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폰 전기-92화 (9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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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고]

왕태자 아슬롯의 죽음은 하폰의 모든 귀족 세력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즉, 지금까지의 후계구도와 그에 따른 권력구도에 일대변혁을 예고하는 사건인 것이다. 현재 하폰의 국왕은 노환으로 국정을 다스릴 수 없는 상태였다. 설혹 국정을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정신에 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하물며 새로이 왕태자를 책봉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귀족들 사이에서 새롭게 왕태자를 선정해야 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원래대로라면, 좀 더 정확히는 법도대로라면 둘째 왕자인 밀튼에게 가장 우선권이 있었다. 그러나 성정이 흉포하고 제멋대로인데다가 귀족들의 말은 쥐똥처럼 알아들으니, 대다수의 귀족들이 꺼려하는 실정이었다.

만약 이대로 밀튼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분명 피바람이 불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현재 밀튼을 따르는 귀족 세력이라고 한다면 외척 세력과 왕자를 개인적으로 추종하는 세력 밖에 없었다.

그 외의 모든 귀족들은 밀튼을 꺼려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다수의 귀족들이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셋째 왕자인 휴안이었다. 성정이 온순하고 외척 또한 밀튼과 못지않게 든든했다. 더욱이 귀족들의 말이라면 의심한번 하지 않고 껌뻑껌뻑 들어주니, 귀족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구미가 당기는 대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시체에 까마귀가 꼬인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상황이 딱 그러했다.

이들 모두 왕태자 아슬롯의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서 몰려든 까마귀떼였다.

루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서 왕태자 책봉을 두고서 말다툼을 벌이는 귀족들의 실태에 진절머리를 내며 하멜른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보았자 득이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각 세력의 귀족들이 루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고 있었다.

좋은 말로 돌려보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일일 어울려주는 것 또한 스트레스였다.

때문에 루이는 하멜른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비비안과 루시아를 찾아갔다. 일단 처음은 루시아였다. 루시아는 제 오라비가 찾아오자, 반가움을 표시하며 루이의 품에 포옥 안겼다.

“오라버니, 어쩐 일이신가요?”

생글생글 웃는 루시아를 보고 있자니,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훌훌 날아가는 듯했다.

루이는 잠시 어린 누이를 부둥켜안고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루시아, 이 못난 오라비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이 물음에 루시아는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루이는 안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지난 며칠간 심사숙고한 말을 루시아에게 했다. 아니, 심사숙고하고 있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루이, 스스로도 지금 자신이 이것을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나와 함께 하멜른으로 가자구나.”

이러한 루이의 말에 루시아는 목이 메는 지 한동안 말을 하지 못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물을 왈칵 터트리며 루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빼꼼 고개를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흐윽, 오라버니와 함께 갈게요! 가고 싶어요. 오라버니와 함께요.”

“고맙구나.”

자신을 따라 가겠다는 루시아의 말에 루이는 안도했다. 동시에 불안했다.

만약에 랄프 산맥의 몬스터들이 갑자기 흉포해져서 하멜른을 공격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왕자의 전쟁 도중에 루시아가 병사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온갖 걱정이 루이의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이윽고 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이는 루시아를 하멜른으로 데려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루시아는 루이를 따라 하멜른으로 가겠노라고 대답한 상태였다.

‘더 이상 운명대로 흘러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굳게 다짐한 루이는 루시아에게 하멜른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말한 뒤에 비비안의 왕성으로 향했다. 사실 비비안은 루시아와는 다르게 루이를 따라 하멜른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누이는 왕성에서 영향력이 큰 편이었고, 외척 또한 든든했다. 그런 그녀는 루시아와는 다르게 루이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이가 비비안을 데려가려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밀튼이었다. 루이가 비비안을 하멜른으로 데려간다면 밀튼이 하멜른까지 공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불과 같은 성격을 가진 밀튼이라면 루이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 하멜른을 앞뒤 재지 않고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그걸 외척이 막아줄 것이다.

밀튼과 비비안은 한 가족이었다. 외척이 그걸 놔둘 리가 없었다. 더욱이 외척 입장에선 구태여 밀튼이 루이를 공격해서 병사를 희생시키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비안은 밀튼의 목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비비안의 외척에게 보내는 화해의 제스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는 이제껏 아슬롯과 휴안을 줄곧 잘 따랐다. 그리고 그런 루이에게 아슬롯과 휴안은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밀튼은 그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로 친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때문에 귀족들은 알게 모르게 루이를 휴안의 편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밀튼의 외척이 그토록 끈질기게 루이에게 손짓한 것이었고 말이다. 그들 입장에선 한명의 귀족이라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루이의 군사력은 이전에 랄프 산맥의 몬스터들을 별다른 피해 없이 막아낸 것과 오백 명에 달하는 도적떼를 섬멸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여기서 루이가 루시아만 데리고 하멜른으로 떠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밀튼의 귀족들은 분명 루이가 휴안의 편에 들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물론 지레 짐작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분명 사이가 끝도 없이 험악해질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왕자 전쟁 도중에 공격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몬스터, 뒤로는 밀튼의 세력. 루이로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이제 겨우 1년 된 하멜른이 그 많은 적들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갓난아이가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셈이었다. 그러니 루이로서는 이 상황을 반드시 피해야만 되었다.

때문에 루이가 계획한 것은 두 가지였다.

여기서 비비안을 데려가서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싸울 생각이 없으며, 이렇게 비비안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비록 밀튼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지만, 비비안이라면 다르다. 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차하면 결혼도 할 생각이었다.

비록 남매이긴 했지만, 배다른 남매였다. 근친혼이야, 얼마든지 용납이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비비안이 루이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였다. 그 땐, 루이로서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야만 되었다.

물론 이대로 왕성에 틀어박히는 방법도 있었다.

어느 한쪽 편에 들지 않고서 왕성에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귀족들의 눈에 띄는 곳에서 얌전히 말이다.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했다. 하멜른은 여전히 불안했고, 루이의 손길이 필요했다. 계속 영주가 머물러주어야지만 도시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놀드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멜른은 현재 모든 게, 루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루이는 이미 하멜른의 상징이었다.

엘프를 끌어들였고, 견인족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어린 오크들도 키우고 있었다. 심지어 드워프 램지까지도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루이가 왕자 전쟁 내내 왕성에만 틀어박힌다? 아무리 믿음이 굳건하다고 하더라도 서서히 금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결정적으로 그들과 루이가 함께 한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때문에 하멜른을 이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루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밀튼의 편에 붙는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더러운 귀족들의 싸움에 발을 들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하멜른을 안전하게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휴안이라면 적어도 루이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러한 까닭에서 루이는 비장하게 비비안의 왕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윽고 비비안의 왕성 앞에 선 루이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 후, 왕성 안으로 들어서자 눈에 익은 영애들과 함께 수다를 나누고 있는 비비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서있었다. 비비안은 이런 여자였다. 언제나 중심이었고, 으뜸이었다.

그것이 살을 빼기 이전이든, 뺀 이후든 말이다.

‘비비안 누님이 과연 하멜른의 삶을 버틸 수 있을까?’

하멜른으로 가게 된다면 더 이상 영애들과 수다를 나눌 수도 없었다. 화려한 사교계에도 발길을 끊어야 될지도 몰랐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루이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저하지 말자.’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루이는 비비안과 영애들 앞에 섰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에 입을 열었다.

“잠시 누님을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영애?”

이러한 루이의 말에 영애들을 호호 웃으며 기꺼이 허락했다.

비비안 또한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루이의 손을 붙잡았다. 사랑스런 손이었다. 루이는 제 손에 잡힌 비비안의 손을 꼭 붙잡은 뒤에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루루, 부담가지지 말고 뭐든지 말해.”

비비안은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과연 비비안에게서 이러한 목소리를 듣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회귀 이전에는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회귀 이후에도……. 루이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루이는 거세게 뛰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누이를 바라보았다.

“저와 함께 하멜른으로 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물음에 비비안은 루시아와 마찬가지로 잠시 감격에 겨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이윽고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대답했다.

“기꺼이.”

그것은 만개한 겨울 꽃이었다.

============================ 작품 후기 ============================

이제부터 루시아와 비비안은 루이 껍니다.

나데스 님 : ㅎㅎ 아마 이런저런 쪽으로 작품이 많이 나올 겁니다. 내년에는 게임북도 생각해두고 있습니다.

halem 님 : 오타죠? 신성이 아니라 신선이죠? 진짜 신성하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오오.. 감동입니다.ㅋㅋ

skdlgg 님 : 뭐, 뭡니까! 그 말투는...! 저 상처받았어요

향향공주 님 : 전쟁 개시!

때구니™ 님 : 여기서 루이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실제로 루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요. 뭘 더 어쩌라는 겁니다.ㅠㅠ

약파는연금술사 님 : 서양에서는 황태자 또는 왕태자와 왕세자의 경칭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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