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환한 빛에 휩싸인 우준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감았는데도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왔다.
얼마나 감고 있었을까.
묘한 느낌이 등에 닿았다.
푹신하고 편안한, 조금은 따뜻하고 익숙한 느낌.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믿고 싶지 않아서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닿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을, 우준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울고 싶다.
하지만 확인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오랫동안 봐왔던 우준의 방 천장.
나무로 만들어진 갈색 천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책상과 컴퓨터가 보인다.
그대로다.
모든 것이 여행을 떠나기 전과 똑같다.
'설마… 이 모든 게 꿈?'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했던 여행이 꿈이었던 거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갈 곳을 잃은 마음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붙잡을 힘조차 없다.
'난 꿈을 꾸면서… 꿈 속의 녀석들과 정이 들고, 꿈 속의 여자를 사랑하게 된 건가?'
믿고 싶지 않다.
그 모든 것이 꿈이라면 그건 정말 절망적이다.
하지만 꿈이 아니어도 절망적인 일이다.
결국 우준은 그들을 위해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브리엔의 말대로 1년 동안 그들에게 헛고생만 시킨 셈이 된다.
과연 어떤 게 더 낫다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을 헛고생시킨 것?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
콰앙-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비가 서 있다.
그토록 그리웠던, 많은 의지가 되었던 비.
하지만 지금은 채민이 그립다.
여행 중에 비를 그리워하고 원했던 것보다 채민을 더 간절히 원한다.
"야, 이 새끼야! 승호 삼촌이 네가 돌아온 것 같다고 해서 와봤는데 진짜로 돌아왔네!
왔으면 나한테 와서 먼저 말을 해야지, 여기 쳐누워서 뭘 하고 자빠진 거냐? 앙?
씨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야, 야! 옷은 그게 뭐야? 왜 그렇게 더러워?
너 어디 가서 구걸이라도 하고 다닌 거냐?"
'꿈이… 아니구나…'
긴장이 풀리는 순간,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치솟았다.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참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만들어냈다.
신이 사는 성에 닿기 전, 곧 있을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떠들던 동료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그들의 희망을 짓밟아버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나았을 텐데…
괜히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고생만 하게 만들고 아무 것도 주지 못했다.
비가 우준의 옆에 털썩 앉으며 외쳤다.
"이 자식아! 말을 좀 해봐, 말을! 너 대체 어디에 갔던 거야? 언제 돌아왔어?
오늘 온 거냐? 도대체 왜 말을 안 하고 그렇게 멍……… 으아앗! 야, 야! 왜 그래? 너 왜 울어?"
우준은 견디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소꿉친구인 비로서는 우준이 엉엉 우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기에 무척 당황했다.
눈을 크게 뜨고 우준을 쳐다봤다.
언제나 아무 생각 없는 듯 행동하던 우준이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괴롭게 흐느끼는 모습이
비의 가슴까지 아프게 만들었다.
비는 입을 다물고 우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슬픔이 전해져온다.
비는 짐작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비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비는 눈을 감고 우준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만들었다.
"으… 으흐흐…흑…"
우준은 이를 악 물고 서럽게 흐느꼈다.
"뭐…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울 정도면 무지 괴로운 일인가 보다.
실컷 울어, 인마. 실컷 울고, 토할 정도로 실컷 울고… 괜찮아지면 여행 얘기해 줘.
뭐가 문제인지 같이 찾아보자. 그러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맘놓고 실컷 울어.
내 앞에서 참을 게 뭐가 있냐? 목욕도 같이 했던 사이인데…"
"비야…"
"그래, 그래. 나 네 옆에 있다."
"비야…"
"그래, 우준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아, 그래. 누군지 몰라도 운이 되게 없구나."
"그런데… 그 녀석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어."
"……"
"그래서… 그 녀석은 아마 앞으로 평생을… 괴롭게 살아야 할거야."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냐, 너?"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어, 아무 것도…"
넋이 나간 듯,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우준의 머리를 꽉 감싸안고 비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애가 죽은 게 아니라면 앞으로 해주면 되지.
그 애가 평생 괴로울 것 같으면, 네가 가서 평생 행복하게 해주면 되지. 그런데 말이야.
그 애가 너한테 원한 게 대체 뭐였는데?"
"……"
말문이 막혔다.
"그 애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네 멋대로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네, 있네 지껄이는 거라면,
네 마음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죽을 때까지 패줄 거니까, 각오하고 있어라."
"난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에게서 떨어져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온몸에 난 크고 작은 흉터가 보인다.
우준이 여행 중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우준은 누운 채로 눈을 감고 말했다.
"그 애들은 날 원망할 거다. 그 애들은 아마도 날 원망할 거야."
며칠 동안 우준은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걱정을 하며 찾아왔지만 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듯 공허한 눈동자를 허공에 두고 있어서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씨 좋은 날, 비와 친구들은 집 근처 공원에 앉아 우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생각엔 말이지…"
비가 심각하게 말했다.
"우준이 그 새끼가 어디 가서 굉장히 많은 여자들을 울리고 다닌 것 같아."
"엥? 왜?"
"우준이 놈이 여행에서 돌아온 날, 뭐라고 혼잣말을 지껄이는 걸 들었는데…
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던가? 아무튼 그러는 거. 근데 또 갑자기 그 녀석들이 자기를 원망할 거래.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울렸으면 그런 걱정을 하겠냐?"
"호오… 우준이가 그랬단 말이야?"
갑자기 끼어 드는 목소리에 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씨바. 누가 감히 내가 말하는데 끼어 드는 거냐? 앙? 죽고 싶냐?"
휙 돌아본 비의 눈에,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여자 둘에, 남자 넷.
"니들 뭐야?"
"그 거친 말투를 들으니, 우준이가 말하던 '비'라는 애가 틀림없는 것 같네. 맞지, 비?"
게중에 눈이 크고 착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명랑하게 말했다.
"엥? 날 어떻게 알아?"
"우준이가 정말 많이 얘기했거든. 반가워. 정말 만나보고 싶었어."
"니들은 뭔데?"
"우리는 우준이랑 같이 여행했던 애들이야."
"아!"
비와 친구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들에게도 여기저기 흉터가 보인다.
우준만큼 심한 것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고생 꽤나 하고 온 듯한 모습이다.
"뭐야? 여긴 왜 왔냐? 강우준한테 원망하려고 찾아온 거냐?"
비가 날카롭게 묻자 강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린 우준이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 그리고… 그 녀석이 정말 많이 보고 싶어서 왔어."
"그래?"
비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봤다.
그리고 채민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너냐? 우준이가 사랑한다는 그 애가?"
채민이 웃었다.
"응, 나야."
"그래? 엄청 불행한 기집애구만."
"응, 맞아. 난 불행해."
"하지만 넌 그다지 불행해 보이지 않는데?"
"응, 맞아. 지금은 행복하거든. 우준이를 만나기 전에는 불행했고, 그래서 죽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니야. 이젠 행복해서 살고 싶어. 그런데 우준이를 만나면 훨씬 더 행복할 것 같아.
우리, 우준이를 만나볼 수 있을까?"
비가 씩 웃었다.
"그래, 좋아. 안내해주지. 하지만 그 녀석 지금 꼴이 말이 아니니까 감안하고 가라.
그 새끼 요새 토끼가 되려는 생각인지 당근만 먹어대고 있거덩."
"당근?"
"앙."
비의 뒤를 따라가며 그들은 생각했다.
우준은 역시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는 애라고.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던 우준은 누군가가 시끌벅적하게 집으로 들어오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무런 표정 없이 앉아서 허공을 응시했다.
허공에 자신이 가지고 싶은 무엇이라도 있다는 듯이.
"우준아!"
귀에 익은 목소리에 우준이 벌떡 일어났다.
우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자 비와 친구들은 신기한 듯 우준을 쳐다봤다.
지금껏 우준의 얼굴에 그토록 표정이 담기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우준아."
채민이 웃으며 우준에게 다가갔다.
"채민아."
"네 눈에는 채민이만 보이고 우리는 안 보이냐?"
강전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얘들아…"
"싸잡아서 얘들이라고 칭하지 말고, 우리도 채민이처럼 애정을 담아서 이름을 불러달라구."
리현의 말에 우준이 천천히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리현아. 강전아. 해윤아. 가인아. 비인아."
"그래, 강우준."
"우리 왔다."
"난…"
우준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진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몇 번이고 입만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너 말이야. 우리들 찾아서 여행가자고 하더니 돌아온 후로는 우리들을 찾아오지도 않고…"
"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고 있지만 우리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해서
찾느라고 엄청 고생했다구. 비인이 녀석이 서울을 샅샅이 뒤져서 널 찾아냈어."
"우리가 이렇게 고생했는데도 네놈은 집에 틀어박혀서 당근이나 먹어대고 있었단 말이야?"
그들이 한 마디씩 하자, 우준이 울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너희들을 어떤 얼굴로 봐야할지 알 수 없었어. 난… 너희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너희들의 아무 것도 바꾸어주지 못해서…"
"하긴… 우리 저주 풀어주겠다고 여행을 떠났는데, 아무 것도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바로 괴상한 섬으로 떨어지긴 했지."
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응. 그 때 만났던 각호는 정말 초괴물이었어. 아주 그냥 죽는 줄 알았다니까…"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는 어떻고…"
"야, 야. 해적선도 장난 아니었잖아."
"그것뿐이냐? 웬 난폭한 왕을 만나지는 않나, 어마어마하게 큰 쥐랑 모기들을 보지 않나."
"애들을 먹어치우는 식인 유괴범도 만나게 만들고…"
"채민이는 발목이 잘릴 뻔했고…"
"수많은 일 겪으면서 신의 성에 도착했더니, 브리엔 녀석이 저주 따위 못 풀어준다면서
헛고생이었다고 우리를 원래 세계로 보내버렸지."
"눈 딱 뜨니까 집 침대 위였는데,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넌 그나마 낫지. 난 화장실이었다. 눈 뜨니까 화장실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구."
그들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우준의 표정은 점점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들이 자신이 질책하고 원망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동료들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그들은 모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푸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적인 웃음이 아닌, 진짜로 즐겁다는 듯한 웃음.
우준은 그들이 왜 웃는 건지 몰랐다.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던 그들은 미소가 한가득 담긴 얼굴로 우준을 쳐다봤다.
그들의 눈에는 질책이나 원망 따위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진짜로 기분 좋게, 다정하게 우준을 쳐다봤다.
"즐거웠어."
"응, 맞아."
"우리 그 모든 게 너무 즐거웠어. 진짜 재미 만빵이었다구."
"너무 즐거워서 그 때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 이 세상에 사는 어느 누가 그런 모험을 해봤겠냐?"
"아무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커다란 뿔을 가진 호랑이를 만나거나
어마어마한 크기의 모기떼를 보거나 흡혈귀 친구를 가져본 적은 없을걸."
"그래서 말이지, 우리가 널 미친 듯이 찾은 건…"
채민이 앞으로 나서서 우준을 올려다 보며 빙긋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우준아. 우리에게 그렇게 즐거운 모험을 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얘들아…"
강전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처음에는 무지 화가 났지. 짜증도 나고… 화장실 벽을 다 때려부수면서 짜증냈어.
대체 뭘 한 건가… 우리가 속은 건가… 우리의 1년을 완전 헛고생하며 보낸 건가…
그런데 말이야. 계속 생각나는 거야. 대체 우리가 뭘 했는지가."
"우리는 모험을 즐겼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겨보기도 했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힘이 남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고…"
"무엇보다… 친구를 만났어. 서로의 이상한 능력에 대해 깊이 이해해주는 친구."
"그거면 된 거잖아."
"그래서 고마워, 우준아."
"나도…"
우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우준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고맙다, 정말…"
"야, 야. 네가 왜 고개를 숙여. 너한테 고개를 숙여서 인사해야 할 것은 우리인데…"
강전이 얼른 우준의 어깨를 잡아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강전은 친구들과 눈을 맞춘 후, 일제히 우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이 절을 하며 외쳤다.
"고맙습니다!"
우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우준도 소파에서 내려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맞절을 했다.
"나도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