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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오르가]
[오르가]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 오르가는 루이를 찾아갔다.
“오늘 밤, 네 목숨을 가져가겠다.”
흑요석을 닮은 오르가의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루이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루이 또한 그것을 느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쿵쿵 뛰는 심장은 마치 오르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루이는 담담하게 오르가의 통보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건 루이와 오르가 사이에 오간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루이가 가장 삶을 갈망할 때, 오르가는 그 삶을 가져간다. 그것이 오르가가 한 약속이자 속삭임이었다. 그리고 루이는 그 속삭임에 이리 대답했었다.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르가.”
루이는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널 죽일테니까.”
당시에 루이가 호언했듯이, 지금도 똑같이 오르가에게 말했다.
오르가는 루이가 자신과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전혀 예기치도 못 한 선물을 받은 어린 소녀처럼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양 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오르가는 쾌락에 가득 찬 신음성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아아, 기대하고 있겠다.”
이리 말한 오르가는 자신의 그림자와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루이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밤이 되었다. 오르가는 궁의 외벽을 조용하고 신속하게 기어 올라갔다. 그녀는 꼭대기에 도달해 루이의 방을 내려다봤다. 루이는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아있었다. 소년의 주변엔 그 어떤 병사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 못 해 아벨이나 아자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을 다른 곳에 숨겨둔 건가 싶어 주변을 세심히 살펴보지만, 오르가의 눈엔 그 어떤 병사도 들어오지 않았다. 루이가 의도적으로 병사들을 물린 것이었다. 소년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그리 한 것일까? 이대로 오르가의 손에 죽어도 괜찮다는 것일까? 아니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포기한 것일까? 하지만 루이는 분명하게 말했었다.
자기가 먼저 오르가를 죽이겠다고. 오르가는 루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오르가는 조용히 루이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처음 자신과 만났을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그 때처럼 삶을 쉬이 포기할 만큼 가진 것이 없지도 않았다. 루이의 손에는 한 인간이 가지기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쥐어져 있었다.
루이는 곧 성인이 될 것이다. 그리 되면 엘리자베스 여왕을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게 될 것이며,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소년은 인간의 정점에 서서 군림하게 될 것이다. 하나 같이 삶을 집착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르가의 눈에 비춰진 루이는 그 모든 것을 초탈한 듯이 오르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르가는 동요했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또한 루이도 그녀에게 삶의 의지를 내비쳐 보이지 않았던가? 루이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오르가에게 죽음을 선사해줄 것이다. 이 길고 길었던 삶이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망성을 극히 적었지만……. 오르가는 루이의 삶이 오늘 밤, 끝날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오르가는 맞은편 외벽에 매달렸다. 그런 다음에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척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게 확실했다. 오르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쌔액!
그 순간, 한 뼘 정도 되는 작은 화살이 오르가를 향해 날아왔다. 오르가는 다급히 몸을 뒤로 뺐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다크 엘프가 아닌 인간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함정이었다.
이런 함정을 만들만한 인간은 단 한명 뿐이었다.
비앙카. 램지란 이름을 가진 드워프의 수제자인 인간 여성이었다. 그녀가 만든 함정일 게 틀림없었다. 오르가는 그제야 루이가 어째서 병사들을 물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소년은 병사들이 함정을 실수로라도 작동시키지 않도록 물린 것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오르가는 그 때서야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죽음의 향기가 물씬 풍겨지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다크 엘프라고 할지라도, 이 앞의 함정들을 상처 하나 없이 피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렵거나 하진 않았다.
이제껏 그 어떤 함정도 오르가를 궁지로 내몬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르가는 계단과 천장, 벽면을 꼼꼼히 살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비앙카가 만든 함정도 제법이었지만, 한번 당한 오르가가 두 번 당할 리가 없었다. 오르가는 다크 엘프 특유의 기감으로 함정을 파훼하며 루이가 머무는 방 쪽으로 다가갔다.
간혹 가다가 함정이 발동하긴 했지만, 그것이 오르가의 목숨을 위협하진 못 했다. 오르가는 계속해서 계단을 밟고 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루이의 방 앞에 서게 된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한 가운데에 서있는 루이의 모습이 오르가의 눈에 들어왔다.
다 잡은 먹잇감이었다.
물론 방 안에도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오르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방 안으로 발을 들이며 루이를 주시했다.
소년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있었다. 루이의 실력은 또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했다. 오르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신중을 기했다. 더욱이 루이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궁지에 몰려있는 상대의 절박함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오르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르가는 방 안을 빙빙 돌아다가, 루이가 숨을 내쉴 때는 노려서 달려들었다.
오르가가 휘두른 단검이 루이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루이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의 단검을 막아내었다.
“죽을 준비는 되었나, 오르가?”
루이의 목소리엔 여유가 한껏 묻어나 있었다.
“오늘 죽는 건, 너야.”
반면에 오르가의 목소리는 한껏 격앙되어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오르가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루이의 목숨을 거듭해서 노렸다. 그 때마다 루이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꿋꿋하게 막아내었다.
검과 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오르가의 공격은 거세고 무자비했다. 루이는 그것을 막아낼 때마다 둔해졌다. 오르가는 이제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루이의 목에 단검을 꽂아 넣으려 했다. 그러나 루이가 몸을 비트는 바람에 어깨에 박혔다.
“끄윽!”
루이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오르가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소년이 휘두른 단검은 오르가의 손에 가로막혔다.
오르가의 손바닥에 단검이 꽂혔지만, 그녀는 고통스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루이의 어깨에 꽂은 단검을 비틀기까지 했다.
“결국 넌 날 실망시켰어. 이대로 죽어. 다른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도 내 손에 죽는 거야.”
오르가의 속삭임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루이의 안색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나 루이는 결코 비명을 터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소년은 단검을 쥐고 있는 손에 한층 더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죽는 건, 너다. 오르가.”
루이는 단검 손잡이에 달려있는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손잡이 안에 숨어있던 검신이 튕겨져 오르며 그대로 오르가의 가슴에 박혔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가슴을 파고들어오자, 오르가의 두 눈에 경악이 실렸다.
그녀는 난생 처음 겪어본 고통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흡사 온 몸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다가 물 밀 듯이 밀려오는 두려움과 통증을 이기지 못 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오르가가 눈을 뜬 건, 나흘이 지난날이었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루이였다.
루이는 눈을 뜬 오르가를 향해 물었다.
“죽음을 겪어보니 어떻지? 이래도 죽고 싶나?”
장난 섞인 루이의 물음에 오르가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얼굴에선 더 이상 죽음에 대한 집착이 엿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다음편 외전, 루시아를 마지막으로 하폰 전기는 완전히 끝납니다.
소셜구경 님 : 네, 오랜만입니다.ㅠㅠ
멀린의혼 님 : 저도 당장 매니저 어플을 연재하고 싶지만 손이 고자가 되는 바람에 시간이 필요합니다.ㅠ
승고이 님 : 처음부터 다시 보시면 됩니다!
울티오r 님 : 감사합니다.ㅎ
제티e 님 : 완결은 맞습니다. 다만 외전 형식으로 몇몇 인물들의 스토리를 마무리 지어줄 생각으로 외전을 쓴겁니다. 다음편 루시아까지만 쓰면 완전히 끝납니다.
나데스 님 :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라서..ㅠ
qoewh 님 : 엘리자베스는 이미 나왔으니, 루시아까지만 다룰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