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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예지]
매끄러운 산등성이 너머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완연한 봄 날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이 틀 무렵에는 항상 머리가 아려올 정도로 시립기만 했다. 특히나 시린 아침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울 때면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 정도였다.
“영주님, 여기 계셨습니까?”
그 때, 뒤쪽에서 낯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놀드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계단을 따라 올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루이가 있는 곳까지 올라오더니, 이윽고 그 옆에 서며 입을 열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될지…….”
“…….”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루이는 담담히 듣기만 했다. 아놀드는 그런 루이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다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따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혈육을 사랑하고 계신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건……. 아시지 않습니까?”
아놀드는 루이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더니,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를 돌자, 산 속에 자리를 잡은 도시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정갈하게 펼쳐져 있는 도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을 보는 듯했다.
이건 아놀드의 자랑이었고, 하폰……. 아니, 대륙의 그 어떤 도시와 비교하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하멜른의 도시 풍경이었다.
“그 때, 내가 승낙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화는 가능했을 것입니다.”
“대화……. 그래, 대화가 있기는 하지.”
루이는 피식, 웃으며 밀튼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도 이 모든 건, 밀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닐 것이 틀림없었다. 천하의 밀튼이 이런 꼼수를 부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당초 밀튼이었다면 일찍이 군사를 몰아서 하멜른을 공격해왔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쩐 일에서인지, 밀튼은 군사를 이끌고 하멜른을 공격하기보다는 사방을 봉쇄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멜른이 산간 지역에 세워진 도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두어서 일절 모든 상단의 출입을 금지시킨 것이었다.
하멜른의 입장에선 끔찍한 재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루이가 일찍부터 식량을 창고에 비축해두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무리해가면서까지 식량을 비축해두지 않았다면 벌써부터 창고가 동나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것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길어야 1년.
짧으면 반년이었다. 그에 반해서 밀튼을 무기한 봉쇄를 할 수 있었다.
지금 하멜른은 대륙 속에 섬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 누구도와도 교역을 할 수 없는 외톨이 섬 말이다. 아니, 차라리 섬이었다면 사정이 나았을 것이다. 섬에서라면 적어도 물고기라도 낚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는 산이었다. 그것도 랄프 산맥 말이다.
먹을 거라곤 약간의 산짐승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몬스터들의 먹잇감이었다. 애당초 하멜른에서 산짐승을 사냥하기 시작하면 굶주린 몬스터들이 포악하게 하멜른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몬스터들에게 있어서 하멜른만큼 먹음직한 먹잇감은 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몬스터를 먹을 수도 없고…….’
어딘가 먼 왕국 혹은 야만족들이 몬스터를 식량삼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적어도 하폰에선 아니었다. 몬스터를 먹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인간 이하 취급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문득 아놀드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휴안 왕자를 팔칸으로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놀드, 그대는 정말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입니다.”
아놀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정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애당초 여기서 하멜른이 행동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막말로 고립된 섬처럼 알아서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백기를 내걸던가 말이다.
어쩌면 차라리 밀튼이 대군을 이끌고서 하멜른을 쳐들어오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적어도 먹을 입을 하나라도 더 줄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비정하긴 해도 이것이 현실이었다.
“밀튼은 하멜른을 욕심내고 있다.”
루이는 아놀드와 마찬가지로 하멜른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도시였다. 아무것도 없던 도시를 밑바닥부터 세운 것이었다. 점점 커져가는 도시를 보는 것만큼 감격스러운 일도 없었다. 그만큼 애정도 깊었다. 만약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하멜른을 수도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몬스터들이 득실대는 곳을 수도로 지정하다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카샤의 가루와 화승총 그리고 랄프 산맥의 몬스터들을 가로막는 울타리.”
밀튼이 루이를 왜 죽이려 했는가, 그리고 귀족들의 말을 따라서 하멜른을 곧장 치지 않고 봉쇄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 세 가지를 들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하멜른을 고립시킴으로서 밀튼은 아무런 손해도 없이, 깔끔하게 위의 세 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루이가 하멜른을 직접 불태우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밀튼은 알고 있을 것이다. 루이가 결코 그러지 못 한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루이가 밀튼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면, 루이와 휴안의 목이 잘리는 것으로 깔끔하게 정리되겠지만, 만약에 루이가 하멜른을 불태우기라도 한다면 그곳에서 살던 주민들은 물론이고 가신들까지 밀튼의 손에 죽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루시아와 비비안마저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정이었다.
아마도 밀튼은 루시아와 비비안의 가치를 높게 사서, 죽이는 것 대신에 늙어서 숟가락 하나 들 힘없는 늙은 귀족 혹은 왕에게 시집을 보낼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고약한 성적 취향을 가진 자에게 보내던가 말이다.
실제로 밀튼은 그런 비정한 자였고 말이다.
그에게 인정이 있었다면 강제로 시녀를 품에 안아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킨 뒤에 그토록 잔인하게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있는 한 밀튼은 끊임없이 내 목숨을 노릴 것이다.”
하멜른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하멜른의 가치가 너무나도 높아졌다. 특히나 화승총의 존재는 루이조차도 예상하지 못 한 것이었다. 만약에 그 때, 램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멜른이 이토록 깔끔하게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지도 못 했을 것이다.
아니, 몬스터 웨이브뿐이겠는가? 북부를 침략한 이민족들을 막기 위해서 루이가 군대를 이끌고 가지 않아도 됐었다. 더욱이 몬스터들에게 큰 피해를 입은 하멜른에 병사가 있을 리가 만무했으니 말이다. 그걸 빌미로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화승총의 존재로, 드워프 램지의 존재로 몬스터들을 너무나도 수월하게 막아내었다. 때문에 카샤의 가루 이외에 무려 두 가지나 이점이 생긴 것이었다.
행운은 항상 시기를 끌고 다닌다.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영주님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놀드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루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싸워야겠지.”
이리 말한 루이는 푸르디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린 승리할 것이다.”
============================ 작품 후기 ============================
하멜른을 가장 사랑하는 가신을 뽑으라 하면 단연 아놀드죠.
진짜 루이와 함께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만들어냈으니까요. 국가로 따지면 개국공신이죠.ㅎ
나데스 님 : 저, 저도! 저도 사랑해요!
향향공주 님 : 한 뚝배기.ㅋㅋ
rlawlgus 님 : 엌ㅋ 죽창 좋군요.ㅋㅋ
은빛*눈꽃 님 : 이런 제가 잘 못 적었네요. 수정했습니다
보람찬 님 : 맞아요. 미래를 아는 반푼이가 제일 좋죠.ㅋㅋ
유령세상 님 : 엄청 빨리 일어나고 있는 거죠. 게다가 루이의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비 효과도 있고요. 대표적인 게, 북부 이민족들이죠. 루이가 아자젤만 안 빼왔어도 충분히 막았을텐데 말이죠.
사신할래여 님 : 쿠폰 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