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폰 전기-143화 (14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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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로렌스와 함께 별실로 자리를 옮긴 루이는 미리 준비해온 종이와 펜을 꺼냈다. 이에 로렌스가 의아함을 표시하며 무어라 물어보려하자, 루이는 재빨리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툭툭 치며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형님?”

이리 물은 루이는 펜촉에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귀족들의 동태는 어떻습니까?’라고 적었다. 이를 본 로렌스는 그제야 루이가 무엇을 하려는 지를 눈치 채고는 서둘러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나야 별 일 없었지.”

이렇게 두 사람의 필담이 시작되었다.

말로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 건강은 어떠냐. 별다른 일은 없었냐. 라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나누기에 더없이 적합한 대화를 했다. 그리고 동시에 손으로는 펜을 열심히 놀리며 필담을 나누었다.

혹시라도 어딘가 귀족들이 심어둔 간자가 루이와 로렌스의 이야기를 엿들을까 싶어, 경계한 까닭이었다. 실제로 왕성 곳곳에 귀족들의 눈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하등 없었다.

하물며 이 일은 루이와 로렌스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아무리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부족했다. 그리고 이는 로렌스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 덕에 대화는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루이는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바를 로렌스에게 상세하게 알려주었고, 로렌스는 그것을 모두 듣고는 계획에 동의했다.

물론 실패한다면 꼼짝없이 화마에 휩싸여 죽게 되겠지만, 로렌스는 막내의 눈을 본 순간 안심할 수가 있었다.

루이의 눈은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저히 죽으러 가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또한 반드시 성공할 거란 믿음마저도 서려있었다. 그걸 본 로렌스는 루이가 자신의 가신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 것인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분명 모르긴 몰라도 루이의 가신들 또한 막내를 대단히 신뢰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계획만 하더라도 그러했다. 죽을지도 모르는 장소에 겁도 없이 루이와 함께 동석하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충성심으로는 도저히 안 될 일이었다.

로렌스는 문득 부러워졌다.

‘사내가 되었구나, 루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루이는 한 없이 작은 소년에 불과했다.

겁 많은 막내였다.

자신처럼 타인과 접촉하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자신의 궁 안에 틀어박혀서, 쥐 죽은 듯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루이의 열 번째 생일을 기점으로 해서 돌연 변했다.

어렸던 막내는 점점 성숙해졌다. 그리고 지금 로렌스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루이는 이미 장성한 청년이었다. 물론 여전히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겉보기엔 틀림없이 어엿한 사내였다.

로렌스는 크게 감탄하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막내에 비해서 나는 변한 게 없구나.’

형이 되어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로렌스는 이 일이 끝나거든, 외국 상단과 함께 상행에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전에 외국 상단주가 그에게 제안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하폰을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허나 그 때는 현재에 안주했기에 거절했다. 구태여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락한 이곳을 떠나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크게 성장한 루이를 보고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 또한 성장하고 싶다고 말이다.

로렌스는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거든 외국 상단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로렌스의 심경 변화를 눈치 챈 루이가 무슨 일이냐며 묻자, 로렌스는 숨길 마음 없이 있는 그대로 밝혔다.

“엘리자베스 누님의 왕위 계승식이 무사히 끝나거든, 그 길로 곧장 외국 상단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보고 싶구나.”

그 말에 루이는 놀람을 표시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왕성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던 로렌스였기 때문이었다. 회귀 이전에도, 현재에도 말이다. 한동안 놀라움을 감추지 못 한 루이였지만,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로렌스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이러한 결단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로렌스에게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끼쳐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로렌스가 외국 상단과 함께 타국으로 떠난다면 루이가 왕위에 오르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 전에 로렌스는 왕위에 대한 뜻이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루이는 조용히 웃고는 로렌스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주로 상행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카샤의 가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두 형제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루이는 로렌스와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고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엘리자베스 누님을 뵙게 되겠군.’

곧 여왕이 될 엘리자베스와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루이의 마음이 이상하게도 자꾸만 술렁거렸다. 뭐라고 해야 될까? 엘리자베스라면 왕위에 오르더라도 충분히 괜찮을 거란 생각이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밀튼처럼 포악하지도 않고, 휴안처럼 한 없이 자비롭지도 않았으니, 그녀라면 능히 하폰을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여기에 루이가 중앙 귀족들과 루펜시아 공작까지 일거에 숙청해버리기까지 한다면 더없이 좋았다. 분명히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뜻대로 마음껏 선정을 펼칠 것이 틀림없었다.

더없이 좋은 세상이 열릴 것이다.

‘……괜찮을지도.’

물론 테온이 크게 실망할 것이다. 아니, 테온뿐만이 아닐 것이다.

루이가 왕위에 오르기만을 기다렸던 무수히 많은 가신들이 실망감을 내비쳐 보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 일은 루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절정에 달했을 때가 아르페 평원에서 있었던 밀튼과의 전투였다.

10만의 군세를 앞에 두고서 목숨을 걸고서 싸웠다. 오로지 루이를 위해서 말이다. 그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순 없었다.

루이는 이미 반기를 들었고, 왕위에 오르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흔들리지 말자.’

생각을 바로 고친 루이는 다음 날을 기약하며 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람 또한 제 몸을 침대 위에 눕히며 턱 하니 루이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에 루이는 자그맣게 웃으며 세람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헤헤.”

견인족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앙증맞은 소리였다. 루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날 아침이 되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가볍게 아침 운동을 하여 땀을 뺐다.

그 후,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한 가신들을 불러 모아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에 오필리아와 함께 왕성을 거닐었다. 이번에 왕성을 방문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이곳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니, 미리미리 왕성을 구경시켜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루이의 배려에 오필리아는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것처럼 좋아했다.

어찌나 기뻐하던지, 큼지막한 눈동자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힐 지경이었다.

루이는 그런 오필리아를 달래주며 왕성과 정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단언컨대 오필리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오필리아에게 왕성과 정원을 구경시켜주고 나니, 오전이 훌쩍 지났다.

루이는 정오에 가까워짐을 깨닫고는 엘리자베스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놀랍게도 루펜시아 공작이 직접 루이를 마중 나와 주었다. 루이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일반적으로 손님은 집사가 맞이해주어야 하는 것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공작이 직접 맞이해주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례라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루펜시아 공작이 루이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만약에 루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공작에게 큰 믿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물며 청렴하기로 유명한 루펜시아 공작이 아니던가? 루이는 저도 모르고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이 모든 게, 내 신뢰를 얻고자 하는 행동이라면 참으로 간악한 인물이로군.’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게,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분명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언제든 루이의 등 뒤에 칼을 꽂아 넣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루이는 속으로 적의를 삼키며 짐짓 웃는 얼굴을 했다.

“환대에 감사하오, 공작.”

“아닙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엘리자베스 공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 말한 공작은 시종들로 하여금 문을 열게 만들었다. 그러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먼저 자리에 앉아있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루이는 자신의 맞은편, 상석에 앉아있는 엘리자베스를 보곤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루이.”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지 일어서는 것뿐일 텐데, 그 행동에서 기품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감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나 갈색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물결칠 때면 루이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렸다.

왕위 계승식을 준비한다고 해서 철저하게 몸 관리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새삼 루이는 엘리자베스가 하폰 제일 미녀라는 사실을 상기실 수 있었다. 첫째 누이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루이는 감탄을 금치 못 하면서도 점차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고는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누님을 뵙습니다.”

“정말……. 정말 오랜만이구나, 루이.”

이리 말한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새하얀 손이 소년의 손을 감싸자, 가슴이 절로 따스해져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이건 결코 연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루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슬롯 형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로 처음이지요?”

“응, 그래. 맞아.”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여전히 아슬롯을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한 배에서 태어난 오누이였다. 그 정 또한 대단할 것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슬롯은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아서 나타났다. 엘리자베스 또한 그것을 싫어하지 않았고 말이다.

때문에 한 때, 아슬롯과 엘리자베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냐는 소문이 사교계에 나돌기까지 했다. 물론 아슬롯이 사망하면서 금세 사그라졌지만 말이다.

루이는 잠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누이의 손을 강하게 붙잡아주며 다독여주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아, 그렇구나. 내가 너무 주책이 없었구나.”

슬픈 기색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인 엘리자베스는 루이를 이끌고서 자리에 앉았다.

이 때, 루펜시아 공작도 함께 자리를 하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오누이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하고픈 마음이 없는 모양인지 자리를 비켜주었다.

덕분에 식사 자리에는 오롯 루이와 엘리자베스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막내인 루이와 함께 하는 식사 자리가 흥겨운 모양인지, 조금 들뜬 기색을 내비쳐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린 아이 같은 가벼운 흥겨움이란 뜻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른의 흥겨움이었다.

술 한 잔 곁들인 뒤에 점잖게 흥을 끌어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루이, 너와 이렇게 식사를 하니 즐겁구나. 괜찮다면 나를 위해 이런 시간을 종종 내어주겠니?”

엘리자베스의 눈동자에는 그리움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문득 루이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통해서 아슬롯을 투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도 그런 기색이 문득문득 엿보였었고 말이다. 하지만 결코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루이는 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루이의 대답에 엘리자베스가 우아하게 웃었다. 너무나도 눈부셨다. 특히나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흔들리는 가슴이 루이의 시선을 자꾸만 어지럽혔다. 비비안과는 전혀 다른 성숙한 여성의 형태가 루이를 자꾸만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엘리자베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빛을 내며 루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가자,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로 결단을 내린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널 지켜주고 싶었단다, 루이. 내가 중앙 귀족들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분명 히르메가 그 자들에게 협박을 받았을 테니까. 그리고 결국 여왕이 된 히르메는 너와 싸울 수밖에 없었을 거란다.”

이 말에 루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히르메가 여왕이 되었다면, 중앙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리저리 흔들렸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왕위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단다.”

이리 말한 엘리자베스는 결연함마저도 엿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루이, 내가 널 지켜 줄 테니……. 이런 못난 누이를 믿어주겠니?”

루이는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어떤 남자가 이 상황에서 감히 거절을 하겠는가? 숨이 멎는 듯했다. 붉은빛마저도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에 하얀 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레스 그리고 그 아래로 풍만한 가슴까지. 미녀의 부탁이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 하던 루이는 이윽고 숨을 차분히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누님을 믿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루이는 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누님만 믿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미안하다, 오필리아.;ㅅ;

뭔가 대화를 넣어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어! 흑흑

울티오r 님 : 항상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서비스 씬은 끝에 왕창 들어갈 것 같네요. 에필로그 뒤에요.

나데스 님 : 으엌ㅋㅋ 심쿵

[炎風] 님 : ㅎㅎ 아닙니다. 다시 읽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죠

매실농축액2 님 : 음, 글쎄요. 20편 정도 남았으려나요? 자세한 건, 아무래도 써봐야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탱구나 님 : 싹 쓸어버려야죠! 루이를 죽이려 하다니!

수천천사 님 : 큰 거 나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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