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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간담이 서늘해진 휴안은 재빨리 테온과 쿤을 도와서 귀족들을 상대했다.
상황이 명확해진 이상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휴안 왕자가 자기 의사를 가지고서 귀족들을 상대하기 시작하자, 테온의 숨통이 탁 트였다. 이제까지의 수세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반면에 귀족들의 얼굴에는 패색이 짙게 서렸다.
휴안 왕자를 죽이자며 건의한 프리지아 남작은 두 말 할 것도 없었다. 만약에 여기서 휴안 왕자를 죽이는데 실패하게 된다면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수를 쓸 자신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차선책에 불과했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휴안 왕자의 목을 베어서 밀튼에게 가져다바치는 것이었다. 다만 이 때, 휴안 왕자의 목을 베는 것은 프리지아 남작이 아닌 다른 귀족이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왕족을 죽이는 건, 분명 큰 죄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휴안과 척을 진 밀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형제를 죽인 귀족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이 될 귀족까지 물색해둔 상태였다.
‘앞으로 한 걸음인데!’
그런데 그 고지가 눈앞에 있는 거한 한 명에 의해서 가로막혀버렸다. 덤으로 그 옆에는 영악한 여우 한 마리 달라붙어있었다.
“왕자를 치십시오! 왕자만 죽이면 됩니다!”
프리지아 남작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외침에 여러 귀족들이 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걸 테온이 가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는 쿤에게 시기적절한 명령을 내리며 귀족들을 착실하게 쓰러트렸다. 덕분에 서른 명이 넘어가던 귀족들 중에 절반가량이 말에서 떨어져 신음하고 있었다.
참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낀 프리지아 남작은 남은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다들 하나 같이 겁을 집어먹고서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게 보였다. 도저히 싸울 태도가 아니었다. 설혹 싸운다고 하더라도 저 거한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겨우 셋인데!’
심지어 자신들은 말을 타고 있기까지 했다. 겉보기엔 더없이 훌륭한 토끼 사냥이었다. 그러나 막상 사냥에 들어가 보니 이건 단순 토끼 사냥이 아니었다. 토끼 곁에 웬 여우와 사자가 호위하듯이 서있는 것이었다.
“으으…….”
앓는 신음성을 내뱉은 프리지아 남작은 어떻게든 휴안의 목을 베기 위해서 이리저리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남작이 미처 방법을 찾아내기도 전에 테온이 성큼 뛰어오르더니 말을 타고 있는 귀족의 몸을 잡아당겨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또 하나의 귀족을 말 위에서 떨어트리고는 말고삐를 쿤에게 넘겨주었다.
“왕자님! 쿤!”
그 소리를 들은 쿤이 재빠르게 말 위에 올라탔다. 동시에 휴안은 테온이 내민 손을 붙잡아 그 뒤에 탔다. 이에 아차 싶어진 프리지아 남작이 크게 소리쳤다.
“놓치면 안 됩니다!”
다급히 소리치며 프리지아 남작이 휴안 왕자를 향해 달려드는데, 일순 쿤이 휘두른 검이 날아왔다. 부웅! 하고 거센 파공음을 만들며 날아오는 검날에 모골이 송연해진 남작은 재빨리 자신의 검을 치켜들어 막았다.
그러나 쿤의 검에 실린 힘이 얼마나 센지, 남작은 그만 버티지 못 하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남작!”
그 광경에 여러 귀족들이 크게 소리치며 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에 그는 잠시 프리지아 남작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저 멀리 먼저 가고 있는 테온의 뒤를 쫓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남작은 안도하는 동시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놓쳤구나.’
물론 지금이라도 휴안 왕자의 뒤를 쫓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쫓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과연 뒤쫓아서 붙잡을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만약에 이대로 쫓게 된다면 틀림없이 전멸하는 쪽은 자신들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하물며 쿤이라는 자는 괴물이었다.
부르르 몸을 떤 프리지아 남작은 몸을 일으킨 뒤에 다음 수를 생각했다.
한편 테온과 쿤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휴안은 더 이상 귀족들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테온이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도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왕자님.”
이러한 테온의 말에 휴안이 깜짝 놀라선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왕자님도 아시다시피 밀튼이 왕자님을 여전히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의 왕위 계승을 인정한다면 내 목숨 하나는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그리 생각하십니까?”
휴안의 말에 테온이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단 듯이 묻자, 일순 휴안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혀왔다. 확실히 저지른 죄가 있었기에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밀튼이 얼마나 불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던가? 목숨을 살려달라고 빈다고 해서 살려줄 위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사지를 잘라 성벽 위에 장식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밀튼, 개인의 성정을 따졌을 때의 일이었다.
“정통성이 부여되는 것과 날 죽이는 것. 무엇이 더 이득이 되는 지는 그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민족 토벌을 하기 이전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병사를 잃고, 귀족을 잃고, 더욱이 민심까지 잃은 왕자님을……. 이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가능성이 없단 이야긴가.”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한 테온은 말고삐를 단단히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왕자님께서 살 길은 두 가지 뿐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는 왕자님의 외척인 칼렌 왕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테온의 말에 휴안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안 된다. 내가 칼렌 왕국으로 가게 되면 이 나라는……. 이 나라는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탄식 어린 그의 목소리에 테온은 알게 모르게 미소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소를 싹 지우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하멜른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멜른? 그곳은…….”
“루이 왕자의 영지입니다. 덧붙여 중립을 고수하고 있는 세력 중에서도 가장 성세한 세력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밀튼 왕자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반딧불에 불과하긴 하지만……. 밀튼 왕자의 여동생인 비비안 공주와 약혼한 사이니 제아무리 밀튼이라 할지라도 다짜고짜 공격부터하지는 못 할 겁니다.”
“막내에겐 폐를 끼칠 순 없다.”
“정신 차리십시오, 왕자님!”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는 휴안의 태도에 테온이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그대로 말을 멈춰 세우며 말을 이었다.
“……밀튼은 미치광이입니다! 그가……. 그 자가 왕위에 올라선 안 됩니다.”
“그대는 어째서 내 형제를 미치광이라 부르는 것이냐?”
“왕자님께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밀튼 왕자가 쓴 졸업논문을……!”
“어찌 그대가 그걸……. 아!”
졸업논물이란 말에 화들짝 놀라서 소리치던 휴안은 불현듯 테온의 얼굴이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대였는가?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제야 알아보셨습니까, 왕자님?”
“이거 참……. 반갑기도 하면서도 씁쓸하기도 하군. 그래, 그 때 이후로 어찌 지냈는가?”
“밀튼 왕자에게 밉보여서 퇴학을 당한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갔을 뿐입니다. 그래도 그 때, 휴안 왕자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
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밀튼에게 밉보여서 퇴학을 당할 그를 써줄 영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라도 그를 관리로 임명했다가 밀튼에게 밉보이기라도 한다면 그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할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시금 묻는 테온의 태도에 휴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막내에게 가야되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민폐였다. 이대로 루이에게 간다면 자신은 짐 밖에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테온이 앞서 말한대로 밀튼은 미치광이였다.
그는 대륙을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이 단순 야욕에서 그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최초의 황제가 되고자 했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그것을 엄밀히 따져보자면 불가능했다. 밀튼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개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걸 가능케 할 계획을 착실하게 세워둔 상태였다.
심지어 비인륜적인 행동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인종 청소였다.
더욱이 그 계획이 너무나도 세세해서 구역질이 치밀어오를 정도였다.
“가자, 하멜른으로.”
이처럼 휴안의 결단이 내리자, 테온은 두 말 않고서 하멜른을 향해 말을 이끌었다.
한편 하멜른에서 밀튼과 휴안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던 루이는 휴안이 두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크게 패해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탄식했다.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단 두 차례였다.
수십여 차례 회전을 거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더욱이 군대를 정비하고 있는 도중에 휴안이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헛소문이 돌아서 그 군세가 급격하게 무너졌다고 한다.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렸는지,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역시 밀튼 형님은 밀튼 형님인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루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그 소리를 자기를 부르는 소리라 착각한 견인족 소녀……. 아니,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된 세람이 귀를 쫑긋 세우며 루이의 곁으로 달려왔다. 이에 루이는 세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상념에 잠겼다.
============================ 작품 후기 ============================
삼자 대면을 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군요.
[炎風] 님 : ㅋㅋㅋ 백골이 진토라니.ㅠㅠ
메카닉덕후 님 : 근데 용병단에 대한 평가는 전부 다 제각각이라서요. 실제로 깡패나 다름 없는 용병단도 많았고요. 원래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잖아요.
rlawlgus 님 : 확인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ㅎ
shutup23 님 : 테온이 밀튼에게 죽을 뻔 했을 때, 휴안이 살려준 적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돕는 겁니다. 게다가 밀튼은.. 진짜 미친놈이거든요.
스텍터 님 : 네, 감사합니다.ㅎ
노스아스터 님 : 물론 밀튼의 성격상이라면 죽이겠다고 하겠죠. 하지만 주변 귀족들이 그러지 말자고 할 겁니다. 적당히 죽이고 적당히 살려두는 편이 장차 큰 이득이 될테니까요. 원래 정치란 게, 개인 감정만으로는 안 되는 법이죠. 루이의 영지가 비정상적인 겁니다. 아, 일종의 독재라고 보시면 되겠군요.
AliceChong 님 : 포악한 왕ㅋㅋㅋ 확실히... 밀튼은 희대의 미치광이 왕이 되겠죠. 하지만 만약 정말로 대륙을 통일한다면? 아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