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휘르곤의 눈물 5
어른들은 그를 일컬어 ‘악마의 세계에 발을 담근 자’라고 불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린 우리들은 몰랐다. 하지만 한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숲속에서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며 살아가는 그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란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른들 몰래 신대륙을 찾아 나선 모험가처럼 그의 은둔처에 숨어든 우리들은 어째서 그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화전민들의 임시 거처였다는 낡은 오두막 앞에 웅크리고 앉아, 연신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어떤 작업에 열중해 있는 사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두 눈, 푸른 안광을 내뿜으며 하던 작업을 멈추고 우리들이 숨어 있는 수풀 쪽을 똑바로 노려보는 남자의 두 눈, 그것은 짐승의 것이었다.
굶주린 맹수, 흡사 악마와도 같은 눈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남자의 벌려진 가랑이 사이에 놓인 것이 늑대의 시체이며, 남자의 두 손이 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온몸을 적실 정도로 더운 날씨였는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문대로 남자는 괴물이었다. 들짐승을 산 채로 잡아먹고, 때론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미친 곰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
겁 많은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는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피에 젖은 늑대의 털이 푸스스 공중에 흩날렸다.
남자는 한쪽 다리를 절었다. 절뚝거리며 다가서는 그 모습에 우리들은 여자애들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엎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험한 산길을 달리고, 개울을 넘고, 편평한 잔디밭을 뒹굴었다.
남자는 더 이상 우리들을 쫓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마을이 보일 때까지 뛰었다. 서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고 또 뛰었다.
등줄기가 섬뜩해져 뒤돌아보면 바로 뒤에서 그 짐승 같은 눈을 빛내며 달려들 것만 같았다. 아가리를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우리들을 씹어 삼킬 것만 같았다.
우리들은 그날 이후로 며칠간을 심하게 앓았다.
꿈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 속에서 우리들은 늑대의 목을 물어뜯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털로 뒤덮인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붉게 물든 이를 드러내며 우리들을 향해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 우리들은 사내를 ‘악마’라 불렀고 내키지는 않지만 성인이 되어선, 당시 어린 우리들에게 어른들이 그러했듯 어둠의 숲 속에 은거하는 그 사내를 ‘악마의 세계에 발을 담근 자’라고 아이들에게 일러주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작정이냐?”
아아, 밀피유 꽃 냄새다.
밀피유 열매를 따서 설탕에 절여 먹으면 맛있는데.
밀피유 술도 좋지. 잔에 따랐을 때 천리 밖까지 풍긴다는 그 향기가 죽음인데 말이야.
왜 이렇게 먹을 것만 머리에 떠오르나 싶었더니 오늘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구나.
“유그! 듣고 있는 거냐!”
역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영감이다. 영감의 호통과 함께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유그에게로 쏠렸다.
형제들과 일가친척까지 한자리에 다 불러 모아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말로는 친족 회의라곤 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회의다운 회의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영감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친척들은 이를 드러내고 짖어대고, 형제들은 그런 친척들과 맞서 싸우고.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인 그런 상황이 매년 펼쳐지는데, 싸우기 위해 모이는 것도 아닐 테고 뭐 하러 이런 쓸데없는 짓을 매년 반복하는 건지.
가끔 저 꼰대 영감의 머리를 따서 뇌를 들여다보고 싶다니까.
“유그, 다시 한 번 묻겠다. 넌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지?”
“글쎄요. 전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버님께 그게 무슨 태도냐!”
이번에 선수를 친 것은 존경하는 둘째 형님이시다.
저 꼰대 영감한테 잘 보여서 재산이나 우려내려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 중 하나다.
유그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말입니다, 형님. 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구요. 형님들처럼 검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전쟁에 나가서 쓸데없이 목숨을 걸기엔 전 아직 너무 젊잖아요? 아직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서 이대론 못 죽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고 앉아 있던 형제들의 얼굴이 불에서 갓 끄집어낸 쇳조각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오냐! 한 번 짖어봐라, 하이에나들아!
하지만 아무리 시끄럽게 옆에서 짖어봤자 내 생각엔 변함이 없어.
난 그 빌어먹을 명예 때문에 애국심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엿 같은 짓은 죽어도 못 하겠다고.
“그게 네 생각이냐, 유그?”
대 귀족 오시예크 님은 저 하이에나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말투 또한 고상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험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법이 없는 아버님.
하지만 어린 시절, 당신의 그 애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두 눈이 내게로 향하는 날이면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울곤 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유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냐. 그렇다면 별 수 없지.”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는 쉽게 자신을 포기해 버린다. 만약 어렸을 때 저 사람이 자신에게서 책을 빼앗고 강압적으로 검술을 가르쳤다면 어느 정도는 그의 의지대로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신을 방치해 두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제대로 놀 친구조차 없어 늘 성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던 자신을 미워했다.
형제들의 폭력 섞인 경멸보다 자신에게 향한 아버지의 싸늘한 두 눈이 더욱 가슴에 사무쳤던 유년 시절. 다시 옛 추억을 끄집어내 본들 무엇 하겠는가. 아무리 더듬어봐도 즐거울 것 하나 없는 기억들뿐인데.
“너의 생각은 확실히 알았다. 나가보거라.”
‘어차피 잘됐어. 이런 구역질나는 친족 회의는 고작해야 1, 2분이 한계라고.’
건달 같은 폼으로 방을 나가는 유그의 등 뒤로 형제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유그, 성을 나가서 뭘 어쩔 생각이지?”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 오시예크의 굵은 저음이 유그를 불러 세웠다.
“애인이랑 칙을 데리고 멘스터로 떠날 생각입니다. 전 전쟁이 싫거든요.”
“그래, 그것도 좋겠지.”
오시예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명심해 둬라. 이 성을 나가는 그 순간부터 넌 더 이상 오시예크 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처음이다. 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나를 붙잡아 두려 한 것은.
하지만 당신은 좀더 오래전에 이랬어야 했어.
난 이제 너무 커버려서 겨우 이 정도의 일로 감동받거나 하진 않는다고.
유그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콧속 가득 채워지는 향긋한 밀피유 냄새......
당장 선술집에 달려가 카이라와 함께 밀피유 절임을 먹어야겠다.
탕,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이놈의 집구석만큼이나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다.
“어이, 칙! 가자.”
복도에서 하녀와 함께 노닥거리고 있던 칙이 강아지처럼 유그의 뒤를 뒤쫓아왔다.
붉은 머리카락의 새로 온 하녀는 요즘 칙이 열을 올리고 있는 상대다. 얼마 전까지 사귀던 금발의 하녀가 정원사와 눈이 맞아 도망간 뒤 한동안 여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더니... 여름철 날씨만큼이나 줏대 없는 놈 같으니라고.
“에이, 조금 더 있다가 나오시지 그러셨어요. 마침 데이트 신청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저 앤 널 싫어한다고. 척 보면 모르겠냐?”
“모르시는 말씀. 저 나이 때의 여자애들은 튕기는 게 매력 아니겠어요? 저 앤 분명 날 좋아하고 있다구요.”
유그는 비웃음, 코웃음을 모두 섞어 피시식, 웃었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냐?”
“인정할 건 인정하라구요. 이 정도면 인물 괜찮지, 성격 좋지, 여자들이 날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하하하!”
참았던 웃음이 이제야 터져나온다. 찔끔 눈물이 비어져 나오고 목구멍이 간질거린다. 너무 웃어서 배꼽이 빠진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정말 배가 터질 듯이 아프고 배꼽 부분이 시큰댄다.
‘드디어 저 망할 놈의 주인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칙은 콧잔등을 긁으며 인상을 썼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친족 회의인지 문중 회의인지 뭔지에 참석하기 위해 수염을 깎고 옷을 갖춰 입은 유그에게선 그나마 귀족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과일이 속은 썩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듯 자신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칙은 미간을 좁힌 채 얼굴을 벅벅 긁을 뿐이었다.
“주인님, 오시예크 님께 혼나기라도 한 겁니까?”
결국 참다못해 칙이 말을 건네자 유그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이봐, 칙.”
“네?”
“날씨 한번 죽여주지 않냐? 이런 날에는 도시락 싸들고 피크닉이라도 가면 좋겠는데.”
유그는 난간 밖으로 머리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독수리가 삐이익,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전쟁 소식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한데 피크닉이나 가자구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아니, 뭐... 그냥 날씨가 하도 좋아서......”
유그는 눈을 깜빡였다.
눈초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 머리카락을 적신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밀피유 꽃향기......
문득 불안한 기분이 든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아니다.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국경에서 그는 사람을 죽였다. 자신의 갈 길을 막아서는 자는 가차 없이 벤다. 그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인을 죽인 죄는 크다. 종신형이거나 아무리 좋게 봐줘도 추방형이다. 듣기로는 크게 상처 입었다고 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어떤 군인의 말로는 곧 죽을 거라고도 했다.
하지만 알 수 있다.
그 남자는 살아 있다. 그렇게 죽을 위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 남자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의 대답도 알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시시각각 더해 오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가는 마음속의 잿빛 덩어리에 비한다면.
여름이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이 뜨겁다는 사실과 함께 유그는 계절이 또 한 번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꿈을 꾸었다.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릎 정도까지 쌓인 눈밭을 자신은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내린 눈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얀 산, 하얀 나무, 하얀 하늘. 눈앞이 온통 하얗기만 했다. 머릿속까지 하얗게 비어버릴 정도였다.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덤 속과도 같은 적막.
어렸을 때 유모에게 비가 내리면 소리가 나는데 눈이 내리면 왜 소리가 나지 않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도련님, 그건 말이지요. 눈은 하늘 신의 절망이라서 그렇답니다. 비는 하늘 신의 눈물이기 때문에 축축하고 소리도 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절망이란 건 무겁고, 조용하답니다.』
절망이란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 당시의 자신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리는 눈과도 같은 하얀 머리카락을 가졌던 유모의 말대로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절망은 돌덩이처럼 무겁고 고요하며, 때론 격렬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속으로 뿜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춥다, 배고프다, 따위의 감각조차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우울했다. 슬펐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밀려와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자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처럼 눈이 쌓인 산길을 헤맸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은 어린애처럼 울었다.
‘대체 난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내가 가야 할 곳은 없는데, 어째서 난 끊임없이 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것일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한 곳에 머물러 있다가는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을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움직이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편한 자기 합리화였을 뿐이다.
걷다가, 걷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은 눈이 쌓인 길을 헤맬 것이다. 모든 것이 하얀색으로 채색된 동화 속 세계와도 같은 그곳을, 신의 절망이라는 눈을 맞으며.
“네프 님, 기침하셨습니까?”
잠에서 깬 것은 한참 전이다.
네프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약한 두통에 미간을 좁히며 그는 집사의 손에서 가운을 받아 입었다.
맨몸에 닿는 보드라운 촉감의 천이 오늘따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오래전 늪 속에 빠졌을 때 몸을 휘감던 이끼처럼.
“간단한 식사와 밀크 티를 준비했습니다.”
네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눈치 빠른 집사는 주인의 수려한 얼굴에 비치는 불안정한 기운을 감지하고는 조용히 물러선다.
“데일.”
이제 중년의 나이로 접어든 집사는 놀란 기색도 없이 즉각 주인의 부름에 응답했다.
“자네에게는 딸린 식구가 있었지?”
“네. 딸 하나에 아들이 하나 있죠.”
“아들은 지금 몇 살인가?”
“며칠 전에 열다섯이 되었습니다.”
“다행이군.”
“네?”
“아직 어려서 다행이라고.”
집사는 주인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꺼낸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왕은 이번에도 나이가 찬 사내애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 대상이 열아홉 이상이 된 아이들이었기에 그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곧 이곳을 떠나야 할 거야. 자네는 아이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대피하도록 하게. 나와 관련 있다는 사실만으로 괜한 불똥이 튈지도 모르니까.”
“전 이 성을 떠날 수 없습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전 네프 님의 곁에 있겠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둬.”
“......”
집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프는 주방장이 정성껏 준비한 아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다. 테이블에 앉아 그저 망연하게 창밖을 바라볼 뿐이다.
결코 자신의 주인이 나약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집사는 늘 그가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몇 시간이고 어딘가를 바라보곤 했다.
예전에도 그런 일은 가끔 있었다.
그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성에 다녀간 뒤에는 며칠 동안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있곤 했다. 뒤엎어진 서재의 책을 정리하는 일이나 잔인하게 죽은 새를 치우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일이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수려한 얼굴과 우아한 행동, 그 뒤에 숨은 폭력적인 성향.
그것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주인의 비밀이었다.
주인은 아직 어린애다. 애정이 결핍된 비뚤어진 어린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더 더욱 주인의 곁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데일은 문가에 가만히 서서 네프의 시선이 머문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주인의 시선 끝엔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있었다. 잎이 풍성한 이름도 모르는 나무였다.
어쩌면 주인은 나뭇가지에 앉은 새 따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좀더 먼 곳, 자신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어.”
네프는 노래를 부르듯이 말을 꺼냈다.
“꿈이요?”
“응, 눈이 소복이 쌓인 산길을 정처 없이 헤매는 꿈.”
“눈이 내리는 날이라, 상당히 운치 있네요.”
“하지만 그건 악몽이야. 가도 가도 계속 같은 풍경만 보이는 거야. 보이는 거라곤 온통 흰색뿐이니 아주 미칠 지경이지. 왜 걷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꿈속의 난 계속 걷기만 해. 가끔 멈춰 서서 사무치는 외로움에 어린애처럼 울기도 하지.”
네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실풋 웃음을 흘렸다. 그는 결코 소리 내어 웃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 외의 누구에게도 저 약한 미소마저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란 걸, 데일은 잘 알고 있었다.
“난 왜 계속 같은 꿈을 꾸는 걸까, 데일? 어째서 계속 같은 곳을 맴돌면서 정처 없이 헤매는 걸까?”
그건 당신이 누군가에게 도움 받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타나 당신 손을 잡아주길 원하니까.
데일은 말을 아꼈다. 굳이 자신이 말하지 않더라도 저 총명한 사람은 언젠가는 알아챌 것이다.
“데일.”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말을 잇는 것은 저 사람의 버릇이다.
“장미 덩굴의 성에는 누가 있지?”
다른 하인들이었다면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만도 한참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그가 말하는 것이 장미 덩굴의 성에 있는 주인의 손님을 말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손님의 방 앞을 누가 지키고 있는지 묻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새로 온 마구간지기입니다.”
“마구간지기?”
네프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시골에, 그것도 거의 유폐(幽閉)된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성에 훈련된 군인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구간지기라니.
“지금 농담이라도 하려는 건가?”
“직접 보시면 알겠지만 그는 보통 마구간지기가 아닙니다.”
“그는 보통의 사내와는 달라. 자네도 잘 알고 있잖은가!”
물론 알고 있다. 네프를 찾아왔던 검은 남자, 그에게 무작정 달려들던 그 사내의 모습은 마치 맹수와도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갈색의 근육이 파도처럼 넘실대며, 두 눈을 홉뜬 채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나타난 사내. 눈앞에서 지나가는 강렬한 색채의 맹수에게 자신 역시 한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단 한 번도 야생의 맹수를 본 적은 없지만 만약 보게 된다면 저 사내와 똑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내에게는 피로 물든 전쟁터가 어울려 보였다. 그런 사내를 네프는 자신의 성에 머물게 했다. 아니, 사실은 그 남자를 일방적으로 가둬두고 있다는 편이 옳겠다.
그 사내는 위험하지만 자신의 주인 역시 위험한 존재다. 모두가 저 외모에 현혹돼 자기들 멋대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 네프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알고는 있지만 불안하다.
그는 확실히 변하고 있다. 어디선가 나타난 맹수 같은 사내가 도화선이 된 게 분명하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 사내의 존재는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데일, 만약 그가 도망치게 놔둔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가라앉은 자수정빛 눈동자를 데일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네프는 깊게 한숨을 내쉰 뒤 손짓으로 나가보라는 신호를 했다. 중년의 집사는 정중하게 인사한 뒤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더운 여름날 목까지 세워 올린 정장을 갖춰 입은 것만으로도 데일이라는 사내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집사로서는 최고지만 융통성이 없다고나 할까.
어찌 됐든 이 감옥과도 같은 성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저 정도로 주인에게 절대복종을 맹세하는 하인은 요즘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본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새로 온 마구간지기라니.
특별한 놈이라 해봤자 시골 동네에서 힘깨나 쓰고 다녔던 골 빈 애송이일 테지.
데일의 저런 행동을 보건대 문 앞을 지키고 있을 마구간지기에게 방 안에 모셔둔 ‘손님’이란 존재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말해 주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 애송이는 방 안에 갇힌 ‘손님’이 마음만 먹으면 한 손으로도 자신의 목을 따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를 언제까지고 이곳에 잡아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두 날개를 자르지 않는 이상 기운 좋은 독수리는 틈만 나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은 그 사내를 잡아두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밤의 꿈 때문인가, 아니면 더운 날씨 때문인가.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네프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꿈속에서 보았던 눈길이 다시 나타난다.
이 꿈을 꾼 뒤에는 늘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함께할 누군가가 있으니 서재의 책들을 뒤엎거나 장거리 사냥을 나가 데일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게다.
“난 여름이 제일 싫더라.”
“왜?”
“덥고 끈적끈적하잖아.”
“그래도 겨울보다는 낫잖아.”
“난 추운 게 질색이야.”
어린애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아닌가? 가만히 들어보니 성인 여성의 목소리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따분한 듯 부채를 팔랑이는 여성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덥다.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 귓바퀴에 고였다가 시트를 적신다. 목덜미가 간지러워져 손을 들려 하지만 두 팔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마찬가지다. 돌덩어리가 몸을 짓누르고 있는 듯하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방 안엔 아무도 없다. 눈을 뜬 채로 가위에 눌리고 있는 것인가?
실제로 경험이 있다. 분명 끊임없이 이어지는 악몽에서 깨어났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보이지만 소리마저 낼 수 없는 악몽의 연속.
이런 때에는 새끼발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새끼발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단순한 동작이 손가락 하나로 돌덩이를 들어올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물에 흠뻑 젖은 것만 같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청각과 시각만이 살아 있을 뿐이다. 움직일 순 없지만 눈을 굴리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질문의 대답은 곧 나왔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라면 좋았을 것을. 눈을 뜨면 이 방 안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으면.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냉정하다. 얼음처럼 차갑고 고급 살롱의 마담처럼 매정하다. 현실이란 것은 때론 지옥과도 같은 것이다.
『놔주지 않는다.』
과거라고는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 눈앞에서 재생된다.
그리고 멀쩡한 청각과 시각이 눈앞의 존재를 보고, 그 목소리를 듣는다.
똑바로 응시하는 보랏빛 두 눈. 개울 속의 사금처럼 빛나는 흰자위. 늘어진 은색 머리카락과 동공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붉은 입술. 피를 머금은 듯한 색의 입술이 벌어지자 낮은 목소리가 다시금 고막을 자극한다.
『절대로 놔주지 않아.』
아무것도 느낄 수는 없지만, 보랏빛 눈동자의 사내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분명히 그 순간, 재생된 영상 속의 사건이 일어났던 그 순간 자신의 모든 감각은 개방되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억센 힘에 의해 구속당한 채 자신은 무슨 말을 했던가.
“그만둬!” 내지는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네놈을 죽여버리겠다!”였던가.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관자놀이가 시큰하게 아파올 정도로. “대체 왜 이러는 거야?”라고 소리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자 사내는 짐승처럼 헐떡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젖은 목소리였다.
귓가에 뿜어내는 뜨거운 숨결에선 달큼한 향이 났다.
─ 놔주지 않는다.
─ 절대 놔주지 않겠어.
귓속 깊숙이 파고드는 그 목소리. 이명처럼 윙윙대며 계속 반복되던 주문과도 같던 그 말.
자신에 대한 사내의 지독하리만치 강렬한 집착은 미치광이의 독점욕과도 닮아 있다.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자신을 가두고 두 팔을 옭아매는지 알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남자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광폭하게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자신을 몰아세우던 사내를 뿌리칠 힘조차 없는 나약한 자신이 너무도 한심해서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래서 그 아이를 떠올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 아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책망했다.
악마와도 같은 그 남자, 라자르 왕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도 없애지 못했다. 그리고 라자르 왕의 혈육이라고 말하는 남자 역시 죽이지 못했다.
도저히 그 아름다운 몸에 칼을 박아넣을 수 없었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보랏빛 눈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어째서 자신은 그 남자를 죽이지 못했던 것인가. 마음을 좀더 굳게 먹었다면 그 얄팍한 가슴에 칼을 꽂아넣고, 그 피냄새에 취해 잠시 동안의 승리감에 도취될 수 있었을 텐데.
눈앞의 영상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눈꺼풀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눈초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마치 눈물 같았다. 바람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가고 얼어붙었던 손가락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름이란 계절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태양이 금빛으로 차오를 무렵 바닷가는 소년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은 상쾌하기만 했다.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마을의 한가로운 정경을 보는 것이 좋았던 그때. 그 무렵엔 자신도 바닷가를 뛰노는 소년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시의 여름은 덥기만 하다. 올해의 여름은 더 더욱.
예르네이는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들러붙은 듯 몸을 떼기가 힘겨웠다.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여서인지 몸에서 삐거덕 쇳소리가 나는 것만 같다.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선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경악한다.
미간을 좁히고 굵은 주름이 생긴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걸음마를 처음 배운 아기처럼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떼어 창가로 다가갔다.
맨몸에 덮고 있던 시트를 허리께에 둘둘 말고서, 그는 창턱에 기대서서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터진 듯 붕대에 피가 스며든다.
태양이 이글대는 정원, 건물의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여자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들은 귀부인들이 아니라 성의 하녀들인 모양이었다. 더위에 늘어진 개처럼 그녀들은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연신 손을 팔랑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원 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별장처럼 자그마한 성이 나타난다. 자신이 갇혀 있는 이곳은 장미 덩굴의 성이라고 불리는 듯하다. 늘 그렇듯 시골 사람들은 로맨틱하다.
그리고 장미 덩굴의 성 뒤로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고, 주위는 모두 허허벌판. 볼 것이라고는 아름다운 자연밖에 없는 따분한 곳이라는 하녀들의 말 그대로다.
태양이 뜨겁다.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다.
어느새 벗은 상반신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머리카락에서 땀이 흘러내려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행복했던 잠깐 동안의 기억과 함께 여지없이 따라붙는 음울한 절망의 그림자.
차라리 죽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죽어버리면 최소한 괴로운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의 죄는 죽음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미안하다고 울면서 용서를 구해도 이미 죽은 자들은 대답이 없다.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석양이 물든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나 늘 자신의 주위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떠다닌다.
독한 피비린내와 함께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과도 같은 존재들.
꿈속에서 세이너 섬의 사람들은 울부짖는다. 도와달라고 소리치며,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타들어 간다. 그리고 울부짖으며 자신을 탓한다. 몇 번이나 자신을 죽이고, 상처 입히며, 또 몇 번이나 같은 악몽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내 탓이라고, 너희들은 그렇게 말할 건가?
네프라는 사내를 끌어들인 건 바로 나니까, 그를 사지로 끌어들이려는 것도 다름 아닌 나니까.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 또한 피해자인데.
종족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을 괴로움에 발버둥치며 살아가야 하는데.
어째서 주위를 떠도는 죽은 자의 망령들은 입을 모아 모든 게 내 탓이라고, 타들어 간 흉측한 몰골로 소리치는 것일까.
『모르겠어.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단지 그 한마디만으로 그 사내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젖은 그의 자수정빛 눈동자가 똑바로 자신을 응시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움직이는 혀와 일그러진 얼굴, 창백한 이마에 맺힌 땀방울, 그런 것들이 동공 속으로 무작정 침입해 들어왔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마치 울음을 참는 어린애 같았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학자처럼 보이기도 했고, 괴로움에 신음하는 병자처럼도 보였다.
아름다운 얼굴, 자신의 땀에 젖은 얼굴을 그대로 비춰내는 맑은 자수정빛 눈동자, 늘어진 은색 머리카락에선 옅은 꽃향기가 났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늘어진 자신의 몸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팔로 버틴 채 진귀한 물건이라도 감상하듯 말이다. 하지만 물건을 감상하는 사람은 저런 얼굴을 하지 않는다.
저런 눈을 하지 않는다.
“난......”
매미가 울기 시작할 무렵 그는 입을 열었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온 목소리는 그의 눈동자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난... 대체......”
길게 내쉰 한숨과 함께 그의 말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가 일어서서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자신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매미 소리만이 시끄럽게 고막을 자극했다.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꿈은 꾸지 않았다. 몇 시간을 잤는지조차 모르겠다. 태양의 위치를 봐선 거의 하루 동안을 잠들었던 듯하다.
다시금 터진 상처가 쿡쿡 쑤셔온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말이 필요하다. 분명 마구간은 성의 가장 뒤쪽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 성의 주인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두 번 다시 자신이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인들에게 문단속을 시키고, 문 앞에 덩치 좋은 하인 몇을 세워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르네이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과 하녀들이 노닥거리고 있는 바닥의 높이를 가늠해 본다. 뛰어내리지 못할 것도 없다. 이 정도 높이라면 조금 타박상을 입는 정도일 터. 하지만 자신이 어디를 가든 사내는 자신의 뒤를 쫓아올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위해서라도 그를 죽여야 할 테지.
이번에야말로 칼을 잡은 손에 힘을 늦추지 말고, 똑바로 향해 오는 자수정빛 눈동자를 외면한 채 심장에 정확히 칼 끝을 겨누자.
사람을 죽이는 건 처음이 아니니까.
칼이 몸속에 박힐 때 그대로 느껴지는 근육의 감촉과 미세한 떨림, 억눌린 신음 소리, 그런 것들이 얼마나 황홀한 것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그는 그 악마 같은 사내, 라자르의 혈육이다. 그를 죽여야 할 정당한 이유도 있으니 더 더욱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오... 오셨습니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와 또 다른 누군가의 가라앉은 목소리.
그다. 이 성의 주인이자 자신을 가둬둔 그 남자.
예르네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식사를 담은 트레이에 나이프조차 보이지 않았다.
철컥철컥,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소리가 들리고 예르네이는 더 더욱 초조해졌다. 별수 없이 침대 난간에 길게 늘어진 커튼의 끈을 잡은 채 잔뜩 몸을 웅크렸다.
“자넨 점심이나 먹고 오도록 하게. 내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전까진 절대 문을 열지 말고.”
하인에게 당부하는 말과 함께 철컥,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열리고 긴 은발을 단정히 묶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이 기회다!
예르네이는 굽혔던 몸을 용수철처럼 튕겨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몸을 피할 새도 없이 사내는 예르네이의 억센 팔에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다. 앗, 하는 순간 팔이 뒤로 돌아가고 둔한 고통과 함께 이번엔 얇은 끈이 목을 조여온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몸놀림이긴 하지만, 직접 당하는 입장이 되면 감회가 새롭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치워버리라고 하녀들에게 신신당부했건만, 역시 그 정도로는 부족했던 걸까.
‘상처를 입었어도 맹수라 이거군.’
목을 조르는 힘엔 용서가 없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이대로라면 꼴사납게 혀를 빼문 채 절명할지도.
하지만 예르네이 역시 네프라는 사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캑캑거리며 괴로워하는 것 같더니 이내 미친 듯이 발버둥치며 달아나려 한다. 그 힘이 만만치 않아서 예르네이는 몸을 휘청거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네프가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하필 상처 입은 곳에 타격을 받고 만 예르네이는 커억, 하는 단말마와 함께 상처를 움켜쥐었다.
자유롭게 풀려난 네프는 사정없이 예르네이에게 전력을 담은 주먹을 선사했다. 이 사내에게 대충이란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 네프였다. 결국 그 커다란 몸을 휘청거리며 주저앉을 때까지 그는 일방적인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가쁜 숨을 내쉬며 예르네이는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벌레처럼 꿈틀댔다. 상처를 감싸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걸로 봐선 꽤 괴로운 듯했다. 하지만 터진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저 성격이라니......
“적당히 해. 상처 입은 사람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퍼붓는 건 내 취향이 아냐.”
고집스럽게 맞물린 입술은 열릴 생각을 않는다. 자신을 노려보는 두 눈이 더욱 매서워졌을 뿐이다.
“죽여버리겠어.”
기대했던 그대로의 말이라서 별다른 감흥은 없다.
네프는 무릎을 굽혀 예르네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양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봐 준다.
유모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감정이 드러나 있다고 말했었다.
예르네이, 이 사내의 감정이란 것은 알기 쉽다. 비록 자신에게 향한 그의 두 눈에 비친 감정이 분노일 뿐이더라도.
“그때도 말했겠지만 자넨 날 죽일 수 없어.”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때 자신의 심장에 겨누었던 칼을 그대로 박아넣기만 하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보았던 그의 두 눈은 풍랑을 만난 바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칼을 쥔 손은 떨리고 있었고, 얼굴은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고 자신의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내였다. 그런데도 그는 처음 칼을 쥔 애송이처럼 떨고 있었다.
` ─ 넌 날 죽일 수 없어.
그 단 한 마디에 그는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남자는 언제든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그때처럼 주저하고 말 것이다. 아까 목을 졸랐던 힘은 분명 엄청난 것이었지만, 끈을 다잡아 쥐었던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네프는 잘 알고 있었다.
깨문 입술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린다. 손끝으로 갈라터진 입술을 쓸었다. 피가 묻은 손가락에 혀를 갖다대 본다. 비릿한 혈향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것 외에 별다른 맛은 없다. 어렸을 때는 사람마다 피의 색과 맛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냥터에서 맛본 사슴의 피조차도 자신의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전쟁 때문에 온 세상이 다 뒤숭숭해.”
역시나 자신의 말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무슨 헛소리야? 전쟁 따위,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가늘게 뜬 두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난 곧 이곳을 떠날 거야. 전쟁 따위 관심도 없고 이런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붉은 머리카락.
저 머리카락의 감촉은 어땠지?
손을 뻗자 매몰차게 자신의 손을 뿌리친다.
“건드리지 마. 두 번 다시 내 몸에 손댔다간......”
“죽여버린다고?”
네프는 얇은 입술을 비스듬히 말아올렸다. 미소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깝다.
예르네이는 이젠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턱을 타고 피가 흘렀지만 닦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자네는 강하지만 한편으론 어린애처럼 나약해.”
갑자기 상처를 입은 부분이 쑤셔오는지 몸을 움츠리면서도 두 눈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다.
꿈 얘기를 하려고 했다. 눈이 소복이 쌓인 산길을 정처 없이 헤매던 그 꿈 이야기를.
그는 분명 관심도 가지지 않을 테지만 그걸로도 좋았다. 단지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뿐이다.
자신과 같은 절망의 무게를 양 어깨에 짊어진 그에게라면 그동안 숨겨왔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약하지 않아. 자네는 날 죽일 수 없지만 난 때가 오면 망설임 없이 자넬 죽이고 말 거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큼 무시무시한 존재는 없다. 아무리 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애송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악마적인 힘을 발휘한다.
“어째서 내게 이러는 거지?”
고된 일상에 지친 중년의 여인 같은 말투였다.
그는 늘 지쳐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지쳐 헐떡이면서도 그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눈이 쌓인 산길을 헤매던 자신처럼.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곳이 있다. 그런데도 길 잃은 아이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이 따끔따끔 아파온다.
네프는 눈을 깜빡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에게 속삭였던 것과 같은 말을 다시 반복한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는지.
무책임한 말이란 것은 알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자신을 바라보는 암갈색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살기와는 또 다른 감정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때, 그런 상황이 되면 오히려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니까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내겐 시간이 없어.”
알고 있어. 자네는 늘 바쁘지.
“실수는 더 이상 없어. 다음번엔 꼭 네놈의 목숨을 가져가 버릴 테니까.”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자네를 놓아달라고, 그렇게 말하려는 건가?”
“길게 말하진 않겠어.”
“내가 만약 자네를 놔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죽는다.”
“자넨 날 죽일 수 없어.”
“너처럼 나 역시 때가 오면 망설임 없이 널 죽일 수 있을 거야.”
의미 없는 대화에 슬슬 염증이 나기 시작한다.
죽인다, 죽이지 못한다, 그런 것이 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사람을 죽여본 자에게 죽여버린다는 협박은 무의미하다. 어린 여자애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달려드는 일만큼이나 우습고 하찮은 일인 것이다.
네프는 예르네이의 상처 입은 어깨를 강하게 짓눌러 움직일 수 없게 한 뒤, 땀 냄새가 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푸석푸석한 모래 같은 감촉, 혀로 머리카락 끝을 말자 비릿한 흙냄새가 난다.
그는 고통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무릎으로 상반신을 쳐올리자 목이 졸린 동물 같은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예르네이는 그르렁그르렁 목울대를 울렸다. 말하기조차 힘든 모양이다. 이미 붕대는 쥐어짜면 핏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젖어 있다.
“난 자네와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이야기...... 그래, 꿈 얘기를 하고 싶었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때가 있어.
쓸데없는 얘기로 밤을 새우는 여자들처럼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잠조차 오지 않을 때.
네프는 예르네이의 몸을 침대의 기둥에 기대게 했다. 이젠 살기를 내뿜는 것조차 힘겨운지 두 눈은 께느른하게 풀려 있다. 초점이 흐려진 두 눈은 여전히 자신에게 향해 있다.
좋은 기분이다.
죽여야 할 적이든, 아군이든 간에 어쨌든 저 포악한 살쾡이의 눈엔 자신의 존재가 머물러 있으니까.
“히이토의 그 바보 같은 국왕이 협박을 했다더군.”
꿈 얘기를 꺼내고 싶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그래도 히이토의 얘기가 나오자 그의 눈에 빛이 돌아온다.
그에겐 독한 살기가 어울린다. 지금 자신의 행동은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못된 장난을 해대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 그것이 꿈 이야기든 히이토의 국왕에 대한 이야기든 상관없다.
“자신의 수중에 스칸데르의 유일한 순혈종이 있다고. 뭐, 자네도 알겠지만 이 나라의 각다귀 같은 왕은 스칸데르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하지. 하지만 역시 바보더군. 그놈은 순혈종 스칸데르인의 특징조차 모르고 있었어. 목 뒤에 자리잡은 초록색 별의 낙인이라든지, 뭐 그런 거 말이야. 왕이 비웃으며 말하자 그놈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렸지. 우린 지금 그런 바보 같은 놈과 전쟁을 하려는 거야. 우습지 않나?”
하지만 그는 전혀 우습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은 출혈이 심한 탓만은 아닌 듯하다.
“레이루......”
떨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이 아닌 다른 먼 곳을 바라보며, 떨리는 몸을 감싸안은 채 계속 그 이름만을 반복해 중얼거린다. 확대된 그의 두 동공은 이제 자신을 비추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레이루......
여자, 혹은 남자의 이름.
그 사람은 저 남자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다.
어쩌면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인지도.
삐걱거리는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유...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어딘가로 향하는 이유......
혹은 저 남자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
영원히 잡아둘 수는 없다.
목숨을 빼앗고 그 영혼을 자신의 소유로 하기 전까지는 결코 저 강인한 야수는 자신의 곁에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기분이 우울해지면 방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유그나 데일과는 다른, 확실히 다른 존재다.
아군, 적, 그런 것으로 나눌 수 있을 만한 존재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자신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가.
유그에게는 카이라가 있고, 데일에게는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카이라와 데일의 아이들에게 질투를 하진 않는다. 그들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곁에 두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째서 넌, 너라는 남자는 나를 이렇게 옹졸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일까?
질투라는 우습지도 않은 감정이 지금껏 쌓아왔던 바리케이트를 허물어버리게 만드는 건지. 분노에 찬 두 눈은 자신을 향해 있지만 더 이상 자신만을 비추고 있지는 않다.
보인다,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레이루라는 이름의, 저 남자의 소중한 존재가.
동공 깊숙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 뒤로 가증스럽게 미소지으며 서 있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에게도 말했듯이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몸을 지배하는 독한 감정,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것의 정체는 대체......
“우윽......!”
낮게 울리는 신음 소리에, 네프는 자신의 손이 예르네이의 상처 입은 어깨에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손에서 힘을 뺐다. 그는 둔통이 느껴지는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피로에 지쳐 핏발이 선 눈으로 네프를 노려보았다.
아몬드형의 맹금류와도 같은 눈이다. 그 노골적인 시선이 지금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자네, 블랙 마켓에서 팔린 스칸데르의 혼혈 노예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았나. 소문으로는 히이토의 페이란이 그 노예를 아주 마음에 들어해서 함께 북부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는군. 전쟁 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도피한 거겠지.”
말없이 응시하기만 하는 예르네이의 가라앉은 눈빛에, 네프는 일부러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계속 입을 놀렸다. 시선을 마주하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방황하고 있는지 들켜버리고 말 것이다.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그가 간파해 버리고 말 것이다.
머릿속 어딘가에 벌레가 사는 것 같다고 말하던 남자가 있었다.
“매일 밤 그 녀석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머릿속 내용물을 갉아먹는다니까.”, 건망증이 심하다고 구박을 하는 아내에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남자의 이름은 뭐였지?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파이를 기가 막히게 굽는 아내를 둔 그 남자......
하나둘씩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져 간다. 세이너 섬의 사람들과 스칸데르의 사람들. 늘 자신에게 파이를 구워주던 여자의 얼굴도, 심지어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에도 벌레가 사는 것 같다. 으드득으드득 소리를 내며 즐거웠던 추억만을 갉아먹는.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어째서 고통이란 것은 늘 새로운 것일까.
하지만 몸의 고통보다 더 괴롭고 힘든 것이 있는데 그건 정신적 고통이다.
죽은 자들에 대한 그리움, 죄책감, 그런 것들 때문에 한시도 즐거워질 수가 없다. 행복해지는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일까? 아니, 그런 문제를 떠나서 이제 더 이상 사심 없이 미소를 지을 수는 없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단잠에 빠져들거나 샌드위치를 먹으며 먼 바다를 감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네프라는 사내는 히이토의 페이란이라는 귀족의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어느 순간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마치 무언가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가끔 그 사내는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행동들을 하거나, 불안에 떨면서 눈을 굴리며 초조함을 나타낸다.
그의 행동에는 일관성이란 게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평정을 가장한 일류 기사로도 보이는 한편, 미치광이로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라자르 왕의 혈육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그 악마의 소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의 일련의 행동들을 정당화시킨다. 나도 모르겠어,라는 말로 그가 자신의 혼란을 정당화시켰듯이.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져 온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뇌 속에 저장된 기억들을 갉아먹는 벌레는 바쁘게 움직이며 주린 배를 채운다.
바람결에 살랑대는 하얀 커튼이 그리운 소녀의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같다. 해사하게 미소지으며 태양빛이 작렬하는 바닷가에 서서 자신을 손짓해 부르던 소녀.
황금색 빛이 팡,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리고 빛과 함께 창가에 미소지으며 서 있던 소녀의 영상도 사라져간다.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두 팔은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눈을 감자, 스커트를 팔랑이며 백사장을 뛰어다니는 가녀린 소녀의 영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잠이 그의 눈을 무겁게 짓눌렀다.
“유그 님!”
“이거 놔!”
“네프 님이 당분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시끄러워! 겨우 그런 이유로 멀리서 달려온 날 문전박대하려는 거냐!”
제멋대로인 오시예크 가의 도련님은 길길이 날뛰며 하녀들의 손을 뿌리쳤다. 하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넘어질 듯 비칠거리며 유그를 막아보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네프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늘 이 시각이면 창가에 기대앉아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겨 있곤 했던 그는 방 안에 없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분명 방 안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녀들 역시 주인의 부재에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서재에 있는 건가?”
“아뇨, 방금 전에 서재를 청소했는데 거기엔 안 계셨었어요.”
“사냥을 나간다는 말씀은 없으셨어?”
주근깨투성이의 하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방, 서재, 정원, 마구간, 그 정도밖에는 다니지 않는 사람인데. 분명 정원엔 아무도 없었고, 말에게 물을 먹이러 마구간에 갔을 때도 마구간을 청소하는 하인밖에는......
‘설마......?’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이 상황으로 봐선 거기밖에 없다.
“어이!”
“네... 네?”
갑자기 어깨를 잡힌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경직시켰다.
“그 남자는 어디에 있냐?”
“네? 그 남자라뇨?”
“네프 님이 감옥... 아니, 네프 님이 데려온 손님 말이야.”
“아, 그분이라면 장미 덩굴의 성에......”
하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그는 장미 덩굴의 성이라고 불리는 중앙의 성을 향해 달려갔다.
중앙의 성과는 통로로 이어져 있어서 굳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어렸을 때 그곳에서 유령을 본 뒤로는 중앙의 성으로 통하는 긴 복도를 걷는 것이 무서웠다. 똑같은 모양의 기둥이 일렬로 늘어선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처럼 보였다.
그날은 바람마저 불지 않았다.
하얀 대리석 바닥이 눈처럼 빛나는, 끝도 없이 기둥이 늘어선 그곳에 발을 내딛자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 모르지만 귀를 울리던 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볼을 감싸는 공기는 적정한 온도로 데워져 있었지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태양에 난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복도 끝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처음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네프의 성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저 고급스런 옷차림의 여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눈을 감았다 떠도 여전히 그녀는 복도 끝 가장자리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틀어올린, 하얀 얼굴의 아름다운 여인.
순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여자는 분명 현실의 존재가 아니다. 눈을 뜬 채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그녀가 웃으며 하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열어 무언가 말을 하려 하는 순간, 일렁이던 그녀의 형체는 사라져버렸다. 그대로 공기 속에 녹아 들어가는 입김처럼 서서히, 하지만 깨끗하게......
데일의 말로는 이 성에 살던 병약한 여주인의 유령이라고 했다.
그녀는 남편이 전사한 사실도 모르고 매일매일 드레스를 차려입고 복도에 서서 남편을 기다렸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로 그녀가 남편을 기다렸던 복도에는 그녀의 유령이 자주 출몰한다고 무감각한 어조로 말해 주었다.
『그래서 아무도 장미 덩굴의 성으로 갈 때 그 복도를 이용하지 않지요. 』
그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늘 장미 덩굴의 성에 갈 때는 다른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힘들더라도 빙 돌아가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네프, 그 사람은 가끔 여주인의 유령이 나온다는 복도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곳에서 보는 정원이 제일 아름답다면서 말이다.
『네프 님은 유령을 본 적 없어요?』
『봤지. 내가 그곳에 서서 정원을 보고 있으면 그녀는 그런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곤 해.』
‘젠장, 하필이면 지금 그런 생각이 날 게 뭐람.’
불안한 예감을 지울 수 없어 돌아가는 것 대신 복도를 통해 가는 것을 택했지만 역시 이곳은 무섭다.
유령이 출몰하는 곳이라 그런지 한여름인데도 이곳의 공기는 싸늘하기만 하다.
역시 복도 중간 정도에 도달하자 복도 끝 저편에 녹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의 형체가 일렁인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다. 그때 이후로 벌써 10년이 흘렀건만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다.
하지만 왜일까.
어렸을 때 그녀를 처음 봤을 때처럼 온몸이 얼어붙는다거나 오줌을 지릴 정도로 두렵다거나 하지는 않다.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태연함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현실의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그녀는 아무런 해가 없다. 그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가련한 여인일 뿐이지 않는가.
유그는 한 걸음씩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슬픔을 가득 담은 채 자신을 향해 있다. 붉은 입술을 열어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며 하얀 손을 흔든다.
─ 어서 오세요, 여보.
그녀는 남편이 다시는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 그래도 늘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아무도 없는 복도 끝을 향해 손을 흔들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어서 오세요,라고 말한다.
가까이, 그녀의 형체가 있는 복도 끝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그녀의 모습은 희미해져만 간다.
축축하게 젖은 두 눈은 여전히 자신을 향한 채, 아니 아무도 없는 복도 끝을 바라보며 언제까지고 그곳에 서서 기다릴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건 다소 과장된 것이 많다. 그땐 그녀가 왜 그렇게 무섭고 두려웠던 것일까.
복도 끝에 다다르자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귓가에 소음과도 같은 매미 소리가 꽂히고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다.
복도에 서서 정원을 감상한다던 네프의 기분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 분명 그녀의 슬픈 마음에 동조된 것일 게다. 확실히 그녀의 감정이란 건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으니까. 유그는 쓰게 웃으며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매앰 매앰.
길게 울리는 매미 소리와 콧속에 녹아드는 달콤한 밀피유 꽃 냄새. 나무가 우거져 이곳은 한낮인데도 꽤 시원하다.
네프가 그 사내를 데려다 놓은 곳이 어디인지 굳이 하인들에게 다그쳐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장을 한, 쓸데없이 덩치만 큰 사내가 문 앞에 죽치고 앉아 졸고 있는 광경은 이곳에선 보기 드문 일이니까.
그 나름대로는 꽤 신경을 써서 고른 방일 것이다.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데다 문도 두껍고, 무엇보다 장미 덩굴의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 괴물은 이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 것 같다.
“이봐, 어이!”
아주 팔자 좋게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잠든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기자, 놈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지른다.
“오셨습니까!”
‘대체 누가 이런 놈에게 저 괴물의 방을 지키도록 한 거야?’
“네프 님은 안에 있냐?”
청년은 자신의 단잠을 깨운 것이 호랑이 같은 집사가 아니라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개뼈다귀 같은 놈이란 사실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네놈이 뭔데 네프 님을 찾는 거야?”
“표정을 보아하니 없는 모양이군. 하긴 네프 님이 안에 있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을 만큼 배짱 두둑한 놈으론 보이지 않으니까.”
“뭐?”
“이 문 좀 열어라. 방 안의 손님인지 뭔지에 용건이 좀 있으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오다 못해 배에 둘둘 감았나 보지? 감히 누구한테 명령이야, 명령이!”
“좋은 말로 할 때 듣지 그러냐?”
“네놈이야말로 두들겨 패서 내쫓기 전에 꺼져라, 앙?”
잠에서 금방 깨서 그런지 안 그래도 더러운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청년은 으름장을 놓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면 새로 온 하인인 듯싶다.
하지만 그 호랑이 집사가 더위라도 먹은 겐지, 그 양반이 얼마나 깔끔한 양반인데 저런 지저분한 면상을 하인으로 뽑았을까?
게다가 저 꼬질꼬질한 옷차림이라니.
하지만 사내는 지지 않고 청년에게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댄다.
“이 문, 열라고 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겐 못 하지.”
“말로 할 때 시키는 대로 해라!”
“명령하지 말랬지. 네놈이야말로 좋게 봐줄 때 사라져. 나 지금 아주 기분이 더러우니까.”
청년의 성질 같아선 이 꼬질꼬질한 놈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쫓겨날 게 분명했다. 어떻게 얻은 일자리인데, 그럴 수는 없다.
두 맹수는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대치했다. 어느 한쪽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루한 대치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었을까.
“어라! 유그 님, 거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비쩍 마른 청년 하나가 손에 과일을 한 움큼 들고 우물대며 어기적어기적 걸어와 두 사람의 사이에 버티고 선다.
잠시 마구간지기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이 비루먹은 강아지 같은 놈이 저 녀석을 ‘님’이라고 부른 건가?
“이 방 안에 예르네이 님이 계시는 거지요? 근데 왜 안 들어가시고 이런 데서 노닥거리고 계시는 겁니까?”
“네놈 눈에는 지금 내가 이놈이랑 노닥거리고 있는 걸로 보이냐? 이놈이 안 들여보내 주니까 못 들어가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 꼬질꼬질한 옷은 좀 버리라고 했잖아요! 정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귀족다운 옷을 좀 입어달라고요!”
“이 더운 여름에 그런 옷을 어떻게 입냐!”
“그리고 너!”
갑자기 과육이 묻은 사내의 손가락이 자신에게 향하자, 마구간지기는 본능적으로 흠칫 놀라 눈을 치떴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지?”
“네... 네에.”
강압적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는 무조건 저자세를 보이는 하인의 비굴한 습성이 여지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짤리고 싶지 않으면 잘 알아둬. 여기 이분은 보기엔 좀 꼬질꼬질하고 어디서 비루먹다 온 건지도 모를 날건달같이 생겼지만 말이야. 네프 님이 친형제처럼 생각하는 분이시고, 또 오시예크 가의 막내 아드님이시라 이거야.”
오시예크라는 말 한마디는 청년을 충분히 주눅 들게 만들었다.
“오... 오시예크 가... 요? 그 대 귀족인......?”
“그래.”
“주... 죽여주십시오! 그런 대단한 분인지도 모르고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오늘만큼은 칙 녀석한테 감사해야겠군.
하지만 감히 주인을 꼬질꼬질한 날건달 취급을 해?
오늘의 치욕은 두고두고 갚아주마, 이 빌어먹을 자식아.
“뭐 죽일 것까지는 없고, 이 문이나 열어라.”
“하지만 네프 님께서......”
말없이 눈을 부라리는 것만으로 곰 같은 덩치의 사내는 움찔 몸을 떨었다.
오시예크 가문이라는 건 지겹도록 자신을 억누르는 짐이긴 해도 가끔은 꽤 쓸모가 있다. 대부분 오시예크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허리를 굽실대니까.
“넌 들어오지 마.”
문고리를 잡고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뒤따라 들어오려던 칙이 불만을 털어놓는다.
“에? 뭡니까? 나도 예르네이 님을 만나고 싶다고요.”
“너, 지금 내가 병문안이나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매섭게 노려보자 칙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의 공기는 뭐랄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꽉 들어차 있었다.
옅은 피비린내와 꽃향기, 뒷덜미를 조여오는 서늘한 기운.
그리고 그런 방 안의 분위기만큼이나 이질적인 존재가 침대 위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다.
자신이 곁으로 다가가도 그 존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눈을 깜빡이거나 얕게 숨을 쉬는 것만 아니라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어이, 전사 아저씨.”
일부러 그가 싫어하는 호칭으로 불러봐도 반응은 없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온몸에 화살을 맞고도 미친 듯이 날뛰었다던 괴물이 이렇게 얌전할 수가 있는 건가?
아니,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이! 이봐요!”
‘설마,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하지만 어깨를 잡아 흔들자 그제야 초점 없는 두 눈이 자신에게 향한다. 정확히는 자신에게가 아닌 어깨를 잡아 흔드는 누군가에게.
“나야, 유그! 이봐요. 내 목소리 들려요?”
대답 대신 약간 미간을 좁힌다. 그리고 손으로 자신의 손을 뿌리치려 한다. 하지만 그의 투박한 손은 자꾸 헛나가고 만다.
약물에 의한 증상이다. 진통제로도 쓰이는 약. 아편과도 다를 바 없는 그 약은 고통은 완벽하게 없애주지만 일시적으로 청각과 시각에 문제가 생기게 만든다.
여행을 다니다가 클레이터 지방 어딘가에서 다리가 절단된 사내에게 마을의 의사가 그 약을 처방해 준 적이 있었다. 덜렁거리는 다리를 몇 번에 걸쳐 잘라내도 환자는 약한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지만 결국 약의 부작용으로 귀가 멀고 말았다.
유그가 알기로는 성의 주치의는 함부로 그런 약을 처방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너......”
혀가 굳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대체 누구지?”
시력 또한 잃은 모양인지,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안개가 낀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뿌옇게 보여서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물건인지 구분조차 못 하는 것일 게다.
“나예요, 유그.”
초점 없는 그의 눈이 빙그르르 돌았다가 힘겹게 감겨졌다.
아까부터 쇳소리가 난다 싶더니, 시트 밖으로 빠져나온 그의 굵은 손목에는 갈색 팔찌와 함께 얇은 쇠사슬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약을 먹여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질 않나, 꼼짝 못 하게 족쇄를 채워놓질 않나. 키우는 개한테도 이 정도로 가혹하게 하지는 못할 거다.
“젠장! 대체 뭐야, 이게!”
청력을 잃었다고는 하나, 바로 귓가에서 터져나오는 일갈에 예르네이의 굳은 몸이 경련하듯 떨려왔다.
“도망치라고 충고해 줬으면, 좀더 확실하게 줄행랑을 쳤어야지!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제정신이었다면 이 남자를 바로 앞에 두고 입 밖에 담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며, 유그는 성난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떠났다고 그나마 안심했더니 국경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을 일으키고는 또 잡혀왔다.
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처럼 머릿속에도 쓸데없는 근육들만 가득 들어찬 건가.
“이봐, 이봐요!”
신경질이 나서 예르네이의 뺨을 좌우로 번갈아가며 후려갈겨도,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초점 없는 눈만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당신 말이야, 살고 싶으면 지금부터 아무것도 입에 넣지 마. 알아들었어?!”
귓가에 대고 언성을 높여 소리지르자, 초점 없는 눈이 약하게 떨렸다.
참담한 심경이다.
이유도 없이 약에 취하고, 사지가 결박돼 이런 꼴로 늘어진 이 남자 또한 죽고 싶은 심정이겠지만, 자신 역시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억지로 본 듯한 느낌이다.
믿어왔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정해 왔던 인물의 추악한 본성이 지금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젠장......!”
유그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길게 늘어진 쇠사슬을 손으로 휘어감아 잡아뜯었다. 하지만 철컹거리는 쇳소리만이 어지럽게 고막을 자극할 뿐, 쇠사슬에는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았다.
네프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나타났다. 어디에 갔었냐고 묻자 말을 타고 시내에 다녀왔다고 한다.
“하인들 몰래요?”
“데일은 이런 더운 날엔 정원 산책도 못 하게 하니까.”
“시내에 가서 대체 뭘 하다 오신 겁니까?”
“너도 데일을 닮아 잔소리만 늘어가는구나.”
“말 돌리지 마세요. 제가 이 난리통에 뭐 하러 이곳까지 쫓아왔겠습니까?”
“너야말로 요점부터 말해.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그의 자수정빛 눈동자가 가만히 유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좋아요. 본론부터 말하도록 하죠.”
갑자기 목이 타 물을 마신 뒤 유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모른 척하지 말아요. 낮에 그 남자 방에 가봤으니까.”
과연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래서 유그,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 남자를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언제까지고 가축처럼 묶어둘 수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요.”
“가축이라... 나는 꽤 귀빈 대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농담하지 말아요.”
“난 농담은 싫어한다, 유그.”
“어쨌든 그 약의 부작용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테지요. 만약 저 남자가 눈이 멀고 귀가 멀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불구로 만들어서라도 당신 곁에 두고 싶었나요?”
“유그.”
“네? 그런 겁니까? 당신은 목에 줄을 달아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내킬 때마다 찾아가 즐기는 그런 노리개가 필요했던 겁니까?”
“닥쳐라, 유그.”
“난 지금까지 당신을 아버지처럼, 친형제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이게 뭡니까! 쾌락의 배출구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노예시장에 가서 성노를 사요!”
“닥치라고 했다, 유그!”
날카로운 일갈과 함께 테이블 위의 그릇들이 덜컹거린다.
컵 몇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채 먹지 못한 음식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식당 구석에 서 있던 하녀들이 몸을 움찔대며 슬슬 몸을 피하는 것을, 유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네프는 야수가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리고, 두 눈을 번쩍번쩍 빛내면서 자신을 씹어삼킬 듯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댄다.
그것이 전부 그 남자 때문이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은 유그를 필요 이상으로 담대하게 만들어놓는다.
“그 남자를 놔줘요. 그 남자에겐 해야 할 일이 있고 또 당신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쓸데없는 시간 낭비란 것은 안다. 그의 두 눈은 완고하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은 그 남자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 남자가 여자였다면 이런 기분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여자가 아니더라도 그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여린 청년이었다면, 노예시장에 굴러다니는 성노였더라도,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모든 걸 그에게 맡겨버렸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사랑하는 상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이 문제가 되는 것이겠지.
“주제넘게 나서지 마. 봐주는 것에도 한도가 있다.”
“알잖아요. 난 당신이 걱정돼서 이러는 거라구요.”
“난 괜찮아. 그리고 그에게 약을 먹인 것은 내가 아니라 주치의다. 상처가 다시 터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
“눈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주치의가 약을 처방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프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표정한 얼굴의 가면은 깨진 지 오래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란 것이 생겼다. 그것이 이상 징후인 것이다.
저 비뚤어진 미소가, 녹녹한 곰팡이 냄새가 날 것처럼 젖은 두 눈이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는지 저 사람은 알고나 있을까.
“유그.”
“네, 네. 무슨 말씀이든 해보시죠.”
“넌 카이라라는 그 애를 사랑하나?”
너무 놀라서 딸꾹질이 다 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네프가 맞긴 한 건가.
저 사람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 세상에!
“사랑이고 자시고 쓸데없이 말 돌리지 말아요!”
“만약 그 애를 사랑하고 있다면 말해 다오. 그 감정이란 게 도대체 어떤 것인지. 대체 어떤 것이기에 사람들이 모두 사랑을 하면 미쳐버리게 되는지.”
머리도 좋고, 얼굴도 최상급이고, 검술도 초일류. 가는 곳마다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 뭐 가끔 남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앓는 소리를 내지 않는 저 강철 인간 같은 남자가, 아니 네프의 모습을 한 얼간이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사랑? 사랑이란 감정이 대체 어떤 것이냐고?
그게 어떤 것이기에 사람들이 사랑을 하면 미쳐버리게 되냐고?!
쾅!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화가 난 모양이다.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고 테이블을 친 손바닥이 얼얼하다. 이렇게 손목이 시큰대는 걸 보니 뼈가 부러졌거나 어긋났거나 둘 중 하나다. 빌어먹을.
“당신 누구야! 대체 누구기에 그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지껄이는 건데!”
“나와 술래잡기라도 하고 싶은 거냐, 유그?”
“당신답지 않잖아! 사랑? 웃기고 있네. 내가 아는 네프 님은 그런 빌어먹을 단어는 입에 담지도 않아!”
“하아, 빌어먹을... 이라.”
오후의 강행군 때문인지 깊게 한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은 무척 지쳐 보였다.
“레이루... 그 이름을 부르더군.”
그의 두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가라앉은 두 눈은, 복도 끝의 여자 유령처럼 슬퍼 보였다.
언젠가 돌아올 남편을 위해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꾹 참고 애써 미소짓던 그녀처럼.
“정신을 잃기 전까지 열에 들뜬 것처럼 그 이름을 뇌까리며 울더군. 레이루, 레이루, 미안하다,라면서.”
레이루라는 존재가 예르네이, 그 남자의 연인이든지 가족이든지, 어쨌든 그 사람이 예르네이에게 더없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은 알겠다. 그리고 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람에게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질투하고 있다는 것도.
“뭔가 몸속에서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는 기분이다, 유그.”
“이봐요, 네프. 당신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식당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하녀들이 수군대고 밖에서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 같더니, 누군가 식당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왔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는 집사 데일이 새파랗게 굳은 얼굴로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로도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큰일났습니다, 네프 님!”
“뭔가?”
“히이토 족의 군인들이 수도에 쳐들어왔다는 소식입니다!”
“전쟁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걸로 아는데.”
“갑자기 수도로 진격해 양민들을 학살하고 가옥에 불을 지르고 있다고 합니다.”
“선전포고라 이건가. 그놈들다운 방법이군.”
정작 부산을 떨며 당혹스러워해야 할 장본인이 턱을 괴고 앉아 남 얘기를 하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참을성 많은 데일로서도 이번만큼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 그렇게 남 얘기 하듯 할 때가 아닙니다! 군인들 중 일부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습니다!”
“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것은 네프가 아니라 유그 쪽이었다.
“자... 잠깐만! 어째서 히이토 족의 군인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거야?”
데일과 네프는 잠시 동안 말없이 그런 유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잠깐! 그렇게 한심한 듯이 보지 말라구요! 진짜 궁금하니까 묻는 거란 말이에요! 데일, 자넨 알고 있지? 왜 그놈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냔 말이야.”
“아... 유그 님, 그건......”
“됐어, 데일.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질 사실 아니었나.”
네프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면서 툭 한마디를 던지고 간다.
그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에 유그는 그 자리에서 쨍쨍하게 얼어붙어야만 했으니, 그 말이란 것은 이렇다.
“그건 내가 그 악마의 피가 흐르는 존재이기 때문이지.”
질문에 되돌아온 것은 상당히 시적인 대답.
그 악마라는 것은 네프가 늘 라자르 왕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고, 그의 피가 흐르는 존재라는 것은? 혈육, 아들? 그렇다는 것은 저 사람이 라자르 왕의 아들, 곧 이 나라의 왕자?!
으아아! 이 사람아!
그런 중대한 사실을 오늘 아침 식사는 별로였어, 따위의 말을 하듯 얘기하지 말라구요!
어렸을 때부터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세상에, 이 나라의 왕자라니.
이 나라의 왕자가 어째서 이런 촌구석에 틀어박혀 사는 거냐고!
“이봐요, 네프 님! 기다려요! 또 어딜 가려는 겁니까!”
뒤늦게 네프의 뒤를 쫓았지만 그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굳이 데일에게 그의 행방을 묻지 않아도 뻔하다.
“뭣들 하고 섰어! 살고 싶으면 짐 싸서 튈 준비나 해!”
그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이곳의 하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무책임한 주인 대신, 유그는 우왕좌왕 늘어선 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데일, 검을 들고 싸울 수 있는 놈들은 모두 불러 모아.”
“네? 그렇지만 이 성의 하인들은 저와 같은 평민으로......”
“검을 써보지 않았어도 곡괭이로 밭은 갈아봤을 거 아냐! 삽이든, 부지깽이든, 식칼이든 뭐든 들고 싸울 수 있을 만한 놈들로 불러 모으라고!”
평소 유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데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결단력 있는 행동에 감사해야겠다고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생각했다.
어느새 하늘 위로 금반지 같은 얇은 달이 걸렸다. 날이 저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이지만 이미 주위는 어두컴컴하다.
“유그 니임!”
불안한 얼굴로 달려오는 칙에게 유그는 마구간에 가서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게 말을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요사하게 달빛이 비치는, 죽은 자의 공간으로 달음질쳤다.
성 안의 불안한 기운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인지 달빛에 비친 그녀의 유령은 기둥 뒤에 숨어 납빛 얼굴로 부산하게 뛰어다니는 성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소리? 뭔가 소란스럽다.
유그의 말대로 점심으로 나온 음식을 먹지 않았더니 약 기운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은 뿌옇기만 하고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윙윙대며 뭉그러진다. 그래도 본능적인 직감으로 성 안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성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런 밤중에 이리도 소란스러운 것일까.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이때가 기회다.
오른쪽 손목을 들어올리자 무겁게 늘어졌던 팔이 힘겹게 끌어 올려진다. 아직 머리는 아프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것은 아니다. 몸을 일으키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칼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날카로운 고통과 함께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빌어먹을......”
욕설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는 기분이라는 것은 오늘 처음으로 경험했다. 될 수만 있다면 욕설과 함께 싫은 기억을 불구덩이 속에 던져버렸으면 좋으련만.
사슬을 자를 수 없다면 손목이라도 기꺼이 내주겠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처럼. 오른쪽 손목이 없다면 두 번 다시 칼을 쓸 수 없겠지만 다른 한 손을 단련시키면 된다. 멀쩡한 정신으로 손목을 자른다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 정도의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손목이라도 자르기 위해선 날카로운 도구가 필요한데, 희뿌옇게 흐려진 시야엔 모든 것이 뭉그러져 보일 뿐이다.
하지만 도구를 발견하기도 전에 문가에서 인기척이 났다. 철컹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 고양이처럼 기척을 숨기고 방 안에 들어선다. 일부러 기척을 숨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에 밴 동작이겠지만.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와 침대 곁,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체중을 싣고 앉았다. 침대 한쪽이 크게 기울고 더운 입김이 훅 끼쳐와 온몸에 일제히 소름이 돋았다.
“주위가 좀 시끄럽지?”
아직 시력과 청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자는 이 성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그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옅은 체향에 뒤섞인 꽃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온다.
“히이토 족의 군사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더군.”
“히... 이토?”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니 약이 든 물을 마시지 않은 모양이군그래. 유그가 가르쳐주던가?”
예르네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히이토와 페르티잔에 대해선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늘 문제다. 그러나 네프는 그 문제를 추궁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놈들, 어지간히 약이 올랐나 보더군. 수도에 침입해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을 불태우고, 왕궁에 난입해 들어갔다는군. 그리고 거의 유폐 상태나 다름없는 날 찾는 걸 보면 왕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처단하려는 모양이야.”
그건 업이다. 라자르 왕이 과거에 저질렀던 악행을 히이토의 군사들은 그대로 답습하는 것 아닌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불쾌하긴 했어도 부정은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런 악마와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공격 대상이 된다는 건 솔직히 기분이 나쁘군.”
어째서 이 남자는 늘 자신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일까. 동굴 속에 갇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는 야인(野人)처럼 그는 몇 시간이고 자신의 곁에 앉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단지 대화 상대로 자신을 가둬두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자네의 손에 죽는 건 언제든 환영이지만 그런 돼지 같은 놈들에게 죽을 순 없지.”
“누구에게 죽든, 그것은 너의 운명이다.”
어둠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빛나는 두 개의 자수정빛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었다. 푸르게 빛나는 커다란 흰자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그 크기를 바꿔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운명이라......”
칙칙하게 갈라진 목소리.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한쪽은 밤의 어둠 속으로, 다른 한쪽은 아직도 이명이 울리는 귓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자넨 자네의 운명에 순응하며 살고 있나? 난 그렇지 않아. 늘 부정하고, 분노하지. 내 운명이란 것에 말이야. 죽어도 될 운명이란 건 누가 정한 거지? 악마의 자식으로, 평생을 아비의 배덕한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심보 고약한 노인네가 정한 거지?”
분노하고 있는 것인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짐승의 포효 같은 네프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그는 잔뜩 성이 나 있다.
잇몸을 다 드러내고서 잇새로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몸을 떨고 있다.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에.
“나 역시 한 번도 내 운명이란 것을 순순히 받아들인 적은 없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는 듯, 네프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이런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언제든지 갈아엎어 주겠다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다. 아무리 분노하고, 광분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내 운명이다. 그리고 지금 네 인생 역시, 어쩔 수 없는 너의 운명이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그는 하얗고 나긋나긋한 손을 뻗어왔다. 서늘한 손가락이 빛바랜 붉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진다. 어둠 속에서 하얀 손만이 도드라져 머리카락 이곳저곳을 상냥하게 쓰다듬는다. 마치 동물의 털을 쓰다듬는 듯한 손길이다.
“손대지 마.”
하지만 예르네이는 그 상냥한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짐승은 짐승이되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다. 상처 입고 팔다리가 묶여 있지만 여전히 야성의 눈빛만은 변함없는.
“꿈속에서 난 계속, 눈 내리는 산길을 걷고 있어.”
한 번 허공으로 뿌리쳐졌던 손이 다시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그 손이 이제는 머리카락을 지나 땀이 배어나온 이마나 귀, 턱 선을 어루만졌다.
“아무도 없는 산길이야. 작은 동물조차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끝없이 이어진 길을 아무 이유 없이 계속 걷기만 하는 거야.”
고양이나 작은 동물을 어루만지듯, 그의 손길에선 상냥함과 부드러움 외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연인에게 하는 듯한 애틋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꿈을 꿀 당시에는 아무것도 느끼질 못해. 조용히 눈이 내려앉는 산길을 걷기만 할 뿐이니까. 하지만 눈을 뜨면 눈초리에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져 베개를 적시더군.”
“손대지 말라고 했잖나. 더 이상 내게 손대면......”
“죽여버리겠다고?”
“......”
“죽음의 사신은 늘 우리를 따라다니지만 그놈은 정작 중요한 순간엔 딴청을 피우지. 살고 싶다, 살아야만 한다, 내겐 할 일이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마음속에선 죽기를 갈망하기에 오히려 죽을 수 없어. 사신이란 놈은 성격 파탄자거든.”
“넌 죽고 싶은 건가?”
“살아 있어야 할 의미가 없으니까.”
물기를 머금은 자수정빛 눈동자가 이번엔 한참 동안, 어둠 속에 가려져 나타나질 않는다. 눈을 감고 동물을 쓰다듬듯, 얼굴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멈춘 채 네프는 숨소리조차 내질 않았다.
그가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취하는지 예르네이는 알 수 있었다. 곧 그도 숨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의 이곳저곳을 탐색하듯 살폈으니 말이다.
소리, 누군가의 기척.
하인들이나 데일의 것은 아니다. 유그는 기척을 숨기는 법을 모른다.
휙휙,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사람, 누군가 침입해 들어왔다. 훈련된 자 특유의, 살인자 특유의 독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그것은 예르네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두 눈은 자신에게 향한 분노와는 다른, 색다른 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히이토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멋대로 자신의 방에 침입해 이런 노골적인 살기를 내뿜진 않는다.
옷 속에 언제나 넣고 다니는 작은 단검을 살며시 꺼내 손에 쥐었다. 번뜩이는 검날을 보더니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예르네이는 눈을 치떴다.
─ 하지만 이 검은 자넬 위한 게 아니야.
소리 없이 옅게 미소지으며 그의 가슴에 가만히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새끼를 낳는 고통과 두려움에 날뛰는 말을 짚더미 위에 눕혀 놓고 손바닥을 배 위에 올려 체온을 전해 주면 말은 곧 안심하고 고르게 숨을 내쉰다. 하지만 살기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맹수의 심장은 터져나올 듯이 고동친다.
쉬익!
공기를 가르는 파찰음.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형체가 움직인다 싶더니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살기가 솟구친다.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과 검이 맞부딪치고, 등 뒤에서 공격을 가하던 자객의 모습이 달빛에 드러났다.
움직임이 선명한 근육과 돌덩이처럼 다부진 몸, 마치 눈앞에 거대한 야생 곰이 서 있는 듯하다.
“과연 거인 족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겠군.”
밀어붙이는 어마어마한 힘을 끈기 있게 막아내며, 네프는 피하는 것처럼 엉덩이를 옮겨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댔다. 힘이 분산되지 않는 탓에 그럭저럭 얼마 동안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문제는 어둠 속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귀신 같은 존재들이다.
둘? 아니, 어림잡아 셋?
어떻게 알고 이 방에 침입해 들었는지 몰라도 시기가 너무 좋지 않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침대 아래로 몸을 날리자, 힘을 모두 집중하고 있던 히이토의 군인이 커다란 몸을 휘청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네프는 검을 다잡아 쥐고 사내에게 달려들어 등 위에 올라타 몸을 짓누르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뒤 젖혀진 목덜미, 정확히 결후가 있는 부분에 망설임 없이 칼 끝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그 뒤는 힘을 주어 박아넣은 칼 끝을 옆으로 이동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당할 히이토의 군인이 아니다. 칼 끝을 박아넣자마자 놈은 미친 듯이 발버둥쳤고 그 덕분에 네프는 침대 아래로 다시 볼품없이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목에 단검을 박아넣은 채 사내는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미친 곰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 건가. 번뜩이는 충혈된 두 눈은 지옥에서 갓 빠져나온 악귀와도 같은 모습이다.
칼을 빼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지 사내는 목에 칼을 덜렁거리며 허리춤에 찬 검을 빼들었다.
저 보잘것없는 단검 하나로 히이토의 군인들을 상대하려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오늘 낮 수도에 인접한 시장에 가서 산 물건,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고 만 검을 네프는 비장한 얼굴로 빼들었다.
어째서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르네이에게 시선이 가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무기 하나 없이 무방비 상태로 놓여진 그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 검을 충동적으로 사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해 본다.
하지만 걱정이라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해 본 적이 있던가.
고막을 자극하는 격렬한 쇳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달려든 자객을 능숙하게 피하며 예르네이는 길게 늘어진 쇠사슬을 이용해 적의 목을 사정없이 졸랐다.
저 남자에게는 무엇이든 무기가 된다. 굳이 자신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신의 목숨은 챙길 줄 아는, 그런 남자다.
챙!
쇳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고 상대적으로 몸이 유연한 네프는 방 안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사내의 공격을 받아쳤다.
사내는 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샌가 빠져나가는 네프의 날랜 동작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는지 “우어어!” 하는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괴이한 소리를 내질렀다.
‘악귀라기보다는 굶주린 멧돼지 같군.’
상처를 입은 탓인지 사내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진다. 때를 봐서 목에 박힌 저 칼을 빼내기만 하면 끝이다.
“우윽......!”
하나 비명과도 같은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려온 순간, 네프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적과 검을 맞댄 이 중요한 상황에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다니.
옆에서 가족과도 같은 유그가 죽어간다 할지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는 인간을 가장 경멸한다고, 늘 유그에게 말하곤 했었다. 자신 때문에 죽게 되더라도 자신을 원망하지 말라고.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흐읍!”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내의 검이 네프의 여린 피부를 갈랐다. 예리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흘러 옷을 적신다.
예르네이, 그가 지금 곤경에 처해 있다. 새로 감은 붕대는 어느새 피로 물들어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던 오만불손한 야생의 짐승은 구석까지 몰려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Ψοжλδη!”
알아들을 수 없는 별세계의 언어를 지껄이며 성난 곰이 달려들고, 미처 피하지 못해 다시 옆구리에 칼 끝이 닿고 만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피가 쿨렁쿨렁 쏟아져 나왔다.
“Ψοжλδητξσ!”
히이토의 방언? 어쨌든 상당히 시끄럽고 아름답지 못한 언어다.
『네프, 하지만 말이에요. 내가 죽으면 그래도 울어줄 거지요? 펑펑 목 놓아 우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나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슬퍼해 주면 돼요. 내 무덤에서 이놈은 참 싱거운 놈이었지,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아주 조금 눈물을 보여주면 돼요.』
유그, 그 아이는 죽어도 자신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하던 자신에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유그, 난 운다는 게 뭔지 몰라.
울 것처럼 슬프다는 게 뭔지 몰라.
이대로 예르네이가 히이토 놈들에게 개죽음을 당한다 해도 난 울지 못할 거야.
출혈 탓에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구석에 몰린 가련한 짐승의 올곧은 등이 보인다.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붉은 털과 쭉 뻗은 팔.
달려드는 자객을 피해 몸을 돌리면서 아주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오로지 살기로 불타고 있었다.
동공 위에 얇은 천을 덧댄 것처럼 눈동자가 뿌옇다. 살기와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절망.
지쳐 있는 것이다. 지쳐 쓰러질 것처럼 허덕이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저 남자는 손을 대면 무너져내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젠장!’
또다시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이며 달려드는 사내를 향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자신을 피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내는 갑자기 네프가 품안으로 뛰어 들어오자 상당히 당혹스러웠나 보다.
허공에 내뻗었던 검을 재빨리 다잡아 쥐었지만 네프의 행동이 더 빨랐다. 복부에 검 끝을 찔러넣고 근육을 자르자 적의 숨소리, 적의 절망, 그러한 모든 것들이 얇은 검 끝을 통해 자신에게 전달된다.
예르네이를 위해 산 검이 금세 시뻘겋게 물들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산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일생일대의 첫 선물은 적의 피로 더럽혀졌다.
“흐억......”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내장 깊숙이 찔러넣은 칼을 90도로 회전시켰다. 역한 입 냄새를 내뿜으며 사내의 거대한 몸이 휘청거렸다.
네프는 마지막으로 미친 곰의 목에 매달린 자신의 칼을 회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검을 빼내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온몸을 적시는 피는 낯설지 않다. 피비린내 또한 정겹기만 하다.
쿵, 하고 사내의 몸은 무릎부터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얼굴을 적신 피를 대충 닦아내고, 네프는 일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고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눈앞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먹잇감에 정신을 뺏긴 적의 뒤로 다가가 등을 찌르는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Ψοжλδη!”
“젠장, 시끄러워!”
몇 번이나 등과 옆구리를 찌르고, 꺼억꺼억 하는 쉰 소리를 내며 꿈틀대는 놈의 몸 위에 올라타 복부를 찔러댔다.
흘끗 훔쳐본 예르네이의 수려한 얼굴과 조각 같은 몸에는 크고 작은 자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편히 잠들 수 있게 하진 않아.
자신조차도 주체할 수 없는 묘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한다.
퍽퍽, 소리를 내며 칼을 놈의 몸속에 박아넣을 때마다 온몸이 저릿저릿 아파온다. 그것은 쾌감과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만......”
고막을 쨍쨍하게 울리는 이명(耳鳴)과도 같은 소리였다.
피와 살이 튀고 갈라진 뱃속에서 각양각색의 내장들이 비어져 나와, 피비린내와는 다른 시큼한 냄새가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다시 칼을 높이 들어 형체도 알 수 없이 짓이겨진 적의 얼굴을 잘게 부수려 하자, 허공에 뻗은 그 손목을 예르네이가 강하게 움켜잡았다. 쇳소리와 함께 뱀처럼 길게 늘어진 쇠사슬이 달빛에 반짝여 난반사된다.
“이제 그만 해. 이미 죽었잖아.”
미간을 좁힌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반듯한 곡선을 지닌 그의 이마에 은빛 땀방울이 맺혀 마치 그의 얼굴 자체가, 아름다운 조각상인 듯 보인다.
“하지만 죽은 뒤에도 꽤 한참 동안 심장은 뛰어. 내장은 살아서 꿈틀댄다고.”
─ 미쳤군.
그의 두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달빛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은 피비린내에 자극당했다. 인정하긴 싫어도 자신은 피와 살육을 즐기는 그 남자의 혈육이니까.
어떤 작가 나부랭이가 라자르 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설을 썼었는데, 그것은 엄청난 명작이었다. 몇 번이나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 한 그 소설엔 이런 구절이 있었다.
『가면을 써서 본성은 감출 수 있어도 늘 그의 머리 위에는 사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몸속에 흐르는 야만인의 피는 시기적절한 곳에서 들끓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 번 들끓은 야성의 피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먹이로 삼지 않으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피는 속일 수 없다. 탐욕스런 혀와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야수의 본성은 늘 피를 원한다. 늘 피를 갈구한다. 』
자신도 그러한 야수가 되어버린 것인가.
“이제 됐어. 됐으니까, 그만둬.”
그는 무사하다.
이 손으로 그의 목숨을 구했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여전히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사실에 안도한다. 안심하고 미소지을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운 그를 끌어안고, 그 온기에 취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예르네이......”
그의 피부에 닿은 손끝이 저릿해져 온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것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던가.
“예르네이.”
이름을 부르자 눈을 깜빡이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렇게 기쁜 것이었던가.
“꿈속에서 나는 늘 혼자야.”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의 가늘게 뜬 눈 같은 음산한 달빛 탓일까. 긴 은발, 창백한 얼굴, 조각처럼 아름다운 그의 몸을 적신 더러운 피, 용솟음치는 적의 핏줄기 속에서 악몽 속의 여신처럼 빛나는 그는 무척 지쳐 보였다. 무척 서글퍼 보이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꿈속에서뿐만 아니라 늘 혼자였지.”
“인간은 누구나 혼자다.”
기다렸다는 대답을 들은 듯 그의 자수정빛 눈동자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피를 뒤집어쓴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적의 탁한 피에 취하기라도 한 듯, 께느른하게 눈을 내리깔고 힘겹게 숨을 내쉴 뿐.
단숨에 적의 목숨을 앗아간 이 아름다운 사내에게서 예르네이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너울너울 춤추는 불꽃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무자비하게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던 잔인한 악귀, 라자르.
그 사내의 혈육이다, 이 남자는.
피를 뒤집어쓴 저 사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한 악마일 뿐이다.
하지만......
“흐윽!”
가장 중요한 순간, 손이 떨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쓰러져 누운 적에게서 탈취한 칼로, 그의 명치를 파고드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적의 작은 기척조차도 감지해 내고 온몸을 경직시키던 남자가 이상하게도 자신의 앞에서만은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나, 이상한 것은 그 남자뿐만이 아니다.
눈을 감고서도 적의 급소에 검을 찌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두 팔을 벌려 그런 자신을 환영하는 것 같은 적의 급소를 지나쳐, 옆구리 부근에 검을 박아넣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째서,라고 자문해 보았자 대답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야수는 야수라 이건가?”
네프는 옆구리에 박힌 검을 망설임 없이 뽑아냈다.
피와 함께 몸 안에 축적된 무언가가 덩어리째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에 네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처음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예르네이는 이대로 좌절하고만 있을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손이 묶이고,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나 위험천만한 야수다. 방심한 상태에서 털을 쓰다듬어 주다가 결국 날카로운 이빨에 손을 물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는 다른, 쇠사슬이 부딪쳐 만들어 내는 이질적인 소음과 함께 공기를 가르고 퍼렇게 날을 세운 검이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하나, 두 번째는 없다.
상처투성이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고는 하나, 정확히 급소를 노리고 파고드는 예르네이의 공격은 독을 머금은 듯 강렬하고도 잔인하다.
두 번째는 없다,라는 네프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예르네이 역시 두 번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당연히 공격하는 자와 공격을 막아내는 자, 모두 서로의 행동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서 검과 검이 맞부딪치고, 살기 어린 두 사람의 눈동자가 불꽃처럼 꽃불을 튀기며 격돌하고, 진주알 같은 땀방울이 피비린내가 가라앉은 공기 속으로 어지럽게 흩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팽팽하게 맞붙어 있던 어느 한쪽의 검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적의 공격에 상대방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검이 침대 시트 위에 떨어짐과 동시에 한밤중의 짧지만 잔혹한 혈투는 끝을 맺었다.
“크윽!”
두 마리의 맹수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손톱을 세우고 맞붙었다면, 승리의 여신은 좀더 강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물론 좀더 강한 쪽이라고 해봤자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태여서 그런 것이지, 결코 실력만으로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네프는 잘 알고 있었다.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는군.”
예르네이의 팔목을 움켜잡아 그의 손에서 칼을 떨어뜨린 다음, 네프는 무자비하게 그의 팔을 한껏 뒤로 꺾었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예르네이의 땀에 젖은 육신이 활처럼 휘었고, 그의 입술 사이로 짓눌린 신음이 새어나온다.
“그렇게도 내 목숨을 뺏고 싶었던가?”
대답 대신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보름달이 뜨면 몸속에 흐르는 짐승의 피를 주체할 수 없어 늑대로 변해 인간을 잡아먹는 괴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마치 이야기 속의 늑대 인간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네프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몸속의 무언가가 용광로처럼 끓어올라 이대로라면 몸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산 채로 타죽을 것만 같았다.
익숙해지지 않는 상처의 고통. 살 전체가 도려내진 듯한,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통증.
예르네이, 그가 휘두른 칼에는 치명적인 독이 묻어 있었다. 그의 분노, 그의 살기, 그의 절망, 그를 지탱하고 있는 암울한 모든 것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독(毒).
“기어이 내 목숨을 거둬들였어야 했나?”
“크으윽!”
자제할 수 없는 힘을 주먹에 모두 실어 몇 번인가 그의 늘어진 육신을 두들겼다. 두들겨 깨부수었다.
철과도 같은 강인한 그의 몸이 뱀처럼 꿈틀대고, 입술 사이로 핏덩이와 함께 신음이 새어나와 바닥을 적시고, 그의 몸을 적시고, 잔악한 폭력을 휘두르는 자신의 더러워진 몸을 적신다.
시체처럼 그의 개암나무색 육신이 피로 더럽혀진 시트 위에 늘어졌다.
“예르네이.”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는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응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늘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동물을 잡아올리듯 그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엉망으로 짓이겨진 그의 얼굴은 참혹했지만 여전히 두 눈만은 살아 있다. 여전히 특유의 빛을 잃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두 눈 속엔 달이 머물러 있었다. 여인의 손가락을 장식한 반지처럼 가늘고 얇은 달이.
문득 그 달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로 엉망이 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움켜잡고 눈가를 어루만졌다.
예쁜 달이다.
그의 암갈색 눈동자는 하늘이 되어 있다. 구름이 잔뜩 낀, 비가 내리기 직전의 암울한 하늘.
달을 만지고 싶다.
“크... 으윽!”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잡아 벌리고 그 안에 든 예쁜 빛깔의 하늘을, 달과 함께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담고 있는 눈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손끝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들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가 휘두른 독을 머금은 칼에, 몸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그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건 구멍을 낸 당사자뿐이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는 존재, 늘 분노라는 감정만이 깃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존재.
“으아아악!”
예르네이의 입술 사이로 터져나오는 새된 비명과 함께, 드디어 몸속의 용광로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터졌다.
두 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모든 것들......
더 이상 예전의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네프는 미소지었다. 창백한 얼굴만큼이나 하얀 이를 그대로 다 드러내고서. 마치 억지로 웃는 얼굴을 그려넣은 피에로 인형처럼.
“네프 니임!”
문을 열어젖힌 순간 유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토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 삼켜야 했다. 걱정이 되어 뒤따라온 데일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모양이었다. 등을 돌려 토악질을 해대는 집사처럼 자신 역시 위 속에 든 내용물 모두를 토해 내고만 싶었다.
방 안의 광경은 지옥이었다. 아니, 지옥이라 해도 이것처럼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프의 뒤를 따라나선 순간 어디선가 여자의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는 울먹이면서 눈앞에 널브러진 핏덩이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시체였다.
다량의 피를 흘리며 죽어 나자빠지긴 했어도 별 고통 없이 절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하인의 목을 자른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데일, 히이토 놈들이 수도에 쳐들어온 것은 몇 시경이지?”
“하인의 말로는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전......”
데일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 역시 짐작되는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추측은 자신의 생각과 같을 것이 분명했다.
히이토 놈들이 성에 잠입한 것이리라. 그리고 하인의 시체가 아직 따뜻한 걸로 봐선 지금 이 순간에도 놈들은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소란을 떨며 우왕좌왕하는 하인들을 진정시키고 무기를 든 장정들을 성 곳곳에 배치해 둔 뒤에야 유그와 데일은 네프가 달려갔을 예의 그 방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놈들은 자신들을 공격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단 한 사람! 라자르 왕의 혈육인 네프, 그일 터.
그 사람이라면 무사할 거야.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상황은 종료된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종료된 상황이란 것이 문제였다.
우선 바닥에는 거대한 몸집의 사내 둘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방에 솟구친 피와 무겁게 가라앉은 역한 피비린내.
붉은색으로 칠한 상자처럼 방 안은 온통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리고 고급 양탄자 또한 검붉은 얼룩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늘어진 두 놈은 상태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침대 위에 자리잡은 그것은 사람의 몸이라고는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으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얼굴과 침대 밖으로 쏟아져 나온 형형색색의 내장들.
피로 축축하게 물든 붉은 시트 위에 그가 있었다.
붉은 방의 부속품이라도 되는 듯한 피를 뒤집어쓴 네프, 그가.
네프는 문 앞에 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유그를 보며 입술을 말아올렸다. 눈, 코, 입도 알아볼 수 없는 핏덩이 속에서 드러난 하얀 이빨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미소짓는 그 얼굴은 천진해 보이기조차 했다. 그래서 더욱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것일까.
─ 그는 미쳤다.
피에 자극당해, 살육의 즐거움에 도취된 저 짐승은 자신이 알던 네프가 아니었다. 그는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아버지, 라자르 왕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의 주위에 떠도는 무섭도록 가라앉은 피비린내는 그가 악마, 라자르 왕의 피가 흐르는 혈육이라는 증거였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 사실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네프 님.”
피로 물든 지옥의 현장으로 유그는 발을 내디뎠다. 지금의 그는 자신이 아니면 진정시킬 수 없다. 침대 위에 늘어진 시체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유그는 네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차라리 살기에 찬 악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더라면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제비꽃 눈동자는 막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의 눈처럼 맑고 깨끗했다.
살아 있긴 한 건지 늘어진 예르네이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얼굴을 푸욱 수그리고 두 팔을 묶인 채 늘어진 그 모습이 마치 고문에 지쳐 기절한 죄인처럼도 보인다.
“유그.”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경쾌하기만 했다.
“달을 내 것으로 만들었어. 이젠 영원히 내 것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손 안에 소중하게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을 때엔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예쁜 달, 이제 이것은 내 것이야.”
그렇게 말하며 네프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물이었다. 울지 못해 억지로 미소짓는 어린애 같은 우스꽝스런 얼굴이었다.
그것은 시신경이 그대로 매달린 작은 구슬, 암갈색의 동공이 있는 하얀 눈.
하지만 그것은 달을 머금고 있지 않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피투성이의 부속품일 뿐이었다.
저 남자에게서 그것을 떼어내 당신은 대체 무얼 할 작정이었던 건가요. 예쁜 달을 머금은 그 눈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래서 떼어내 가지려 했던 겁니까?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 이후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이라는 것은 마음 여린 여인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눈물을 보이는 그 순간 자신은 끝장이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을 참았다.
우는 대신 웃었다.
일부러 광대처럼 웃고 떠들며 사람들이 즐거워해 주면 그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참았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상황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이 흘러 옷을 적시고 피로 물든 시트에 방울져 떨어진다.
네프는 어린애처럼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우는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외로운 사람이란 걸.
당신은 늘 혼자였으니까. 가끔 나와 이야기를 할 때도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곤 했지요.
내가 언젠가 물어봤던 적이 있지요. 당신은 늘 어디를 바라보고 있냐고.
『눈이 내린 산길이야. 끝도 없이 이어진 하얀 길 말이야.』
언제든 손을 내밀면 아무도 없는 그 하얀 길을 같이 걸어줄 수 있었을 텐데.
당신에게는 내가 있고 데일이 있었잖아요.
하지만 우리와는 그 길을 걷고 싶지 않았던 겁니까?
당신이 찾아낸, 눈 쌓인 그 길을 함께 걸어줄 사람이 바로 저 남자였나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당신은 저 남자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건가요? 그가 다시 떠날까 봐, 겨우 찾아낸 여행의 동반자가 사라져버릴까봐, 그렇게 두려웠나요?
어린 시절엔 하늘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구멍을 통해 신이 내려와 비를 내리고 눈을 만드는 거라고.
하지만 하늘에 구멍 따위는 없었다.
대신 자신의 몸속에 자그마한, 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쌔액쌔액 하고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몸속의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구멍은 이제 지독한 냄새를 내며 썩어가기 시작한다. 쓸데없는 것까지 모두 그 구멍을 통해 새어나가 버리고 결국 남은 것은 변변찮은 몸뚱이뿐이다.
유그는 한참 동안 지옥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끅끅 소리를 내며 울었다. 상처 입은 내장을 억지로 잡아 벌린 것처럼 몸속 어딘가가 쿡쿡 쑤셔온다.
카이라가 보고 싶었다. 그 지독히도 나른한 얼굴을 보며, 비누 향이 나는 화사한 몸에 얼굴을 묻고 여러 가지를 얘기해 주고 싶었다.
만약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보이게 돼도 그녀는 모른 척해 줄 것이다. 쓸데없는 질문도 하지 않고 그냥 그런 자신을 담담히 지켜보아 줄 것이다.
네프는 하늘에 걸린 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했지만 여전히 암청색 하늘에는 얇고 음산한 달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