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폰 전기-119화 (119/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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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아놀드와 테온, 두 사람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루이는 곧장 활터로 나갔다.

그곳에선 레베카와 아만다가 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루이에게 활쏘기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엘프만큼 활쏘기에 능한 종족은 또 없으니 말이다. 물론 아벨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는 엘프라고 해도 믿을만큼 활을 잘 쏘았으니 말이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엘프보다 더 했다. 엘프 중에 엘프, 고대의 엘프라 불리는 하이 엘프라면 그나마 아벨과 견줄 수 있을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여하튼 레베카와 아만다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리고 간간히 루이의 자세를 봐주는 아벨 또한 훌륭한 스승이었고 말이다.

루이는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활을 쏜 뒤에 찬 물로 몸을 식혔다. 바로 식히는 건 좋지 않다며 아만다가 매번 잔소리를 하지만 뜨겁게 덥혀진 몸을 찬물로 식힐 때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웠기에 루이는 잔소리를 감수하고 몸을 찬 물로 씻어 내렸다.

기분 좋게 웃은 루이는 몸을 정갈히 씻은 뒤에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루시아와 비비안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특별하게 어제 방문한 루이의 형인 휴안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왕성에서도 볼 수 없었던 희귀한 장면이었다.

네 남매가 이렇게 한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는 장면은 말이다. 만약에 이 장면을 아슬롯이 보았다면 흐뭇하게 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죽은 아슬롯의 모습을 떠올리니 루이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두 번의 죽음, 그것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번 생에서 아슬롯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일까? 잘 생각해보면 이전 삶에서 아슬롯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굉장히 드물었다. 그저 가끔씩 아슬롯이 루이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몇 번 지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루이는 낯설음에 아슬롯을 피하곤 했었다.

잘 생각해보면 왕성에서 루이를 별다른 편견 없이 봐주던 이는 아슬롯과 루시아 밖에 없었던 듯이 싶었다.

새삼 그리워지긴 했지만, 이내 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슬롯은 죽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할 때는 모든 일이 다 끝나고, 죽음을 기다릴 때뿐이었다. 그 외의 시간을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될 뿐이었다. 루이는 애써 웃는 얼굴을 하며 자리에 앉고는 형, 누이들과 함께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에 루이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쿤을 기사로 임명하고 싶은데, 마침 네 영지에 기사와 남작이 있지 않느냐? 더욱이 루이, 너도 있으니 훌륭한 증인이 되어줄 듯이 싶구나.”

루이가 알기론 쿤은 평민이었다. 하물며 얼굴에 흉측한 흉터가 잔뜩 나있는 사내였다. 그런 자를 대뜸 기사로 삼겠다니, 루이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루이가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묻자, 휴안이 잔뜩 흥분해선 쿤의 활약을 이야기해주었다. 단신으로 말을 탄 밀튼을 가로막았던 것부터 시작해서 귀족들이 배신을 했을 때, 혼자서 대다수의 귀족들을 때려눕혔다는 것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루이는 쿤이 단신으로 밀튼을 가로막았다는 이야기에 놀람을 금치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가 알기론 밀튼의 무위가 하폰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밀튼, 그 혼자서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서 몇 번이고 휴안과 루이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더욱이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런 무모한 짓을 했으면서도 매번 유유히 본진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기사들의 머리를 전리품 삼아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상대하는 입장에선 숨통이 턱턱 막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철가면 앞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 하지만 말이다. 아니, 어쩌면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할지도 몰랐다.

밀튼은 혼자서 적진을 파고들면서도 지휘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반면에 철가면은 지휘란 게 없었다.

애당초 지휘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달려들면 적들은 도망치기 바빴으니 말이다.

밀튼이 어느 정도 타협을 할 수 있는 비바람이라고 한다면, 철가면은 타협을 할 수 없는 폭풍이었다.

‘쿤……. 쿤, 그가 철가면인 걸 아닐까?’

재차 루이의 머릿속에 의혹이 떠올랐다. 물론 아닐 확률이 다분하기는 했다. 하지만 별다른 무장 없이 단신으로 밀튼을 가로막았다는 것은 충분히 그가 철가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하물며 밀튼은 그 때, 말을 타고 있었고 쿤은 타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정면 대결을 할 때, 말을 탄 것과 타지 않은 것의 차이는 매우 컸다. 게다가 쿤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서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곰곰이 생각해보던 루이는 이내 휴안에게 이리 말했다.

“그 자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이리 말한 루이는 곧바로 아자젤을 불러들였다. 아벨과 맞붙게 할 수도 있었지만, 평민 출신인 아벨을 내세웠다간 자칫 휴안을 모욕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귀족 자제이며 기사인 아자젤을 불러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아자젤과 쿤이 루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오호.”

두 사람 모두 출중한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아자젤이 조금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일단 아자젤의 검이 너무 가벼운데 비해서 쿤의 검은 너무나도 무거웠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웃긴 게, 묵직하게 휘두르는 주제에 그 속도가 어지간한 기사 못지않게 빠르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천하의 아자젤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괴물이 대체 어디서……?’

정교하진 않지만 불시에, 그곳도 전혀 예상지도 못 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오는 쿤의 공격에 결국 아자젤은 한 대 제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그 동안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 검을 휘두르던 아자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반면에 쿤 또한 아자젤과의 대결에서 많은 것을 얻은 듯이 은근히 기뻐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루이는 온 몸에 털이란 털이 오소소 곤두서는 걸 느꼈다.

‘철가면!’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는 분명히 철가면이었다. 아직 덜 성숙했지만, 틀림없이 철가면이었다. 특히나 완벽하진 않지만, 저 짐승 같은 검술은 루이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완벽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워낙에 거친 검술이다 보니 감히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검술이었다.

그런데 그 검술을 쿤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루이의 기억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천천히 숨을 몰아쉰 루이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얼굴을 쓸어내린 루이는 곧바로 휴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쿤이란 자를 기사로 임명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가 보기에도 그래 보이느냐?”

휴안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해 보였다. 하기야 자기가 밀어주고 있는 자가 루이가 내세운 기사를 이기고 당당하게 서있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루이는 이런 휴안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안?”

“그렇습니다. 지금 쿤이란 자는 기사가 되기엔 여러모로 예절이 부족합니다. 또한 그의 검술을 보니, 저 또한 깨닫는 바가 있어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싶습니다.”

이러한 루이의 예상지 못 한 제안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보인 휴안이었지만, 이내 좋은 뜻이란 걸 알고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안의 입장에선 딱히 거절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허락을 받아낸 루이는 그날로 곧장 쿤을 따로 연무장으로 불러내었다.

“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아는가?”

“알고 있다. 난……. 가르치고 배운다. 검술.”

띄엄띄엄 말하는 쿤의 행동에 루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말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로군. 하폰 출신이 아닌가?”

“아니다. 하폰인이다. 다만……. 말하기 어렵다. 입 안이 눌어붙었다.”

“화상 때문인가 보군. 화상은 언제 입었지?”

“…….”

이런 루이의 물음에 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보아하니 안 좋은 기억을 루이가 들춰낸 모양이었다. 이에 루이는 검을 뽑아들며 입을 열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의 과거……. 어차피 중요하지 않으니.”

“……?”

중요하지 않단 말에 쿤이 의문을 표시하자, 루이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지금 이 현실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쿤?”

이리 말한 루이는 한 걸음 떨어진 뒤에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회귀 이전에 철가면이 사용하던 검술을 떠올렸다. 그것은 하나의 폭풍이었다. 루이는 그것과 닮기 위해서 호흡을 골랐다. 폭풍을 따라 하기 위해선 자신 또한 폭풍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폭풍은 루이와 같은 범인이 감히 감당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잘 못 따라했다간 오히려 자신의 몸만 상할 뿐이었다. 어쩌면 근육이 뒤틀리고 뼈가 어긋나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때문에 루이는 빠르게 휘몰아치기보다는 봄바람처럼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검을 내뻗었다.

어차피 이건 실전이 아니었다. 쿤에게 보여주면 그걸로 족했다.

루이는 철가면의 검술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짚으며 검을 휘두르고 발을 내딛었다.

“……!”

그리고 이처럼 루이가 검을 뻗을 때마다 쿤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종래에는 믿기 힘들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쿤은 마치 홀린 것처럼 루이의 검술을 지켜보다가 마지막에는 실핏줄이 다 보일만큼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 검을 휘둘러보고 싶다는 의지가 가득해보였다. 하지만 루이가 휘두르는 검술 또한 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당장의 충동을 억누르며 두 눈으로 똑똑히 새겼다. 그리고 이윽고 루이의 움직임이 멎자, 쿤은 신 내림이도 받은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핫!”

그 모습에 루이는 저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딱 루이가 원했던 모습이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기세에서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루이는 쿤의 움직임이 멈추기를 기다리며 그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쿤이 휘두르던 검이 우뚝 멈추자, 루이는 그에게 다가가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여기선 발을 좀 더 넓게 벌리고, 검을 좀 더 바짝 당겨라.”

루이의 말에 쿤은 별다른 군말 없이 따랐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따랐다. 그의 시선에선 어느샌가 존경의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무리도 아니었다. 쿤과 같은 사람은 매번 힘을 갈망한다. 보다 높은 무력을 얻길 소망하며 자신만의 검술을 갖고자 한다. 그런데 그 길을 루이가 시원하게 뚫어주었으니, 쿤으로선 감격하지 않으려야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항상……. 이런 검을 원했다.”

나지막하게 쿤이 이리 말하자, 루이가 씩 웃으며 그의 팔을 툭 쳤다.

“곧 얻게 될 거다, 쿤.”

이런 루이의 말이 쿤의 가슴을 보다 뜨겁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쿤에게 플래그를 꽂는 루이.

돔페리뇽 님 : 킹 메이커라니! 엌ㅋㅋ

반딧가 님 : 그렇긴 하죠. 하지만 혁명이란 이름으론 충분히 가능한 사상이죠

리눅 님 : 네, 감사합니다!

superrobot 님 : 사실 루시아가 무쌍입니다.라는 건 거짓말이고, 그냥 루시아니까 무난하게 들어온 겁니다. 공주님 가시는 길을 누가 감히 막겠습니까?

qoewh 님 : 테온 건들며 큰일나요.ㅋㅋ

노스아스터 님 : 존왕이요?

희설아 님 : 감사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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