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폰 전기-156화 (외전) (156/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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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아벨]

[아벨]

몇 년 만에 다시 밟은 고향땅은 여전히 처참했다. 나라가 안팎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만큼은 마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부모와 함께 땡볕 아래에서 손이 갈라질 때까지 농사일을 하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이었다.

그걸 부모라고 해서 모를 리가 없다.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하지만 혹독한 수탈 탓에 차마 쉬라고도 할 수 없다. 그나마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하루에 두 끼, 희멀건 죽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해주지 못 하는 부모는 결국엔 결단을 내려야만 되었다.

야반도주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걸 영주가 호락호락 놔둘 리가 없다. 하물며 그것이 영지민들을 착취하는데 이골이 나있는 영주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영주는 야밤을 틈타 도주한 가족의 이웃에게 세금을 그만큼 더 부여했다.

결국 이웃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서로서로를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과거의 친절했던 이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철천지원수만이 그 자리에 남게 된다. 어려운 시기에 서로가 서로를 돕던 이웃은 아주 먼 옛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벨은 고개를 돌렸다.

오로지 자신의 향락과 사치를 위해서, 없던 세금까지 매겨가면서 수탈하던 루블른 남작의 행태에 결국 참다 못 해 징수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때려죽인 이후, 6년 만에 다시 밟은 고향땅이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군.’

지긋지긋한 곳이었다. 이곳은.

‘……하지만 이제부턴 변화할 것이다.’

사람일이란 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벨은 루블른 남작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용병들에게 쫓겨 다녀야만 되었다. 그 와중에 죽을 고비로 여러 차례 겪었었다. 지독히도 괴로웠던 시간들이었다. 죽고 싶단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그러던 중 아벨은 루이가 고용한 자들에게 붙잡혔다. 당시 아벨은 그들이 루블른 남작이 고용한 용병들인 줄 알았기에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니, 한켠으로는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 아벨이었다.

쫓고 쫓기던 끔찍한 시간이 드디어 끝을 맺게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벨을 기다리고 있던 건, 전혀 다른 것이다.

올해로 열 살이 된 왕자, 루이였다.

소년은 아벨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벨은 그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음유시인을 통해서나 들을 법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며, 세상을 변화시켰다.

아니, 변화시키는 중이었다.

이 또한 그것의 일환이었다.

루블른 남작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파견한 지방관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서 다른 귀족들과 작당하여 왕실에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 남작은 죽어야만 했다. 그가 죽어야만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다.

아벨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루블른 남작이 머물고 있는 디온트리 성으로 향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나고 자란 고향이었기에 길을 해매는 일은 없었다. 다만 길을 가던 도중에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는 관리들을 볼 때면 아벨은 어김없이 말머리를 멈추고서 그들을 벌했다.

자비란 없었다.

아벨은 관리들의 목을 베었고, 영지민들은 이런 아벨의 행동에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들 중 몇몇 이들은 스스로 자원해서 군대에 합류했다. 아벨 또한 그들의 합류를 막지 않았다.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화이니, 그것을 풀어주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벨의 군대는 마을을 거쳐 갈수록 그 수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분노한 영지민들은 먼저 앞서 나아가며 길을 열었다. 루블른 남작은 정찰병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겁에 질려, 디온트리 성에 틀어박혔다.

덕분에 아벨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디온트리 성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디온트리 성은 옛날에 비해서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인지, 성벽 이곳저곳이 무너져 있었다. 게다가 성벽 주변엔 해자가 파여 있지 않아, 성벽과 성문에 접근하기가 무척이나 수월해보였다.

일단 사다리만 건다면 낙승이라 할 수 있었다.

“전진!!”

아벨의 명령에 따라 창대를 어깨에 맨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진군하기 시작했다. 다들 분기탱천 상태였기에 발걸음에 힘이 넘쳤다. 이 모습을 본 적들이 다급히 화살을 쏘아보지만, 머리 높이까지 치켜든 방패에 가로막혀 제대로 된 피해를 주지 못 했다.

아벨은 말을 탄 채로 병사들과 함께 진군하다가, 성벽 위에 보이는 병사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가 쏜 화살은 단 한발도 빗나가지 않고 적들의 미간을 맞췄으며, 적병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루블른 남작의 병사들은 모두 겁에 질려 활쏘기를 멈추고 성벽 뒤에 몸을 숨겼다. 이를 본 아벨의 병사들은 기세등등하게 성벽 아래까지 다가가 사다리를 걸었다. 이를 본 적들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성벽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부패한 귀족에게 어울리는 머저리 같은 병사들이었다. 아벨은 달아나는 적들을 뒤로 하고서 루블른 남작이 있는 관저까지 쳐들어갔다.

디온트리 성, 중심부에 위치해있는 관저는 성벽과는 다르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곳이야말로 요새라 할 수 있었다. 적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성벽을 버리고 달아났던 병사들이 관저를 성벽 삼아 방어하고 있었다.

아벨은 잠시 병사들로 하여금 대기하도록 했다. 당장 돌격하기엔 피해가 너무나도 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적들도 아벨이 쉬이 돌격 명령을 내리지 못 할 거라 생각한 모양인지, 안도한 기색을 내비쳐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산발한 머리에 퀭한 눈을 가진 사내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서 큰 소리로 떠들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온 것이냐? 당장 꺼지지 못 해? 그 어떠한 왕들도 귀족들을 이리 함부로 대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지방관이라니! 하, 웃기는 소리군! 이 땅은 루블른 남작 가가 일백년 동안 다스려왔다! 근본도 없는 지방관 따위가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루블른 남작이었다.

그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아벨은 그런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말에서 내렸다. 그를 보필하는 기사가 의아해했지만, 아벨은 그에게 잠시 통솔권을 넘겨주고는 붉은 벽돌과 목재로 만든 주택이 즐비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아벨은 병사들의 시선이 루블른 남작에게로 쏠려있는 틈을 타서 저택 지붕 위로 올라간 뒤에 관저 벽 쪽으로 가볍게 뛰었다. 궁수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다급히 조준하려 했지만, 워낙에 갑작스러웠던데다가 아벨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단검을 꺼내 단번에 궁수의 목을 벤 뒤에 고꾸라트렸다. 궁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한 채 뒷걸음질 치다가 얼마 못 가 고꾸라지며 숨이 끊어졌다.

무사히 관저 안으로 들어선 아벨은 활을 들었다.

루블른 남작이 멍청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일일이 상대해줄 필요는 없었다.

아벨은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루블른 남작이 머리를 내민 창문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이 정도 거리는 아벨에게 있어서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는 잠시 숨을 멈추고 활시위가 팽팽해질 때까지 당겼다.

실수해선 안 되었다.

여기서 그와의 질긴 악연을 끊는 것이다. 아벨은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사나운 바람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그가 쏜 화살은 이제껏 단 한번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이번에도 저버리지 않았다.

“내가 바로……!”

아벨이 쏜 화살이 루블른 남작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남작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벌렸다. 나오는 것이라고는 악취뿐이었다.

루블른 남작은 머리에 화살을 꽂은 채로 비틀거리다가 관저 아래로 떨어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작의 머리통이 으깨어지며 그의 최후를 알렸다. 아벨은 남작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왼손에 들고 있는 활을 높이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항복해라!”

그의 외침에 적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무기를 버렸다. 사방에서 철그렁거리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벨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적들을 포박했다.

루블른 남작을 죽인 이상, 더 이상 불필요한 살생은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몇몇 관리인들이 크게 윽박지르며 병사들을 다그쳐 저항해보려 했지만, 그 때마다 아벨이 그들의 미간에 화살을 꽂아주었다. 그러자 곧 불만의 목소리는 사그라지고, 남은 관리인 모두 투항했다.

루블른 남작의 가족들은 선처를 바라며 아벨 앞에 납작 엎드렸다. 아벨은 그런 루블른 남작의 일가를 수도로 압송하여, 그곳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예정대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새로이 파견한 지방관이 남작령을 새롭게 다스리고, 아벨은 루블른 남작과 함께 반기를 들었던 귀족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때, 다시 고향을 뒤로 하는 아벨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 작품 후기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몇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고 바빴습니다.ㅠㅠ

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제 남은 인물 별로 외전을 진행하고 완결란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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