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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아르페 평원으로 향하는 동안 루이는 휴안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좋았다. 휴안과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좋았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이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라던가,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 같은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루이는 아카데미에 관한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다.
사실 이건 일종의 동경 같은 것이었다.
막연한 동경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는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해본 적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루이의 삶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루이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나이쯤엔 하폰 전역이 전란에 휩싸여있었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 손으로 밀튼의 목을 벤 뒤에 왕좌에 올라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데미를 갈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귀족들은 똑똑한 왕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루이가 아카데미가 가려해도, 귀족들이 왕의 업무를 들먹이며 결단코 아카데미 근처에는 가지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묘하게 아카데미에 대한 동경 같은 게 남아있었다.
실제로 왕족들의 아카데미 생황은 대대로 호사스러웠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카데미에서 특별히 왕족에게 무언가 더 대우를 해준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변 귀족들이 왕족들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자 알랑방귀를 뀌어대었기 때문에 호사스러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귀족 자제들을 손가락 하나로 부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원하면 피앙새를 하나 만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놀 수도 있었다. 물론 이 피앙새가 나중에 잘 커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피앙새에서 멈추는 게 고작이었다.
기껏 해봐야 첩실 정도일까?
“아슬롯 형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셨지. 오히려 엘리자베스 누님과 붙어다니셔서 종종 오해를 사곤 그랬단다.”
“휴안 형님은 어떠셨습니까? 마음에 드는 영애가 없으셨습니까?”
“후후, 어찌 마음에 드는 영애가 없었겠느냐? 다만 그 때는 밀튼 형님 하나만으로도 벅찼단다.”
그때만 생각하면 골머리가 썩는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 휴안이다. 실제로 밀튼과 휴안은 서로 눈만 마주치기만 해도 으르렁거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두 형제가 싸움이라도 붙게 되면, 아슬롯이 재빨리 말리곤 했다.
단지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루이였다.
만약에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슬롯 형님처럼 두 형제를 뜯어 말렸을까? 아니면 옆에서 부추겼을까? 그도 아니라면 쩔쩔 매며 허둥지둥 댔을까? 물론 지금처럼 회귀한 상태라면 마음 편하게 구경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후, 웃은 루이는 마저 휴안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휴안 또한 귀찮아하는 기색 하나 없이 루이와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아니, 오히려 휴안 쪽에서 안달이 난 것처럼 루이에게 말을 걸어올 정도였다.
“루이, 너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후련하구나.”
루이는 이런 휴안의 말에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다. 확실히 루이도 이렇게 형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으니 말이다. 가능하다면 몇날 며칠 동안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였지만, 불운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해야 될 일은 산재해있었고, 루이는 휴안처럼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마음가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휴안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었지만, 루이는 이번 전투에서 이기리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꾸준한 행군을 거듭해 아르페 평원에 도착한 군대는 루이의 명령에 따라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아르페 평원은 기본적으로 하폰 중부에 위치한 너른 평원인데 북쪽으로 작은 산과 같은 언덕이 봉긋 솟아있다. 다만 그 면적이 워낙에 좁기에 거의 쓰지 않는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하폰 곡창지대라는 말에 걸맞게 드넓은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제 막 씨앗을 뿌린 참이었기 때문에 싹이 트려면 아직 한참 먼 시기였다.
루이는 일단 북쪽에 위치한 작은 산 위에 올라간 뒤에 진채를 세웠다. 물론 진채라고 해보았자, 나무를 베어 간단히 울타리를 만들고 천막을 세워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애당초 이곳에 그럴 듯한 진채를 짓기에는 시간과 목재가 지나치게 부족했다.
‘언덕을 점한 상태에서 폭탄을 굴린다면 제아무리 기사단이라고 할지라도 쉽사리 올라오진 못 하겠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화살이었다. 십만 명 중에 적어도 몇 만은 궁수로 이루어져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일사분란하게 화살을 쏜다? 루이가 가진 오천의 병사들에겐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서 루이는 진채를 세운 목재 중에 일부를 간이 나무 방패로 만들었다. 이거라면 적어도 며칠은 버텨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 애당초 적게는 하루, 많게는 삼일만 버티면 되었다.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면 제아무리 힘차게 쏜다 하더라도 곧장 힘을 잃고 떨어질 테니 말이다. 더욱이 화살을 위에서 아래로 쏘는 것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쏘는 것이었다. 제대로 힘을 발휘할 리가 만무했다.
물론 그것을 모르는 병사들은 죽을 각오로 어떻게든 간이 나무 방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일단 그들에게 있어서 나무 방패는 목숨을 연명해줄 동아줄이었으니 말이다. 다들 필사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 루이는 독기를 품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조금은 풀어줄까도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기였다.
굳이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안도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물론 희망을 불어넣는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사기 진작이긴 했다. 그러나 루이는 지금의 악바리가 마음에 들었다. 루이는 한동안 병사들을 다독이며 최대한 많은 준비를 했다. 땅 속에 화약을 묻기도 하고 나무로 창을 깎아 함정을 만들기도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했다. 그리고 밀튼의 군대가 불과 반나절 거리 정도 남겨두었을 무렵 오필리아가 루이를 찾아와 물었다.
“영주님은 안 무서우세요?”
“잘 모르겠구나. 오필리아, 너는 무서우냐?”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영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아, 딱 한번 빼고요.”
랄프 산맥을 토벌하기 위해 원정대를 꾸렸을 당시 지긋지긋할 정도로 몰려오는 몬스터들에게 질린 나머지 도망치듯 하멜른으로 돌아온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루이는 잠시 그 때를 생각하다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땐 고생이었지.”
“그렇지만 좋은 경험이었어요.”
양 볼을 수줍게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오필리아의 모습에 루이는 한동안 말없이 소녀를 바라만 보았다. 확실히 이렇게 보면 흑장미가 아닌 예쁜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전투에 들어서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잔혹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적들을 유린할 소녀였지만 말이다.
루이는 가만히 오필리아를 바라보다가 슬쩍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앞으로 패배란 없을 것이다, 오필리아.”
“아.”
나긋하게 속삭인 루이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오필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그 입맞춤에 오필리아는 작은 탄성을 터트리며 수줍게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기에 루이는 몇 번 더 입술을 맞춰주고는 고개를 떼어내었다.
아니,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밀튼이 정찰 삼아 보낸 걸로 보이는 선발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곧바로 오필리아와 함께 몸을 돌린 뒤에 아벨에게 지시해 저 건방진 선발대에게 화살 세례를 먹여주었다.
언던 위에서 쏘는 화살이었다. 하물며 아벨에게 훈련받은 병사들과 활쏘기의 귀재라 불리는 엘프들의 화살이었다. 적들은 루이의 병사들이 쏜 화살에 기겁하며 언덕은 제대로 밟아보지 못 하고 그대로 쫓기듯이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전이라면 서전이라 할 수 있는 첫 전투의 승리였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승리한 것이라고 보기엔 이른 모양인지, 선발대에 이어서 큼지막한 방패를 든 방패 병을 앞세운 경갑 보병들의 보무가 시작되었다.
무장의 수준의 보니, 용병대인 모양이었다. 분명 공적을 탐내서 밀튼의 허락 없이 먼저 공격해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사주에는 분명 어느 돈 많은 귀족일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눈이 삔 귀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루이의 군대는 하폰 내에서도 최정예란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그 군대를 이끄는 건, 열다섯 애송이에 불과하긴 했다. 귀족도 그 점을 알고서 자신감 넘치게 큰돈을 투자해 용병대를 내보낸 것이 분명했다. 용병대 역시도 루이를 우습게 본 것일 테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꿈이었다.
용병들이 언덕을 올라오기 시작하자, 준비된 사수들이 화승총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잠시 뒤, 탕! 소리와 함께 짙은 회색 연기와 함께 불이 뿜어져 나왔다. 방패를 든 용병은 그 소리에 깜작 놀라서 그만 방패를 떨어트리거나 몸을 잔뜩 웅크렸다. 때문에 방패병들은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 했고, 그 뒤에서 미처 방패에 몸을 가리지 못 한 병사들이 저마다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비명소리와 함께 방패 병을 탓하는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루이는 그들을 한번 비웃어주고는 아자젤을 중심으로 뽑은 기사단을 내보냈다. 그들은 단번에 내달려 혼란에 빠진 용병대를 유린했다. 기사단의 숫자는 비록 적었지만, 그들의 실력은 충분했다.
아자젤은 상대적으로 느린 방패 병을 철저히 유린한 뒤에 유유히 말머리를 돌려 진채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벨이 기다렸다는 듯이 활시위를 당겼다. 방패병이 사라진 만큼 용병대는 딱 먹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아벨과 카샨이 특별히 가려 뽑은 궁병 일천 여명이 신호에 따라 하늘을 향해 발사했다. 활한 허공 위를 거침없이 난 화살은 지면의 이끌림에 따라 용병이 방향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이어진 비명 소리가 언덕을 가득 채웠다.
용병대장은 더 이상 접근이 어렵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부상자를 내려버려둔 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깔끔하게 첫 전투를 승리로 매듭지은 것이었다. 루이의 군대는 도망치는 용병대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는 부상당한 용병대는 모조리 사로잡아 검이며 화살, 활 같은 날붙이를 모조리 빼앗은 뒤에 내쫓았다.
물론 포로로 데리고 있는다면 나중에 용병 대장에게 몸값을 받아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루이는 첫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충분히 내어준 뒤에 푹 쉬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밀튼의 본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게, 저 멀리 보였다.
‘내일인가.’
루이는 각오를 굳히며 지금의 승리를 즐겼다.
============================ 작품 후기 ============================
서전은 가볍게 밟아줍시다.
사신 카이스 님 : 엌ㅋㅋ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포스크 님 : 네, 힘내겠습니다!
향향공주 님 : 형님의 하트를 캐칰ㅋㅋㅋ
청룡문주 님 : 명분과 민심을 음유시인으로 얻을 수 있다는 건 또 처음들어보네요. 당시에 민심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좋은 방법은 축제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분은 말 그대로 명분이죠. 가장 좋은 명분은 역시나 결혼을 통한 명분 획득이고요.
섹시파워 님 : 떡밥 다 회수해야죠. 뭐, 거의 다 회수했으니, 이제 걱정없이 치고 박고 싸워야겠죠.
AliceChong 님 : 밀튼은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죠. 애당초 대화가 가능했다면 귀족들이 먼저 해봤을 겁니다. 참 슬픈일이지요.ㅠ
유령세상 님 : 그래서 제갈량이 사기였죠. 적벽대전 수준...ㅂㄷㅂㄷ
솔리테어 님 : 총이 짱이긴 하죠.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