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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앞선 전투로 하폰의 토벌대에게 된통 당한 히르카 부족의 군세였다. 다들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히르카 부족장들의 머릿속에는 후퇴라는 단어가 없었다. 애당초 물러날 거였다면 진작 물러나야 되었다.
히르카 부족장들은 겁에 질린 노예병들을 채찍질하며 소리쳤다.
“살고 싶다면 싸워라!”
“뒤로 물러나지 마라! 버텨라!”
이처럼 노예병들을 앞세운 히르카 부족장들은 전사들로 하여금 하폰의 측면으로 치도록 했다. 이전과 똑같은 전법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같은 전법에 두 번 당할 만큼 밀튼과 휴안은 미련하지 않았다.
밀튼은 휴안의 군대에게 양 쪽 날개를 맡기고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중앙을 공격했다. 단번에 결착을 내려는 심산이었다. 만약에 이게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면 밀튼의 기사단이 단번에 노예병들을 짓밟고 부족장들의 머리를 으깨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돌격!”
기사단을 선두로 밀튼의 병사들이 앞으로 내달렸다. 휴안 또한 병사들을 지휘해 좌우로 밀튼을 둘러쌌다. 강력한 쐐기였다. 노예병이 대다수인 히르카 부족의 군세가 이걸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쐐기의 첨단은 밀튼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보통 쐐기 진형의 경우, 선두에 선 자가 얼마나 유능 하느냐에 따라서 그 효과가 천차만별로 나뉜다. 무능할수록 그 힘이 약해지고, 유능할수록 그 힘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밀튼은 유능한 쪽에 속했다.
하물며 그를 따르는 기사단은 두 말 할 것도 없었다. 다들 밀튼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달려나아가며 적들의 진형을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진형을 휴안의 병사들이 거센 파도처럼 덮쳤다.
“창을 들어라! 버텨라!”
부족장들이 다급히 소리치며 노예병들을 다그쳐보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암울했다.
노예병들이 창 한 번 휘두르는 것보다 기사단이 그들을 짓밟고 가는 것이 훨씬 더 빨랐다. 전열은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혼란이 찾아왔다. 노예병들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밀튼은 이대로 기세를 몰아붙여 히르카 부족장들이 있는 중앙까지 꿰뚫었다.
쐐기가 적들의 심장에 꽂히는 바로 직전이었다.
“쳐라!”
“와아아아아!!”
밀튼이 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소리치자, 병사들이 따라서 우렁차게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이에 히르카 부족의 전사들이 노예병들을 채찍질하며 앞으로 내세웠다. 동시에 자신들 또한 검을 뽑아들었다. 여기서 승부를 볼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세는 기울어 있었다.
밀튼과 함께 기사단이 들이닥치자, 노예병과 히르카 부족의 전사들이 사이좋게 반 토막 나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칼솜씨가 뛰어난 전사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밀튼을 가로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전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자 히르카 부족의 전의는 바닥을 내리쳤다. 이건 마치 팔다리를 묶어놓고 싸우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럼에도 히르카 부족장들은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미련할 정도로 노예병들을 다그치며 끝까지 싸우도록 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켜보려고 했다.
사실 그들로서도 여기서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당초 여기서 그들이 물러나게 되면 하폰 북부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순식간에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결코 볼 수가 없었다.
부족장들은 죽기를 각오하고서 밀튼의 군세를 막았다. 하지만 이러한 각오에도 불구하고 밀튼의 군세는 멈출 줄 몰랐다. 밀튼은 순식간에 적들의 코앞까지 군대를 몰고 왔다. 5만을 자랑하던 히르카 부족의 군세가 순식간에 이등분되려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그런데 돌연 밀튼의 좌우측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함성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밀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좌우측으로 밀고 들어오는 히르카 부족의 전사들이 보였다.
말도 안 됐다.
‘휴안은?’
저들은 휴안의 군대가 막아야 되었다. 사전에 그리 약속이 되어있었다. 밀튼은 휴안의 군대를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러자 마땅히 보여야 될 휴안의 군대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히르카 부족의 공세를 견디지 못 하고 전멸한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더 말이 안 되었다.
무려 이만에 달하는 군대였다. 그들이 한순간에 몰살당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렇게 호락할리도 없었다. 그리도 쉽게 전멸할 군세였다면 밀튼이 먼저 전멸시켰을 것이 틀림없었다.
“왕자님! 적들이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부장 한 명이 다급히 소리쳤다. 얼굴색이 어두웠다. 이건 그 한 명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었다.
“휴안!”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휴안의 배신이다.
밀튼은 상처 입은 맹수마냥 크게 소리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타락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 했다. 자신과 같은 핏줄을 탄 형제라는 게 증오스러웠다. 내심 휴안을 인정하고 있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모여라!”
그는 증오를 불태우며 병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자신의 군세를 둘러싼 히르카 부족의 군세를 돌아보며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를 따라라!”
이리 소리친 밀튼은 생로를 뚫기 위해서 앞으로 내달렸다. 그것은 영웅의 진격이었다. 다들 아군에게 배신당했다는 절망감보다는 영웅을 뒤쫓는다는 기대감에 가득 찼다.
“와아아아!!”
각자 무기를 꽉 쥔 병사들이 휴안의 뒤를 쫓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르카 부족들은 순순히 길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무려 2만이나 되는 군세가 전선에서 빠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일만 오천 조금 넘는 숫자였다.
물론 히르카 부족의 군세도 많이 깎여나간 상태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4만은 거뜬히 넘어갔다. 더욱이 휴안의 군세는 히르카 부족의 전사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뒤로 내뺐다.
결국 소모된 것은 노예병들뿐이라는 소리였다.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으냐!’
밀튼은 이를 악 물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전사의 목을 베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뻘건 핏물이 온 몸을 뒤덮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에 타고 있던 말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마지막 숨을 토해내었지만, 밀튼은 자신의 애마를 애도하기 보다는 상대의 말부터 빼앗았다.
“왕자님!”
양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튼은 자신을 뒤따르는 병사들을 향해 검을 한번 들어준 뒤에 다시 소리쳤다.
“살아남아라!!”
“와아아아아!!”
그 외침이 다시금 병사들의 기운을 돋워주었다. 다들 악귀처럼 길을 뚫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뛰었다. 그 살기등등한 기세에 히르카 부족의 군세가 주춤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밀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동물적인 감각이 그곳을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으아악!”
“아악!”
맹수가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듯이 밀튼 또한 상대 군세를 물어뜯으며 길을 뚫었다. 그리고 이윽고 적들의 추격을 뿌리친 밀튼은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끔찍했다.
살아남은 병사의 숫자가 칠천도 채 되지 않았다. 일만 칠천에 달하던 병사 중에 일만이 이민족들의 손에 죽은 것이었다.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밀튼을 따르던 수많은 귀족들과 기사들도 목숨을 잃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분통함에 크게 소리치던 밀튼은 그만 화를 이기지 못 하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평소라면 혼절까지 가지 않았겠지만, 오랜 전투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던데다가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기에 아무리 밀튼이라고 하더라도 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밀튼이 혼절하자, 그의 가신들과 기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야영을 준비하도록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밀튼과 같이 분통해하면서도 그가 혼절했다는 소식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가신들은 혹시라도 밀튼이 죽을까 싶어 밤이 새도록 그를 간호했다. 그리고 이런 극진한 간호 덕분일까, 다음날 아침이 되자 밀튼이 깨어났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다들 아단트 여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기쁨 어린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탄성이 미처 막사 밖으로 새어나가기도 전에 밀튼이 그들을 조용히 시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죽었다고 소문을 내라.”
이리 말한 밀튼은 정말로 죽은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관을 짜고 그 안에 직접 들어갔다. 살아있는 사람이 관 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모든 가신들이 반대했지만 밀튼은 자신의 계획을 알려주는 것으로 불만을 잠재웠다.
“밀튼이 죽었다고 합니다.”
밀튼이 죽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애당초 밀튼의 막사에서 관이 나오자, 밀튼의 군세 전체가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밀튼의 군대를 정찰했던 병사들이 밀튼의 사망을 알려오자, 휴안의 귀족들은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믿기만 할까? 다들 환호성을 터트리며 기뻐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더없이 훌륭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휴안이 왕좌에 오르는 게 확실시 된 것이었다.
“자, 이제 이민족들을 몰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프리지아 남작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다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이민족들을 몰아내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물론 밀튼의 군세가 떨어져 나간 탓에 전력이 2만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이건 히르카 부족의 군세도 마찬가지였다.
밀튼이 마지막까지 흉악하게 물어뜯은 탓에 그들 또한 큰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프리지아 남작은 귀족들의 의견을 하나로 일치시킨 뒤에 휴안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휴안은 프리지아 남작을 무섭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밀튼이 먼저 배신했다 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밀튼이……. 밀튼이 이민족의 손에 죽은 것이오!”
이러한 휴안의 외침에 남작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전령이 잘 못 전달했던 모양입니다. 왕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전령을 처벌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지아 남작!”
“왕자님……. 아니, 전하. 이제 곧 보위에 오르실 분이 너무 큰 소리를 내는 건, 그리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이야.”
휴안은 진심을 담아서 경고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말에 남작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전하를 진심으로 모실 할 따름입니다.”
============================ 작품 후기 ============================
이 부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쓰는 겁니다.
elas 님 : 그래서 루이는 귀족들을 싹 쓸어버리려고 하죠.ㅋㅋ
로넨그린 님 : 확실히 사공도 문제고, 왕과 귀족이란 것도 문제죠
나는나다잉 님 : 명분이 필요합니다. 히르카 부족 같은 경우에는 이민족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약탈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 같은 경우에는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치지 못 하는 거죠.
노스아스터 님 : 음, 그쪽 전투는 잘 모르겠지만... 뭐, 사람이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하니 반복되는 게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