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89화 (89/91)

-89-

모두가 떠났다.

브리엔은 바닥에 떨어진 인어의 검과 스웨인을 응시했다.

두 개의 검만이 지금껏 브리엔의 마음을 움직였던 그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콧등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옥죄었다.

허파가 짓눌려 간신히 숨을 쉬었다.

'그 애들은 날 미워해. 날 원망하고 저주하겠지.'

슬픔이 브리엔을 뒤덮었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슬픔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잘근 깨물고 멍하니 서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고 있는 중인데도 하늘은 변함 없이 푸르고

나무들은 언제나와 같이 싱싱하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째서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왜 그들만 내 곁에 없는 거지?'

크나큰 상실감에 온몸이 떨려온다.

세계로 눈을 돌렸다.

신이라고 불리웠던, 그러나 신이 아니었던 남자가 말했다.

그들의 저주는 이곳 자연의 힘을 빌어서 걸어놓은 저주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는 한 풀리지 않을 거라고…

브리엔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멸망시키면 되는 거잖아.'

싸늘한 눈으로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계를 둘러본다.

그들이 없기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세계.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남지 않도록 싸그리 멸망시키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그 녀석들에게 걸린 저주도 깨끗이 사라지고, 그 녀석들은 자유가 되는 거잖아. 안 그래?'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많은 시간 동안 하늘을 날면서도 이 세계를 유심히 눈 여겨 본 것은 처음이다.

흐르는 커다란 강의 근처에 커다란 도시가 있고, 그 주위에 숲이 있다.

강의 끝에는 바다가 있고, 또 어딘가에는 섬이 있겠지.

중요한 것은, 보고 있는 그 어디에도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 모두 없애주겠어.'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마음을 먹는다면 이 세계 정도는 멸망시키기에 충분하다.

세계가 소멸함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마저 사라진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어차피 죽음을 갈망했으니 그것으로 된 거다.

한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일단은 눈에 보이는 저 나라부터…'

하나하나 파괴시키리라 결심하며 힘을 모으는 순간, 따사로운 햇살이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햇살의 따뜻함은 우준을 떠오르게 했다.

동상을 입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브리엔의 손을 굳게 잡았던,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던 그 손. 그리고 다정한 눈동자.

결코 잊지 못할 그 느낌이 떠올라서 브리엔은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말라있던 눈물이 무게를 지녔다.

부드러운 볼을 미끄러져 저 아래 바닥을 향해 낙하한다.

눈물은 브리엔을 녹여버리기라도 할 듯, 뜨겁게 볼을 어루만졌다.

"이런…"

떨어지는 눈물 마냥, 치켜올렸던 브리엔의 손도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이게… 뭐야…"

괴로운 목소리도 바닥으로 흘렀다.

"이게…"

무거운 두 손을 올려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강을 이룰 만큼의 눈물이 비집고 흐른다.

"이게… 뭐야, 정말…"

없앨 수 없다.

저 도시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못한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눈빛 때문이다.

우준의 눈빛.

조금이라도 내가 괴로워할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의 그 눈빛.

그것이 브리엔에게서 힘을 빼앗았다.

"아프잖아…"

우준의 눈빛은 다정했지만, 그것을 떠올리는 지금은 괴롭다.

"정말… 아프잖아…"

그들을 사랑했다.

"아파서… 눈물이 나잖아…"

그들을 사랑한다.

"정말… 이게 뭐냐구우…"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인간들은 짧은 생을 사는 만큼 격한 감정에 휘둘린다.

길게 늘어진 세월 동안 누군가를 이토록 격하게 사랑하리라 예상한 적이 있던가?

없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브리엔은 상상도 못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음을 알았고,

막혀 있던 것이 터질 때면 강한 위력을 보이듯 가둬져 있던 감정이 폭발한 그 역시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

'난 앞으로 영원히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래, 그거면 된 거지.'

신의 성으로 향했다.

'내가 그 애들을 사랑하면 되는 거지. 그 애들이 꼭 나를 사랑해줄 필요는 없는 거야.'

그곳에 있던 거울을 떠올렸다.

'너희들이 날 미워할 테지만, 난 너희들을 사랑하니까… 보고 싶다.'

그 거울의 일부가 우준 일행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오가게 할 수 있었다면

그 거울 역시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브리엔은 여전히 고고하게 놓인 거울을 부여잡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거울. 날 그 애들에게로 보내 줘.'

브리엔은 아주 작은 박쥐로 변하여 조용히 그들을 지켜봤다.

단 한 번도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둠 속에 숨어 한때나마 동료였던, 지금 현재도 사랑해마지 않는 그들을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예상대로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그들이 모습이 브리엔의 가슴을 따뜻하게 밝혀주었다.

혹시라도 헛고생이었던 여행으로 인해 좌절하여 살아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들은 여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웃었고 서로를 믿었다.

본다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사람을 죽여 피를 빠는 일은 관두었다.

이 세계로 오니 "헌혈"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어서 피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봉투에 모아져 있는 피로 허기를 달래며 언제나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브리엔은 착잡하게 지켜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서 견디기 힘들다.

지금까지처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그들은 빠르게 늙어갈 것이다.

그들이 죽을까 봐 브리엔은 언제나 손에 땀을 쥐었다.

그들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불로불사의 연구를 하는 사람들의 자료를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진정한 불노불사를 깨달은 사람은 없었고,

브리엔 역시 소중한 그들에게 불로불사의 몸을 떠맡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겪어봐서 아는데, 불로불사라는 것은 외롭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저주"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도 불로불사의 몸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브리엔은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에 대해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 처음부터 지켜보기로 했으니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채민과 우준이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알았기에

둘의 결혼식을 지켜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강우준 녀석, 늘 그렇게 뜨겁게 현채민을 지켜보더니 결국 열매를 맺는구나.'

리현과 비인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그 이해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음껏 애정 전선을 펼치던 두 사람은 채민과 우준이 결혼하고 1년쯤 후에

같은 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하는 중에, 리현이 딱 한 번 브리엔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빙긋 웃었는데, 브리엔은 자신의 모습을 들킨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브리엔을 발견했다는 그 어떠한 조짐도 없었기에

브리엔은 그 날의 기억이 자신이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인과 해윤은 원래 세계로 돌아온지 1년도 안 되어서 함께 살며 "귀신 퇴치"하는 사업을 벌였다.

알려지지 않은 괴현상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업은 오래 지나지 않아 크게 번창했고

그들은 곧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들의 우정이 몹시 깊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애인 사이냐?"

라고들 질문했다.

그럴 때마다 해윤은

"물론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하다가 가인에게 몇 대 맞곤 했다.

강전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자신의 능력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기에 흥분을 한다고 해서 전기가 뻗어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줄었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실력을 탄탄히 다져 의대에 들어갔고,

의사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서로 바쁜 와중에도 그들은 자주 왕래하며 그 때처럼 즐거운 모습을 브리엔에게 보여주었다.

브리엔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더없이 즐거웠다.

가끔 '나도 저기에 끼일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욕심은 사라졌다.

나이를 먹어 늙어 가는 그들 사이에 변함 없이 10대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브리엔이 낀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테다.

사람들의 시선도 문제지만 아마 그들이 불편할 거다.

자신들의 외모와 맞지 않는 브리엔으로 인해.

그래서 브리엔은 욕심을 버렸다.

또 시간이 흘렀다.

리현과 비인, 채민과 우준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저주를 더 이상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브리엔은 조금 섭섭했다.

혹여 그들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들의 분신을 지켜보며 기나긴 세월 중의 일부를 보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가 없어도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브리엔도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미소가 브리엔에게 기쁨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들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그들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 있다면…

간절하게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은 일어나는 법이라서

브리엔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들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균형을 깨뜨린 것은 리현과 비인이었다.

비인은 여전히 미래를 보고 왔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비인을 믿어주는 동료가 있었기에 미래를 바꾸기도, 바꾸지 못하기도 했다.

바꾸지 못할 때에도 예전과 같은 절망은 하지 않았다.

믿어주는 동료들 덕분이다.

바꾸지 못했지만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동료들이 알기에 비인은 외롭지 않았다.

그들이 45세가 되었을 때, 잠에서 깨어난 비인이 옆에서 잠든 리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체 이탈로 보고 온 끔찍한 참사.

그것을 바꾸려고 하다가는 자신들이 죽을지도 몰랐다.

'이번 일은 나 혼자 해내야 돼. 리현이까지 죽게 만들 수는 없어.'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리현이 비인의 손을 꼭 잡았다.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비인에게, 리현이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 놔두고 혼자서 어디 갈 생각하면 가만 안 둬."

비인은 웃었다.

"그래, 언제까지나 함께 해야지."

죽게 될지도 모르지만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일들이 그렇지 않았던가.

단지 이 사람이 옆에 있다는 확신 하나를 가지고 해냈다.

"무슨 일인데?"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리현도 분명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리현의 어조는 일상을 이야기하듯 단조로워서 비인의 마음까지도 편해졌다.

리현의 이런 면을 사랑한다.

"사흘 뒤에 미국에서 커다란 배가 하나 바다로 떠나.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어.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엔진이 고장나고

설상가상으로 배 아랫부분이 폭발을 해서 배가 가라앉아.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모두 당황했기 때문에 생존자는 1퍼센트도 안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는 지금 당장 미국으로 가서 그 배의 출항을 막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되겠지.

결국 그 배의 출항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 배에 타면 돼.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을 돕는 거야."

"얼마나 구할 수 있을까?"

리현이 돌아누우며 잠에 취한 눈으로 비인을 올려다봤다.

비인이 허리를 굽혀 리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을 더 구할 수 있어. 모두는 구할 수 없지만…"

"그럼 됐어."

리현이 나른하게 미소지으며 비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비인은 조금 괴로운 듯 웃으며 리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단 한 명이어도 구할 수 있으면 하는 거야."

"그래."

"사랑해. 너만 옆에 있으면 돼."

"나도야, 리현아."

"내일 미국으로 가자."

"응."

"우리 둘이서…"

"응."

브리엔은 창가에 앉아 말없이 그들을 지켜봤다.

새벽빛이 밝아오며 그들의 침실이 붉게 물들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브리엔은 가슴이 아팠다.

돕고 싶지만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한다.

이곳에 온 이유는 그들의 삶을 '지켜보기' 위해.

그 이상의 일로 그들의 삶에 '관여'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택했다면 그 선택을 존중하고 싶다.

존중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괴로움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브리엔은 만면을 일그러뜨린 채, 서로를 꼭 부둥켜안고 누워있는 리현과 비인을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리고 하염없이 응시했다.

다음 날, 리현과 비인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오후로 예약했기에 서둘러야 했다.

누군가를 방문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임에도 친구들은 기분 좋게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강전, 그 다음에는 가인과 해윤.

마지막으로 우준과 채민을 만난 이유는, 두 사람은 속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별히 속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들이 누군가를 돕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걸 안다면

친구들도 함께 하려고 달려올 거다.

친구들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은 싫다.

"미국에 잠깐 여행 가려고 하는데, 가지고 싶은 선물이 있나 물어보려고 들른 거야."

라고 말하기로 했다.

강전과 해윤, 가인은 의심하는 기색 없이 잘 다녀오라고 이야기했지만

역시 우준과 채민은 달랐다.

특히 우준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한동안 리현을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 봐? 날 그렇게 뜨겁게 쳐다보지 말고 채민이나 봐."

리현의 장난기 어린 말에 우준이 빙긋 웃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서둘러 떠나는 그들을 보며 우준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또 보자."

그 순간 울음이 터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우준의 마지막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우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그곳을 빠져나갔을 뿐이다.

며칠 후, 미국에서 출항한 여객선의 대형 참사에 관한 보도가 한국 뉴스에까지 크게 떴고,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현 (45세)

초비인 (45세)

강전은 절규했다.

"빌어먹을! 니들! 니들 그 인간들 구할 생각으로 거기까지 간 거지?

니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아서 우리한테 아무 말 안 한 거지?

평소처럼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 거지?"

아무도 강전을 탓하지 않았다.

강전은 통곡했다.

땅을 쥐어뜯으며 외쳤다.

"두고 봐라, 이 멍청이들아. 난 니들처럼은 안 살아. 내가 남들 도우며 살기는 해도

남들 돕다가 죽어서 친구들 가슴 아프게는 안 할 거라구! 절대로 안 그럴 거라구!"

강전의 괴로운 외침을 들을 때만 해도,

그들 중의 누구도, 브리엔조차도 강전이 누군가를 구하다가 죽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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