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휘르곤의 눈물 2 (3/16)

휘르곤의 눈물 2

지독히도 나른하다.

수백 개의 손이 땅에서 솟아나와 모든 것을 땅속에 묻어버릴 심산으로 온갖 힘을 다해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다. 이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면 그대로 잠이 들 것만 같아. 난 깨 있고 싶은데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고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아아... 젠장. 이래서 난 봄이 싫다니까.

“뭐야? 카이라. 어제 잠을 못 잔 거야?”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꾸벅꾸벅 조는 금발의 여자 앞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으며, 사내는 늘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잠을 못 자긴 무슨. 그 애, 요즘에 열세 시간 이상을 잔다고. 요즘은 머리만 대면 저 모양이야.”

선술집 주인인 육중한 몸집의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잔을 닦으며 툴툴댔다. 사내는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긁적이며 과장되게 소리 내 웃었다.

“카이라다워서 귀엽잖아요.”

“귀여워? 자네가 저런 게을러빠진 고양이 같은 애를 고용했다고 생각해 봐. 매달 주는 돈이 아까워서 손이 부르르 떨릴걸? 하여튼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저걸 어디다 써먹겠어. 그냥 얼굴만 봐줄 만한 접대용 고양이야, 저 애는.”

“하하하!”

‘젠장. 시끄러워.’

카이라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부스스 얼굴을 들었다.

보기 드물게 미인형인 하얀 얼굴을 오만상으로 찌푸린 채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이 완전히 잠에서 깬 어린애다.

어깨 아래까지 늘어진 엷은 금발에 조개 껍데기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긴 속눈썹에 감싸인 에메랄드색의 두 눈동자.

늘 이렇게 늘어져 낮잠을 자거나 화가 날 정도로 느려터진 행동만 아니라면 곱게 자란 양갓집 규수로도 보일 법한데.

사내는 속으로 혀를 차며 가져온 가죽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여전히 낮잠을 방해한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카이라의 앞에 내밀었다.

“니가 사다 달라던 아성초 잎이랑, 선물인 클레이터 지방 특산품 건포도 쿠키다.”

그제야 카이라의 어울리지 않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눈초리가 아래로 쳐진 커다란 초록색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카이라는 사내의 손에서 작은 꾸러미를 낚아챘다.

“어이어이, 최소한 고맙다는 인사는 하라고.”

이미 아이 얼굴만 한 커다란 쿠키를 꺼내 우적우적 씹으며 카이라는 웅얼웅얼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고마워,라고 중얼댔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저 얼굴을 보려고 일부러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 선물할 거라고 거짓말까지 하며 사온 쿠키였다.

현재 사귀고 있는 세 명의 여인들에게 줄 것도 샀지만 그녀들은 분명 이런 걸 먹으면 살이 찐다고 말하며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클레이터 지방에서만 나는 무지갯빛 보석이라든지 화려한 장식의 목걸이, 뭐 그런 것이겠지.

고작 쿠키 하나로 저렇게 기뻐하는 여자는 내가 아는 한 이 녀석밖에 없다. 사내는 카이라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닦아내 주며 빙긋이 웃었다.

“맛있어?”

카이라는 말없이 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작 하나도 어쩜 저리 굼뜬 것일까. 이 여관의 접대용 암컷 고양이라곤 해도 이렇게 손님 응대도 제대로 못 해서야.

“오늘 밤 네 방에 가도 될까?”

일부러 능글능글한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말해도, 오뚝이 인형처럼 고개만 끄덕끄덕댄다.

“너, 지금 네 방에서 같이 뜨개질이나 하자고 말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냐?”

“알아.”

이제야 겨우 입을 열고 애교 있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카이라는 사내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젖은 두 눈과 오물거리는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하지만 완벽하게 음영을 이뤄 음험한 사내들로 하여금 저 여자, 지금 나를 유혹하는 건가, 따위의 망상을 하게 만드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 따위가 아니라 노골적인 유혹이다.

3년 전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 선술집 ‘고래의 뱃속’에 터를 잡은 카이라라는 저 달콤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한 여자는, 남자들을 요리할 줄 아는 닳고 닳은 창부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크레임 가의 창녀나 남창들이 자신의 맨몸을 드러내놓고 거리에 서서 손님을 유혹하는 반면, 카이라는 타고난 얼굴과 숨 막히도록 자극적인 페로몬을 풍기는 것만으로 남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온갖 비싼 선물을 사오게 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내키지 않을 때는 아무리 비싼 선물과 많은 돈을 내밀어도 결코 몸을 내주는 일이 없다.

그렇기에 남자들은 카이라에게 목을 매는 것이다.

특히 돈과 재력, 외모와 뛰어난 테크닉, 아름다운 여인들을 연인으로 둔 자신 같은 남자들, 카이라가 돈을 빼면 별볼일없는 골 빈 놈들이라고 칭하는 그런 사내들 말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어차피 자신들은 카이라와 연애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조금 특이한 성격의 아름다운 생물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을 뿐. 아무리 잘해 주어도 밥그릇 가득 퍼놓은 밥만 먹고 냉큼 뒤돌아서 가버리는 거만한 고양이 같은 여자를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을 뿐.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여행에서 금방 돌아와 피곤하기도 하고 말이야. 밤에는 잠을 자야겠지.”

사내가 음흉하게 미소지으며 눈을 깜빡이자 카이라는 느릿느릿 먹던 쿠키를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고는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느려터진 걸음걸이로 넘어질 듯 몸을 흔들며 손님들의 객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 치수가 큰 낡은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는 나긋나긋하고 화사한 신체를 홀린 듯 감상하던 사내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일어서 카이라의 뒤를 쫓았다.

3층 복도 끝, 가장자리에 위치한 카이라의 방은 손님방을 개조한 것이었다.

입이 험하고 걸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정이 많은 주인 여자는 3년 전, 병들어 죽어가는 동물처럼 자신의 가게로 기어 들어온 카이라를 자신의 가게에 눌러앉혀 버렸다.

『그대로 내쫓으면 어딘가에 노예로 팔려가거나 나쁜 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병들어 죽어버릴 게 분명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 커다란 눈을 보니까 도저히 내쫓을 수가 없더라고. 느려터진 데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긴 하지만, 하는 짓은 귀여우니까.』

주인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잔에 가득 채워놓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었다.

녀석은 분명 부모에게 이렇게 교육받았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적응하도록 해라. 그리고 누구도 너를 미워하지 않게, 최대한 불쌍하고 힘없고, 하지만 결코 만만히 보이지 않게 행동해라.

“낮에 하는 건 싫은데.”

어린애처럼 투정하는 입술에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한 뒤 사내는 카이라의 가는 목덜미를 혀로 핥았다.

“그래? 그럼 왜 날 네 방으로 불러들였지?”

사내가 카이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며 묻자, 카이라는 손을 뒤로 돌려 드레스의 여밈을 하나씩 풀며 나른한 어조로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억지로 당하는 건 싫어. 아프니까.”

“난 네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해. 난 신사라고, 카이라.”

“너희들은 모두 똑같은 짐승이야.”

“그래그래. 남자들은 다 짐승이지. 그렇게 따지면 그 짐승 같은 녀석들과 몸을 섞는 넌 뭐지? 철저한 박애주의자신가?”

카이라는 커다란 눈을 치뜨고 사내를 흘겨보았다. 가끔 보이는 저 생뚱한 표정이 환장할 정도로 예쁘다는 걸 저 녀석은 알고나 있을까.

사내는 소리 내 웃으며 카이라의 가는 허리를 움켜잡았다.

품 안에 순순히 안기는 가는 몸의 감촉은 정말이지 최상이다. 귀족 아가씨들처럼 향유 목욕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카이라의 새하얀 피부는 늘 촉촉하게 젖어 있다.

마치 일부러 독한 향기를 내뿜으며 벌을 유혹하는 꽃처럼.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방금 전 먹은 클레이터 쿠키 냄새와 은은한 꽃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또 어딘가에 사는 귀족 나부랭이에게서 선물로 받은 향유일 게다.

이렇듯 카이라에게선 매번 다른 향기가 풍기는데, 어떤 향유를 뿌려도 없어지지 않는 카이라 특유의 냄새가 하나 있다.

그것은 흙냄새다. 비 오는 날 정원에서 풍기는 것과 같은.

사랑스런 외모와는 달리 사내애처럼 흙장난을 좋아하는 그녀였다. 흙장난이라기보다는 햇살이 내리쬐는 여관 뒷문에 쭈그려 앉아 이것저것 만지는 게 그녀의 얼마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였지만.

사실 여느 귀족 아가씨 못지않은 인형 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머리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 그녀였다. 가끔씩 보여주는 어른스런 언행을 보건대 완전히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성격이 그런 듯했다. 유그는 보통 여자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카이라의 그런 엉뚱한 점을 좋아했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건 이 폭신하고 탄력 있는 육체지만.

“도련님! 유그 도련님!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카이라가 목덜미에 닿는 사내의 콧김에 바르작대며 고양이 같은 애처로운 소리를 낸 것과 동시에 누군가 사내를 소리 높여 불러댔다.

“널 부르는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고.”

“하지만......”

부끄러움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아주 특이한 암컷 고양이조차도 머릿속까지 쾅쾅 울려대는 저 앙칼진 목소리는 신경에 거슬리나 보다. 그건 사내, 유그 역시 마찬가지로 이미 미간에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유그 도련니임! 젠장, 도련님!”

밖에서 시끄럽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이젠 아주 시비조다.

게다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저 녀석, 욕설을 내뱉었다.

감히 이 하늘 같은 주인님한테!

“이젠 아주 자기 주인한테 바락바락 기어오르는구나, 기어올라!”

참다못해 사내는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거리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청년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자 옅은 갈색 모자를 뒤집어쓴 앳된 얼굴의 청년은 손을 확성기 모양으로 만들어 사내에게 소리쳤다.

“지금 여자랑 팔자 좋게 뒹굴고 있을 때가 아니라구요! 빨리 내려와 보세요! 네프 님이 낯선 남자들이랑 싸움이 붙었다구요!”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섭게 굳어졌다.

“뭐? 네프 님이라고? 그분은 또 언제 오신 거야!”

“도련님이 클레이터 지방으로 여행갔을 때지, 언제긴 언제겠어요!”

“젠장! 알았어, 금방 내려갈 테니까 기다려!”

사내는 헝클어진 옷차림 그대로 재빨리 방을 가로질러 나갔다.

“그럼 카이라, 다음에 계속하자고.”

유그는 나가기 전 카이라의 금발을 움켜쥔 채, 그녀의 작은 입술에 키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이라는 여전히 보는 이를 맥 빠지게 만드는 멍청한 얼굴로 힘없이 그런 유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어린애 같은 인사 말고, 밤잠을 못 이루게 할 정도의 뜨거운 키스가 더 좋을 텐데.

유그는 웃는 얼굴로 어린애 같은 카이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황급히 여관의 낡은 계단을 달음질쳐 내려갔다.

카이라는 무릎을 이용해 꼬물꼬물 움직여 창에 머리를 기대고 늘 같이 다니는 하인과 함께 어딘가로 서둘러 뛰어가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수수한 평상복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수염을 깎지 않아 지저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은은하게 풍겨나는 귀족다운 고귀한 분위기는 감출 수 없다.

화려한 옷, 기이한 여러 가지 장신구, 각종 향유, 달콤한 초콜릿. 그런 것들을 한아름 들고 와 싸구려 고백을 늘어놓으며 구애하는 많은 남자들.

하지만 저 사내, 유그는 특별하다. 귀족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있는 그런 한심한 남자들과는 달리 유그는 정말 뼛속까지 귀족인 사내다. 비록 허름한 평민의 옷을 입고 낭인 같은 모습으로 대륙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기이한 사내지만.

그래도 여행지에서 이런 걸 사다 주는 남자는 없다.

평민 누구라도 살 수 있는, 지방의 값싼 특산품 쿠키. 크고 볼품없는 모양의 쿠키지만 클레이터 지방에서만 나는 건포도가 잔뜩 들어간 고급스런 맛이다. 마치 유그, 그 남자 같은.

“어디였지......”

창틀에 턱을 기댄 채, 카이라는 늘어진 금발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골목 어귀로 사라지는 유그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러고는 계속 어디였지, 어디였더라라는 말을 반복하며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 유그와 그의 하인인 듯한 남자가 완전히 골목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을 때 카이라는 크게 눈을 뜨고서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오시예크. 페르티잔의 오시예크 가의 유그였어.”

분명 겉모습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답긴 하다.

장인의 솜씨로 만든 정교한 인형처럼 완벽한 외모. 저 도도한 표정과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를 연상시키는 나긋나긋한 몸, 어딘지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

인정은 한다. 어렸을 적에 자신도 저 악마 같은 완벽한 외모에 홀랑 넘어갔던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놈들아, 네놈들의 그 썩어빠진 눈은 장식이냐? 두 눈 똑바로 뜨고 자세히 보라고. 저 사람의 어디가 크레임 가의 닳고 닳은 남창처럼 보이는지! 저 사람이 걸치고 있는 저 옷만 해도 너희 같은 시종잡배들은 평생을 가도 만져보지 못할 고급품이란 걸 왜 모르냔 말이다!

“지금 뭐라고 했냐, 이쁜아?”

“귀는 달려 있지만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럼 내 친히 다시 한 번 말해 주지. 네놈들은 오물이 가득 쌓인 늪 속에서 뒹구는 돼지다.”

그러니까 당신도 문제라구요. 왜, 어째서 당신 같은 사람이 크레임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겁니까!

이곳만은 오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거늘!

“하하하! 모두들 들어본 적 있나? 귀족 나부랭이의 흉내를 내는 크레임 거리의 걸레 같은 남창 얘기 말야.”

대낮부터 술에 잔뜩 취한 거구의 사내는 새빨간 코를 문지르며 목젖까지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구경꾼들 역시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키들대고 있었다.

평민들의 거리, 특히 크레임 거리 주변의 빈민구역에선 금기시되는 일이 하나 있다. 자신이 귀족이라면 절대로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할 것.

귀족을 이상할 정도로 싫어하는 이곳에선 아무리 실력 좋은 수행원이라 해도 도움이 되질 못한다. 온갖 범죄자들과 각종 범죄들이 판을 치는 이곳은 페르티잔에서도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문제 구역이었다. 주로 이곳을 놀이터로 삼아 놀곤 하는 유그 자신도 평민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이런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귀족이다,라고 광고를 하듯이 저런 하늘하늘한 고급 옷을 걸치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오만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으니 이곳 시종잡배들이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겠는가.

귀족의 귀 자만 들어도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서 이를 드극드극 가는 놈들이.

게다가 거의 모든 귀족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이곳에 여자나 남자를 사러 오는 것에 반해, 그는 노골적으로 이 거리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으니......

“어이, 애송이. 살고 싶으면 이곳에선 그 꼴같잖은 귀족 흉내는 그만둬라.”

방금 전까지 배를 움켜잡고 웃어대던 사내는 종이를 뒤집듯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는 결 좋은 은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청년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죽거렸다.

그러곤 더러운 손으로 청년의 도자기같이 매끈한 얼굴을 매만졌다. 하지만 곧 가늘고 하얀 청년의 손이 자신에게 무례하게 손을 댄 사내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꼿꼿하게 등을 세운 채 팔목만을 움직인 청년의 얼굴에는 적의도, 혐오감도,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 새끼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어린애같이 가녀린 청년에게 뺨을 얻어맞은 사내는 성난 곰처럼 눈을 번뜩이며 투박한 손을 들어올렸다. 저 커다란 손에 맞으면 청년은 그대로 나가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보랏빛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저 인형처럼 꼿꼿하게 등을 펴고 선 채 묵묵히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사내뿐만 아니라 모여든 구경꾼들 또한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저 남자의 하얀 손이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길게 늘어진 상의 아래 늘 차고 다니는 얇은 단도에 가 있음을. 사내의 손이 좀더 가까이 다가오면 단도는 허공에서 현란한 춤을 추며, 피를 흩뿌릴 것이다.

또 모른다.

예리한 칼날에 사내의 손가락이 두어 개 정도 잘려나갈지.

그 모든 것이 예상만이 아닌 현실이 될 것임을 잘 알기에 유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동물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사내와 청년의 사이로 파고들어, 그대로 사내의 손을 막아낸 것이다.

하지만 요령 없이 몸으로 막아낸 덕분에 은발의 청년에게 휘둘러졌을 사내의 우악스런 손에 그만 얼굴을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유그 도련... 아니, 유그!”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갈색 모자의 청년을 흘끗 째려보자 청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금세 말을 바꿨다. 주인을 잘못 만난 덕에 이곳 크레임 가의 생리에 대해선 주인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청년이었다.

이 거리에서 저 정도로 행인들에게 시비를 걸고 다닐 정도면, 저 사내도 보통이 아니란 말이다. 사람 여럿 때려죽였을 무식한 주먹에 정통으로 맞았으니, 입 안이 찢어지고 이빨 하나가 덜렁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터져서 피가 나는 입술을 거칠게 훔쳐내자 옆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고 있던 갈색 모자의 청년이 꼬깃꼬깃 더러워진 손수건을 내밀었다. 소심한 데다 용기도 없고, 비굴하기까지 한 녀석이지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넌 또 뭐야!”

이번에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지, 사내는 들고 있던 술병을 깨부숴 유그의 앞에 들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도저도 안 되니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해보자는 속셈인 듯했다. 어차피 누군가 죽어 나자빠져도 시체를 치워줄 사람 하나 없는 무법 천지의 거리다.

“하하하하! 저희 도련님이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셔서 무례를 범한 모양이군요.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유그는 간신배처럼 웃으며 굽실굽실 머리를 조아렸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귀족 신분을 숨기고 그들과 동화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익힌 유그만의 처세술이었다.

뒤에서 모든 사건의 원흉이 된 은발의 청년이 얼마나 한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따위를 생각하며 유그는 갈색 모자를 쓴 청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자신의 하인이자 별로 믿음직스럽진 못하지만 눈치 하나만은 빠른 청년은 그제야 유그처럼 굽실대며 성난 곰같이 씩씩대는 사내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무사히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문이 닳도록 빌 각오도 되어 있었다.

적어도 유그에게는 말이다.

“뭐야. 너, 최근 카이라한테 푹 빠져 사는 미친놈 중 하나잖아?”

워낙 품행이 단정치 못한 데다, 하는 짓이나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다 특이한 여자인지라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카이라를 정신 나간 여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정신 나간 여자에게 구애를 펼치는 수많은 사내들을 전부 싸잡아 미친놈, 내지는 머리에 바람구멍이 난 귀족 애새끼들이라고 불렀다.

‘이 자식! 너, 밤길 조심해라. 쥐도 새도 모르게 머리가 으스러져서 사람 구실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면서도 유그는 비굴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사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사내는 손바닥을 펼쳐 그것이 지폐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이걸로 질 좋은 셰리주라도 한 병 사드세요.”

근처 여관에서 파는 가장 질 좋은 셰리주를 네 병 정도 마실 수 있는 큰 돈이다.

사내는 못 이기는 척,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지폐를 슬쩍 주머니에 구겨넣었다.

“그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용서고 뭐고, 그 녀석 교육 좀 잘 시켜. 도련님이라면 양지 바른 성에 가서 놀란 말이다. 이곳에서 놀고 싶으면 최소한 저 거들먹거리는 표정은 지우고 오라고 해!”

“아이고! 네네, 물론입지요.”

유그와 그의 수행원은 사내가 골목 어귀로 사라질 때까지 굽실대며 비굴하게 웃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짓을 했는지 허리가 뻐근하게 아파서 제대로 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곁눈질로 구경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유그는 삐걱대는 허리를 펴, 무섭게 굳은 얼굴로 은발의 청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우아한 동작으로 한 손을 허리에 갖다대며, 그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보랏빛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평민처럼 차려입고 빈민굴을 드나들더니 머릿속에까지 비굴한 노예 근성이 뱄군, 유그.”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나는지 멧돼지처럼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오고, 목에선 핏줄 두어 개가 불거져 나왔다.

“이게, 이게 다 누구 때문입니까! 대체 언제 이곳에 오신 겁니까! 그리고 오셨으면 가만히 성에 계실 것이지, 왜 크레임 거리에 나오신 겁니까! 그것도 그런 공주님 같은 복장을 하고 말입니닷! 대체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당신은!”

남은 호흡 곤란 지경까지 갈 정도로 핏대를 세워 소리쳤건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활처럼 휜 모양 좋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귀찮다는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네가 낭인처럼 클레이터 지방으로 놀러간 사이다. 그리고 이곳에 온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유그.”

“어디 한번 그 이유란 것 좀 들어봅시다?”

비꼬듯이 팔짱을 끼고 한쪽 다리를 탈탈거리는 유그를 보지도 않은 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하늘마저도 탁하군.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서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제 질문에 대답부터 해주시죠!”

“유그, 넌 어릴 때부터 너무 성격이 급해서 탈이었어. 정말이지 넌 도무지 발전이 없구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를 넘어서, 경악으로까지 발전한 감각에 풍 걸린 노인네마냥 손가락 끝에서부터 떨림이 시작되어 나중에는 눈 밑 근육까지 파르르 경련한다.

“어릴 때부터 수행원 몰래 이곳저곳 싸돌아 다니며 걱정을 끼치더니, 머리가 굵어지면서 방랑벽이 더 심해졌어. 죽어도 편히 죽지 못할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지금의 넌. 오시예크 경이 최근 들어 많이 힘들어 보인다 싶더니, 이런 망나니 같은 아들 때문이었군.”

말이 필요 없다.

이 상태에서 어설프게 말을 꺼내봤자 그것을 트집 잡아 족히 30분 가량은 선 자리에서 설교를 늘어놓을 사람이다, 이 사람은.

기껏해야 1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지만, 하는 말은 완전히 노인네 수준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저 은발을 늘어뜨린 남자는 유그보다 무려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다.

네프라고만 불리는 이 사내는 유그가 어렸을 때부터 오시예크 가문에 가끔 찾아오곤 했었다. 그는 자신에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늘 구박하지만, 그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저 무뚝뚝한 얼굴은 여전하다.

어린 시절, 처음 그를 봤을 때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외모에 끌려 다가갔다가 얼음같이 굳은 표정에 질려 울며 주저앉았던 적이 있다. 그 당시에도 이미 이 남자는 어린아이를 울며 주저앉게 만들 만큼 독한 살기와 냉기를 뿜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었다.

나이가 들어 어린 시절 근방의 꽃들조차 시들게 할 것 같던 노골적인 살기는 화사한 몸 속에 얌전히 가두어둔 것 같지만, 그의 존재감은 한층 더 강해져 이제는 가만히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다.

그에 관한 것은 모든 것이 다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아무리 끈질기게 이곳저곳 캐묻고 다녀도 그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고, 간혹 억지로 사교 파티에 가면 귀부인들에게 접근해 그에 대해 물어봤지만 그녀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모두 대답을 회피하거나 뚱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여기는 공기가 좋지 않아. 거리도 지저분하고 보기 싫은 것들도 보게 되고.”

보기 싫은 것이란 허연 가슴을 드러내 놓고 호객 행위를 하는 창녀들을 말하는 것일 게다. 워낙 표정이 없는 탓에 혐오감이랄까, 뭐 그런 감정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거리가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다.

“그렇게 싫다면 오지 않았으면 됐잖아요.”

“하지만 소문을 들어서......”

“소문이요?”

“크레임 거리의 지하 블랙 마켓에서 성노들을 팔고 사는 거래가 있다고.”

유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대낮인데도 어둡고 음습한 낡은 건물을 가리켰다.

“저 건물 지하에서 정기적으로 열렸지요. 여자, 남자, 아이 할 것 없이 용모가 아름다운 녀석들이 팔렸었어요.”

“넌 가봤나?”

“물론... 아아. 그냥 멀리서 구경만 했어요.”

구경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럭저럭 값이 싼 멘스터 족의 여자애를 사기도 했었지만, 바로 옆에 아버지가 붙여준 말 많은 스파이가 있었기에...... 유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그 소문은 사실인가.”

“네?”

“가끔 스칸데르의 혼혈이 대단한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는.”

어째서 이 사람은 그런 엄청난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말을 꺼낸 당사자는 멀쩡한데, 겁 많은 수행원이 오히려 옆에서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며 소란을 피운다.

하지만 보통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스칸데르의 이야기가 나오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이런 행동이 정상이다.

특히 페르티잔의 궁성이 있는 이곳, 수도에서라면 더 더욱. 어디에나 포진해 있는 수도의 군인에게 붙잡혀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그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습니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묻자 네프는 수려한 얼굴을 약하게 일그러뜨리며 방금 전 유그가 가리켰던 건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성의 하녀들은 늘 말이 많지.”

“하녀에게 들었든 이곳 사람들에게 들었든 이제부턴 블랙 마켓에 대해선 입도 뻥끗하지 마세요.”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유그.”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하도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한마디 해주려다가 유그는 맥없이 푸욱 고개를 떨구고는 자라다 만 수염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벅벅 긁었다.

“당신에게 충고 따위 해봤자 뭐 하겠어요. 괜히 내 입만 아프지. 그래요. 당신 말대로 지하 블랙 마켓에선 가뭄에 콩 나듯 스칸데르의 혼혈도 거래되곤 했었어요. 하지만 요즘엔 아예 블랙 마켓 자체가 열리질 않죠.”

“어째서?”

“정말 몰라서 물어요? 라자르 왕도 귀가 있으니까 그 소문을 들었겠죠.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블랙 마켓을 개최했던 뚱뚱보 아저씨가 산 채로 사지가 찢겨 사형당하고, 스칸데르 혼혈을 샀던 귀족들도 모두 엄벌에 처해졌어요.”

“그럼 그들이 샀던 스칸데르의 혼혈들은 어떻게 되었지?”

“죽었죠. 정말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끔찍한 방법으로요.”

가만히 유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네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훈련받은 군인처럼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등을 돌려 걸었다.

이제는 완전히 폐쇄된 블랙 마켓이 열리던 낡은 건물을 향해.

“으왓! 뭐 하는 겁니까! 거기는 폐쇄 구역이라구요!”

방금 전까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그의 수행원은 네프의 갑작스런 행동에, 이제 아예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

하지만 유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성큼성큼 네프의 뒤를 따라나섰다.

‘저 사람 고집은 아무도 못 꺾지. 고집 세기로는 고래 힘줄보다도 더 질긴 사람인데 누가 저 사람의 고집을 꺾겠어.’

생긴 것과는 달리 갓 스무 살이 된 혈기왕성한 청년, 유그는 몇 겹으로 바리케이트를 쳐놓은 나무판을 발로 작살내며 네프의 앞길을 터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값을 흥정하는 경매자와 입찰자의 시끄러운 소리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했던 지하의 넓은 홀은 이젠 부서진 나무 의자와 찢겨진 종이 조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예를 전시해 놓고 팔곤 했던 가운데의 무대는 페르티잔 군에 의해 완전히 박살이 난 모양이었다.

네프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나무 조각들을 밟으며 그곳이 무대였음을 알려주는 부서지다 만 나무 기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주먹을 움켜쥐고는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나무 기둥을 부러뜨려 버렸다.

늘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던 네프였기에 유그와 뒤따라 들어온 유그의 수행원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스칸데르. 스칸데르.

네프는 속으로 몇백 번이나 되뇌고 되뇌었던 저주받은 종족의 이름을 떠올렸다.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과 매끄러운 유백색의 피부, 들판을 날뛰는 들짐승 같은 야성적인 아름다움. 결코 상대방에게 먼저 무릎 꿇는 법이 없으며 자신의 나라를 위해선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았던 용맹하고 강한 전사들. 이젠 페르티잔의 라자르라는 광기에 찬 악마에 의해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만......

“크윽......”

네프는 얇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맨손으로 나무 기둥을 부러뜨린 덕분에 연약한 피부는 사정없이 갈라터져서 예리한 고통을 호소했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렸을 적 잠깐 가본 스칸데르라는 나라는.

건강한 밀빛 피부의 사람들은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듯 모두가 빛나고 있었고, 그들의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에선 찝찔한 바다 냄새, 마른 흙의 냄새가 났다.

그들은 강하고 용맹한 전사들인 동시에 밝고 꾸밈없는 미소가 어울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축복받은 존재들이었다.

아름답고 용맹하고, 한편으론 한없이 온화한 성품을 지녔던 그들은 대륙인들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라자르,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버린 그 독재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을 불태우고 신의 축복을 받은 듯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피로 대지를 붉게 적셨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스칸데르의 피가 흐르는 자들은 모두 죽여 없애려 하고 있다.

대체 당신은 어째서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겁니까!

당신이 걷고 있는 이 대지가 전부 피로 물드는 그날까지 이런 짓을 되풀이할 셈인가요!

결국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망령이 당신의 몸을 옭아매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으로 인도해 줄 그 순간까지?

그런 겁니까! 당신은 몸속에 흐르는 그 더러운 피가 그렇게도 저주스러운 겁니까? 당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를 짓밟을 정도로 말입니다!

“으아아! 유... 유... 유그 니임!”

날카로운 비명이 지하의 넓은 공간에 쩌렁쩌렁 울렸다.

겁 많고 말 많고, 탈도 많은 유그의 수행원이었다.

그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정말 봐주고 있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목엔 날카로워 보이는 단도의 날이 겨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하의 인위적인 어둠 속에서, 단도의 끝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행원의 팔을 뒤로 비틀어 단단히 잡고 있는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유그가 괴한을 본 소감은 단지 크다,라는 것뿐이었다.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수행원의 앙상한 몸과는 대조적으로 괴한의 몸은 탄탄했다. 더러워진 망토와 옷 사이로도 확연히 드러나는 근육은 분명 오랜 세월 몸을 단련한 자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느낀 것은 굶주린 들짐승 같은 눈이구나,였다. 두 눈은 머리에 쓴 두건에 가려져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고양이의 눈처럼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들짐승 같은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머리색이다,였다. 창녀들이 사 입곤 하는 질 나쁜 염료로 염색한 새빨간 비단 같은 색.

바닷바람과 햇볕에 자연적으로 탈색된 어부들의 머리카락처럼 어딘가 천박해 보이고, 뭐랄까 정말 당장이라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자연스런 색이다. 저게 천연이 아니라 물들인 것이라면 어지간히 취미가 나쁜 사내임이 분명하다.

원래 전사라는 족속들은 하나같이 패션 감각이 빵점이니 저런 촌스런 머리색을 한 것도 이해가 가지만.

“유... 유그 님, 도... 도와주세요!”

이런 도시에는 저런 들짐승 같은 전사 타입의 남자는 드물다.

잘 훈련된 군인,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서 아녀자들의 드레스 속 다리 같은 가냘픈 검을 휘두르는 기사, 아니면 완전히 풀어져 있는 미친 들개 같은 건달들.

가끔씩 외부에서 유입된 여행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절제된 야성미와 거친 매력. 그 둘을 적절하게 혼합시킨 남자다.

“넌 뭐냐? 이런 데 숨어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블랙 마켓에 노예를 사러 온 여행객인가?”

건성으로 중얼거리며 괴한에게 다가가자 그는 흠칫 놀라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몸에 걸친 낡은 옷이나 머리에 쓴 취미 나쁜 두건, 저 소름 끼치는 눈. 페르티잔인은 아니고 혹시 히이토 족의 혼혈인가, 아니면 도적질을 일삼는다는 사막의 전사?

“뭘 원하는지 몰라도 우리들은 그냥 지나가던 사람들이라고. 그 녀석은 놔주지 그래? 그 녀석은 무기도 없는 데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소심한 일반인이거든.”

사막의 전사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혀를 자른다고 하던데 설마 저 남자도 그랬을지 모른다.

“너, 이곳 사람인가?”

‘다행히 벙어리는 아니었구만.’

유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긴, 블랙 마켓이 열리던 곳이라고 들었다.”

“블랙 마켓을 보기 위해 온 거라면 한발 늦었어. 보시다시피 이곳은 완전히 폐쇄돼 버렸다고.”

“그럼 이곳에서 팔렸다던 스칸데르의 혼혈들은 어디에 있지?”

......또 스칸데르냐.

유그는 귀찮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날이 따뜻해지니까 다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가.

페르티잔의 궁성이 바로 코앞에 있는 수도에서 스칸데르를 자기 친구 이름 부르듯이 불러대다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다시 한 번 블랙 마켓의 말로에 대해 얘기하려던 유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쩌억 벌린 채 굳어버렸다. 아까까지 저쪽에서 갖은 폼을 다 잡으며 쓸데없이 나무 기둥에 화풀이를 해대던 사람이 언제 저 남자의 뒤에 가 선 건지. 한 눈에 봐도 오랜 시간 동안 훈련받았을 전사 타입의 사내가 낌새도 알아채지 못하게 말이다.

그제야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붉은 머리의 괴한은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네프의 몸놀림이 훨씬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새에 네프는 가느다란 손목으로 괴한의 억센 손목을 비틀었고, 사내의 손에서 단도가 떨어지자 이번엔 고양이처럼 나긋나긋한 팔꿈치로 자신보다 큰 사내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내는 맥없이 무너졌고, 괴로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유그는 순수하게 경탄했다.

날렵하고도 정확한, 맹수와도 같은 움직임. 정확히 상대의 급소를 노린 대담함. 사슴 같이 가는 몸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대단해요! 네프 님!”

“별로 대단할 건 없어. 이 남자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또 상처 입고 있었으니까.”

네프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옆구리 부분의 옷이 찢긴 상태다.

드러난 맨살은 끔찍하게 찢겨져 있는 데다 오랜 시간 동안 치료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상처에 먼지가 들어가 화농된 상태였다.

유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괴로운 듯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쌔액쌔액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두 눈만은 여전히 날카롭다.

이렇게 지독한 살기는 처음이다.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이런 두려움 역시.

마치 처음 봤을 때의 네프, 그 남자 같다.

절제되지 않은 노골적인 살기.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독과도 같은 공기가 폐 속까지 썩게 만들, 그런......

“넌 뭐지?”

하지만 네프는 아름다운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채 사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살기로 번들거리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살기등등한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넌 뭐냐고 물었다.”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두건 밑의 매서운 눈을 빛내며 네프를 노려볼 뿐이었다.

상처 입은 야수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그리고 네프 역시 더 이상 사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감정 없는 보랏빛 눈으로 마치 진귀한 물건을 감상이라도 하듯 사내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지독히도 비현실적이고 묘한 광경이었다.

빛이라고는 천장의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전부인, 곰팡이 냄새가 나는 어둡고 습한 지하의 넓은 홀에 그들은 마치 연극무대의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 주위가 빛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눈의 착각일지는 몰라도, 유그와 그의 수행원은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칙칙한 붉은색과 화려한 은색.

동물의 눈처럼 빛나는 암갈색의 눈과 유리알처럼 부자연스런 광택을 띠고 빛나는 자수정빛의 눈.

태양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갈색의 피부와 시체처럼 납빛을 띤 창백한 피부.

두 남자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묘할 정도로 닮아 있다.

언제 어디서 달려들어 인간의 목을 물어뜯을지 모르는 흉폭하고 잔인한 야수 같은, 날이 잘 선 은장도 같은 저 눈. 그들 주위를 감싼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이질적인 공기까지도.

그리고 아름답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위험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사막의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흩어져버릴, 환상처럼 위태로운 그런 류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이다.

결국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있던 사내가 맥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덩치가 있어서 그런지 바닥의 먼지가 일제히 피어올라, 유그와 그의 수행원은 기침을 해대며 눈앞을 뿌옇게 만든 먼지를 향해 손사레를 쳤다.

“유그!”

“네.”

기침을 하느라 눈물이 비어져 나온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유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네프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를 데려가 상처를 치료해 줘라.”

“이런 어디서 굴러온 건지도 모르는 이방인을 성으로 데려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나름대로는 꽤 심각하게 질문한 것인데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싸늘한 눈으로 유그를 흘겨보았다.

어렸을 때 자주 성으로 찾아와 자신과 놀아주곤 했던 사람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도 저 눈에서 따뜻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저 사람이 저런 살벌한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면 계집애처럼 징징 울면서 유모에게 달려가곤 했었다. 네프는 날 싫어하나 봐,라고 울먹이면서. 그럴 때면 유모는 늘 이렇게 말하며 어린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었었다.

『아니에요, 도련님. 네프 님은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신 분이라 그런 거예요. 아마 네프 님도 조금씩 나아지실 겁니다.』

자상했던 유모가 하는 말은 언제나 옳았다. 하지만 네프에 관해서만은 유모가 틀렸다.

조금씩 나아지기는커녕 저 가면 같은 얼굴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두께를 더해 가는 것 같았다.

싫다, 좋다의 단순한 감정조차도 없는 견고한 가면.

과연 저 가면이 깨어지는 순간이 오기는 할까.

유그는 수행원의 도움을 받아 쓰러진 사내를 부축했다.

그리고 네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유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소름 끼칠 정도의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몸을 의지하고 늘어진 이 갈색 피부의 이방인에게 향한 것임을, 유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난 예르네이가 정말로 좋아요.』

가느다란 미성과 함께 보드라운 손바닥이 얼굴에 닿는다. 작고 통통한 아이의 손에선 비릿한 우유 냄새가 났다.

지그시 감은 눈을 뜨자 하얀 얼굴의 사랑스런 여자아이가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빠져들 것만 같은 커다란 눈 가득, 봄 햇살에 취해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는 자신을 담고서.

『그런 말은 다른 남자애한테나 해라, 레이루.』

『하지만 예르네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걸요.』

촉촉이 젖은 커다란 눈이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아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웃음을 흘리며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는 고양이처럼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 내 웃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였다. 레이루는, 자신의 은인이었던 남자 멘더의 어린 딸은. 야생 곰 같은 멘더와는 달리 내성적이고 마음이 여린 그런 아이였다.

강아지처럼 자신을 따르고 믿고 의지하고, 때론 옛 기억에 괴로워하는 자신을 작은 손으로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곤 했던 착한 아이.

죽은 누이동생을 닮은 커다란 눈 때문에 더 더욱 소중하게 생각해 왔었다. 지켜주지 못한 누이동생을 대신해 새롭게 얻은 가족을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켜주지 못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던 그 귀엽고 착한 아이를, 이번에도 어이없이 잃고 말았다.

『캡틴.』

어느새 세이너 섬의 플라타너스 언덕 위에 앉아 작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어린 소녀는 성숙한 몸을 한 가녀린 처녀로 변해 있었다.

늘 어딘가 슬퍼 보이던 커다란 눈을 가늘게 떨며, 레이루는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땀에 젖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같다고 생각했었지. 레이루의 부드러운 손길과 저 온화한 미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레이루의 얼굴로 손을 뻗으려다가 흠칫 놀라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고 말았다.

뜨겁다.

레이루의 피부는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병자처럼, 아니 마치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낸 달궈진 쇳조각처럼 뜨거웠다.

『캡틴, 난 당신이 날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귓가에 꽂히는 레이루의 목소리는 울먹이는 아이처럼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그 아이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레이루!』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카락에 붙은 불을 끄려 했지만 불꽃은 오히려 더 빠르게 레이루의 머리카락을, 매끄러운 얼굴을 태워갔다.

서서히 홍염 속에서 녹아가는 아이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미소짓고 있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원망하듯이 노려보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우리들을 버렸어.』

『아냐. 난 너희들을 위해서......』

『모두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없었다면 우리들은 이렇게 산 채로 타죽진 않았을 거야.』

살이 타는 냄새가 콧속을 파고든다.

어느새 자신은 울고 있었다. 울면서 계속 레이루의 몸을 좀먹어 들어가는 불꽃을 사라지게 하려고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미 레이루는 완전히 불꽃에 휩싸여 형체도 남기지 않고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시뻘건 불꽃 속에서 오직 두 눈만이, 자신을 원망하며 부릅뜬 두 눈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한순간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아이의 상냥한 눈이 되어 형체뿐인 입술을 달싹여 애원하기 시작한다.

『뜨겁고 아파요, 캡틴. 제발 도와줘요. 죽는 건 싫어.』

불꽃 속에서 레이루가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 손을 잡자 뼈만 남았던 앙상한 손은 금세 바스라지고 만다.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품속에 안긴 몸 역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새까만 재가 되어 푸스스 흩어지고 만다.

『레이루! 안 돼!』

누군가 허공으로 뻗어진 손을 움켜잡는다.

보드라운, 마치 기억 속의 그 아이처럼 따스한.

눈을 뜨자 커다란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을 잡아준 것은 이 여자인가.

“뭔가 나쁜 꿈을 꿨어요?”

늘어진 금발이 살랑이며 코끝을 간질인다. 유순해 보이는 얼굴만큼이나 맑고 나른한 느낌의 목소리다.

눈을 깜빡이자 눈초리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셨지만 다행히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당신, 계속 누군가를 불러댔어요. 이루... 아니, 레이루였던가......”

적은 아니다.

어린애같이 직선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예쁘장한 얼굴의 여자 ─ 아니, 소녀라고 해야 옳을 듯한 ─ 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적의의 감정도 호의의 감정도, 그저 허공에 뻗어진 자신의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소년 같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이다.

그녀의 보드랍고 따스한 손의 감촉이 좋았지만 예르네이는 그녀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냈다.

“넌 누구지? 그리고 여긴......?”

“아... 난 카이라고 여긴 내 방이에요. 유그가 쓰러진 당신을 업고 왔었어요.”

쓰러졌다,라. 그래. 분명 그 지하의 엉망이 된 커다란 홀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제법 큰 덩치에 산도적같이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앳된 얼굴이 아직 남아 있던 청년과, 보랏빛 눈의 아찔할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한 사내.

그 사내의 아름다움은 특별했다.

같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자연스런 아름다움과 가는 몸에서 발산되던 그 엄청난 살기.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 사내를 본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그들 일행을 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꼴사납게 적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고 말다니.

“어딜 가는 거예요? 저기요!”

카이라라는 이름의 여자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르네이는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었다.

그대로 놔두면 파상풍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은 고맙지만 적, 그것도 페르티잔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도 그럴 여유도 없다.

하지만 욱씬거리는 상처 부분을 감싸안고 걸음을 옮긴 순간 문 앞에 누군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버티고 섰다.

지하의 홀에서 보았던 일행들 중 하나였다.

“뭐야,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려는 거야? 거 참 매정하네, 이 아저씨.”

“비켜라.”

“싫은데?”

“죽고 싶은가?”

예르네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를 노려보자 어정쩡한 폼으로 문에 기대서 있던 사내는 크게 동요하며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입고 있는 옷은 남루하지만 제대로 교육받은 귀족의 자제일 것이다, 저 사내는. 상대를 경계하면서 자세를 바로잡는 움직임이나 손짓 하나하나에서 숨길 수 없는 기품이 묻어난다.

하지만 지금의 정신 상태로는 자신의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어린아이라도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살생은 하지 말라던 멘더의 충고를 늘 머릿속에 새겨두며 살아왔지만 이젠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어차피 나 같은 건 상대도 안 되겠지만 일단은 네프 님의 명령이라서 말이야.”

예르네이는 말없이 허리에 찬 단도를 뽑아들었다.

사내와 카이라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손놀림이었다. 일단 검집에서 빠져나온 단도는 푸른빛을 번뜩이며 허공을 갈랐다.

공기를 두 쪽으로 가르듯 정확하고 예리한 공격을 사내는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했지만, 두 번째로 날아든 공격은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유그!”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쓰러지고 카이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오른쪽 어깨를 베었는지 붉은 선혈이 흘러 마룻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제엔장! 당신, 생명의 은인한테 이딴 식으로 해도 되는 거야!”

고통 탓에 일그러진 얼굴로 유그는 기세 좋게 소릴 질렀지만 금세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몸을 꿈틀댔다. 자신을 노려보며 단도를 높이 치켜든 사내, 예르네이의 두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성에서 가끔 검술 대련을 해주곤 했던 기사들의 눈에는 장난기 넘치는 온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저 남자의 눈에선 살기밖에 읽을 수 없다.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에 불이 옮겨 붙을 듯 뜨겁고 강렬한 두 눈.

오직 눈앞의 적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만이 서린.

“으앗!”

들짐승과도 같은 재빠른 몸짓으로 낮게 허리를 틀어 예르네이는 단도 끝을 사내의 심장에 정확히 조준했다. 저 날카로운 무기 앞에선 소용없는 일이란 것을 알지만 유그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자신의 몸을 방어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별다른 감흥 없이 담담해질 수는 있었지만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유그의 눈앞에 작은 단도가 떨어졌다. 마룻바닥 위를 뒹구는 단도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사내의 손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짓이지?”

네프였다.

사내를 자신에게 맡기고 어딘가에 다녀오겠다며 평소와는 달리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졌던.

“너희 나라에선 은인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던가?”

아마도 그가 던진 칼에 맞아 사내는 단도를 떨어뜨린 모양이다. 타이밍 좋게 나타나 몸에 구멍이 뚫리는 불상사를 막아준 것까지는 좋은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설교를 하려는 건가, 저 사람은.

나면서부터 천적이었던 짐승처럼 두 사람의 매서운 눈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살기와, 두꺼운 얼음 밑 강물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은 보랏빛 살기.

“우선 앉아. 너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내게 명령하지 마라.”

“왜 너희 같은 전사들은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칼을 휘두르는 거지? 난 그저 너와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난 할 얘기가 없어.”

“넌 없어도 난 있어.”

한마디 툭 내던지면 싸늘하게 쏘아붙이고, 또 한마디 내던지면 매몰차게 맞받아 치고. 끝날 것 같지 않은 고집 센 코흘리개들 같은 눈싸움을 끝내기 위해 네프는 보라색 눈을 깜빡이며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을 띠었다.

하지만 역시 얼굴 표정은 그대로고 입술만 움직이는 정도의 미소라, 상대방을 도발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블랙 마켓에서 팔리던 스칸데르 혼혈에 대한 이야기다.”

과연 비장의 카드를 불쑥 내민 네프의 작전은 성공이었다. 두건 밑의 날카로운 두 눈에서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던 살기가 사라지고 성난 들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던 얼굴이 풀어졌다.

“이제야 얘기할 마음이 들었나 보군.”

그리고 생각뿐인지는 모르겠지만 네프의 목소리 역시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유그, 저 아가씨를 데리고 문을 닫고 나가라.”

테이블 의자에 우아하게 걸터앉으며 네프는 아직까지 바닥에 주저앉은 유그를 흘겨보았다. 그냥 쳐다보는 것뿐이겠지만 저 차가운 보랏빛 눈에 응시당하면 누구든 자신에게 적의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될 것이다.

“네네. 알았어요, 알았어. 어이, 카이라. 이리 와라.”

구석에 서서 그 환장할 정도로 나른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카이라는 움찔대면서 유그에게로 달려갔다. 저 느긋한 성격의 녀석도 두 사람의 얼어붙은 분위기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품에 안긴다.

카이라의 가는 어깨를 안고 방을 나온 뒤에도 유그는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카이라가 커다란 눈을 꿈뻑이며 궁금해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치 챌 것이다. 지금 저 방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가 나누는 얘기는 당장 감옥에 처넣어져 끔찍한 고문을 받게 될 엄청난 이야기이며, 자신을 쳐다보던 네프의 얼굴은 나가서 아무도 방 앞을 지나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어라,라는 암묵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 이 미련 곰탱이 같은 녀석은 죽었다 깨어나도 눈치 채지 못하려나?

빛에 비추면 무지갯빛으로도 빛나고 짙은 남색으로도 가라앉는다. 마치 커다란 자수정을 그대로 박아넣은 듯 맑고 선명한 보라색의 눈이다.

손을 뻗어 온기가 느껴지는지 확인하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창백한 피부와 비현실적인 외모.

주위의 공기마저도 달라 보일 만큼 사내는 아름다웠다.

예르네이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무표정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넌 대체 누구지?”

하지만 정작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은 자신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사내의 정체 따위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는데. 한눈에 명문 귀족의 자제라는 것과 페르티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째서 자신은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일까. 게다가 저런 위험한 눈을 한 사내가 쉽게 자신의 정체를 말해 줄 리는 없다.

“보시는 바와 같이 페르티잔의 귀족. 현재는 시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사내는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세세하게 말해 주었다. 농담을 할 타입으론 보이지 않는데.

“뭐, 어찌 됐든 좋아. 서로 통성명이나 하자고 이런 자릴 마련한 건 아니니까.”

흘러내린 은발을 쓸어넘기는 동작에도 귀족의 우아함과 훈련받은 자 특유의 절도가 배어 있었다.

“우선 얘기를 하기 전에 질문 하나만 하지. 자넨 왜 스칸데르의 혼혈을 찾는 거지?”

언제라도 허리춤의 검을 뽑을 수 있게 무릎 위에 얹은 예르네이의 손이 약하게 떨리는 것을 네프의 두 눈은 놓치지 않았다.

“스칸데르의 혼혈 노예를 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침묵은 곧 긍정.

네프는 예르네이의 두 눈이 살짝 감겼다가 떠지는 것을 마치 새로운 것을 발견한 학자처럼 유심히 바라보았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눈꺼풀을 빽빽이 덮고 있어 눈매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머리카락 색과는 달리 속눈썹의 색은 검은색이다. 혼혈족일 경우에는 머리카락의 색과 체모의 색이 다른 경우가 간혹 있었다. 하지만 저 속눈썹과 같이 머리카락의 색도 좀더 짙은 색이면 좋았을 것을.

저 천박한 붉은색은 사내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 검은 표범에게 호랑이 가죽을 씌워놓은 것 같은 위화감마저 든다.

“난 단지 스칸데르의 혼혈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한참 만에야 변명을 하듯 말하며 예르네이는 두 눈을 부릅떴다.

노골적인 적의를 담은 전사의 눈이다. 저 낡은 두건만 아니라면 맹금류처럼 치켜 올라간 저 눈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을 텐데.

“비참한 상황에 처한 그들을 동정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건가?”

얼굴을 약간 들어 비꼬듯 말하자 사내의 두 눈은 더욱 날카롭게 빛난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지? 알다시피 스칸데르의 피가 섞인 것만으로도 그들은 죄인이다. 그런 그들을 만나서 어쩔 작정이었지?”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은 열릴 생각을 않는다. 이래서 똑같은 틀에 찍혀 만들어진 것 같은 전사 타입은 질색이다.

결코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법이 없는 네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을 사내에게 가까이 댔다.

갑작스런 자신의 행동에 흠칫 놀라긴 했지만 피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키스라도 하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네프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예르네이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가득 펼쳐진 자수정빛의 바다.

거울 표면과도 같은 동그란 동공에는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보랏빛의 눈동자는 잔잔한 수면과도 같았고 그 속에 비친 자신은 물 속에 잠긴 익사체 같은 모습이었다.

물결 따라 늘어진 몸을 일렁이는, 마치 불타오르는 레이루를 끌어안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무력한 꿈속에서의 자신 같은.

점점 빠져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맑은, 하지만 생명이 없는 유리알 같은 그 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무의 바다 속으로 서서히 잠겨 들어간다.

정말로 묘한 느낌의 사내다.

그 알 수 없는 보랏빛 눈에 응시당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약해진다. 굳건히 쌓아올렸던 강철 같은 벽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어이없이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다.

말해 버리고 싶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모든 사실들을.

모두 말해 버리고 편해지고 싶다.

한순간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게 놀라 예르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신이 짊어진 허무와 절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진실을 처음 만난, 정체조차도 알 수 없는 사내에게 떠맡기려 하는 것인가.

가끔 이렇게 한없이 나약해지곤 하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럽다.

“끝까지 말하지 않을 작정인가.”

네프는 둔한 사람이라면 알아채지 못할 사내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며,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 무료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더욱 굳게 다물린 입은 설사 저 목에 칼을 들이댄다고 해도 열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까지 추궁해서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알고 싶다.

저 남자가 왜 스칸데르 혼혈의 행방을 찾는 것인지. 그것이 단지 스칸데르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은 아닐 텐데, 어째서......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그리고 네가 찾는 블랙 마켓의 스칸데르 혼혈은 모두 사형당했다.”

사내는 예상했다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투박하고 상처로 빽빽이 뒤덮인 험한 손이다. 그동안 사내가 살아온 험난한 인생을 말해 주는 것 같은.

“하지만 두 달 전 블랙 마켓에서 판매된 노예 중 단 한 명, 살아남은 자가 있지.”

생각에 잠겨 있던 날카로운 눈이 놀라운 기색을 띠며 똑바로 네프를 응시했다. 네프는 묘한 우월감 같은 것을 느끼며 아치형의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건 누구지?”

“히이토 족의 귀족에게 팔린 여자 노예다. 상대가 히이토 족이니 제아무리 라자르 왕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히이토......”

히이토, 히이토......

몇 번이고 사내는 같은 말을 반복해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페르티잔은 대륙인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하늘 위의 요새 같은 존재다.

하지만 히이토는 공포, 그 자체다.

히이토를 말할 때 사람들은 역한 피비린내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 짐승같이 잔악한 미소를 띠고는 화염 속에서 무차별하게 양민을 학살하는 짐승 같은 사내들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페르티잔이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악마 같은 것이라면 히이토는 온 대륙을 떠돌고 있는 무서운 전염병과도 같은 이미지로 대륙인들에게 각인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 사내 역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일 테지.

“그래도 만나러 갈 생각인가? 상대가 히이토 족인데도?”

스스로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네프였다. 저 사내 같은 타입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저 라자르 왕까지도 섣불리 손대지 못하는 히이토 족이라 할지라도.

“블랙 마켓에서 스칸데르 혼혈을 사간 녀석은 누구지?”

기다렸다는 듯 네프는 분홍빛이 도는 손톱으로 낡은 테이블을 탁탁 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페이란. 호크 가의 페이란이란 놈이다.”

“어째서지?”

“뭘 말인가?”

“어째서 내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대가 없이 말해 주는 거지?”

네프는 우아한 동작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나 역시 블랙 마켓에서 팔리던 스칸데르 혼혈을 찾고 있었으니까. 같은 목적을 가진 동지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고 해둘까?”

자신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선 적의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좋은 정보 고맙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해 준 것도.”

여전히 자신을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면서 사내는 네프의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네프는 말없이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사내의 굵고 투박한 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난 이만.”

“기다려. 놈의 성까지는 먼 거리다. 말이 없으면 가지 못해.”

“그런가.”

“우선 상처가 나을 때까지 이곳에서 쉬어. 그것이 너한테는 좋을 테니까. 그리고 말은 내가 준비하지.”

자신을 올려다보는 매의 눈과도 같은 날카로운 눈을 응시하며 네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적에게 결투 신청을 하듯 비장한 어조로 사내에게 말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역시 스칸데르의 혼혈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 가는 것은 나와 함께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저 고지식한 전사 타입의 남자에 대한 것을 궁금해 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저 사내의 호감을 사기 위해 골 빈 자선 사업가처럼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었는지.

흥미가 생긴 것이다.

어두운 지하의 홀에서 저 남자를 처음 본 순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상처 입은 맹수와도 같은 눈을 하고 있던 저 남자에게 말이다.

그래서 저 남자가 내민 손을 기꺼이 맞잡았다.

타인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던 자신이었지만 맞잡은 사내의 크고 투박한 손은 꽤 좋은 느낌이었다.

손을 뒤덮은 온기와 거친 손바닥의 감촉, 그리고 결코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야성적인 눈.

사냥꾼들에게 둘러싸여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눈을 번뜩이며 이를 드러내는 야수 같은......

“당신답지 않아요.”

과연 자신의 명령대로 문 앞에 비스듬히 서 있던 유그는 앞서 걸어가는 자신을 졸졸 따라왔다.

“뭐가 나답지 않다는 거지?”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요?”

“그저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을 만나 반가웠을 뿐이다.”

“그것뿐이에요? 정말로?”

명문 오시예크 가에는 다섯 자녀가 있었다. 그 중 가장 막내인 이 아이, 유그는 싸움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지만 골 빈 짐승 같은 네 형제와는 달리 총명하고 지혜로운 아이였다.

하지만 군인 집안인 오시예크 가에선 검이 아니라 책과 공부에만 관심 있는 아들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유그는 자신에게 유달리 집착했다.

하지만 나이를 앞선 총명함도 때론 독이 되는 법.

“죽고 싶지 않다면 그 경망스런 입을 다물어라, 유그.”

“하지만 저 남자, 위험한 냄새가 풍긴다구요!”

“유그.”

계단 참에 서서 매섭게 노려보자 눈치 빠른 아이는 자신의 뜻을 금세 알아채고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툴툴댔다.

“저 남자는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다. 그리고 튼튼한 말 두 필만 준비해 줘.”

“네네. 명령이시라는데 따라야죠.”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과장되게 머리를 조아리며 유그는 일부러 소리를 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사람을 보는 유그의 눈은 정확하다. 저 아이의 말대로 사내에게선 위험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넓게 트인 초원과 아름다운 자연밖에는 볼 게 없는 시골 생활이 슬슬 무료해지기 시작한 것일까.

맑은 공기와 조용한 시골에서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지만 마음속의 불안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자신은 어째서 이런 곳에서 여유롭게 차 따위를 마시고 있는 것일까. 평화로운 보통 사람들의 일상 같은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네프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씻어내도 몸에 밴 피냄새는 없어지지 않는다. 가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독한 깊은 절망의 냄새 역시.

유그는 자신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 아이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험하고,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일을 함께할 동반자로서 저 붉은 머리의 사내는 최고다. 저 사내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으니까.

“네프 님이라고 했죠? 유그가 저녁은 여기서 먹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고 오랬어요.”

덩치만 큰 어린애는 잔뜩 삐쳐서 자신과 말도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유그의 전령사 역할을 도맡은 듯한 금발의 고양이 같은 나른한 아름다움을 지닌 아가씨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며 네프의 눈치를 살폈다.

“알겠다. 그렇게 하겠다고 유그에게 전해 주게, 전령사 씨. 그리고 유그 말로는 이곳의 셰리주가 수도에서 최고라고 하던데.”

“네. 마티 아줌마가 직접 담근 술인데 정말 끝내주게 맛있어요.”

자기 엄마 자랑을 하는 어린애처럼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에메랄드빛 눈을 빛내며 여자는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그걸로 두 병 부탁하네.”

“네∼”

나긋나긋한 몸을 흔들며 여자는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네프는 얼굴을 들어 사내가 머물고 있는 3층을 흘끗 쳐다보고는 곧 볼을 부풀리며 툴툴대고 있을 유그가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절로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지고 역한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진동한다. 하지만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속이 뒤집히는 저 너덜너덜한 형체들이다.

사람인지 고깃덩어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짓이겨진 신체.

피와 습기로 뒤덮인 더러운 벽에 포박된 쭉 뻗은 두 팔과, 흰자위를 드러내고 번뜩이는 두 눈만이 눈앞의 고깃덩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으... 끄아아아악!”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벽에 묶인 사람의 형체를 한 고깃덩이가 미친 듯이 요동했다. 피와 땀에 늘어붙은 긴 머리카락이 뱀처럼 꿈틀대며 피로 물든 피부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눈 부분에 검은 가죽 마스크를 쓴 고문관의 갈색 피부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고문을 하는 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시뻘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상반신을 태우던 인두가 떨어져 나가자 요동치던 피투성이의 몸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하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내뿜어지는 숨결은 짐승처럼 거칠고 불안정하다.

고문관의 곁에 서서 포로의 얼굴을 살피던 사내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뮌에게 다가왔다.

“정말 질긴 놈입니다. 벌써 사흘째 고문을 하고 있는데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이놈은 페르티잔 초정예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놈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눈앞의 사내가 자신들과 싸우던 용맹한 적의 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투구 속의 얼굴은 꽤 잘생긴 편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잘게 저며놓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뮌은 사내의 남자다웠던 단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노골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할까요, 뮌 님? 이 상태로 계속 고문해 봤자 헛수고일 것 같은데요?”

“할 수 없지. 처형해.”

“공개 화형입니까?”

고문관이 가죽 마스크로 뒤덮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스크에 짓눌린 그 목소리는 전투 때마다 뮌을 괴롭히는 귀울림과도 비슷했다.

“아니, 참수형이다.”

“하지만 페르티잔의 포로들은 지금까지 줄곧 공개 화형에 처해졌었는데요.”

“적국의 포로지만 한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자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내 말을 거역할 셈인가?”

“죄송합니다, 뮌 님.”

고문관은 황급히 뮌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정과도 같은 천한 계급의 그가 귀족이자 왕의 측근이기도 한 뮌에게 거역하는 것은 곧 반역을 의미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는 고문관에게 됐다고 말하며 뮌은 바닥에 늘어진 포로를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사흘 동안 계속된 엄청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몸. 하지만 붉은 피부 위에 도드라진 두 눈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살아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도 저 남자는 자신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군인, 특히 철저하게 훈련받은 거친 사내들을 통솔하는 리더라는 놈들은 쓸데없이 자신의 목숨을 건다.

나라와 왕에 대한 충성.

그런 건 아사 직전의 들개에게나 주라고 해라. 죽음 앞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자, 펜.”

뮌은 서둘러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고문실을 빠져나왔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지기가 횃불을 들고 그들이 가는 길을 밝혀주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의지할 것은 오직 문지기가 든 횃불뿐이다.

바람결을 따라 일렁이는 작은 빛.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진 가파른 계단. 습기로 늘 축축한 이곳에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피비린내, 알 수 없는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가끔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눈앞으로 흰빛 같은 게 빠르게 지나가는데 문지기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것을 죽은 자의 망령이 허공을 떠돌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은 포로, 죄인, 그리고 사형수들. 그들이 죽어서도 자신이 고통받으며 죽었던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헤맨다는 것이다.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긴 하지만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이 빛의 덩어리들을 대체 뭐라고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뮌 님.”

작달만한 문지기가 든 횃불이 일렁이자 곰팡이가 낀 벽에 달라붙은 벌레가 황급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습기에 찬 벽을 울리는 청아한 목소리는 이곳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위화감마저 든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사흘 동안 포로를 고문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굳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전 당신의 박식함과 군사들을 다루는 천재적인 솜씨를 존경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은 당신을 일컬어 리더가 될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곤 하셨죠.”

“뭘 말하고 싶은 거지, 펜?”

“저 남자는 페르티잔의 사령관이었던 자입니다. 저 남자에 의해 희생당한 동족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공개 화형이 아니라 아예 사지를 찢어죽여도 모자랄 대죄인에게 왜 그런 관대한 처분을 내리신 겁니까?”

“한 나라의 사령관이나 지도자는 아무리 포로라 할지라도 소홀히 대접하면 안 된다는 게 군법이다.”

“그 군법을 깨고 대륙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든 게 바로 페르티잔의 국왕입니다.”

젊고 총명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벗어나는 일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고지식함이 최대 단점인 이 사내에게 더 이상 입 아프게 말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사실 늙고 머리에 든 건 돈과 권력욕밖에 없는 윗분들에게도 잔소리를 들을, 그런 처분이었다. 저 페르티잔의 사령관에 대한 자신의 명령은.

하지만 한 나라의 사령관이었던 남자다. 그는 분명 귀족으로서, 한 집안의 자랑스런 아들로서, 두려울 것 없이 밝은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오직 빛의 존재만을 믿고 살아왔을 자존심 센 군인에게 그런 끔찍한 형벌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둠의 세계 저편에 눈이 부시도록 밝은 금색빛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다.

맑은 공기를 폐 속 가득 집어삼키며 뮌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이렇게 고마운 존재일 줄이야.

“뮌 님, 어쨌든 전......”

“이제 그만 하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청년의 말허리를 자르고 뮌은 천천히 수풀이 우거진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이대로 한참 동안 걷다 보면 왕궁의 정원이 나올 것이다.

정원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이곳 일대는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와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지하 감옥 안의 절망적인 어둠에 비하면 천국, 그 자체다.

적어도 이곳엔 빛이 있고, 살아 있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향긋한 풀냄새가 있으니까.

어쨌든 이곳은 죽은 자의 망령이 떠돌아다니는 무덤 속 같은 감옥 안과는 달리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 아닌가.

“펜, 호그에의 탑에 가서 나 대신 왕께 드릴 약을 받아와 주게.”

“펠터 님께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것은 뮌 님의......”

“이제부터 자네가 대신 해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좀 바쁜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감아 보이며 너스레를 떨자 사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가 이내 굳게 다물어진다. 그리고 햇살을 받아 더욱 온화한 빛을 발하는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다시 한 번 눈앞에 쏟아진다.

“알겠습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청년이 조용히 물러서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뮌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왕에게 드릴 약을 받아오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워낙 고가에다가 희귀한 약이라 오는 도중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약을 조달하는 일은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자가 도맡아 왔다.

‘이것으로 저 고지식한 청년의 기분이 조금쯤은 풀어졌으면 좋겠지만......’

뮌은 약하게 한숨을 쉬고는 두 팔을 등 뒤에 깍지 낀 채 다시 오후의 산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비록 우거진 나뭇가지 때문에 제대로 빛이 들진 않았지만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청아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뮌이 걸음을 멈춘 것은 왕궁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수수한 암갈색의 문 앞에서였다.

언뜻 보면 창고로도 보일 법한 곳이었지만 문 앞에 버티고 선 무장을 한 군인들의 존재는 그곳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임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문의 양 옆에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군인들은 뮌을 보며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고생이 많군그래.”

“저희는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머리 위에 뒤집어쓴 투구 사이로 빛나는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날카롭지만 저 판에 박힌 대사는 어설프기 그지없다.

요령 없이 시키는 대로 인형처럼 버티고 선 행동으로 보건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녀석들임에 틀림이 없다. 분명 이들은 말 잘 듣는 충견일지는 몰라도 실전에선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빨 빠진 견공들일 뿐이다.

이런 애송이 녀석들을 무슨 생각으로 이 방 앞에 배치해 둔 건지. 저 방 안에 있는 아이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알기나 하는 걸까.

뮌은 속으로 혀를 차며 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딸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사이로 향긋한 꽃냄새가 퍼져나온다.

마치 귀부인의 방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에 뮌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리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나치게 큰 침대 곁 테이블 위엔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치 편식이 심한 공주에게 바치는 음식 같다며 주방장이 툴툴대던 게 생각나 뮌은 작게 실소했다.

어쩌면 떼쓰는 어린 공주보다 더 다루기 힘든 손님일지 모르지.

“이런, 또 먹지 않은 건가.”

뮌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에 불룩하게 솟아 있던 침대 시트가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그저 돌돌 감겨 있기만 하던 하얀 덩어리가 금세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뱀이 허물을 벗듯 천천히 흰 시트가 미끄러져 내려가고, 시트보다 더욱 하얀 소녀의 창백한 얼굴이 뮌의 눈앞에 드러났다.

물기를 머금은 커다란 두 눈은 무기력하게 흔들리고 있고, 시트 아래로 드러난 몸은 애처로울 정도로 가늘다.

손을 뻗어 건드리려 하면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에 녹아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한 존재감. 마치 공중을 떠도는 미세한 먼지와도 같아서 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를 않았으니 저런 유령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죽고 싶은 건가.”

커다란 눈을 나른하게 깜빡이며 약하게 고개를 젓는다.

귀를 덮는 밤의 어둠과도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창백한 이마를 덮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왜 먹지 않는 거지?”

추궁하는 듯한 자신의 말투에 겁을 먹은 듯 몸을 잔뜩 움츠리고는 입술을 오물거린다.

“머... 먹을 수가... 없어요.”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작은 목소리였다. 가는 몸만큼이나 작고 가냘픈 목소리에 뮌은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뭐? 먹을 수가 없어?”

“......네.”

“어째서지? 몸이 안 좋은 건가?”

“냄새가... 나요.”

하지만 뮌의 눈치를 살피며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냄새라니. 음식 특유의 시큼한 냄새밖에는 나지 않는데.

하지만 오늘의 요리는 고기 요리다. 다른 대륙에선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신맛이 나는 향신료를 가미하지만 자신들의 나라에선 단지 후추와 히이토 지방에서만 나는 향이 독특한 잎으로만 요리를 한다.

그렇다는 것은......

뮌은 황급히 다 식어버린 고기 요리 접시를 들고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역시 신 냄새다. 그것도 향신료나 고기양념의 냄새가 아닌 인위적인 약품의 냄새.

이 냄새는 분명 기억에 있다.

극소량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몸속의 내장이 녹아내려 그대로 즉사하고 마는 독약 ‘소르몬’!

“거기 누구 없느냐! 근위병!”

뮌의 엄청난 기세에 소녀는 침대 구석으로 가 시트를 둘둘 말고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이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오자 뮌은 사정없이 주먹으로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작스런 상관의 폭력에 영문을 몰라 눈을 꿈뻑이는 근위병에게 뮌은 들고 있던 요리 접시를 내던졌다.

“오늘 식사를 가져온 하녀는 어떤 여자였지?!”

“붉은 머리에 밤색 눈을 한 주근깨가 많은 젊은 여자였습니다. 늘 오던 하녀가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해서......”

거기까지 말하던 근위병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 방에 있는 저 아이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놀러 온 옆집 아이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저 아이는 스칸데르인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순혈종이란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뮌 님! 주... 죽여주십시오!”

근위병은 재빨리 일어나 허리를 굽실대며 애원하듯 뮌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할 시간이 있으면 당장 달려가 그 여자를 잡아들여!”

거의 울듯이 훌쩍거리며 근위병은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똥돼지 같은 자식. 명색이 사령단장이라는 자식이 저런 코찔찔이 풋내기 자식들에게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겨? 만약 이 아이가 이대로 독살당했다면 내 손으로 친히 누런 지방으로 가득 찬 네놈의 배를 갈라버렸을 거다!’

분노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뮌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겁에 질려 잔뜩 몸을 웅크려 말고 있는 소녀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소녀의 가는 팔을 움켜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 몸 어디에도 소르몬을 섭취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없었다.

“너 진짜 괜찮은 거냐? 조금이라도 음식을 먹었다면......”

“안 먹었어요.”

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녀는 약간 큰 소리로 반박했다. 이런 식으로 소녀가 정색을 하고 덤벼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런데 그 냄새를 어떻게 알고 먹지 않은 거지?”

“날 쳐다보는 눈이... 무서웠어요.”

아마 하녀를 가장해 독이 든 음식을 가져온 자객을 말하는 것일 게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자나 적국의 포로로 잡혀온 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살기에 예민하다. 이 아이 역시 하녀 복장을 한 자객에게서 풍겨나오는 살기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겠지.

“저... 팔... 아파요.”

그제야 뮌은 자신이 소녀의 가는 팔목을 아직까지 움켜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를 쥔 듯한 느낌이었다. 힘을 주어 부러뜨리면 소리도 없이 바스라질 것 같은 팔목.

침대 위에 늘어진 몸도 마찬가지다. 시트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하얀 피부에 흐느적거리는 사지, 애원하는 듯한 커다란 눈.

그저 조금 예쁘장한 얼굴을 한 겁 많은 소녀. 하지만 왕궁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럴듯한 외모의 하인들과 다른 점은 단아한 이마 위에 늘어진 검은색 머리카락이다.

하얀 피부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아름답지만 이젠 저주받은 색이 되어버린 스칸데르인의 징표.

소녀는 발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어루만지며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탐색하듯 쳐다보았다. 가끔 이렇게 소녀가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면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조그만 소음에도 흠칫 놀라 몸을 사리는 상처 입은 초식동물 같았지만, 결코 소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거나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삶에 집착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론 자신들을 탐색한다.

자신의 고향을 파괴하고 마을 사람들을 죽인 적에 대한 살기로, 때론 아무 감정 없는 유리알 같은 광택을 띠고 커다란 두 눈은 빛나는 것이다. 모두들 무기력하게 침대 위에 늘어진 소녀를 한낱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지만 언젠가는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땅을 치며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다.

뮌은 더 이상 소녀의 커다란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 아이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억까지 떠올라 밤잠을 설쳐야 한다.

“이제부터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안심하고 쉬도록 해.”

“저기요......”

늘어지는 약한 목소리와 함께 보드라운 손이 뱀처럼 뻗어나와 뮌의 투박한 손을 덮었다. 눈처럼 하얗고 작은 손은 뮌의 손등을 애무하듯 어루만졌다.

소녀를 세이너 섬에서 잡아 왕궁으로 데려온 날부터 그녀를 감시하고 보살피는 것은 뮌의 몫이었다.

왕은 자신이 잡아들이라고 한 스칸데르인 포로를 단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았다. 왕은 원래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 뮌이 알고 있는 스칸데르인 포로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다. 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커다란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조심성 많은 아이였다. 결코 타인, 그것도 자신의 적이 분명한 자에게 먼저 손을 뻗는, 그런 아이는......

“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애원하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와 손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뮌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쳐다보고 말았다.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아요.”

자신을 응시하는 커다란 눈이 금세 촉촉이 젖어들고 소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아프도록 눈에 와 박힌다.

손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 헐렁한 옷 사이로 그대로 내비쳐지는 순백의 피부, 열려진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검은색의 머리카락.

심장이 아프도록 뛴다.

맞닿은 손을 통해 소녀의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진다.

위험하다.

하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하얀 시트를 밟고 소녀의 가는 몸이 고양이처럼 나긋나긋하게 움직인다. 뮌은 천천히 천천히, 마치 꿈속과도 같이 몽환적인 색채를 띠고 다가오는 유형물을 아프도록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내 꿈결처럼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까지 다다랐을 때, 뮌은 약한 현기증마저 느꼈다.

작은 입술 사이로 토해지는 숨결에선 달콤한 꽃향기가 났다. 지하 감옥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녹녹한 곰팡이 냄새, 피비린내보다 더욱 강렬하고 독한 향이다.

소녀는 살짝 눈을 치뜨고 뮌의 손을 살며시 들어 자신의 얼굴에 갖다댔다. 매끄럽고 따스한 피부가 손바닥을 감싸듯 와닿는다.

“도와줘요.”

찰싹!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뮌은 자신을 유혹하는 못된 악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거칠게 훔치고 자신을 응시하는 소녀의 눈에선 더 이상 목숨을 구걸하는 자의 비굴함은 보이지 않는다.

살기다. 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강렬한 저 살기마저 향기롭다.

젠장!

뮌은 소녀에게서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미쳐버린 게 틀림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기분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자신은 군인이고 저 아이는 포로다.

언젠가는 왕의 명령에 따라 죽여 없애야 할, 지하 감옥 안에 늘어진 포로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왕궁을 빠져나와 하녀들이 모여 앉아 한참 점심을 먹고 있는 정원을 뛰듯이 걸으며 뮌은 주먹을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아직도 손 안엔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그 강렬한 두 눈을 담아두었던 두 눈은 아프도록 시리다.

끌리고 있다.

저 나약한 몸속 어딘가에 증오라는 사악한 악마를 키우고 있는 달콤한 외모의 소녀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끌리고 있는 것이다.

세이너 섬에서 소녀를 처음 본 순간 느꼈던 알 수 없는 위화감은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뮌은 아무도 없는 정원 구석의 벤치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약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온다.

정원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하녀들의 웃음소리는 그런 뮌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펜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약을 조달하는 첫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약을 노리는 도적 떼를 소탕한 것으로 왕이 포상휴가를 내린 것이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경쾌하게 왕궁의 긴 복도를 걷던 청년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뮌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뮌 님.”

답지 않은 청년의 아침 인사에 뮌은 코웃음을 치며 청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왕께서 친히 포상휴가를 내리셨다면서?”

“네. 이게 모두 뮌 님 덕분입니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청년을 뒤로하고 뮌은 복도 끝 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의 인사를 받으며 정확히 세 번 노크를 한 뒤, 뮌은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잉크 향이 가실 날이 없는 이곳은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서재 같은 느낌이다.

“북쪽의 사령단장 뮌 힐터, 부름을 받고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자 책에 둘러싸인 커다란 의자 위로 사람의 형체가 서서히 솟아올랐다.

짙은 남빛의 머리카락이 완만한 곡선을 그린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쭉 뻗은 팔을 우아하게 허리에 갖다대며, 남자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보랏빛을 띠는 푸른색 자켓을 걸친 사내는 책에 둘러싸인 이곳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었다.

선이 가는 몸과 굳게 다물린 입술, 이지적으로 살짝 치켜 올라간 눈. 왼쪽 얼굴을 가린 섬세한 무늬의 마스크 대신 외알 안경을 썼더라면 공부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학자처럼 보일 수도 있을 법한 이미지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마스크를 살짝 치켜올리며 남자는 온갖 문서와 잡동사니로 가득 찬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스칸데르의 포로에게 자객이 찾아들었단 얘기를 들었다, 뮌.”

단색의 은은한 광택이 나는 마스크 아래를 비집고 나온 것은 끝이 약간 쉰 싸늘하게 얼어붙은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자객은 잡아들였나?”

“물론입니다. 궁성 내를 헤매고 있는 것을 발견해 지하 감옥의 고문실로 보냈습니다.”

“누가 보낸 자객이었지?”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왕궁 근처에 사는 페르티잔의 혼혈이거나 왕께 적대감을 가진 반란분자들의 소행이라고 생각됩니다.”

“흐음......”

사내는 손으로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은은한 물빛 블라우스의 소매 밑으로 드러난 앙상한 팔엔 멀리서도 확연하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흉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소매 속에서부터 이어져 손가락 끝까지 피부 위를 빽빽이 뒤덮은 화상의 흉터. 아마도 저 마스크 안의 얼굴 역시 화상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을 것이다.

“역시 아무리 숨기려 해도 소문이 새나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게로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사내는 한쪽 눈을 매섭게 빛냈다.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왕이시여.”

“됐네. 자네는 맡은 바 임무를 다했어. 잘못은 그런 새파란 애송이들을 근위병으로 세운 남쪽 사령단장에게 있는 거지. 그 아이는 중요한 인질이다. 나라의 흥망이 걸린 중요한 인물을 소홀히 대한 죄는 커.”

목소리만큼이나 싸늘하게 가라앉은 사내의 하나뿐인 물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뮌은 진심으로 남쪽 사령단장 ─ 자신은 그저 똥만 들어찬 돼지라고 부르는 ─ 을 동정했다.

아마 실수를 저지른 애송이 문지기들은 사형당하거나, 두 팔을 잘린 채 국경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쪽 사령단장 역시 무사하지는 못할 터.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저 사내는 잔악한 전사의 피가 흐르는 히이토 족의 왕이다. 온몸이 활활 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살기 위해 두 팔로 기어나온 악귀와도 같은 사내인 것이다.

“그래. 뮌, 어쨌든 그 아이는 괜찮은 건가?”

“네. 혹시나 싶어 의사를 불러 진찰했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듣기로는 어린 계집아이라고 하던데, 자객의 살기를 눈치 채고 독약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면서? 대단해. 정말 대단해. 아무리 어린애라 할지라도 몸속에 흐르는 피는 스칸데르의 것이란 말인가.”

경쾌한 목소리와 과장되게 탄식하는 듯한 말투로 보건대 왕은 꽤 즐거워 보였다. 어쩌면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뮌은 알 수 있었다. 한쪽뿐인 물빛 눈동자가 탁하게 빛을 발하는 것으로 보아 왕은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세이너 섬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 시체 위로 불을 놓으라고 지시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뭔가 지독히도 위험하고 잔악한.

“그 아이를 데려와.”

갑작스럽게 머리 위로 떨어진 사내의 낮은 목소리에 뮌은 당황하며 눈을 치떴다.

“네?”

“그 계집애를 데려오라고. 스칸데르의 포로 말일세.”

“아...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발소리를 죽여 물러서는 뮌을 사내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불러 세웠다.

“뮌, 그 아이는 아름다운가?”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못한 것을 질문하곤 해 많은 이들을 당황시키던 왕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엉뚱한 성격에 적응이 된 뮌은 기다렸다는 듯 확실히 왕이 원하는 답을 말해 줄 수 있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물기를 머금은 커다란 눈, 빛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마치 숲의 정령과도 같습니다. 아주 작고, 가녀린 새 같은 아이지요.”

“호오, 그래?”

왕은 눈앞에 그 사랑스런 외모를 한 소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황홀한 눈을 하고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스칸데르 족의 여자는 무척 아름답고, 신비한 매력이 있지. 옛날 내가 아이였을 적에 궁성에 스칸데르의 사제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어린 마음이지만 난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어.”

“네, 스칸데르 족은 정말이지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뮌, 자네가 누군가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군.”

사실 뮌 스스로도 놀랐다.

왕이 원하는 대로 그렇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됐을 것이다.

굳이 스칸데르 족 여인의 아름다움을 유치한 삼류 음유시인처럼 미화시키지 않았어도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을 게 분명하다.

숙여진 머리 위로 왕의 노골적인 시선이 내리꽂힌다.

분명 왕은 여인처럼 붉고 얇은 입술을 말아올린 채 물빛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할 정도라면 필시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아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비꼬는 듯한 그 말투에 뮌의 남자다운 얼굴이 딱할 정도로 붉게 상기되었다.

“아아. 너무 부끄러워하지는 말게. 극상의 미(美)를 순수하게 찬양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니까. 이제 자네도 슬슬 제대로 된 정실을 맞아들일 때가 된 모양이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게.”

왕의 목소리는 장난기 가득한 어린애처럼 한껏 들떠 있었다.

거의 도망치듯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왕은 천천히, 포만감에 찬 맹수처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창가를 향해 다가서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아름다울수록 좋지. 그래야 산 제물로서의 비장미가 더해질 테니까.”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비쳐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내의 얼굴이 잔악하게 일그러졌다.

흘러내린 남빛 머리카락을 화상의 흉터로 뒤덮인 손으로 쓸어올리며, 사내는 갑자기 발작을 하듯 크게 목을 젖혀 웃었다.

마치 집무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그림 속의 악마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생각 탓인지는 모르지만 방 안의 공기마저도 무겁게 가라앉은 듯하다.

뮌은 황급히 왕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햇살이 내리쬐는 난간에 기대섰다.

왕은 미쳤다.

저 남자는 페르티잔에 의해 뿔뿔이 흩어진 히이토 족들을 한데 모아 성을 재건한 구국의 영웅일지 모르지만, 뮌이 보기엔 그저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저 미치광이의 욕망에 희생되는 것은 다름 아닌 스칸데르의 아이.

라자르 왕과의 타협이 성사돼 무사히 페르티잔에 넘겨진다 해도 저 아이가 살아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5년 전 완전히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린 그곳, 스칸데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는 단지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스칸데르의 피 때문에 살해당하고 마는 것이다.

알고 있다.

소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세이너 섬에서 그 아이를 처음 본 순간 모두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섬의 사람들을 모두 몰살한 자신들에 대한 적의도 없었으며, 자신들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자 특유의 무기력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어째서, 대체 무엇이 그 아이를 그런 괴물로 만든 것일까.

가족같이 지냈던 섬 사람들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적진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닳고 닳은 창녀처럼 능숙하게 자신을 유혹하는 그 대범함.

어머니의 고향 멘스터에선 악마에게 몸도 마음도 모두 줘버린, 이미 이 세계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온화한 미소가 아름다웠던 어머니를 죽이고 처참하게 짓이겨진 어머니의 시체 옆에서 울고 있는 자신에게도 칼을 겨누었던 아버지 같은 사람이 그 좋은 예다.

악마의 세계에 발을 담근 자.

결국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자신의 보잘것없는 육신마저도 악마에게 모조리 빼앗겨 버린 미치광이.

그 아이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것일까.

『도와줘요.』

머릿속에서 눈물을 머금고 자신에게 애원하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숲의 정령처럼 아름답고, 가녀린 아이. 도와달라던 애원도, 자신을 쳐다보던 젖은 눈도 모두 거짓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오를 알리는 탑의 종이 청명한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여섯 번의 종이 다 울리고도 꽤 오랫동안 난간에 기대서 있던 뮌은 왕이 기다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임을 떠올리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녀장이 준비해 온 옷은 수수하지만 고급스런 느낌의 정례복으로, 가는 체구의 소녀에게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소녀는 생명이 없는 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거울 속의 자신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늘 느끼곤 했던 것이지만 왕을 알현할 때 입곤 하는 정례복은 왜 이다지도 복잡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특히 여성용의 복장은 혼자서는 절대 입을 수 없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천 조각으로, 잘 입혀놓으면 꽤 예쁘긴 하지만 절대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진 않은 옷이다.

시녀들 네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옷의 주름을 아름답게 정돈하고, 복잡한 장식들을 모두 제자리에 꽂은 뒤에야 장장 30여 분 동안 계속된 힘든 작업은 끝이 났다.

“이제 다 끝난 건가?”

“네, 뮌 님.”

시녀장은 소녀의 머리에 하늘하늘한 천으로 장식된 물빛 꽃을 장식하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옷을 갖춰 입는 것도 꽤 힘든 작업이군. 여자들은 참 힘들겠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우셔서 힘든 것도 모르겠어요.”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처럼 말하는 시녀장의 말대로 정례복을 완벽히 갖춘 소녀는 장인의 솜씨로 빚은 아름다운 도자기 인형 같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투명한 피부 위를 살짝 덮은 하얀 천과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화사한 몸의 라인, 벌어진 천 사이로 쭉 뻗은 길고 가느다란 다리.

무표정한 얼굴과 짙은 빛의 커다란 두 눈,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거울 속에 비치는 물기를 머금은 커다란 눈도 청순한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시녀들이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 모두들 나가주게. 아직 왕을 알현하기까진 시간이 좀 있으니까.”

시녀장을 필두로 한 시녀군단이 물러서자 방 안엔 어색한 정적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꽤 오랫동안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플 텐데도 소녀는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좀 앉아 있지 그래?”

“아뇨.”

시녀들의 앞에선 말 한마디 꺼내지 않던 소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 것인가.

우월감과도 비슷한 묘한 감각에 뮌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옷이 불편한 건가?”

가까이 다가서서 몸을 부축해 주기 위해 손을 뻗자 소녀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냥 좀 서 있고 싶어요.”

소녀는 변명을 하듯 우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도와달라고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유혹하던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창부의 모습을, 날개가 달린 것 같은 하늘하늘한 옷을 차려입은 이 소녀에게선 조금도 엿볼 수 없다.

그래서 짜증이 치밀었다.

“아아... 그래? 그럼 멋대로 해.”

스스로도 어린애 같은 행동이란 것은 알지만 저번처럼 또 손찌검을 했다간 자신과는 아예 말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뮌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입술을 깨물며 눌러 삼켜야 했다.

소녀는 뮌의 눈치를 살피며 소매 끝으로 비어져 나온 손가락을 만지작댔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쭉 뻗은 하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녀들이 목욕물에 집어넣었을 달짝지근한 향유 냄새가 바람을 타고 뮌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뮌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 기대앉아 가만히 소녀를 쳐다보았다.

뮌의 노골적인 시선에 어쩔 줄 몰라 소녀는 붉어진 얼굴로 계속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건가. 혹은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사냥개에게 둘러싸인 토끼처럼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왜 그때 내게 그런 짓을 한 거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뮌이 입을 열자 소녀는 흠칫 놀라며 살짝 눈을 치떴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깔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없다. 그저 고개를 푸욱 숙인 채 길게 늘어진 소매 밑의 어린애같이 작은 손을 약하게 떨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접근해 날 유혹하면 내가 널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나?”

얇은 천 위로 도드라진 둥근 어깨가 크게 떨린다.

“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행동한 것치고는 능숙하더군. 스칸데르인은 모두 너처럼 닳고 닳은 창녀인가? 나약하고 힘없는 소녀인 척 가장하고 그럴듯한 외모로 상대를 유혹해, 결국은 방심한 상대의 등에 칼을 내리꽂는다. 뭐 그런 시나리오겠지.”

뭔가 반박하고 싶은 듯 주먹을 움켜쥔 소녀는 뮌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일그러진 두 눈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하다.

뭔가 화도 나고, 무슨 말이든 해서 반박하고 싶긴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일 게다.

커다란 두 눈에 분노를 담고 주먹을 쥔 하얀 손을 잘게 떨면서 어깨를 들썩이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뮌의 몸속에서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결국 뮌은 평정심을 잃고 소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가는 어깨를 움켜쥐었다.

“살고 싶은 건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살고 싶은 건가?! 대답해 봐!”

무서운 기세로 소리치는 뮌을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작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나... 난......”

꺼져가는 모닥불의 불꽃처럼 작은 목소리가 붉은 입술을 비집고 나옴과 동시에 소녀의 유리알 같은 커다란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난... 그냥... 무서웠을 뿐이에요. 무서웠던 것뿐이에요!”

소금기를 머금은 따뜻한 액체가 소녀의 턱을 타고 흘러내려 옷을 적셨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두려움에 질려 크게 눈을 치뜬 채 소녀는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어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가는 하얀 천이 그 증거였다.

하얀 볼 위에도, 벌려진 입술에도 눈물이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단비처럼 촉촉하게 스며든다.

소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한 번 울음을 터뜨리자 주체할 수 없는 듯 소녀의 커다란 눈에선 쉴새없이 눈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안은 채 소녀는 서럽게도 울었다. 두려움에 질려 울고 있는 저 모습도 어쩌면 거짓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애처롭다. 그것이 비록 거짓된 모습일지라도.

일그러진 소녀의 얼굴만큼이나 심장이 아무렇게 구겨져 격한 고통을 호소한다.

아버지는 악마에 홀렸던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말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지금 악마일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버지를 조종했던 악마처럼 이 소녀도 자신의 영혼을 빼앗고 자신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허공을 향해 내뻗은 손은 소녀의 축축하게 젖은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자신의 두 눈은 애처롭게 몸을 떨며 우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 주고,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그대로 자신의 손에 얼굴을 기대온다.

뮌은 그대로 달콤한 향유 냄새가 나는 소녀의 몸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젖은 소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열에 들뜬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미안하다. 미안해.”

소녀의 어깨가 크게 한 번 들썩였다. 계속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이자 격한 떨림도 서서히 잦아든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구나. 이름이 뭐지?”

격한 감정이 잦아들자, 소녀는 몸을 바르작거려 뮌에게서 살짝 몸을 뗀 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이기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이루... 레이루예요, 내 이름은.”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한 걸음걸이로 레이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 앞에 멈춰 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인위적인 마스크로 얼굴 반쪽을 가린 왕의 모습에 레이루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왕이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져도 피할 생각도 않고, 잔뜩 경직된 채 눈을 치뜰 뿐이었다.

“겁에 질린 작은 동물 같군.”

왕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

푸른빛 눈동자를 싸늘하게 빛내며, 문 앞에 버티고 선 뮌을 바라보며 왕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알고 있는 스칸데르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용맹하고 강인한 전사의 피가 흐르는 종족이었다. 부드럽지만 속은 돌처럼 단단한, 그런 놈들이었어. 하지만 이건......”

잠깐 말허리를 끊고 왕은 매만지던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레이루는 몸을 휘청거리며 꽤 아픈 듯 약한 신음 소리를 냈다.

“어디에나 있는 벌레 아닌가.”

뮌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왕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힘없고 나약한 존재다.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것을 당연한 듯이 생각하며, 자신의 몸조차 지킬 수 없는 무기력한 생물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레이루라는 저 스칸데르의 아이가 왕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오나 전하, 저 아이는 전하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약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

“세이너 섬에서 저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모두 한순간 할 말을 잃었었습니다. 그만큼 저 아이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아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호오......”

왕의 빛나는 눈이 이젠 뮌에게 향해졌다.

“이 아이에 대해서 무척 잘 알고 있군그래.”

“그저 보고 느낀 점을 그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래?”

묘하게 끝이 올라간 목소리다.

온몸을 훑듯이 지나가는 노골적인 시선을 무시하려 애쓰며 뮌은 예를 갖추기 위해 뒤로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왕은 즐거운 듯 보였다.

기다리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스칸데르의 아이가 궁성에 입궐한 뒤부터 줄곧 왕은 저 상태였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돼 왔던 이성과 광기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드디어 부서지고 만 것일까.

왕의 웃는 얼굴에선 이젠 소름 끼치는 공포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레이루는 악마에게 잡혀온 순결한 처녀처럼 애처로울 정도로 순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흰 옷을 입은 채 가는 몸을 떨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고결하고 비장미가 흐르는 아름다운 산 제물을 원했던 왕의 바람 그대로다.

자신을 향한 소녀의 경직된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뮌은 입술만을 움직여 말을 꺼냈다.

“전하, 페르티잔 포로들의 사형 날짜가 대신들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린 것이었지만 다행히 왕은 뮌이 던진 미끼를 덥썩 물어왔다.

“언제지?”

“내일 정오입니다.”

“포로들 중에 페르티잔의 사령관도 있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관례법상 화형을 시키는 건가?”

“페르티잔의 사령관만이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자네가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건가? 어째서지?”

이미 각료회의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을 뮌은 다시 한 번 앵무새처럼 지껄였다.

“상대는 한 나라의 사령관입니다. 그런 자를 그런 끔찍한 방법으로 사형시켰다간 후일 페르티잔과의 협상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페르티잔과의 협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전쟁뿐이야!”

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피와 폭력을 좋아하는 야만인의 습성을 그대로 간직한 난폭한 전사의 피가 흐르는 종족. 히이토 족은 그래서 대륙인들에게 악마의 종족이라고도 불린다.

그런 히이토 족들에게 전쟁은 즐거운 축제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 피는 피를 부른다. 어째서 히이토 족들은 그 단순명료한 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페르티잔의 포로들 전부, 왕궁 밖의 주민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극살시킨다. 그리고 시체들은 굶주린 맹수들에게 던져줘. 사령관이라는 놈은 목을 잘라 최대한 정성스럽게 포장한 뒤 페르티잔의 국왕에게 보내!”

극살. 그것은 극악무도한 살인범이나 대역죄인들에게 행하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사형 방법이다.

머리 위를 십자 모양으로 절개한 뒤 거꾸로 매달아 뇌수와 몸 안의 내장이 모두 쏟아져 나오게 하는 방법으로 죄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끔찍한 고통과 절망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끔찍한 모습으로 죽고 마는, 히이토 족들의 잔악성을 보여주는 사형법 중 하나다.

“하오나 전하, 그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이십니다.”

“페르티잔인에게 살해된 동족들은 셀 수도 없어. 뮌, 자네는 보이지 않나? 비통에 잠긴 목소리로 흐느끼며 왕궁을 떠도는 원혼들이?”

뮌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왕의 한쪽뿐인 물빛 눈동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를 맴돌고 있었고, 두 팔은 눈앞에 떠다니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공중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 위에서 춤추던 팔로 레이루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하얗게 질린 소녀의 얼굴에 대고 목에서 쉰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웃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불쌍한 종족이여. 너희들도 피해자다! 너희들도 그 더러운 페르티잔에게 희생된 가련한 존재들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난 그 빌어먹을 라자르 왕을 없애기 위해 널 이용할 거다! 너의 그 하얀 몸을 산 채로 잡아찢어 라자르 왕의 얼굴에 내던지며 소리칠 테다. 이젠 네놈이 죽을 차례다! 이젠 네놈이 산 채로 불에 구워질 차례다! 이 가련한 아이의 동족처럼 페르티잔인들도 대륙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줄 테다!”

레이루의 얼굴색은 이제 거의 흙빛으로 변해 갔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이젠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는지 눈을 커다랗게 치뜬 채 가련한 소녀는 왕의 힘에 이끌려, 물 위에 떠다니는 부초처럼 힘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왕은 그녀의 머리를 움켜잡은 채로 인형처럼 아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늘거리는 하얀 천과 함께 소녀의 작은 몸은 핏빛 양탄자 위로 시체처럼 늘어졌다. 미동도 없이 부들부들 몸을 떠는 그녀의 커다란 눈은 뮌을 향해 애절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와줄 수 없다.

애처롭게 떨리는 몸을 껴안아 줄 수조차 없는 것이다.

“모두 나가. 난 이 아이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왕은 잔악하게 미소지으며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뮌과 왕의 호위병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하지만 뮌은 호위병들이 모두 갑옷 소리를 내며 서둘러 방을 나설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익사한 여자의 시체처럼 핏빛 바닥 위로 흩어진 하얀 천. 맥없이 늘어진 가는 팔다리. 젖어 있는 애달픈 눈동자.

왕의 우악스런 손길에 붙잡힌 채 떨고 있는 작은 동물 같은 소녀.

“자네는 왜 나가지 않는 거지? 내 말을 거역할 셈인가!”

왕의 신경질적인 외침을 뒤로하고, 뮌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등뒤로 살기와는 다른 강렬한 시선이 꽂혔지만 돌아볼 수는 없었다.

마침 왕에게 보고할 일이 있었는지 펜이 서류 뭉치를 든 채 문 앞에 서 있다가 뮌을 맞았다.

“우리들의 왕은 미쳐버린 것 같군요.”

뮌은 소리 없이 쓰게 웃었다.

“이미 옛날부터 저분은 미쳐 있었다, 펜.”

“전 가끔 왕이 진심으로 두렵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미쳐버린 왕.

절대적인 힘을 가진 악마와도 같은 사내.

최소한의 인간다운 온정도, 용서도 없는 잔악한 피의 마왕. 그를 거역하는 자는 산 채로 불구덩이 속에 처넣어지리라.

왕을 알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펜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뮌의 뒤를 따랐다.

“저 스칸데르의 소녀는 결국 죽고 말겠군요.”

아무런 감흥 없이 지껄인 펜의 말에 가슴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 아이도 죽는 그 순간에는 비명을 내지를 것이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는 팔을 허우적대며 도와달라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죽고 만다. 하얀, 순백의 결정체 같은 저 아름다운 소녀가 눈앞에서 붉은 선혈을 내뿜으며 맥없이 쓰러지고 만다.

저 빌어먹을 미친 악마에 의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어머니처럼!

최초로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살의를 느낀 것은 열두 살 때였다.

상대는 아버지였다. 무감동한 눈으로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에게서였다.

그리고 15년 만에 다시 느낀 주체할 수 없는 살의의 대상은 바로 자신의 왕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자가 왕궁 안에 있다면 당장 지하 감옥 안에 처넣어져, 페르티잔의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온몸의 뇌수와 내장을 쏟으며 죽어갈, 그런 엄청난 살의가 뮌의 몸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 레이루가 왕궁의 가장 안쪽, 자신이 드나들곤 했던 암갈색 문의 방에 머무는 일은 없었다. 시녀들의 말로는 지금은 쓰지 않는, 왕비의 침실로 이용되곤 했던 방에 감금되었다고 했다.

페르티잔의 포로들은 이틀 만에야 겨우 죽음이라는 고통 없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시체는 왕의 명령대로 숲의 굶주린 짐승들에게 던져졌고, 페르티잔 사령관의 목은 왕이 가장 좋아하는 물빛 상자에 보랏빛 꽃과 함께 넣어져 페르티잔의 왕에게 보내졌다.

그날 저녁 하늘을 물들인 석양은 피처럼 붉어, 보는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젠장.”

유그는 호밀 빵을 신경질적으로 씹으며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칙이라는 단순한 이름의 있으나마나 한 수행인은 요구르트로 버무린 건포도를 한 입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제기랄!”

칙은 자신의 주인이 현재 열을 올리고 있는 카이라라는 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 때문에 기분이 저조한 거라고, 눈알을 굴리며 생각했다. 카이라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게을러터진 고양이 같은 여자로, 달짝지근한 사랑스런 얼굴로 주위 남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가 일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선술집으로 찾아온 느끼한 얼굴의 귀족은 카이라의 곁에 딱 달라붙어, 선물을 한아름 안겨주고는 옷 위로 드러난 화사한 몸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나 같으면 놈에게 달려들어 저 느끼한 면상을 후려갈겼을 텐데.’

하지만 자신의 주인이란 남자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성격의 소유자다.

다른 남자가 카이라에게 추근덕거리는 게 보기 싫으면 그냥 밖으로 나가든가 할 것이지, 소심하게 한숨만 폭폭 내쉬곤 애꿎은 테이블을 탕탕 치며 화풀이를 해대는 것이다.

하지만 칙의 생각과는 달리 유그가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물론 저 버터를 처바른 것 같은 면상의 놈이 카이라의 몸을 지분대는 게 꼴 보기 싫지만, 저놈이 카이라의 팔목을 붙잡고 여관방으로 올라가려 하면 당장 달려들어 느끼한 면상에 주먹을 처박아 주면 되는 거고.

문제는 저 3층 방 ─ 원래는 카이라의 방이었던 ─ 에 머물고 있는 근육 덩어리의 빌어먹을 손님이다.

그리고 시골구석에 처박혀 일 년에 한 번 자신을 찾아오면 다행이었던 네프가 아예 자신의 성에 자리를 잡고 허구한 날 저 남자를 만나러 드나드는 것도 문제다.

저 근육질의 남자에게선 위험한 냄새가 나니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말라는 자신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듣고, 매일매일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들듯 3층 구석방 문을 노크하는 저 뻔뻔함이라니.

유그가 알고 있던 네프라는 남자는 외모만 그럴싸한 얼음인형 같은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타인에게 저토록 관심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사람에겐 좋다, 싫다는 기본적인 감정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스칸데르 혼혈의 노예를 찾는 그 남자에게 조금 흥미가 인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길어야 사흘 정도면 관심을 가졌던 어떤 것에서 다시 눈을 돌렸거늘......

저것은 마치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아가씨를 매일같이 만나러 오는 순진한 시골 청년 같은 모습 아닌가.

예쁘기로 소문난 귀족 아가씨와 연결해 주려고 해도, 그의 아름다움에 홀려 달라붙어 있던 여자들도 결국 그 병적인 무뚝뚝함에 질려 손사레를 치고야 말았다.

한창때의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하는 일이라곤 책을 보거나, 검술 연습을 하거나, 승마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등의 노인네 취미 같은 일들 뿐이라 조금은 생산적인 일을 해보라고 그렇게 목이 쉬도록 잔소리를 해대도 한다는 말이,

『발정기의 짐승 같은 남녀의 교접이 어째서 생산적인 일이란 거지?』

귀족 아가씨들이 울고 갈 환장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해가지고서는, 겨우 입에 담는다는 말이 남녀의 교접이란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3층 방의 저 우락부락한 남자에게 허구한 날 들락거리는 일이 생산적인 일이란 겁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머리 뚜껑을 열어서 그 특이한 뇌 속의 내용물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구요!

전조는 있었지만 드디어 완전히 미친 건가.

칙은 갑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유그의 곁에서 슬쩍 물러서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유그의 고충을 알 리 없는 카이라는 무슨 일인가 싶어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유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카이라의 에메랄드빛 눈은 계단 위를 향했다.

끼익끼익.

계단의 낡은 나무가 사정없이 울부짖는 소리에 유그는 아예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끄응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몸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란한 소리가 나긴 해도, 저 정도 덩치의 사내들이 그러하듯 소란스런 기척은 없다. 마른 나뭇가지를 밟고 살금살금 걸어오는 맹수 같은, 조심스러운 몸놀림. 저렇게 기술적으로 기척을 감출 수 있는 자는 유그가 알기론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야아∼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셨네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놈이지만 친화력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수행원 칙이 경쾌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인사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자신의 앞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테이블에 걸쳐진 건강한 갈색의 두터운 팔.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근육이긴 하다.

“자아자아, 드세요. 금방 따온 야채라 정말 신선해요∼”

‘빌어먹을 놈. 네놈이 저 남자처럼 되고 싶어하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주인의 먹을 것까지 빼앗아 상납하는 거냐!’

눈앞에 놓인 갈색의 근육이 넘실거리며 포크를 쥐고, 접시의 야채를 집는다.

얼마나 훈련을 거듭하면 저렇게 완벽한 근육이 생기는 걸까.

“아직 그 남자는 오지 않은 건가?”

이것이 사내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던 유그는 발끈해서 고개를 쳐들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젠장, 오늘따라 더 멋져 보이는구만. 그림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야성미라니. 아니지! 내가 저놈의 외모에 감탄하면 어쩌겠단 거냐!’

“그 남자가 아니라 네프 님이다, 전사 아저씨.”

“난 전사 아저씨가 아니라 예르네이다. 그리고 자네에게 아저씨라고 불릴 정도는 아냐.”

칙이 핏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겉늙어 보이는 외모 덕에 아직 20대 초반이건만 애 서넛은 있는 30대로 보이는 유그였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무렇지 않게 자극한 남자, 예르네이를 향해 유그는 가늘게 눈을 뜨고 매서운 눈빛을 보내봤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칙이 상납한 야채 샐러드만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리고 네프 님이 매일매일 당신을 찾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마. 그분은 바쁜 분이야.”

아침에 기상해서 책 보고, 검술 훈련을 해야 하고, 차를 마시고, 산책도 해야 하는 바쁘기 그지없는 분...이라고 덧붙이려다 창피한 건 아는 성인이기에 관뒀다.

그런 말을 꺼내봤자 쓸개 빠진 귀족의 생활을 보여주며 우린 한심한 귀족이야,라고 광고하는 것밖에 더 될까.

“아무리 바빠도 약속을 어길 만한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약속? 네프 님이 약속을 해?”

세상에......!

이런 천지가 개벽하고, 염소가 개구리를 잡아먹고, 라자르 왕이 웃다가 뒤집어져 절명할 그런 대 사건이......!

그 사람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은 개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했던 그 사람이 누군가와 약속을 해?

“그래. 갈아입을 옷이 없다고 하니까 같이 사러 가자고 하더군.”

아아! 하늘에 계신 어머님! 태양의 신이시여!

네프 님이 저 남자에게 같이 옷을 사러 가자고 했답니다!

손 꼭 붙잡고 장터를 돌아다니는 계집애들처럼, 그런 한심한 짓거리를 하자고 했답니다!

귀족 아가씨가 가슴을 다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아무리 유혹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사람이!

코르셋 끈이 풀어졌나 봐요, 좀 봐주시겠어요? 하고 유혹한 귀부인에게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이번 기회에 새 코르셋을 하나 장만하시죠,라고 말했다던 그 사람이!

“우와∼ 네프 님에게도 그런 자상한 면이 있었군요.”

말 많고, 탈도 많고, 사교성은 끝내주지만 머리에 들어찬 건 먹을 것과 똥밖에 없는 수행원 칙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웃었다. 유그는 바보처럼 헤실대는 수행원의 머리를 한 대 후려갈긴 뒤 조용히 야채를 씹고 있는 예르네이라는 이름의 사내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러곤 눈을 가늘게 뜬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당신, 상처가 다 나았으면 빨리 이곳을 떠나. 네프 님 몰래 말이야.”

두건 밑으로 드러난 사내의 눈이 순간 매섭게 빛났다.

“아버지의 인장을 훔쳐서라도 통행증을 만들어줄 테니까.”

사내는 잠시 유그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시선을 떨구고 얼마 남지 않은 접시 안의 야채를 모두 입 안에 우겨넣으며 우물댔다.

“알았다. 나도 더 이상 여기서 지체할 시간은 없으니까.”

네프 님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그 싸늘한 보랏빛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허리춤의 칼을 들이댈지도 모르지만, 산 채로 손가락 몇 개가 휙 하고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지만, 이게 다 그 사람을 위해서다.

“네? 예르네이 님, 떠나실 거예요? 네?”

하지만 잊고 있었다. 바로 곁에서 귀를 활짝 열어놓고 자신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쥐새끼의 존재를.

유그는 최대한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칙의 멱살을 잡고 낮게 속삭였다.

“너, 임마. 네프 님 앞에선 입도 뻥끗하지 마. 네놈은 지금 아무것도 안 들은 거야. 네프 님 앞에서 입만 놀려봐라. 네놈을 죽이고 네놈 가족까지 모두 불태워 죽여버릴 테니까.”

“저기, 저희 가족은 멘스터 변방에 살고 있거든요. 워낙 시골 사람들이라 무식하게 힘만 세서, 죽이기 전에 아마 유그 님이 먼저 죽을걸요?”

“카악! 최소한 네놈은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다, 이놈아!”

“에이, 자기 검도 제대로 못 쓰는 분이 무슨∼”

“오냐! 내가 검을 제대로 쓰나 못 쓰나 이번 기회에 한번 확인해 볼래?!”

망나니에다 집에서 아예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유그 역시 귀족이었다. 그것도 대대로 군인 집안이었던 오시예크 가의. 형제들에 비해 검술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본 것은 있어서 그럴듯하게 폼은 잡을 수 있었다.

“알았냐?! 절대 입도 뻥끗하지 마!”

“아... 네에. 아... 알았어요.”

검집에서 검을 빼내 칙의 목덜미에 갖다대고 위협하자 그제야 칙이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자식, 꼭 한 대 맞아야 말을 들어요.”

그리고 유그가 혀를 쯧 차며 검을 검집에 쑤셔넣은 그 순간, 절묘한 타이밍으로 네프가 나타났다.

긴 은발을 가지런히 묶고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곧장 자신들이 있는 ─ 정확히는 예르네이가 있는 ─ 테이블로 걸어왔다.

여관 안의 여자들과는 다른 의미로 유그의 심장이 벌렁댔다.

조금만 저 사람이 빨리 등장했더라면, 아침부터 피 볼 뻔했다.

“이런 시간에 유그, 널 볼 수 있다니 기분이 이상한걸?”

“젠장! 저 남자를 찾아왔으면 저 남자한테 아침인사나 할 것이지, 왜 또 날 걸고 넘어지는 겁니까!”

발끈해서 소리치는 유그를 여전히 감정 없는 보랏빛 눈으로 쳐다보며 네프는 가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카이라가 바람을 펴서 잔뜩 삐친 모양이군.”

“삐치긴 누가 삐쳐요! 내가 어린앱니까!”

“얼굴만 엄청 겉늙은 어린애죠, 사실은.”

꼭 낄 때 안 낄 때 다 머리를 쑥 잡아빼고 끼어드는 칙을, 유그는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댔다. 그러자 칙은 흠칫 놀라며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쓸데없이 딴청을 피워댔다.

“어째서 아침부터 그렇게 저기압인 거지? 유그?”

“지금 어째서,라고 묻는 겁니까? 당신이!”

“나 때문이란 건가?”

“애초에 당신이 뭔가에 홀린 것처럼 답지 않은 행동들을 하니까......”

유그를 똑바로 응시한 보랏빛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온몸으로 강렬한 독기를 뿜어내며, 상대를 기(氣)만으로 압도시킨다.

무서울 것 없는 철없는 어린아이라도 저런 싸늘한 눈에 응시당하면 울음을 터뜨릴 게 분명하다.

‘젠장.’

유그는 주먹 쥔 손을 약하게 떨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침식사는 아직인가?”

“아니, 이걸로 됐다. 그만 가지.”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듯 예르네이는 일부러 소란스럽게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어느 장소에서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지금도 식당 안에서 아침을 먹고 있던 손님들이 넋을 잃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유그 자신도 저 예르네이라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맹수 같은 사내와 함께 있을 때 네프의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

언뜻 보기엔 음과 양의 조화로 보일지 모르나 두 사람은 묘하게 닮아 있다.

그래서 저 사내가 싫다.

묘하게 닮은 두 사람 중 어느 하나는 당연한 듯이 또 다른 하나에 동화될 것이다. 그것이 네프일지, 저 사내일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저 사내는 안 된다.

유그는 착잡한 심경으로 식당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그는 내가 자네와 친하게 지내는 게 못마땅한가 보더군.”

네프는 예르네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높낮이 없는 평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르네이는 말없이 자신들을 피해 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가 휘청거리는 어린 소녀의 어깨를 붙잡아 주었다.

소녀는 동그란 눈으로 예르네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황급히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도망치듯 달려갔다.

“아이를 좋아하나?”

예르네이는 약하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의외군. 자네 같은 전사가 아이를 좋아하다니.”

“난 전사가 아냐.”

비꼬듯 말하는 네프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며 예르네이는 음절 하나하나에 강약을 두어 확실한 부정의 뜻을 전했다.

“난 그저 저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웃고 떠드는 아이들, 하나라도 물건을 더 팔기 위해 목청껏 외치는 가게의 상인들.

물론 눈, 코, 입 제대로 붙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저들과 다를 바 없지만 이 남자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주위를 에워싼 불쾌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를.

들짐승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듯, 사람들은 그에게서 풍기는 불온한 냄새를 눈치 채고 일부러 그가 지나는 인도를 피해 마차 길로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 말을 하려면 몸에서 풍기는 그 지독한 피비린내나 지우고 하지 그래? 평범한 사람은 자네처럼 그런 독한 살기를 내뿜으며 상대를 노려보지 않아.”

네프를 향한 두건 밑의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가라앉았다.

감정 표현이 무척이나 직선적인 남자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 꽤 노력하고 있는 듯하지만 저 눈은 너무도 솔직하다.

“내 말에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네프의 행동에 예르네이는 말없이 매서운 시선을 거두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좁은 인도를 걸었다.

선술집 주인의 말대로 꽤 큰 장이 열리는 날이라 그런지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걸을 수 있던 길이건만, 오늘은 곁에 선 네프와 어깨를 바짝 붙인 채 걷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리고 예르네이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동행자의 온기로 지금까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자신보다 작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란히 서보니 어깨가 맞부딪칠 정도로 비슷한 신장이다. 그리고 늘씬하게 뻗은 몸은 생각보다 꽤 탄탄해 보인다.

화사한 외모 탓에 귀부인처럼 섬세하고 가는 체구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검술을 배운 적이 있나?”

갑작스런 예르네이의 질문에 네프는 활처럼 휜 눈썹을 치켜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잠깐 배운 적이 있지.”

“그런가.”

몸을 단련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스스로 인식하는 사내들은 자신과 닮은꼴을 쉽게 알아채기 마련이다. 옷 속에 감춰진 그의 화사한 몸이 귀공자의 그것과는 다른 빈틈없는 탄탄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예르네이는 눈치 챈 것이다.

“언제 한번 자네와 검술 대련을 해보고 싶군.”

예르네이는 아무 말 없이 두건 밑의 미간 사이에 굵은 주름을 만들었다.

네프라는 사내는 결코 말이 많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끊겼다. 워낙 말이 없는 두 사람이기에 어느 한쪽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이 고루한 침묵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었다.

“왜지?”

“뭘, 말인가.”

“어째서 내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지?”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를 만나서일까.”

“단지 그것뿐인가?”

두건 밑의 강인한 두 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저 두 눈은 결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저 눈은 자신 외의 모든 인간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늘 매섭게 빛난다.

“글쎄. 굳이 말하자면 자네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라고 할까.”

차라리 그가 아름다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면, 이렇게 당혹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르네이는 눈을 크게 뜨고 네프를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연신 눈을 깜빡였다.

겉으로는 결코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지만, 네프는 지금 속으로 짓궂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한 남자다. 그렇기에 타인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다.

당혹을 넘어서, 가만 생각해 보니 부끄러워지기까지 한 것인가. 과묵하게 고개를 숙여 길을 걷는 예르네이의 귀는 짙은 흑장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크고, 둥근 모양을 한 적당히 보기 좋은 귓바퀴다. 저 귀에 맑은 푸른빛의 보석을 달아준다면 갈색의 피부와 동화돼 햇살에 비춰질 때마다 영롱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저 부자연스런 조화를 이루는 천박한 붉은 머리카락을 짙은 갈색으로 물들이고, 몸이 훤히 드러나는 푸른색의 얇은 옷을 입혀 귀족들의 천박한 입담이 오고 가는 사교 파티에 내보낸다면, 그의 눈빛만으로도 음탕하기 짝이 없는 귀부인들은 하반신을 축축하게 적신 채 황홀한 소리를 내며 자지러질 것이다.

“왜 그렇게 날 바라보는 거지?”

타인의 시선을 참다못한 예르네이의 질문에 네프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넨 정말 미청년이구나 싶어서 말이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는구나, 이 남자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해 주지 않았었다. 자신을 흠모하던 세이너 섬의 여자애들은 그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레이루, 그 사랑스런 아이도. 온화한 빛을 띤 커다란 눈으로 그저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레이루를 떠올리자 잊고 있던 괴로운 기억이 하나둘씩 예르네이의 몸을 잠식해 들어갔다.

수도에 와서 히이토 족에 의해 몰살된 세이너 섬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페르티잔인인 척 위장한 히이토 족의 병사들을 우연히 발견하곤, 뭔가에 홀린 듯 그들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날은 다행히 큰 비가 왔었다.

그래서 그 돼지 같은 놈들의 비명 소리도, 놈들의 더러운 피도 모두 빗속에 묻혀 사라졌다. 놈들의 칼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몸의 고통보다는 마음의 고통이 더욱 심했다. 그렇게 제대로 상처도 치료하지 않은 채 떠돌다가 듣게 된 것이 레이루에게 들은 적이 있었던 비밀 블랙 마켓이었다.

스칸데르인의 혼혈. 비록 반쯤 다른 종족의 피가 섞여 있을지 몰라도 같은 처지에 놓인 동족이다.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을 만나 자신의 절망을 함께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알아내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대대로 스칸데르인에게만 전해진다는 전설의 성지. 그곳이 위치한 곳이 어디인지를.

익숙해진 둔한 고통에 시야가 흐려진다.

땅속에서 수십 개의 손이 뻗어나와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불에 탄 세이너 섬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부모와 어린 누이, 고향 사람들의 썩어버린 손.

죽은 자의 망령이 발목을 휘감고,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린 순간, 인도를 벗어난 자신의 몸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마차 앞으로 고꾸라진다.

아아, 그래...... 죽은 자의 망령이 날 자신들의 세계로 데려가려 하는구나.

“예르네이!”

그 순간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강한 힘이 예르네이의 허리를 낚아챘다. 아슬아슬하게 마차는 예르네이의 몸을 스쳐 지나갔고, 무모하게 마차 앞으로 몸을 던진 그에게 마부가 험한 욕설을 내뱉었다.

여전히 시야는 흐리지만 강하게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남자의 손은 확실하게 보인다. 그리고 자신에게 향한, 감정을 알 수 없는 인형 같은 아름다운 얼굴도.

“괜찮은 건가?”

평소와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다.

“아아... 괜찮아.”

“얼굴색이 많이 안 좋은데.”

“그냥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을 뿐이다. 신경 쓰지 마.”

예르네이는 네프의 손을 차갑게 떨쳐내고 비틀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네프는 탄탄한 근육의 느낌이 생생히 남아 있는 손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곧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춘 예르네이의 뒤를 쫓았다.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네프라는 사내는.

마음이 잘 맞는 십년지기 친구 같으면서도 어느 한순간 깨닫고 보면 다시 저만치 떨어져 있다.

세이너 섬에서 어린 레이루와 함께 섬에서 나는 나뭇잎으로 만든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놀았던 적이 있었다.

두 아이는 서로 장난을 치며 놀다가 깜빡 잠이 들었고, 미지근한 해풍에 의해 아이들이 탄 배는 바다 멀리까지 떠밀려 와 있었다.

마치 그때와 같은 느낌이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온갖 친절을 베풀고는, 어느새 다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여자로 치자면 살롱의 마담 정도일까.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들이 바치는 온갖 사랑의 구애와 선물들을 받으며 헤프게 웃음을 팔지만 결국 자신의 마음은 결코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 고급 살롱의 간판급 스타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좀 의미가 다른데.

예르네이는 적절한 비유가 생각나지 않아 식어버린 페르티잔 식 밀크 티를 멀거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찌 됐든 적은 아닌 듯하다.

페르티잔의 귀족 같지만 처음 느꼈던 본능적인 혐오감 같은 것은 더 이상 들지 않았고, 또한 그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믿어도 될 것 같다.

무표정한 얼굴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나쁜 남자는 아니다.

거리를 떠도는 자신을 키워준 남자, 멘더는 자신에게 사람을 많이 사귀어보지 않아서 너무 쉽게 상대방을 믿는 경향이 있다며, 살기 위해선 남을 믿기보다 우선 의심부터 하라고 늘 입이 아프도록 얘기하곤 했었다.

하지만 사방에 널리고 깔린 것이 적이다.

자신이 묵고 있는 선술집 창문으로 보이는 왕궁. 그곳을 지키고 있는 잔악한 살인마 라자르. 그리고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평화로운 섬을 순식간에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버린 짐승 같은 히이토 족.

약해지면 안 된다고,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그래서 피가 흐르는 상처를 움켜쥐고 그 끔찍한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다. 배고픔과 어깨를 짓누르는 피곤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외로움은,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은 그런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최대의 요인이었다.

이 넓은 대륙에 홀로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순혈종.

예르네이는 혼자였다.

그리고 죄인이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스칸데르의 피는 앞으로도 계속 자신과 관계된 자들을 희생시킬 것이다.

네프는 꽤 괜찮은 사내다. 그리고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유그라는 이름의 청년도. 자신을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며 눈을 빛내는 유그의 수행원 칙도, 늘 졸린 듯 반쯤 감겨진 초록색 눈을 깜빡이며 자신에게 나른하게 미소지어 보이는 카이라도.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식은 밀크 티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예르네이는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산딸기 파이를 한 조각 집었다.

맞은편에 자리잡은 중년 남성들은 창밖으로 떼지어 지나가는 무장한 페르티잔의 수비대원들을 바라보며 수근대고 있었다.

“웬일이지? 수비대가 무장을 다 하고? 또 무슨 사건이라도 벌어진 건가?”

한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자 그의 친구인 듯한 사내가 손으로 입을 막고 작게 속삭였다.

“아직 모르고 있나? 국경 지방에서 설치는 히이토 족을 토벌하러 간 토벌대를, 히이토 놈들이 군법을 위배하고 극살시켰다는구만.”

사내에게서 히이토 족의 얘기가 나온 순간 예르네이는 그들의 이야기에 청각을 집중시켰다.

“극살?”

“히이토 놈들이 중죄인이나 반역죄인들을 사형시키는 방법이야.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시체를 굶주린 들짐승한테 던져줬다는군.”

“세상에. 하느님이 천노하실!”

“히이토 놈들의 그 미친 왕이 토벌대 사령관의 목을 상자에 넣어 라자르 왕에게 보냈다더군. 그래서 말이야. 어쩌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전쟁?”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스라치게 놀란 사내만큼이나 예르네이도 당황했다.

“그리고 이건 자네만 알고 있게. 궁성에서 일하는 큰딸이 그러는데, 히이토 족에게 스칸데르의 순혈종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구만.”

“무... 무슨. 스칸데르인은 모두 죽었잖나?”

“그때 우연히 살아남은 아이인 모양이야. 하여튼 라자르 왕은 그 소식을 듣고 꽤 당황하고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어째서 스칸데르인이 인질이 될 수 있는 거지?”

“어쨌든 그 소식을 들은 라자르 왕이 얼굴을 굳히고 며칠 동안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뭔가 이유가 있겠지.”

“허긴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그 미치광이가 스칸데르를 순식간에 지옥으로 만든 걸 테지.”

사내들은 차를 마시며 전쟁이 나면 대피할 장소, 히이토 족들의 잔혹성, 그 외 잡다한 자신들의 신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게 안의 공기는 청명했다.

하지만 예르네이를 감싸고 있는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순혈종.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자신 외에 또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아이가 있었던 건가.

......레이루.

어째서일까.

그 순간 레이루의 온화하게 미소 띤 얼굴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쓸데없는 망상들이 머리 위로 어지럽게 떠다닌다.

“오래 기다렸나?”

근처에 볼일이 있다면서 잠깐 자리를 비운 네프가 기척도 없이 예르네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예르네이는 흠칫 놀라 네프의 손을 쳐내곤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당장 이곳을 떠난다.”

입술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자수정빛 눈동자 역시.

“자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국경을 넘어갈 수 없어.”

“히이토 놈들과의 전쟁 소문 때문인가?”

여자들처럼 쉴새없이 수다를 떨고 있던 맞은편의 사내들이 놀란 얼굴로 예르네이를 응시했다.

“이런 데서 할 얘기가 아닌 듯하군. 가지. 자네 방으로 가서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세나.”

“내겐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난 히이토 지방으로 간다.”

소란스럽던 가게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페이란에겐 가지 않는 건가?”

“그것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 지금까지 고마웠다.”

“그렇게 멋대로 하도록 놔둘 것 같은가!”

결코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던 네프였기에 예르네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 보인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의 얼굴은 더 더욱 무서워 보였다. 깊게 주름이 패인 콧잔등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맹수의 눈동자처럼 번쩍이는 두 눈동자, 그리고 자신의 팔을 움켜쥔 강한 힘.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예르네이의 굳은 얼굴에 네프는 이내 평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의 팔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아... 미안하네. 내가 너무 흥분했었나 보군.”

예르네이는 네프에게 잡혔던 손을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가게 밖으로 나갔다.

순간이었지만 진심으로 두려웠다. 마치 보이지 않는 기분 나쁜 무언가에 꼼짝없이 붙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그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에 집어 삼켜지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예르네이는 무리지어 서서 과일을 고르는 무장한 군인들을 스쳐 지나가며, 이상할 정도로 고동치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게 안에 남겨진 네프는 맥없이 예르네이가 앉았던 자리에 주저앉아 이미 비어버린 밀크 티 잔을 들어 입가에 갖다댔다.

메마른 입술 자국이 남은 컵의 테두리 부분에서 희미하지만 그의 것이 분명한 향취가 난다.

메마른 모래의 냄새가 밴 강렬한 사내의 체취.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예르네이가 갑자기 히이토 지방으로 가겠다고 한다. 어디선가 히이토 놈들과의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알고 있다. 그가 히이토와 자신들, 페르티잔에게 묘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스칸데르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도.

똑바로 앞을 응시하는 네프의 자수정빛 눈동자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물들어 폭풍이 휘몰아치는 하늘처럼 짙은 남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이빨로 강하게 깨물자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튼다.

유그는 품에 안긴 가는 몸을 그대로 쓰러뜨리고는 매서운 눈으로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는 예쁜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놈한테 뭘 받았냐?”

“목걸이. 빛에 비추면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예뻐.”

지나치게 솔직한 게 카이라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이럴 땐 그냥 받기 싫었는데 억지로 목에 달아줘서,라든지 전에 네가 해줬던 반지보다 안 예뻐,라고 말하며 안겨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유그는 카이라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거칠게 떼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깨지기 쉬운 재질인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 위로 파편이 흩어진다.

“아까워라.”

커다란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흘끗 바라보며 카이라는 느릿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유그는 카이라의 볼을 잡고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 뒤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사랑 고백을 하듯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가 더 예쁜 걸로 사줄게.”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조금쯤 좋아해 주거나 하면 안 되냐?

볼이 짓눌려 새 부리처럼 삐죽이 솟은 입술에 살짝 키스하자 카이라는 눈을 꿈뻑이며 환장할 정도의 나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유그......”

니가 웬일이냐? 매일 곰 내지는 밝히기만 하는 색정광 따위로 날 부르더니 이름을 다 불러주고?

“왜? 카이라.”

카이라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유그는 빙긋이 웃는 낯으로 카이라의 늘어진 금발을 쓰다듬었다.

“내 방에 사는 그 사람......”

하지만 카이라의 사랑스런 입술에서 그 빌어먹을 녀석의 얘기가 나오자 다시 기분은 바닥 밑으로 급하강했다.

젠장. 이놈이나 저놈이나 죄다 예르네이, 예르네이.

갑자기 카이라를 추궁할 기분도, 화사한 몸을 안고 싶은 기분도 모두 사라져버려 유그는 카이라의 곁에 벌렁 누워 발을 까딱였다.

“그래, 그 엿 같은 놈이 왜?”

그의 불량스런 태도엔 신경도 쓰지 않고 카이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원래 이 여자는 이런 여자다. 느려터진 데다 느긋한 것만이 장점인 노인네 같은 여자.

“매일 두건을 쓰고 있잖아.”

그래, 쓰고 있지. 하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 전사들 대부분은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관례를 따르고 있는데.

“모두 다같이 유그의 성에 갔을 때 있잖아. 나 먼저 몸이 안 좋아서 집으로 왔잖아.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예르네이가 엄청 당황해서는 밖으로 도망치듯이 뛰쳐나가는 거야.”

“뭐야? 혼자 이상한 짓이라도 하고 있었나?”

카이라가 그런 자신을 흘겨보았지만 유그는 너스레를 떨며 이번엔 반대쪽 발을 까딱였다.

“그런데 방 안에 그 냄새가 가득한 거야.”

“무슨 냄새? 뭔가 밤꽃 향기 같은 그런 냄새?”

다른 아가씨였다면 작게 소리를 지르며,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그의 옆구리를 찔렀겠지만 카이라는 역시나 눈 한번 깜빡이질 않는다.

“엄청 안 좋은 냄새. 머리 염색할 때 쓰는 그거.”

“아성초 말이냐?”

“아... 응.”

“전에 내가 너한테 사다준 거였잖아. 그놈, 그거 못쓰겠네. 이젠 남의 물건에 막 손을 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매일 두건을 쓰고 다니고, 아성초로 염색을 하다가 내가 들어가자 재빨리 도망친 것 하며, 갑갑할 텐데도 늘 목까지 덮는 옷을 입는 것 말이야.”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긴 하다.

매일 머리에 뒤집어쓰는 두건,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붉은색 머리카락, 목까지 덮는 옷, 그리고 아성초.

분명 매서운 눈을 덮은 속눈썹은 짙은 색인데 어째서 머리카락 색은 저 모양인 걸까,라고 늘 그의 촌스런 색채 감각을 비웃곤 했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필요에 의해 할 수 없이 색을 바꾼 것이고, 새로 자라나는 본래의 머리카락 색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늘 두건을 쓰고 다니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말인데, 예르네이는 혹시 스칸데르인이 아닐까.”

늘어진 카이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유그는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칙이 있었다면 또 호들갑을 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을 게 분명하다.

“너, 죽고 싶지 않으면 나 외의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 그런 얘기 하지 마. 그리고 무슨 근거로 그가 스칸데르인이란 거야? 그저 비밀이 많은 은둔자일지도 모르잖아!”

“그냥... 느낌이 그래.”

“뭐야? 그게!”

“그냥......”

의미를 알 수 없는 카이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제의 주인공 예르네이가 격하게 숨을 몰아쉬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지만 침대에 나란히 누운 자신들을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다. 유그가 뒤따라 나가자, 그는 유그가 따라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문 앞에 버티고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달리기 경주라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방해해서 미안하군.”

“미안한 건 알고 있수?”

“지금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당신 때문에 기분 다 잡쳤으니, 어디 한번 그 얘기란 거나 들어봅시다.”

“히이토 족과의 전쟁 얘기로 국경을 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네 아버지의 직인이 있는 통행증이 있으면 무사 통과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오늘 밤 통행증을 만들어 내게 가져다 줘. 통행증을 받는 즉시 난 이곳을 떠난다.”

“뭐야,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건데?”

“오늘 밤 10시. 시장 중앙의 분수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럼 방 안에 있는 내 짐도 함께 부탁한다.”

“잠깐...! 어이! 이봐!”

누군가에게 쫓기듯 예르네이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난간에 기대 지켜보던 유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대체 뭐냐, 저 남자는.

물론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준다면 나나 네프 님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대체 뭐가 저렇게 급한 건지.

예르네이는 뭔가에 쫓기는 듯 사람들로 넘쳐나는 거리를 달렸다.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것만 같아서, 도저히 멈춰 설 수가 없었다.

귓가에 곱게 차려입은 소녀들의 과장된 웃음소리가 녹아든다.

─ 아성초로 염색한 머리인데 색이 꽤 예쁘게 나오지 않았니? 이번 파티엔 누구를 파트너로 데리고 올 거야? 헤이너 가의 그분, 정말 멋지지 않니?

세이너 섬 여자애들도 곧 있을 축제에 자신을 파트너로 삼으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전쟁을 벌였었다. 앳된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캡틴, 오늘은 우리 집에 오셔서 저녁을 드실 거죠?”라고 묻던 여자애들. 이제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세이너 섬과 함께 불에 타버린 가련한 아이들.

세이너 섬은 완전히 불타버렸을 것이다.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버려진 황무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레이루. 레이루. 제발, 레이루.

살아 있어줘. 만약 히이토 놈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는 스칸데르인이 너라면, 만약 신의 가호를 받아 네가 그 섬에서 살아남았다면, 내가 기필코 널 구해 줄 테니까. 제발 살아 있어줘.

레이루, 이번엔 내가 널 지킬 수 있게 해줘. 제발 부탁이야.

그 온화한 미소를 다시 한 번 내게 보여줘, 레이루.

예르네이는 인적이 없는 골목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두건 밑으로 흐른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 옷을 적신다.

난 죽지 않는다. 절대 죽을 수 없다.

쓰러지는 것은 레이루, 그 불쌍한 아이를 이 손으로 구해 내고 라자르 왕과 빌어먹을 히이토 놈들을 죽인 뒤다.

난 강하다. 난 약하지 않다. 난 해낼 것이다.

예르네이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땀이 배인 두건을 벗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검은 물을 머리 위에 쏟아놓은 듯 머리 윗부분만이 새까만 색이다.

쓰레기 냄새가 나는 외진 골목, 건물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늘어진 자신. 마치 멘더를 처음 만났던 그때 같다고 생각하며 예르네이는 실풋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날 밤 약속했던 장소에 유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네프 때문이라는 것을 예르네이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통행증이 없다면 몰래 넘어가면 그만이다. 칼과 얼마의 돈은 늘 허리춤에 차고 다녔기 때문에 선술집에 놔두고 온 짐에 미련은 없다.

그날 밤 예르네이는 거리를 떠돌던 어린 시절처럼 이제는 쓰지 않는 허름한 창고에 숨어 들어가 잠을 청했다. 두 팔로 몸을 감싸안아도 가시지 않는 추위 때문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지만, 레이루가 도화빛으로 얼굴을 붉히며 주었던 은빛 단도를 쓸며, 세이너 섬에서 있었던 즐거운 추억들을 차례로 떠올리자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동이 트자마자 예르네이는 아무 미련 없이 국경으로 향했다.

언젠가는 저 궁성의 라자르라는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이곳으로 다시 오리라.

그리고 자신이 다시 이곳을 찾는 그 순간, 이곳은 자신의 고향이나 세이너 섬처럼 피로 물든 지옥의 땅으로 변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후일 자신이 저 악귀 같은 라자르 왕을 없애고 죄 없는 페르티잔 국민들을 살육한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게 될지라도.

쾅!

엄청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의 티 세트가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깨진 도자기 파편이 바닥에 흩어졌다. 붉은 페르티잔 식 향차에 물든 파편들은 마치 눈밭 위에 피를 흩뿌리며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 같은 모습이다.

“죄송합니다.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신 겁니까? 그럼 다른 차로 대신......”

겁에 질린 하녀들은 새파랗게 변색된 얼굴로 파편을 주워 담았고,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는 수석집사 역시 꽤 당황하는 듯했다.

“모두 나가.”

“차가 싫으시다면 간단한 디저트라도......”

“모두 나가라고 했잖아!”

네프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저 무표정한 가면을 벗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건 아니다. 무표정한 가면 위에 또 다른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위화감.

그의 몸속에 악령이 깃든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하녀들과 집사가 서둘러 나가고 테라스에 유그와 단둘만이 남자 네프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그, 그에게 떠날 것을 종용한 것이 바로 너라지?”

빌어먹을 칙 녀석.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건 너무 빠르잖냐. 난 적어도 니놈이 최소한 일주일쯤은 버틸 거라 생각했는데.

“네, 제가 그랬습니다.”

이미 드러난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우스워 유그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왜지?”

“그 남자가 나타난 뒤부터 당신, 이상해졌다구요. 마치 당신의 몸속에 다른 영혼이 깃든 것처럼 두려울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구요!”

“그래서 주제도 모르고 설쳐댄 건가?”

“그 남자가 어차피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타입이 아니란 건 네프 님도 알고 계셨잖아요!”

그렇게 소리친 순간 뭔가 흰 물체가 날아와 유그의 볼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힌 물건은 산산조각났고, 사방으로 튄 파편에 유그의 볼은 자잘한 자상으로 더러워졌다. 유그는 볼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눈을 부릅뜨고 네프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저건 내가 알고 있는 네프 님이 아니다.

네프 님은 저렇게 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유리잔을 내던지는 그런 폭력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두려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타고난 우아함과 지적인 분위기를 지닌, 그런 귀공자 같은 사내였다. 내가 믿고 따랐던 네프라는 남자는.

“통행증이 없다면 국경 부근에서 무장한 군인들에게 붙잡히겠지. 어차피 돌아올 거다, 그 남자는.”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은 듯 네프는 눈을 빛내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인장을 훔쳐낸 순간 아버지에게 들켜 다음날 아침까지 반성실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리고 짐을 가지러 돌아올 줄 알았던 예르네이는 이미 수도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이상해진 것은. 알콜 중독자처럼 붉게 충혈된 눈으로 혼잣말을 하고, 차를 마시다 찻잔을 모두 뒤엎고, 침실의 시트와 커텐을 모조리 칼로 잘게 찢어놓았다. 그렇게 해도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으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무래도 그는 미친 것 같다,고 말하던 아버지와 형들의 생각은 사실이었다.

그는 미쳤다. 그 빌어먹을 붉은 머리의 전사에 의해. 갑자기 자신들 앞에 나타난 상처 입은 야수 같은 흉폭한 사내 때문에.

“용서 못 해. 용서할 수 없어. 내가 그토록 친절하게 대해 주었건만! 어째서! 어째서!”

테이블을 소리가 나도록 치며, 분한 듯 입술을 씹으며 중얼거리는 네프에게 유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된 보랏빛 눈동자.

먹물에 담가놓은 자수정처럼 탁한 남색으로 빛나고 있는 두 눈을 응시하며 유그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안았다.

“당신, 왜 이렇게 약해진 거예요. 차라리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당신이 더 나아. 나에게조차 마음을 열어주지 않던 그런 냉혹한 당신이 더 좋았어. 당신은 늘 완벽했잖아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언제나 자로 잰 듯 완벽했잖아요.”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그.”

지친 듯 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네프의 은색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부드럽게 흩어져 내렸다. 두 손을 깍지 껴 이마에 댄 채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 몸속엔 흉폭한 야수의 피가 흐르고 있어. 언젠가는 그 야수가 눈을 뜨고 날 잔악한 악귀로 만들겠지. 그리고 그 남자 역시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라면 야수로 변한 날 막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남자에게라면 내 모든 것을 의지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그는 말없이 네프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가득 드리워진 짙은 수심을, 유그는 보고도 모른 척했다.

그와 같은 시각, 석양에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얘기를 나누던 국경 수비대는 수상한 사내가 저녁을 먹고 있던 수비대원 중 하나를 인질로 잡고, 국경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득달같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입가에 스프 국물을 묻힌 채 인질로 잡힌 수비대원은 새파랗게 질린 상태로 몸을 떨고 있었다. 사건을 일으킨 남자는 마치 숲을 어슬렁거리는 야수 같았다.

190cm정도의 키에 탄탄한 체구, 칼을 쥔 투박한 손과 살기로 번뜩이는 두 눈.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 수비대장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높은 곳에서 보지 않는 이상 결코 보이지 않는 장소에 늘 포진시켜 놓고 있는 궁수들에게 눈으로 무언의 명령을 전달했다.

“당장 저 문을 열어! 난 국경을 넘어야 한다!”

흥분 상태에 빠진 저 남자에게 설득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가뜩이나 전쟁 소문으로 국경 주위가 소란스러운 요즘이었다. 뭔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긴 하겠지만 통행증 없이 국경을 넘는 것은 엄연한 범법 행위. 그것도 수비대원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사정이 있든 없든 저것은 죄인이다.

수비대장이 크게 눈을 깜빡이자, 어딘가에서 화살이 날아와 정확히 사내의 어깨를 맞추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하지만 그것이 사내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사내는 길길이 날뛰며, 인질의 머리를 움켜잡고는 젖혀진 목덜미를 단도로 사정없이 그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모두들 당혹감에 물든 얼굴로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 자신들의 동료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모두 죽여버렸어야 했어. 어차피 페르티잔, 네놈들은 그런 놈들이니까!”

어깨에 화살이 박힌 채, 사내는 엄청난 몸놀림으로 자신을 에워싼 수비대원들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새에 수비대원들은 픽픽 쓰러졌고, 그것은 일당백으로 싸워 이겼다는 전설 속의 용맹한 전사가 현신한 듯한 모습이었다.

“쏴!”

수비대장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들었고, 길길이 날뛰던 흉폭한 야수도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된 사내에게 수비대원들이 달려들어 에워싸자, 사내는 핏발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분한 듯 피가 흐르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모두... 죽여버리겠어. 모두......”

국경 지방에서 일어난 소동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진정이 되었고, 정신을 잃은 사내는 한 개 부대의 수비대원들과 함께 수도로 호송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