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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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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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50년에 한 번 하늘에서 붉은, 피처럼 붉은 눈이 내리는 날이 있다고. 사람들은 붉은 눈이 내리면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서서 눈을 맞는다고 한다.

평생 다리를 절던 노인의 다리가 말끔하게 낫고, 각혈을 하던 병약한 소녀의 얼굴이 복숭아빛으로 물들며, 또한 맹인이 두 눈을 번쩍 뜨고 환호성을 지르며 이곳저곳 뛰어다닌다.

사람들은 50년에 한 번 내리는 그 붉은 눈을 자신들이 섬기는 오르타 신이 내려주신 축복의 선물이라고도 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아름다운 처녀였으나 벙어리였다고 했다.

하지만 붉은 눈을 맞은 그 순간, 기적과도 같이 목소리가 트였고 그 이후부터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주위에서 알아주는 음유시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50년이 지난 지금.

하늘에선 붉은 눈이 내리고 있다.

할머니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병든 사람들을 말끔히 치료해 준 축복의 붉은 눈이.

하지만 병이 치료된 사람들의 기쁨의 함성도, 순수한 탄성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무덤 속과도 같은 적막만이 붉은 눈이 내리는 꿈 같은 세계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소년은 힘겹게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축복의 눈이 소리 없이 대지 위로 내려앉는 광경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경건하고 성스러운 것이었다.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에 소년은 넋을 잃고 조용히 내리는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너무도 조용히 들판 위에 쌓여가는 붉은 눈.

붉게 물든 대지를 다시 붉은색으로 뒤덮어 가는, 신이 주신 축복의 선물.

시체처럼 납빛을 띠고 있던 소년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고 온몸을 가득 메운 상처들이 조금씩 아물어갔다.

절망스럽기까지 했던 몸의 고통은 서서히 사그라들었지만 왜인지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소년의 커다란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떨어졌다.

들판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쓰다 버린 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그들의 몸 위로 쌓여만 가는 붉은 눈.

이미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려 크게 떠진 눈조차 제대로 감겨줄 수 없는 누이, 형제, 부모, 그리고 많은 사람들.

50년 만에 한 번 내리는 기적의 눈은 시체들 속에 파묻힌 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소년은 되살려냈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은 되살려내지 못했다.

뭐가 신의 선물이고, 뭐가 기적의 눈이란 말인가.

억울하게 죽은 이 많은 사람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누이와 형제들의 애처로운 몸을 보듬어 안아주지도 못하면서 대체 뭐가 신의 축복이란 말인가!

“으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억눌린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소년은 가녀린 어깨를 애처로울 정도로 떨며 오열했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여가며, 몸속의 수분이 모두 메말라 버릴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절망으로 가득 찬 소년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죽인다.

죽여버린다.

어린 누이와 형제, 부모, 죄 없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그들. 검은 갑옷을 입고 악귀 같은 눈으로 자신들을 사냥하던 야만인들. 사자 갈기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야만인들의 선두에 서 있던 그 남자.

“D 님! 그쪽은 위험하니 더 이상 들어가지 마십시오!”

적막만이 지배하던 꿈속 같은 세계에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말발굽 소리와 갑옷이 부딪치는 불쾌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죽은 자들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붉은 눈에 파묻힌,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 옆으로 몸을 숨겼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죽은 자의 세계에 발을 디딘 이방인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도 보이는 검은 말. 약간 몸집이 작은 말의 체구답게 타고 있는 자 역시 아직 어린애다.

붉은 눈 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이는 은색의 머리카락, 시체처럼 파리한 하얀 얼굴. 굳게 다문 입술은 소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붉고 도톰하게 부풀어 있다. 고급스런 검은 망토 아래의 가녀린 어깨와 어딘지 병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녀석은 어른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정말 꿈처럼 아름다운 아이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 바람에 흩날리는 아이의 검은 망토엔 피처럼 붉은 용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망막 안쪽 깊숙한 곳에 각인된 공포.

바로 눈앞에서 자신의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잔인하게 베어버린 사내들의 망토에도 저것과 똑같은 용이 자리잡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애써 참아내면서 소년은 똑똑히 보았다. 자신을 필사적으로 감싸안고 유명을 달리한 어미의 품안에서 소년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살육의 대 현장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넣었다.

바람에 흩날리던 검은 망토.

사방으로 튀는 피, 코를 찌르는 악취와도 같은 피비린내.

그 아수라장 속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사자 갈기와도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 사내는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지옥에서 갓 빠져나온 악귀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무기력하게 자신의 칼에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인다는 듯이 그렇게.

죽인다!

죽여버리겠어!

소년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들어찼다. 눈알이 빠져나올 것처럼 크게 치떠지고 온몸이 심하게 떨려온다.

화사한 은발을 나부끼는 아이를 태운 말이 사뿐사뿐 다가온다.

바로 눈앞에 자신의 적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아이를 태운 말의 늘씬하게 빠진 다리가 소년이 몸을 숨기고 있는 시체를 밟는다고 생각한 순간, 소년은 들짐승처럼 재빨리 튕겨나가 무작정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이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방향을 틀었다. 소년은 방향을 잃고 비틀댔지만 이내 눈을 부릅뜨고 다시 아이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아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허리춤에 찬 검을 빼어들곤 소년의 연약한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갑자기 등을 가격당한 소년은 붉은 눈이 가득 쌓인 바닥에 널브러졌다.

차가운 눈이 금세 녹아 얼굴과 머리카락을 적신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척추를 정통으로 가격당한 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난 이렇게도 무력한 놈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자 순식간에 눈가가 젖어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잃고도 난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녀석인가? 스칸데르인은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생각대로 맑고 청아했다. 소년은 크게 눈을 치뜨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이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너무도 차가운 눈이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저 외모만큼이나.

“놀랍군. 이런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녀석이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어린 녀석이 말이야.”

“죽여버리겠어.”

소년은 피가 맺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들짐승처럼 낮게 으르렁댔다.

“무기도 없는 애송이가 나를 죽이겠다고? 우습군.”

표정엔 변함이 없었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분하긴 했지만 아이의 말이 맞다. 자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일 뿐이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더 더욱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오는 것이다.

아이는 감정 없는 유리알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들어 조용히 붉은 눈이 내리고 있는 하늘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기적의 붉은 눈이라......”

하지만 제대로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이 어디선가 낯선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D 님! 어디 계신 겁니까!”

아마도 아이와 동행한 자인 듯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말살해 버리려 했던 페르티잔이다. 그리고 분명 아이는 페르티잔 귀족의 자제일 것이다.

죽는다. 죽고 만다.

이대로, 부모와 어린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더러운 페르티잔 녀석들의 칼에 죽고 만다!

“D 님!”

“난 여기 있다!”

아이는 다급하게 자신을 찾는 사내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그리고 싸늘한 보랏빛 눈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소년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 명쯤 살아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아이의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싶은 순간, 소년은 심하게 머리를 얻어맞고 그대로 눈밭 위로 쓰러졌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소년은 아이를 태운 말의 가벼운 말발굽 소리와, 아이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시야 가득 붉은 눈, 축복의 붉은 눈이 가득 찬다고 생각한 순간. 그걸로 끝이었다.

바시고트 력 650년.

80년 동안 계속되었던 스칸데르와 페르티잔의 분쟁은 스칸데르에 50년 만의 기적의 붉은 눈이 내리던 겨울, 페르티잔의 승리로 지루하고 피비린내 나던 전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페르티잔 역대 왕 중 가장 잔인하고 극악무도하다고 일컬어지는 라자르 왕의 무모하지만 결단력 있는 전술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라자르 왕은 순수한 스칸데르의 피가 흐르는 자라면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살육했고, 그 시체를 들판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다. 모두들 그의 잔악한 방식에 치를 떨었으며, 누구도 섣불리 페르티잔을 넘보지 못했다.

그 이후 페르티잔의 라자르 왕은 ‘살육의 신’이란 칭호를 얻었다.

페르티잔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스칸데르인은 단 한 명.

일개 농노 출신으로 평범한 가정의 장자였던 그의 이름은 예르네이ㆍ코피타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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