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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고]
루시아와 비비안을 차례로 설득한 루이는 밀튼의 왕성을 찾아갔다.
밀튼의 왕성은 여타 왕성들과는 다른 한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바로 금녀 구역이라는 것이다. 시녀는 물론이고 기사들까지도 모두 남자로 구성되어 있다. 오로지 남성만이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밀튼이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밀튼은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시녀 하나를 임신시켰다.
그리고 그 시녀가 만삭일 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였다.
일종의 시위였다. 나는 엄연히 이성애자다. 그러나 여자를 싫어할 뿐이다. 그러니 내 능력을 의심하지 마라. 그것은 매우 강렬했으며 또한 소문을 잠재우기에 최적이었다.
다만 강렬해도 너무 강렬했다.
모든 이가 밀튼을 두려워했다.
루이 또한 그 일로 인해서 밀튼이라고 하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당시 여섯 살에 불과했던 어린 소년에게 있어서 목이 잘린 시녀의 모습을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까닭에서 루이는 밀튼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싫어했다.
밀튼의 왕성은 되도록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살다보면 사적인 감정을 잠시 접어두어야 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루이는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제법 검소한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밀튼은 그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형님.”
루이는 나직이 밀튼을 불렀다. 그러나 밀튼은 루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 주변에만 유독 무거운 공기가 머물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만 무릎을 꿇을 것만 같았다.
이런 걸 두고서 흔히들 제왕의 기질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다만 그 기세가 너무나도 흉포했기에, 밀튼이 제왕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결국 자기 자신마저도 집어삼킬 것이다. 실제로 회귀 이전에 밀튼은 스스로를 파멸시켰다.
루이는 조용히 밀튼이 검을 멈추길 기다렸다. 그리고 이윽고 검이 우뚝 멈추자, 밀튼의 시선이 루이에게로 향했다. 그것을 느낀 소년은 제 형님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왜 방문했는지,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형님과 싸울 의사가 조금도 없습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형님과 손을 잡을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중립의 입장을 지키고 싶습니다. 형님과 휴안 형님 중에 그 누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불만이 없습니다.”
루이는 최대한 저자세로 나갔다. 이럴 때일수록 몸을 작게 움츠려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망이로군.”
그 때, 밀튼이 사납게 으르렁대었다. 그는 차디 찬 눈길로 루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중립이란 본디 겁쟁이들이나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네 녀석이 스스로 왕성을 벗어나기에 범이 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로군. 범들이 무서워 도망친 승냥이었던 것이냐?”
“…….”
“투쟁해라. 정당한 후계자를 선택해라. 어리석은 놈.”
딱 세 마디였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루이는 조용히 밀튼을 올려다보았다.
마른 겨울 하늘을 등지고 서있는 밀튼이 보였다.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1미터 90에 달하는 큰 키에 남자다운 외모 그리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 그것은 분명 왕의 기질이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광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루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광기라…….’
자신이 옆에서 밀튼의 광기를 잘 조율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휴안은 아슬롯과 마찬가지로 병으로 죽게 된 운명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루이만 얌전히 밀튼의 편에 서게 된다면, 모든 게 원활하게 굴러갈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넷째 왕자인 로렌스가 남아있었지만, 그는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도망치려 할 것이다. 그에겐 야망이 없었다.
‘……여기서 밀튼을…….’
거센 파도가 밀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밀튼의 광기는 감히 루이가 감당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밀튼,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 했다. 그의 광기는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빠르게 치솟을 것이고, 곧 절정에 달할 것이다.
여기선 그 누구도 선택해선 안 되었다.
루이는 자신을 관철시켰다.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배신자를 선택해라.”
“그것 또한 불가합니다.”
“멍청한 놈.”
밀튼이 으르렁대었다. 당장이라도 루이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루이는 그것을 꿋꿋이 버텨내었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마주했다. 여기서 물러서게 된다면 회귀한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온 까닭이 없었다.
“멍청하다 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심으로 두 형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물속에 빠져도 입만 둥둥 떠오를 놈이로군.”
밀튼의 눈초리에 혐오감이 짙게 서렸다. 루이는 그것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면 밀튼은 입만 산 작자를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형님이 무어라 욕하셔도 저는 이것 하나만큼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
“저는 비비안 누님과 루시아를 데리고 하멜른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루이의 말에 밀튼은 잠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마하니 비비안이 루이를 따라 갈 거라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밀튼은 입가를 이죽이며 차게 쏘아붙였다.
“그깟 계집년을 데려간다고 해서 내가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으냐?”
“물론 아니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것을 하나의 징표로 삼고자 합니다. 저와 형님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로요.”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루이가 이제까지 휴안과 좋은 관계를 맺었던 것을 비비안을 하멜른으로 데려감으로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대다수의 귀족들이 루이를 중립이라 여길 것이 분명했다. 물론 밀튼이 그걸 순순히 용납할 리가 없었다.
“지금 나보고 귀족들 앞에서 비비안, 그 계집년을 네게 보내란 것이냐?”
“그렇습니다.”
“왜 그래야하지?”
“그것이 서로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리 말한 루이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종이에는 엄청난 액수가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려 금화 삼만이었다.
이전에 루이가 휴안에게 선물한 금액과 동일했다. 루이는 그것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곧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
“그 때, 이 금화는 유용한 군자금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밀튼에게 있어서 탐이 나는 제안이었다. 하물며 그는 세력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금화 삼만 개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 이것은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것이었다.
하지만 냉큼 루이가 주는 돈을 받아먹기에는 밀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짐작한 루이는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말을 덧붙였다.
“……또한 저는 형님을 정당한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그럼에도 제가 형님의 편에 들지 못 하는 건, 휴안 형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더욱이 형님도 아시다시피 제 영지는 랄프 산맥에 위치해있습니다.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수 없는 처지입니다. 때문에 이리 중립을 선택한 것입니다.”
“…….”
“또한 앞서 형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멍청이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하나 선뜻 선택할 수가 없는 겁니다. 경험이 부족한 제가 이러한 것을 선택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루이는 여기서 밀튼에게 자신의 나이를 재차 상기시켰다. 자신은 아직 열한 살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그러니 내 사정 또한 고려해 달라.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로서 완벽해졌다.
밀튼은 더 이상 막내인 루이를 혹독하게 대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밀튼이 루이가 내민 손을 받지 않는다면, 다 큰 어른이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형세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이 모습을 따로 보고 있는 이는 없었지만, 밀튼 스스로가 그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체면을 중요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못난 놈.”
어리석은 놈, 멍청한 놈에 이어서 못난 놈인가. 루이는 쓰게 웃으며 밀튼이 자신의 돈을 받아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밀튼이 루이의 손에 들려있는 돈을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두 번 다신 왕성에 얼씬도 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루이는 웃음기를 삼키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후, 루이는 등을 돌리고서 밀튼의 왕성을 빠져나갔다. 큰 고비를 넘기고 나니, 겨우 마음이 편안해졌다. 루이의 잠시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찬란한 초겨울의 햇빛을 받으며 매 한 마리가 미끄러지듯이 창공을 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루이 또한 저 매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었다. 그러나 그 감상도 잠시, 루이는 휴안의 궁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 소년에겐 할 일이 산재해있었다.
============================ 작품 후기 ============================
밀튼까지 클리어! 이제 남은 건, 휴안과 귀족들이네요.
아쉐니트 님 : ㅎㅎ 아마 해피엔딩으로 가지 않을까 싶네요. 현재 플롯이 세개 정도 있는데... 하나는 배드, 또하나는 해피, 그리고 마지막은 노말입니다.
한우리아 님 : 기꺼이!
비오는날엔우울해 님 : 그렇죠. 이제 엘리자베스까지 먹으면 현역 제일미를 손에 넣는 거지만... 안될겁니다
향향공주 님 :시집살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