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7 [엘퀴네스의 부탁] =========================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나를 범죄자로 보는 이프리트의 눈치를 보며 고민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말해야겠지?’
아니, 당연히 말해야하는 게 맞을 것이다. 운이 안 좋았던, 아니면 나 때문이든 간에 헤스티아는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것이니 말이다. 이런 얘기를 입 다물고 넘어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런 걸로 고민하다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보다.
나는 재빨리 이프리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까발리기 위한 서두를 꺼내들었다.
“저기, 이프리트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말해봐. 우리 귀여운 헤스티아를 덮쳤다는 얘기만 아니면 다 관대하게 넘어가줄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나는 이프리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하나씩 설명해줬다. 카페로 갔었던 것, 거기서 검제와 권제 등등 여러 인물을 만났고, 헤스티아가 나를 구해준 것, 그로 인해 죽을 뻔 했다는 것과 다행히 가지고 있었던 엘릭서를 이용해 치료했다는 것까지 전부 말이다.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프리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이야? 거짓말 하는 건 아니지?”
의외로 이프리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혹시 별로 화가 안 난걸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는 없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땅 주위가 진흙마냥 천천히 녹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프리트님은 지금 화를 참고 있는 거다.’
거짓말처럼 녹아가던 땅은 내 앞에서 뚝, 하고 멈춰 섰다. 그리고 이프리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아냐. 헤스티아가 무사하다면... 그걸로 됐어. 무엇보다...... 이 빌어먹을 개자식들은 전부 도망친 것 같으니까. 화를 내봤자 나만 손해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땅을 질근질근 밞는 모습은, 전혀 화가 풀린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왜 당장 복수하러 움직이지 않으려는 거지?’
도망쳤다고 하나, 정령왕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무리 반신(半伸)의 경지에 이른 검제가 있더라도, 단숨에 한줌의 재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이해를 못 하는 내 귓가에 언제나 그렇듯이, 마더가 설명을 해줬다.
[...별 수 없어요. 마왕, 천왕, 드래곤 로드, 정령왕들 같이 상상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들은...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신께 많은 제약을 받았거든요. 전부 필요한 일이었어요. 인간들에게 능력이 주어졌다고 하나, 처음부터 절대자였던 왕들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적어도 그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는 이상... 왕들은 움직일 수 없어요.]
마더의 말에 나는 작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맞는 말이지만, 화가 나는 것은 별 수 없었다. 이프리트는 그 빌어먹을 제약 때문에, 자기 자식을 죽이려고 했던 녀석들에게 복수조차 못 한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으니, 헤스티아가 조막만한 손을 마구 흔들며 나에게 애교를 부렸다.
“꺄으~ 꺄아앗~!”
그런 헤스티아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거짓말처럼 화가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졌다. 동시에 이프리트가 그런 헤스티아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꺄, 꺄악!! 귀, 귀여워!! 뭐야,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나한테는 한 번도 저런 모습 보여준 적 없단 말이야!!!”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당장 나에게서 헤스티아를 빼앗아가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프리트. 당연히 그녀의 딸이었기에, 나는 얌전히 헤스티아를 넘겨주려 했는데... 헤스티아가 갑자기 이프리트를 향해 불을 뿜어냈다.
화르륵!-
“꺄르르~~!”
“..........”
불의 정령왕이니, 불에 뜨거움을 느끼지는 않겠지만... 거짓말처럼 그녀가 입고 있던 상의가 전부 불타 사라졌다. 내 눈에 엄청난 크기의 가슴이 출렁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프리트는 자신의 상체가 드러났다는 것보다, 헤스티아가 자신에게 반항을 했다는 게 더 신경 쓰였나 보다. 불의 정령왕답게, 그녀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딸 새끼가!!”
“꺄아, 꺄꺄!”
헤스티아는 그런 이프리트를 비웃듯이 꺌꺌거렸고, 이프리트의 온 몸에서는 다시 한 번 불꽃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크흐흐, 오늘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할 것 같은데...?”
이프리트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지만, 헤스티아는 그저 이프리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할 뿐이었다.
이 말괄량이 부모자식들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헤스티아의 귀에 속삭였다.
“헤스티아...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꺄르르~”
내가 귓가에 속삭이자, 고개를 마구 흔들며 부끄러워하면서도 헤스티아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몸에 힘을 쭉 뺐다. 역시 정령족이라 그런지, 아니면 이프리트의 딸이라 그런지 똑똑한 아기다.
나는 한 번 웃어주고는 이프리트에게 헤스티아를 넘겨주었다.
“여기요. 이프리트님.”
얼떨결에 헤스티아를 넘겨받은 이프리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와, 진짜 너 뭐야? 혹시 진짜 아동성추행 범? 아니면 전문 보육사? 어떻게 우리 헤스티아를 이렇게 잘 다뤄?”
이프리트의 말에 나는 움찔하며 대충 둘러댔다. 만약 ‘헤스티아에게 최면을 걸었거든요.’라고 솔직히 말했다가는... 바로 한줌의 먼지가 될 게 분명했다.
“하하, 헤스티아가 처음부터 잘 따르더라고요.”
“흐응? 그래? 뭐, 어쨌든 마음에 들었어! 그러고 보니, 내가 보상도 안 줬지? 일단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따라와.”
“네?”
갑작스런 이프리트의 제안에 깜짝 놀랐지만, 내가 거절할 틈도 없이 이프리트가 앞장서더니, 가슴을 드러낸 채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다시 한 번 ‘불족발파’건물에 도착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프리트는 헤스티아를 껴안으며, 전화를 꺼내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나에게 물었다.
“아, 맞다. 넌 뭐 먹을 거야? 냉채족발? 불족발?”
“그냥 족발은 안 되는 건가요.”
냉채족발은 와사비 때문에 코가 매웠고, 불족발은 그냥 혀가 매웠다. 굳이 먹으라면 못 먹을 것도 없었지만, 족발을 시켜줄 거면 그냥 쌈장에 찍어먹는 무난한 족발이 끌렸다.
그러나 내 말에 전화를 걸고 있던 이프리트가 책상을 쾅 하고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불족발파에 와서 일반 족발을 찾다니!! 감히 나를 모욕하는 거야. 뭐야?!”
“.........화끈한 불족발이 사실, 큭... 먹고 싶었습니다.”
“후훗, 그래야지.”
무슨 일반 족발 먹고 싶다고 했다가, 모욕을 한다는 말까지 들을 줄이야. 이내,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프리트가 흥겨운 목소리로 전화 너머로 주문을 시켰다.
“응, 응응, 나야. 나. 이프리트. 내 사무실 어딘지 알지? 불족발 대(大)자 두 개랑 소주... 으음, 두 명이니까... 대충 스무 병만 들고 와. 계산은 내 앞으로 달아놓고. 알았지? 빨랑 안 오면 가게 다 불태워 버릴 테니까. 빨리 와라?”
뚝!-
아주 일방적인 통보를 내뱉고는 바로 전화를 끊더니, 그대로 전화기를 저 멀리 던져버리는 이프리트. 그것보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면, 둘이 먹는데 대(大)자 두 개에 소주를 무려 스무 병이나 가져달라고 한 것 같은데... 정말 다 마시려는 걸까?
“크으, 기운도 많이 회복했으니 오늘은 마시고 죽자고!”
당신은 그냥 마시고 뻗을지 모르지만, 내가 독한 소주 스무 병을 둘이서 대작(對酌)했다가는 진짜 죽을 게 분명하다.
내가 벌벌 떨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태양을 보기 위해 살려면 지금 거절해야만 했다.
“저, 저기 이프리트님. 사실 제가 술이 조금 약.......”
여기까지 말하는데, 이프리트가 갑자기 눈을 치켜뜨며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손가락에 자그마한 불을 만들어, 담배를 입에 문 뒤 자연스럽게 한 모금 빨더니, 중얼거렸다.
“아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술자리에서 내빼는 남자인데... 하아, 이것 참... 갑자기 누군가를 불태우고 싶네? 혹시 뜨거운 거 좋아해?”
“..........”
“하아, 너무 아쉽다. 응? 설마 아니면... 유부녀인 나한테 쫄은 거야?”
이프리트의 말에 나는 기가 차고,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 말도 못 했다. 이프리트는 유부녀기 이전에, 정령왕이지 않은가!
그러나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뺄 수도 없었다. 남자의 자존심도 문제지만, 일단 거절하면 진짜 불태워질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저녁 대접이야!! 시발!! 보상이나 받고 떠나려 했다가, 병원에서 다시 수술 받게 생겼네!!’
소주 스무 병을 둘이서 나눠 마셨다가는 백퍼센트 내 간에 구멍이 뚫릴 게 분명하다. 이럴 때 숙취 해소나, 술에 강해지는 아이템 같은 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젠장.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프리트는 실실 웃으면서 헤스티아와 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헤스티아가 곤히 잠들었고 족발집 배달원이 불족발 두 접시와 소주 두 박스를 통째로 들고 들어왔다. 한 박스에 12병씩 들어 있으니, 총 24병이었다.
‘으아! 스무 병도 아니잖아! 대충 들고 오라고 했더니, 그냥 통째로 두 박스를 들고 오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면서 배달원의 뺨을 때려주고 싶었으나, 이미 내려놓을 거 다 내려놓은 배달원은 번개처럼 사라진 뒤였다.
이프리트는 소주 한 박스씩을 서로의 앞에 놔두며 중얼거렸다.
“크, 역시 저 녀석 센스가 있다니까. 이러면 서로 딱 열 두 병씩만 마시면 되겠다. 그치?”
“그, 그렇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소주 박스를 쓰다듬었다.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도착한 소주는 너무나도 시원했고, 불족발은 또 너무 매웠다.
“크으...”
불족발을 한 입 먹을 때마다, 소주를 안 먹을 수가 없었다. 매운데, 물을 마실 수는 없으니... 소주를 마셔야했고, 소주를 마시니 불족발을 안주 삼아 먹어야 했다.
나는 이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에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벌써부터 간이 비명을 지르고, 내 위장이 불을 뿜어내고 있는 것만 같다.
‘여기가 바로 십팔지옥(十八地獄)의 불지옥이로구나.’
내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이프리트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후훗, 왜? 힘들어? 내가 좀 기운 나게 해줄까?”
그렇게 말하는 이프리트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 붉어져 있었는데, 뭔가... 나보다 더 취한 것 같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제 소주 한 병 째다.
나는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아무 말도 못 했는데, 그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이프리트가 실실 쪼개면서 계속 말했다.
“헤헤, 있잖아... 남자는 원래 여자랑 같이 술 마시면 많이 마실 수 있다고 하거든. 그것도 눈앞에 있는 여자랑 섹스까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히끅, 얼마든지 마실 수 있고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천천히, 방금 입었던 상의를 벗기 시작하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 년, 술 무진장 약하잖아! 시발!!’
심지어 술주정도 장난 아닌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후훗, 역시 지우한테서 떡을 뺄 수는 없죠.
* 정령왕은 굳이 취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으면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불의 정령왕이다 보니, 액체인 술에 약하다는 설정입니다.
* 편수가 많아지다 보니, 작가가 실수를 하거나, 설정 충돌이 일어나는 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말씀해주시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수정을 해나갈 테니, 많은 도움 바랄게요 ㅎㅎ
발표 준비해야하는데, 신기하게 소설이 써지는...마술!
곰의판타지 / 무슨 소리입니까! 미래 장모님부터 덮치는 거죠!
키바Emperor / 헤스티아는 아직 멀었습니다!
nikumaimu / 아쉽지만, 이프리트에게는 제약이 걸려 있습니다 ㅠ ㅠ
Elde / 헉 , 그랬다면... 아마 그 편이 완결이 되었을지도...
내코돌려줘용 / 겨울도 슬슬 지나가는 것이...다람쥐가 일어날 때가 오고 있네요.
epooro / 아청, 읍읍!
은아준 / 화이팅해요. 서로!!
smone / 제약이 걸려 있지 않았다면... 지구는 옛날에 멸망했을테죠 후후.
휘텐가르트 /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죠 ㅠㅠ
*추천, 코멘트, 쿠폰 항상 감사합니다.*
*이제 진짜!! 오늘 마지막편은 밤 12시에 올라갈 겁니다. 후후. 작가도 쉬어야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