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90화 (90/91)

-90-

리현과 비인의 죽음을 그들은 잘 견뎌냈다.

그들은 두 사람이 자신들의 정의를 실천했고 그로 인해 행복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또 10년이 흐르고, 또 다시 10년이 흘렀다.

이제 그들은 모습은 어릴 적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이 늙었다.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보다 많아지고 얼굴에 주름도 많이 생겼다.

지금 브리엔이 그들 앞에 나타나

"강우준", "현채민"하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라며 혀를 찰 것이다.

그들의 흰머리가 늘어갈수록 브리엔은 한숨만 늘었다.

시간을 붙잡는 것이 가능하다면 꽉 붙들어매고 싶다.

해가 지고 해가 뜨는 것이 이토록 가슴 졸이는 일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하루하루 가는 시간이 생생할 정도로 깊숙이 온몸에 새겨진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언젠가 비인과 리현이 떠났듯이 저들도 떠나겠지.

그러면 오래 전 그 세계에서 그들이 사라졌듯 또 다시 앞에서 사라지겠지.

그 후에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할 거야.

그래,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지.

불안해서 해가 뜨는 게 싫었다.

영원을 살기에 시간의 흐름이 두렵지 않았건만,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늙어버린 그들을 보며 세월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강전은 70살의 노인이었지만 여전히 운동을 즐겨해서 건장하고 많이 늙어 보이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서도 실력을 인정 받아 계속 병원에서 근무했고,

몇몇 여직원들이 강전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지만 강전은 결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았다.

혼자 사는 강전은 언제나 혼자서 생필품을 사러 마트에 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브리엔은 강전의 뒤를 따랐다.

강전은 느끼지 못할 테지만 "함께"하고 싶었다.

마트에 쇼핑을 간 강전은 여느 때처럼 몇 개의 인스턴트 식품과 싱싱한 채소,

고기와 화장지 등을 쇼핑 카트에 담았다.

계산을 하러 향하던 중에 강전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건물이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

무언가가 어긋나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강전은 온몸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1년뿐이기는 했지만, 다른 세계에서 위험을 겪은 동안의 감각은 여전히 남은 채였기에

미묘한 위협을 느끼는 것이 가능했다.

강전은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죽을 거라는 걸 깨달았고,

깨닫는 순간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해야할 일을 실행에 옮겼다.

"모두 이 건물에서 나가! 건물이 무너질 거야!"

으레 그렇듯 몇 몇 사람은 강전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무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강전의 절박한 목소리에 반응했다.

"위험하니까 나가! 이 건물이 무너질 거라구!"

강전이 다시 한 번 외치고 카트를 버린 채 마트의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바보스러운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강전의 표정이 진지한 데다가

굉장히 덕망 있는 얼굴을 가졌기에 모두들 저도 모르게 강전을 따라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전은 무사히 마트에서 빠져나왔지만 입구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로 인해 꽉 막혀서

사람들이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경비원들이 당황하여 사람들을 만류했지만

생명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이성적인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강전의 말을 증명하듯 잘못 지어진 건물의 균열이 점점 벌어지며 무너지려 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브리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되었든 강전은 안전한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강전의 빠른 판단으로 인해 사람들은 거의 빠져나왔다.

쿠궁-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여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비명을 질러대며 자신들이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감사했다.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 강전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입구에서 벌벌 떠는 아이들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었다.

브리엔이 어찌할 시간도 없었다.

강전은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조금 전 균열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다.

무너지는 건물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무사히 아이 두 명을 품에 안았지만 둘 다 데리고 밖으로 나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먼지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강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노인의 힘으로는 힘든 일인데도 아이를 품에 안고 어떻게든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 위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돌을 피하지 못했다.

건물의 커다란 파편은 그대로 강전을 향해 떨어졌다.

브리엔은 강전이 아이들을 버리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강전은 아이들을 버리지 않고 품에 감싸며 몸을 앞으로 숙였고 돌은 그대로 강전을 덮쳤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소란스러웠다.

브리엔은 가슴에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그 주위에서 맴돌았다.

당장 능력을 발휘해 파편을 없애 강전을 구해내고 싶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강전이 선택한 삶.

그들의 삶에 끼어 들 권리는 없다.

주먹을 꽉 쥐고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무너짐이 멈추고 먼지도 가라앉아 구조대원들이 강전이 깔린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무거운 돌덩이를 조심스레 들어내 강전과 아이들을 찾아냈다.

아이들은 무사했다.

하지만 강전은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이 목격한 믿기 힘든 장면을 경찰들과 뒤늦은 구경꾼들에게 전달했다.

아마도 강전의 이름과 그의 행적은 곧 신문과 뉴스에서 크게 다뤄질 것이다.

사람들의 자잘한 행동 따위는 브리엔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브리엔은 강전만큼이나 눈을 크게 뜬 채, 영혼이 빠져나간 강전의 빈 껍데기를 응시했다.

강전의 눈동자는, 마치 브리엔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 브리엔을 똑바로 향한 채였다.

우준이 위암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건 브리엔뿐이다.

의사는 우준이 얼마 못 살 거라고 했다.

브리엔은 절망적인 기분이었지만 정작 우준 본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우준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브리엔은 우준이 죽을까 봐 하루하루 가슴을 움켜쥐고 그를 지켜봤다.

이상하게도 우준은 의사가 말한 시간 이상을 살았는데도 죽지 않았다.

브리엔은 어째서 우준이 죽지 않는 건지, 병으로 괴로우면서도 끝까지 생명을 붙들고 있는 건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했다.

"책임감" 때문이다.

가는 사람보다 남겨지는 사람이 힘든 법이다.

우준에게는 아직 지켜야 할, 생사를 함께 했던 동료들이 세상에 남아있다.

때문에 우준은 그들을 남겨두고 죽을 수 없어, 끝까지 병든 육체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준의 육체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 괴로운 비명을 질러댔지만

우준이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우준의 병을 알아채지 못했다.

75살이 되던 해, 채민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다.

우준은 매일 채민의 손을 꽉 붙들고 침대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마치 채민이 여전히 건강하게 움직인다는 듯 행동했다.

그 모습이 슬퍼서 브리엔은 몇 번이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잔뜩 고인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우준의 창가에 앉아 그들을 지켜봤다.

눈을 감고 있는 채민은 여전히 고왔다.

처음 봤던 그 때처럼 선하고 아름다웠다.

새벽녘, 우준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브리엔은 참지 못하고 채민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채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입술에 느껴지자 브리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뜨거운 눈물은 방울이 되어 채민의 이마로 떨어졌다.

사실은 모두에게 해주고 싶었다.

죽어간 모두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그들을 보내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해주고 싶었다.

"사랑해, 채민아."

눈의 착각이다.

채민의 입술이 부드럽게 미소를 그려내는 모습은 분명 눈의 착각이다.

우준이 돌아오기 전, 브리엔은 얼른 원래 있던 창가로 돌아갔다.

우준은 다시 채민의 침대 옆에 앉아 채민의 손을 잡았다.

한동안 채민의 얼굴을 응시하던 우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브리엔이 입을 맞추었던 그곳에 입술을 대며 말했다.

"사랑해."

채민에게 한 말이 분명하지만, 브리엔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한 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채민이 식물인간이 되고 몇 주가 지난 후 해윤과 가인이 찾아왔다.

반갑게 맞이하는 우준 앞에서 두 사람은 곤란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에게 차를 대접한 우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게지?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건가?"

그들은 우준이 모두 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해윤이 다정하게 가인의 어깨를 감쌌다.

가인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미안해, 미안하네, 우준이. 정말 미안하네. 이런 말을 전하게 돼서… 정말… 정말 미안하네."

우준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가인의 말을 기다렸다.

"채민이의 영혼이 어제 날 찾아왔어."

"……"

"그만… 가고 싶대…"

가인이 흐느꼈다.

우준은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있다.

"이제 그만 가고 싶다고… 생명 유지 장치를… 빼달라고… 흐…흐윽…"

"그래…"

낮은 목소리가 슬프게 울렸다.

"그렇군."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정말 미안하네…"

"괜찮네.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채민이의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입가에 남겨진 미소가 슬펐다.

"그렇게 해야겠지."

우준이 눈을 감았다.

그녀를 사랑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는 가슴 속에 남으리라.

육체를 잃는 것뿐이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남겨진다.

"괜찮아."

우준은 채민에게로 향했다.

가인과 해윤도 우준의 뒤를 따랐다.

채민은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랑해."

우준이 채민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장치로 손을 가져갔다.

"조만간… 또 만나자."

브리엔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채민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다.

청회색 밤하늘에 브리엔의 눈물이 흩뿌려졌다.

"너무 짧잖아!"

브리엔은 외쳤다.

"정말 이건 너무 짧잖아!"

숨을 토해낸다.

"너무 짧다구!"

가인의 통곡, 해윤의 흐느낌, 우준의 슬픔이 브리엔의 절규에 묻혔다.

브리엔은 자신도 얼른 죽고 싶다고 간절히 원했다.

가인과 해윤은 평온하게 삶을 마감했다.

78세의 생일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인이 해윤에게 말했다.

"난 이제 그만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해윤은 웃으며 가인의 손을 잡았다.

"그럼 같이 가면 되겠다."

"우준이가 혼자 남겨지네."

"그 친구… 마지막까지 책임감이 강해."

"응. 우리들의 슬픔을 덜어주려고 자기가 가장 늦게까지 남은 거겠지."

"우리가 가도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우준이 옆에 늘 따라다니는 친구가 하나 있잖아."

해윤이 웃었다.

"브리엔 말이지?"

"응."

"그 애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를 따라다닌다는 거, 우린 모두 알고 있었는데…

모르겠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을…"

"바보라서… 모를 거야."

가인의 숨이 가빠왔다.

"우리가 미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으면 좋겠다."

"응. 정말 그래."

"침대에 눕혀줄까?"

"이제 날 번쩍 안을 힘도 없잖아."

"아직 너 정도는 번쩍 안을 수 있어. 이것 봐."

"떨어뜨리지 마."

"걱정 마."

가인을 침대에 눕히고 해윤도 그 옆에 누웠다.

"좀 자야겠어."

"응, 그래. 내가 옆에 있을게. 안심하고 자."

"눈을 뜨면… 세계가 변하겠지?"

"그래도 내가 네 곁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가인이 눈을 감았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안심이네."

"나도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안심이야."

두 사람의 마지막을 브리엔은 보지 못했다.

채민이 떠난 후, 브리엔은 우준의 근처에서만 맴돌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은 우준에게 걸려온 전화로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죽음으로 우준 역시 책임을 덜고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우준의 삶도 얼마 안 남았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우준은 브리엔의 짐작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여행을 함께 해온 동료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우준은 계속해서 살았던 것이다.

의사들은 이토록 몸이 망가졌는데도 살아있는 우준을 신기하게 여겼다.

친구들의 아들, 딸과 손자, 손녀들이 때때로 우준을 방문했다.

우준은 그렇게 93세까지 살았다.

우준이 이대로 영원히 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졌던 브리엔은

우준이 94세의 생일을 맞이하기 전,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준의 병은 더 이상 손쓰기 힘들도록 깊어졌고, 우준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친구의 아들이 보내준 간병인이 도와야만 가까스로 움직일 따름이다.

우준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본 브리엔은 차라리 우준이 얼른 죽어서

귀찮은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 날 밤, 우준은 꺼져가기 직전의 촛불과 같았다.

깊이 잠들어 보이는 우준의 근처에서 맴돌던 브리엔은 한참 망설이다가 우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우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우준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준에게 키스를 하고 나면 진짜로 우준이 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침대 곁에 서서 망설였다.

"브리엔…"

잠든 줄로만 알았던 우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는

대단한 브리엔도 깜짝 놀라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잠꼬대인가 싶어서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우준의 나직한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브리엔, 자네… 여기에 있지?"

"어떻게 그걸…"

브리엔이 당황했다.

"이리… 가까이 오게. 얼굴이 보고 싶어."

브리엔이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우준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소년의 모습을 간직한 브리엔이

얼굴을 마주했다.

우준의 육체는 늙었지만 죽어가는 와중에도 눈빛만은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알고 있었다네.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었어."

"어, 언제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브리엔은 문득 오래 전 리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봤던 것과

강전의 눈이 자신에게 향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우준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혈액이 사라진다고 뉴스에서 한창 떠들어댔지. 자네 말고 누가 있겠는가.

꾸준히 때마다 혈액을 가져갈 만한 사람이…"

"아…"

브리엔도 웃었다.

슬픈 미소였다.

"우준아."

"자네가 먼저 용기내어 다가오기를 기다렸네. 그러면 꼭 말해주고 싶었어."

"뭘?"

"우리 모두 자네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브리엔은 웃으려고 노력했다.

우준의 마지막 가는 길에 웃는 얼굴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얼굴이 자꾸 일그러진다.

표정 관리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래서 괴로운데도 이렇게 오래 살아있었던 거야?

채민이도 죽고, 다른 애들도 다 죽었는데… 나 때문에… 나한테 그 말 해주려고…

계속… 힘든데도 계속… 그렇게? 그 책임감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든 우준이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금방 눈을 떠서 브리엔을 응시했다.

"어째서 다들 내게 책임감이 강하다고 말하는지 모르겠군.

난 책임감이 강하지 않아. 자네들과 똑같아. 그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할 뿐이네.

자네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그 마음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텼지."

"으…"

괴로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우준아…"

가까이 다가가 우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다.

그 때와 똑같다.

하지만 상황은 다르다.

곧 우준은 떠난다.

조금 지나면 우준은 더 이상 웃지 않게 된다.

그러면… 아마도 세계가 바뀔 것이다.

브리엔의 세계가 완전히 바뀌어 버릴 것이다.

"우준아…"

"마지막으로… 자네를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

"나도… 나도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여기로 왔어.

미친 듯이 너희들이 보고 싶어서… 그런데… 이제 너마저 가버리면…

나에겐 아무도 없어. 난… 아무도 없어."

"아니야, 브리엔. 그렇지 않아."

"……"

"자네에게는 자네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브리엔의 눈이 커졌다.

"날 기다리는 사람?"

"그래. 성에서 자네를 기다리는… 그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아!"

잊고 있었다.

우준 일행과의 여행, 그리고 그들과의 이별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자신에게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헤쥰을 만나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네 가치는 내 집사로서가 아니야. 나에게 너의 의미는 동반자야. 영원이라는 시간을 함께 할 소중한 동반자.'

그래,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그에게 돌아가면 되는 거야. 그는 분명 자네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걸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그는 그곳에 있는 거라네."

브리엔이 우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잡고 있는 우준의 손을 끌어당겨 이마를 댔다.

우준의 체온을 느낀다.

이제는 사라져 버릴 그 따스함을 한껏 느낀다.

"난… 인간의 감정 따위 이해할 수 없었어. 외로웠어. 혼자인 것 같고, 지루했지.

그래서 죽고 싶었어. 신이 너희들을 데리고 오면 날 죽여준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너희들을 지켜봤어. 너희들은… 정말 이상했어. 내가 봐온 인간들과 달랐지.

그 중에서 너랑 채민이가 제일 이상했어."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하하… 다들 나보고 이상하다고 하더군."

"응, 넌 이상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만 했잖아."

"그랬나…"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너희를 지켜보는 시간이 즐거웠어.

좀 더 오래 너희들 곁에 있고 싶었지. 그래서 너희들과 합류했어."

"기뻤지. 자네가 함께 한다고 했을 때는…"

"점점 마음이라는 걸 이해했어. 너희들에게 동화되어서 나도 이상해졌지.

직접적으로 돕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돕게 되었어."

"그래…"

"마지막에 신에게 갔을 때, 난 깨달았어. 그는 신이 아니라는 걸."

"그랬군."

"그는 너희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어. 난… 난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너희들을 원래 세계로 보냈어. 날 원망한다고 해도 너희들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어."

"그래…"

"그런데… 보고 싶어서… 그래서 찾아오고 말았어. 날 원망하더라도 좋으니 너희들을 보고 싶었어."

"그래…"

"너와 채민이의 행복한 모습이 보기 좋더라. 리현이랑 비인이도 좋았고,

해윤이랑 가인이도 행복해 보였고… 강전이는 점점 더 멋있어지고…

보기 좋아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는 생각도 못했어."

"그래…"

"그리고… 내가 지금 네 곁으로 온 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무슨… 말…?"

"사랑해."

우준이 미소지었다.

"나도…"

"사랑해, 우준아."

"나도…"

"사랑해."

"……"

"사랑해."

"……"

"사랑해."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브리엔은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목이 쉴 때까지, 해가 뜰 때까지 우준의 차게 식은 손을 꼭 부여잡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간병인이 온 듯 아래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브리엔은 일어나 우준을 내려다봤다.

우준은 미소짓는 모습 그대로 눈을 감았다.

평화로운 모습이다.

브리엔은 웃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만 그래도 웃었다.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며 우준의 몸 위로 허리를 굽혀 그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차가운 감촉이 입가에 서렸다.

"사랑해…"

마지막으로 낮은 고백을 한 브리엔은 사람이 들어오기 전 우준의 방을 떠났다.

떠나는 브리엔의 귓가에 우준의 대답이 들려오는 듯 했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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