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폰 전기-125화 (12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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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서전이 있고 이튿날, 밀튼의 군대가 언덕을 마주보고서 전열을 완비했다.

언덕 위에서 바라본 밀튼의 군대는 딱히 이렇다 할 트집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병사면 병사, 사기면 사기, 기사면 기사. 회귀 이전과는 다르게 길고 긴 왕자 전쟁을 거치지 않은 탓에 병사들은 지나치게 생기가 넘쳤다.

보고 받은 병사의 숫자만 하더라도 십만이 넘어갔다. 그리고 그 중에서 오천이 기사였다.

오천의 기사! 루이가 가진 병력과 동일한 숫자의 기사였다. 막말로 언덕이 아닌 평야에서 맞붙었다면, 화승총이란 무기의 존재가 없었다면 루이의 군대는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 하고 오천의 기사에게 짓밟혔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었다.

이쪽에서 먼저 지형의 이점을 선점했으며, 화승총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함정을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더욱이 루이의 가신들은 회귀 이전에 무수히 많은 명성을 떨쳤던 이들이었다. 하물며 아르페 평원으로 오는 동안 쿤은 아벨과 아자젤을 비롯한 여러 이들과 검을 섞으며 자신의 검술을 완성시켜 나아갔다.

조만간 쿤은 루이의 기억 속 철가면으로 변모할 것이 틀림없었다.

재밌지 않은가? 이렇게 서있으니, 마치 루이가 반란군의 수장이라도 된 듯이 싶었다. 아니, 실제로 반란군이기도 했다. 밀튼은 이미 휴안에게 승리해 왕좌에 올랐고, 루이는 밀튼에게 반기를 들었다.

더없이 훌륭한 반란이었다.

여기서 승리하면 모든 것을 얻게 된다. 반면에 패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하염없이 나왔다. 흥분인지.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몰랐다.

그냥 웃었다. 미친 듯이.

사방이 루이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을 때, 세람이 낑낑 우는 소리를 내며 루이의 손등을 핥았다. 이에 정신을 차린 루이는 슬쩍 웃으며 견인족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키가 루이보다 훌쩍 큰 세람이었지만, 여전히 네 다리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견인족 소녀였다.

‘이르면 오늘 저녁, 늦으면 내일 점심때쯤 비가 오겠군.’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기를 가늠한 루이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있는 루이의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소중한 영지민들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루이의 손으로 쌓아올린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이런 궁지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루이를 믿고 여기까지 와주었다.

단 한명의 탈영병도 없이 말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들은 제 몫을 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루이는 살짝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시했다.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들은 분명 이러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자, 그렇다면 슬슬 결전의 시간이었다.

밀튼은 마지막으로 막내인 루이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인지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루이 또한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많은 이들이 루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아벨과 아자젤, 오필리아, 캬산, 클라우드, 필립 남작, 호울, 피터, 쿤, 휴안, 테온이 있었다.

다크 엘프의 수장 오르가는 어딘가 숨어서 음흉하게 루이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루이는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오금이 저려왔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이 온갖 감정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흥분, 초조, 걱정, 두려움, 공포, 불안, 즐거운, 기쁨……. 여러 가지 감정들이 루이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밀튼과 마주했을 때, 그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

밀튼은 언덕 아래에서 루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이다. 오직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한결같이 웃어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이듯 바라보았다. 넌 승리했지만, 겁쟁이에 불과하다. 루이가 휘두른 차가운 장검이 밀튼의 목을 벨 때까지 그 시선은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아니, 죽은 이후에서 들러붙어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막내야!”

그 순간, 밀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컸구나!!”

밀튼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를 도발하듯이, 항상 그러하듯이 오만하게 웃어 보이며 루이를 향해 검을 내밀었다.

“어디 한번 버텨 보거라.”

이리 말한 밀튼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휘둘러 자신의 군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밀튼은 검을 루이에게 겨누며 경고했다. 과연, 그다운 언행이었다. 밀튼 형님다운 행동이었다.

루이는 옅게 웃음을 터트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밀튼이 멋지게 도발했으니, 이쪽도 나름대로 도발을 할 필요가 있었다.

‘미친개처럼 달려들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형님.’

밀튼이 이성을 잃고 이곳을 향해 달려들도록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었고 말이다.

‘……조금씩 몰려오면 이쪽이 곤란하니까.’

준비한 함정은 적고, 적들은 많았다.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적들을 꼬드겨 함정 속으로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무작정 달려들 리가 없었다. 물론 밀튼의 성격상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도 모르겠지만, 저돌적이면서도 지능적인 것이 밀튼이었다.

겉은 불타고 있지만, 속은 항상 냉철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무작정 많은 수의 병사들을 언덕으로 몰아넣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야금야금 밀고 들어오면서 함정을 해체할 심산이 컸다. 그렇기에 밀튼의 이성을 날려버릴 만한 도발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할 것…….

‘테온.’

한 때, 밀튼이 죽이려 했던 아카데미의 졸업생.

비록 위험한 사상이긴 했지만 밀튼의 도발하기엔 더없이 적합했다.

아니, 밀튼뿐만이 아니었다. 그 휘하 가신들까지도 도발할 수 있었다. 모두가 미쳐 날뛰는 것이었다.

루이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카샨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재빨리 다가와 마법을 사용했다. 음성 증폭 마법이었다. 단순히 밀튼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면 큰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지금 이것은 밀튼에게만 하려는 말이 아니었다.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음성 증폭 마법이 필요했다.

“되었습니다.”

카샨이 입을 열어 말하자, 루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십만의 적. 하지만 지금은 십만의 군중이었다.

루이는 수많은 병사, 수많은 깃발,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을 끝없이 포용하게 입을 열었다.

“귀족은 무능하다.”

루이가 입을 연 순간 소년의 음성이 드넓은 평원에 울려 퍼졌다.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 하였으며, 북부가 이민족들에게 유린당하도록 방치했다.”

루이의 목소리가 보다 높아졌다.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크고 사나운 목소리로 외친 루이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과거 귀족이란 명예를 알고, 타인을 위해 헌신할 줄 알았으며, 정의를 위해 싸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르 포아르였다.

“그러나 지금의 귀족은 어떠한가?”

루이의 질문에 다들 침착했다.

“썩었다!”

오른손을 크게 휘두른 루이는 귀족들을 책망하듯 소리쳤다.

“더 이상 귀족들은 명예를 알지 못 하고, 타인을 위해 헌신 할 줄 모르며, 정의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만 싸우고 있다!”

이리 소리쳐 말한 루이는 다시금 십만의 병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러한 자들을 계속해서 귀족으로 놔두어야 하는가?”

이때쯤 해서 테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숨을 멈추고서 연설을 하고 있는 루이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루이는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열성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의문을 품었다.”

“왕태자 아슬롯이 죽고 많은 귀족들이 편을 나누었을 때, 나는 의문을 품었다.”

“하폰의 북부가 이민족들에게 유린당했을 때, 나는 의문을 품었다.”

“왕자 휴안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나는 의문을 품었다.”

세 가지 의문을 제시한 루이는 다시금 물었다.

“이 모든 게 누구의 탓인가?”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그렇다, 귀족들이 무능하기에 일어난 일이다. 아니, 무능하기만 했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악하기에 썩었다.

“귀족은 썩었다!”

크게 소리쳐 말한 루이는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일부러 두 왕자를 싸우게 만들었다!”

“하폰의 백성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창칼을 손에 쥐고 있는가? 도대체 그대들은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있는가?”

다시금 크게 소리쳐 물은 루이는 수많은 병사들을 향해 물었다.

“나는 그러한 귀족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동시에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두 왕자에게 환멸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나는 계급에 환멸을 느꼈다!”

테온의 입술이 루이의 연설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자리를 빌려서 선언하겠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귀족을 몰아내어, 각 영지마다 투표를 할 것이다. 귀족이 아닌 관리인을 선출하여, 5년 동안 관리하도록 만들 것이다.”

투표라는 말에 밀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어느샌가 가슴께까지 올라와있었다.

그러나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건 왕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루이는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투표를 함으로서 그 누구도 사익을 추구하지 못 하도록 막을 것이다!”

“두 번 다신 북부 때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못 하도록 막을 것이다!”

“하폰의 백성들이여!”

루이가 소리쳤다.

“귀족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싸워라!”

============================ 작품 후기 ============================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요.

사신 카이스 님 : 네, 감사합니다.ㅎ

향향공주 님 : ㅎㅎ 그러진 않을 겁니다.

돔페리뇽 님 : 귀여움으로 승부입니까?ㅋㅋ

qoewh 님 : 엘리자베스라... 흠, 글쎄요?

유령세상 님 : 참고해서 그 부분도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EndOfTheWar 님 : 음, 화기의 위력은 조총보다 보다 더 좋은 수준입니다. 머스킷까지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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