거고, 우리를 보고 강전이가 정신을 차리면 그걸로 또 좋은 거고…"
"우와! 좋은 생각이다."
"응. 내가 생각해도 이건 정말 좋은 생각이야. 난 왜 머리까지 좋은 거지?"
해윤이 자아도취에 빠져 들어갔다.
"그런데… 설마…"
가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우리 남자들도 시녀로 위장을 하자는 말은 아니겠지?"
"오케이!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해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크게 외쳤다.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그것! 가인이 너의 여장을 보는 거라구!"
"리현아. 이제 내 힘으로 해윤이를 죽여 없앨 수 있을 것 같아.
내 안에서 참지 못할 분노가 들끓어."
"응. 마음껏 죽여. 난 한 발 떨어져서 보고 있을게."
"하하하하핫!"
가인에게 맞아가면서도 해윤은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리현이랑 채민이가 강하다고는 해도, 성안을 지키는 병사들이 무지 많을 텐데…
둘만 보내서는 안심할 수가 없다구. 그리고 아무래도 더 이상 뿔뿔히 흩어지는 건 싫고 말이야.
니들은 안 그래?"
우준이 피식 웃었다.
"맞아. 나도 더 이상 흩어지고 싶진 않다."
"그럼 결정된 거지?"
"어쩔 수 없지."
가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아, 여장 따위는 정말 싫은데…"
"하지만 가인이 너는 정말 잘 어울릴 거야."
"초비인! 너까지 그런 말 할래?"
"가인이 넌 정말 예쁘잖아. 여자치고는 키가 크긴 하지만, 화장까지 해놓으면 우리들 중에서 제일 예쁠걸."
"채민아. 난 남자야. 남자치고는 그리 큰 키가 아니라구!"
"그럼…"
리현이 더 이상 지체할 새 없다는 듯 일어나며 말했다.
"나랑 채민이가 나가서 옷을 좀 사올게. 남자들이 몰려다니면서 여자 옷을 고르는 건 눈에 띌 테니까."
그리하여 두 시간 후.
우준 일행은 모두 "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