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우준 일행은 점점 더 신의 둥지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그들의 앞에는 장애물이 없다.
2, 3일 정도 걷기만 하면 신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잘 된 일인데, 그들에게 잘 된 일인데 이 마음의 답답함은 무엇인가.
저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소망?
그래, 아마 그런 소망도 있을 테지만 그 소망보다 더 답답하게 짓누르는 이 덩어리는 불안함일 것이다.
저들을 이 성으로 들이면 안 된다는 불안.
그들을 멀리 떨어뜨려 놔야 한다는 생각에 이토록 가슴이 답답한 것이리라.
브리엔은 주먹을 꽉 쥐고 신의 옆에 서서 거울 안의 우준 일행을 지켜봤다.
어찌하여 저들은 저토록 아름다운 것인가.
제대로 씻지 못해 지저분한데도 주위를 환하게 만들 만큼 밝아 보이는 것인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과 함께 있었을 때는 내 모습도 저토록 빛이 났을까?'
브리엔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 신의 옆에 머무르며 수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꼽을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토록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은 처음이다.
이 신의 계획이란 무엇인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한 나라까지도 망하게 하는 이 신이
우준 일행에 대해 계획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못돼먹은 신이 순순히 우준 일행의 저주를 풀어줄 리는 없다.
브리엔을 시켜 그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오도록 요구했으면서도 결국 차희를 죽게 만들었다.
어째서지?
반복되는 질문과 반복되는 대답.
브리엔에게 한 가닥 빛이 보이는 듯 했다.
무언가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 그러나 또렷하게 존재하는 답이 있었다.
신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래, 그러고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신"
지금 이 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 "신"이라고들 한다.
아마도 이 "신"이라는 자가 인간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정말인가.
이 남자가 "신"이란 말인가.
전지전능하며 세계를 창조한 "신"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이 신이라는 남자는 브리엔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브리엔은 신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브리엔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까 봐 언제나 노심초사하고 있다.
신이 그런 존재인가?
게다가 브리엔은 자신이 가진 힘이 이 신을 능가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런데 신이라고?'
브리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 것 같다.
그 한 줄기의 빛을 손으로 잡은 것 같다.
"풀어줄 생각이 없는 거군."
브리엔이 중얼거렸다.
"신"은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브리엔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브리엔의 차가운 눈동자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브리엔은 당장이라도 신의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우준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의 저주 받은 운명을 풀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좌절할 것인가.
특히, 그들을 이 세계로 이끌어 함께 해온 우준이 얼마나 괴로워 할 것인가.
그들이 절망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 부근이 꽉 막힌 듯 아파 와서
브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이 이 성에 도착하는 순간, 날 죽여준다는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신이 빙그레 웃었다.
"물론이지."
"정말 날 죽일 수는 있는 건가?"
"당연하잖아, 그런 건. 내가 못 하는 게 뭐가 있겠어?"
하지만 브리엔은 더 이상 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오래 살았을 뿐인 이 자는 브리엔을 죽일 수 있는 방법 따위는 모른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자는 신이 아니다.
그저 아주 오래 살아온, 그래서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닌, 그런 존재일 뿐이다.
어찌 보면 브리엔과 같은…
문득 괴물 두더지를 만났을 때,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웃음이 난다.
… 으앗! 이 세계는 오래 살기만 하면 능력을 갖게 되는 거냐? …
그 말이 딱 맞는 말.
오래 살다 보니 엄청난 힘을 갖게 되어버린 이 남자는 외로웠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브리엔은 이 남자가 하는 짓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홀로 이 성에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수많은 세월을 살며 느꼈을 권태로움과 고독.
그것에 몸부림치다가 생각해낸 방법이 인간들을 괴롭히고 그들이 발버둥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래, 당신도 외로웠던 거군.'
그렇다고 해서 그를 용서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브리엔을 기만했고, 우준 일행에게 헛고생을 시켰다.
'헛고생으로 만들 수는 없어.'
우준 일행이 즐거운 표정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그들은 막 브리엔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브리엔이 많이 외롭지 않을까?"
"우리랑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그 녀석은 어디에 가서 안 나타나는 거야? 슬슬 걱정되지 않냐?"
"신이 사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만나고 싶은데… 원래 세계로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더 보고 싶어."
"인사도 제대로 못 했고…"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따뜻하다.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그저 함께 있었을 뿐인데, 그들은 브리엔을 자신들의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들과 다시 함께 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자꾸만 깊이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었다.
"저 놈들이…"
브리엔은 신을 구슬릴 방법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이 성에 도착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죽는 거냐?"
"그래."
신이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신은 브리엔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브리엔의 한 쪽 눈썹이 매섭게 올라간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성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저놈들은 온몸이 마비되어 발끝부터 서서히 돌로 변할 거다.
그리고 나에게 속아 이 성까지 온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자신들을 이곳까지 이끌어온 우준이라는 놈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굳어버리겠지. 심장까지 딱딱하게 굳어버리면, 그 때는 손쓸 수 없게 돼.
죽는 거지. 저주하고 미워하면서 말이야."
"그래?"
브리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신의 속내를 알아야 했다.
그것만이 우준 일행을 도울 길이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대로 또 다시 홀로 남아, 영원과 같은 고독 속에 묻혀 지내게 되더라도
우준 일행은 구하고 싶었다.
그들이 짧은 삶을 살며 또 다시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저들의 삶이 이대로 끝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내가 또 외로움에 갇혀, 영원히 너희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야하더라도…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너희들이 벌써 죽는 건 싫다.'
브리엔은 이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난… 너희들을 사랑해.'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야. 당신, 저 애들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아는 거야?"
"아니."
신이 딱 잘라 대답했다.
브리엔의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들은 신은 브리엔이 더 이상 저들의 편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내가 저들에게 건 저주는 이 세계의 나무와 땅과 흙과 하늘, 그리고 물의 힘을 빌어서 건 저주거든.
내가 죽는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죽게 된다 하더라도… 이 세계가 멸망해서 사라지지 않는 한은
저들에게 걸린 저주도 사라지지 않아. 17살에 죽는다는 말은 저들을 재촉하기 위한 나의 거짓말이긴 했지만,
다른 저주들은 계속될걸. 뭐, 저들이 애를 낳지 않고 죽는다면 저주가 더 이상
대를 이어 물려받게 되지는 않겠지만 저들은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해야 돼.
하지만 상관없잖아. 저들의 삶은 짧으니까."
'짧으니까 더 소중한 거다.'
브리엔은 신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아무튼 저놈들도 대단한 놈들이야. 여기까지 온 경우는 드문데… 내 방해를 받으면서도 고작해야
일행 한 명 죽은 것뿐이라니…"
'고작이 아니야. 저들에게는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을 거야.'
브리엔은 차희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던 일행의 슬픈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브리엔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것만 질문하고 나면 끝이다.
이 빌어먹을 연극도 끝내는 거다.
"저 녀석들… 자기들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거냐?"
"그거? 강우준 목에 걸린 펜던트를 부수면 돼. 그게 부서지면 저들은 자기들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지."
"그렇다면 넌 채민의 도플갱어를 어떤 방법을 써서 저들의 세계로 보냈지?"
"여기…"
신이 씩 웃으며 우준 일행을 보여주는 거울을 손으로 툭툭 쳤다.
"이 거울을 통해서지. 거울로 저들이 사는 세계를 비추고 손을 밀어넣으면 그곳으로 갈 수 있거든.
펜던트도 결국은 이 거울의 한 조각으로 만든 거니까."
그러고 보니, 거울의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떨어져나간 부분이 있다.
브리엔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이제 끝.'
브리엔은 손을 스르륵 올렸다.
'너희들을 사랑하니까…'
브리엔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길을 택하겠어.'
살의를 느낀 신이 고개를 번쩍 들어 브리엔의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떠올랐다.
"뭐, 뭘 하려는… 거지?"
"당신은 신 따위가 아니야."
"뭐, 뭐라고?"
"아마 저들도 슬슬 깨닫고 있겠지. 진짜 신이라면 인간이 행복해지기를 바랄 것이라는 걸.
당신은 인간들이 서로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을 즐겨. 그러니까 당신은 신 따위가 아니야."
"그, 그게 무슨! 너, 저들이랑 다니다가 인간의 마음이 전염되기라도 한 거냐?
저렇게 미천하고 나약한 인간 따위를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된 거냐?"
"당신이 날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
신이라 불리는 그 남자가 움찔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죽일 생각이야. 그리고 저들을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낼 생각이야."
"흥. 저놈들에게 단단히 빠져버렸군.
하지만 너 때문에 자기들의 저주를 풀어줄 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면,
네가 사랑해마지 않는 저놈들은 널 원망하고 저주할 거다. 알아?"
"글쎄… 과연 저 애들이 남을 저주하고 미워할까? 아니, 그건 모를 일이지. 저 애들도 인간이니까.
하지만… 설령 저들이 날 원망하고 저주하고 미워한다 하더라도…"
브리엔이 슬프게 웃었다.
너무 슬퍼서 그걸 보는 "신"조차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난 저 녀석들을 위해서 악인이 되는 걸 선택하겠어."
"설마 너…"
"내가 모든 걸 덮어쓰고 저 녀석들을 원래 세계로 보낸다면… 그래, 저 애들은 날 원망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난 저 애들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좀 더 웃었으면 좋겠거든."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빌미를 주면 돼. 뭐, 이 일은 전부 내가 꾸민 일이고, 진짜 저주를 풀고 싶으면 다른 신을 찾아라.
이 정도의 빌미? 그런다면 그 애들은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한 여행을 또 해나가게 될 거야.
그러면 그 애들은 또 여행할 수 있겠지."
"너… 네가 얼마나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괜찮아."
브리엔의 시선이 잠시 거울 위에 놓였다.
웃고 있는 우준 일행.
기분 좋다.
저들의 저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래, 난 괜찮아. 난 저 애들을 사랑하니까."
"안 돼!"
브리엔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천천히, 그러나 신이 보기에는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브리엔의 날카로운 손톱 끝이 신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경동맥을 움켜쥐었다.
그 어떤 것도 뚫을 수 없던 신의 피부는 마치 두부처럼 뜯겨나갔다.
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브리엔을 쳐다봤다.
말은 못 하지만 살려달라는 간절한 희망이 눈에 담겼다.
그러나 브리엔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동정도, 용서도 담기지 않았다.
브리엔은 더 이상 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우준 일행을 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싫다고 했지. 너희들이 싫어하는 거라면 나도 싫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었던 신의 생명이 브리엔의 한 손에 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브리엔의 얼굴에는 그 어떤 승리감도, 기쁨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한 번만큼은 내가 나쁜 짓 좀 해야겠다. 미안."
브리엔이 손에 힘을 주자, 위태롭게 걸려있던 경동맥이 끊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브리엔의 옷에도, 얼굴에도 붉고 뜨뜻한 피가 튀었다.
브리엔은 가만히 서서 신이라 불리웠던 남자의 숨이 서서히 멎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신은 원망스러운 듯 브리엔을 올려다보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오래 살고도 더 살고 싶었단 말인가? 인간들을 괴롭히면서?"
브리엔이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퉁기자 몸에 묻었던 비릿한 붉은 피가 사라지고
처음과 같이 깨끗하게 돌아왔다.
"난 누구든 나를 좀 죽여줬으면 좋겠는데…"
브리엔은 방금 전까지 신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거울을 응시했다.
온갖 능력을 가지고 인간들에게 악질의 장난을 쳐댔던 신은
평범한 인간과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죽었다고 해서 가루가 되어 날아가지도, 위대한 석상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유기체, 딱 그것이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리라.
"적어도… 니들만큼은 원래의 세계로 보내주겠어."
언제나 그렇듯 그들은 웃고 있었고, 그걸 보는 브리엔은 괴로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에 보이는 커다란 성을 보며 우준 일행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신을 만나는 건가? 이 여행도 끝이라는 거군. 조금 아쉬운걸."
해윤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강전과 합류한 후로는 이렇다할 사건에 휘말리지 않아서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걸어오면서 그들은 여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성에 가까이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풍경과 성의 모습에 그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우준은 그들을 무사히 이곳까지 데리고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우준은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다.
다리는 많이 아프지만 성을 보는 순간 힘든 것도 잊고 열심히 걸었다.
이제 몇 분만 더 걸어가면 성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길었던 여행은 끝이 나겠지.
그 때, 우준 일행의 앞을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숨어 있던 적인 줄 알고 긴장하며 싸울 준비를 하던 그들은 낯익은, 보고 싶었던 얼굴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브리엔이었다.
"브리엔!"
"야, 야! 너 먼저 와 있었던 거냐? 우리 진짜 걱정했다구."
"빨리 올 수 있었으면 같이 좀 데려갈 것이지."
"우리가 어떤 경험을 했는 줄 아냐?"
모두가 신나서 앞다투어 이야기했다.
브리엔은 울고 싶었다.
가슴에 생기는 괴로운 통증이 가시질 않는다.
이별.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해야만 했다.
주먹을 꽉 쥐고 될 수 있도록 표정을 담지 않으려 애쓰며 한때나마 동료였던,
앞으로도 쭉 동료이고 싶은 이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자세히 쳐다본다.
그들의 얼굴을 잊지 않도록, 또 다시 살아가야 할 기나긴 시간 동안 그들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도록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는다.
"잘 도착했군."
"당근이지, 인마."
강전이 기분 좋게 웃으며 브리엔의 어깨를 탁 쳤다.
애정 어린 그 감촉도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 다시는 느끼지 못할 이 순간을 남김 없이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브리엔, 너도 우리랑 같이 우리 세계로 가지 않을래?"
리현의 말에 브리엔의 표정이 구겨졌다.
표정을 담지 않으려고 했는데 괴로움이 얼굴에 드러난다.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냉랭한 조소를 가득 머금고 리현을 응시하다가 우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 눈동자가 브리엔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아, 시선을 잘못 옮긴 모양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준과는 눈이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 정직하고 다정한 눈빛을 보고 슬픔을 감출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우준에게 말했다.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 그것 덕분에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고 했지?"
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줘 봐."
이유를 물어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우준은 의심하는 기색 없이 브리엔에게 펜던트를 건넸다.
브리엔은 그것을 받아들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일행이 말을 멈추고 브리엔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
브리엔을 믿고 있는 그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잘 해줬군."
브리엔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한다.
"이 펜던트가 제 역할을 잘 해줬어."
"그게 무슨 말이야, 브리엔?"
채민의 목소리에 브리엔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채민의 목소리도 들으면 안 된다.
저 선량한 목소리는 언제나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와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아직도 모르겠냐, 머저리들?"
브리엔이 한 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이게 모두 내가 꾸민 일이라는 걸?"
"……!"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쓴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말을 잇는다.
"내가 여기서 오래 살다보니 어찌나 심심하던지… 인간 몇 명 골려주자는 생각은 들었는데,
이 세계의 인간들은 날 믿지 않거든. 그래서 다른 세계의 머저리들 중에 날 즐겁게 해줄만한 사람이 있나 싶어서
찾아 봤더니, 니들이 딱 보이더란 말이지."
"……"
"뭐, 혹시나 싶어서 거울의 요정을 시켜 니들을 꼬여냈어. 니들은 미끼를 딱 물어버렸고 말이야.
거울로 니들 하는 꼴을 지켜봤는데, 어지간히 약해빠졌어야지. 잘못하다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죽어버릴 것 같아서 잠깐 같이 다녀줬더니 아주 그냥 동료라도 된 듯이 날 믿어버리더군."
"브리엔…"
채민의 눈을 피했다.
"어쨌든 즐거웠어. 아, 그리고 니들 저주 말이야. 그건 풀어줄 만한 다른 능력 있는 녀석에게
가서 부탁해야 할거다. 중요한 건, 이 세계에는 니들의 저주를 풀어줄 만한 능력 있는 녀석이 없다는 거지."
"그럼… 우리가 한 여행은… 전부… 뭐라는 거냐?"
강전이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물었다.
"모르겠냐?"
브리엔이 씩 웃으며 펜던트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헛.고.생.이었다는 거다, 멍청이들아."
"브리엔, 너!"
"안타깝게도 난 니들한테 저주를 건 신이 아니야. 뭐, 니들 덕분에 요 몇 달 동안 정말 즐거웠다."
"자, 잠깐!"
펜던트를 부러뜨리려던 브리엔은 다급한 채민의 부름에 자기도 모르게 멈칫 했다.
채민의 커다란 눈이 브리엔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저 눈을 봐서는 안 돼.'
브리엔은 손으로 외치며 펜던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거짓말쟁이!"
"그래, 맞아. 난 거짓말쟁이지. 하지만 니들도 나만큼 오래 살아봐. 무진장 심심해서 누구라도
괴롭히지 않고서는 살 맛이 안 나거든.
아무튼 니들 여행은 여기서 끝이다."
"그게 아니야, 브리엔! 넌… 넌!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잖아!"
채민의 절규가 브리엔의 마음을 잡아주었다.
'그래, 맞아. 니들은 끝까지 날 의심하지 않을 테지. 그래도 가라.
내가 잔인하고 잔혹한, 인정머리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어딘가에서 너희들의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걸 믿으면서 살아라.
그게 내가 너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너무 남을 믿지 마, 현채민.
니들은 나한테 속은 거야. 아주 철저하게 헛고생을 해가면서…"
"야, 이 박쥐 새끼야!"
강전이 버럭 외쳤다.
브리엔은 놀리듯 웃었다.
"바이바이."
브리엔의 손에 있던 펜던트가 반으로 쪼개어졌다.
쪼개진 펜던트에서 환한 빛이 퍼져나갔다.
너무나 밝아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우준 일행은 눈을 질끈 감았고, 브리엔도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들려 있던 펜던트 조각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빛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빛이 가신 후 한참 동안 브리엔은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워서 꽉 감은 채로 아주 오랫동안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감고 있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눈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