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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유모의 도움을 받아 외출 준비를 끝마친 히르메는 곧바로 오라비인 로렌스 왕자를 찾아갔다.
로렌스는 일찍이 기별을 받아놓은 상태였기에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밤늦게 자신을 찾아온 어린 누이를 달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거라.”
로렌스는 히르메를 자신의 방 안으로 들였다. 방 안에는 다른 이가 없었다.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는 어린 누이를 위한 배려임이 틀림없었다.
히르메는 이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예의를 갖춘 인사를 건넸다.
“이 늦은 시간에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너무 그렇게 격식을 차리진 말거라. 누가 무어라 해도 우린 남매가 아니더냐?”
무척이나 따스한 말이었다. 실제로 로렌스와 히르메는 다른 형제자매들과는 다르게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만약에 두 남매가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각별한 우애를 과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외부에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려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내색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히르메는 로렌스의 말투에서 자신을 아껴주고 있음을 느끼곤 이곳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히르메는 로렌스가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그 후,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상기시킨 공주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나직이 운을 띄웠다.
“오라버니는 루펜시아 공작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루펜시아 공작 말이냐? 청렴한 인물이지. 또한 이번 사태를 진정시키려하는 자가 아니더냐? 루이가 왕위에 오르지 못 한다는 게 다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엘리자베스 누님 또한 올바르신 분이니 분명 왕국을 잘 다스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루펜시아 공작이 중앙 귀족들과 결탁하여 오라버니와 루이를 죽이려 한다면 어쩌시겠어요?”
“뭐?”
로렌스는 저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설마하니 히르메의 입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렌스는 차분히 생각을 가라앉혔다.
왜냐하면 히르메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일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히르메가 이런 늦은 시간에,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올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냐? 루펜시아 공작이 중앙 귀족들과 결탁하여 나와 루이를 죽이려 하다니……. 허나, 그걸 엘리자베스 누님께서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으실 텐데?”
“엘리자베스 언니 몰래 계획을 꾸미고 있었어요. 게다가 장미궁으로 오라버니와 루이를 불러내서 방화로 죽인다면 결코 의심하지 않을 거라면서……. 상세하게 계획을 짜고 있었어요.”
히르메가 이토록 구체적으로 계획을 언급해주자, 로렌스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어린 누이의 말대로 루펜시아 공작이 중앙 귀족들과 결탁하여 자신과 루이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고맙구나, 히르메. 네가 아니었다면 영문도 모른 채 불타 죽을 뻔했구나.”
탄식을 토해낸 로렌스는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끝에서 식은땀의 축축함이 느껴졌다. 이를 느낀 로렌스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뒤에 히르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린 누이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이러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빨리 수도를 떠나서 루이에게 알려야만 되요.”
확실히 그 말대로 한시 바삐 수도를 벗어나 루이에게 알려야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중앙 귀족과 루이의 전면 대결은 불가피했다. 분명 팔칸에 수많은 피가 뿌려질 것이 틀림없었다.
하물며 무엇보다도 여기서 자신이 도망이라도 친다면…….
“그럴 수 없구나. 만약에 내가 여기서 도망친다면……. 네 안전은 누가 책임져준다는 것이냐? 분명 지금 나와 네가 만난 일은 근 시일 내로 귀족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수도를 벗어난다면 분명히 귀족들은 널 의심할 거란다.”
“그럼 저도 함께 가겠어요.”
히르메는 일말 고민 없이 대답했다. 참으로 고마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로렌스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자신이 히르메와 함께 수도를 떠난다면, 분명 중앙 귀족들이 수작을 부려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외국 상단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히르메가 여태껏 단 한 번도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귀하게 자란 어린 누이가 혹독해질지도 모르는 여행길을 제대로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로렌스는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엘리자베스 누님께 도움을 구해볼까?’
엘리자베스라면 충분히 자신의 방패막이 되어줄 듯이 싶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당장은 귀족들의 음모를 막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다음은 몰랐다. 어쩌면 히르메까지 위험에 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이 일은 루이와 의논해보아야겠구나.’
비록 루이가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그 생각과 행동만큼은 다 큰 성인 못지않게 대단했다. 실제로 루이가 이루어낸 업적만 하더라도 대단한 것들이었다. 로렌스, 자신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듯 결정을 내린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일을 루이에게 알려야겠구나.”
“하지만 중앙 귀족들이 오라버니의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기라도 한다면 더욱 더 곤란해질 거예요.”
“그건 걱정 말거라. 오랫동안 나와 알고 지냈던 외국의 상단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니 말이다.”
이리 말한 로렌스는 루이에게 보낼 편지를 서둘러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로렌스는 외국의 상단주를 불러내어 간밤에 적은 편지를 건네주었다. 비록 상단주가 외국인이긴 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로렌스와 거래를 하면서 신뢰를 쌓아왔기에 믿을만 했다.
그리고 이런 로렌스의 기대대로 외국의 상단주는 곧바로 수도를 벗어나, 루이를 찾아갔다. 이 때, 마침 루이의 군대가 팔칸으로 향하던 중이었기에 보름도 채 되지 않아서 편지를 전해줄 수가 있었다.
“…….”
이처럼 무사히 편지를 건네받게 된 루이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읽어 내려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중앙 귀족들이 수작을 부려올 것이란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나니 그 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귀족들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로렌스까지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비열한 수작에 자신과 형제가 죽을 뻔했는데,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
루이는 이 일을 어찌 해결할지 생각해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수도로 쳐들어가고 싶지만…….’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이상 수도 방위군의 존재를 간과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하폰의 수도인 팔칸은 그 성벽이 유독 높기로 유명했다. 함부로 공성전을 치룰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쪽이 꿇린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쪽엔 비앙카가 만든 발석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미완성이긴 했지만, 그 위력만큼은 충분히 실전에서 쓸만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루이의 손에 죽었던 프리지아 남작이 2만의 군세를 이끌고서 하멜른을 공격했을 때, 발석거가 무척이나 큰 활약을 했었다.
그리고 이처럼 루이가 진지하게 수도 공방전을 고려해보고 있는데, 아자젤이 루이의 곁으로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주군, 무엇을 그리도 곰곰이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이 말에 정신을 차린 루이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아자젤을 비롯한 쿤, 아만다, 세람 그리고 얼마 전에 군대를 이끌고 합류한 아벨과 오르가, 테온, 오필리아, 호울, 피터, 필립 남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충성심 높고, 유능한 이들이 이렇게나 많이 루이의 곁에 모여있다.
그 모습을 보니, 루이는 새삼 이들을 놔두고서 홀로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어리석었다. 자신은 한낱 범인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한 시대를 풍미하던 범상치 않는 인물들이었다.
슬쩍 웃은 루이는 편지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귀족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서 함정을 파놓았다.
라며 운을 띄운 루이는 현재 상황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윽고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가 하나 같이 분개하며 화를 내었다. 특히나 이 중에서도 오필리아가 가장 크게 화를 내었다.
당장에 수도로 쳐들어가자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테온이 조용히 의견을 꺼내놓았다.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중앙 귀족들을 한꺼번에 옭아매어 버리십시오.”
“무슨 수로 말인가?”
“주군께서 일부러 귀족들의 함정에 빠지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오르가를 위시한 다크 엘프들로 하여금 방화를 일으키려하는 자들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중앙 귀족들을 적법하게 처벌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설령 꼬리 자르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히르메 공주의 증언을 내세운다면 충분히 처벌하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엘리자베스 공주 또한 끌어내려 왕위에 오르시지요.”
이러한 테온의 말에 오필리아가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 왕자님보고 그런 위험한 장소에 들어가란 거야? 너 지금 말이면 다인 줄 알아?”
“왕자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만약에 다크 엘프들이 제대로 막아내지 못 한다면 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군을 탈출시키겠습니다.”
테온의 태도에선 결연함마저도 느껴졌다. 그가 느끼기에 이번 기회에 모든 중앙 귀족들을 정리하지 못 한다면, 루이가 말한 개혁은 결코 해내지 못 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달랐다.
그녀의 중심은 루이였다. 루이가 위험에 처한다는 건,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왕자님! 차라리 수도를 공격하는 편이 낫습니다. 제게 맡겨주신다면 일주일 내로 함락시켜 보이겠습니다!”
라고 소리치는 오필리아의 모습에선 왠지 모르게 독기마저도 엿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루이는 회귀 이전의 흑장미의 모습을 엿보았다. 확실히 대단했다.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지금 그녀라면 루이의 한 마디에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학살할 수 있을 듯이 싶었다.
그리고 이처럼 루이와 오필리아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필립 남작이 앞으로 나와서 중재했다.
“만에 하나 수도를 공격하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됩니다. 더욱이 주군께서 왕위에 오르실 거라면 더더욱 안 됩니다. 만약에 주군께서 군대를 몰아쳐, 팔칸을 공격하신다면 분명 민심이 주군에게서 돌아설 겁니다.”
확실히 그 말대로 수도를 공격하여 왕위에 오른 왕치곤 제대로 된 통치를 한 자가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말로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루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필립 남작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다.
그 후, 다시금 고개를 들어 가신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쿤과 아벨을 본 순간, 귀족들의 함정에 빠지더라도 꼭 나쁘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라면…….’
설령 적들이 사방에서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아벨과 쿤이라면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쿤이 그러한 일들을 회귀 이전에 무수히 해냈었고 말이다. 슬쩍 웃은 루이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좋다, 테온. 그대의 계획에 따르겠다.”
============================ 작품 후기 ============================
아벨과 쿤 조합은 정말 최강이죠.
울티오r 님 : 감사합니다!ㅎㅎ
아스라히i 님 : ㅎㅎ 저도 이렇게 다시 글 쓰니 기분 좋네요.
돼지띠 님 : 물론있죠! 되도록 매일 2편 연재할 생각입니다.
노스아스터 님 : 네, 완결까지 2편이요!
나데스 님 : 요, 용서해주세요. 능욕만은...!
메깐더v 님 : 네, 오랜만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