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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을 하자마자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킬킬대며 웃는 것.
가인이나 해윤은 본판이 고운 얼굴이었기에 여장이 아주 잘 어울릴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우준과 비인조차도 여장이 몹시 잘 어울렸다.
눈을 슬쩍 내리깐 우준이 내뿜는 그 매혹적인 분위기에
리현마저도 꿀꺽 침을 삼킬 정도였다.
비인은 비인대로 지적이고 차분한 이미지의 여성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어서,
오히려 리현과 채민이 그들의 여성스러움에 눌릴 정도였다.
아무튼 그들은 한동안 미친 듯이 웃은 후에, 이름을 바꾸고 서로의 모습에 좀 적응한 뒤, 성으로 향했다.
시녀가 되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 성의 경비병들은 군말 없이 그들을 들여 보내주었다.
우준에게 은근한 추파를 던지는 경비병도 몇 명 있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자꾸 들러붙는 경비병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안으로 들어오며 우준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심인 것 같아서 무섭다."
"응, 진심이다."
우준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잘못하면 살인날 분위기였다.
한 어린 시녀가 와서 그들을 시녀의 쉼터로 안내해주었다.
시녀의 쉼터에서는 시녀장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깐깐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리고 한참동안 성안에서 숙지할 일에 대해서 잔소리를 늘어놓은 후 덧붙여 말했다.
"행여나, 공주님의 남편 되시는 분께 치근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공주님께서 그분을 너무 아끼셔서 그 주위에 여자가 있는 꼴을 못 보세요.
그러니 될 수 있도록 그분과 마주치면 눈을 피하고 얼른 그 자리를 뜨도록 하세요."
시녀장이 간 후, 비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강전이 녀석, 엄청 사랑 받고 있는 모양인데?"
"그러게. 그렇게 감시가 심해서야 우리가 가까이 갈 수나 있겠어?"
"어쨌든 파티는 내일이니까 내일까지는 뭐라도 해낼 수 있겠지.
정 안 되면 납치라도 하자."
아까 그들을 안내했던 어린 시녀가 다가왔다.
"시녀장님께서 여러분께 성안을 안내하라고 하셨어요."
앳된 시녀는 고작해야 15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동그란 얼굴과 눈웃음이 귀염성 있는 아이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 성안을 안내 받으면서 내부 구조를 샅샅이 살폈다.
한참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맞은편에서 공주와 함께 걸어오는 강전을 보았다.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한 강전은 공주의 말에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공주는 그런 강전을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딱 달라붙어 있었다.
"공주님."
어린 시녀가 깊이 허리를 숙여 공주에게 인사를 하자,
우준 일행도 따라서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한 후 고개를 들던 리현은 강전과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공허한 눈빛.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어서 인상을 찌푸리던 리현은 공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공주의 눈에 살의가 담긴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금방 사라졌고,
공주는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새로온 시녀들인가요?"
"네, 공주님. 내일 있을 파티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잠시 고용했어요."
"그렇군요. 내일 잘 부탁드리겠어요. 중요한 자리니까요."
공주가 말하는 동안, 리현이 다시 강전을 쳐다봤다.
강전은 리현을 보고 있었지만, 리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억을 잃은 건가? 머리를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리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공주가 강전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얼른 가요, 아버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아, 그래."
공주의 재촉에 강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주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계속 강전을 쏘아보던 리현은 뒤를 돌아보는 공주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공주는 잠깐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주 그냥 꽉 잡혀사는구만."
해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상해. 읽히지 않아."
리현이 말했다.
"생각이 전혀 안 읽혀. 공주도, 강전이도… 뭔가 뿌연 것이 가리고 있는 느낌이야.
이상한 주술이라도 걸려있는 건가?"
"네 능력에 문제가 생긴 거 아냐?"
리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해윤이 네가 지금 가인이를 확 덮쳐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읽히고 있어서 짜증나 미치겠어."
"앗! 나의 순수한 마음을 그렇게 생중계하다니… 너무 부끄럽잖아."
"죽여버리고 싶다, 진짜."
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오후가 지나고 왕의 저녁 식사 준비를 할 때까지는 그렇다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몇 번쯤 강전과 마주치기는 했지만,
공주가 너무 딱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강전과 이야기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강전이 화장실 갈 때조차 공주가 따라가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리현은 어떻게든 강전의 가까이에서 강전의 생각을 읽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때마다 공주와 눈이 마주칠 뿐,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생각을 읽는 건 그렇다 쳐도, 남의 눈빛을 읽어서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능력도 있는데, 강전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똑같이 생각이 읽히지 않는 공주의 눈빛에서도 리현을 향한 "살의"를 읽을 수 있건만,
강전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공허"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야."
걸어가는 강전과 공주의 뒷모습을 보며 리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공주가 이상한 술수라도 쓴 건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나서 신경질적으로 걸레질을 하던 리현은 그만
장식장을 팔꿈치로 세게 치고 말았다.
장식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장식장이 흔들리며
그 위에 놓여있던 비싸 보이는 도자기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쨍그랑-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복도 안에 크게 울렸다.
리현은 바짝 얼어붙었다.
'이거 겁나 비싼 거 아냐?'
그 때, 리현의 앞으로 달려온 사람이 있었다.
강전이었다.
"강전아."
혹시 강전이 자신을 알아본 건가 싶어 불러보았지만, 강전은 리현의 앞에 떨어진 도자기 조각을 주울 뿐이었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군요."
강전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리현은 생각했다.
'강전아. 그런 다정하고 기품 있는 말투는 너랑 정말 안 어울린다. 밥맛 떨어져.'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덜렁대다가 도자기를… 정말 죄송합니다."
"다치지 않았으면 된 거지요. 사람 목숨보다 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짜 밥맛 떨어져, 최강전.'
리현은 온몸에 돋아나는 닭살을 긁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어느덧 다가온 공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치우도록 하지요. 가요, 여보."
"아, 그러지."
강전이 리현을 쳐다봤다.
리현도 강전을 쳐다봤다.
그리고 공주는 그런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매가 약간 사납기는 하지만 어디 가도 눈에 띌 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이 이름 모를 시녀.
처음 봤을 때부터 강전에게 눈길을 주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던 강전이 이 시녀에게만은 관심을 보인다.
아까부터 마주칠 때마다 강전이 뚫어져라 이 시녀를 응시하는 걸 알고 있었다.
'거슬려.'
공주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강전의 시선이 이런 미천한 시녀 따위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무척 자존심 상하게 만들었다.
'감히 날 두고… 이딴 시녀 따위에게…'
도자기 깨지는 소리에 슬쩍 뒤를 돌아본 강전은 그것을 깨뜨린 사람이 리현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공주의 손을 뿌리치고 리현에게 달려갔다.
그것이 공주를 무척 화나게 만들었다.
"가요, 여보. 정말 늦겠어요."
"그래."
강전은 공주를 따라가면서도 못내 리현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머리가 아프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리현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두통이 굉장히 심해서 견딜 수 없다.
그렇게 견딜 수 없는데도 그 날카로운 눈빛을 한 번 더 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생긴다.
공주의 옆에 서서 걸어가는 중에도 자신의 목덜미에 리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머리는 몹시 아프지만, 그 시선이 닿아있다는 것이 익숙한 쾌감을 준다.
어느 날엔가 성안에 있는 침대에서 눈을 뜨고, 자신이 기억 상실이라는 것을 알고,
공주의 남편이었다는 것을 안 후, 처음으로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야 있어야 할 곳에 온 듯한 편안한 기분.
공주의 손이 강전의 팔을 꽉 잡았다.
"사랑해요."
"응, 나도…"
강전은 무의미하게 중얼거리면서, 어떻게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그 시녀를
자신의 곁에 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때, 리현아? 최강전 마음 읽을 수 있겠냐? 저 새끼는 저렇게 좋은 데 앉아서 잘 먹고 있는데 말이지.
대체 이게 웬 고생인지…"
왕과 그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동안,
우준 일행은 부엌에서 불편한 자세로 앉아 남은 음식을 먹었다.
"마음은 잘 읽히지 않아. 눈빛도 읽을 수가 없고…
아까 나를 알아챈 건가 싶기도 했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공주는?"
"공주 마음도 안 읽혀."
"그럼 공주가 뭔가 수를 쓴 거겠네. 주술 같은 거 할 줄 아는 계집인가?"
해윤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왕은 참 좋구나. 남은 음식들조차도 이렇게 맛있으니까…"
"가인이 네가 원한다면 내가 이 성을 차지해주겠어."
해윤이 얼른 표정을 바꾸어 가인에게 들러붙었다.
"저리 좀 비켜, 이 호모 변태야!"
"무슨 소리!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이 너인 거지, 원래부터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구.
물론 우준이처럼 섹시한 눈빛을 가진 녀석이라면 혹할 법도 하지만…"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우준은 아까부터 자꾸 자신에게 추근대는 경비병이라든지, 신하들 때문에 무척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치마 안에 몰래 숨겨둔 스웨인으로 손이 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하, 하, 하. 무서운 녀석."
이글이글 타오르는 우준의 눈빛에 질린 해윤이 어색하니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저…"
어린 시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네?"
그들은 얼른 목소리를 바꾸고 어린 시녀를 쳐다봤다.
"공주님께서 좀 보시자고…"
"우리를요?"
"아니요. 리현님만…"
"나요?"
리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어린 시녀가 흠칫 했다.
"네, 잠깐 보시자고 하시던데…"
"아, 그래요. 어디로 가면 되죠?"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어린 시녀가 앞장섰다.
일행이 걱정스럽게 리현을 쳐다봤지만 리현은 씩 웃어 보이고는 어린 시녀를 따라갔다.
공주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좀 불안하긴 하지만 도이넨을 잘 감춰두고 있으니
여차하면 공주를 인질로라도 삼아서 이 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공주는 넓은 방에서 리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를 하는 중에 온 공주는 아름다운 분홍빛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어린 시녀는 공주에게 인사를 한 후에 물러났다.
공주는 한동안 말없이 리현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리현은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지만 계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문도 닫혀 있는데 찬공기가 쌩쌩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로 봐서는
공주가 굉장히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중이라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무지 공주의 마음은 읽히지 않았다.
"나의 남편이…"
이윽고 공주가 입을 열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여서 리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을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군요."
"아…"
리현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공주는 부드러운 눈으로 리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남편이 얼마 전 사고를 당한 후에 감정을 잃은 것 같아서 많이 불안했어요."
"사고요?"
"네. 배를 타고 낚시를 나간 중에 폭우가 쏟아져서 물에 빠지고 말았지요.
구출이 늦어져서 조금… 건강상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원인도 아직 알 수 없고…"
'물에 빠진 건 진짜겠지만… 원래부터 자기 남편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군.
저 공주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그이가 감정을 되찾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어요.
아름다운 여성, 귀여운 동물, 즐거운 놀이, 자극적인 게임…
수많은 것들을 그이에게 경험하도록 했지만 그이는 아직도 감정을 잃은 상태예요.
그런데 당신을 보는 그이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보고,
당신이라면 내 남편을 고쳐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아…"
"그래서 말인데… 지금 제 남편을 이 방으로 부를 테니,
그 이와 하룻밤의 동침을 해주면 안 될까요?"
"네에?"
리현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 하지만… 공주님의 남편이신데… 제, 제가 어찌…"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괜찮아요."
공주가 슬픔 담긴 미소를 지었다.
등잔에서 흘러나오는 어스레한 빛에 잠겨 더욱 슬퍼 보였다.
"그이의 감정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괜찮아요."
너무도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기에, 리현은 좀 당황했다.
공주가 진심으로 강전을 사랑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사실은 좋은 기회다.
공주가 계속 붙어있어서 강전과 이야기할 기회를 잡지 못했는데,
설마 동침을 시키면서까지 공주가 옆에 붙어있을 일은 없지 않겠는가.
강전과 둘이 있게 되면 강전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현이 아니었다.
리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한 척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공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어찌 미천한 제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명대로 하겠습니다."
공주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곧… 제 남편을 이곳으로 올려보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