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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히르카 부족들이 북부를 휩쓸자, 급기야 고향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치는 피난민들이 생겨났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영주 대리인들은 부랴부랴 병사들을 보내서 영지민들이 자리를 이탈하지 못 하도록 막았다. 하지만 일시에 시작된 피난행렬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다들 하나 같이 겁에 질려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이민족들에게 약탈당해서 모조리 죽거나 노예병이 되느니, 차라리 이렇게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히르카 부족민들이 하폰 북부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하폰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기존 백성들은 마치 쫓겨나듯 남부로 대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밀튼과 휴안이 따로 만남을 가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하폰 북부를 이민족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판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밀튼과 휴안은 서로의 명예를 걸고, 성심성의껏 협력하기로 했다. 더불어 군대도 본인들이 직접 이끌기로 약조했다. 임시방편치고는 썩 나쁘지 않았다. 히르카 부족의 땅을 휩쓸고 있던 루이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타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족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두고 봐야 될 일이었다.
루이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토벌군의 행보를 지켜보았다.
일단 휴안이 새로이 일만을 차출하고, 휴안이 일만 오천을 차출했다. 일찍이 이민족들에게 패해서 쫓겨난 토벌대까지 합친다면 도합 삼만 오천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대다수가 노예병인 이민족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력이었다.
막말로 휴안과 밀튼이 두 눈 딱 감고서 전군 돌격만 외쳐도 이길 싸움이었다. 더욱이 왕자들이 직접 토벌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도 기세등등했다. 모든 게 다 좋아보였다.
단, 귀족들의 속삭임만 없었다면 말이다.
“적들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항상 의심 또 의심하셔야 합니다.”
“이번 토벌이 끝난 뒤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 하나씩 두고 본다면 전부 다 옳은 말이었다. 밀튼과 휴안이 잠시 싸움을 멈추었다고는 하지만, 토벌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으르렁대며 싸워야 될 상대였다. 그러니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벌을 얼마나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끝마치냐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덤으로 상대측이 아군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는다면 금상첨화였다.
모든 귀족들이 그것을 꿈꾸었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상대측 피해를 극대화하는 것을 말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악수를 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비수를 쥐고 있는 꼴이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정없이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형세였다.
진절머리가 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마조히즘 성향이 있는 모양인지, 이러한 상황을 무척이나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상대방을 욕해서 자기를 좀 더 욕해달라며 애원하는 놈들 같았다.
변태 같은 놈들. 루이는 속으로 욕하며 계속해서 하폰 북부를 주시했다.
그리고 이처럼 주시하는 가운에 히르카 부족이 반응했다. 각 부족장들은 서둘러 부족의 전사들을 불러 모았다. 더불어 노예병들도 새로이 더 차출했다. 최대한 많이 뽑아서 어떻게든 하폰의 토벌대보다도 더 많은 군사를 보유하고자 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식량 보급에 혼선이 빗게 되겠지만, 부족장들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덩치를 부풀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무려 5만에 달하는 군세를 완성시켰다.
이놈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놈들끼리 제대로 맞붙는 셈이었다.
히르카 부족장들은 부족민들을 꾸준히 하폰 북부로 이주시키는 것과 동시에 전쟁 준비를 바쁘게 했다. 이번에도 이민족들은 당연하게도 토벌대를 맞이하러 나갔다. 그들에게는 수성한다는 개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제까지 울타리 하나 없이 이곳저곳 전전하며 돌아다니던 유목민족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수성이란 것은 생소한 것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성전에는 기병이 쓸모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탁월한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이의 생각에는 영 아니었다. 실제로 밀튼과 휴안 모두 헛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저런 이민족들에게 대패한 토벌대가 한심했다. 수치였다. 애초에 서로가 합심해서 이민족들을 밀어내었다면 피해가 이 정도로 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밀튼과 휴안이 도끼눈으로 일찍이 토벌대를 이끌었던 귀족들을 쳐다보자, 그들은 하나 같이 억울하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상대측 귀족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쟤가 더 잘 못 했다고 울부짖었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애들 마냥 남 탓이나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닥쳐라!”
결국 보다 못 한 밀튼이 크게 소리치자, 다들 찍 소리도 못 했다. 과연 밀튼다웠다. 반면에 휴안은 그저 작은 한숨만 내뱉을 따름이었다.
여하튼 두 왕자가 직접 오는 것으로 토벌대가 어느 정도 구실을 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 삼만 오천 군세는 오만에 달하는 이민족들과 마주했다. 사실 이쯤 되면 이민족이라고 부르기도 참 애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오만 중에 이만 정도가 히르카 부족의 전사들이었고, 나머지 삼만이 노예병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밀튼은 한번 정찰을 보낸 것으로 적들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때문에 밀튼은 단번에 몰아붙여 적들을 일거에 몰살시키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휴안은 되도록 영지민들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노예병들을 설득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서 노예병들을 설득해서 반전시킨다면 순식간에 전세는 육만 오천 대 이만으로 좁혀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밀튼이 보기에 그건 그저 빗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애당초 저들이 저항할 의사가 있었다면 끝까지 이민족들과 싸웠거나, 진작 반란을 일으켜야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민족들에게 복종했으며, 그들이 원하는대로 같은 민족을 향해 칼창을 들이밀었다. 그런 자들을 설득한다고 해서 설득이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치적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노예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구실로 이민족들이 성 안에 틀어박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당장 쳐야 된다!”
“시간을 두고서 노예병들을 설득합시다!”
두 왕자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조금씩 토벌대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는 와중에 고맙게도 이민족들이 먼저 공격을 와주었다. 밀튼은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검을 뽑아들었다.
휴안 또한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일단 저쪽에서 먼저 공격을 온 이상 수비를 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순식간에 오만 군세가 하폰의 토벌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악! 쏘지 마!”
“난 하폰 사람이라고! 이민족이 아니야!”
노예병들은 이전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악을 질렀다.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곽시키며 선두에 선 병사들에게 들러붙었다. 그러나 밀튼은 가차 없었다. 병사들을 다그치며 창으로 노예병들을 찔러 죽였다.
“이들은 배신자다! 살아남기 위해서 동족을 버린 배신자! 손속에 자비를 둘 필요는 없다!”
이처럼 밀튼이 소리치자, 양심의 가책이 덜어졌다. 병사들은 싸늘하게 노예병들을 쳐다보며 일말 주저 없이 검과 창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공격에 노예병들은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비명만 지르면 죽어나갔다.
애당초에 제대로 된 무장도 안 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노예병들이 적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사이, 이민족들이 측면으로 달려들었다. 노예병들로 시선을 잡아두고 측면을 치는 것이었다. 나름 괜찮은 전략이었다. 그러나 휴안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폰의 기병으로 맞받아쳤다.
“이민족들에게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가르쳐주어라!”
“쳐라!”
밀튼이 자랑하는 기병대는 순식간에 히르카의 전사들을 도륙 내었다. 특히나 기사단의 위력은 단연 돋보였다. 밥값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기사단은 전장을 휩쓸며 히르카 부족이 자랑하는 기병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반면에 휴안 쪽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노예병들을 설득하고 무기를 버리도록 종용하는 사이, 측면에서 공격해오는 이민족들에게 제대로 공격 받은 것이었다. 때문에 측면에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프리지아 남작이 재빠르게 기병을 운용해서 중앙이 뚫리는 사태만큼은 막았다.
휴안은 프리지아 남작의 활약에 감동하며 그를 크게 칭찬했다. 물론 자신과 루이를 이간질 하려 했다는 점 때문에 다소 거북하긴 했지만, 그의 활약이 없었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 사적인 감정은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이처럼 히르카 부족의 공세가 그치고 나자, 돌연 히르카 부족이 수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토벌대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특히나 밀튼이 가진 기사단에게 크게 한번 데이고 나더니,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히르카 부족의 족장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내며 언성을 높였다.
“성에 들어갑시다. 수성을 한다면 보다 쉽게 토벌대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유격전을 합시다. 계속 괴롭히면서 보급을 끊는다면 저들은 금세 굶주리게 될 거요!”
“곧 농사철입니다. 하폰에선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시간을 끌어봅시다.”
하나 같이 그럴 듯한 의견들이었기에 부족장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섣불리 선택하기 못 했다. 그리고 이것은 토벌대로 마찬가지였다. 한 차례 전투가 끝나자, 휴안과 밀튼은 다시금 공격을 하자는 쪽과 노예병을 설득하자는 쪽으로 대립했다.
그리고 이러는 와중에 프리지아 남작이 휴안 측 귀족들을 은밀하게 모아두고서 계책을 내놓았다.
“밀튼이 저리도 돌격을 원한다면 하게 해줍시다. 그리고 저들이 적진 깊숙이 들어갔을 때, 버리고 도망칩시다.”
“……!”
더없이 훌륭했다. 간단했지만 이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또 없었다. 더욱이 밀튼의 성정 상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돌격할 것이 틀림없었다. 모든 귀족들이 군침을 뚝뚝 흘렸다. 일이 잘만 풀린다면 밀튼이 이민족들의 손에 붙잡혀서 죽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몇몇 귀족들이 반발했다. 애초에 두 왕자가 자신의 명예를 걸고서 성심성의껏 협력하기로 약조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휴안이 밀튼을 배신한다? 휴안 왕자의 명예가 곤두박질 칠 것이 자명했다.
설혹 여기서 왕좌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가 휴안을 욕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프리지아 남작은 오히려 이것이 잘 된 일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현재 하폰의 국왕이 가진 이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더욱이 직할령도 지나치게 넓지 않습니까? 이 일을 빌미로 몇 가지만 가져옵시다.”
부도덕한 왕이라던가, 민란을 조정한다면 간단히 가져올 수 있는 이권들이었다. 이유야 원래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프리지아 남작의 말에 대다수의 귀족들이 박수를 쳤다. 소수의 귀족들만이 말도 안 된다며 소리쳤다. 이에 프리지아 남작은 그들을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계획을 누설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들을 일시 감금했다.
프리지아 남작의 계획에 찬동한 귀족들이 대다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오랫동안 그들을 감금한다면 휴안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랐지만, 하루 이틀 정도라면 병을 이유로 얼마든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리지아 남작의 계획은 하루 이틀이면 충분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하폰의 백성들이 신음하는 시간만 늘어날 뿐입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이민족들이 멋도 모르고 하폰 북부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장 공격해서 섬멸해야 됩니다! 노예병들은 결국 노예병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민족의 노예가 된 자들입니다. 더 이상 하폰의 백성이 아닙니다!”
휴안 측 귀족들이 아우성치며 휴안을 압박했다. 그리고 그 압박에 휴안은 결국 고집을 꺾고 말았다.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간단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밀튼은 휴안이 자신의 뜻에 전적으로 따른다는 의사를 보내오자, 눈을 게슴츠레 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과 논쟁까지 벌이며 고집을 꺾지 않았던 휴안이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태도를 싹 바꾸어 자신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배신일 수도 있겠지만, 밀튼은 휴안의 명예를 믿었다. 밀튼이 명예를 중하게 여기듯이 휴안 또한 명예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준비해라.”
이윽고 밀튼은 명령을 내렸다. 본격적인 전면전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토벌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히르카 부족의 진형이 들끓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뭔가 크게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밀튼과 휴안은 멍청한 게 아닙니다.
애당초 왕자의 전쟁 자체가 귀족들의 힘에 의지해서 싸우는 전쟁입니다. 왕자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사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발언권이 더 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식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회사의 사장이 가진 주식은 10% 밖에 안 되는데, 다른 대주주들이 90%를 차지한 상황인 겁니다. 이러니 대주주들에게 이리저리 채일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rageking 님 : 조선도 이런 식으로 망할 뻔 하다가 살았죠.ㅋㅋ 이순신 장군님!
카이프 님 : 진심 개판ㅋㅋㅋ
LunaticF 님 : 이제 프리지아 남작이 똥을 투척합니다! 그리고 귀족들 입장에선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로 따지면 철저한 기업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