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6 / 0158 ----------------------------------------------
[다른 삶]
귀족들과 함께 전장을 이탈한 휴안이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또다시 밀튼의 추격대가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숨통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었다. 휴안은 지금 가진 병력으론 추격대와 맞설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강을 건너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강을 건넌 뒤에 다리를 끊어버릴 생각에서였다.
다만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그다지 넓지 않은 까닭에 다리는 순식간에 휴안의 병사들로 가득 메워졌다. 병사들은 밀튼의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과 성난 황소마냥 달려드는 추격을 피하기 서로 밀치고 주먹다짐을 했다. 더욱이 이 중의 대다수는 거친 용병들었기 때문에 제대로 통제가 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다리 위에서 떨어지는 병사들이 쉴 새 없이 보였다. 지옥, 그 자체였다. 휴안은 자신의 등 뒤로 들리는 비명 소리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피가 베어날 정도였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뒤늦은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 어리석은 전쟁을 시작해서는 안 됐었다. 차라리 얌전히 밀튼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수도, 팔칸을 도망치듯이 떠났어야만 했다. 아니면 막내인 루이처럼 영지를 받던가 말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말인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고 했던가? 지금 휴안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휴안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탄식하며 귀족들과 함께 추격대를 피해서 도망쳤다. 그리고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을 때, 살아남은 귀족들이 휴안을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힘을 내십시오, 왕자님. 아직 모든 게 끝난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왕자님의 외척은 칼렌 왕국이 아닙니까? 이렇게 된 거, 칼렌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확실히 칼렌 왕국에서도 아무런 인연이 없는 밀튼보다야 휴안 왕자님을 지지할 것입니다.”
귀족들의 말을 듣는 순간, 휴안은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 작자들은 제정신이 아니구나.’
만약 예전의 휴안이었다면 귀족들의 말에 혹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했으며, 휴안은 자신의 패배를 절감했다. 게다가 여기서 귀족들의 말대로 칼렌 왕국을 끌어들이게 된다면, 차후 휴안이 왕위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하폰 왕국은 더 이상 하폰 왕국이 아니었다.
그 때는 칼렌 왕국의 속국이 되어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니.’
어쩌면 밀튼 역시도 자신의 외척을 끌어들여서 제 3의 왕국을 끌어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폰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설혹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성세를 이루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차라리 이건……. 그래, 멸망이었다.
“나는…….”
휴안은 자신의 곁에 모여 있는 귀족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난 왕위를 포기할 것이오. 난 패배했소. 그대들도 이만 깨어나시오.”
딱 세 마디였다. 휴안은 자신의 심정을 귀족들에게 밝히고는 몸을 돌렸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휴안이 자리를 떠나자, 남은 귀족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틀렸군. 글러먹었어.’
‘이렇게 된 이상,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내 재산만이라도…….’
조금씩 생각하는 바는 달랐지만, 최종 목적은 같았다.
‘……휴안의 목을 밀튼 왕자에게 가져간다.’
적어도 이렇게 한다면 밀튼 왕자 쪽에서도 자신을 천대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공론으로 꺼낸 이는 다름 아닌 프리지아 남작이었다. 그 또한 전쟁 통에 행색이 말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 모두 검을 듭시다. 저 겁쟁이에게 현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처럼 프리지아 남작이 목소리를 높이자, 모든 귀족들이 자기 검을 뽑아들었다. 검을 뽑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서른 명이 넘어가는 귀족들이 휴안 왕자를 죽이기 위해서 움직였다.
한편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휴안은 홀로 탄식하며 밀튼에게 무어라 말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볼 면목조차 없구나.’
비록 귀족들의 말에 속아서 밀튼을 버리고 간 것이긴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결정을 내린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후퇴하자고 최후의 발언을 했기 때문에 군대가 뒤로 빠진 것이었다. 그렇다, 그곳에서 자신이 조금만 더 신중하게……. 하다못해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해보도록 했다면 밀튼과 이토록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응?”
이처럼 탄식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휴안이 있는 자리로 누군가 나타났다. 이에 깜짝 놀란 휴안이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테온과 쿤이 서있었다.
“휴안 왕자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뭐, 뭐?”
“그들이 왕자님을 해치기 위해서 오고 있단 말입니다!”
다짜고짜 이리 소리치는 테온의 말에 휴안은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지만, 귀족들이 이처럼 기다렸단 듯이 자신에게 검을 휘두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니냐?”
“오해가 아닙니다! 제 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왕자님. 지금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합니다.”
이리 소리친 테온이 ‘쿤!’이라고 소리치자, 옆에 서있던 거한이 휴안의 몸을 자신의 어깨에 들쳐 멨다. 이에 휴안이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며 발길질을 해보았지만, 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자!”
이처럼 쿤이 휴안을 어깨에 들쳐 메자, 테온이 크게 소리치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자리를 떠나고, 얼마 뒤에 프리지아 남작을 선두로 한 귀족들이 도착했다. 그 후, 프리지아 남작은 휴안이 도망쳤다는 것을 깨닫곤 이를 바득 갈았다.
“왕자가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되진 않았을 겁니다! 당장 뒤를 쫓읍시다.”
이리 말하며 몸을 돌리던 프리지아 남작이 돌연 뒤에 선 서른 명의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휴안 왕자를 보거든 이리 소리치십시오. 왕자님이 불한당에게 사로잡혔다고요.”
이러한 프리지아 남작의 말에 한 귀족이 ‘왜 그래야 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남작이 씩 웃으며 땅에 찍힌 발자국을 가리켰다.
“여기에 찍힌 발자국은 도합 세 쌍인데, 나갈 때는 두 쌍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할 것 같습니까? 두 놈이 와서 왕자를 설득했는데, 왕자에게 설득이 통하지 않자 억지로 데려간 겁니다.”
씩, 웃은 프리지아 남작은 낼름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즉, 우리는 왕자를 구하러 가는 겁니다.”
간단히 설명을 마친 프리이자 남작은 서른 명의 귀족들과 함께 발자국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처럼 서른 명이 넘어가는 귀족들이 말을 타고서 추격하자, 두 다리로 뛰고 있는 테온과 쿤을 금세 따라잡게 되었다.
“왕자님이 불한당에게 잡혀가신다!”
“왕자님을 구해라!!”
귀족들이 하나 같이 왕자를 구하는 척 하며 소리치자, 휴안의 고개가 번쩍 치켜들어졌다. 그리고는 테온을 향해 소리쳤다.
“이것 봐라! 저들이 지금 날 구하기 위해서 오지 않았느냐? 테온, 쿤! 당장 날 내려놔라!”
이러한 휴안의 외침에 테온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끔찍한 수를 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테온은 한순간 은혜고 뭐고 상관없이 휴안을 버리고 갈까 고민에 빠졌다.
‘아니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테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에 그 때, 휴안이 자신을 감싸주지 않았다면 테온은 꼼짝없이 밀튼에게 살해당했었을 것이다. 물론 휴안은 그 때의 일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은혜는 은혜였다.
짐승조차도 은혜를 갚는데, 인간인 자신이 갚지 않는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테온은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쿤! 왕자님을 지켜라!”
이러한 테온의 외침에 쿤 또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서른 명의 귀족들이 말을 탄 채로 테온과 쿤을 둘러쌌다.
“역시나 하찮은 것들이라서 그런지, 음흉한 속셈을 지니고 있었군. 그래, 왕자님을 납치해서 무엇을 하려 한 것이지? 밀튼 왕자에게 가져다 바치기라도 할 속셈이냐?”
한 귀족의 빈정거림에 테온은 차게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그건 네 놈들의 속셈이 아닌가?”
툭 쏘듯이 말하는 테온의 말에 몇몇 귀족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프리지아 남작이 검을 곧추세우며 ‘상정 못할 놈이로구나!’라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셈이었다.
테온은 날랜 말을 타고서 달려드는 귀족들의 공격을 겨우겨우 받아내며 쿤이 이들을 쓰러트려주기를 바랬다. 실제로 쿤은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쿤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 했다.
“당장 왕자님을 내려놓아라!”
“금세 구해드리겠습니다!”
귀족들이 이리 소리치며 쿤을 향해 달려들자, 휴안 역시 호응하듯이 쿤의 몸을 밀어내며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쿤! 당장 내 몸을 내려놓거라!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내 목숨을 구해준 그대를 기억하고 있기에 지금 이 죄는 묻지 않겠다.”
안팎으로 이러니, 제아무리 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귀족들의 목적은 휴안의 목숨이었기 때문에, 쿤은 신경도 안 쓴 채 휴안만 노려서 교묘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반면에 쿤은 휴안의 목숨을 신경 써야 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막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본 테온은 이를 악 물며 수를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좌우를 살핀 테온은 곧장 쿤 곁으로 내달리며 소리쳤다.
“쿤, 왕자님을 내게 넘겨라!”
이러한 테온의 외침에 쿤은 일말 고민도 없이 그에게 휴안 왕자를 넘겼다. 그리고 이처럼 왕자를 건네받은 테온은 그대로 검을 휴안의 목에 겨누며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왕자를 죽이겠다!”
이처럼 테온이 큰 소리로 말하자, 휴안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반발했다.
“테온! 정말로 날 배신한 것이었느냐!”
처절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테온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이에 몇몇 귀족들이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하찮은 놈, 드디어 속내를 드러내는구나.”
“그래, 얼마를 원하느냐? 한번 말해보거라.”
낄낄 대며 다가오는 귀족들의 행동에 테온이 보다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외침과 동시에 휴안의 목에 바짝 검날을 가져다대자,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덩달아 휴안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덜덜 떠는 떨림이 여실히 전해져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 귀족들의 표정에 난처함이 서렸다.
일단 왕자를 구하는 척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다가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 모두가 프리지아 남작을 바라보자, 남작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가면을 벗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계속 쓰고 있는 것이 나을지 계산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계산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일이 벌어졌다.
“아악!”
쿤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말을 탄 귀족들이 하나둘씩 쓰러져나갔다.
심지어 쿤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말의 목을 붙잡아 그대로 부러트리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이라 할 수 있었다.
“저런 미친……!”
그 광경에 화들짝 놀란 프리지아 남작이 서둘러 결단을 내렸다.
“……왕자를 죽이십시오!!”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외침에 휴안의 표정이 와락 무너져 내렸고, 테온은 웃었다.
“더러운 새끼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인 테온은 휴안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귀족들의 검을 쳐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잠시 휴안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왕자님도 죽기 싫다면 검을 잡으십시오!”
이러한 테온의 외침에 휴안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둘러오는 귀족을 보곤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검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향해 휘두르자, 챙 하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아!’
그 순간, 휴안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귀족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태극기를 게양해주세요!
그리고 독자님들 모두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도즈 님 : ...!
나데스 님 : 히익!
팀워크 님 : 항상 감사합니다!
노스아스터 님 : 용병에 관해서는 호불호가 상당히 많이 갈리는 편입니다. 노스아스터 님의 말씀대로 신의를 가지는 용병단이 있는가 하면, 정말로 부랑자 집단처럼 떠도는 한량들이 있습니다. 제 소설 속에선 그런 한량들로 묘사했고요. 물론 정말로 신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용병들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런 용병들의 경우에는 머리가 제정신인 경우입니다.
만약 제가 그런 용병단을 이끄는 단주라면 결코 지는 싸움에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일단 누가봐도 휴안은 밀튼에게 지게 되어있으니까요. 하물며 민심도 잃었고요. 결국 휴안의 편에 가담한 건, 그저 돈 좀 만져보려는 어중이 떠중이들 뿐이라는 소리입니다.
qoewh 님 : 저 금화가 루이가 밀튼에게 준 금화입니닼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