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르곤의 눈물 3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왕은 즐거운 듯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선물을 받아든 라자르 왕의 얼굴을 꼭 봤어야 하는 건데. 하하하! 분명 속으로 이를 갈고 있겠지?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야만족에게 그런 취급을 받고 얼마나 화가 났을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던 자존심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겠지. 하하! 그래, 라자르. 전쟁이다! 네놈의 목은 내가 꼭 거두어들이겠어!”
왕은 일부러 소리를 내 포도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리쳤다.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레이루는 흠칫 몸을 떨며 눈을 크게 치떴다.
이 남자는 미쳤다.
성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루가 보기에도 이 사내는 정상이 아닌 듯했다.
“알고 있나? 스칸데르의 아이여. 라자르 왕은 너의 존재에 더욱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내가 보낸 그 선물보다 내 손에 있는 너라는 존재가 더욱 놀라웠나 보더군.”
마스크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사내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곤 키들거리며 웃었다.
맛깔스럽게 차려진 아침은 아버지가 해주던 엉망진창의 스프보다 더욱 맛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 자체가 변한 것이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가 담긴 은접시에 비친 자신의 모습 역시 변했다.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 생기 없이 풀어진 눈, 야윈 볼.
얼마 전까지 섬의 친구들과 함께 풀밭 위에 누워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키들거리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자신은 혼자가 되었다.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자신의 편이라고는 하나 없는 황량한 이곳에서, 죽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택한 길이다.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일임을 알면서 스스로 택한 길이다.
후회하지 말자. 약해지면 안 된다.
레이루는 붉은 입술을 고집스레 깨물고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주먹을 움켜쥐었다. 왕의 한쪽뿐인 물빛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게 느껴진다. 늘 그렇듯 자신을 핥듯이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훑어보고 있을 것이다.
“스칸데르인은 아름답지. 예술을 한답시고 설치는 놈들은 죄다 너희들의 아름다움과 용맹함을 찬양하느라 바빴을 정도니까.”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난다. 그리고 구두 소리가 멈춘 순간,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손이 레이루의 턱을 들어 얼굴을 받쳐 올렸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아름다운 남색의 머리카락. 긴 속눈썹 사이로 빛나는 맑은 눈동자. 우아하게 말려 올라간 입술.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생김새지만 얼굴 한쪽을 가리는 마스크와 목과 드러난 손을 빽빽이 덮고 있는 화상의 흉터는 혐오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한다.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남은 남자라고 했다. 히이토의 새로운 왕이 된 이 남자는. 그리고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페르티잔의 라자르 왕이라고, 말 많은 시녀들은 수군거리곤 했었다.
“예쁘군. 깨끗한 순백의 피부도, 커다란 두 눈도, 가는 몸도 모두 아름다워. 작은 동물처럼 사랑스러워, 너는.”
부드럽게 얼굴을 매만져 오는 손길에 레이루는 약하게 몸을 떨었다. 그것이 사내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레이루를 응시하는 물빛 눈동자가 험악하게 굳어졌다.
“뮌은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아이라고 했지만 난 믿을 수 없어. 내가 보기에 넌 그저 겁 많은 초식동물일 뿐인데.”
부드럽게 쓸어올리던 손에 힘을 주어, 사내는 레이루의 연약한 피부에 자신의 긴 손톱을 박아넣었다.
작은 상흔과 함께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 위로 붉은 피가 스며나온다.
사내는 작은 상처를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손끝에 묻어난 붉은 선혈을 입가에 갖다대고 고양이처럼 핥았다.
“넌 피조차도 달콤하군.”
두려웠다. 이 남자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자신을 학대하다가도, 어떨 땐 지독하리만치 상냥하다.
하지만 그 어느 때든 자신을 향한 물빛 눈동자는 차갑다. 하나뿐인 눈동자는 늘 광기의 늪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아아...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넌 소중한 인질이니까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아.”
섬뜩하게 말려 올라가는 사내의 입술을 아프도록 응시하며 레이루는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달아나고 싶다. 이 미친 자들의 소굴에서 당장이라도 빠져나가고 싶다.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이 미치광이에게서 달아나 어딘가에 있을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예르네이. 붉은 머리카락으로 위장한 채 세이너 섬을 지키던, 용맹하고도 아름다운 사람.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멀리서 그 사람의 살아 있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면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텐데.
사내는 그저 겁에 질려 몸을 떨기만 하는 자신에게 질렸는지 두 사람이 있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식당의 문을 신경질적으로 박차고 나갔다.
“식사가 끝나는 즉시 그 방에 가둬둬. 저래봬도 스칸데르의 피가 흐르는 녀석이니 조심하도록.”
그리고 그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병에게 충고의 말도 잊지 않았다.
멀어지는 구두 소리를 들으며 레이루는 따끔하게 아파오는 볼의 상처를 냅킨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흰 천을 적신 장미꽃잎 같은 선혈.
강렬한 그 색채에 눈물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레이루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왕께서 엄청나게 노하셨던데.”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열리는 법이 없던 문이 빠끔히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이윽고 그리 단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의 중년 남성이 말 그대로 어슬렁어슬렁 레이루를 향해 다가왔다.
뮌이었다.
이 방에 감금된 순간부터 도무지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그래서 그 미치광이 왕이 자신이 저 남자에게 매달려 도움을 청한 것을 눈치 채고 그를 감옥에 가두거나 한 게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반가운 기분에 레이루는 커다란 눈을 생기 있게 빛내며 가까워져 오는 탄탄한 체구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다른 종족들보다 체격이 큰 히이토 족은 과장된 말로 ‘거인 족’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그것은 군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인 듯, 대신들이나 학자들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체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인으로서는 드물게 이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탄탄한 체구지만 곰 같은 덩치의 우락부락한 군인들과는 다르다.
우선 눈부터가 다른 것이다. 군인, 그것도 한 부대의 사령관이지만 가끔 보여지는 따스한 눈빛은 누군가를 닮았다.
늘 자신을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던 예르네이, 그 남자와......
“많이 야위었군. 제대로 식사는 하고 있는 건가?”
레이루는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따스한 말에 마음 한구석이 온후하게 녹아든다.
“다쳤군.”
투박한 손으로 볼의 상처를 가볍게 쓸어주는 뮌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왕께서 또 네게 손찌검을 하신 건가? 하녀들에게 들었다. 왕께서 널 학대하고 계신다고.”
“그냥 견딜 만해요....”
힘없이 중얼거리는 레이루의 말에 뮌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견딜 만하다라... 어느 누가 이유 없이 가해지는 폭력을 견딜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을 비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정직하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런 남자다. 적이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오히려 아버지같이 상냥한 그에게 의지하고 만다.
레이루는 손을 들어 뮌의 손을 잡고 악어 등가죽처럼 거친 손등을 쓸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자신을 안아줄 거라 생각했던 커다란 손은, 슬쩍 레이루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왕께서는 협상을 요청한 페르티잔에 가셨다. 꽤 오랜 일정이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너의 감시를 내게 맡기셨다.”
처음 이곳에 왔던 때처럼 매일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인가.
“아... 저......”
사과하려고 했다.
그에게 무례하게 군 것을, 그에게 무리하게 도움을 요청했던 그 일을 사과하려 했다. 솔직하게 사과하면 용서해 주고 괜찮다며 자신을 안아주지 않을까. 저 따스한 품에 안기면 괴로운 일을 잊을 수 있어 좋았는데.
하지만 무겁게 깔린 뮌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뻗어나갔던 레이루의 손은 사냥꾼에게 저격당한 새처럼 맥없이 툭 떨어졌다.
“왕께서 페르티잔에서 돌아오시면 아마도 넌 페르티잔에 인도될 거다.”
“아......”
“그리고 곧 전쟁이 날 거다. 그러니......”
“난 죽는 건가요?”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째서 난 이렇게 어린애 같은 짓만 하는 걸까.’
뮌은 굳은 얼굴로 레이루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은 솔직하다. 그래, 아마 넌 죽을 거야. 깊게 패인 눈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스칸데르인인 이상 살아남기는 어렵겠지.”
말해 버리고 싶었다.
자신은 스칸데르인이 아니라고.
이 밤의 어둠과도 같은 색의 머리는 아성초로 염색을 한 것이며, 자신에게는 스칸데르인에게 있는 초록색 별의 낙인도 없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다.
이제 와서 사실을 말해 봤자 죽는 것은 똑같다. 오히려 자신을 우롱한 죄로 그 미치광이 왕은 자신을 페르티잔의 포로들을 사형시켰던 것처럼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겠지.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선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 하지만 무서워. 죽는 건 싫어. 아프고 괴로운 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다시는 울지 않으려 했는데 주책없이 또다시 눈물이 포록포록 솟아나온다. 어떻게든 눈물을 멈추게 하려고 주먹을 움켜쥔 채 입술을 깨물었지만, 오히려 몸의 떨림이 더욱 심해질 뿐 눈물은 그치지 않고 쉴새없이 흘러내린다.
경련하듯 떨리는 어깨를 뮌의 커다란 손이 감싸안았다.
적이지만, 미워해야 할 적이지만, 자신에겐 이 남자밖에 없음을, 레이루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한 개체로서 인정해 주고, 이런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해 주는 유일한 사람.
─ 도와줘. 제발 도와줘. 난 죽기 싫어요. 죽는 건 싫어요.
매달리고 싶다.
미치광이 왕이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이 몸을 이용해서라도 그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살고 싶다는 지독한 생존 욕구보다 몸을 지배하고 있는 이성이 먼저 앞서는 것일까.
“레이루......”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고, 따뜻한 손이 눈물에 젖은 얼굴을 매만진다.
“살고 싶나?”
─ 살고 싶어. 살고 싶어. 하지만 난......
“살고 싶다면 내게 매달려라. 넌 절대 강하지 않다는 걸 내게 확인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난 널 믿을 수 없어. 네가 나약한 초식동물의 가면을 뒤집어쓴 사나운 맹수가 아니라는 것을, 내게 증명해 봐.”
말없이 레이루는 눈을 깜빡였다.
눈초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려 뮌의 손등을 적신다.
“레이루......”
어깨를 감싸 안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자 레이루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수정 같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매달려 온다.
“제발... 도와줘요. 난... 난 죽고 싶지 않아. 난 죽고 싶지 않아요......”
뮌은 레이루의 가는 두 팔을 움켜쥐고 허리를 굽혀 눈물에 젖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댔다. 한 번, 두 번. 음란한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그리고 레이루가 살며시 눈을 감자 뮌은 강한 힘으로 그녀의 몸을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고 격정적으로 시큼씁쓸한 소금 맛이 나는 보드라운 입술을 물어뜯듯이 탐했다. 짐승과도 같은 키스에 맥없이 흐느적거리던 두 팔이 느릿느릿 뮌의 두터운 몸을 끌어안는다.
품안에 안긴 작은 몸. 달큰한 체향과 뒤섞인 꽃향기. 부서질 듯 가느다란 팔.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그 미치광이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어.”
거친 숨결과 함께 속삭여지는 그 말에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잘게 떨리는 사랑스러운 몸을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고 뮌은 몸속에서 움트고 있는 폭압적인 이형(異形)의 생물에게 자신의 몸을 그대로 맡겨버렸다.
『예르네이?』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리운 인영(人影)에 레이루는 어린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의 인영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달려가도 달려가도 따라잡을 수 없는 밤하늘의 달처럼.
『예르네이! 나예요! 나, 레이루예요!』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러보지만 그의 인영은 말이 없다. 그러다가 결국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려 두 번 다시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의 인영은 여전히 아까와 똑같은 거리에서 그런 레이루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루......』
기적과도 같이 어둠 속으로 울려 퍼지는 반가운 목소리에 레이루는 다시 눈물을 왈칵 쏟으며 그의 인영을 향해 소리쳤다.
『예르네이! 그래요, 나예요!』
『잘 지내고 있니? 레이루?』
평소와 다름없는 자상한 오빠 같은 말투에 레이루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여전히 넌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그러는 당신은요? 당신은 건강히 잘 지내고 있나요?』
『......』
나도 잘 지내고 있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르네이?』
『미안하다, 레이루. 널 지켜주지 못해서.』
『괜찮아요. 난......』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던 그의 형체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널 지켜주고 싶었다, 레이루. 불쌍한 아이.』
그리고 그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져 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끝이 완전히 잠겨간다.
『가지 말아요. 예르네이. 가지 말아요! 날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
『미안......』
그 말만을 남기고 예르네이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죽은 자들의 세계처럼 고요한 정적.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감옥 속에서 레이루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오열했다. 뜨거운 눈물이 손등을 적셨지만 자신의 손조차 볼 수가 없다.
『무서워요, 예르네이. 난 어두운 게 싫어요.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아요.』
어둠 속으로 자신의 가라앉은 목소리만이 황망하게 떠돈다.
『예르네이.』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레이루는 그의 이름을 소리 내 불렀다.
『예르네이... 흐윽... 예르네이......』
눈을 뜨자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미풍에 뭔지 알 수 없는 독한 꽃향기가 섞여 들어온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끔찍한 두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 두통이 가실 날이 없다. 그것도 매일 조금씩 조금씩 강도를 더해 가 이제는 가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고통에 신음을 삼켜야 할 정도다.
일어나려는 것을 포기하고 레이루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방은 말 그대로 감옥이지만 천장을 장식한 저 그림만은 마음에 든다.
머리에 꽃을 꽂은 아름다운 여자와 그런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그녀에게 내민 귀족 청년.
두 사람의 주위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고, 사슴과 개, 토끼들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세피아색으로 수놓아져 있고, 여인을 향한 청년의 두 눈은 별빛처럼 빛나고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의 두 눈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청년이 아닌, 나무 뒤에 숨은 악기를 든 악사에게 향해 있다.
“휘르곤의 눈물이지. 저 천장화의 바탕이 된 이야기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 한구석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뮌이었다.
“휘르곤의 눈물?”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나온 자신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래. 한때 온 대륙을 누비고 다니던 유명한 떠돌이 악사가 연극을 위해 만든 얘기지.”
뮌은 침대 곁 의자에 앉아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늘어진 레이루의 여린 손을 꼬옥 맞잡은 채 천장화를 올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에 휘르곤이란 귀족 청년이 있었지. 그는 왕의 직계 혈통으로서 후일 왕의 보좌가 될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어.”
휘르곤은 훤칠한 키에 옅은 금발을 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청년이었다.
어느 날 휘르곤은 마을에 공연을 하러 온 유랑극단의 공주 역을 맡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힐테기르타.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인.
순박하고 착한 마음씨를 지닌 그녀에게 휘르곤은 구애를 했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름도 없는 떠돌이 악사였다.
어떤 값비싼 선물로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휘르곤은 그녀 몰래 자객에게 떠돌이 악사를 살해하라고 시킨다. 살해된 떠돌이 악사의 시체는 깊숙한 연못 속에 가라앉았고, 휘르곤은 떠돌이 악사가 변심해 당신을 떠난 것이라고 말하며 상심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한 힐테기르타는 시름시름 앓다가, 달이 밝은 어느 날 밤 맨발로 밤의 숲을 걸어가 연못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떠돌이 악사가 매장된 바로 그 연못에 말이다.
휘르곤은 그녀의 시체를 껴안고 오열했고, 그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자살한다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그 연극을 본 여왕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화가를 불러 자신의 방에 휘르곤의 눈물을 바탕으로 한 천장화를 그릴 것을 명령했다지. 하지만 그녀는 천장화가 완성되고 얼마 후에 전염병으로 죽고 말았어. 그리고 죽은 여왕을 대신해 젊고 아름다운 새 왕비가 이 방에 들어왔는데 그녀 역시 얼마 안 가 자살하고 말았지. 그래서 이 방은 저주받은 방이라 하여 폐쇄된 거야.”
귀족 청년은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저 떠돌이 악사를 사랑한다.
슬픈, 지독히도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그림.
“왕께선 무슨 생각으로 널 이 방에 가둬두신 건지 모르겠군.”
“내가 이 방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를 바란 것이겠지요.”
뮌은 작게 소리 내 웃으며 땀으로 늘어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그리고 피곤한 듯 눈을 깜빡이는 사랑스러운 얼굴에 살짝 키스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미치광이 왕은 꽤 오랫동안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치광이 왕 대신 뮌이 거의 매일 밤 찾아들었다.
그는 상냥했다. 그의 포옹은 부드러웠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은 따스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상냥하고 온화한 몸에서 생경하지만 어느 한편으론 익숙한 불온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학대하던 미치광이 왕에게서 느껴지던 찐득한 광기, 그것과도 닮아 있었다.
15년 전.
스칸데르에선 기적의 붉은 눈이 내렸다.
하지만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널브러진 그 누구도 부스스 일어나 기적의 눈을 내려주신 오르타 신을 찬양하지 않았다. 오직 적막만이 피를 머금은 대지 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은 살아났다. 목숨을 위협하는 큰 상처를 입었지만 기적의 붉은 눈이 그런 자신을 살아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꿈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부모와 형제들의 시체 위로 붉은 눈이 소복이 쌓여갈 뿐이었다.
너무 고요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허망한, 마치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 갇힌 것처럼 너무도 절망적이어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기력함.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이 덩어리째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여가는 느낌. 슬픔을 느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 영혼 없는 인형이 된 것 같은 느낌.
예르네이에게 있어 죽음이란 것은 그런 의미였다.
차라리 소리 내 울 수 있다면,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에 가슴을 짓누르는 덩어리가 용해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편안해질 수 있을 텐데.
매일 밤 소리 없는 절규를 하며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아파오는 심장을 움켜쥐고 밤잠을 설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고통을 잊으려 몸을 웅크리는 순간, 15년 전 기적의 붉은 눈이 내리던 그때 만났던 또래의 소년이 떠올랐다.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던 싸늘한 눈동자와 거만하고 우아한 몸짓, 귓가에 낮게 속삭여지던 달콤한 미성 따위의 단편적인 기억뿐이다.
그리고 소년은 분명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죽은 자를 저 세상으로 인도할 천사처럼 성스럽고 고결한 아름다움.
그 아이 때문에 자신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차라리 그때 그 아이가 날 적의 손에 넘겼더라면 이런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따위의 원망도 몽롱한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곧 돌덩이처럼 무겁게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다.
“저어... 유그 님. 이래도 될까요?”
칙이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감옥 주위를 지키는 무장 군인들을 둘러보았다.
“뭐가?”
“주인님이 아시면 우릴 죽이려 하실 텐데요.”
“괜찮아. 설마 자기 아들을 죽이기야 하겠냐?”
당신은 그분의 혈육이니까 괜찮겠지만 난 어떻게 하냐구요!
칙은 속으로 우는 소리를 해대며 유그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갔다.
감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다다르자 군인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고는 위압적인 얼굴로 외부인은 출입금지요,라는 판에 박힌 말을 지껄였다. 평민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유그는 늘 옷장을 가득 채운 고급 옷은 마다하고 편한 평민의 복장을 즐겨 입었다. 게다가 남자답게 보이기 위해서라며 깎지 않은 수염이 유그를 술 취한 주정뱅이쯤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죄인 하나를 데려가야 돼.”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주정뱅이의 취기 어린 농담으로 생각했는지 수비대원 중 하나가 귀찮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어허! 무례하게 감히 누구에게 반말을 찍찍 갈기는 거냐!”
오랜만에 오시예크 가문의 아들다운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저어... 유그 님. 보통 귀족들은 그런 상스런 말을 쓰지 않는다구요. 반말을 찍찍 갈기다니요! 주인님이 들으셨다면 아마 거품을 물고 쓰러지셨을 겁니다!
“두들겨 패서 쫓아내기 전에 당장 사라져!”
“난 오시예크 가문의 막내 아들, 유그ㆍ오시예크다!”
유그는 품에 고이 모셔두었던 오시예크 가문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수비대원들 앞에 흔들어 보이며 큰소리를 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수비대원들은 서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그것이 가짜가 아닌 것을 확인한 수비대원 중 하나가 즉각 태도를 바꿔 유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모...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유그 님!”
“괜찮아. 밤새 공부를 하느라 내 꼴이 말이 아니지? 몰라볼 만도 하지.”
그래도 지금 자신의 행색이 어떤지는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요.
칙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쨌든 난 아버님의 명령에 따라 여기 수감된 죄인 하나를 데려가야 해.”
“네? 오시예크 님의 명령이요? 하지만 상부에선 아무런 지시도 없었는데......”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유그는 거만하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수비대원들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타고난 귀족인지라 눈매가 꽤 위압적이다.
“아... 아닙니다. 그럼 데려가실 죄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예르네이, 국경에서 호송된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다.”
“네? 그 사내라면... 이미 상부에서 오신 분이 인도해 가셨는데요.”
유그와 칙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국경에서 수비대원 다섯을 살해하고 일곱 명을 부상 입힌 붉은 머리의 중죄인이 호송되어 감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오시예크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빼돌려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먼저 선수를 친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게 누구지?”
“네프 님이라고, 은발에 보랏빛 눈을 한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역시......
그런데 자신은 오시예크라는 든든한 뒷 배경이 있다 치더라도,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수로 군인을 살해한 중죄인을 빼갈 수 있었던 걸까. 그것도, 상부에서 직접 내려온 명령이라고 한다.
또 모르지. 궁성 내의 높은 분들과 친분이 있는 건지도.
워낙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 그가 남색가로 유명한 국무대신, 너크의 숨겨놓은 아들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네요. 예르네이 님이 살인을 하다니.”
자신이 존경하던 남자가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는 것이 칙에겐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잊었냐? 그가 지하의 홀에서 너한테 칼을 겨눴던 남자라는 걸?”
“하지만 그건 단지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잖아요.”
“바보 같은 놈. 네프 님이 아니었더라면 넌 이미 죽은목숨이야!”
“그래도......”
“이것 하나만 알아둬. 네놈의 머릿속에서 그놈이 얼마나 미화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은 전사야. 다른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악귀와도 같은 존재란 말이다.”
“저... 유그 님. 만약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실 거죠?”
제길, 애써 잊고 있었던 일을 또 생각나게 하다니.
오시예크 가문은 대대로 내려오는 군인 집안이다. 전쟁이 나면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나가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전쟁터에서 나라와 국왕을 위해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하겠지만 유그는 달랐다.
나라와 국왕에 대한 충성심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국왕은 단지 살육에 재미를 붙인 악마일 뿐, 저 히이토의 미치광이 왕과 다를 바가 없는 인물이다. 그런 악마 같은 사내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칠 필요성도, 그럴 만한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전쟁이 나면 저도 유그 님을 따라 전쟁터로 끌려가겠죠?”
“웃기는 소리. 내가 미쳤냐? 그런 개죽음을 당하게? 전쟁이 나면 난 짐 싸들고 카이라랑 너와 함께 도망칠 거다.”
스스로 생각해도 꽤 감동적인 말이건만 칙은 그런 자신을 한심해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당신은 정말 얍삽하고 비겁하네요.”
“정말 이놈의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주인 알기를 개똥으로 아나!”
유그는 칙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지금 페르티잔의 궁성에는 협상을 위해 히이토 족의 국왕이 와 있다. 하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히이토의 미치광이 국왕은 한때 자신들을 핍박했던 페르티잔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페르티잔 역시 그 선전포고를 받아들였다.
얼마 안 있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결국 라자르 왕은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그에게 중요한 것은 전쟁 따위가 아니라 국경 지방의 수비대원들을 살해한 중죄인을 몰래 빼돌린 네프의 상태였다.
꽤 괴로운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빗발치는 화살을 모두 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게다가 저지른 죄 때문에 제대로 상처도 치료받지 못하고 그 먼 길을 끌려왔을 뿐더러 어두침침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세상에!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군요.”
의사는 드러난 환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혀를 찼다.
“그래. 살아날 수 있긴 한 건가?”
“확실한 장담은 못 드립니다. 하지만 환자의 체력이 워낙에 좋고, 이 상태로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명줄은 확실히 질긴 모양이니 천운에 맡겨봐야지요.”
의사는 약초를 바른 환부에 정성스럽게 붕대를 감고 그 위에 살포시 깨끗한 시트를 덮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네프 님, 부디 조심하십시오.”
네프는 말없이 늙은 의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가끔 참기 힘든 듯 미간을 좁히는 예르네이의 남자다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겨우 이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눈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남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남자다, 이 사내는.
“예르네이.”
이름을 부르며 손으로 얼굴을 쓸자 끈적한 땀이 배어나온다.
손끝을 적신 투명한 액체를 입가에 갖다대고 혀끝으로 핥자 짭짤한 소금 맛이 느껴진다.
피와 고름으로 엉망이 된 환부, 붕대를 적시는 붉은 선혈,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래, 예르네이. 이렇게 하면서까지 국경을 넘어 히이토로 가려 했던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예르네이라는 사내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왜 스칸데르의 혼혈을 만나고 싶어하는지, 히이토와의 전쟁 소문을 들은 그가 왜 갑자기 히이토로 가고 싶어했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저 가끔 그의 눈에서 보여지는 무거운 절망에 그가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행복한 빛 속의 사람이었다면 자신은 결코 그에게 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본 순간,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냄새를 맡았기에, 그 역시 자신과 같이 어둠에 속한 동족이란 것을 깨달았기에 흥미가 생겼다.
그리고.
그가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가 자신의 곁에 지친 날개를 접고 안주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그런 감정을 갖게 된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아이러니다.
그가 곁에 있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론 그가 어느 한 곳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의 눈 속, 동공 깊숙한 곳에 각인된 깊은 절망을 보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자신은 그 절망을 사랑한다.
하나, 그가 떠나려는 이유가 자신이 아닌 다른 자를 위한 것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그의 몸을 잠식한 절망이 다른 자를 위한 것이라면, 그를 죽여서라도 자신의 곁에 두겠다.
‘나는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던가.’
몸을 갉아먹는 어두운 감정에 그저 웃음을 흘릴 뿐이다.
알고 있다. 자신의 몸속엔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수백, 수천의 억울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그들의 무덤 위에 ‘평화’라는 이름을 가장한 가식적인 도시를 세운 광인의 더러운 피가 자신의 몸속에도 똑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크레임 거리에 흐르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하천과도 같은 탁한 검은색을 띠고 있는 자신의 피는 지금 찐득한 점액질의 목소리로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있다.
─ 두 번 다시 이 남자를 놓치지 마라.
어쩌면 자신은 그토록 경멸했던 자와 같은 과오를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으로 느낀 이 감정을 일부러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놓치지 않는다.
이 남자가 있어야만 ‘그 일’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남자는 내 최고의 동반자다.
그러니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붉은색은 싫다고 생각했다.
15년 전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던 것이 하늘에서 내리던 붉은 눈이었다.
그때부터 붉은색이 싫었다.
하지만 붉은색은 자신의 몸속에 숨어 있는 잔악한 본성을 일깨워 주는 촉매제이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순식간에 고아가 돼 거리를 떠돌 때, 소년들 무리에 둘러싸인 적이 있었다. 자신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몰매를 맞았었고, 몸의 고통보다는 몸을 지배하는 치욕과 모멸감 때문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발길질을 퍼붓던 짐승의 머리를 손에 쥔 돌로 후려갈겼을 때, 사방으로 튀는 피와 함께 처음으로 피의 본능을 자각했다.
멘더는 늘 자신에게 비릿한 피의 잔향이 맴돌고 있다고 말했었다. 가끔 코를 찌르는 독한 피비린내에 몇 번이고 몸을 씻곤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내도 피비린내는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죽인 자의 망령이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 거지. 그래서 살인자들에게선 피비린내가 없어지지 않아.』
멘더, 그도 죄인이었다.
그 역시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아내를 능욕한 귀족을 살해하고 어린 레이루를 안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고 했다.
세이너 섬은 죄인의 섬이었다.
멘더뿐만 아니라 섬의 사람들 대부분이 도시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은둔자들이었다. 그들은 죄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따스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죄인이 된 나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줄 레이루가 있다.
멘더의 말대로 자신에게 달라붙은 죽은 자의 망령이 내뿜는 지독한 냄새에도 레이루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웃으며 자신을 맞아줄 것이다. 그 커다란 눈으로 온화하게 웃으며 자신을 껴안아 줄 것이다.
“뭔가 행복한 꿈을 꾼 모양이군.”
머리 위에서 들리는 싸늘한 목소리에 예르네이는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상처에서 나는 열 탓에 시야가 흐렸지만 자신을 응시하는 자수정빛 눈동자만은 똑똑히 보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사내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가.
“어떻게 된 일이지?”
“여긴 나의 성이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곳이 냄새나는 음습한 감옥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궁금한 것은 수비대원들을 살해하고 화살에 맞아 정신을 잃은 자신이, 어째서 네프의 성에 와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국경에서 수도까지 호송된 뒤 감옥에 수감되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욕지기가 절로 나올 정도의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내달린다.
“무리해서 일어나려 하지 마. 절대 안정이 중요하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네프는 예르네이의 몸을 부축해 등에 베개를 놓아주고는 편히 일어나 앉을 수 있게 해주었다.
상처를 감은 깨끗한 붕대와 청결한 시트.
하지만 곧 예르네이는 온몸의 피가 싸악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지금 자신은 알몸이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더러워진 옷을 벗겨낸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늘 쓰고 다니던 두건 역시 없다.
다행히 그동안 머리카락이 길어 목덜미는 충분히 가리고 있지만, 머리카락은... 아성초로 염색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눈치 챈 것은 아닐까.
“그렇게 당황할 거 없어. 옷이 너무 더러워져서 할 수 없이 벗겨낸 거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지 않은 것에 안도할 틈도 없이 예르네이는 또 다른 걱정거리에 미간을 좁혔다.
“날 어떻게 빼온 거지?”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가끔 이 사내 앞에선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어느 나라든 부패한 귀족은 있기 마련이지. 그저 그런 자들을 좀 이용했을 뿐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빼돌렸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군인을 살해한 죄는 무겁다. 분명 자신은 1급 죄인으로 낙인 찍힌 채 사형을 당하거나 어두운 감옥 안에서 평생을 썩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체 뭐란 말인가. 이 밑도끝도없는 자만심은.
“나흘째 자넨 계속 잠만 잤어. 의사는 생명이 위태로울 거라고 했지만 역시 내 생각대로군. 자네라면 죽음의 고비 따윈 우습게 뛰어넘을 거라고 생각했지.”
끼익 소리가 나며 침대 한쪽이 크게 기울었다. 이윽고 옅은 향기와 함께 그의 얼굴이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얼굴.
자신을 바라보는 자수정빛 눈동자가 평소와는 다른 빛으로 물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일까.
“어째서지? 어째서 그렇게 하면서까지 국경을 넘으려 했던 거지?”
어떤 변명을 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의 두 눈은 자신을 불신하고 있다. 폐부를 꿰뚫는 듯한 저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르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프 역시 그런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네프의 눈은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때론 말보다 위압적인 눈빛이 더욱 효과적일 때가 있다.
아마 의지가 약한 자였다면 저 눈에 응시당하는 것만으로 모든 진실을 실토했을 것이다.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자신에게로 뻗어온 희고 고운 손을 뿌리치려 하자, 강한 힘에 의해 허공으로 내뻗어진 자신의 손이 되려 붙잡히고 말았다.
이대로 자신의 손목을 비틀어 버릴 듯 강하게 옭아매는 손.
자신과는 달리 눈처럼 희고 아름다운.
“난 너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답 없는 친절을 베푼 것은 처음이었어. 그런데 넌 내게 인사도 없이 떠났다. 난 널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예르네이는 놀라고 말았다.
처음이었다.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무표정한 네프의 얼굴에 ‘분노’라는 감정이 내비친 것은.
자신을 응시하는 자수정빛 눈동자는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수려한 얼굴은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자신의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듯 손목을 움켜쥔 하얀 손이 약하게 떨린다.
“대체 무엇 때문에 국경을 넘으려 했던 건가! 대체 무슨 이유로 넌 스칸데르의 노예를 만나고 싶어하는 거냐! 어째서 넌 늘 그런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세상의 불행을 모두 짊어진 듯한 얼굴을 하고, 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 짓을 벌이는 거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린 갓난애처럼 네프는 쉴새없이 말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그는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왜?
어째서 그는 이토록 분노하고,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까.
상처 때문인지, 약한 미열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네프에게 잡힌 손목에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피곤했다.
그냥 좀 누워 쉴 수 있게 해주면 좋으련만.
몸이 좋아지면 어서 빨리 히이토에 가서 레이루를 구해 내야 하는데. 그 애의 따스한 미소가 보고 싶은데.
“그만 해. 내가 잘못한 것은 인정하지.”
자꾸만 감기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뜨고 귀찮다는 듯 쏘아붙이자 네프는 우악스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보라색 눈동자가 눈 속에 가득 찬다.
코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은색의 머리카락과 얼굴에 내뿜어지는 뜨거운 숨결.
짐승처럼 미쳐 날뛰는 이런 모습조차도 아름답다.
눈을 마주한 순간, 그의 눈동자 속 얼음 덩어리에 감싸인 차가운 불꽃을 보았다. 그것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푸르고, 음습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영혼을 흡수당할 것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예르네이는 손으로 네프의 얼굴을 쳤다.
그의 고운 턱이 약간 위로 치켜올랐다가 다시 부자연스런 속도로 내려오자, 그의 모양 좋은 입술에 한 줄기 선혈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흐응... 아무리 상처를 입었어도 맹수라 이건가.”
마치 그의 몸을 빌린 누군가가 그의 입술을 통해 얘기하고 있는 듯한 위화감마저 느껴졌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절제된 네프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잔뜩 가라앉은 쇳소리 섞인 저 목소리는 비열한 악당을 연상케 한다.
“넌 대체 누구지?”
스스로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서 사실을 듣지 않는 이상 도저히 자신의 몸속에 싹트는 불신감을 지워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지? 난 네가 알고 있는 네프라는 남자다. 아니지, 사실 네프라는 남자도 내 본모습은 아니야. 어쩌면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모습이 내 본모습일지도 몰라.”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네프, 저 남자가 저토록 비열하고 잔악한 얼굴로 미소짓지는 않을 것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지으며, 저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서두르지는 않겠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 너의 모든 걸 알아내고야 말 테니까.”
“내겐 할 일이 있다.”
겨우 입 밖으로 나온 자신의 목소리는 한심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넌 이제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소름 끼치는 목소리와 함께 하얀 손이 예르네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무섭도록 차가운 손의 감촉이 불쾌했지만 여전히 몸은 움직여주질 않는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매만지듯 그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자신을 응시한 두 눈은 알 수 없는 감정에 물들어 무섭게 빛나고 있다.
언젠가 자신은 이 남자를 두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마음을 터놓고 다가온 남자.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라 말하며 친절하게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사내.
적은 곧 동료가 되었고, 어느새 그는 알 수 없지만 의심할 필요는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지울 수 없듯이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불온한 공기 역시 숨겨지지 않았다.
이 사내는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내가 베푸는 친절에 그만 마음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진작 이곳을 떠났어야 했다. 아니, 그 지하의 홀에는 애초에 가지를 말았어야 했다!
“절대로 놔주지 않아. 넌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언제라도 난 떠날 수 있어.”
네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얼굴을 매만지던 끔찍한 감각이 거두어지고 자신을 향해 있던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자수정빛 눈도 멀어져 간다.
“말했듯이 난 절대로 널 놓아주지 않는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네프가 나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예르네이는 그가 서 있던 장소를 망연하게 쳐다보아야 했다.
그저 머릿속이 혼란할 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 단지 콧속을 채운 그의 향기로운 체향이 이젠 불쾌하다고 생각될 뿐이었다.
단지 흥미가 일었을 뿐이다.
지하의 어두운 홀에서, 그토록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눈을 지닌 암갈색 털의 야수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가 일었던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먼 이국 땅에서 가져온 신비로운 물건에 노골적으로 흥미를 가지듯, 자신의 이런 감정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네프는 생각했다.
그의 두 눈은 늘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다. 한시도 침잠되는 법 없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붉은 혀를 낼름거리며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한다.
네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피부에 닿았던 손이 아직도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린다. 마치 그 자체가 거대한 불꽃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사내는 뜨거웠다.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채 불타오르고 있다.
저 남자는 위험하다. 하나, 저 남자에게서 풍기는 불온한 냄새는 늘 자신의 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피비린내와도 닮았다.
유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불안해 하며 저 남자를 국경으로 보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정기적으로 의사가 찾아와 상처를 치료해 준 덕분에 몸도 이젠 많이 나아졌다. 아직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무리지만 방 안을 거니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갈색 머리의 앳된 얼굴을 한 하녀가 가져온 음식을 모두 비우고 예르네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절대 보내지 않는다는 네프의 말대로 늘 자신의 방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네프는 가끔 자신을 찾아와 쓸데없는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때 보였던 비열한 악당과도 같았던 모습은 두 번 다시 보여주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한 두 눈은 늘 어떤 감정을 띤 채 빛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가 자신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만약 다시 한 번 그가 그런 짓을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버릴 거라고, 예르네이는 생각하곤 했다.
하녀가 아침식사와 함께 가져온 새 옷은 고급품이 분명했지만, 이런 우아하고 귀족적인 옷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 남자는 왜 모르는 것일까.
창밖으로 햇살이 비치는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내리쬐는 햇살이 그립다. 발바닥을 감싸는 흙바닥의 느낌과 풋풋한 풀냄새조차도 그리워졌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곳에 갇혀 있을 이유는 없다.
아무리 자신을 감시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감시 역으로 따라붙은 놈들 한둘쯤을 처치하는 것은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상처 탓인지, 의사의 약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에 얌전히 감옥에 갇힌 죄수 흉내를 내준 것뿐.
예르네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하녀가 가져다 준 옷을 꿰어 입고 조심스럽게 문가로 다가갔다.
끼익.
자신이 조금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문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하녀가 식사를 가져다 줄 때나 네프가 올 때 외에는 결코 열리는 법이 없었던 문이다. 아마 하녀가 문을 잠그는 것을 잊은 것이리라.
쓸데없는 살상 없이 예르네이는 감옥과도 같았던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혹시 자신에게 붙여진 감시 역이 어디선가 튀어나올지 몰라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쭉 뻗은 복도엔 하녀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건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다. 마치 자신만을 남겨둔 채 모두 어디론가 떠난 듯한 기분이다.
예르네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발소리를 죽여 끝도 없이 이어진 듯한 복도를 걸었다. 걸을 때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쿡쿡 쑤셔왔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 성을 빠져나가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날 수도 있지만, 찾아야만 할 것이 하나 있다.
레이루, 그 아이가 준 단도.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한다.
“너도 봤니? 정말 무시무시하더라.”
“그래. 그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은 처음이야. 네프 님의 중요한 손님이라곤 하지만 정말 소름 끼치더라고.”
복도 끝 구석에서 들려오는 하녀들의 재잘대는 목소리에 예르네이는 황급히 대리석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아마도 성에 중요한 손님이 와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아침을 가져다 주던 하녀가 평소와는 달리 급하게 나갔던 것도 같다.
“대체 그분은 누구실까?”
“글쎄. 네프 님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접대하시는 걸 보면 꽤 높은 분이 아닐까?”
하녀들은 얘기에 정신이 팔려 기둥 뒤에 숨은 예르네이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마침내 하녀들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즈음, 예르네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체 그 단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역시 네프, 그가 가지고 있는 걸까. 그라면 순순히 단도를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그를 죽이고 단도를 빼앗아야겠지.
자신이 없앤 히이토 족과 국경 수비대원들처럼, 단칼에 그의 아름다운 목을 베어버리고, 자신은 또다시 피를 뒤집어쓴 채 역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 하얗고 하얀 아이에게.
자신에겐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자신을 위해 적진에 끌려간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기꺼이 악마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 아름다운 사내의 목을 베고, 맥없이 늘어진 몸을 바닥에 내팽개쳐야만 한다. 하지만 히이토 족과 국경 수비대원들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때와는 달리 가슴이 아파온다.
자신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남자를 죽여야 할 그 순간이 오면 칼을 쥔 자신의 손은 약하게 떨려올 것이다.
‘이런 데서 약해지면 어쩌겠다는 거냐, 예르네이. 설마 그 남자가 무서워지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알 수가 없다. 그 남자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어째서 이런 기분이 되는 것인지. 그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그를 죽이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드는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의지할 데라곤 없는 적의 소굴에서 친절하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존재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저주스러워지기라도 한 것일까.
잠시 걸음을 늦추고 생각에 잠겨 있던 예르네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잊었는가.
그 남자는 페르티잔인이다.
그는 위험한 남자다.
잊으면 안 된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은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고 미소짓던 그의 얼굴은 악마, 그 자체였다.
저 남자는 자신을 옭아매려 한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사내는 자신을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레이루를 위해서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는 그 가련한 아이를 위해서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뇌며 예르네이는 궁성 밖으로 빠져나와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의 나무숲으로 숨어들었다. 정원 너머의 작은 성이 네프가 기거하고 있는 곳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정원사가 놓고 간 듯한 작은 가위를 챙겨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이 강렬하다. 이제 곧 여름이 될 것이다.
여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부패 속도가 빨라 역한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신에게서 풍기는 피비린내는 사방에 맴도는 죽음의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곧 전쟁이 벌어질 거다. 히이토 족의 그 애송이가 감히 나에게 싸움을 걸어왔어.”
사내는 즐거운 듯 목덜미를 젖히고 웃었지만 네프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사내는 별로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아니, 되도록이면 영원히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히이토는 만만히 볼 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고 우아하게 홍차를 마시는 네프를, 사내는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온통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고, 검은색 모자를 뒤집어쓴 채 이 사내가 성에 나타났을 때 성의 하인들은 모두 도적이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네프가 보기에 이 사내는 도적 따위가 아니라 검은 날개를 펼친 사악한 악마다. 도적 따위보다 훨씬 질이 나쁘다.
무섭도록 굳은 사내의 이마와 매섭게 빛나는 눈가에 패인 굵은 주름이 사내의 나이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해주었지만, 저 두 눈만은 그 어떤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보다 생기 있게 빛나고 있다.
‘광기에 찬 악마의 눈이다, 저것은.’
대신들이 입을 모아 패기에 넘치고 용맹한 매의 눈과도 같다고 칭송하는 사내의 눈매를, 네프는 그렇게 한마디로 정의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뭘 말입니까?”
“전쟁에 대해서 말이야.”
“전쟁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요.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시신을 부여잡고 아이들은 모든 일의 원흉이 된 당신을 원망하겠죠. 그뿐입니다.”
“너는? 너 역시 날 원망하고 있지 않나.”
네프는 말없이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원망하고 있다. 지금 당장 달려들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저주해 왔고 지금도 저 남자가 밉다.
하지만 저 남자가 있기에 자신은 살아올 수 있었다.
저 남자에 대한 분노가 있었기에 자신은 강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사내 역시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위험한 맹수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는 것을 즐거운 기분으로 지켜봐 왔을 것이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실타래. 저 사내와 자신의 관계는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엉킨 실타래 같다.
“넌 커갈수록 그녀를 닮아가는군.”
네프는 일부러 사내의 시선을 피했다. 가끔 저 악마와도 같은 사내는 이렇듯 자신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미소짓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런 사내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눈을 돌렸다.
속아선 안 된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저 온화한 얼굴은 그가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깊은 눈매에 슬픔의 빛이 서려 있다고 믿게 만든다.
사내는 그런 네프의 완강한 태도에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군. 그렇게 내가 싫은 건가? 난 이래봬도 널 꽤나 사랑하고 있는데 말이야.”
웃긴 소리.
네프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일부러 소리 내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 궁성엔 히이토의 국왕이 와 있을 텐데, 이런 곳에서 한가로이 차나 마시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그깟 애송이는 대신들이 알아서 상대해 줄 거다.”
“그럼 무슨 용건이 있으시기에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하셨는지요?”
“클레이터 지방으로 가는 길에 생각이 나서 들러본 것뿐이다.”
곧 여름이 온다.
자신의 사촌 누이를 사랑했던 남자.
그녀를 잃고 미쳐 날뛰며 한 나라를 죽음의 땅으로 만든 악마.
이 남자가 사랑했던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는 여름이 다가오는 이맘때 그 저주받은 목숨을 버렸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겠다는 건가. 그녀의 피가 흩뿌려진 그 저주받은 대지 위에 주저앉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테이블 밑의 손이 약하게 떨려온다.
“그리고 티토의 말로는 국경 수비대원들을 살해한 죄인을 감옥에서 빼내갔다던데......?”
정원을 바라보며 사내는 손에 든 찻잔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침묵을 곧 긍정이라고 생각한 사내는 미소와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들었다.”
어느새 자신을 향한 사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네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이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겁니까?”
“그 남자에게 흥미가 인 게냐?”
네프의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다.
사내는 즐거운 듯 빙긋이 미소지으며 다과용 쿠키를 손끝으로 살짝 집어올렸다.
“그는 어떤 사내지? 아름다운가? 한 나라의 자존심 센 공주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던 네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라면 분명 대단한 남자겠지. 나도 한번 그를 만나보고 싶구나.”
“그에게 손대면 당신을 죽여버릴 겁니다.”
“이런이런. 이거야 원, 마치 사랑에 빠진 순진한 시골 청년 같구나.”
비꼬듯 말하며 사내는 손 안에 쥔 쿠키를 힘을 주어 부숴뜨렸다.
잘게 흩어진 쿠키 조각이 눈처럼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전 당신을 증오합니다.”
“그녀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그래.”
사내는 소리 내 웃으며 쿠키 조각이 묻은 손끝을 네프의 눈앞에 갖다대고는 위압적으로 눈을 빛냈다.
“난 네 손에 죽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너의 마음을 빼앗은 그 사내가 먼저 죽을 거야.”
맞물린 이빨이 부딪치며 묘한 소리를 낸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목구멍이 간질거렸지만, 지금의 자신은 저 사내에게 상대도 되지 않음을 알기에 매서운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언젠가는 저 사내의 목을 자신의 손으로 베어버리고, 맥없이 늘어진 추악한 육신의 껍데기를 그녀가 죽어간 대지 위에 잘게 잘라 뿌려놓을 것이다. 그것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그녀를 위로할 수 있다면, 허공을 맴돌며 통탄의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편히 잠들게 할 수 있다면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을 것이다.
“호오... 꽤 괜찮은 청년이 하인으로 들어왔군그래. 네 새로운 수행원이냐, 네프?”
비웃음을 띤 얼굴로 사내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따각따각 소리가 나도록 치며 테라스 밖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로 사내의 시선이 머문 곳을 응시한 네프는 순간 몸속의 피가 싸악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였다.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는 거친 맹수.
하지만 어째서 예르네이, 그가 이런 곳을 배회하고 있는 것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던 그가 드디어 자신들을 발견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야성의 매력이 그대로 느껴지는 매서운 눈이 뭔가에 놀란 듯 커다랗게 치떠졌다가, 이내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노골적인 살의를 띠고 무섭게 빛난다.
“저 남자로군.”
사내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젠장.’
속으로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네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몸의 상태가 꽤 좋아져서 어떤 수를 써서든 방을 빠져나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
소중하게 허리에 차고 있던 은색의 단도를 찾으러 온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심상치가 않다.
그런 네프의 예상대로 예르네이는 빠른 속도로 그들이 있는 테라스 쪽으로 뛰어들었다.
정말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가 한 손에 움켜 쥔 것은 정원용 가위로, 위력은 세지 않지만 저 남자의 손에선 그 어떤 것이든 흉악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결국 나를 죽이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인가.’
분노와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채 네프는 재빨리 몸을 틀어 허리춤에 찬 검을 빼들었다. 그와 검을 맞대고 싸우는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죽고 싶지 않다면 싸울 수밖에.
하지만 예르네이는 공격 태세를 취한 자신을 스쳐 지나, 느긋한 미소를 띤 채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째서......?!’
놀랄 새도 없이 귀를 찌르는 쇳소리와 함께 예르네이의 손에서 볼품없는 작은 정원용 가위가 떨어졌다. 연극을 감상하듯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사내가 어느새 자신의 검으로 예르네이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왜 나를 노리는 거지?”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윽박지르는 부모 같은 어투로 사내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여버리겠어!”
하지만 대답 대신 예르네이는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일갈과 함께 맨손으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너무도 쉽게 예르네이의 몸을 막아내며, 중심을 잃고 휘청대는 그의 복부를 사정없이 무릎으로 후려갈겼다.
예르네이는 억눌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지만 사내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만두십시오! 상처를 입은 몸입니다!”
예르네이의 몸을 막아선 네프를 사내는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며 검 끝을 예르네이의 목에 겨누었다.
“비켜라. 나를 죽이려 달려든 자다. 그러니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려야겠지.”
“그에게 손을 대면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우습군.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출신도 모르는 사내를 위해 네가 감히 나에게 반항을 하는 거냐?”
“때가 되면, 망설임 없이 당신의 목에 칼을 박아넣을 겁니다.”
사내는 입술을 비틀어 조소했다.
그의 말려 올라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가 물 속의 사금처럼 빛난다.
네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푸른빛으로 가라앉은 눈 속에 광인의 모습을 억지로 우겨 담았다.
그래야만 귓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비틀어진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분노의 감정과 살의를 불태울 수 있을 테니까.
『모두 죽여라! 남김없이 모두 죽여 없애!』
잔악하게 미소지은 사내는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부하들에게 호령했다. 악마의 거대한 날개처럼 일렁거리던 사내의 검은 망토 위로는 붉은 용 문양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피로 뒤덮인 얼굴로 사내는 웃고 있었다.
반항 한번 못 하고 맥없이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짓밟으며, 그는 승리감에 도취된 채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잊지 못한다.
그 잔악한 악마가 어떻게 자신들을 살육했는지.
대지를 물들이던 동족의 피가 얼마나 역한 냄새를 풍기며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는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야수의 무리를 이끈 남자를 꼭 자신의 손으로 죽여 없애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몰래 숨어 들어간 네프의 처소에서 그 사내를 보았다. 밝은 햇살을 등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악한 오라를 내뿜으며 비열하게 미소짓던 그 악마를.
죽여버리겠다!
단지 그 명령만이 몸을 지배했다.
어째서 그 남자가 이런 곳에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 남자를 죽여 없애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달려들었다. 이를 악물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을 빛내며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악마였다. 보통의 인간 따위가 아닌 자였던 것이다.
자신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적이라 생각했던 자에게 보호받고 말았다.
“이거 놔!”
참을 수 없는 자괴감과 분노에 예르네이는 팔을 움켜쥔 네프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하지만 허공으로 내쳐졌던 손은 다시 뻗어와 아까보다 더욱 강하게 팔을 옭아맨다.
“이거 놓으라고 했잖아!”
“닥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네프는 짐승처럼 울부짖듯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방금 전 빠져나온 방으로 다시 돌아온 예르네이는 네프의 억센 힘에 의해 침대 위로 내팽개쳐졌다.
믿을 수 없는 힘이다.
용수철처럼 튕기듯 일어나 사내를 노려보자, 콧잔등에 패여 있던 굵은 주름이 더욱 깊어진다.
“너무 오랫동안 방 안에 갇혀 있다 보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비꼬듯 말하는 사내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작은 가위조차도 없다.
“넌 대체 그 남자와 어떤 사이지?”
또다.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이번으로 몇 번째였던가.
“알고 싶은가?”
예르네이는 말없이 네프를 노려보았다.
“알고 싶다면 먼저 말해 봐. 어째서!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나? 그 남자는 악마야. 너 따위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악귀란 말이다!”
“알고 있어.”
“너,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건가?”
“페르티잔의 라자르 왕.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살인귀.”
시트를 움켜쥔 손이 발작하듯 떨려온다. 자신을 향했던 라자르 왕의 싸늘한 눈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어떻게 알고 있지? 그 미치광이 살인마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예르네이는 질끈 눈을 감고 쥐어짜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나의 원수다. 나의 가족과 동족을 살해한.”
그리고 감았던 눈을 다시 떠 여전히 분노라는 감정의 오라를 내뿜고 있는 사내에게 다시 한 번 반복해 묻는다.
“그 남자와 넌 대체 무슨 관계지?”
네프는 망설임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같은 피가 섞인 가족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남자는 나의 아버지란 존재이지.”
머릿속에서 15년 전 가족들을 살해하던 자들의 검은 망토가 커튼처럼 출렁이며 지나간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되뇌이며 눈을 깜빡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분노의 감정이 되었고, 지독한 살의로 바뀌어갔다.
“으아아아!”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자신은 수면 위로 박차고 올라온 야수의 본성 탓에 엄청난 기세로 네프에게 달려들었던 듯하다. 그대로 그의 몸을 깔아뭉개고,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그의 수려한 얼굴을 후려갈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을 장식한 자신의 단도를 발견하곤 그대로 낚아채 그의 심장을 겨누었다.
그 남자, 자신의 동족을 멸족시킨 악마와도 같은 남자, 그 악귀의 피가 흐르는 자다.
죽여버리겠다!
죽여버릴 테다!
“예르네이......”
하지만 부풀어 터진 그의 입술 사이로 자신의 이름이 새어나온 순간, 자신을 향한 그의 자수정빛 눈동자를 응시한 순간, 그의 심장을 겨눈 단도의 끝이 심하게 흔들려왔다. 몸을 지배한 야수의 본성이 다시 깊은 늪 속으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악마 같은 사내의 피가 흐르는 이 남자의 심장에 이대로 칼을 박아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순간에.
“그만둬. 넌 날 죽일 수 없어.”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가 차갑게 속삭인다.
죽일 수 없다.
자신은 이 남자를 도저히 죽일 수 없는 것이다.
네프는 가만히 손을 뻗어 단도를 쥔 예르네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단도가 바닥에 떨어지고 잡힌 손목이 맥없이 꺾인다.
“어째서, 어째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네프는 그의 거친 피부를 부드럽게 쓸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하지만 결코 이 남자는 자신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난......”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아파온다.
멋대로 방을 빠져나와 무모하게 그 사내에게 덤벼든 그를 추궁할 생각이었다. 왜 하필 그 남자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냐고 사납게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라자르 왕의 말대로 바보가 되어버린 것인가.
몸을 떨며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고 있는 사내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
라자르 왕에게 가족이나 동족을 잃은 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예르네이 역시 그 수많은 자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자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자신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연약한 내면을 강한 껍데기로 가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참을 수 없는 격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쳐 네프는 예르네이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품에 안긴 몸은 결코 약하지 않다. 하지만 작은 동물처럼 애처롭기만 하다.
“난... 아직도 약한 어린애야. 내겐 아무런 힘이 없어. 난 대체 어쩌면... 어떻게 하면 되지?”
네프는 말없이 약하게 떨리는 몸을 더욱 힘을 주어 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강한 체향과 함께 그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인다. 뿌리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품에 안긴 몸은 오히려 서서히 진정이 되어간다.
그가 사정없이 후려갈긴 덕분에 찢어진 입 안엔 피비린내가 가득하지만 그것은 곧 사내의 향긋한 살냄새로 변화한다.
닮은꼴이다. 이 남자와 자신은.
판에 찍어놓은 것처럼, 명암만 다를 뿐 똑같은 그림이다.
똑같이 상처 입고, 똑같이 강한 척 자신을 세뇌시키고, 똑같이 그 남자를 증오한다. 라자르라는 이름의 미치광이를.
자신과 너무도 닮은 이 남자가 안쓰럽고 애처롭다. 외롭고 고독했지만, 그 누구 하나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자신처럼 이 남자 역시 그런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네프는 어린 동생에게 하듯, 예르네이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손 안에 넣게 된 자신만의 물건을 끌어안은 양, 그의 손에는 한 치의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 실례합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선 하녀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제 자리에 붙박힌 듯 멈춰서야 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주홍빛 햇살에 비친 사람의 형체.
그대로 공기 속에 녹아들어 갈 것만 같은 가녀린 체구의 소녀.
얇은 천을 몸에 감고 창가에 선 채 소녀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어린아이처럼 여린 몸과 커다란 눈, 걸을 때마다 내비쳐지는 가늘고 긴 다리, 이마 위에서 살랑이는 검은색 머리카락.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독히도 강렬한 요부와도 같은 관능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무슨 용건이지?”
“아... 네......!”
소녀의 낮은 음성에 하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만 들고 있던 물건들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잖아.”
웃음 띤 얼굴로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하며, 소녀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하녀에게 건네주었다.
바로 눈앞에 놓인 웃음 띤 화사한 얼굴에 하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였다.
“저... 뮌 님께서 레이루 님께 새 옷을 가져다 드리라고......”
“아아......”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하녀가 내민 옷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서슴없이 그녀의 앞에서 몸을 덮고 있던 천을 벗어던진다.
얇은 천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눈부신 소녀의 나신이 드러난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쭉 뻗은 등, 가는 허리.
신체 일부분 하나하나를 정교한 솜씨로 깎아 만든 인형처럼 연약하지만 완벽한 곡선을 그리는 몸이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그 몸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관능적이다.
옷감이 스치는 가벼운 소리마저 음란하게 들려와 그녀는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을 움켜잡아야 했다. 마치 처녀의 나체를 훔쳐보는 사춘기 소년이 된 듯한 기분이다.
변했다. 이제 더 이상 저 스칸데르의 아이는 적진에 끌려와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매일같이 방을 드나드는 뮌 때문일 것이다.
소녀와 뮌의 관계는 이미 하녀들 사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분명 그 예쁘장한 얼굴로 뮌 님을 유혹했을 거라는 동료의 수군거림에 그저 웃고 말았지만, 이젠 그녀가 그런 말을 꺼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어린아이의 유약함이 그대로 남은, 지나칠 정도로 연약하고 아름다운 아이. 저 아름다운 얼굴로 유혹한다면 어떤 남자라도 쉽게 넘어가고 말 것이다.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갑작스레 들려온 소녀의 음성에 하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휘르곤의 눈물이라는 책을 읽고 싶어.”
“휘르곤의... 눈물... 이요?”
“응.”
천장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은 ‘휘르곤의 눈물’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다. 시내의 고서점 가에 널리고 깔린 게 휘르곤의 눈물에 대한 책이긴 하지만......
소녀의 부탁을 거절할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녀가 나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레이루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천장에 그려진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그림이다. 저 그림 속의 여인은 정말이지 너무도 아름답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가끔씩 느껴지는 하복부의 둔통으로 자신의 처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뮌은 매일 자신을 찾아온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는다.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괴롭다. 몸의 고통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가는 불안감이 더욱 괴롭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서 그에게 몸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늘 슬픈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사내의 몸 아래 깔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다가 결국 어느 순간, 혀를 깨물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림 속의 여인은 우수를 가득 머금은 눈으로 나무 뒤에 숨은 악사를 바라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필시 행복한 기분일 테지.
언젠가 예르네이, 그가 나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형체만이 보이던 그 사람.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미안하다라는 말만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둠이 그를 먹어버렸다. 악마가 그를 산 채로 집어삼킨 것이다.
그때부터 갈증과도 같은 불길한 예감은 더욱 심해져 갔다.
만약... 만약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가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이곳에서 남자라는 짐승에 안겨 있을 때 그는 괴로운 듯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레이루... 레이루, 미안하다......』
메말라터진 입술 사이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이미 그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버렸을지도 몰라.
꿈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늘 그의 주위를 떠돌던 어둠이 그의 몸을 뒤덮고, 형체도 없이 산 채로 씹어 삼켰는지도......
“흐윽......”
싸늘한 대지 위에 널브러져 쓸쓸하게 죽어갈 그를 떠올리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쉴새없이 흐른 눈물에 그림 속 그녀의 모습이 빛에 둘러싸인 듯 희뿌옇게 변색돼 간다.
아버지는 늘 자신에게 눈물을 아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너무 자주 울다 보면 눈물이 메말라 꼭 울어야 할 때 나오지 않게 된다고.
하지만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울보다.
슬프고 두렵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리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를 악물고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울지 않는, 그런 사람은 될 수 없다.
예르네이, 그도 가끔 먼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참곤 했었다.
차라리 울어버리면 마음이 편해질 텐데. 그의 슬픔에 잠긴 옆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은 늘 그렇게 생각하곤 했었다.
언젠가는 그가 자신의 품에 기대 마음놓고 울 수 있도록 강한 여인이 되리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예르네이,
난 어쩔 수 없는 바보에 겁쟁이인가 봐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나를 안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나약한 어린애인가 봐요.
나, 당신이 보고 싶어요.
당신을 만나면 할 얘기가 아주 많아요. 그리고 이제는 당신에게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좋아한다고. 당신이 너무 좋아 당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샘솟는다고.
지쳐 쓰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언젠가 뮌이 흥얼거렸던 노래가 떠오른다.
『그대를 사랑해요. 나의 아름다운 여인. 내게 허락된 그 소중한 시간을 함께해 준 당신을. 탐욕에 물든 나의 두 눈을 당신이란 존재로 가득 채워준 고마운 당신께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떠돌이 악사가 낡은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
아름다운 여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악사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고, 악사는 사랑스런 연인의 몸을 애무하듯 악기를 튕기며 사랑해요, 사랑해요,라고 몇 번이고 속삭여준다.
하녀가 몰래 가져다 준 낡은 책엔 악사가 그녀에게 사랑의 노래를 불러주는 그 장면에 아름다운 삽화가 삽입되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들에 둘러싸인 행복한 얼굴의 아름다운 여인과 초췌하지만 그녀를 향한 두 눈만은 맑게 빛나고 있는 떠돌이 악사.
레이루는 몇 번이고 그 삽화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어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침대에 누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천장을 장식한 그림 속의 여인은 자신으로, 나무 뒤에 숨은 떠돌이 악사는 예르네이로 변해 간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하는 청년 휘르곤은 웬일인지 뮌의 모습으로 변해 간다.
“그대를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의 아름다운 사람. 사랑해요.”
노랫소리는 적막한 방 안을 감미롭게 떠돌며 지쳐 잠이 든 아름다운 소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귓가에 맴도는 달콤한 사랑의 노랫소리에 소녀는 이곳으로 끌려온 이후 처음으로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었다.
“휘르곤의 눈물? 그 책을 그 애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네... 네에.”
하녀는 겁에 질려 가녀린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스칸데르의 포로에게는 허락 없이 어떤 것도 가져다 주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자신이다.
하지만 명령을 어긴 그녀를 탓하려는 마음은 없다.
“알았다. 그만 가봐. 그리고 두 번 다신 내 명령 없이 그런 부탁은 들어주지 말도록.”
“네... 네에, 알겠습니다.”
하녀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몇 번이고 뮌에게 인사를 한 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휘르곤의 눈물이라......
방의 천장을 장식한 그림 때문인지 레이루는 그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자신 역시 그 유치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천장의 그림을 보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것이 왜인진 잘 알고 있다.
그림 속의 휘르곤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니까.
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요즘 계속 불면증에 시달려서인지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다.
그 아이의 두 눈은 늘 뭔가를 바라고 있다. 무엇을 바라는지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망설이게 된다. 왕이 돌아오기 전까지 저 아이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건만, 자칫하면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저 사랑스러운 아이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기에 망설여진다.
그리고 아마도 저 아이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순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이다. 새장 속에서 꺼내준 자신을 남겨두고 먼 하늘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것이 두렵다. 저 아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준다는 보장이 없기에 계속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이거야 원,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애 같군.’
손가락 사이로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 누구도 마음에 품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을까.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을 히이토의 군인으로 만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특별히 그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형당해 버렸으니까.
자신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물결 따라 일렁이는 해파리처럼 출렁거리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스칸데르의 아이를 만난 것이다.
처음 본 순간 끌렸다.
청년 휘르곤이 아름다운 여인 힐테기르타를 처음 본 순간 마음을 빼앗겼듯, 자신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결코 강하지도 않은 묘한 매력의 소녀에게 한없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늪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심연의 늪에.
─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이것이 그녀에 대한 사랑인지, 자신이 소유한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집착인지.
─ 그렇다면 어째서 난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어째서 이다지도 괴로운 것일까.
그 아이의 아름다운 두 눈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잃은 그 순간보다 더 괴롭다니... 독점욕 강한 이기적인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약속이다. 소녀와 자신 사이에서 이루어진 아무런 징표도 없는 무언의 약속. 레이루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순순히 자신에게 안겼고, 자신은 그 몸을 안았다.
‘역시 서두르지 않으면......’
미간을 좁히고 신경질적으로 손에 쥔 펜을 부러뜨리며 뮌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과 함께 조금쯤 머리가 맑아지는 듯하다.
“뮌 님! 크... 큰일났습니다!”
그 순간 하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제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들이냐!”
“저... 전하께서... 전하께서 지금 막 돌아오셔서......”
“뭐? 왕께서?”
순간 머리 위로 온통 피가 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분명 페르티잔과의 회담은 나흘 정도가 더 남았는데 어째서.
“지금 전하는 어디 계시지?”
“그게... 성에 당도하시자마자 무서운 얼굴로 레이루 님의 방으로 가셨습니다!”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책상 위의 책들이 바닥 위에 엉망으로 흩어진다. 뒤에서 하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슨 말인가를 한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다.
왕을 호위했던 무장 군인들이 피곤에 지친 얼굴로 뮌에게 인사해 왔지만 그들의 인사를 받아줄 여유 따윈 없었다.
왕이 돌아왔다! 그 미치광이 왕이 돌아왔다!
활짝 열려진 레이루의 방 앞에는 무장한 군인들과 겁에 질린 하녀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미 자신과 그녀의 관계를 하녀들에게 들은 것일까.
조금 더 서둘러야 했다. 바보처럼 망설일 시간이 있었으면 그 아이의 손을 붙잡고 이곳을 떠나야 했다.
“전하!”
일부러 큰 소리를 내 방 안으로 뛰어든 뮌은 순간 그 자리에 붙박힌 듯 멈춰서야 했다.
왕에게 한 손을 잡힌 채 아이는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입술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을 적시고, 천천히 들어 올려진 하얀 얼굴은 온통 붉은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초점을 잃고 맥없이 풀린 두 눈,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은 자신을 원망하듯 흔들리고 있다.
왕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아이는 죽어 있었다. 숨은 붙어 있지만 저 두 눈은 이미 죽은 자의 눈이다.
“오오, 뮌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왕은 얼굴을 돌려 뮌에게 악당처럼 미소지어 보였다.
붉게 충혈된 두 눈과 심상치 않은 미소.
이미 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하, 오셨습니까.”
뮌은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강렬한 살의를 눌러 삼키며 아이를 붙잡고 있는 미치광이 악마에게 예를 갖추었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군그래. 내가 없는 동안 이 아이와 재미를 좀 본 모양이지?”
한 나라의 왕이 내뱉은 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저속한 말에 뮌은 미간을 좁혔다.
“뭐 어찌 됐든 좋아. 어차피 이 아이가 먼저 자넬 유혹했겠지. 저 조갯살처럼 부드럽고 고운 몸으로 말이야. 이해해. 자네도 남자니까 그 강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뮌, 그거 알고 있나?”
왕은 소녀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어, 늘어진 소녀의 가녀린 몸을 짐짝처럼 뮌의 앞에 내팽개쳤다.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소녀의 하얀 몸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양탄자 위로 쓰러진다.
“페르티잔의 대신이란 놈이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더군.”
비웃음을 띤 얼굴로 왕은 맹수처럼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쓰러진 소녀의 등에 올라타고는 몸에 걸친 얇은 옷을 잡아찢듯 벗겨냈다.
그러곤 뒷덜미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치워 레이루의 매끈한 피부를 드러내 보이며 위압적으로 물빛 눈동자를 빛낸다.
“그놈 말로는 스칸데르의 순혈종은 뒷덜미에 초록색 별의 낙인을 찍는다고 하더군. 하지만 자, 봐. 이 녀석의 목에는 아무것도 없지?”
왕의 몸 아래 깔린 소녀는 애처로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소녀의 얼굴과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목덜미를 바라본 순간, 뮌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왕의 말이 사실이라곤 믿기 힘들었다.
그래서 변명했다.
“낙인을 없애는 것쯤은 간단합니다. 이 아이를 키워준 세이너 섬의 사람들이 별의 낙인을 없애준 것인지도 모르잖습니까.”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자신을 왕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며 문가에 선 군인들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왕이 소녀의 몸 위에서 일어서자 군인들은 그 아이의 몸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시체처럼 파리한 납빛 얼굴.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은 커다랗게 확대된 동공.
소녀는 잘게 떨며 입술을 오물거려 계속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저것은 말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일종의 주문일지도 모른다.
“저게 무엇인지 아나? 아성초의 독기를 제거하는 용액이라고 하더군. 어이, 그걸 그대로 저 아이에게 부어버려.”
또 다른 무장군인이 커다란 나무통을 가져와 멀리서 소녀의 머리를 향해 뿌렸다. 눈물이 저절로 날 정도로 독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진다. 이윽고 마법처럼 정체 모를 액체를 뒤집어쓴 레이루의 머리카락 색이 변화해 간다.
밤의 어둠과도 같은 색이었던 검은색 머리카락이 빛을 뒤집어쓴 듯 밝은 갈색으로. 색을 다르게 칠한 그림 위에 덮은 또 다른 그림을 벗겨내듯이 그렇게.
‘아......’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울고만 싶었다.
검은색이 아닌 갈색의 머리카락.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목덜미.
‘그래. 그랬던 거냐? 레이루?’
“봤다시피, 이 아인 스칸데르인이 아냐. 네가 세이너 섬에서 데려온 이 아인 가짜란 말이다! 이 계집애 덕분에 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어! 날 바라보며 웃던 라자르, 그 자식의 얼굴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이게 다 자네 때문이야! 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불쌍한 레이루, 가엾고 가엾은 아이.
넌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인 거냐. 네가 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을 위해서? 네가 뒤집어쓴 스칸데르인 가면의 주인을 위해서?
불쌍한 아이다, 넌. 그리고 나 역시 불쌍한 남자다.
레이루, 너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에 대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나란 놈도 정말 가엾은 인생이다.
“하하하......”
너무도 허탈해서 웃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왕은 더욱 길길이 날뛰며 자신을 추궁한다.
“왕이시여, 이것 하나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분노에 찬 물빛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뮌은 한쪽 입술을 비끌어 올렸다. 군인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늘어진 레이루는 이런 순간에도 여전히 아름답다.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두 눈도, 이마 위에 늘어진 빛바랜 갈색 머리도.
뮌은 지친 듯한 미소와 함께 미치광이 악마를 향해 말을 씹어 내뱉었다.
“당신은 그저 미치광이일 뿐입니다. 당신은 이 나라의 왕이 될 자격이 없어! 당신은 그저 피에 미친 굶주린 짐승일 뿐이야! 저 페르티잔의 라자르 왕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 말이야!”
왕의 무섭도록 굳은 얼굴이 멀어진다.
무장한 군인들이 자신의 몸을 막아섰다.
“저 빌어먹을 자식을 당장 감옥에 처넣어!”
‘아아, 정말이지 멋진 세상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통쾌하고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하하... 하하하하하!”
그래서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미치광이 왕처럼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눈초리를 적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머리카락을 적신다.
‘멋진 세상이다. 그렇지, 레이루? 정말 살 만한 세상이야!’
마지막으로 본 군인들에게 붙잡힌 하얀 몸은, 어렸을 때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본 휘르곤의 눈물이란 그림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힐테기르타와 닮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던 그녀의 슬픔에 젖은 모습과......
어머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온화한 미소를 보는 게 좋아서 자신은 늘 그녀를 위해 들꽃을 꺾어다 바치곤 했었다.
그녀는 평화를 사랑하는 멘스터 족의 여자였다.
어느 날 그녀가 선물이라며 준 책이 휘르곤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어린 아들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책을 읽어주었다. 떠돌이 악사와 그녀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선 함께 웃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녀가 괴로워하는 장면에선 함께 눈물지었다. 그리고 미쳐버린 그녀가 연못 속으로 뛰어들던 장면에선 아예 어머니의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 울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휘르곤이 미웠다.
그녀가 사랑하는 떠돌이 악사를 죽인 그 청년이 싫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휘르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했었다. 휘르곤도 불쌍한 사람이니까 미워해선 안 된다고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었다.
어린 자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모두를 비극으로 몰고 간 그 남자가 불쌍한 것인지.
하지만 이젠 알 수 있다. 홀로 남겨진 채 쓸쓸히 자살한 휘르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지만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던 아름다운 여인. 가장 괴로웠던 것은 휘르곤,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며 그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심장이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다.
역한 토기가 밀려와 뮌은 목을 움켜쥐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감옥 안.
가끔 눈앞에 빛줄기가 지나가는 이 죽은 자의 세계에 자신이 속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눅눅한 벽을 타고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하의 고문실에서 가죽 마스크를 뒤집어쓴 고문관이 또 누군가를 잡아 족치고 있는 것이겠지. 아니, 어쩌면 지하 감옥을 떠도는 망령들의 원한에 찬 비명 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마 자신도 끔찍한 고문을 받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그저 알 수 없는 절망감에 눈물이 비어져 나올 뿐이다. 눈을 감자 공기를 울리는 낮은 비명 소리와 함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대를 사랑해요. 나의 아름다운 여인.』
어머니가 어린 자신을 안고 불러주었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
눈앞으로 여지없이 작은 빛줄기가 스쳐 지나간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하자 그것은 반딧불처럼 위잉 소리를 내며 저만치 날아가 버린다.
곧 여름이 될 것이다.
내리쬐는 햇살은 따스하다 못해 뜨거울 것이다.
하지만 이곳 지하 감옥은 한겨울처럼 춥고, 음습하기만 했다.
녹녹한 공기가 여름의 냄새를 머금고 대지 위로 피어오를 무렵,
히이토는 정식으로 페르티잔에 전쟁을 선포했고 두 나라는 국경에 군인들을 배치했다.
사람들은 가족의 손을 붙잡고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떠났고 피로 물든 대지 위에 지어진 ‘악의 왕국’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모두의 마음속엔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싹텄고, 여름을 알리는 뜨거운 공기는 벌써부터 역한 피비린내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평화로운 지방 클레이터에선 각처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을 위해 유랑극단이 마련한 작은 연극을 상연했다. 그것은 ‘휘르곤의 눈물’로, 연극을 감상하던 피난민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목숨을 끊은 가련한 여인과 휘르곤을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