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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르곤의 눈물 6 (7/16)

휘르곤의 눈물 6

여름인데도 이곳의 기온은 서늘하기만 하다. 축축한 벽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기 때문일 테지.

하지만 미신을 좋아하는 놈들은 죽은 자들의 망령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라고 과장되게 몸을 떨며 말한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가끔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흰빛의 덩어리를 대체 뭐라고 정의한단 말인가.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이 모이는 곳은 늘 그렇듯,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곳에도 산재하고 있다.

이곳에 갇힌 지 며칠이 지났는지,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사방에 가득 들어찬 어둠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든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차라리 끔찍한 고문을 받는 편이 이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끼니 때마다 작은 구멍으로 식사가 들어오지만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 하나와 건더기라고는 없는 묽은 스프뿐인 초라한 식단이다.

하지만 맛이 없다는 이유로 음식을 거부하는 자는 진정한 군인이 아니다. 몇 날 며칠을 힘든 훈련에 시달리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바닥에 기어다니는 벌레조차도 입에 집어넣는 것이 군인이라는 족속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꼬박꼬박 식사를 넣어주는지는 몰라도 배가 부른 만큼 초조해진다.

그때 왕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씹어삼킬 듯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미치광이 왕에게 그런 폭언을 퍼부은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기도 했다.

부엌에 숨어 왕의 흉을 보던 하녀들의 팔다리를 산 채로 잘라 맹수가 출몰하는 산 속에 버린, 그런 남자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철컹!

쇳소리와 함께 작은 구멍 사이로 음식이 담긴 접시가 들어온다. 뮌은 황급히 문가로 다가가 간수를 소리쳐 불렀다. 소용없는 일이란 것은 알지만 외부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봐, 거기 서! 가지 말라고!”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멀어져 간다.

오늘도 허탕인가.

하지만 곧이어 멀어졌던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아닌,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은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그자의 체중이나 직업 등을 알아챌 수 있다. 뮌이 알기에 이 지하 감옥의 간수들 중에 저런 고양이 같은 발걸음 소리를 지닌 자는 없다.

곧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결코 열리지 않던 철창 문 위의 면회용 구멍이 열렸다. 상대의 눈 정도만이 보이는 작은 구멍 사이로 주홍빛 불꽃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옅은 암갈색 눈동자와 콧잔등 아래로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

“뮌 님, 접니다.”

펜이었다.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탐욕스런 정치가처럼 권력욕에 물들어 있던 청년.

“자네가 웬일인가?”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방문이 이렇게 기쁘다니. 평소에는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인물이지만 작은 구멍 사이로 두 눈을 드러낸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빛나 보였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말하겠습니다. 왕께서는 군사 협정을 깨고 페르티잔의 수도에 군사를 잠입시켰습니다. 왕께서는 그들에게 라자르 왕과 그에 관련된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셨지요.”

완전히 돌았군.

페르티잔이 저질렀던 과거의 악행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건가.

“그리고 왕께서는 당신의 손발을 자르고 눈과 혀를 못 쓰게 만들어 사막 한가운데 던져버리라고 간수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 미치광이다운 처사군.”

“어찌 됐든 당신에 대한 처분은 내일입니다. 돈으로 간수 하나를 매수해 놨습니다. 그가 오늘 밤 자정에 자물쇠를 풀어놓을 겁니다. 그리고 위장용 옷과 간단한 무기는 감옥 뒤 창고에 두겠습니다.”

“어째서 날 도와주려는 거지? 자네는 날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네, 맞습니다. 하지만 뮌 님, 그때 당신이 왕에게 퍼부었던 말에 나 역시 동감합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왕은 미쳤어요.”

주홍빛 불꽃이 멀어져 간다. 구멍으로 비쳐 보이던 그의 두 눈이 일그러지더니 불꽃과 함께 어둠 저편으로 녹아 들어갔다.

“날 풀어준 것을 왕이 알게 되면 너 또한 위험해질 거다, 펜.”

“나도 곧 이곳을 떠날 겁니다. 더 이상 그런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진 않아요.”

청년의 목소리가 애처로울 정도로 떨렸다.

한참 동안 뮌은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어둠 저편을 응시했다.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지면 어둠 속에 숨겨진 광경을 볼 수 있게 된다. 자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드나드는 쥐의 움직임이라든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빵 부스러기를 갉아먹는 벌레들,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쉬익, 바람 소리를 내며 눈앞으로 흰빛의 덩어리가 스쳐 지나갔다.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채 그것은 좁은 방 안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다가 결국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사라지고 만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멘스터 지방으로 가도 좋을 것이다.

평화롭고 안락한, 어머니의 품속 같은 그곳으로.

하지만 목구멍에 수십 개의 돌덩이가 걸린 것만 같다. 자신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해도 그 아이는......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아이, 레이루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미치광이 왕의 손에 붙잡혀 힘없이 늘어져 있던 그 아이는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인가.

놔두고 갈 수 없다.

이미 자신은 그 사슴처럼 여린 아이의 두 눈에, 그 깊고 깊은 연못 속에 발목까지 푸욱 담가버렸다. 그대로 그 악마의 손에 희생당하게 할 수는 없다.

스칸데르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이상, 왕은 더 이상 그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을 테니 어쩌면 이미 처형되었는지도 모른다.

뮌은 머릿속에 떠오른 피투성이가 된 레이루의 모습을,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아직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은 전쟁 준비로 여념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문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테니까.

살아 있다.

그 아이는 살아서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 것이다.

직감을 믿자.

그 아이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 멘스터로 가는 거다.

전쟁이 없는 그 평화로운 안식의 땅으로.

『너는 행복해질 수 없어. 너는 늘 불행할 거야. 너는 내 아들이니까. 그러니까 언젠가는 나처럼 파멸할 거다, 뮌.』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형당하던 사내,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려던 살인귀, 한때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주와도 같은 말을 내뱉으며 죽어갔다.

‘만약 아버지의 말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처럼 파멸한다고 해도 아주 잠깐 달콤한 꿈을 꾸는 것 정도는 허락되겠지요. 어머니.’

딱딱하게 굳은 빵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뮌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어둠이 눈꺼풀 안에 물처럼 고여든다.

잠깐 자두는 것이 좋으리라. 곧 자진해서 들어가게 될 호랑이 굴은 지금껏 경험했던 그 어떤 전쟁터보다도 더 끔찍하고 참혹한 지옥일 테니까.

달이 차오른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개수를 세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신경질적으로 시트를 쥐어뜯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몸 위를 짓누른 돌덩이는 점점 그 무게를 더해 갈 뿐이었다.

시트 위에 펼쳐진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을 띠고 있다.

머리카락을 물들이고 있던 어둠의 색을 자신의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들통날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었던가. 하지만 막상 그때가 닥치자 이상할 정도로 태연해진다. 물론 앞으로 닥칠 일이 두렵기는 하지만 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뜨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또 식사를 남기셨네요.”

끼니 때마다 늘 식사를 가져다 주는 하녀가 혀를 차며 음식이 그대로 남은 식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대로 굶어 죽기라도 할 작정이신가요?”

이 하녀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줌마처럼 말이 많다.

“저기요......”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목구멍 안쪽에서 그 말이 빙글빙글 맴돈다. 그러나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일부러 소리를 내 그릇들을 치우며 하녀는 또 시끄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낮은 목소리다.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의 말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처럼 소곤소곤,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다.

“왕께서 뮌 님에 대한 처분을 내리셨어요. 손발을 자르고 눈을 지지고 혀를 뽑아 사막에 던져버리라는 명령이셨죠.”

쓸데없이 자세한 그녀의 설명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런......”

“집행일은 내일 오후로 정해졌어요. 그리고 왕께서는 당신에 대한 처분도 내리셨어요. 극살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나요?”

레이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려온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당신들에 대한 처분은 잊지 않고 내리신 걸 보면 어지간히 약이 올랐던 모양이죠.”

성에서 일하는 하녀치고는 상당히 거칠게 말하는 여자다. 어떤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좋은 평을 듣기는 힘들겠지만 그 미치광이 왕 정도쯤 되면 도처에 적이 깔려 있을 것이다.

“아마 두 분은 죽어도 곱게 죽진 못할 테죠.”

저 여자의 말은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극살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사태를 지켜보는 관망자가 된 기분이다. 죽는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생각될 정도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칠 끔찍한 현실보다도 감옥에 갇힌 그 남자가, 걷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사막을 떠돌다가 결국은 독수리의 먹이가 될 그가 걱정이 된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머릿속이 말끔하게 비워져 갔다.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조금쯤은 강해진 것일까. 아니, 이것은 죽음을 초월한 자만이 낼 수 있는 용기다. 힘이다.

“그래서 내게 하려는 말이 뭐지요?”

하녀는 놀란 듯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일종의 도박이었다.

말이 많은 여자긴 해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런 말을 꺼내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그저 자신을 비꼬기 위한 말이었다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

“무슨... 전 그냥 당신이 딱해서......”

변명하는 폼이 어설프기 그지없다.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눈에 힘을 주고 필사적인 절박함을 담아.

당신은 내게 할 말이 있을 거야.

이대로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어.

난 이제 더 이상 나약한 어린애가 아냐.

그러니 뭐든 말해 줘.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지만 이대로 죽기는 싫어.

그녀의 두 눈이 불꽃처럼 일렁인다. 그리고 멍청하게 풀려 있던 그녀의 얼굴은 다른 그림을 덧댄 것처럼 요염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존재가 그녀의 몸을 빌렸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들고 있던 그릇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그녀는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 사소한 동작 하나조차도 지독히 관능적이다. 그다지 예쁜 외모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녀는 그 어떤 미녀보다도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마저 독한 향기를 내뿜는 듯한 기분이다.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하는 어린 계집애라고 생각했더니 제법이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대가 없는 도박은 자신의 승리였다.

뮌, 그 남자도 말했었다. 자신은 직감이 뛰어나다고.

무의식 중에 그녀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냄새를 감지한 것일까?

아무려면 어떠랴.

그녀는 독 이빨을 가진 뱀처럼 위험해 보였지만 최소한 그 날카로운 이빨이 자신을 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만, 그렇게 믿는다.

“하긴 평범한 애였다면 간 크게 그 미치광이 짐승을 속이려 들진 않았겠지. 미쳐버려서 겨우 그 정도 속임수도 눈치 채지 못한 그놈이 바보 같은 거겠지만.”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말아올리며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저 부자연스런 미소, 치켜 올라간 두 눈, 색기 넘치는 손짓.

“당신... 언젠가 만난 적 있죠?”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더니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어머! 뭐야, 너? 지금 날 꼬시려는 거야? 난 귀여운 여자애는 좋아하지만, 너처럼 영악한 애는 사양이야.”

“그... 그런 게......”

“그때는 변장을 했었는데 잘도 알아보는구나?”

드디어 기억이 났다. 언젠가 늘 오던 하녀가 아닌 다른 하녀가 음식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음식을 가져온 그 하녀는 당장 잡아 처형시켰다고, 뮌은 그렇게 말했었는데 어떻게......?

“살아 있었어요?”

세이너 섬에서도 자신의 이런 한심한 점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었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중간에 끼어 얘기 중인 화제와는 전혀 다른 말을 툭 던져 분위기를 잡치곤 했던.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지 않은가.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괴로운 듯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온다. 얼마 동안을 발작하는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끅끅대다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그녀는 눈가에 눈물을 훔쳤다.

“하하하... 너 정말... 귀여워... 쿡쿡......”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코끝을 사정없이 잡아 흔들었다.

어린애한테 하듯이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역시 말은 나오지 않았고 레이루는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그때 처형당한 건 내 대역이었지. 어차피 놈들은 내 얼굴을 잘 모르니까 같은 붉은 머리에 체구가 비슷한 대역을 적절한 장소에 놓아두면 되는 거였어.”

그녀는 즐거운 추억을 얘기하듯 미소짓고 있었지만 레이루는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엉뚱하게 죄를 뒤집어쓴 여자가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처형당했다는 얘기 아닌가.

“어쨌든 시간이 없으니까 용건부터 말하지.”

새빨갛게 물든 코를 손으로 슬슬 문지르며 레이루는 그녀의 얘기를 숨죽여 들었다.

“우리는 헌터야. 오래전부터 우리들은 스칸데르의 순혈종을 찾고 있었지. 네가 스칸데르인이 아니란 건 유감이지만 너 같은 애가 머리를 물들이고 스칸데르인으로 행세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녀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 두 눈은 무엇이든 꿰뚫어보는 마법사의 수정 구슬처럼 보였다.

“우린 심각한 회의 끝에 결론을 내렸어. 네가 스칸데르인인 누군가를 위해 그런 어설픈 연극을 꾸몄다고. 그리고 그 사람은 분명 15년 전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순혈종일 거라고.”

옷을 움켜쥔 손이 약하게 떨려왔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헌터든 뭐든 간에 그녀는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유일한 조력자다.

“부정하지는 않네.”

“사실이니까요.”

“뭐야? 그렇게 쉽게 실토해 버리니까 왠지 맥이 빠지네.”

“당신들이 헌터든 뭐든 저와는 상관없어요.”

“그래?”

“도와줘요.”

이상하게 그 말은 너무도 쉽게 튀어나왔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눈에서 비굴함은 엿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서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 지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우리들에게 스칸데르인이 아닌 넌 필요 없어.”

“그렇다면 왜 다시 날 찾아온 거죠?”

“......”

그녀는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다가 이내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됐다, 됐어.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그래, 난 널 도와주러 왔어.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움직이지 않아.”

그녀의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두 눈은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예르네이, 그 남자를.

지금 그가 자신의 모습을 봤다면 분명 기뻐했을 것이다. “강해졌구나, 레이루.” 하고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겠지.

언젠가부터 그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아파온다.

그와 헤어진 지 1년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 그와의 추억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그의 얼굴이 어땠는지, 그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그의 미소는 어땠는지,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간다.

그에 반해 감정이란 건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절망적으로 바뀌어간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랑으로, 그것이 가슴을 저며오는 그리움으로......

“그 대가가 뭐죠?”

“당연하잖아. 네가 알고 있는 그 스칸데르의 순혈종에게로 우리를 안내할 것.”

레이루는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핏빛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지었다.

달이 차오른다.

영원처럼 더딘 시간이 점점 흘러 지나가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감하듯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는 뮌과, 여자가 챙겨준 평상복을 떨리는 손으로 입으며 밤하늘을 쳐다보는 레이루, 그리고 사건을 계획 중인 모두의 마음속에 얼음처럼 차갑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이 타오른다.

그리고 자정을 알리는 종 소리가 정확히 열두 번을 울린 순간, 쿠데타라고도 불리게 될 작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사건을 위해 모두가 잠든 그 시각에 몇 명의 인물들은 밤의 어둠을 갈랐다.

찌르륵찌르륵.

사내의 가쁜 숨소리는 풀벌레 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들짐승처럼 날렵한 몸짓으로 사내는 요령 좋게 숲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전시 상황이라 그런지 곳곳에 근위병이 배치돼 있어서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펜이 구해 준 옷은 남루한 작업복 한 벌과 모자였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면 어느 정도는 얼굴을 가릴 수 있지만 저 사내들, 군인들에게 자신의 얼굴이 너무 잘 알려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나무 기둥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흘려버렸다. 펜이 숲 속에 준비한 말을 타고 도망치기만 하면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펜이 있었다면, 그런데 어째서 목숨을 걸면서까지 성으로 다시 들어가느냐고 한심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며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사정이란 게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때론 그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다른 한 명의 근위병이 길게 하품을 해대며 자리를 떠난다. 남은 것은 단 한 명. 이때가 기회다.

사내는 히이토 족의 전사에 비해선 작은 체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크지만 짐승 같은 저들에게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멘스터 족의 혼혈이라는 신체적 특징은 늘 위급 상황에 유리하게 적용했다. 그것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사내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근위병에게 달려들어 당황한 그가 무기를 다잡아 쥐기도 전에 적의 복부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몸속에 잠긴 칼을 빼내 명치께를 찌르자 커억 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다. 사내는 피로 젖은 검을 근위병에 머리카락에 문질러 닦고는 문 대신 벽으로 기어 올라가 반대편으로 뛰어내렸다.

왕이 거처하는 중앙의 성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다. 그 때문에 풀벌레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린다. 수만 마리의 벌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듯한 기분이다.

사내는 정확히 성의 가장 바깥쪽, 휘르곤의 눈물을 원작으로 한 그림이 있는 그 방을 향해 달음질쳐 간다.

어디선가 개가 짖었지만 그것은 곧 풀벌레 소리로 바뀐다. 아직까지는 아무 위험이 없다. 아직까지는.

같은 시각.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문 앞을 지키고 섰던 근위병이 절명하고,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타이트한 옷을 입은 매력적인 미녀가 웃는 낯으로 방 안의 누군가에게 손짓을 한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남루한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아이였다.

“절대 나를 놓치지 마. 알았지? 내 뒤만 잘 따라오면 돼.”

소녀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여인은 날렵한 몸짓으로 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지만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막 성 안을 순찰하고 돌아가던 근위병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눈앞에 거대한 벽이 세워진 것처럼 숨이 터억 막혀온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큰 사내들의 생명을 단숨에 앗아갔다. 엄청난 속도로 두 남자 사이를 번갈아 뛰어다니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춤을 추듯 팔랑이는 그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남자는 피를 흩뿌리며 절명한 것이다.

‘대단하다!’

이런 여자를 적으로 두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소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맞닥뜨린 적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우선 그 수가 문제였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자랑하는 그녀라 할지라도 곰 같은 덩치의 사내들이 한꺼번에 덤벼드는 상황은 좀 버거운 모양이었다.

매끄러운 피부에 상처가 생기고, 그녀의 얼굴을 타고 땀방울이 쉴 새없이 쏟아져 내렸다.

소녀는 눈치 빠르게 구석에 숨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있다가는 그녀의 걸림돌이 되고 만다.

결국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기고 도망친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녀는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 복도를 벗어나려는 순간 걸어오던 근위병과 마주치고 말았다. 소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터져나올 듯이 뛴다.

“뭐야? 이런 늦은 밤에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거냐?”

다행히도 그는 자신을 성의 하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 할 일이 좀 많아서요.”

“하긴 왕께서 쓸데없이 일을 벌이신 바람에 정신없이 바쁘긴 하지.”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어색하기만 한 그 미소에 근위병도 마주 웃어 보인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꽤 순박한 청년 같았다.

다리를 움직이자 만에 하나 일이 생기면 쓰라고 그녀가 허벅지에 매어두었던 단검의 표면이 살갗에 스친다.

“그런데 너 굉장히 낯이 익단 말이야. 대체 어디서 봤더라......”

남자는 잠시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생각을 하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소녀의 가는 팔을 붙잡았다.

“너... 혹시... 그 스칸데르 계집애......?”

스커트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단검을 빼내고 무방비 상태의 사내를 찌른 일련의 동작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가 칼의 손잡이 부분을 잡은 손을 뒤덮었다. 사내는 굳은 얼굴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크게 몸을 떨었다. 단지 그에게 잡힐까 무서워서, 남자에게서 빠져나가기 위해 칼 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움켜잡힌 팔이 자유로워지고 남자의 몸은 더욱 크게 경련했다.

검붉은 피가 흘러 대리석 바닥에는 금세 커다란 피 웅덩이가 생기고 말았다. 소녀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고 사내의 곁을 스쳐 지났다.

사람을 찌른 것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의해 피를 내뿜으며 죽어갔다.

사내의 몸속에 칼을 꽂아넣었던 손이 덜덜 떨려온다.

그 남자, 죽었을까?

그렇게 피를 많이 흘렸으니 죽었으리라.

하지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그 남자는 적이니까... 죽어 마땅한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래도 그 사람의 미소는 어린애처럼 순수했는데......

아냐, 겨우 이 정도로 눈물을 보이면 안 돼.

강해지겠다고 했잖아, 강해지겠다고......!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목이 메어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자의 피로 더러워져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자신만이 깨끗한 척, 보호받는 공주님처럼 벌벌 떨며 살아갈 순 없으니까.

하지만 무서워.

무서워요, 예르네이.

난 아직 당신처럼 강해지려면 멀었나 봐요.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어느새 건물을 벗어난 것 같다.

풀벌레 소리가 귀를 울리고, 선선한 바람이 경직된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무작정 달리고는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넓고 광활한 대지 위에 홀로 남겨진 듯한 그런 황량한 기분이다.

어째서일까, 지금 이 순간 그 남자가 생각나는 것은......?

자신이 이용하고, 그런 자신 때문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 그 바보 같은 남자, 뮌. 굵은 주름을 만들며 접히는 두 눈이 무척이나 지쳐 보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도와달라는 자신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내뻗은 자신의 손을 잡고 기꺼이 지옥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겠노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던 사람이었다.

“이봐! 거기 누구야!”

어둠 속에서 맹금류처럼 잘도 자신을 알아보고 누군가 소리쳤다. 그리고 풀을 밟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얼마 가지 못해 남자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너 대체......”

거칠게 뒷덜미를 붙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휘청거리며 소녀는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살고 싶다고 갈망했던 것에 반비례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무뎌져 있었다.

하지만 소녀를 붙잡은 사내는 괴이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뜻밖의 상황에 소녀는 크게 확대된 눈으로 어둠 속의 인영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마찬가지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부드러운 달빛이 그의 지친 어깨 위로 녹아들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두 눈이 달빛처럼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리고, 투박한 그 입술이 열리고, 믿을 수 없는 말이 새어나온다.

“레이루......?”

소녀는 꿈을 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달빛이 만들어낸 환상,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자신이 멋대로 만들어낸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환상과도 같은 존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레이루... 설마... 레이루, 정말 너인가?”

“......!”

달려들어 안겼다. 그 커다란 가슴에 안겨 두 팔로 그의 땀 냄새가 나는 목을 껴안았다.

뮌이었다. 지하 감옥에 갇혀 내일 있을 처분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그 사람이다.

울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을,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얼굴을 차례대로 어루만졌다. 이것은 분명히 현실의 감각이다. 이 따스한 체온은 분명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다.

“레이루......”

바람결에 꽃향기가 실려 온다.

마음속까지 편안하게 해주는 그리운 냄새다.

세이너 섬에서도 여름이 되면 똑같은 향기가 났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들판에 누워 달을 쳐다보고 있으면 수면제와도 같은 꽃향기가 실려와 스르륵 잠이 들었다. 풀벌레 소리는 자장가였다. 볼을 간질이는 풀은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었다.

“널 데리러 가는 중이었어, 레이루.”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는 젖은 입술을 이마에 갖다대고 소리를 내 키스했다.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바보 같은 남자.

난 당신을 이용하려 했을 뿐인데.

난 그저 당신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정말 다행이야.”

그는 울고 있는 것일까. 얼굴 위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져 내린다.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그냥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그가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심장 박동 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이렇게 크고 강한 사람이 울고 있다.

살아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에 자신은 안심한다. 쿡쿡 쑤셔오던 가슴 한쪽의 고통이 씻은 듯 사그라진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그의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하지만 싸움터에 놔두고 온 여전사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뛰어왔기에 더 이상 그의 품에서 안락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와 함께 꿈에서 깨어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조우한다.

“저기다!”

자신들이 탈출한 사실을 알아챘는지 횃불을 든 근위병들의 외침이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젠장!”

피투성이가 된 여인은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소녀의 가는 팔을 움켜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녀와 여인을 호위하듯 낡은 작업복의 사내가 그 뒤를 따른다.

달은 하늘 위, 정중앙에 홀연히 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달이 지고 해가 뜨면 모든 상황은 끝나 있을 것이다. 저들에게 잡혀 예정대로 처형을 당하거나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 어딘가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리고 그 확률은 정확히 반반. 어느 한쪽도 한 치의 오차가 없기에 쫓는 쪽도, 도망치는 쪽도 필사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쾅!

하녀들이 흠칫 놀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을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 미친 들짐승 한 마리와 그의 희생양이 된 가련한 양이었다.

깨진 유리 파편을 밟으며 들짐승이 눈을 번뜩이며 다가섰다.

“지금 뭐라고 했지? 뭔가 재미있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말이야.”

사내는 눈앞에 놓인 한쪽뿐인 물빛 눈동자에게서 애써 시선을 피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한다.

“뮌 님과 스칸데르인을 가장했던 소녀가 탈출했습니다. 피해자가 많은 것으로 보아 조력자가 있었음이 분명......”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사내는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들짐승의 지팡이는 용서가 없었다. 사정없이 사내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쓰러진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지금 그 두 연놈이 탈출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사내는 입가의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때 자신들이 왕이라고 부르며 칭송하던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천박한 욕설을 내뱉고, 분노로 몸을 떨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남자는 광인(狂人)일 뿐이다.

“그 두 연놈을 놓쳤다고!”

거센 일갈과 함께 왕의 지팡이는 허공에 떠올랐다가 사내의 몸을 가격하기를 반복했다. 피가 튀고, 결국 사내의 몸이 바닥에 늘어져 벌레처럼 꿈틀댈 때까지 그는 일방적인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 두 녀석이 도망을 쳤다. 자신을 속이고, 그런 자신을 비웃던,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두 연놈이......!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바드득바드득 갈린다.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걷어올려 흉터 투성이의 팔을 긁었다.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흐르고 진물이 흘러도 사내는 그 편집증적인 동작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아문 상처이건만 가끔 이렇게 참을 수 없이 가렵다. 쿡쿡 쑤셔오고 뜨겁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불에 산 채로 타들어 가던 그 당시의 고통이 떠올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조금만 더 있으면 승리의 미소를 짓게 될 것이었다.

페르티잔의 그 빌어먹을 왕의 머리를 밀피유 꽃이 가득 담긴 상자에 넣어 언제까지고 자신의 집무실에 장식해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 제대로 잠을 이룰 수조차 없었다.

먼저 군사 협정을 깨고 일방적인 살육을 해댄 것은 그 남자다. 일족을 몰살시키고 핏덩이의 목숨조차도 앗아갔던 그런 남자다. 그 남자의 악행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해서 그 누가 자신을 욕하겠는가.

온몸을 잠식한 화상의 흉터, 자신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는 이런 몸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 남자, 페르티잔의 국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그 악마인데!

이것은 복수다.

자신이 느꼈던 고통을 그 남자에게도 똑같이 맛보게 해주겠다.

그 남자뿐만 아니라 주위에 관련된 자들까지도 모두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해주리라.

『그대는 스칸데르인의 신체적 특징도 모르고 내게 협박을 하려는 거요?』

그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웃던 그 남자의 얼굴을, 미소짓던 그 얼굴을 다시는 웃지 못하도록 짓이겨 주리라.

그리고 자신을 욕보였던 그 빌어먹을 아이, 스칸데르인을 가장하고 눈앞에 나타난 악마의 하수인 같은 계집의 자그마한 뇌를 뜯어 몸속의 내장을 쏟아낸 다음, 천천히 끓는 물을 부어 그 눈처럼 하얀 피부가 흉측하게 오그라드는 것을 보며 따분한 여름날의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다.

자신을 악마라고, 라자르 왕처럼 비웃음을 띤 얼굴로 소리치던 그놈의 몸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꿰뚫고 자른 다음, 비웃음 가득한 두 눈을 뽑아내고, 망발을 지껄였던 혀를 뽑아 사막의 들짐승들에게 던져주려고 했었다.

그렇게 하면 꽤 오랫동안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몸이 산 채로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 탈출이라니!

내게서 도망치려 하다니!

“거기 누구 없나!”

즉각 무장을 한 군인들이 부름에 응한다.

“그 두 연놈을 잡아들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산 채로 잡아와. 그들을 잡지 못하면 너희들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모조리 처형시킬 테다. 알겠나!”

그리 좋지만은 않은 표정을 하고 군인들이 물러섰다.

알고 있다. 성 안의 하인이나 군인들이 자신을 뭐라고 부르며 수군대는지.

피에 굶주린 악마. 미친 들짐승.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후일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간에 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몸을 지탱하는 것은 악마의 힘이다. 얼마 동안의 목숨이 연장된 대신 자신은 악마에게 사람들의 피와 살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자신은 악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저 페르티잔의 국왕이다.

“빌어먹을!”

욕설과 함께 사내는 한쪽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벗어 내팽개쳤다.

닫힌 유리창에 밀가루 반죽을 뭉쳐놓은 것처럼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이 어렴풋이 비친다.

의사의 도움으로 겨우 한쪽 눈만은 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한쪽 눈마저 침침해져 온다.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운명이다.

얼마 동안의 목숨을 보장받았지만 이제는 끝이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혼자 죽지는 않는다.

그때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들의 죽음을 관망했었지만 이번엔 함께다, 라자르 왕이여!

네놈이 죽인 수천, 수만의 원혼들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가는 거야.

나와 함께,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을 간직한 채.

“그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세상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감히 그 남자에게 싸움을 걸다니. 승산 없는 싸움이란 건 코흘리개 어린애도 알겠다!”

정말 기운도 좋다.

자신은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을 정도인데 여자는 아까부터 쉴새없이 계속 무슨 말인가를 지껄여대고 있다. 하녀인 척 변장을 했을 때부터 말이 많은 여자이긴 했다.

축축한 공기다.

꼭 이런 늪지를 지나가야 하냐는 질문에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죽고 싶냐,라는 단 한 마디로 자신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 살았다.

한동안 그 단어만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어떻게 그 지옥과도 같은 성을 빠져나와 숲 속으로 접어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눈앞에서 피가 튀고, 적의 비명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뮌은 자신을 말에 태운 채 어둠 속을 달렸고, 그 뒤를 여자가 따라붙었다. 그녀는 성을 빠져나오자 목을 젖히고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약 좀 오를 거다, 꼴통들! 하하핫!”

그녀는 관능적인 외모와는 달리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여자였다. 어느새 해가 뜨고 주위가 서서히 밝아졌다. 하지만 늪지에 잔뜩 낀 안개는 오후쯤이나 돼야 사라질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지친 목소리로 묻자 그녀는 웃는 낯으로 대답해 준다.

“바다로.”

“바다?”

그렇게 되물은 것은 뮌이었다. 그 역시 지칠 대로 지쳤는지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다.

“그래, 바다.”

“어째서 하필 바다지?”

“거기서 동료들과 합류해야 하거든.”

“우리들까지 너희들과 합류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

“무슨 소리! 저 꼬마가 자기 입으로 그랬다고. 스칸데르의 순혈종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말이야. 도망치거나 하면 가만 안 둬!”

레이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뮌의 시선이 아프도록 느껴진다. 쓸데없이 질문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을 아낄 줄 아는 진정한 어른이다.

“그런데 뮌, 당신 말이야. 어떻게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온 거지? 거긴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곳인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난 오래전부터 성에 하녀로 잠입해 있었다고. 그 미치광이가 저 애에게 약을 퍼붓고, 당신이 폭언을 퍼붓던 장면도 모두 봤지. 당신, 군인치고는 꽤 괜찮은 남자야. 용기도 있고.”

그녀의 두 눈이 유혹하듯 가늘게 접힌다. 피로 더러워져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넌 뭐지?”

하지만 뮌은 그 노골적인 유혹에 넘어갈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였다.

“이래 봬도 난 눈빛 하나로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여자라고. 이거 무지 자존심 상하는데?”

“쓸데없이 말 돌리지 마. 적이라고 생각되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가는 목을 비틀어줄 테니까.”

“너무 사납게 굴지 마. 난 당신의 적은 아냐. 까놓고 말하자면 히이토의 정권을 잡고 있는 바보 같은 국왕에게 반기를 든 반역 세력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난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어.”

“하지만... 당신은 헌터라고......”

갑자기 끼어든 레이루를 두 사람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 애,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설마 헌터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헌터는 반역 세력을 뜻하는 일종의 은어 비슷한 거야.”

괜히 무안해져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런 레이루를 보며 쿡쿡 소리 내어 웃는 여자에게 다시 뮌의 싸늘한 질문이 화살처럼 꽂힌다.

“네가 헌터의 일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하지만 어째서 스칸데르인의 순혈종을 찾는 거지?”

“스칸데르인만이 찾을 수 있다는 전설의 성지, 그곳을 알아내기 위해서.”

“보물이 탐나는 건가?”

“군인을 모으기 위해선 군자금이 필요해. 뭐 돈이 필요한 탓도 있고 대대로 내려오는 그곳의 전설이 궁금하기도 해서 말이야.”

옛날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코끼리가 자신이 죽을 곳을 찾아가듯 스칸데르인에겐 그들만의 공통된 안식처가 있다. 그곳은 순수 스칸데르인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결코 알려지지 않은 전설 속의 성지라고 했다.

스칸데르라는 나라가 대륙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춘 이후부터 그곳은 천국의 이상향이 되어버렸다.

금은보화가 가득한 황금의 땅, 그곳에 가면 누구든지 안식을 취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다.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준다는 전설의 성지......!

뮌은 말이 없었다.

안개 낀 고요한 세계에 따가닥따가닥, 말발굽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묻고 싶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기에 레이루는 말을 아꼈다.

“우리는 곧 그 미치광이 왕을 공격할 거야.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영원히 자유지.”

“그렇겠지.”

“자유롭게 되면 당신들은 뭘 할 거야?”

“글쎄......”

그는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린다.

기대하면 안 된다.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두면 안 된다.

하지만 그의 품은 따스하다.

안락하다......

“레이루, 힘들면 내게 기대서 눈이라도 좀 붙여라.”

레이루는 그의 지친 얼굴을 마주보며 약하게 미소지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대체 당신들 어떤 관계야?”

“성의 하녀로 있었다면 잘 알 텐데.”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란 게 통하느냐 이거지.”

뮌은 말없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감정? 이 사람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이란 것은 대체 뭘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축축한 습기가 몸을 감싸온다.

이곳에서는 여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물비린내와 이끼 냄새, 그런 불쾌한 냄새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무리 가도 가도 안개로 뒤덮인 길은 끝나지 않는다.

소녀의 머릿속으로 독한 유황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이 펼쳐진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연한 발바닥이 타들어 간다. 언제까지고 이 길을 걸을 순 없다. 길의 끝에 존재하는 것은 지옥이다. 그리고 지옥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것은 자신 혼자다.

“젠장, 설마 벌써 따라붙은 건가?”

여자의 신경질적인 외침과 함께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떨어지게 되더라도 항구로 오라고. 알았지?”

아무도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말의 고삐를 감아쥐며 다잡고 앞서 달리기 시작한다.

“잡혀서 뒈지고 싶지 않으면 무조건 튀어!”

거친 욕설이 섞인 그 말을 여운처럼 남기며.

“으아아악!”

침대가 크게 요동치고 곁에 늘어서 있던 장정들이 일제히 물고기처럼 퍼덕이는 사내의 몸을 잡아 누른다.

“거기 잘 좀 잡아!”

“젠장! 의사 양반, 뭐 하는 거야? 어떻게 좀 해보라고!”

쓸데없이 느긋하기만 한 중년의 의사가 가방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더니 하인 하나에게 사내의 입을 잡아 벌리라고 명령했다. 억지로 벌려진 입 안에 의사는 작은 병에 든 물약을 쏟아부었다.

“토해 내지 못하게 입을 막아!”

반항은 심했다.

맹수처럼 미쳐 날뛰는 사내를 잡아 누르기란 쉽지가 않았다. 한쪽 손에 채워진 족쇄를 침대 기둥에 고정시켰는데도 다른 한 손으로 신체 건장한 청년들을 휙휙 잘도 내친다. 평소에도 다루기 힘든 남자였지만 이건 거의 괴물 수준이다.

얼마 동안 거세게 요동치던 몸이 서서히 얌전해진다.

“대단하군그래. 그 정도의 약을 먹고도 몸을 움직이다니. 코끼리한테도 그 정도는 먹이지 않는데 말이야.”

“빌어먹을 영감탱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동물한테 먹이는 걸 사람한테 먹였단 말이야? 이거 완전 돌팔이잖아!”

“모르고 있나 본데 난 원래 수의사라고.”

순간 유그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수의사? 의사를 불러 오랬더니 수의사를 불러 와?!”

유그는 매서운 눈으로 곁에 선 칙을 노려보았다.

“하... 하지만 전쟁 때문에 의사가 씨가 말랐다구요.”

“네프 님의 주치의가 있을 거 아냐!”

“주치의든 뭐든 의사란 의사는 모두 수도로 갔어. 그곳은 완전 아비규환 상태라니까.”

고르게 숨을 몰아쉬며 늘어진 환자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던 돌팔이 의사 ─ 정확히는 수의사지만 ─ 는 혀를 찼다.

“얼래? 이건 화살에 맞은 상처잖아? 채 아물기도 전에 몇 번이나 터졌구만. 대체 어떤 변태 같은 놈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알고 싶군그래.”

그 변태 같은 놈이 바로 이 성의 주인이자, 국왕의 숨겨놓은 아들이라는 사실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때 그 광경을 본 것은 자신과 데일뿐이다. 데일이야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걱정이 없지만 문제는 그놈의 소문이란 놈이다.

“눈은 괜찮을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떤 놈인지 몰라도 무식하게도 잡아 뺐구만. 아예 손으로 눈알을 뒤집어 파기라도 한 건가. 아예 동공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완전히.”

일단 그때 네프의 손에서 신경까지 제대로 붙은 동공을 빼앗아 고이 모셔두긴 했어도 다시 갖다 붙이기란 사실상 힘들어 보였다. 웬만큼 의학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빼냈던 눈알을 다시 집어넣기란 불가능하기에.

“허 참, 어린 시절엔 돼지 눈알을 빼서 구슬치기를 하긴 했지만, 요즘 놈들은 인간의 눈알을 빼서 구슬치기를 하는 건가?”

“당신... 그거 농담 맞지?”

“허긴 자네, 그런 거지 꼬라지를 하고 있어도 귀족이라고 했지? 빈민가에선 말이야, 돼지 오줌통을 공 삼아 놀기도 한다고.”

물론 태생은 귀족이라도 이곳저곳을 전전해 다닌 덕에 돼지 오줌통으로 축구를 하는 애들은 봤어도, 돼지 눈알로 구슬치기를 하는 정신 나간 애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어이, 이 녀석 좀 돌려봐.”

“또 뭔 짓을 하게! 돌팔이 영감아!”

“등 쪽에도 상처가 많을 거다. 여름이라서 제대로 치료해 두지 않으면 곪아 문드러져.”

그의 몸을 돌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게 시체를 옮기는 듯한 기분이다. 착잡했다.

다행히 등 쪽에는 그리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의사는 상처 하나하나에 손수 찧은 약초를 바르며 가끔 미간을 좁히고 혀를 찬다. 이 정도의 덩치를 한 청년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시체처럼 늘어진 모습이 딱해 보일 터.

“그런데 이놈은 뭐 하는 놈이냐?”

“그냥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야.”

“아직 젊은데 이런 꼴이 되다니 딱하군. 한쪽 눈만 계속 혹사시키면 언젠가는 한쪽 눈마저 멀게 돼.”

“그렇겠지.”

“그나저나 저놈들 좀 어떻게 해줄 수 없나? 어디 부담돼서 치료하겠어?”

지금까지 잘도 치료했으면서 새삼 부담스러운 척은.

유그가 손짓하자 살벌하게 곁을 지키고 있던 하인들이 깍듯이 인사한 뒤 사라진다.

“어이! 너도 나가라, 칙.”

“싫어요! 유그 님이 뭐라 말씀하셔도 난 안 나갑니다. 예르네이 님 곁에서 병간호할 거예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매정하게 쫓아낼 수는 없다.

칙은 예르네이를 존경했다.

자신도 늘 이 남자처럼 강해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칙, 아직도 넌 이 남자를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어?

지금 네놈이 이 남자에게 느끼는 감정은 존경이 아니라 동정이라는 걸 넌 모를 테지.

“그나저나 정말 잘생긴 놈이군그래. 이 딱딱한 근육 좀 보라고.”

“사람을 고기 주무르듯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지 마.”

“아무리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도 대부분 이런 근육은 만들어지기 힘들다고.”

“영감탱이, 좋은 말로 할 때 그만둬.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을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그 손이 댕강 잘리게 될 테니까.”

“귀족 나부랭이들은 허풍이 심하다니까.”

의사는 투덜대면서 약초가 묻은 손으로 슬슬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척추를 따라 움직이던 그 손이 뒷목으로 올라가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웬만해서는 노출되지 않는 부위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이런 곳까지 상처가 있군. 잠깐... 이건 최근에 생긴 상처가 아닌 것 같은데.”

의사와 함께 유그는 드러난 예르네이의 뒷목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작은 흉터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그것은 화상의 흉터가 분명하다. 하지만 단순히 흉터라고 보기에는 확실하게 모양이 있다. 마치 주인이 노예에게 자신의 소유라는 낙인을 찍듯이......

의사는 자연스럽게,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약초를 바르는 척하면서 화상의 흉터를 덮었다.

허공에서 유그와 의사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얼굴은 밀가루를 바른 듯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봐, 칙이라고 했나? 부엌에 가서 포도주를 좀 가져다 주지 않겠나?”

의사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이 약초는 포도주와 함께 섞어야 되거든. 환자를 위한다면 다녀와 주게.”

‘환자를 위한다면’이라는 말에 칙은 눈을 빛내고서 불평 한마디 없이 부엌으로 달음질쳐 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유그였다.

“영감... 당신, 죽는 그 순간까지 비밀을 지킬 자신 있어?”

“내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차라리 방금 전 자신이 본 것이 꿈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엿 같은 경우가 다 있나!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건 대체 뭐냐고!

그 뒷목의 흉터는 별 모양을 하고 있었다. 피부색이 짙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녹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페르티잔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안다.

밤의 색과도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저주받은 표식이라고 일컬어지는 낙인.

그것은 스칸데르인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일부러 그 저주 같은 표식을 달고 다닐 사람은 없다.

‘젠장, 하필 스칸데르인이라니!’

그것도 순혈종을 의미하는 낙인이라니!

어째 사태가 꼬여도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그저 추방된 귀족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사람이 이 나라 왕의 아들이라고 하질 않나, 그 사람이 현재 목매고 있는 상대가 빌어먹을 스칸데르인이질 않나!

카이라, 그녀가 예르네이가 스칸데르인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졌을 땐 그저 웃어넘겼었는데 그 말이 현실이 되다니... 이대로 미쳐 죽지 않는 것만도 신기하다!

“스칸데르인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그래. 내가 이 청년 나이 정도 됐을 때 스칸데르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여자를 만났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스칸데르인은 눈에 확 띄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사람 눈을 잡아끌게 하는 매력이 있거든.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에 홀라당 반해 버렸었는데 말이야. 만약 그때 그녀와 결혼을 했더라면 정말이지, 큰일날 뻔했어.”

“그랬더라면 지금 이렇게 영감 얼굴을 볼 일도 없었겠지.”

중년 의사는 억지로, 정말 억지로 미소지었다.

“귀족들 중에 스칸데르 혼혈을 노예로 삼는 골 빈 놈들이 있다고 하던데, 이 성의 주인이란 놈도 그런 건가?”

아까도 그랬듯이 유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영감탱이.

당신 말대로 이 성의 주인은 상종 못 할 변태에 골 빈 귀족 나부랭이야.

하지만,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이 남자가 스칸데르인이라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우연찮게 그 사람의 마음에 든 남자가 스칸데르인이었어.

왜 삼류 로맨스 소설에서도 자주 나오는 대목이잖아.

어쩌다가 내가 좋아하게 된 여인이 비천한 천민 계급의 여인이었을 뿐, 그녀가 누구든 내 마음엔 변함이 없다오.

“아성초로 염색을 하긴 했어도 곧 검은 머리가 자라날 게야.”

“그렇겠지.”

“더 알려지기 전에 새로 염색을 시키도록 해.”

“오늘 본 것은 무덤 속까지 가져가도록 해, 영감.”

다시 한 번 다짐을 시켰지만 그리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이 나라도 곧 엉망이 될 텐데. 스칸데르인에 대한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난다는 왕이지만 이런 때에 그런 것까지 돌아볼 여유는 없겠지.

똑똑.

정확히 두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유그와 의사는 황급히 남자의 몸을 돌려 눕히고, 시트를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데일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땐 유그와 의사는 이마에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 오늘도 더럽게 덥지 않나?”

“그러게! 이러다간 햇볕에 타서 인간 바비큐가 되는 거 아닌지 몰라!”

한 쌍의 바보 콤비 탄생.

데일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들고 왔던 옷을 테이블 위에 포개놓았다.

“예르네이 님의 새 옷입니다. 제일 큰 치수로 준비했는데 괜찮을까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작으면 찢어서 입히면 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지.

당신이 늘 입고 다니는 그 후줄근한 옷이야 얼마든지 입고 버릴 수 있을 테지만, 네프 님 정도 되는 귀족의 옷은 서민들의 한 달치 생활비보다 더 값비싸다는 사실쯤은 알 텐데.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없어, 없어!”

“네, 그럼......”

여전히 밥맛 떨어지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뒷걸음질쳐 밖으로 나가던 데일이 문 앞에 멈춰 서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덧붙여 말한다.

“그런데 유그 님, 네프 님이 또 어디론가 가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저 빌어먹을 집사!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말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냐고!

“어이, 영감탱이! 예르네이를 부탁해.”

흰 태양빛이 작렬하는 복도를 달려갈 생각을 하니 좀 끔찍하긴 하다. 정말 이놈의 날씨는 왜 이렇게 더운 건지. 덥지도 않은지 문가에 기대선 데일은 오늘도 완벽한 정장을 입고 있다.

“네프 님께 가시는 겁니까?”

“지금 그 사람 제정신이 아냐. 당신도 잘 알 텐데? 그 사람 나가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차라리 바깥으로 나돌게 놔두는 편이 더 좋을 듯합니다만.”

“뭐?”

데일은 사나운 자신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 밑이 거무죽죽한 게 그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장면을 보고도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바보거나 미친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의 네프 님은 저분과 접촉하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봐, 데일. 넌 네프 님을 좋아하냐?”

웬 헛소리냐고, 그의 치뜬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말이야, 네프 님이 정말 좋아. 그 사람은 내 가족 같은 사람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겁니까?”

“네프 님 때문에 저렇게 된 예르네이가 불쌍하긴 해도 내게는 저 남자보다 네프 님이 더 소중해. 그러니까 딱해도 어쩔 수 없어. 네프 님이 괴로워하는 걸 보는 건 싫으니까.”

“저분을 죽이기라도 하실 겁니까, 네프 님을 위해?”

지나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저씨다. 자신처럼 날 때부터 머리가 좋은 건 아닌 듯하지만 연륜의 차이일까? 섣불리 감정을 토하는 법이 없고 늘 침착하다. 하지만 가끔 그 침착함이 두려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자신도 네프 님을 위해 그렇게 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예르네이의 목을 조를 그런 남자다.

“어... 어이,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네프 님과는 달리 그냥 보통 사람이라고.”

“그래서요?”

“뭐?”

“그래서 저분을 어떻게 할 작정이십니까?”

아무래도 역적모의를 하기엔 장소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데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주춤 물러섰다.

“참 내, 왜 피하는 거야? 내가 당신한테 키스라도 할까 봐?”

데일의 굳은 얼굴이 순식간에 장밋빛으로 물든다.

세...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저 무뚝뚝함의 대명사 데일이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이봐, 왜 얼굴을 붉히는 거야? 나한테도 취향이란 게 있다고! 내가 인간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노땅이든 영계든 닥치지 않고 잡아먹는 그런 놈으로 보여? 요즘 아무리 여자를 안지 못해 욕구불만이긴 해도, 남자에다가 당신 같은 노땅한테 손을 댈 정도로 굶주리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돌아갔다.

어... 어라? 잠을 못 자서 눈 뜬 채로 꿈이라도 꾸는 건가.

지금 데일이 내 뺨을 후려갈긴 거야?

“이것 하나만은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종을 맹세한 것은 네프 님뿐입니다. 그리고 전 당신이란 존재가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네프 님의 손님이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겠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불쾌합니다.”

뻐끔뻐끔.

유그는 한 마리 붕어가 되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붙잡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그에게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최소한의 예의 ─ 인사를 하는 것 따위의 ─ 를 갖춘 뒤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다.

저거 진짜 데일이 맞긴 한 거야? 늘 네프 님의 곁에 서 있던 인형 같은, 그 밥맛없는 집사가 맞는 거냐고.

저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누구 뺨을 후려갈기는 거야!

“너 죽여버린다! 거기 서지 못해! 이봐아! 이 빌어먹을 노땅 아저씨!”

하지만 데일은 이미 복도 끝, 코너로 사라진 뒤였다. 포도주 병을 소중하게 안아들고 달려온 칙은 손자국이 난 얼굴로 길길이 날뛰는 주인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미쳤구만, 미쳤어. 원래부터 상태가 안 좋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예르네이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의사가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럽냐고 묻자 칙은 미친 개 한 마리가 더위를 먹어서 발광 중이라고 대답하며 혀를 찼다.

“비켜! 나 지금 엄청 열 받았어. 다 죽여버리기 전에 꺼져!”

과연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씩씩대는 폼이 미친 들짐승을 연상시킨다. 하녀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봐요, 네프 니임 ─ !”

문을 열어젖히자 하녀들이 알몸으로 버티고 선 네프를 보며 작게 소리를 내지른다.

과연 하녀들이 왜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늬들 좋은 구경 한 거라고. 저 사람의 알몸이 그렇게 보기 쉬운 건 줄 알아?

금방 목욕이라도 했는지 하얀 피부 위로 물방울이 맺혀 있다. 놀란 기색도 없이 그는 의자에 걸쳐둔 옷을 하나씩 꿰어 입었다. 마치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태연하기만 하다.

“이봐요, 사람이 들어왔는데 아는 척도 하지 않을 건가요?”

자수정빛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려는지 굳게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을 않는다.

젠장, 정작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군데!

당신 때문에 난 머리가 터져나가기 직전인데 당신은 그렇게 태연해도 되는 거야?

“옛날처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아요. 나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으니까!”

“그래, 어렸을 때부터 넌 참는다는 게 뭔지 몰랐었지.”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 같은 소리만 하지 말고 말해 봐요!”

“무얼 말이지?”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요? 내게 해줄 말이 아주아주아∼주! 많을 텐데요? 우선 지금 어디로 가려는지부터 말해 주시죠!”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채워 올리며 그는 잠꼬대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웅얼댔다.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다면 그저 정신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의 혼잣말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도.”

달싹이는 입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수도,란다.

수도, 페르티잔의 수도.

히이토 놈들이 한바탕 뒤집어 놓은 그 전쟁터로 간단다!

진짜 미치고 환장할 노릇 아닌가!

“당신 진짜 미쳤어요? 죽고 싶어서 아주 용을 쓰네요, 용을 써!”

성질 같아선 저 정신 나간 사람에게 달려들어 흠씬 두들겨 패줄 텐데. 저런 사람은 눈에서 번쩍 별이 뜰 정도로 맞아야지 정신을 차리지.

미친 놈 정신 차리게 하는 데엔 매가 최고라고, 옛 어른들이 입을 모아 말씀하시지 않았겠어?

“가서 물어볼 게 있어.”

“누구한테 뭘 물어요!”

“내 아버지.”

“도망치려는 건 아니구요?”

“......”

“당신이 하는 말은 모두 핑계로밖에 안 들려요. 당신 도망치고 싶은 거죠? 하지만 그렇게 꽁지가 빠져라 내빼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죠? 당신이 그렇게 만든 그 남자는요? 당신 그렇게 무책임한 인간이었어요? 당신 원래 그렇게 저질이었냐구요!”

“난......”

그는 말을 멈추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혼잣말처럼 목소리를 죽여 중얼거린다.

“피에 자극받았을 뿐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피비린내에 정신을 잃고 날뛰었을 뿐이야. 난 짐승이니까. 몸속에 흐르는 탁한 피가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들끓어 올랐어. 이젠 한계치까지 다다른 것 같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끝내야겠지. 질기고도 길었던 악연의 끈을 이젠 끊어야겠지.”

“이봐요, 네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가 다가온다.

여자처럼 옅은 꽃향기를 풍기며. 그에게선 불쾌한 사내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수도에 가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네? 말해 봐요! 라자르 왕을 만나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예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네프의 주먹이 유그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너무 아파서 소리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눈물이 고인 탓에 눈앞이 뿌옇다. 배를 움켜잡고 주저앉은 자신을 그는 감정 없는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인형처럼 굳은 얼굴이다. 하지만 그의 제비꽃 눈동자에선 불온한 기운이 느껴진다. 지독히도 위험하고, 또 지독히도 절망적인.

그런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그는 속삭이듯 말한다.

“미안하다, 유그.”

뭐가 미안하다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맙다, 미안하다, 따위의 말은 해본 적이 없으면서 이제 와서 뭐가 미안하냐구!

“빌어먹을! 으아악 ─ 젠장! 젠자앙!”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하지만 얼얼한 손목의 아픔과 함께 기분만 더 나빠졌을 뿐이었다.

태양? 아니, 불꽃이다.

어둠 저편에서 붉은 불꽃이 뱀의 혀처럼 날름댄다. 그리고 작은 불씨였던 그것은 순식간에 어둠 전체를 감싼다.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불꽃은 살아 있는 생물인 양 아가리를 벌리고 자신을 뒤쫓아 온다. 그리고 결국 불꽃에게 먹혀버린다.

『으아악!』

치지직 소리를 내며 옷이 타들어 가고, 머리카락이 그을려지며, 피부가 뭉개진다. 고통보다는 뜨겁다는 감각이 우선이다.

뜨겁다. 불꽃이 비명을 내지르는 입을 통해 들어가 내장을 불태우고, 심장을 태운다.

도와줘.

누가 좀 도와줘!

불꽃에게 몸을 잠식당한 채 어둠 속으로 손을 뻗는다. 이윽고 뻗은 그 손을 누군가가 맞잡아 왔다.

『예르네이!』

맑은 목소리다. 어둠을 뚫고 작은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루!』

윙윙대며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아이는 해사하게 미소지었다. 흉측하게 타들어 간 손을 아이의 보드라운 손이 덮어온다.

『괜찮아요. 이젠 괜찮을 거예요.』

몸을 불태우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일그러진 자신의 몸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불꽃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이는 자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주문과도 같은 말을 반복하며 웃고, 보드라운 손으로 얼굴을 매만져 온다.

『이젠 괜찮아요. 이젠 아프지 않을 거야.』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의 손길 같았다. 머리를 기댄 아이의 가슴은 작고 좁았지만 충분히 안락하다.

『와주었구나, 레이루.

날 구해 주러 와주었어.

이젠 내가 원망스럽지 않니?』

눈빛으로 그렇게 묻자 아이는 대답 없이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하듯 보드라운 입술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댄다. 그것으로 자신은 구원받는다.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 몸의 고통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예르네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달콤한 고백을 아이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내뱉는다.

응. 알고 있어, 레이루.

네가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나도 널 좋아했지만 그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어. 난 그런 감정에는 서투르니까.

하지만 레이루, 널 다시 만나면 네 손을 꼬옥 잡고 말해 줄게.

『난 네가......』

무척 소중하다고.

두 번 다시 잃지 않도록 품에 껴안아, 절대 놓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자신의 고백은 날카로운 굉음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불꽃이다.

사라졌던 불꽃이 다시 나타나 아이의 작은 몸을 집어삼키려 한다. 아가리를 벌리고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레이루!』

맞잡은 아이의 손을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하지만 이미 아이는 불꽃에게 먹혀버린 뒤다.

새빨갛게 타들어 간다.

늘 자신을 괴롭혔던 악몽에서처럼, 아이는 괴로움에 울부짖으며 서서히 타들어 갔다. 그리고 결국은 손 안에 아이의 손만이 남았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손목 아래에서 잘린, 박제와도 같은 그것만이.

불꽃은 굶주린 짐승처럼 아이를 먹어치우고 자신에게 달려든다. 피할 시간조차 없이 또다시 불꽃 속에 잠겨간다.

미안해, 미안하다.

구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했다.

불꽃은 그런 자신을 조롱하듯 타들어 가는 자신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이었다. 커다란 눈이 달린 짐승이었다. 그리고 그 두 눈은 매끄러운 자수정빛을 띠고 있었다.

보랏빛 눈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한데 모여 커다란 덩어리가 되고, 그것은 은색 털을 지닌 거대한 짐승으로 변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자신을 찍어 누른다.

그리고 그 커다란 이빨에 자신의 몸은 산산조각이 난다. 으드득으드득 소리를 내며 갈가리 찢긴다.

황금의 빛, 세찬 바람처럼 열려진 눈꺼풀을 두드리고 동공 안으로 가득 들어찬다. 눈앞이 흐리다. 눈꺼풀을 잡아 벌리는 듯한 어색한 감각에 눈을 깜빡여본다.

이상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모두 흐리다. 마치 세상이 반쪽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

“으윽......!”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와 몸을 비틀었다. 아니, 아픈 것은 머리가 아니다. 상반신의 상처도 아니다. 눈 안 어딘가에 벌레가 기어 들어와 독침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예리한 고통.

엉망으로 뒤섞여 버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그 영상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손으로 얼굴을 더듬는다. 까칠한 천의 느낌. 머리 위에서 턱 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붕대. 그리고......

『예쁜... 정말로 아름다운 달이야. 그렇지?』

꿈속에서 보았던 자수정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그리고 피에 젖은 얼굴로 미소짓는다. 손 안에 무언가를 움켜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해 말하며......

『이건 내 거야. 아무에게도 주지 않아. 이것은 내 것이다.』

“으아아악 ─ !”

목에서 피가 들끓을 정도로 비명을 내질렀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잡아뜯고, 온몸을 친친 감은 붕대를, 상처를 쥐어짠다.

자수정의 눈동자, 은색 털의 거대한 짐승.

피로 물든 얼굴, 미소짓던 그 얼굴, 드러난 이빨이 무척 눈부셨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남빛으로 물든 그 눈동자와 이빨만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건 짐승이었다.

그건 아름다운 얼굴을 한 악마의 현신이었다!

“진정해!”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상처를 쥐어뜯는 자신의 손을 움켜잡았다.

발작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고 달을 향해 포효하는 늑대처럼 목덜미를 젖히고 울부짖었다. 눈물조차도 나오질 않는다. 이미 눈물은 오래전 동공 안에서 말라버렸다.

침대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손을 옭아맨 쇠사슬이 물결처럼 허공에서 출렁였다.

예르네이의 몸은 성난 파도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뜯겨진 붕대 사이로 몇 번이나 터져 이제는 손 쓸 수조차 없게 된 상처가 삐죽이 드러난다.

피가 흘러 새로 깐 시트를 적시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가련한 들짐승은 제 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발버둥쳤다.

“진정해, 전사 아저씨! 이젠 괜찮다고!”

꿈속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아이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레이루, 너니?

이번에도 날 도와주기 위해 지옥에서 빠져나온 거니?’

짐승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예르네이는 희뿌옇게 뭉그러진 형체를 쳐다보았다.

“그래, 크게 숨을 쉬어. 크게.”

그의 말대로 몇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격하게 치솟아 올랐던 감정의 폭풍이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레이루가 아니다. 들리는 목소리와 부드러운 천으로 얼굴을 닦아내 주는 손길은 그 아이의 것이 아니다.

“상처를 치료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이대로 죽고 싶지 않으면 작작 좀 하라고.”

기억에 있는 퉁명스런 목소리.

‘유그?’

그 남자와 늘 함께 다니던 청년.

무겁게 가라앉은 자수정빛 눈동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닿는 것조차도 싫다. 손을 뿌리치자 확실히 보이진 않지만 노골적으로 싫은 얼굴을 한다.

“이봐, 도와주려는 사람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냐?”

“내... 게 손대지 마.”

신경을 긁는 남자의 쇳소리에 유그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좀 건드렸다 싶으면 내 몸에 손대지 마, 따위의 말만 지껄이고.

순진한 시골 처녀라면 귀엽기나 할 텐데, 덩치는 산만 해서 여자처럼 몸을 웅크려 말고 있는 저 꼬락서니라니.

자신의 분노가 단지 이 남자의 모습 때문에 비롯된 것만은 아니란 걸 유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 세고 강인했던 오만불손한 남자를 이 지경으로 만든 빌어먹을 상황이란 게 문제지.

“알았어, 알았어. 이젠 손 안 댈 테니까 약이나 먹어.”

그 돌팔이 수의사 영감이 안겨주고 간 약병을 그에게 건넸다. 하지만 어째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설마 날 의심하고 있는 거야?’

“저번에 먹었던 그런 약은 아니라고. 먹기 싫어도 먹어. 뭐 그대로 죽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고.”

그러자 마지못해 자신의 손에서 약병을 채간다. 아직 하나뿐인 눈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뚜껑을 여는 손이 자꾸만 빗나간다. 보기에도 힘겨울 정도로 뚜껑을 열어 마시고는 있지만 먹는 양보다는 흘리는 양이 더 많은 것 같다.

노예를 학대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변태 귀족들의 마음을 지금까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조금쯤은 알 것도 같다.

피에 젖은 남자라는 건 상당히 매력적이구나.

피로 물든 붕대를 감고 가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그의 모습을 변태 호사가들이 본다면 침을 흘리며 달려들 게 분명하다.

“어이! 이봐요, 전사 아저씨.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도 될까?”

아이구, 저런! 저 표독스러운 눈 좀 봐.

가까이 다가갔다간 뼈째 씹어 삼키기라도 할 기세군그래.

하지만 지금부터 할 얘기는 크게 소리 내어 떠들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날카로운 이빨에 물리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가 침대 곁의 의자에 앉아, 유그는 최대한 비장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어.”

머리는 좋은데 비해 말주변이 없는 유그로서는 그 정도의 말을 꺼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쪽뿐인 암갈색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가 금세 가늘게 접힌다. 하나뿐이라서 그런지 박력이 장난이 아니다.

“아까 상처를 치료하면서 봤어. 목 뒤의 그거 말이야. 하긴 그걸 지금에야 알아차린 우리들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죽여버린다.”

입만 열면 그 말뿐이다. 할 줄 아는 협박이라곤 죽여버린다, 하나뿐인가 보다.

이 사내에게 있어 그 협박만큼 현실성 있게 다가오는 것은 없겠지만 지금의 몸 상태론 어린애 하나의 목도 비틀지 못할 주제에 쓸데없이 허세 부리기는.

“당신이 스칸데르인이든, 유일하게 살아남은 순혈종이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 없어. 하지만 당신의 몸속에 흐르는 그 빌어먹을 피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마 당신 자신이 더 잘 알 거야.”

“그따위로 말하지 마라.”

“당신이 그 더럽고 냄새나는 일족인 줄 알았다면 처음 만났던 그 순간, 목을 따버렸을 거야.”

철컹, 하는 쇳소리와 함께 상처투성이의 들짐승이 자신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허공에 내뻗어진 손목을 잡아 비틀어 쓰러뜨리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일만큼 쉬웠다. 이 정도로 상처를 입으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텐데 정말 잘도 움직인다.

유그는 그의 등을 찍어 누르고, 귓가에 얼굴을 들이댄 채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이렇게 된 것은 유감이야. 하지만 네프 님을 그렇게 만든 것 또한 당신이니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는 마.”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흘러 콧잔등을 지나 그의 갈색 피부 위로 떨어진다.

차라리 이대로 미쳐버렸으면 좋겠다고 유그는 생각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뇌 속은 포화 상태다. 데일의 말대로 이 남자를 죽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 아닐까.

이 남자는 스칸데르인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과도 같은 존재다.

이대로 약해진 남자의 목에 칼을 박아넣으면 모든 게 끝날 텐데.

이 남자 역시 지겹도록 지고 온 절망의 짐 덩어리를 벗어던지고, 죽음이라는 안식의 땅으로 갈 수 있을 텐데.

『피에 자극받았어.』

두근, 가슴 한쪽이 시큰거린다.

그 사람은 뭐라고 했지? 피에 자극을 받았다고?

『난 짐승이니까.』

아주 쉽다. 네프가 잠입해 들어온 히이토 족의 군인을 고깃덩이처럼 짓이겨 놓고 산 채로 남자의 눈을 빼내 미소짓던 것처럼, 자신도 이 남자를 죽이고 “난 짐승이라서......”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미소지으면, 그걸로 끝 아닌가.

“으......”

짓눌린 들짐승이 앓는 소리를 낸다.

덥구나.

이 여름이 끝날 때 즈음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와 있을까.

지금에야 생각난 것이지만 카이라, 그녀는 무사할까?

그녀라면 어느 곳에서든 살아남을 거야. 원래 이 복잡한 세상에선 바보 같을수록 오래오래 살아남는 법이니까.

어느새 자신의 손은 남자의 굵은 목을 힘주어 조르고 있었다. 틀어 막힌 듯한 신음 소리가 절정의 순간 내지르는 교성과도 같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이다. 조금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두근두근, 심장이 세차게 박동하고 꿈틀대던 움직임이 점차 미약해져 간다.

“유... 유그 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아!”

“......!”

칙의 외침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하녀 대신 음식을 담은 그릇을 든 채 칙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매앰 매앰.

매미 놈들이 시끄럽게도 울어댄다. 정신이 들자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간헐적으로 꿈틀대며 늘어진 남자의 몸 위에서 뛰어내려 유그는 창가로 달려가 아침에 먹은 것을 그대로 쏟아냈다.

미쳐버린 건가, 아니면 더위를 먹은 건가.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한 거지?

저 남자를 죽이려 했던 건가? 이 손으로?

“유그 님, 괜찮아요?”

어느새 칙이 다가와 자신의 등을 토닥이며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어왔다. 유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이봐, 칙.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

“상처 입은 예르네이 님의 몸 위에 올라타서는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고 했겠지요. 만년 발정기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주인님이 남자도 오케이인, 그런 부류일 줄은......”

“누가 만년 발정기야! 누가 남자도 오케이라는 건데!”

“그거야 주인님이죠. 아무리 예르네이 님이 미남에다가 좀 멋지긴 하지만, 환자한테 그러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아요?”

“......”

“예르네이 님이 아무리 매력적이라고는 해도 너무하잖아요. 그리고 유그 님께는 카이라 님이 있으니까 예르네이 님은 넘보지 마요.”

아이고, 정말 죽겠다! 뭐? 넘봐? 누가 누굴 넘본다는 거야?

주인 알기를 개똥으로 아는 괘씸한 녀석이긴 해도 가끔 이 녀석 때문에 싫은 생각을 잊게 된다. 가끔 툭툭 내뱉는 말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늘어져 예르네이는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그 눈은 무척 지쳐 보였다.

마치 다량의 모래를 머금은 듯하다. 눈물이 아닌 모래를 쏟아낼 것만 같다.

당신도 조금쯤은 바라고 있었지?

아니라고는 하지 마.

당신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죽고 싶을 거야, 그렇지?

죽어서 편해지고 싶을 거야.

하지만 내 손으론 죽이지 않아.

그렇다고 네프 님에게 그 지독한 일을 시키지도 않을 거야.

그 사람은 당신만큼이나 불쌍한 사람이니까.

“이봐, 칙. 데일을 불러와 줘.”

“허억! 이제는 데일 님한테까지 손을 대려는 겁니까! 주인님, 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이 자식, 누가 누구한테 손을 대! 쓸데없는 말만 지껄이는 주둥이를 확 찢어버릴까 보다!”

칙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긴 복도를 뛰어나갔다.

머리 위에서 태양이 작렬한다.

기절할 것만 같은 현기증에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깨문다. 벌써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와 혀를 적신다.

자신의 피에는 자극당하지 않는다. 입 안을 적시는 그것은 비릿한 맛이 나는 일종의 배설물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오늘따라 수도로 가는 길은 지독히도 멀다. 달리고 또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낮의 태양빛에 둘러싸인 초원, 숲만이 계속해서 나타날 뿐이다. 전혀 다른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네프는 그것이 꿈속의 눈 덮인 산길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자신은 혼자다.

예쁜 달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아름다운 눈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은 혼자 끝도 없는 초원을 달리고 있다.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땀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혼자라는 사실에 다시금 가슴이 저며온다.

‘난 언제까지 이 눈 덮인 초원을 걸어야 하는 걸까?’

대답은 없다.

영원히, 앞으로도 계속 넌 혼자야,라고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올 정도로 더운데도 알 수 없는 한기가 뒷덜미를 서늘하게 감싸온다.

이것은 악마의 손길이다. 악마는 늘 소리 없이 다가와 뒷덜미를 서늘하게 조여온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겠어.

너희들이 아무리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한다 해도 내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수록 악마의 차가운 손길은 더욱 강하게 뒷덜미를, 그리고 땀에 젖은 몸을 조여든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상어 떼처럼.

고요하다. 밤하늘에 총총히 뜬 별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다.

욕설과 함께 여자 ─ 그녀는 자신을 페리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 는 엉겨붙는 벌레들을 손으로 탁탁 쳐대며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었다.

“좀 자둬. 내일부터 또 강행군이니까.”

그녀의 말이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알고 레이루는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겁다. 고막 안쪽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대로 누우면 잠이 들 것처럼 피곤한데 이상하게도 정신은 말짱하다. 비 온 뒤의 하늘처럼 깨끗하게 개어 있는 것이다.

“피곤하지 않나?”

뮌은 따뜻한 차가 든 컵을 레이루에게 내밀었다.

“조금요.”

페리의 가방에는 여행에 필요한 갖가지 물품들이 갖춰져 있었다. 덕분에 식사 후에 차까지 마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좀 자두도록 해.”

“네에......”

말은 그렇게 해도 소녀는 자리를 펴고 누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두 사람이 잠들기를 기다려 그들과 이별을 고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페리는 단지 전설의 성지를 찾기 위해 스칸데르인을 찾는 거라고 했지만 앞서 말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던,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예르네이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단지 스칸데르인이란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충분히 괴로워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하지만 뮌, 저 사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어떻게 끊어버릴 것인가. 자신은 사랑이라는 게 뭔지 모른다. 예르네이에게 향한 감정은 사랑과는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변질된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이토록 그리운 것이다.

어린애 같은 자신에 비해 저 남자는 어른이다. 어른이란 것은 늘 든든한 존재다. 늘 어린 자신을 보듬어 안아주는 그런 존재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색되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 몸을 감싸안자 뮌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자상한 사람이다. 홀로 적의 소굴에 남겨진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이다. 그 자상함에 기대고 싶다는 이 마음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으아아! 진짜 눈꼴시어서 못 봐주겠네. 이 늙은 언니도 이렇게 다 벗고 있는데 젊은 것이 뭐가 춥다고 엄살이야, 엄살이!”

“이 애는 몸이 약하니까.”

“얼씨구! 잘났군, 잘났어. 솔로의 염장을 지르는구나, 아주! 레이루, 넌 좋겠다. 이렇게 든든한 왕자님이 있어서 말이야.”

비꼬듯 말하는 페리에게 약하게 미소지었을 뿐이다.

늘 자신은 누군가에게 보호받으며 살아왔다. 세이너 섬에서는 아버지와 예르네이에게, 그리고 지금은 뮌에게 보호받으며 그를 사지로 내몬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바람은 여기서도 충분히 쐴 수 있어. 어린애 혼자서 어딜 돌아다니려는 거야?”

“오늘은 달이 밝으니까 괜찮아요.”

“기회를 틈타 도망친다는 따위의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말투는 어린애 같아도 역시 그녀는 어른이다.

가슴 한구석이 바늘로 찌르듯이 따끔하게 아파왔지만 레이루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지었다.

“나 혼자 도망쳐 봤자 뭘 하겠어요. 난 아무 힘도 없는 어린애인데요.”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매섭다.

태연하게 웃는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다. 옛날 같았으면 속마음을 들킨 순간 당황해서 안색을 굳혔을 텐데 말이다.

“내가 함께 갔다 오지.”

보다 못한 뮌이 자진해서 나섰다.

“하나가 가든 둘이 가든 마찬가지야. 오히려 하나보다 둘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아직은 너와 떨어질 마음이 없다. 히이토 지방을 벗어나기 위해선 여러 가지 도움이 필요하니까.”

페리는 한참 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 뮌을 노려보더니 이내 두 손을 들어올리고 항복 선언을 했다.

“알았어. 믿어줄 테니까 그놈의 바람 실컷 쐬고 와. 허파에 바람이 들 때까지. 알았냐, 레이루?”

그녀의 탁월한 언어 구사력에 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어쩜 저런 말만 골라서 할 수 있는 걸까.

여정을 푼 장소에서 조금 벗어나자 훤히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무릎 길이 정도로 길게 자란 잡초들.

달빛이 비친 그곳은 잘 익은 보리밭을 연상케 했다. 바람에 풀이 부대끼는 소리가 음악 같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누군가의 노랫소리 같기도 하다.

뮌은 그저 자신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기만 했다. 말이 없는 사람이다. 예르네이,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눈빛만으로 모든 걸 표현하려 한다. 그의 두 눈은 수백 가지의 표정을 담고 있다.

“나, 사람을 죽였어요.”

입을 열자 그는 조용히 자신의 곁에 다가선다. 눈가에 패인 굵은 주름은 그를 더욱 지쳐 보이게 한다.

“기분은 어땠나?”

“그냥... 불쾌했을 뿐이에요. 한동안 손이 덜덜 떨려오긴 했지만요.”

“익숙해지면 괜찮아져.”

익숙해지면......?

언제가 되어야 이 남자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익숙해질까.

“지하 감옥에서 어떻게 빠져나온 거예요?”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너처럼 조력자가 있었지. 뜻밖의 인물이었어.”

“아... 네에......”

또 침묵의 공간이 생겨버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먼 숲에서 새가 날아오를 무렵 먼저 그가 입을 연다.

“나 혼자 도망쳐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고향?”

“그래, 내 고향은 멘스터지. 그곳은 스칸데르만큼은 아니지만 대륙에 남은 유일한 천국이야. 그곳으로 숨어 들어가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네가 눈에 밟혀 차마 성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손을 잡아 쥐었다. 똑바로 향한 그의 두 눈이 부자연스런 광택을 띠고 빛난다. 그의 눈 속에 감추어진 수백 가지의 표정 중 저것은 어떤 감정일까.

“널 사랑한다, 레이루.”

어디선가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단잠을 자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푸드득대는 날갯짓 소리가 꿈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아련하다.

“사랑해.”

나이가 찬 남자의 사랑은 늦되지만 격렬하다.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조바심이 날 정도로 조심스럽지만 그것이 사랑임을 확신한 순간 폭발해 버린다. 애써 찾은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늘 격하게 상대를 몰아붙인다.

애써 찾은 사랑에 실패하면 다시 일어날 기력이 없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을 용기도 없어진다.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

세이너 섬에서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누군가를 품에 안는 것이 기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존재다.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밤마다 자장가를 불러주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같다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만든 존재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려 했던 유일한 존재.

그 아이를 정원에서 본 순간, 달빛에 비쳐 눈부시게 빛나는 천사 같은 아이를 다시 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아주어서 다행이라고.

“페리가... 기다릴 거예요.”

하지만 자신을 향한 젖은 두 눈은 완강하다.

그때 성의 정원에서 너와 다시 만났던 그날, 내 품에 안겨 들뜬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너의 모습은 환상이었나.

내 몸을 마주 안아오던 그때의 뜨거운 체온도, 젖은 눈동자도 모두 달빛이 보여준 달콤한 꿈?

“내일을 위해서 자도록 해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흩날려 얼굴을 간질였다.

밤하늘에 뜬 달은 여전히 가늘다. 저 달이 여인의 동그란 가슴처럼 차오를 무렵, 모든 것은 끝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저 아이와 함께 멘스터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헛된 망상을 품어본다.

레이루의 뒤를 따라 자리로 돌아왔을 때, 레이루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너도 자도록 해. 보초는 내가 설 테니까.”

“됐어.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아. 당신이나 나나 하루 정도 밤을 샌다고 쓰러질 그런 위인은 아니잖아?”

말없이 모닥불 곁에 앉자 페리는 새롭게 끓인 차를 잔에 따라 건넸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차를 마시는 여자의 얼굴은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붉어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사람을 죽였다고 소녀는 말했다. 한참 동안 손이 떨려와 어쩔 줄 몰랐다고 말하는 소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어느새 소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악마에게 유혹당해 버린 것이다.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소녀의 두 눈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늘 그렇듯 악마의 손길은 은밀하고, 서늘하며, 달콤하기에 선뜻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그래서 자신 역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지 않은가. 당신이 원하면 악마가 되어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지 않은가.

소녀가 살아남기 위해 그 행동을 정당화시키듯 자신도 말할 수 있다. 독(毒)과도 같은 감정, 사랑 때문에 그리했노라고.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까지도 죽이려 했던 아버지, 그가 피에 젖은 두 눈에서 눈물을 쏟으며 그리 말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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