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조우] =========================
검제(劍帝) 신하연. 나 또한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인물. 차원문이 열렸을 때, 벌어졌던 전쟁에서 가장 활약을 했던 영웅 중 한 명이었으니까... ‘에브리원 평화협정’이 맺어진 뒤로는 세상 살아가는 게 바빠서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그녀는 어느새 내 눈앞에 있었다. 무심한 듯한 검은색 두 눈동자와 우리랑 똑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운 흑발. 얇디얇은 허리에 빈약한 몸매... 이건 좀 눈물이군. 외모 레벨만으로 따지면 단연코 엘프가 위였으나, 그녀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도 까먹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아마 마더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질식사해도 몰랐을 것이다.
[사용자님! 최면... 최면술을 사용하세요!]
뭐?
통하지도 않을 최면을 사용하라는 마더의 목소리에... 나는 의아해면서도 최면술을 사용했다. 무슨 말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무엇이라 말했던 것 같은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넌...나에게.......거야...”
[최면술에 실패하셨습니다.]
[반신(半神)의 경지에 이른 존재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싸움을 건 당신에게 보너스 경험치 : 5000EXP]
[다음 레벨까지 필요 경험치 : -4142EXP]
[최면술 Lv 1 → Lv 2로 상승합니다.]
[다음 레벨까지 필요 경험치 : 5858EXP]
[효과가 상승합니다. 자신보다 레벨이 낮거나, 마음이 약해진 상대에게 최면이 성공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갑작스런 마더의 소리와 내 눈앞을 가리는 반투명한 창들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신하연을 볼 수 없었다. 아니, 이미 의식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들 때문에 몸이 버티지 못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컵라면 하나만 먹었었네.’
나는 쓰러져 가면서도 유일하게 들었던 검제의 한마디를 똑똑히 기억했다.
“죽일 가치도 없는 녀석이군.”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울컥했다. 그녀의 가치가 없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틀어박힌 것 마냥 아파왔다.
그리고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에 나는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사용자님... 잘하셨어요. 잠시만... 주무세요.]
찌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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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얀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근처 병원의 천장이었다. 보는 순간 마음에 안정감이 오는 색깔이다...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누운 채 팔에는 링거 하나 꽂은 채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은 아니겠지.”
다시 한 번...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중얼거렸다. 날 죽이려고 했던 엘프,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머리의 여자. 그리고 검제와의 만남.
전부 꿈은 아닐까.
[꿈이 아니에요. 사용자님...... 이런 말 하기는 정말 싫었지만... 힘이 있는 자들이 평생을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어.”
난 그럴 줄 알았지. 2년은 평화로웠다 생각했으니까. 그 때 어디 숨어있었는지, 토실토실한 다람쥐 한 마리가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로 젓더니 내 얼굴 위로 올라와 조막만한 손으로 내 뺨을 때렸다.
찰싹!-
찌~찌~찍!-
별로 아프지는 않은데 뭐랄까... 기분이 더럽네.
“이 빌어먹을 다람쥐 새끼가!!”
나는 링거를 꽂은 채 다람쥐를 향해 손을 이리저리 뻗었지만, 솔직히 최면술 없이는 다람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다람쥐는 여유롭게 이리저리 피하며 나를 비웃었다.
찌~익?-
저 웃음이 마치 ‘씨익, 둔한 새끼.’라고 하는 것만 같아 더 열 받는다.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넌 죽었어! 임마!”
우당탕탕!-
내가 소란을 일으키자 바로 간호사들이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빌어먹을 다람쥐 때문에 폭풍잔소리를 듣고 말았다.
“저기요! 여기 병원이라고요. 병원!”
“조용히 좀 해주세요. 정말... 기절한 거 살려놨더니.”
“저기 다 나으셨으면, 이제 나가주실래요?”
“......네에.”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간호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이 병원이 특별한 건지, 아니면 간호사들이 따로 맞춘 건지 그들은 내가 이때까지 보지 못 했던 섹시한 간호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특히 가슴들이 전부 하나 같이 지혜 누나가 떠오를 정도로 컸다.
그런 그들이 한데모여 잔소리를 하고 있으니, 잔소리보다 가슴에만 눈이 간다. 그러나 이내 나는 쫓겨나듯이 ‘포만감을 느끼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간호사에게 마지막으로 후처리를 받은 뒤 병원비를 지불하고 병원을 나섰다.
“저런 능력은 어디다가 써먹는 거야.”
내가 어제 봤던 사람들은 전부 전투에 관련된 능력이었는데, 막상 다시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상한 능력으로 배가 채워진 것만 같은 느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궁금증을 조용히 있던 마더가 해결해줬다.
[뭐... 사실 그리 쓸모 있는 능력이 아닌 것도 있어요. 하지만 저 능력도 레벨만 오르면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포만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뱃속을 음식으로 가득 채워 터뜨려 죽이는 능력이 될지 어떻게 아나요.]
“...핵 무섭다.”
갑자기 지나가고 있는 배가 빵빵해지면서 터져 죽으면 얼마나 끔찍한 기분일까. 나는 병원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도저히 어제 보았던 광경들이 떠나지 않는다. 빛과 같은 움직임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던 엘프. 날카롭던 레이피어가 내 코앞까지 다가왔었고, 그걸 거구의 남자가 막았다. 거기다 총까지... 마지막에는 세상의 영웅이라고 불리던 검제(劍帝)까지.
내 평범하기 그지없던 생활에 무슨 핫소스마냥 파문을 일으킨 녀석들을 떠올리며 나는 마더에게 물었다.
“마더... 나 강해져야 하냐?”
내 물음에 마더는 이때까지와는 다른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사용자님은 강해지셔야 해요. 마더는 더 이상...... 사용자님이 그런 꼴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만약 마더에게 실체가 있었다면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마더의 목소리에는 짙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아쉽다. 만약 마더가 눈앞에 있었다면 머리 정도는 쓰다듬어 줬을 텐데.
“하아... 평화롭기만 하다 생각했던 세상이었는데, 하루 만에 인식이 변해버렸네.”
세상은 평화롭다.
...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세상은 평화로웠던 거다. 전부 과거의 일에 불과했다. 지금 세상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강해져?”
나는 마더에게 물었고, 마더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야, 제일 중요한 걸 말 안 해주면 어떻게 하냐.
찌익!-
툭!-
그런 나를 향해 도토리를 던지는 다람쥐 새끼.
“......”
넌 밥을 왜 나한테 던지고 지랄이야.
찍찍!-
분위기 잡지 말라고?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끓이며 중얼거렸다.
“밥이나 먹으면서... 천천히 생각하자.”
============================ 작품 후기 ============================
HighMax / 기대 감사합니다! (두근두근- 작가의 심장박동수가 빨라졌다).
제로스이 / 장편이 될지 단편이 될지는...아무도 모르죠!! 이히히!!
비수검 / 찍찍!
[경험치를 빨리 올리기 위해서는 강한 상대에게 최면술을 사용해야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궁금하신가요? 다음편을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