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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숲]
루이가 엘프 마을 쪽으로 다가서자, 이백 여명의 엘프들이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다들 잔뜩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물론 몇몇 엘프들은 강한 적대감을 표시하며 루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공격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저 소년을 공격한 순간, 그 뒤에 서있는 일백 명의 장병과 일백 오십 여명의 엘프 사냥꾼들이 숨 한번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달려들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까닭에서 그 어떤 엘프도 루이에게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았다.
“…….”
루이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엘프들을 둘러보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
의심 가득한 눈동자.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수 많은 눈동자가 각기 다른 감정들을 품고서 루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아.”
루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이곳의 지도자가 누구인가?”
이러한 루이의 물음에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엘프들은 인간들과는 다르게 따로 무리의 지도자를 뽑아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에 루이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누구인가?”
다시금 나온 루이의 물음에 그제야 한 명의 엘프가 앞으로 나왔다.
“내가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소. 인간의 지도자여.”
낮은 목소리가 소름끼칠 정도로 달콤하게 들려왔다.
적대감이 어려 있는 음성은 마치 상대를 유혹하는 것처럼 들렸다. 만약에 루이가 같은 동성이 아닌 이성이었다면 단번에 매료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더없이 치명적이었다.
과연, 숲의 요정이라 불릴만 했다.
“그대가 마을을 대표해서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가?”
루이가 이리 물음을 던지자, 엘프는 잠시 고개를 돌려 엘프 마을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의 목선을 타고 가느다랗게 드러난 쇄골이 겨울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 반짝 빛을 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품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대표할 순 없다. 나는 그저 나이가 많을 뿐, 우리 모두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동등……. 그래, 그렇군.”
동등이란 단어가 낯선 탓에 루이는 한동안 입 안에 머금고서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동등…….
이 얼마나 이상적인 단어라는 말인가?
몽상이다. 루이에게 있어선 더없이도 낯선 단어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루이에게 동등이란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루이와 동등에 가까웠던 루시아조차도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로 미묘하게 엇갈려있었다.
그리고 그 불균형이 루시아를 죽게 만들었다.
성탑에 올라가 떨어져 자살한 불쌍한 어린 누이.
불쌍하구나. 불쌍해. 참으로 불쌍해.
그리고 어리석다.
입가를 이죽인 루이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휘청일 뻔했지만, 옆에 서있던 아벨이 소년의 몸을 받쳐준 덕분에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루이는 자신의 어깨를 꽉 붙잡아주는 아벨의 행동에 ‘고맙다.’라고 말을 건네고는 똑바로 섰다.
“……가장 나이가 많은 엘프여. 그렇다면 그대에게 묻겠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마을 안으로 가져가서 논의 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엘프의 태도에 루이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좋다, 그럼 이쪽의 조건을 말하겠다.”
이리 말한 직후, 루이는 엘프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항복해라. 그렇게 한다면 이곳이 아닌 안전한 곳에 거처를 따로 마련해주겠다.”
“하.”
그 말에 엘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입가가 험악하게 삐뚤어지며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기괴하게 빛을 내었다. 엘프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루이를 단호히 쏘아보며 대답했다.
“안전? 어린 인간이여. 네가 말하는 그 안전이란 건, 우리를 너희가 말하는 노예로서 사육하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절하겠다.”
“무언가 오해한 것 같군.”
“오해?”
“나는 너희를 노예로 삼겠다는 것이 아니다. 정당한 나의 영지민으로서 받아드리겠다는 뜻이다.”
“그것이 노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엘프의 말은 더없이 단호했다.
그러나 루이 또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너희를 영지민으로 우리, 인간과 동등하게 대할 것이다.”
이러한 루이의 말에 엘프가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동시에 루이의 옆에 서있던 아벨도 활을 꺼내들었다.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무려 오백년이다! 지난 오백년 동안 너희 인간들이 동족의 마을을 불태우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아버지의 목이 베였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겁탈 당했다. 내가 아는 동족들은 전부 너희, 인간들의 손에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그런데도 내가 무엇을 믿고 널 믿으라는 것이냐?”
그의 성난 목소리가 루이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찌릿찌릿한 게,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루이는 천천히 숨을 토해내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순간 엘프들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그들 모두가 화를 내고 있었다.
루이에게, 인간들에게 말이다.
“나로서는 네가 느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너처럼 부모를 잃지도 않았고, 주변 누군가를 잃은 적도 없다.”
거짓말이다. 루이는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많이 잃었었다.
네 명의 형제와 네 명의 누이를 잃었다. 그들 중에 세 명은 바로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속이 뒤틀려왔다.
슬쩍 시선을 내려보니, 양 손이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루이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파르르 떨고 말았다.
아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루이는 실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네가 지금 이전 날과 같은 일을 반복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다시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너희는 죽는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거라고 생각한다. 너는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그것을 보아왔으니 말이다.”
루이는 상대를 응시하며, 또박또박 이야기 했다.
마치 화살을 쏘듯이, 상대방의 가슴을 향해 말을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묻겠다. 너희는 이제까지 무엇을 한 것이냐? 오백 년이란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한 것이냐는 말이다.”
루이는 감정을 고조시키며 쏘아붙였다.
“……너희는 인간을 이길 수 없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미래에도 엘프라는 종족은 결단코 인간을 이기지 못 할 것이다.
그들은 서서히 멸망해가고 있었다.
루이는 이번 것으로 확신했다.
그들에겐 복수심이 없다. 투쟁심은 있으나, 복수심이 없어서 인간에게 복수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손에 아비의 목이 베이고, 어미가 겁탈당해도……. 마을이 불에 탔음에도 엘프들은 결코 복수를 하려하지 않았다.
도리어 도망쳤다.
복수심을 잃은 그들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달랐다.
과거로 돌아온 지금, 복수를 하고자했다.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붙인 귀족들에게 말이다.
“…….”
엘프는 이를 악 물었다.
그 모습에 루이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항복해라. 그렇게 한다면 너희를 영지민으로서 인간과 동등하게 대해주겠다.”
지독히도 오만하고, 강압적인 말에 엘프는 이전 날 보았던 그 광경을 떠올렸다.
불에 타고 있는 마을, 인간들에게 유린당하는 동족들. 마을을 등진 채로 도망치는 동족들. 실의에 빠진 채로 복수를 포기하는 동족들.
한없이 나약한 이들이었다.
수백 년을 살면 무엇 하는가?
겨우 일백년도 살지 못 하는 인간들보다도 못한 종족이었다. 자신들은…….
엘프는 소년의 말로 확실히 깨달았다.
“묻고 오겠다.”
그는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였던 독기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어 있었다. 루이는 그 모습에 조금 놀라긴 했으나,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저 멀리 서있는 엘프 노예 쪽으로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쪼르르 달려와 루이의 옆에 섰다.
“가는 길에 이 아이도 데려가라.”
“그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려줄 것이다. 분명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루이의 말에 엘프는 잠시 엘프 노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같은 동족임을 알아본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쪽으로 손짓했다. 이에 엘프 노예는 루이의 눈치를 한번 살펴보더니, 곧 미련 없이 발걸음을 떼어 엘프 마을 쪽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설정상, 엘프는 감정에 민감한 종족입니다.
이전의 본문에도 적어놓았지만, 엘프들은 희미하게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엘프가 느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나이가 많거나, 정령사거나, 특출난 재능을 가진 엘프들이 감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halem 님 : 사실 루이는 무재능입니다. 말로 잘 못텁니다.ㅋㅋ
dbss 님 : 넵.ㅎ
레디다 님 : 핡핡, 들었다 놓았다.
양산형마법사 님 : 그렇게까지 말빨 좋은 건 아닙니다. 걍 갈구는 걸 잘하죠.ㅋㅋ
Chalybs 님 : 헉? 감사합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