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폰 전기-5화 (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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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기 시작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프랑스 어로 ‘귀족의 의무’라는 뜻이다.

귀족은 평민에 비해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고, 그 만큼 사회적으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귀족들은 평민들보다도 높은 도덕적 의식과 공공의식이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은 퇴폐적으로 변하고 자신들보다 약자인 평민들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그래도 이런 와중에 한 가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지켜지고 있는 게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아르 포아르라고 할 수 있었다. 1년 열두 달 중에 11월에 시작하는 아르 포아르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 하고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귀족들의 의무 행사이다.

만일에 여기서 귀족들이 아르 포아르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순식간에 영지는 몬스터들에게 약탈당하고 영지민들은 당장에 겨울을 이기지 못 하고 아사하게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르 포아르에는 반드시 참여했다.

물론 어떠한 귀족은 자신의 부와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참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이 가끔 지나쳐서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지나치지만 않다면 눈감아주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때문에 아르 포아르는 평민들을 지키기 위한 의무 행사인 동시에 귀족 개인의 부와 용맹을 과시하기 위한 연례행사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 본래의 뜻은 변하지 않으니, 아르 포아르는 평민 귀족 모두에게서 사랑받는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 막내 왕자, 루이가 10살을 맞이하여 짐을 찾아와 아르 포아르에 참여하고 싶단 뜻을 밝혔다. 이 얼마나 기특한 뜻이라는 말인가? 그렇기에 짐은 루이 왕자에서 정병 일천을 내주어 아르 포아르에 참석하도록 할 것이다.”

하폰의 국왕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이리 말했다.

어린 왕자가 아르 포아르에 참석한다는 것은 다소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르 포아르는 귀족의 부와 용맹을 과시하기 위한 연례행사였다. 그렇기에 혹여 루이 왕자가 왕위에 관심을 보이려고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몇몇 귀족들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의 위에는 왕태자인 아슬롯이 건재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루이 왕자 위로는 세 명의 형이 더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이 왕자가 왕위 쟁탈전에 끼어든다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루이에 대한 소문은 귀족들 사이에서 아주 잠깐의 화제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길게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루이는 무척이나 반겼다. 애당초 루이의 목적은 카샤의 안정적인 확보이지, 귀족들을 통한 세력 획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귀족들이 자기들 이득을 챙기길 얼마나 좋아하고, 왕권의 상승을 얼마나 싫어하는 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루이의 입장에서도 귀족들로 세력을 꾸리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게다가 회귀 이전에 자신을 사형대로 올려 보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귀족들이었다.

아무튼 10살의 어린 왕자가 아르 포아르에 참석한다는 소식은 귀족들 사이에서 퍼졌고, 이윽고 그건 평민들 사이에도 퍼졌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한쪽 무리에선 어린 왕자가 기특하다는 것과 다른 한쪽에선 어린 왕자가 철없이 나선다는 것이었다. 이건 루이도 예상지 못 한 반응이었지만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의 소문이 무언가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쓰잘데기 없는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소문이 퍼지고 며칠 뒤, 루이가 아놀드를 찾아갔다.

“왕자님, 아르 포아르에 참여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그나저나 준비는 잘 되어가오?”

“준비는 꾸준히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놀드의 표정이 석연치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일꾼들이 아놀드의 말을 잘 따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기 같아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카샤의 원산지는 랄프 산맥이다.

온갖 몬스터들로 북적이는 그곳을 누가 가고 싶어 하겠는가?

루이는 아무래도 여기선 자신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금이 더 필요하다면 내가 보태겠네.”

“아닙니다, 왕자님! 어찌 제가 그런…….”

“괜찮네. 이번에 생일을 맞이하게 되어 폐하께 적잖은 금화를 받았네.”

실제로 루이는 열 번째 생일이라는 명목으로 폐하께 적잖은 금화를 받았다. 게다가 맏형인 아슬롯이 앞으로 영지를 꾸리려고 하는 루이가 기특하다며 얼마간의 금화를 내려주기도 했다.

덕분에 예상지도 못 하게 자금 사정이 풍족해진 루이였다.

때문에 루이는 선뜻 아놀드에게 금화를 건네주었고, 그 금화를 건네받은 아놀드는 저도 모르게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왕자님께선 무슨 이유로 나를 이렇게 신용해주시는 걸까?’

그의 입장에선 그저 황망하면서도 황송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회귀하기 전의 일을 알고 있는 루이에게는 아놀드는 충분히 자격이 있는 상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보았을 때, 아놀드는 사기꾼이 아닌 진정한 상인이었다. 하긴 그렇기에 거상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루이가 이토록 아놀드를 신용하고 있는 이유는 모든 일에서 중립을 지켜주던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어디 한 곳으로 치우쳐지지 않고 중도를 지키는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류층들이 참석하는, 하다못해 국왕이 주최하는 파티장에 엘프를 데리고 올 정도로 아인종에 관해서 관대한 그라면 충분히 루이의 일에 도움이 될 게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루이의 입장에선 반드시 아놀드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돈으로 아놀드의 환심을 사고 있지만, 나중에는 진심으로 아놀드의 마음을 얻어 보겠다.’

루이는 내심 이리 다짐하며 아놀드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충분히 그를 달래주었다고 생각한 루이는 슬슬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내가 자네를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군.”

이러한 루이의 말에 아놀드는 공손히 금화 주머니를 받아들이면서 귀를 기울였다.

“……라우덴 협곡에 숨어있는 화전민들을 찾아주었으면 하네.”

“화전민들을 말씀이십니까? 혹여 그들을 토벌하실 생각이…….”

“아니네. 그 반대네. 그들을 랄프 산맥으로 이주시켜 내 영지민으로 만들 생각이네.”

“영지민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왕자님께서 영지를…….”

아놀드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이상한가?”

“아닙니다. 다만 왕자님께선 아직 어리신데 영지를 직접 다스리기엔 조금 이르지 않나 싶어서 놀랐을 뿐입니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이 수두룩하네. 그런 이들도 하는데 나라고 해서 못 하겠는가?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나.”

그 말에 아놀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눈동자를 정신없이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놀드가 보기엔 그저 왕자가 어린 나이의 치기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면전에서 면박을 줄 수 없으니 당황해하는 것뿐이었다.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군.’

의젓한 것 같으면서 철이 없고, 생각이 깊은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얕아보였다.

“……그러니 자네는 랄프 산맥으로 이주시킬만한 화전민 부락을 좀 찾아주었으면 하네. 되도록 많이 알아봐주었으면 하는군.”

“알겠습니다. 혹여 다른 명령은 없으십니까?”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아놀드의 태도에 루이는 옅게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이바이크 백작가의 차남에게 이 편지를 전해주었으면 하네. 물론 내 이름을 말해도 되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둔 편지를 아놀드에게 건네주는 루이다.

“이바이크 백작가의 차남이라고 하면 천하에 둘도 없는 난봉꾼이 아닙니까?”

아놀드의 말대로 이바이크 백작가의 차남은 천하에 둘도 없는 난봉꾼이다. 얼마나 잘 휘두르고 다니던지, 영지 내에 이바이크 백작가의 차남과 자보지 않은 아가씨가 손에 꼽을 정도라고까지 했다.

아무튼 세간에 평가된 이바이크 백작가의 차남은 이러했다.

그러나 차후, 그의 평가는 180도 바뀌게 된다. 백작가의 골칫거리로 속을 썩이고 있던 그는 18세가 되던 해에 북방 전선으로 차출되어, 그곳에서 유능한 지휘관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루이는 미리 그를 포섭하고자 편지를 보내려 한 것이었다.

‘북장 전선에서 이름을 떨치던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분명 랄프 산맥의 거친 몬스터들도 능히 막아주겠지.’

이것이 바로 루이가 믿고 있는 점이었다.

물론 몬스터는 용병으로 막아도 충분하긴 하다. 그러나 그래서는 루이가 생각하고 미래를 만들 수 없었다.

‘당장은 잘 먹고 잘 살지 몰라도 나중에 전쟁이 시작되면 한 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돈에 좌우되는 용병보다는 충성심이 높은 정규군을 꾸려서 미리 훈련 겸 몬스터 토벌을 하는 것이 좋았다.

“걱정 말거라, 그는 난봉꾼일지 언정 남성에게 추파는 던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해하는 아놀드의 모습에 유쾌히 웃음을 터트린 루이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상단을 빠져나갔다. 일단 저런 모습을 보이고는 있어도, 아놀드는 분명 루이의 말대로 편지를 잘 전해줄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듯 아놀드에게 할 일을 건네준 루이는 루시아의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동안 이곳저곳을 쏘아 다닌 탓에 루시아를 자주 봐주지 못 한 탓이었다.

“오라버니!”

루시아는 루이를 보자마자 크게 소리치며 그의 품에 안겼다. 두 살 어린 누이는 제대로 밥을 먹지 못 하고 있던 모양인지,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보였다. 루이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루시아의 금빛 머리칼을 살살 어루만져주며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찾아오지 못 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보다 들었어요. 아르 포아르에 참여하신다고…….”

“그래, 직접 폐하께 청을 넣어 참여했다. 다음 달에 출발할거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걱정 말거라. 단순히 나들이를 하는 것 정도이니 말이다.”

이러한 루이의 말에 루시아는 그제야 안도하며 제 오라버니의 품에 안겼다.

루이는 자기 몸을 이토록 끔찍이 여겨주는 어린 누이의 태도에 고마움을 느끼며 그 날, 하루만큼은 루시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 작품 후기 ============================

8시쯤에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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