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폰 전기-120화 (1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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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쿤은 천재였다. 다만 그것이 검술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긴 했지만, 적어도 검술에 관한 것이라면 그 누구도 쿤을 따라갈 수 없었다. 물론 이 넓은 대륙 어딘가, 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루이의 기억 속에는 쿤보다 더한 검의 천재는 단 한명도 없었다.

설사 밀튼이 말년까지 살아남아 검을 완성시킨다고 할지라도 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루이는 매시간 변해가는 쿤의 모습에 만족하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모두 꺼내놓았다. 철가면의 사소한 버릇부터 시작해서 분위기, 그가 즐겨 사용하던 검술까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에서 질리도록 보았던 것이었기에 루이는 쿤에게 생생하게 전해 줄 수 있었다.

기실 실제로 겪어본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루이의 가르침에 감동한 것인지, 쿤은 보다 열성적으로 배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점차 친숙해지자, 쿤은 루이를 스승처럼 따랐다. 루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았기에 기껍게 받아주었다.

애당초 루이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쿤이 당장은 휴안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앞으로 몇 년 뒤에 병으로 죽을 운명이었다. 물론 작금의 현실이 바뀐 이상, 휴안의 삶이 어떠한 식으로 변하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설혹 병으로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곧 밀튼이 휴안을 내놓으라며 루이에게 으름장을 내어놓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겁박에 못이긴 루이는 어쩔 수 없이 휴안을 내놓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장 밀튼과 맞붙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쿤이 모셔야 될 주군이 사라지게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이 때, 쿤이 다음으로 선택하게 될 주군이 누구일가? 세 살 배기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쿤이 루이에게 실망해 떠나려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때, 루이가 그를 잘 다독인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좋은 말로, 어린 아이를 다그치듯이 휴안을 밀튼에게 보낸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속삭이고, 기회가 된다면 밀튼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쿤은 복수를 원할 테니, 틀림없이 루이를 따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여기선 최대한 몸을 웅크린 뒤에 힘을 차근차근 기르면서 밀튼이 본격적으로 미친 짓을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밀튼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루이가 검을 치켜드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루이는 자신 있었다.

‘쿤, 아벨, 오필리아, 비앙카…….’

비앙카는 논외로 치더라도 쿤, 아벨, 오필리아 이 세 사람은 하폰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반란군의 수장들이었다. 더욱이 지금 루이의 곁에는 회귀 이전에 북부를 안전하게 막아주고 있었던 아자젤도 함께 하고 있었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부족한 병사들의 숫자만 채워놓는다면 밀튼과 당장 맞붙더라도 두려울 것이 하등 없었다.

‘……게다가 밀튼이 인종 청소를 시작할 때, 로데인을 최대한 많이 살려서 보호해준다면 차후에 큰 도움이 되겠지.’

비록 이런 루이의 행동이 밀튼에게 밉보이게 될지도 몰랐지만, 어차피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심증이 간다고 한들 물증이 없으면 추궁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루이는 천천히 미래를 그려나가며 밀튼을 대비했다.

그리고 이처럼 한 달 정도가 지나자, 밀튼이 루이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을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루이가 휴안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순순히 휴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밀튼이 어떻게 휴안이 하멜른에 있는 줄 안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당초 휴안을 배신한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 줄 뻔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히 휴안의 신변을 밀튼에게 알려주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려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이 와중에 몇몇 귀족들이 본보기로 목이 베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대다수가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매우 훌륭한 처신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구역질이 치밀어오를 정도였다.

“……적법한 왕이 명하건 데, 후작은 왕의 명령을 따라 죄인 하폰 휴안 미스틸을 이끌고 왕도, 팔칸으로 오라.”

적법한 왕이라니, 침상에 누워있는 루이의 아버지, 하폰의 국왕이 벌떡 일어나서 노발대발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 내일 하며 끙끙 앓고 있는 국왕의 상태를 떠올려본다면 충분히 적법한 왕이라 불릴 만도 했다.

물론 평상시 같았다면 오만방자한 발언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문서로 자신을 적법한 왕이라 칭한 것을 보면 이미 수도는 밀튼의 손에 온전히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국왕 또한 이미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눈에 훤했다.

밀튼은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관을 머리에 쓴 뒤에 오만하게 왕좌에 앉아있을 것이다.

밀튼답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이끌고 오라고?’

이게 걸렸다. 루이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휴안이 중요한 죄인……. 즉, 패한 왕자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루이가 직접 호송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다만, 호송에 관한 문제는 루이가 직접 판단할 일이었다.

왕이라고 해서 왈가불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음모를 늘여놓을 수가 있었다.

더럽고 비열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나와 휴안을 적당히 처리하려는 속셈인가.’

밀튼의 심성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만약에 루이가 밀튼이었다면, 일전에 받은 화승총을 경계했을 테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총이란 무기는 기사의 시대를 종지부를 찍는 도장과도 같았다.

검과 방패의 세계가 점차 검은 화약의 시대로 변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기사의 두꺼운 갑주를 뚫기엔 총알이 너무나도 빈약하기는 했지만, 운이 좋아서 이음새라던가 눈구멍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단번에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기사는 키우는데 있어서 비싼 값이 드는 반면에 총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라 할지라도 총기 사용법만 숙달한다면 한두 달 내로 능숙하게 다룰 수가 있었다. 그 누가 보아도 총이 기사에 비해서 월등히 좋았다.

이렇다보니 밀튼은 분명히 루이가 건네준 화승총을 경계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휴안을 배신한 귀족들이 꼬드기기까지 하니, 더없이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아니, 설혹 밀튼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충실한 가신들이 알아서 루이를 죽이려 음모를 꾸몄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화승총 때문이 아니라면 하멜른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겠지.’

카샤의 가루가 탐이 났던가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유는 너무나도 많았다.

값비싼 카샤의 가루.

기사의 기대의 종막을 알리는 화승총.

몬스터 웨이브를 별다른 피해 없이 막아낸 하멜른 그리고 왕을 위협하는 형제.

간단히 말해서 지금 현재로선 루이가 밀튼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큰 잠재적 위험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말이다. 루이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담담하게 루이를 바라보고 있는 휴안이 보였다.

그는 이미 루이가 무슨 선택을 하던 간에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겉으론 저렇게 보여도,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서 고군부투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매번 휴안의 곁을 맴돌고 있던 테온이란 자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배신한 귀족들로부터 휴안 형님을 구해냈다고 했던가.’

그런 걸 생각해보면 테온이란 자 역시 무언가 비범한 면이 없잖아 있는 듯이 싶었다.

루이는 한동안 주변을 돌아보다가 이윽고 밀튼이 보낸 사신을 바라보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여기서 밀튼의 명의 받아서 휴안을 하폰의 수도, 팔칸으로 호송했다간 꼼짝없이 가는 길에 도적으로 위장한 병사들에게 살해당할 판이었다. 물론 아벨과 아자젤을 데려간다면 간단히 적들을 뿌리쳐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수도에 들어선 뒤였다.

분명 온갖 음모가 판을 치며 루이를 죽이려 들 것이 틀림없었다. 과연 그 음모의 늪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일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테온이란 자가 손을 써서 휴안을 빼돌리기라도 한다면?

물론 그럴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정말로 발생하게 된다면 밀튼으로서는 루이가 휴안을 풀어줬다고 밖에는 생각하지 못 할 것이다.

‘……내 생각이 얕았군.’

철가면과 친분을 쌓았다는 것에 들뜬 나머지 너무 깊게 심계를 꾸미지 않았다. 최악 중에서도 최악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되었다. 이건 명백한 루이의 실책이었다. 그런데 또 웃긴 건, 이걸 짐작하고 있었더라도 어떻게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이걸 막으려면 휴안에게 자금을 대주지 말고, 휴안이 하멜른을 찾아왔을 때 매몰차게 내쫓아야되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러지 못 했다. 휴안을 매몰차게 내쫓기보다는 그를 따스하게 받아주었다.

‘난 반푼이다.’

아슬롯처럼 완벽하지 못 하고, 밀튼처럼 냉철하지도 못 했다. 그렇다고 해서 휴안처럼 순수하지도 못 했다. 심지어 넷째 왕자, 로렌스처럼 자신을 철저히 숨기지도 못 했다.

스스로가 우스울 정도로 모든 게 어중간했다.

완벽하지도 냉철하지도 순수하지도 초탈하지도……. 잠시 숨을 들이켠 루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반푼이답게 싸워주지.’

자, 결단의 순간이다.

루이는 맞은편에 서있는 사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거절하겠다. 휴안 형님은 보낼 수 없다.”

봄의 마지막을 알리는 바람이 불던 날, 루이는 왕명을 거절했다.

============================ 작품 후기 ============================

반푼이지만 미래를 알고 있죠.ㅋㅋㅋㅋㅋㅋㅋ

나데스 님 : 히익! 전 맛 없습니다!

향향공주 님 : 아수라 파천무!!

돔페리뇽 님 : 루시아는 나중에 많이 나올 겁니다.ㅎ

비오는날엔우울해 님 : 게이 로드라니.ㅋㅋ

qoewh 님 : 그러게요. 다 같이 먹는 건 참 훈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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