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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쏟아지는 총탄 세례에 결국 기사들이 돌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죽은 자만 얼추 세어보아도 이천은 넘어 보였다. 전과를 굳이 추산해보지 않더라도 대승리임이 분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적들의 사기가 형편없이 꺾였다.
우렁찬 고함성도, 보무를 맞춘 진격도, 하늘을 뒤덮을 만큼 새까만 화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단지 패배의 기색만이 짙게 깔려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를 가장 크게 받은 것은 역시나 대다수가 농노로 구성되어 있는 징집병들이라 할 수 있었다.
애당초 징집병이라 하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않은, 말 그대로 급하게 징집된 자들이었다. 그러다보니 훈련 상태가 엉망인 것은 물론이고 사기 또한 대단히 낮았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최상위 병과라 일컫는 기사가 돌격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것은 징집병들에게 있어서 청천병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더욱이 이들 대다수가 전투 전에 루이의 연설을 들은 상태였다. 아무리 우둔한 자라고 할지라도 루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귀족의 시대는 끝났다. 여기서 루이가 이긴다면 자신들의 위에서 떵떵거리던 귀족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다보니, 다들 적당히 싸우다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어떤 이들은 차라리 잘 되었다며 냅다 도망치기까지 했다. 어차피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언제 한번 갈아엎어져야만 되었다고 다들 무의식 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아벨이 활을 쏘아 징집병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만 골라서 죽이니, 징집병들은 아주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적들의 사기가 형편없이 추락했다.
아니, 사기만 떨어진다면 다행이었다.
부대와 부대가 서로 뒤엉키며 혼잡해졌다. 앞에 있어야 하는 아군이 뒤돌아 도망치니, 뒤에 있던 부대도 혼란에 빠진 것이었다.
심지어 첫 돌격 때, 밀튼이 폭발에 휘말려 사망했단 소문까지 더해지자, 밀튼의 군대는 머리를 읽은 닭마냥 어쩔 줄 몰라해하며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머리를 잃은 닭의 모가지를 꺾는 것만큼 간단한 일도 없었다.
만약에 여기에 밀튼을 대신할 인재가 있었다면 충분한 만회할만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당장의 병력은 루이보다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적들은 첫 폭발에 단단히 겁을 먹은 상태였고, 머리가 좀 돌아간다는 자들은 밀튼과 함께 폭발에 휘말려 죽거나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후방에 남은 자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다크 엘프들에게 암살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팎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이러다보니 남은 선택지는 언덕을 오르기를 포기한 채, 화살을 쏘며 폭발에 휘말린 밀튼의 생사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걸 루이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루이는 적들이 밀튼을 찾지 못 하도록 최대한 훼방을 놓았다. 하지만 워낙에 수적인 열세에 시달리다보니 함부로 병사들을 내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적들은 크게 화상을 입은 채, 생사를 오가는 밀튼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대로 병사들을 뒤로 빼었다. 잠시 전투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숨 한번 제대로 고르지 않고 치열하게 싸운 양 측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전사자들을 한 자리로 모아 태우거나 수레에 실었다.
그리고 이처럼 소강상태에 빠진 사이에 루이의 가신들이 속속들이 소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연설 때문이었다. 몇몇 이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고, 또 몇몇 이들은 무덤덤함을,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귀족 출신인 아자젤과 필립 남작이 반발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필립 남작은 초탈한 듯이 허허 웃으며 넘어갔고, 아자젤은 오히려 잘 되었다며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에 가장 격하게 루이의 연설을 반기는 이는 역시나 테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루이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 하면서도, 만에 하나 함정은 아닐까 싶어 경계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함정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루이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려 했다면 구태여 이런 수까지 쓰지 않았어도 되었다.
‘나와 같은 생각하고 있는 이가 설마하니 왕족 중에서 나올 줄이야.’
루이가 테온의 졸업 논문을 보고서 이러한 생각을 품게 된 줄은 꿈에도 모르는 테온은 그저 속으로 감탄하며 루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처럼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루이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귀족 계급을 없앨 것이다.”
루이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귀족 계급을 없애고 그 자리에 관리자를 넣겠다는 것을 말이다. 세습제의 형태를 가진 귀족에서 투표를 통해 단기간 그 영지를 관리하는 관리자를 뽑는 것이었다.
즉, 계급이 노예와 평민 그리고 관리자, 왕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큰 틀이 바뀌는 것 같지는 않지만, 평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다만 왕을 투표로 뽑는 일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애당초 왕을 투표로 뽑는다는 건, 그 만큼 왕의 권한이 줄어드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장차 왕위에 오르게 될 루이로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왕을 투표로 뽑자고 한 것은 단순히 밀튼을 도발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실제로 밀튼은 왕을 투표로 뽑자는 루이의 말에 미친 망아지마냥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 채로 말이다. 하지만 밀튼은 자신의 끈질긴 생명줄을 자랑하듯이 현재 죽지 않고 생명을 연장해가는 중이었다.
사실 이건 루이에게 있어서 불운한 소식이었다. 만약 여기서 밀튼이 깨어나게 된다면 그가 어떠한 수를 써서 루이를 압박할지 아무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밀튼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적어도 삼일, 길면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맬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폭우가 쏟아지기 충분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보자.”
루이는 담담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이런 루이의 말에 다들 동조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아군의 사기는 드높이고, 적군의 사기를 철저히 깎아내린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루이의 가신들이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밀튼의 진형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시금 공세를 재개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로서는 이대로 얌전히 있을 까닭이 없었다. 어서 빨리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는 루이의 군세를 무너트리고, 밀튼의 치료에 전념하고 싶을 것이다.
“쏴라!”
전투의 시작을 알린 것은 적들이 쏘아대는 화살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앞선 전투로 기사의 돌격이 적에게 효과가 없음을 깨달았으니, 이런 식으로 화살을 쏘아서 루이의 병사들의 진을 빼놓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루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적들이 활쏘기에 주력하자, 카샨과 아벨이 이끄는 궁수들 또한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었다. 물론 그 숫자가 적들에 비해서 현저하게 적기는 하지만, 다들 일당백이란 호칭이 잘 어울릴 정도로 활쏘기라면 이골이 난 병사들이었다. 하물며 엘프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반면에 상대는 하멜른의 병사들처럼 악독하게 훈련을 받은 병사들도 아니었던데다가 언덕 아래에서 위로 쏘는 것이었다. 힘이 몇 배는 더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언덕 위의 적들을 맞추는 것이다 보니 제대로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죽어나가는 언덕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궁수들뿐이었다.
언덕의 이점이 극대화되는 순간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모든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사방이 시원하게 뚫려있었기 때문에 적들이 기습을 하려 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 했다. 물론 그 대가로 퇴로도 없었지만, 그 정도는 기습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대가 정도로 감수해야 되는 일이었다.
적들은 자기들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인지, 서서히 활쏘기를 멈추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총력전 밖에 없었다. 수십만의 병사들로 일거에 언덕을 점령한 뒤에 루이의 진채를 짓밟는 것이었다.
물론 함정이 마음에 걸리겠지만, 함정이 무한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유한했다. 기껏 해봐야 서너 개가 더 일 것이다. 반면에 병사는 충분하다 못 해 넘쳐났다. 다시 생각해보자. 오천 대 십만이었다. 절반이 죽더라도 남은 절반인 오만으로 충분히 오천을 쓸어버릴 수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적들도 용기백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피해가 일어나겠지만, 승리만 한다면 된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놈들. 승리가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놈들의 한계였다. 하긴 오직 승리만 추구하는 놈들이니, 북부가 이민족들에게 유린당하던 말든 신경 쓰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현 시대의 귀족들은 썩었다.
‘와라.’
루이는 마치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리고 이런 루이의 말에 적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형이 출렁이는 것을 보니, 돌격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두터운 방패를 든 병사들이 앞열에 서고, 그 뒤로 긴 창을 든 병사들이 섰다. 궁수는 마지막, 죽을힘을 다해서 활을 쏘고 있었다.
돌격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 또한 돌격 준비를 했다.
만약 여기서 적들의 난입을 허용하게 된다면 루이의 진채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 하고 박살날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든 해가 저물 때까지 버텨낼 필요성이 있었다. 루이는 피가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슬쩍 다른 이들을 살펴보니,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사, 지휘관 할 것 없이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종족이 다른 이들조차도 고양되어, 긴장감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전장의 공기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오크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고, 엘프들은 나직이 숨을 토해내었다. 견인족들은 길게 하울링을 하며 전투 고양감을 한껏 올렸다. 아우우우! 길게 울리는 소리가 오싹오싹 거려올 정도였다. 만약에 이들이 적들이었다면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지만, 지금은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었다.
든든하다 못 해 듬직할 정도였다.
그 때였다. 드디어 돌격을 시작할 모양인지, 남은 기사들이 랜스에 매달린 삼각 깃발을 나부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앞서 이천에 달하는 기사들을 쓰러트렸건만 여전히 기사들의 돌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그 뒤를 따라 달려오는 병사들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쿵쿵 소리를 내며 작은 지진이라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오필리아는 다시금 총을 장전하며 기사들을 향해 쏘아대었다.
탕!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지만 여전히 달려오고 있는 기사의 숫자는 많았다. 하지만 그걸로 주눅이 들 오필리아가 아니었다.
“투척!”
오필리아가 큰 소리로 호령하며 흑색 구체를 던지자, 일제히 기다렸다는 듯이 흑색 구체를 던졌다. 그리고 곧 흑색 구체는 언덕 아래에서 달려오고 있는 기사들의 앞에 떨어지더니, 쾅! 하고 폭발했다.
콰앙!
폭발과 동시에 흑색 구체가 부서지며 그 파편들이 기사들의 육중한 갑옷을 마치 종이처럼 꿰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기사들은 그 폭발 속에서도 꾸역꾸역 밀러 들어왔다. 흡사 광신도라도 보는 것만 같았지만, 오필리아가 이끄는 화승총병의 사격은 교대로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기사들은 기어코 진채를 넘어 들어와 랜스를 던지거나 검과 철퇴를 휘둘렀다. 집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딱 거기까지였다. 기다리고 있던 쿤이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어 모조리 쓰러트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말과 함께 베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철가면이라 불릴 만했다. 실제로 철가면이 싸움에서 도망치거나 패한 역사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설혹 정규 기사단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결국 기사들은 목숨을 건 최후의 돌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의 진형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 했다. 최고의 전력이라 불리는 기사가 만들어낸 전과라고 하기엔 지나지게 초라했다. 상황이 이러니 징집병들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남은 건, 이제 정규병들 뿐이었다.
살아남은 귀족들도 각오를 굳힌 듯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모로 제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지만, 봐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꼭 완결을 내고야 말겠습니다.
크라우덴 님 : 각기 장단점이 있긴 하겠지만, 최소한 루이의 목적은 이루겠죠. 귀족 계급의 몰락이요.
매실농축액2 님 : 네, 그런 쪽입니다. 왕까지는 투표로 뽑을 생각이 없습니다. 애당초 왕을 선거로 뽑는 건, 귀족들의 힘을 늘려주는 일이니까요
superrobot 님 : 이번 전투로 실행 시킬 힘을 얻게 되겠죠.ㅎ
사신 카이스 님 : 네, 감사합니다!
破天魔痕 님 : 힘 내겠습니다!ㅠㅠ
jinni 님 : 아뇨, 딱 왕까지만 쓸 생각입니다. 도저히 이건... 아마 하폰 전기를 끝으로 영지물은 절대로 손대지 않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