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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르곤의 눈물 1 (2/16)

휘르곤의 눈물 1

이제는 완연한 봄이었다.

볼을 스치는 바람엔 훈훈한 온기가 느껴졌고 은은한 꽃향기마저 품고 있었다.

봄이 되자 기나긴 겨울 동안 움츠러들었던 모든 것이 다시금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래 통을 옆구리에 끼고 빨래터에 가는 아낙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고, 아이들은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들판 위를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지치지도 않는지 연신 시끄럽게 재잘대며 봄나물을 캐러 다니던 처녀들은 햇살이 내리쬐는 풀밭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곤 더욱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캡틴! 오늘 저녁에 어머니가 칠면조 요리를 해놓고 기다리신대요!”

처녀 중 하나가 내리쬐는 햇살보다 더욱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자 언덕 위의 사내 역시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겨울 내내 익혀두었던 술도 있으니까 꼭 오셔야 돼요!”

이번에도 사내는 그저 손을 흔들어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러자 곁에 선 처녀의 친구들이 그녀를 순식간에 에워싸고 불만이라는 듯 중얼중얼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못된 계집애! 오늘 저녁엔 우리 집에 초대하려고 했었는데, 선수를 치다니!”

“아버지가 겨우내 익혀두었던 포도주가 있다고 해서 나도 오늘 캡틴을 초청할 생각이었는데.”

친구들의 원망 어린 시선에 처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 애썼다.

“에이, 오늘만 날이니? 캡틴을 집으로 초청하는 건 언제든 해도 되잖아.”

“하지만 곧 꽃의 축제란 말이야. 캡틴한테 댄스 신청을 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어머머? 웃기네. 축제 때 캡틴이랑 댄스를 추는 건 바로 나야.”

“누가 정해 놨대니? 먼저 신청하는 사람이 캡틴의 파트너가 되는 거지, 뭐.”

정답게 웃으며 나물을 캐던 절친한 친구들이 순식간에 눈을 부라리며 싸우는 연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그런 작은 싸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서로 노려보던 그녀들 중 한 명이 먼저 웃음을 터뜨리고 다른 한 명도 같이 웃음을 터뜨림으로써, 그녀들은 다시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다.

그러곤 그녀들은 셋이 나란히 앉아 나물 캐기에 열중하면서 자신들의 특기인 수다떨기를 시작했다.

“우리 캡틴 말야. 왠지 더 멋있어진 것 같지 않아?”

“캡틴은 원래 멋졌어.”

“그렇지. 대륙 전체를 다 뒤져봐도 캡틴만큼 멋진 남자는 없을 거야.”

그녀들은 머리를 맞대고 어린애처럼 킥킥 소리 내 웃었다.

이렇듯 한창 피어나는 젊은 처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기인은 언덕 위에 다리를 쩌억 벌리고 앉아, 양고기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는 이제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렇게나 대충 썰어서 고기와 야채를 억지로 끼워넣은 엉망진창인 샌드위치였지만,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아침은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맛있었다.

사내는 반쯤 남은 빵을 한 입에 우겨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그리고 작년에 따서 고이 재워놓은 포도주를 들이키고는 만족한 얼굴로 웃으며 거칠게 입술을 문질러 닦는다.

“아침부터 술이라니. 정말 당신답네요, 예르네이.”

과연 아까부터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밝게 웃는 소녀의 얼굴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소녀의 얼굴을 바라본 사내의 얼굴은 종이를 뒤집듯 순식간에 밝아졌다.

“너, 언제 온 거냐?”

사내의 목소리는 약간 상기돼 있었다.

부드럽게 풀어진 그의 얼굴이 마치 오랜만에 딸을 보는 아버지와도 같아 보여서 소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제요. 캡틴은 원정 나갔다가 어젯밤 늦게 왔으니까 몰랐겠지요.”

“아아, 미안. 바다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거든.”

“알아요. 봄의 서쪽 바다는 거칠기로 유명하니까.”

“그래그래. 어쨌든 수도에 갔다온 얘기 좀 해봐, 레이루.”

“에, 뭐예요? 내가 반가운 게 아니라 내가 다녀온 수도에 대한 것이 궁금했다는 거예요?”

사내는 말없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소녀, 레이루의 빛바랜 갈색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았다.

어린애 취급 하지 말라며 노골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사내의 커다란 손을 떼어내도 그는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어쩔 수 없지. 이 사람에겐 아무도 못 당한다니까.’

레이루는 고개를 저으며 사내의 곁에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성질 나쁘고 우악스러운 아버지를 따라, 가는 데만도 꼬박 2주가 걸리는 수도에 다녀온 이야기를.

아무도 오지 않는 무인도 같은 죄인들의 섬.

한 나라라기보다는 모두가 가족같이 지내는 평화로운 이곳, 세이너 섬의 사람들은 매년 멀고 먼 수도까지 나가서 1년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사갖고 돌아온다.

물품 운송 담당은 매년 바뀌는데 올해는 레이루의 아버지와 레이루의 친구인 넨의 아버지, 이렇게 둘이었다. 그리고 매년 그랬듯이 두 아버지들은 나이가 찬 자식들과 함께 수도로 가는 배에 올랐고, 2주간의 긴 항해 끝에 겨우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 수도에 와보는 레이루에게는 수도의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진진해 보였다.

끝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 아름다운 여인들, 고급스런 옷의 귀족들, 그리고 진귀한 물건들.

레이루와 넨은 세이너 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활기에 넘치는 수도를 어린애들처럼 뛰어다녔다.

너무나 즐거웠다.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고, 여자애들은 인형처럼 예뻤으며, 남자들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있었고, 순찰을 다니는 국경 수비대원들의 제복에선 고급스런 윤기가 흘러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2주간의 일정 중 처음 일주일간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수도의 새로운 문화에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수도 남쪽의 외진 골목을 탐험하기로 결정한 어느 날, 레이루와 넨은 볕도 들지 않는 음습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에는 덜렁이는 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여자들이 줄지어 늘어서선 천박한 미소로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분을 바른 창백한 얼굴과 생기 없이 늘어진 젖가슴, 초점 없이 풀린 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그녀들은 마치 도심 속의 유령 같았다.

“저 여자들은 창녀야, 레이루.”

넨은 잔뜩 긴장한 레이루에게 바짝 붙어 낮게 속삭였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들이래.”

“에? 돈을 받고 몸을 팔아?”

“응. 마크 오빠가 그랬어. 여긴 수도에서 제일 유명한 환락가래. 마크 오빠도 여기에서 동정을 뗐대.”

그렇게 말하는 넨의 주근깨 투성이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아직 젖가슴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넨과 레이루에게 있어선 성숙하게 여문 나체를 햇빛 아래 그대로 드러낸 거리의 여자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돈을 주고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

“나도 얼마 전에 마크 오빠가 친구들이랑 하는 얘기를 엿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 왠지 기분이 나빠졌어.”

레이루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넨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것은 넨 역시 마찬가지인지 레이루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거리를 지나갔다.

“어이! 이봐, 꼬마 아가씨들. 어느 가게에 있어?”

수염이 덥수룩한, 붉은 머리를 한 남자였다. 대낮부터 술에 취했는지 그의 숨결에선 썩은 알코올 냄새가 났다. 사내는 넨과 레이루의 앞에 버티고 서서, 욕망에 찌든 얼굴을 하고는 물건을 감정하듯 두 소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마치 흉측한 파충류의 혀가 온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느낌에 레이루는 몸서리를 쳤다.

“우리들은 그냥 여길 지나던 중이었어요.”

“에이. 돈은 섭섭하지 않게 줄게.”

“아뇨, 우린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어허. 몸을 파는 창녀 주제에, 손님을 거절하는 건가?”

“꺄아!”

사내는 넨의 가는 팔목을 붙잡고 성난 돼지 같은 숨결을 내뿜으며 언성을 높였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넨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그만둬요! 넨을 놔줘요!”

레이루는 필사적으로 사내에게 덤벼들었지만, 화가 난 사내는 자제력을 잃고 온 힘을 다해 레이루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사내에게 얼굴을 얻어맞고 레이루는 크게 휘청거렸지만, 다시 이를 악물고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넨을 놔줘요! 그 애한테서 더러운 손, 떼요!”

“시끄러워!”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법은 없었다.

이곳에서 사내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 누구도 어린 여자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무뢰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자신이 나고 자란 세이너 섬의 사내아이들은 결코 여자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보호해 주고,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해 주는 그런 세계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입 안이 찢어졌는지 턱을 타고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레이루는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문질러 닦고, 눈을 치뜬 채 다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아직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강하고 추악했지만, 세이너 섬의 여자들은 부당한 폭력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그런 여자들이 아니었다.

“넨을 놔! 이 자식!”

“이 계집애가 진짜!”

레이루는 똑바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폭력은 두렵지 않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바다 신의 분노, 고깃배를 전복시키고 섬 남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풍랑, 시도 때도 없이 고깃배를 공격하는 굶주린 상어 떼.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추악한 사내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쯤이야.

“어머, 멋진 오빠. 뭣 하러 이런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한테 힘자랑을 하는 거야?”

한 번도 햇빛을 쬐지 않은 것 같은 납빛을 띤 하얀 팔목이었다.

레이루를 향해 휘둘러졌을, 털이 북슬북슬한 사내의 팔을 움켜잡은 가늘고 화사한 팔목 위로 하얀 분가루를 칠한 섬세한 얼굴이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햇빛에 그을려 갈색으로 탄 세이너 섬의 야성적인 여자애들과는 달리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터질 듯 부풀어오른 가슴을 한껏 밀어올려 가는 허리를 돋보이게 한 붉은 드레스의 여인. 드레스 색깔에 맞춘 붉은 꽃 모양의 머리 장식이 여자의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 속에서 처연하게 빛났다.

“가슴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어린애를 상대로 뭘 하려고? 오빠는 내가 멋지게 상대해 줄게.”

여자의 퇴폐적인 미소에, 사내의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가 걸렸다. 털로 뒤덮인 냄새나는 사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감겼고, 그녀는 붉은 입술을 유혹적으로 달싹이며 사내의 상반신에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밀착시켰다.

그것만으로도 사내는 이미 천국에 당도한 모양이었다.

레이루는 가는 몸을 떨며 울먹이는 애처로운 친구에게 다가가 그녀의 가는 어깨를 감싸안고 토닥였다. 넨의 팔목에는 사내의 끔찍한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거기, 꼬마들. 여기서 기웃거려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애들은 사탕이나 사 먹으러 시장에나 나가봐.”

붉은 드레스에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주정뱅이를 옆구리에 끼고, 가는 팔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레이루는 넨을 부축한 채, 그녀가 골목 어귀의 간판도 없는 싸구려 여관 안으로 사내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

건물 구석구석을 지키고 있는 하얀 얼굴의 유령 같은 여자들.

“돌아가자, 넨.”

옷깃을 잡아끄는 넨의 손을 붙잡은 채 레이루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빨리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악취가 풍기는 이곳을 벗어나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레이루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몇 분, 몇 초라도 이런 더러운 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여자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길을 걷던 레이루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멈춰 섰다.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하하하하! 불쌍한 레이루. 수도에 가서도 길을 잃다니!”

사내의 호쾌한 웃음소리에 레이루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내 탓이 아니라구요. 이상하게, 걸어도 걸어도 계속 같은 곳만 맴돌게 되더라구요.”

“하긴 크레임 거리는 미로 같아서 그곳 토박이들도 가끔 길을 잃곤 하지. 자, 어쨌든 계속 얘기해 봐. 크레임 거리에서 길을 잃고, 그래서 어떻게 됐냐?”

재밌어 죽겠다는 듯 연신 웃음을 흘리는 사내를 한번 노려보고 레이루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한참 헤매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가고 있더라구요. 배도 고프고 더 이상 돌아다닐 기운도 없고 해서 광장 같은 곳에 주저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조심조심,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어디론가 떼지어 몰려가는 거예요.”

그것은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쓰레기가 둥둥 떠 있는 분수에 걸터앉아 다리를 쉬고 있는데 광장 바깥쪽의 어두운 골목으로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가고 있었다.

크레임 거리에서 본 취객이나 여자를 사러 온 사내들처럼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지도 않았고, 일부러 요란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들처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어둠 속으로, 골목 안쪽의 어딘가로 물결처럼 쓸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중에는 하인을 대동한 고급스런 옷의 귀족들도 꽤 많았다.

“뭐야? 저건?”

넨은 불안한 듯 레이루의 품에서 눈을 굴렸다.

하지만 넨의 두려움을 완화시켜 줄 만한 적절한 대답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그들의 행렬은 암흑의 미사를 위해 몰려가는 사교의 신자들 같았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들에게서 나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일련된 행동 ─ 모두 침묵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갈 길만을 가는 ─ 들은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아서, 결국 레이루와 넨은 홀린 듯이 아직까지도 꾸역꾸역 어딘가로 밀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렬 가까이로 다가갔다.

어찌 됐든 섬에서 자란 탓에 둘은 또래 사내아이들만큼이나 호기심이 왕성한 소녀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사람들에게 휩쓸려 두 소녀는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이 사람들과 함께 어두운 골목 안, 정확히는 간판도 없는 낡고 큰 건물의 지하로 쓸려 내려갔다.

꽤 많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 겨우 도착한 그곳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레이루는 볼 수 있었다.

가장 밝게 빛나는 높은 강단. 그 위에 죄인처럼 팔과 다리에 족쇄를 차고 축 늘어져 있는 여자들을.

그녀들은 하나같이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이미 바깥에서 여자들의 벗은 몸을 수도 없이 봐온 레이루였지만 이토록 적나라하게, 그것도 가축처럼 몸을 얽매인 채 늘어선 여자의 나체를 본다는 것은 꽤 큰 충격이었다.

“자아자아! 여러분! 이 여자들은 게로커 족의 여자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게로커 족은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지요. 이 애들은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처녀들입니다. 자아, 그럼 가장 왼쪽의 아이부터 경매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시작합니다!”

여자들의 앞쪽에 선, 개구리처럼 배가 튀어나온 중년 사내가 달뜬 어조로 소리치자 모여선 사람들이 돈의 액수를 큰 소리로 불러댔다.

“노예시장이군. 그것도 불법적으로 성행하고 있는 성노를 팔고 사는. 크레임 거리에 그런 블랙 마켓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사내는 턱을 손가락으로 쓸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레이루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음 얘기를 재촉했다. 하지만 사내의 잘 그을린 건강한 얼굴을 보는 순간 레이루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바닷바람에 살랑이는 그의 붉은 머리카락과 코를 찌르는 강렬한 체취,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상냥한 두 눈.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그저 좋아서 옆에서 잠든 그의 얼굴을 밤이 새도록 바라보기만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괴로워졌다. 태양의 냄새가 나는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 와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알고 있다.

몸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 괴로운 감정이 무엇인지.

늘 가족같이 지내던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더 이상 순수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언제까지나 이 사람의 마음속에 자신은 코를 질질 흘리던 철부지 계집애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미 함께 발가벗고 목욕을 하곤 했던 또래 남자애들과는 완전히 다른, 여자의 몸을 하고 있건만.

넨과 함께 사람들에게 떠밀려 내려간 지하에서 본 광경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손가락 끝이 약하게 저려온다.

“자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하이라이트, 스칸데르의 피가 섞인 아주 귀한 물건을 소개합니다!”

둥근 스테이지 위에서, 사회자인 듯한 뚱뚱한 남자는 과장되게 팔을 뻗어 무대 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비밀의 공간을 가리켰다. 그 순간 낡고 더러운 붉은 휘장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 얇은 천을 두른 젊은 청년이 떠밀려 나왔다.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과 매끄러운 갈색 피부, 겁먹은 듯한 두 눈은 보석을 박아놓은 듯 맑고 청아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스칸데르. 15년 전 초강대국 페르티잔에게 패한 뒤 어린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몰살당했다는 비운의 종족.

스칸데르의 순수 혈통은 현재 완전히 멸족된 상태지만 스칸데르와 다른 종족의 혼혈은 극소수가 대륙 전체에 퍼져 있다며, 아버지는 어린 레이루에게 말해 주곤 했었다.

페르티잔에선 스칸데르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을 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대륙에서 완전히 스칸데르의 씨를 말리기 위해 페르티잔은 현재까지도 스칸데르의 혼혈들을 찾는 족족 살해하고 있다고도 했다.

“자아, 그럼 100크리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 안의 사람들이 무섭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잠자코 단상을 지켜보던 맨 앞줄의 귀족들도 이번엔 눈을 벌겋게 뜬 채 고함을 질러댔다.

레이루는 그저 가만히 서서, 단상 위에 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가련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몰이꾼에게 쫓겨 코너에 몰린 초식동물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며, 촉촉하게 젖은 두 눈을 커다랗게 치뜬 채 자신을 사기 위해 어마어마한 액수도 마다 않는 추악한 돼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성스러운 외모도, 그렇다고 미성숙한 소년처럼 가는 몸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청년은 사내였다. 성인 남성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건장한 남자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레이루가 보기에, 그는 그 어떤 여자들보다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몸을 휘감은 부드러운 천과,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탄탄한 몸, 그리고 넘실대는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청년의 머리카락, 눈동자, 몸짓 하나하나가 숨막힐 정도로 관능적이었다. 사내들의 거친 숨결과 역한 땀냄새로 가득한 이곳에서 그는, 스칸데르의 피가 섞인 고귀한 그는 드래곤에게 바쳐진 순결한 처녀처럼 황홀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이 스칸데르인인가.’

레이루는 마른침을 삼키며 단상 위의 청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 청년에게 매혹되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청년은 닮아 있었다. 세이너 섬 ─ 죄인들의 섬이라고도 불리는 ─ 의 누구보다도 강한 캡틴, 예르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 바로 그 남자를.

“그 청년은 결국 돼지처럼 살이 디룩디룩 찐 어떤 귀족한테 팔렸어요. 낙찰된 가격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저절로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어요. 그럴 돈이 있으면 빈민가에 기부나 할 것이지. 하여튼 귀족들이란......”

레이루는 평소와 다름없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얘기를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다른 때와는 달리 사내, 예르네이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어린애같이 웃으며 자신에게 짓궂은 농담을 던졌을 그였기에 레이루는 커다랗게 눈을 깜빡이며 사내의 굳은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사내의 옆얼굴은 장인의 솜씨로 깎아놓은 조각처럼 완벽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늘 쓰고 다니는 두건 밑의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는 달리 빽빽이 들어찬 긴 속눈썹은 매끄러운 검은색이다.

유리알처럼 맑은 두 눈동자는 은은한 밤나무색을 하고 있지만 결코 심약해 보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의 두 눈이 햇살에 비쳐 짙은 색으로 물들 때면 레이루는 어렸을 때 그림책에서 본 전투의 신을 떠올리곤 했다.

“스칸데르인의 혼혈이 노예시장에서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혼잣말을 하듯 예르네이는 낮게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저... 캡틴?”

보다 못한 레이루가 걱정스러운 듯 예르네이에게 넌지시 말을 걸자 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 흠칫 놀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아. 어쨌든 잘 들었다, 레이루. 생전 처음으로 가본 수도에서 재밌게 놀다 왔다니 다행이군. 하지만 말이다. 다음부터는 그런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마. 이번엔 처음이었으니 용서해 주겠다만 다음엔 정말 혼내줄 거야. 알았니?”

활짝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는 그였지만 눈치 빠른 레이루는 그가 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스칸데르인의 혼혈 얘기가 나오자마자 그의 안색이 나빠졌다.

뭔가 스칸데르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건가.

어색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이루는 허리춤에 찬 가죽 가방에 소중하게 가져온 선물을 생각해 내고는 주섬주섬 가방 속을 뒤졌다. 소녀의 작은 가죽 가방 안에서 나온 것은 작은 단도였다. 검집의 정교한 무늬로 보건대 꽤나 고가의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이걸 보자마자 예르네이 생각이 나서 사버렸어요.”

“너 같은 어린애가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비싼 걸 사와?”

“하지만 나, 캡틴한테 늘 받기만 했는걸요. 그리고 이거 생각보다 그리 비싼 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받아둬요.”

레이루는 떠넘기듯이 단도를 사내의 품안에 쑤셔넣어 주었다.

“못 말리는 녀석 같으니라고. 다시는 이런 거 사오지 마. 난 수도에서 나는 마멜로 열매 하나 정도면 된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꽤나 기쁜 듯 사내의 얼굴은 온화하게 풀어져 있었다. 사실 이 단도를 사느라 몇 년 동안 틈틈이 모아두었던 비상금이 전부 날아가 버렸지만 그까짓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며 레이루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고맙다, 레이루. 잘 쓸게.”

사내는 커다란 손으로 레이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레이루는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는 어린애처럼 소리 내 웃었다.

스칸데르.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과 풍족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아침이 되면 크우저의 맑은 노랫소리가 들리던 평화롭고 축복받은 땅.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사람들이었고 어린 동생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웠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했으며 함께 노여워했다. 그것이 스칸데르였다.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란 아름다운 고향, 스칸데르.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궁성이 대낮처럼 밝아졌고,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아직 잠이 덜 깬 나와 어린 동생들을 껴안고 부모님들은 잠옷 바람으로 밤이슬을 맞으며 뛰었다.

단지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희뿌연 시야에 비치던 눈물이 나올 정도로 선명한 붉은 빛의 향연, 밤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던 불꽃. 그리고 어디론가 정신없이 뛰는 마을 사람들을 뒤쫓던 거대한 악마의 개들.

흩날리는 검은 망토에 수놓아진 붉은 용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꿈틀거린다고 생각했을 때 가족과도 같았던 마을 사람들은 허수아비처럼 픽픽 쓰러져갔다.

고막을 자극하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그들의 거대한 칼에 몸을 찢기며, 대지를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이며 그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보았다.

뒤따라오던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덮치던 검은 그림자를, 아가리를 벌리고 굶주린 들개처럼 어머니와 동생들을 물어뜯던 악마와도 같은 그들을.

“크윽......”

죽은 자의 망령처럼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옛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예르네이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아마도 낮에 레이루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도의 남쪽 거리, 크레임 가에서 벌어진 비밀 시장에 관한 이야기.

물론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다. 페르티잔의 무자비한 살육을 피해 대륙 각처에 숨어든 그들을 잡아 귀족들에게 팔아넘기는, 마귀와도 같은 무리들에 대한 이야기는.

15년 전 페르티잔에 의해 완전히 멸족된 종족이라는 것은 희귀한 것을 좋아하는 돈 많은 변태 귀족들에게는 분명 구미가 당기는 물건일 테지.

그리고 자신들, 스칸데르 족은 불행히도 보기에 그럴듯한 외모를 하고 있다.

오직 스칸데르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 매끄러운 밀빛 피부, 단정한 이목구비.

어떤 유명한 음유시인은 스칸데르인을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아름다운 맹수에 비유하며 극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모가 아름다운 종족은 얼마든지 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완전히 멸족된 종족이라는 이유가 자신들을 더욱더 비극적으로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르네이는 쓰게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곁에 놓아둔 낡은 그릇 안의 아성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성초는 여자들이 머리색을 바꾸고 싶을 때 쓰곤 하는 일종의 염색용 풀이다. 잘 짓이겨서 소금과 섞어 머리에 발라두면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의 색이 변한다.

자르지 않는 한 결코 색이 빠지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마다 색이 다르게 변해서 수도의 귀부인들까지 애용하는 미용 상품 중 하나지만 단점이 하나 있다면 냄새가 고약하다는 점이랄까.

악취 정도는 아니지만 특유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염색을 한 뒤에도 얼마 동안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다.

예르네이는 아성초 즙을 커다란 솔에 묻혀 뿌리 부분에 대충 펴바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본연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 세이너 섬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본래 머리카락 색을 모른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은 이미 완전히 대륙에서 사라져버린 스칸데르인 특유의 색이다.

그리고 목 뒤쪽에 자리잡은 작은 초록의 별.

목을 덮은 머리카락을 일부러 쓸어넘기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는 작은 문신이지만, 이것은 15년 전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칸데르인 순혈종이라는 징표다.

스칸데르에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목 뒤에 별의 낙인을 새긴다.

초록의 별은 스칸데르에서 섬기는 신, 오르타의 표식으로 아이에게 오르타 신의 낙인을 새김으로써 아이가 무사하고 건강하게 커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여어! 예르네이!”

홀로 상념에 젖어 있던 그를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게 해준 것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제치고 집 안으로 쳐들어온 한밤의 침입자였다. 한 손에 커다란 술병을 든 채 곰처럼 쿵쿵대는 발소리를 내며 멋대로 의자에 걸터앉는 침입자를 예르네이는 못마땅한 눈으로 곱아 보았다.

“제발 부탁이니 노크라도 좀 하고 들어오라구요.”

“우리 사이에 무슨. 머리색을 빼던 중이었냐? 이리 줘봐. 내가 해줄 테니까.”

제대로 깎지 않은 지저분한 수염에 들짐승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덩치, 짧게 쳐올린 갈색 머리카락.

웃으면 부드럽게 풀리는 눈매가 딸인 레이루와 꼭 닮은 사내, 멘더는 예르네이에게서 솔을 빼앗아 들고 거뭇거뭇 올라오기 시작한 검은색 부분에 아성초 즙을 건성으로 찍어 발랐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야생짐승 같은 예르네이였지만 사내의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불평까지 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자신이 스칸데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향을 뒤로하고 무작정 길을 떠난 끝에 결국 도시의 도둑들에 의해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자신을 대륙 각지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죄인들의 섬, 세이너의 도적 두목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어린 자신을 번쩍 안아들고 이렇게 말했다.

“너도 우리들과 같은 죄인이구나, 꼬마야. 검은색은 아름다운 색이지만 한편으론 저주받은 색이기도 하지.”

어딘가에서 아성초 즙을 구해 온 사내는 도시의 싸구려 여관 방구석에서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타는 듯한 붉은색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를 따라 도착한 세이너 섬은 죄인들의 섬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람들은 늘 웃음을 잃지 않았고, 모두가 다 한가족인 것처럼 지냈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랐던 그곳, 스칸데르처럼.

그렇기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모두가 너무나 소중하기에, 다시는 잃고 싶지 않기에.

“자, 다 됐다! 그대로 조금만 있으면 색이 제대로 빠질 거야.”

사내는 호쾌하게 웃으며 예르네이의 등을 소리가 나도록 쳤다.

“아프잖습니까!”

“아들아, 이건 아버지의 사랑의 스킨십이라는 거다.”

“어렸을 때도 당신의 그 엄청난 사랑의 스킨십 때문에 등짝은 늘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지요.”

“하하! 자, 어쨌든 마시자고! 수도에서 사온 특제 셰리주야!”

사내, 멘더는 손에 집히는 대로 잔을 들어 가득 술을 따랐다. 향긋한 과일주의 냄새가 위를 자극해 입 안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예르네이는 사내에게서 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부드러운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모양이구만. 어이, 좀 천천히 마시라고.”

아성초 잎의 독한 냄새 때문에 갈증이 더욱 심해진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취하고 싶었다. 정신없이 취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취해서 잠이 들지 않으면 말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 남자에게, 자신의 아버지이자 가족인 그에게 어린애처럼 의지해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사양이다. 자신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니까.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술을 홀짝였다.

영원과도 같았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멘더 쪽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술에 취한 탓인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번에 수도에 갔다가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다.”

예르네이는 말없이 눈을 들어 멘더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잠잠하던 히이토 족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있는 모양이야. 벌써 꽤 많은 소국가들이 그놈들한테 당했나 봐.”

거인 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히이토 족. 잔악하고 야만스런 그들은 한때 대륙에 피바람을 몰고 왔던 전설의 종족이다.

강대한 국가인 페르티잔이 정벌에 실패한 유일한 종족.

언젠가는 그들이 페르티잔의 억압에서 벗어나 활개를 칠 날이 올 거라고 모두들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예상보다 너무 빨리 그날이 온 것뿐.

“페르티잔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요.”

“그게, 히이토 놈들의 새로운 왕이 된 녀석이 어마어마한 녀석이라 누르기가 쉽지 않다는군.”

“페르티잔 라자르 왕도 이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모양이군요.”

“아냐. 라자르 왕은 아직까지 건재해. 다 늙어빠진 호호 할아버지가 된 주제에 아직까지 대륙인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잖냐. 라자르 왕이 쇠약해진 게 아니라 히이토 족의 새로운 왕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겠지.”

히이토 족들이 한창 활동하던 그때, 예르네이는 갓 태어나 바닥을 기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얘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어린 손자를 앉혀두고 할머니는 늘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들은 피를 뒤집어쓴 악마, 대륙을 통째로 삼켜버릴 거대한 죽음의 신이라고.

하지만 그 거대한 죽음의 신도 결국 페르티잔이라는 악마에게 사정없이 짓밟혔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으론 그놈들이 다음으로 노리고 있는 곳이 우리가 사는 이곳, 세이너 섬이라더군.”

비장한 어조로 말을 끝낸 멘더는 미간을 좁히고 잔에 남은 셰리주를 몽땅 위 속에 쓸어담았다.

“어째서 그들 같은 대단한 종족이 이런 아무것도 없는 섬을 공격한다는 거지요?”

멘더는 예르네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멘더!”

다시 한 번 추궁하자 그제야 그는 괴로운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순혈종이 있으니까.”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손에서 떨어진 술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바닥에 쏟아진 피처럼 붉은 셰리주의 시큼한 냄새가 작은 부엌 안에 가득 찼다.

“넨이 너의 새로 자라나는 검은 머리카락과 목 뒤 별 모양의 낙인을 본 모양이야. 사람들 앞에서는 결코 두건을 벗지 않는 너니까 아마 네가 혼자 있을 때 우연히 봤겠지. 그 아이가 수도에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처음 만난 또래 녀석에게 떠벌리는 걸 마침 옆을 지나던 히이토 족 녀석이 들은 것 같다.”

“......”

“미안하다. 내가 좀더 주의를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멘더는 쉴새없이 계속 떠들고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그는 우는 것처럼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아마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될 거다, 예르네이.”

“피하면 되잖아요. 그 녀석들이 오기 전에 모두 함께 다른 곳으로 달아나면 되잖습니까! 그렇게 하면 모두들 살 수 있습니다!”

“예르네이.”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예르네이의 팔을 붙잡고 멘더는 초췌한 얼굴로 웃었다.

“우리들은 대륙에서 버림받은 죄인들이다.”

멘더의 눈가 주름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우는 아이 같은, 일그러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쫓기고 쫓겨 겨우 이곳에 정착하게 된 거야. 더 이상 우리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어.”

“하지만 멘더......”

“우리가 뼈를 묻고 안전하게 잠들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다. 최소한 여긴 죄인이라고 해서 죽은 자의 무덤까지 파헤치진 않으니까.”

“......”

“아마 녀석들은 이번 주 안에 이곳으로 쳐들어올 거다. 놈들의 배는 보통 배의 네 배 가량의 속도를 내니까. 준비 기간은 이틀. 그동안 짐을 꾸리고 넌 아이들과 함께 도망가라.”

“멘더.”

“넌 이곳 세이너 섬의 캡틴이잖냐. 전쟁이 일어나면 아이들과 여자, 노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게 조직의 우두머리가 해야 할 중요 임무야.”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무언가 딱딱한 것이 목구멍에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을 벙긋대다가 결국 포기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예르네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멘더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럽고 냄새나는 유흥가의 뒷골목,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남자.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의 얼굴은, 여기저기 흉터가 난 험악한 얼굴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괜찮냐? 꼬마야?』

처음으로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는 굵고 거칠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으며 맞잡은 손은 무척이나 따스했었다.

멘더는 손을 뻗어 예르네이의 늘어진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투박하지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이다.

“그리고 예르네이. 우리 레이루, 그 불쌍한 아이를 부탁한다. 그 애, 사실 널 좋아하거든. 그래서 그 애가 나이가 차면 너에게 시집보내려 했는데.”

“뭡니까.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란 것도 없는 겁니까.”

“레이루 정도면 너 같은 무식한 놈한테 과분하지, 뭘 그래? 성격 좋지, 인물도 그만하면 빠지지 않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한 그에게 안겨 소리 내 울고 싶었다.

“예르네이, 부탁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기에 예르네이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피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아성초 즙을 아직 씻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금 코를 찌르는 아성초 특유의 냄새 덕분에 예르네이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스칸데르인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스칸데르. 이제는 그 이름만으로도 타인에게까지 저주가 되어버린 비운의 종족.

그것이 자신이다. 그것이 자신인 것이다.

“누가 저 애 좀 잡아줘요! 도둑이야! 도둑!”

동글동글한 배를 출렁이며 빵 가게 주인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하지만 어린 도둑은 이미 골목 어귀로 사라진 뒤였다. 두 손 가득 흑깨 빵과 과일을 소중한 듯이 움켜쥐고서.

어린 도둑은 인적이 드문 골목 구석에 다다르자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빵과 과일을 입 안에 우겨넣기 시작했다. 과일 즙이 지저분한 손과 낡고 더러운 망토 위로 흘러내렸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순식간에 훔쳐온 빵과 과일을 다 먹어치운 소년은 아쉬운 듯 더러운 손가락을 빨며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망토를 벗었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소년의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잘 손질해 빗겨놓는다면 분명 여자아이들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곱게 늘어질 순수한 검은색이었다.

소년은 멍청하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린애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을 응시하는 소년의 갈색 눈에선 깊이를 모를 절망감마저 느껴졌다.

“요즘 어디에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도둑고양이가 어슬렁거린다고 하더니 그게 너였냐?”

하지만 상념에 젖어 있던 소년은 금세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열일곱 살쯤 되었을까. 키만 커다랬지 아직 미성숙한 몸을 한 소년 세 명이 먹이를 찾은 들고양이처럼 어슬렁어슬렁 골목 어귀에서 나타났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뒤는 벽이다.

퇴로는 이미 저들에게 차단당해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볼 여유조차 없이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소년을 에워쌌다. 야비하게 웃는 그들의 얼굴이 몹시 기분 나빴지만, 그들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소년으로선 그저 눈을 내리까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너 말야, 대체 누구 허락을 받고 우리 구역에서 어슬렁거리는 거냐?”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의 허락을 받은 것도, 누구의 수하도 아니기에 그저 잠자코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기분을 나쁘게 한 모양이었다.

“이 새끼! 반항이라 이거냐?”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 소년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잡아 당겼다. 순간 목뼈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서 소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 녀석, 사실은 미친 코너한테서 도망친 그 꼬마일지도 몰라.”

“미친 코너? 그 삼류 건달 자식?”

“그래. 그 자식, 애들을 너무 부려먹어서 애들이 가끔 도망치거나 하잖아. 이번에도 또 한 놈이 도망쳤다고, 그놈 길길이 날뛰더라고.”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소년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래. 그러니까 이 녀석, 늘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다니는 거야. 그놈한테 걸리면 죽어도 곱게 못 죽을 테니까!”

“그럴 테지. 코너 그 자식, 사실은 식인종이라고. 특히 어린애들 고기를 좋아한다던데?”

빼빼 마른 녀석의 말에 다른 녀석들도 기분 나쁘게 키들댔다.

소년은 그들이 딴청을 피우고 있는 틈을 타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녀석들의 우악스런 손길에 붙잡히고 말았고, 그들은 소년을 바닥에 짐짝처럼 내팽개쳤다.

“어허! 어딜 가려고!”

자신을 쳐다보는 녀석들의 눈은 모두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짐승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들은 소년에게 달려들어 힘없이 바르작대는 가는 신체를 찍어 눌렀다.

“이대로 코너 자식한테 넘겨버리는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도 코너, 그 자식이 싫어서 말이지. 그냥 두 번 다시 우리 구역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지 못하도록 손만 좀 봐주도록 할게.”

“많이 아플 테니 이 악물고 있어라, 꼬맹아.”

흙냄새 나는 더러운 누군가의 손이 소년의 입을 틀어막고, 여러 개의 손이 소년의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소년의 크게 확대된 동공에 푸른빛을 띤 단도의 날이 선명하게 인식됐다. 다리 하나를 우악스럽게 잡아 올리고, 바짓단을 끌어올려 소년의 가는 발목 안쪽에 단도의 날을 들이대고는 여러 개의 얼굴들이 야비하게 웃었다.

두려웠다.

자신을 억누르는 힘이, 자신을 쳐다보며 기분 나쁘게 웃는 얼굴들이 두려워서 소리 내 울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움과 함께 배고픔과도 같은 헐벗은 어떤 검은 욕구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이유도 없이 자신에게 향해지는 부당한 폭력.

단지 자신들이 강하다는 이유로, 힘없는 약자를 조롱한다.

그것이 참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이런 취급을 당하는 자신.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

그런 자신을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추악한 무리들.

죽인다. 죽여버릴 테다.

고통마저도 잠식시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살기.

죽여버리고 싶었다.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듯 키들대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들을 당장이라도 쳐죽여 버리고 싶었다.

저 비열하게 웃는 입을 찢고, 저 팔다리를 잡아찢고, 저 머리를 수박처럼 뭉개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숨 막히도록 강렬한 파괴 욕구가 피를 얼어붙게 만든다고 생각한 순간, 소년은 입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녀석의 손가락을 잘라버릴 듯이 힘을 주어 깨물었다.

“끄아아악!”

녀석은 돼지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잡아떼려 했지만 소년은 입을 다문 조개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대체 뭐야?”

갑작스런 동료의 비명에 몸을 짓누르던 손이 소년의 몸 위에서 허우적댔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손을 물린 녀석을 밀쳐냈다.

그 순간 녀석의 허리춤에 찬 단도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소년은 너덜너덜해진 손가락을 붙잡고 바닥을 뒹구는 녀석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에게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단도를 허공에서 휘둘렀다.

“아아악! 눈이... 내 눈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소년의 몸 위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검에 눈을 베인 모양이었다. 소년은 한동안 자신의 하얀 몸 위에 떨어진 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

입 안에 가득한 혈향, 시야를 가득 메운 강렬한 붉은색.

소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분이 좋았다. 정말 참을 수 없이 즐거웠다.

바닥을 뒹구는 두 녀석의 새된 비명 소리가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릴 수가 없었다.

자신은 미친 것일까. 낯선 곳에서, 낯선 자들에게 능욕당하고, 결국 미쳐버린 것일까.

“이 자식! 죽여 버린다!”

잊고 있었던 남은 한 녀석이 굶주린 짐승처럼 눈을 벌겋게 빛내며 허리춤에 찬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녀석의 검을 막았지만 힘에서 차이가 났다.

무서운 기세로 녀석은 소년의 손에서 단도를 쳐내고 듣기 싫은 괴성을 내지르며 푸른 빛깔로 빛나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검날이 자신의 몸에 박힌다고 생각한 순간, 녀석은 억 하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더니 힘없이 고꾸라졌다.

마치 끈이 풀린 인형처럼 털썩 소리를 내며.

“괜찮냐? 꼬마야?”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흐려진 시야에 산 속의 야생 곰처럼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들어왔다.

털이 숭숭 난 투박한 손을 내밀며, 그 험악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온화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소년을 일으켜 세워 말없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바르르 떠는 피투성이의 소년을 가만히 껴안아 주었다.

이젠 괜찮아, 이젠 괜찮아,란 말을 반복하며 그는 소년을 안아들고 자신의 숙소로 데려와 상처를 치료해 주고, 씻겨주고, 새 옷도 사주었으며 머리도 염색해 주었다.

“꼬마야, 강해져라. 오늘같이 분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강해져.”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를 사들고 온 아성초 잎으로 염색해 주며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사내의 말대로 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했다.

아무 힘 없는 나약한 인간은 늘 강한 자에게 지배당하고 만다,라는 것이 사내의 지론이었다.

사내는 묵묵히 소년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대로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소년에게 세이너 섬의 캡틴 자리를 내주었다.

모두들 자신을 좋아해 주었다.

캡틴, 캡틴, 병아리처럼 짹짹대며 쫓아다니는 여자애들과 사내애들, 말없이 웃으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 사내들, 어머니 같은 아낙들.

그래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로운 나날에 취해 늘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 믿고, 잊었던 것이다.

자신은 저주받은 종족이라는 것을.

자신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순혈종,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진작 이곳을 떠났어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 떠났어야 했다.

자신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지 않은가.

자신의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을 잔악하게 베어버린 남자, 페르티잔의 그 야만인을 죽여버리기 위해, 자신은 살아남았지 않은가.

낡은 거울에 비친 자신은 어색한 붉은 머리와 매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닌, 누군가를 지켜줘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예르네이는 레이루에게서 받은 단도를 허리춤에 차고 가방 하나뿐인 짐을 어깨에 들쳐 멨다.

지금쯤 히이토 족은 바다를 건너 세이너 섬으로 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먼저 배를 타고 나가 히이토 족의 포로로 잡혀준다면 세이너 섬은 안전할 것이다. 히이토 족은 페르티잔과의 결전을 위해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테니, 녀석들이 페르티잔에 쳐들어가는 순간 자신은 그 남자, 페르티잔 우두머리의 목을 친다.

물론 생각하는 것만큼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예르네이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아직은 찬 공기가 온몸을 뱀처럼 휘감는다. 예르네이는 옷깃을 여미고 잠시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맘때 즈음이면 공기에 녹아드는 향긋한 풀냄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버티고 선 언덕 위의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녹녹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

이제는 안녕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왔던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아프도록 눈에 들어와 박혔다.

마치 떠나기 전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말하듯이 세이너 섬에서만 사는 새가 어두운 암청색 하늘을 향해 구슬픈 목소리로 울어댔다.

쓰게 웃으며 예르네이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도, 그런 우울한 감정을 느낄 여유도 없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복수뿐.

그것을 위해 자신은 그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살아남아 부모와 동족의 원수를 갚으라는 하늘의 뜻인 것이다.

두 번 다시 한 곳에 머무르며 사람들과 친해지는 과오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약해지면 끝장이다. 안이하게 사람들의 따스한 정과 온기에 풀어져 있다가는 가족들과 동족들처럼 모두 한순간에 잃고 말 것이다.

늘 혼자여야만 한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누구도 믿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아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자.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어엿한 성인이며, 어엿한 남자다.

바람이 불었다.

풀이 부대끼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너무 오랜 시간 방치해 완전히 빛바랜 오렌지색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아직까지는 바람이 차지만 그래도 공기는 벌써부터 노곤하게 녹아 있다. 예르네이는 어슴푸레하게 밝아져 오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있지. 캡틴의 원래 머리색은 검은색이 아닐까?”

갑작스런 넨의 말에 소년, 소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 검은색이라니. 캡틴의 머리색은 붉은색이잖아.”

“아냐아냐. 전에 캡틴이 혼자 언덕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몰래 다가가서 본 적이 있는데 새로 자라는 뿌리 부분이 검은색이더라고. 언제나 두건을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말야.”

“검은색? 검은색 머리는 흔치 않은데.”

“그렇지? 오빠한테 물어봤더니 밤의 색처럼 새까만 머리색을 한 종족은 단 하나뿐이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넨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넨은 아이들의 머리를 맞대게 하고는 괜히 분위기를 잡고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스칸데르. 그들만이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아이들의 진지한 얼굴이 이번에는 새파랗게 질렸다.

스칸데르의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이도 있을 정도였다.

넨은 아이들의 과장된 반응이 재밌는지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야. 캡틴의 목 뒷부분에 작은 초록색 별 같은 낙인이 있었는데, 오빠 말로는 오직 스칸데르에서만 아이가 태어나면 목 뒤에 화인을 찍는다는 거야.”

“에에!”

“그... 그... 그럼 캡틴이 스칸데르의 순혈종이란 말야?”

“말도 안 돼! 스칸데르는 15년 전에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졌잖아.”

“알 게 뭐야. 시체더미 속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아이가 있었는지. 인간이란 건 의외로 생명 줄이 질긴 생물이라고 오빠가 그랬는걸.”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안한 듯 눈을 디룩디룩 굴리며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라는 의심과 반쯤의 확신.

하지만 그들과 떨어져 앉아 얘기를 듣고 있던 레이루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림으로써 넨의 말을 완벽한 거짓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허풍쟁이 넨. 거짓말쟁이 넨. 그것이 저 아이의 수많은 별명 중 하나 아니었던가. 좋은 애이긴 하지만 저 애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삼시 세끼 밥 먹듯이 하는 애였다.

레이루를 비롯한 소년, 소녀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그 사실을 망각의 샘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캡틴은 아이들에게 있어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고, 강하고 책임감 있는 그를 늘 친형이나 친오빠처럼 믿고 따르던 그들이었다.

모두들 그를 좋아했다.

그는 세이너 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 마... 만약에 넨의 말대로 캡틴이 스칸데르인이라 해도 난 절대 캡틴을 배신하지 않을 거야. 너... 너희들도 맹세해.”

나이가 들어도 말을 더듬는 것은 여전한 주근깨 소년 딘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때 모두들 딘의 병약한 손을 움켜잡고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목소리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 무식한 페르티잔이 캡틴을 잡으러 온다고 해도, 누군가 그를 살해하려 해도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캡틴을 지키겠어.”

“흐윽... 흐으윽......”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레이루는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했다.

굴러 떨어진 눈물이 늘어진 머리카락과 손을 적시고 더러운 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모두와 함께 굳은 얼굴로 맹세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자신들에겐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캡틴을 지켜낼 만한 힘도, 아니 자신의 몸을 지켜낼 수조차 없다는 것을.

수도에서 넨을 붙잡은 주정뱅이 사내와 상대했을 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란 걸 절감했었다.

결코 이 조그마한 섬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아무리 이 섬 안에서 설쳐댄다 하더라도 넓은 대륙 안에선 이름도 없는 힘없는 아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복받친 서러운 눈물만이 끊임없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들이 마을에 침입한 것은 모두가 잠든 밤이었다.

갑자기 해안가 쪽이 대낮처럼 밝아졌고, 마을의 남자들이 저마다 손에 무기를 쥔 채 바쁘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어린아이와 여자, 노약자들을 대피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빠르고도 민첩했다.

거대한 몸을 한 그들은 모두가 허둥지둥 마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동안 짐승처럼 몸을 날려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

죄인의 섬.

대륙 이곳저곳을 방황하다 겨우 이곳에 정착한 거친 무리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도, 히이토라는 짐승 같은 악마의 무리들 앞에선 너무도 무력했다. 무기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그들의 거대한 철퇴에 맞아 쓰러졌고, 그들의 발에 짓밟혀 내장을 토해 내며 숨을 거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난 수년 동안 일구어놓았던 행복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한 아이의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 이 섬에 평화라는 이름의 선물을 안겨주었던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캡틴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던 친구들은 맥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아버지 또는 남편의 죽음에 오열하던 여자들은 그 짐승 같은 놈들에게 무자비하게 유린당했다.

거대한 들짐승에게 깔려 그녀들은 시체처럼 파랗게 뜬 얼굴로 목에서 피가 들끓을 정도로 비명을 내질렀다.

가느다란 두 팔을 허공에서 미친 듯이 허우적대며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란 말만 반복했다.

자신들의 아버지, 남자친구, 남편, 형제들의 참혹한 시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며 그녀들은 내장이 뒤틀어지는 고통 속에서 피를 토해 냈다.

들짐승들은 그렇게 자신의 욕구를 채운 뒤 인형처럼 늘어진 소녀들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그녀들은 비명 소리 한번 없이 절명했다.

지옥이었다.

그것은 실존하는 화염지옥이었다.

그리고 그들, 히이토는 악귀였다. 죽은 자의 시체를 짓밟고 그들의 피를 뒤집어쓴 그들은, 악마 그 자체였다.

아버지, 선대 캡틴이었던 멘더, 그는 정말 용감히 싸웠다.

겁에 질려 벌벌 떨며 훌쩍이는 어린 딸을 위해 검을 휘두르며, 무서운 얼굴로 소리쳤다.

“레이루! 예르네이, 그 녀석에게 가! 어서!”

정신없이 달렸다.

어째서일까. 아버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본능적으로 다리가 움직였다. 뛰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고, 무릎에서 피가 흘러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언덕 위 외진 곳에 위치한 그의 집에 가서, 그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친구들의 비명, 적의 칼에 쓰러지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억지로 귀를 틀어막은 채 달렸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엔 적막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바람에 팔랑이는 테이블 위의 종이쪽지에는 그의 것이 분명한 필체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 멘더, 미안합니다.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는 떠난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그는 이 세이너 섬에 없는 것이다.

레이루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열려진 창 틈으로 매캐한 연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마을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린 불꽃, 간간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인지, 침입자들의 포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째지는 듯한 소리.

넨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캡틴, 그는 스칸데르인이었다.

그것도 15년 전, 그 끔찍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단 하나의 순수한 혈족이라고 한다. 그를 찾기 위해 거인 족, 히이토는 세이너 섬으로 갑작스레 쳐들어왔다.

평화로웠던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푸릇푸릇 새 풀이 돋아나는 대지는 마을 사람들의 피로 더럽혀졌다.

“스칸데르인을 찾아라! 머리가 검고 목 뒤에 초록색 별이 있는 녀석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순혈종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봉두난발의 사나이는 화염에 휩싸인 마을 한가운데에서 짐승처럼 포효하며 피로 물든 거대한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예르네이, 그는 없다. 이미 이 마을을 떠나고 만 것이다.

자신만 살겠다고 모두를 버릴 그런 남자가 아니다, 예르네이는. 분명 자신 하나를 희생시켜 섬 사람들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강직하고, 의리 있는 우리들의 캡틴은.

그렇다 해도 저들은 대륙 끝까지라도 그의 뒤를 쫓을 것이다.

언젠가는 저 짐승 같은 녀석들에게 잡히겠지.

아무리 그가 용맹하고 강하다고 해도 히이토 족과는 우선 체격부터 비교가 안 된다.

당할 거다. 저들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늘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집어놓곤 했던 그가, 다정한 오빠 같고 때론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도 같았던 그가... 죽어 널브러진 마을의 아이들과 같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그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 순간 몸의 떨림이 멎었다.

온몸을 마비시켰던 두려움의 감정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레이루는 거칠게 눈물을 훔쳐내고는 주인 없는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검은색 머리를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다니기 위해선 늘 아성초 잎이 필요했을 것이다.

부엌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상자 안을 가득 채운 아성초 잎을 꺼내 레이루는 정신없이 그릇에 넣고 짓이기기 시작했다.

독한 아성초 즙의 냄새에 절로 눈물이 배어나왔다.

레이루는 맨손으로 아성초 즙을 자신의 머리에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넨이 장난으로 자신의 머리에 아성초 즙을 쏟았던 적이 있었다. 아성초 즙이 쏟아졌던 부분이 검게 변한 것을 보며 밤새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대로 내 인생은 끝이라며 울고 또 울었었지.

레이루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거칠게 쓸어냈다. 손끝이 아리고 두피가 시큰거렸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엌의 열린 창 틈으로 보이는 마을은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토록 용맹하게 싸우던 마을의 어른들도, 늘 자신을 친딸처럼 대해 주던 아줌마들도, 친구들도 모두 저 시뻘건 화염 속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늘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용감했던 마을의 캡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는지.

용서하세요, 아버지. 난 지금 단 하나뿐인 가족인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살아남으려 합니다.

난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친구들과 맹세했으니까요.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그 사람을 지켜내겠다고.

히이토 족들은 지금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수도의 거리에서 어떤 소녀가 떠벌리는 얘기를 믿고 무작정 이 조그만 섬으로 쳐들어온 것이건만, 자신들이 그토록 찾던 스칸데르인은 없었다.

이것이 히이토 족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였다. 무모한 데다 계획성 없이 일단 해치우고 보자는 그런 성격.

이번 임무를 맡은 총사령관 뮌은 시뻘겋게 물든 마을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칸데르인은 산 채로 포획하고 그 이외의 자들은 남김없이 죽인 뒤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리라는 것이 왕의 명령이었지만, 잔악한 히이토 족의 습성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나는 뮌이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의 절반이 평화를 사랑하는 멘스터 족의 것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요, 뮌 님? 스칸데르인은 없는 것 같은데요?”

“마을 뒤쪽의 숲까지 샅샅이 뒤져본 건가?”

“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없었습니다.”

“흐음......”

스칸데르인이 없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왕에게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이곳을 떠나는 편이......

“뮌 님! 스칸데르... 우리가 찾던 스칸데르인입니다!”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에 뮌은 짐승처럼 눈을 번뜩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밤의 어둠과도 같은 머리색.

스칸데르인이다.

마을 뒤편의 숲 쪽에서 마을 앞에 포진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고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걸어온다.

숲을 산책하는 맹수처럼 나긋나긋하고 여유에 찬 걸음걸이.

찢어져 펄럭이는 얇은 옷감 사이로 소녀의 나긋나긋한 신체가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적진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오는 소녀의 존재감에 히이토 족들은 압도당하고 말았다.

손을 뻗어 건드리면 소리 없이 바스라질 것 같은 가늘고 작은 몸에, 납빛을 띤 창백한 얼굴. 바람결에 살랑이는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마치 허공을 떠도는 유령 같은.

“저게 스칸데르인인가......”

누군가가 넋을 잃은 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녀였다. 아직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아름다웠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당돌하게 빛나는 커다란 두 눈, 더러워졌지만 하얀 피부,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여리여리한 신체.

달빛을 받은 정령 같은 신비로운 소녀의 아름다움에, 늘 욕망에 찌들어 있는 짐승 같은 히이토 족들조차 경외심을 띤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당장 저 애를 잡아!”

마른침을 집어삼키며 뮌은 홀린 듯한 얼굴로 굳어 있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녀석들은 소녀에게 뛰어가 그녀의 자그마한 몸을 포박했다. 소녀는 반항 한번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순순히 묶이고, 순순히 끌려왔다.

바로 눈앞에서 본 소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작았다.

혼혈인 탓에 다른 히이토 족들보다 작은 뮌이었지만 소녀는 그런 뮌의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에 뮌은 약하게 주먹을 떨었다.

대체 뭔가.

힘을 주어 때리면 부서질 것 같은 작은 소녀를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들, 그리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소녀의 저 강렬한 오라는.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눈.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 유리알 같은 두 눈. 마치 생명 없는 인형에게 영혼이 들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위화감.

그리고 매끈한 도자기같이 창백한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을 때, 붉은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가고 핏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얇은 눈매가 가늘어졌을 때, 뮌은 마른침을 삼키며 두 눈을 부릅떴다.

딱 한 번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자신이 히이토의 수련 기사로 있을 무렵, 산 채로 생살을 꿰뚫는 끔찍한 고문 속에서도 비명 하나 내지르지 않던 스칸데르의 포로를 본 적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차라리 혀를 깨물어 죽고 말았을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 땀과 피에 젖은 얼굴로 그는 웃고 있었다. 고문관의 어깨 너머로 자신을 심문하는 뮌을 향해, 이 정도 고통쯤은 우습지도 않아,라고 말하듯이......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그리고 뮌은 그때 느꼈던 알 수 없는 극도의 공포를 다시 한 번 경험하며, 약하게 떨리는 주먹을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쥐어야 했다.

아마 내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을 거야.

늘 곁에 있는 가족과도 같은 당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바다에서 웃고 떠들던 당신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어.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 탓이었을까. 그때 당신이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 보였던 것은......

당신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서늘해지고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서 난 한참 동안 눈을 비벼대면서도 넋을 잃은 채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지.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열네 살,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 어린애였던 그때부터 쭈욱 당신만을 사랑해 왔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죽는 그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할 거야.

당신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어. 죽는 건 괴롭겠지만, 정말 엄청나게 아플 테지만 그래도 난 참을 거야.

고통을 꾹 눌러 참고서 웃으면서 죽을 거야.

당신을 위해서니까.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서 죽는 거니까.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뿐이니까.

“아......”

출렁이는 배 위에서 예르네이는 번쩍 눈을 떴다.

잔잔한 파도와 따스한 햇살 때문에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레이루와 멘더,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나오는 꿈을.

예르네이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갈매기 한 쌍이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푸른색.

가져온 가죽 가방에서 빵을 꺼내 허리춤의 단도로 자르다가 문득 단도를 준 사랑스런 소녀의 얼굴이 떠올라 예르네이는 실풋, 웃음을 흘렸다.

늘 자신을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던 하얀 얼굴을 한 귀여운 아이.

무덤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어린 누이와 꼭 닮은, 동물처럼 커다란 눈을 한......

“레이루......”

잠꼬대처럼 나른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예르네이는 꽤 비싼 돈을 주고 샀을 단도의 표면을 부드럽게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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