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3 / 0158 ----------------------------------------------
[예지]
아르페 평원으로 향하는 동안 루이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유스테스 백작을 비롯한 하멜른과 인접해있는 영지의 영주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즉슨, 다른 누군가가 하멜른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거든 곧장 하멜른에 소식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밀튼이 이미 점찍어 놓은 영지를 냉큼 가로챌 만큼 간 큰 귀족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하물며 귀족이란 족속은 때때로 권력을 위해서 혹은 가문을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서 루이는 유스테스 백작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에게 부탁을 했다. 그리고 이런 루이의 편지를 받은 그들은 두 말 할 것 없이 승낙했다. 오히려 일전에 루이의 도움으로 자신의 영지와 영지민들을 몬스터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은혜를 드디어 갚을 수 있게 되었다면서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귀족들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서 루이에게 가세하려 했지만, 루이는 점잖게 그들의 뜻을 거절했다.
거절을 한 데에는 많은 이유가 따랐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혹시 모를 변심을 경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만도 안 되는 아군에 비해서 상대는 무려 십만이었다.
이미 결심을 한 루이조차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데, 은혜를 갚겠단 마음으로 합류한 영주들은 어떻겠는가? 사람인 이상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루이는 이러한 이유에서 그들의 합류를 거절하고, 하멜른을 잘 지켜달라는 부탁만 남겨두었다.
“약혼이라…….”
그리고 또 하나의 조치. 그것은 테온 백작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하멜른에서 아르페 평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테온 백작의 영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루이는 테온 백작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군대가 아르페 평원으로 향하는 동안 다른 귀족들이 이끄는 군대가 테온 백작령 안으로 들어오지 못 하도록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실제로 영주는 자신의 영지와 영지민을 지키기 위해서 타 영지의 군대가 자신의 영지 내로 들어오는 것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막거나 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힘, 즉 강한 군대가 있어야만 되었지만 다행히도 테온 백작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루이의 도움을 받아 에드윈 백작령을 흡수한 뒤에 공작 못지않게 힘을 키운 테온 백작이었다.
그리고 이런 루이의 부탁에 테온 백작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니, 오히려 한 발 더 나가서 루이에게 다시금 혼약을 제의했다. 이번 기회에 밀튼의 여동생인 비비안과의 약혼을 깨트리고, 자신의 딸과 결혼을 하자면서 말이다. 다만 이 결혼은 테온 영애가 루이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닌 루이가 데릴사위로 테온 백작 가로 오는 것이었다.
모계 결혼이었다.
즉, 테온 영애와 결혼하게 됨으로서 루이는 더 이상 하폰 왕가의 사람이 아닌 테온 백작 가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루이는 자연스럽게 왕위 계승권을 잃게 되면서 더 이상 밀튼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남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한들 하멜른을 잃게 되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분명 루이로서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기실 이건 밀튼에게 밉보이는 것을 각오하고서 루이의 목숨을 챙겨주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루이는 정중하게 테온 백작의 제안을 거절했다.
애당초 루이는 이미 각오를 굳힌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르페 평원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말이다. 여기서 테온 백작 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았다.
물론 테온 백작이 보내온 답장을 받았을 때, 아주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다.
‘여기서 테온 백작 가의 사위로 들어가게 된다면 한동안 평온한 삶을 가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자신이 한 일이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멜른을 세운 일부터 시작해서 비비안과 약혼하고, 휴안을 지원하고 그리고 휴안을 옹호한 것까지. 전부 다 무의미한 일로 돌아가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여기선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되었다.
모든 것을 잃느냐, 모든 것을 얻느냐.
다행히도 여신은 루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여주고 있었다.
“삶이란 참 알 수 없군.”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회귀 이전에는 지금처럼 루이를 옹호해주는 귀족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렸고,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루이를 왕좌에서 끌어내어 반란군에게 넘겨주었다.
그 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루이에게 은혜를 입은 모든 귀족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소년을 도와주고 있었다. 무언가 부탁을 하면 그 이상으로 보답을 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입장이 정반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귀족들이 루이를 도와주고 있었다.
“……정말로 알 수가 없어.”
루이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막사 안을 둘러보았다. 램프에 담겨있는 불빛 하나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사 안은 충분히 밝았다. 루이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 잠시 하멜른을 떠날 당시를 떠올려보았다.
자신이 직접 밀튼을 설득해보겠다며 루이와 함께 가려했던 비비안, 그리고 루이의 품에 안긴 채로 흐느껴 울던 루시아. 그 외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루이의 곁에 모여들어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왔다. 반대로 루이와 함께 하멜른을 나서는 군대와 가신들은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다들 절망적인 상황이란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말 두려움을 내비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루이와 함께라면 지옥 불에도 기꺼이 몸을 던져주겠다는 각오마저도 얼핏 내비쳐 보일 정도였다.
충성스런 병사들과 믿음직한 장수들이었다.
루이는 문득 반란군의 수장이 이러한 기분을 맛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상황이 참 비슷하군.’
당시 반란군이 출현했을 때는 1만도 채 되지 않았었다. 하폰의 군사력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루이를 꼭두각시로 만든 귀족들은 반란군을 우습게보며 동등한 숫자인 1만의 병력을 보내서 반란군을 격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랍도록 끔찍했다.
동등한 숫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은 일백 남짓한 사망자만 낸 채로 정규병을 전멸시켰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귀족들은 당시 지휘관의 무능함을 욕했다. 그리고 이 수모를 씻어내고자 다섯 배 많은 5만의 병력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만의 반란군이 5만의 병력을 단 일주일 만에 전멸시켜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반란군이 정규병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이 하폰 전역에 알려지자,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반란군에 가담했다.
무기가 없다면 농기구라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수십만의 반란군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눈 깜짝 할 사이였다. 귀족들 역시도 제때 반응을 하지 못 했다. 그 때문에 반란군이 수십만으로 늘어날 때까지 멍청하니 손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뒤늦게 정규병을 편성해서 반란을 진압해보려고 했지만, 철가면을 위시한 아벨과 오필리아에게 철저히 유린당하며 짓밟히고 말았다.
“쿤, 아벨……. 오필리아.”
그런데 지금 이 세 명이 자신의 손에 있었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심지어 아자젤도 그의 편에 있었다.
‘그리고 난 미래를 알고 있지.’
숫자에서 밀린다는 것뿐이지, 두려울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 두려울 건 없었다. 루이는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숨을 죽이고 있는데, 불현듯 누군가가 루이의 몸을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할 준비가 아직 안 되었는가?”
누군지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애당초 루이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이곳에서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오르가.”
루이는 자신의 목에 둘러져 있는 다크 엘프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르가가 보다 세게 루이의 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대의 최후는 내가 정해주겠다. 그러니 안심해라.”
그녀의 속삭임이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실제로 루이와 오르가가 계약한 것은 바로 죽음이었으니 말이다. 오르가는 루이가 생에 미련을 가진 순간 가차 없이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아니, 설혹 생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루이가 다른 이에게 살해당하려고 한다면 오르가가 그걸 막아설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 들 것이다.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다크 엘프와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 그런 의미였으니 말이다.
“내 최후는 아직 멀었다.”
“이번에 상대해야 될 적이 십만이라고 들었다. 그것에 비해서 그대의 군대는……. 초라하구나.”
“겁이 나느냐?”
루이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오르가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루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겁? 글쎄…….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아서 모르겠군.”
그 말에 루이는 저도 모르게 실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는 이미 죽음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와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참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죽음을 경험한 뒤에 다시 과거로 돌아온다니 말이다.
만약 이번에 죽는다면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은 한번이면 족했다.
물론 아놀드와 아벨 그리고 아자젤, 오필리아……. 무수히 많은 이들을 차례대로 만나는 일은 분명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들이 자신의 곁에 머물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칠 정도로 열렬히 자신을 섬기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선 꿈에서조차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아놀드는 항상 먼 거리에 서있는 상인이었고, 아자젤은 북부를 지키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반란군이 궐기해서 하폰 전역을 어지럽힐 때도 아자젤은 북부를 지켜야 된다는 이유로 왕명을 거절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참 무정하단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인과응보란 생각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부에서 몇 번이고 경비 증원을 요청했지만, 그 때마다 루이와 귀족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거절했으니 말이다.
애당초 루이는 히르카 부족을 한낱 이민족 따위라고 생각했다.
문명을 이룬 하폰인에 비해서 히르카 부족은 도시 국가를 이루지 못 한 야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괜히 엄살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잘 못 된 생각이었다.
히르카 부족은 생각 이상으로 강인한 전사들이었다. 특히나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서 달려들던 그들의 모습은 루이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반란군은……. 두 말 할 것도 없군.’
애당초 적이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루이는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오르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푹신한 감촉이 루이의 머리를 감싸며 안락함을 선사해주었다. 확실히 다크 엘프라도 엘프는 엘프였다.
타락한 요정족. 루이는 멍하니 오르가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런 루이의 행동에 오르가는 아주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이내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을 되찾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루이가 잠에 들 때까지 말이다.
============================ 작품 후기 ============================
뿌린대로 걷는 중입니다!
후후, 풍년이로군요.
잘나가는행인 님 : 확실히 평지전인만큼... 제가 생각한대로 잘 써져야 될텐데 조금 걱정이로군요.
사신 카이스 님 : 재밌다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쿠마백작 님 : 밀튼의 몰락 ㅋㅋ
thecrazy 님 :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면요.ㅋㅋ
도즈 님 : 확실히 그렇긴 하죠
jinni 님 : 명분이 없어서 못 공격해옵니다. 실제로 모든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물론 임진왜란 때처럼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란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몰상식한 놈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 세계엔 신성제국이 존재합니다. 때문에 같은 종교권 국가들끼리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서 싸웁니다.
물론 최소한의 예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