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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르곤의 눈물 7 (8/16)

휘르곤의 눈물 7

지옥.

눈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눈이 시큰거려 손등으로 비비자 새까만 재가 묻어난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 구석구석에도 재가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네프는 아침 산책을 하듯 천천히 지옥의 현장을 걸었다.

어디선가 간간이 터져나오는 비명이 현장의 참담함을 더한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 피비린내가 뒤섞인 불쾌한 공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사람들의 웃음이 넘쳐나는 거리였다.

그것이 비록 사막의 신기루처럼 곧 사라질 것처럼 보이긴 했어도, 어쨌든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후끈한 열기가 가득한 활기찬 도시였다.

“나으리... 제발 부탁입니다. 우리 아이를... 아이를 살려주세요.”

재투성이가 된 여인이 다가와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여인은 피에 젖은 천 덩어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꼼짝도 하지 않고 늘어진.

“아이라면, 벌써 죽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자 여인은 거세게 화를 내며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은 뒤 지나는 다른 사람을 붙잡아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폐허가 된 가옥, 부상당한 사람들, 그들 위로 떠도는 음울한 공기.

똑같다. 페르티잔의 국왕 라자르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곳, 그 지옥 같았던 현장과.

이것은 그동안 페르티잔이라는 나라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대가다. 이제야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 것이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궁성 앞을 지키고 선 군인들의 몰골 역시 말이 아니었다. 피곤에 절은 그들의 얼굴은 모두 새까맣게 더러워져 있었다. 근위병들 대부분이 거리로 나가 구호 작업을 펼치고 있는 덕에 철통같았던 궁성의 경비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궁성에서 오들오들 떨며 명령이나 내리는 귀족 나부랭이들을 위하느니 차라리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보겠다는 게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군인을 모으는 왕의 공고문을 보며 유그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빈정거렸었다.

『어떤 골 빈 놈이 이런 거지 같은 나라를 위해 죽고 싶다고 생각하겠어요?』

이런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된 사람들은 궁성의 기사들이나 오시예크 가의 그 늙어빠진 꼰대 정도일 것이다.

“난 왕을 만나러 왔다.”

“아무도 성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럴 때 유그가 자주 써먹는 방법이 있다. 가지고 다니는 오시예크 가의 문장이 찍힌 서류를 보여주거나 꼰대 몰래 훔친 인장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

자신 역시 같은 방법을 써본다. 언젠가 알고 지내는 남자에게 받은 그것은 붉은 천에 감긴 작은 두루마리였다. 이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언제든 궁성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하며, 필요 없다고 내치는 자신의 손에 이것을 꼬옥 쥐어주었었다.

“어이, 들여보내 드려라.”

자신이 내민 물건을 알아본 것은 막 거리에서 돌아온 늙은 군인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그는 네프를 향해 지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티토 님의 전갈이지요, 그건.”

말없이 네프는 늙은 군인을 쳐다보았다.

“궁성의 다른 귀족들은 사태가 이 지경이 되어도 나와보지도 않는데 비해 그분은 음식과 약품을 가지고 나와 아침부터 부상자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 사람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마음이 여리고 자상해서 누구에게나 칭송받는 그런 사람이었다. 저 악마 같은 왕의 수하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지금 궁성 안도 엉망일 겁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티토가 준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는 자신 역시 그 ‘훌륭한 사람’의 대열에 낀 것인가.

늙은 군인은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아침부터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 그 사람과는 달리, 자신은 도와달라는 여인을 내친 ─ 궁성 안의 귀족 나부랭이들과 다를 바 없는 ─ 인간인데 말이다.

늙은 군인의 말대로 궁성 안의 상황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불에 탄 건물들과 역시 새까만 얼굴로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사람들. 곳곳에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널려 있고 농도 짙은 피비린내가 떠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 악마의 보금자리다운 형상이지 않은가.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헤치고, 곧바로 악마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을 둥지로 향한다.

그 악마가 죽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쉽게 죽을 위인이었다면 벌써 예전에 잿더미가 되어 차가운 연못 속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과연 지금 그 악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얼굴을 무섭게 굳히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자신을 조롱한 히이토의 국왕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을까?

두고 봐, 빌어먹을 자식!

언젠가 네놈의 그 하나뿐인 눈마저 도려내 줄 테니까.

그 재수 없는 마스크를 벗기고 그 위에 끓는 기름을 퍼부어 줄 테니까.

그따위의 말을 곱씹으며 가끔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방 안의 집기들을 때려 부수겠지. 감정이 폭발하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복도를 지나 육중한 암갈색의 문 앞에 섰다.

문득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자신은 단 한 번도 이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곳은 어린 자신에게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방 안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그날의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큰 의자만이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의자는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방 안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가 있었다. 아버지라고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존재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그는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서린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슬픔이었다. 또 절망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들어선 것을 눈치 챈 순간, 그의 두 눈은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그림을 바라보던 눈과는 대조적인, 너무도 차갑고 매서운, 감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눈이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오래된 나무 냄새, 햇빛 냄새, 녹녹한 곰팡이 냄새, 그런 것들이 콧속 가득 들어찬다.

방 안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의자의 위치도, 벽에 걸린 그림도, 그림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에 서린 복잡한 감정도.

“올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남자는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자신이 이룩해 놓은 왕국이 짓밟히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 말입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향한 잿빛 눈동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그는 분노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 그랬었다.

저속한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대부분이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일련의 행동을 보일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저 남자는.

“상당히 화가 나 있는 듯하구나, 아들아.”

“당신이야말로 평소보다 더 태연해 보이는군요. 지금 거리엔 시체들이 넘쳐나는데 말입니다.”

“나를 탓하려고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게냐?”

“물론 아닙니다.”

“그래, 그렇겠지.”

“히이토의 자객이 나에게까지 찾아왔었습니다.”

“그래?”

그는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방에 처음 들어왔던 그때 자신은 상처 입고 있었다. 말에서 떨어져 뼈가 부러져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무슨 일로 이 방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지 그때도 지금처럼 이 사람은 상처 입은 자신을 걱정하는 것보다 자신의 용건이 먼저였다는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유모는 늘 이 남자를 욕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도 피가 섞인 가족이잖아요. 당신의 아버지예요. 그분도 틀림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실 겁니다.』

아버지라, 내게 아버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놈들의 정보 수집 능력은 알아줘야겠군그래.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서류상으로도 알려져 있지 않은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또 모르죠. 스파이를 성 안에 잠입시켜 정보를 캐냈을지도.’

네프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왔습니다.”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을 마주 본다. 그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다.

어린 시절엔 그 눈이 무서웠다. 유리알처럼 매끄러운 광택을 발하는 그 눈이 무서워서 먼저 시선을 돌리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까?”

데일이 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하녀들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이 성의 주인인 네프와 함께 완벽한 그림을 이루던 그런 남자였다.

“데일 님, 오늘도 덥네요.”

정원을 손질하던 늙은 정원사가 인사를 해도 그의 걸음은 늦추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데일이 향한 곳은 마구간이었다.

마구간지기는 수도에 살고 있는 누나 내외가 걱정된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허억... 허억!”

데일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거칠게 훔쳐냈다. 마구간 안으로 들어서자 더위에 늘어져 있던 말들이 일제히 요동친다. 익숙지 않은 손님의 방문에 흥분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데일에게 말들의 항변에까지 귀 기울일 여력은 없었다.

그늘진 가장 구석진 곳에는 윤기 흐르는 잿빛 털을 지닌 말이 있었다. 다른 말들과는 달리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버티고 서서, 쌩쌩 콧김을 내뿜는다.

말에 대해 문외한인 데일이 봐도 놈은 물건이었다. 나무 기둥에 매어 있는 고삐를 풀자 놈은 거세게 반항했다. 하지만 데일은 고삐를 놓지 않았다. 마구간지기가 하듯 워어, 워어, 소리를 내며 말을 진정시키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이놈은 주인 외의 인간은 모두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놈의 고향은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네프가 몇 날 며칠을 숲에서 기거하며 거친 야생마를 길들여 자신의 애마(愛馬)로 만든 이야기는 이제는 거의 전설처럼 남아 있다.

“워어, 워어. 진정해, 제발 진정해.”

애원하듯 달래고 얼러봐도 놈은 요지부동이다.

안간힘을 다해 버텨보지만 놈의 엄청난 힘에 의해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런 자신을 놈은 앞발을 쳐들어 짓뭉개려 한다.

야생마가 아니라 사람을 잡아먹는 악귀 같은 놈이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에 질 순 없지!

“날 짓뭉개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난 널 데리고 갈 거야. 이게 다 네 주인을 위해서니까. 제발 진정해, 부탁이다.”

놈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놈은 신기하게도 자신의 말이 끝나자 얌전히 앞발을 내리고 콧김을 내뿜으며 머리를 자신의 몸에 비벼왔다.

과연 물건 중의 물건이라고 새로 온 마구간지기가 입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놈의 등에 올라타고, 데일은 아침 산책이라도 나가듯 느긋하게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방금 전 모른 척했던 정원사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하네. 오늘도 날씨가 덥지?”

“이거 참, 저도 이제 죽을 때가 다된 모양입니다. 데일 님이 꽁지가 빠져라 뛰고, 말을 타고 있는 환상을 보다니 말입니다.”

“아니, 그냥 기분이 좀 그래서 말이지. 여러 가지로 복잡한 일들이 많아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정원사와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데일은 정원을 지나 성의 바깥쪽을 돌며 지나는 하인들에게 일일이 말을 걸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하녀들은 곧 집사가 미쳤다고 떠들어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계획 중 하나였다.

자신은 유그가 시키는 그대로 할 뿐이다.

계획대로 데일은 하인 중 한 명에게 산책 좀 하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숲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숲 속, 유그가 어린 시절 어른들 몰래 놀곤 했다던 후미진 곳의 나무 곁에 말의 고삐를 묶어둔다. 남은 것은 시간이 흐를 때까지 이곳에 앉아 낮잠이라도 자면 되는 것이다.

네프가 외출을 한 사이, 예르네이를 탈출시킨다는 것이 유그와 자신의 위험한 계획이었다. 자신은 그저 치밀하게 계획된 길을 밟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유그는 머리가 좋은 사내였다.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 역시 계획에 동참한 공범자이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아무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새에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 집사가 이상해졌다고 하인들은 단정지을 것이다. 이대로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며 주인의 말을 타고 숲으로 산책 나간 정신 나간 집사는 저녁 느지막이 돌아와 주인의 손님을 위해 저녁식사가 담긴 그릇을 들고 방으로 향한다. 방으로 들어가자 주인의 손님은 집사를 때려눕히고,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마구간으로 달려가 집사가 타고 나갔다 온 말을 훔쳐 타고 보기 좋게 탈출에 성공한다.

단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계획이지만,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과 유그는 비지땀을 흘리며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단숨에 늘어놓으며, 유그는 지저분하게 수염이 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당신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 얼굴에 묘한 불안감 같은 것이 느껴졌기에 물었다.

“그가 사라지면, 네프 님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유그는 말없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미소라고 보기엔 힘든 한숨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지금보다는.”

그렇게 말하며 유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창 틈으로 비치는 맑은 하늘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이미 끝까지 추락했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잖아. 더 이상 떨어질 곳은 없어.”

데일은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가 그대로 풀밭 위에 몸을 뉘였다. 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곤 했던 기억은 자신에게도 있다.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혼나면 나무 그늘에 누워 울다가 잠이 들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성의 집사가 되고, 젊고 아름다운 주인을 맞아들이게 된 뒤부터 성 바깥쪽의 숲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 하지만 땅 속으로 파고드는 경우도 있다.

자신을 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놈은 자신의 곁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긴 꼬리로 달려드는 벌레를 치며, 가끔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콧김을 내뿜는다.

눈을 감자 시골의 친척들에게 맡기고 온 두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 아이들에겐 무심한 아버지가 되었다.

아내의 얼굴은 잊은 지 오래다. 긴 머리카락을 지닌, 목이 길고 눈이 아름다웠던 여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최근에 온 친척의 편지에서 딸이 커갈수록 지 어미를 닮아간다는 대목을 보았다. 딸을 만나게 되면 기억 저편에 묻힌 아내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겠지.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최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 이곳에서라면 아무 생각 없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이봐, 데일은 어디 갔어?”

“말을 타고 숲으로 가셨습니다.”

“뭐, 그 데일이? 설마!”

“그게... 아침부터 이상하셨어요. 글쎄, 그분이 아침부터 사색이 된 얼굴로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시는 거예요.”

“뭐어? 데일이 그랬단 말이야? 더위라도 먹은 거 아냐?”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데일 님은 섬세한 분이라서 충격을 받으신 게 아닐까요? 벌써부터 애들은 데일 님이 실성했다고 떠들고 있어요.”

예상대로다.

여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소문이란 건 천리마보다도 빠르고 새끼를 밴 돼지의 배만큼이나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하긴 그동안 힘들기도 힘들었겠지. 그 성격에 그렇게까지라도 하지 않으면 폭발해 버릴 거야.”

“저... 데일 님은 괜찮으실까요?”

“그럼, 곧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녀의 동그란 눈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쌀쌀맞은 인간이지만 하인들에게는 꽤 평판이 좋은 듯하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는 안전할 것이다. 하인들이 그를 비호해 줄 테니까.

하녀를 뒤로하고 유그는 거들먹거리며 복도를 어슬렁거리다가 시야에서 하녀가 사라지자 예의 그 여자 유령이 출몰하는 곳으로 향했다. 중간에 하인들을 만나면 혀를 내빼물고 덥다며 짜증을 내는 등의 연기도 잊지 않았다.

침대에 늘어져 있던 예르네이는 약간의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방에 들어선 것이 자신임을 알자 경직되었던 어깨가 약간은 수그러든다.

불쌍한 사람이다, 이 남자도.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쌍하다.

행복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유유상종이라고, 자신이 불행하기에 그렇고 그런 사람들만 꼬이는 것일 게다.

원래 동족들은 한데 모이는 법이다.

유그는 예르네이에게 다가가 품속에 넣어온 도구를 꺼내 침대 기둥에 연결된 쇠사슬을 끊었다. 꽤 힘든 작업이었지만 몇 번 두들기고 억지로 잡아 비틀자 겨우 끊어졌다.

자유가 된 그는 묶였던 손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에게 칼과 여러 가지 물건이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잠시 그는 한쪽뿐인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네프 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서둘러.”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겠어.”

‘어련하시겠어.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입에 발린 인사치레는 하지 않을 사람이지.’

예르네이는 비칠거리며 일어서서는 데일이 가져다 놓은 옷을 위에 걸쳐 입었다.

“뒤집어쓰고 있어. 햇볕이 뜨거우니까.”

천을 찢어 만든 어설픈 두건을 건네며 유그는 예르네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떠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자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또 모른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네프에게 복수하러 달려올지도.

하지만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질 때까지 저 얼굴을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천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인기척이 사라졌다.

자신이 일러준 대로 그는 벽을 타고 자란 담쟁이 덩굴을 이용해 내려갈 것이다.

지금 이 시각이면 정원사는 점심을 먹으러 갔을 터이기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는 데일이 말을 매어놓은 숲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저녁때쯤 데일이 돌아오면 자신은 데일의 단아한 얼굴에 주먹을 갈겨놓고, 그를 쓰러뜨린 다음 예르네이가 도망쳤다고 소리치면 된다. 그때쯤 되면 그는 꽤 먼 곳까지 가 있을 것이다.

그걸로 끝이다.

“휴우......”

유그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자신이 이 방에 있는 걸 알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골칫덩어리 칙도 예르네이를 위한 일이라며 약초를 사러 보냈다.

눈이 빡빡하다.

하지만 오늘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을 듯하다.

진창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동물이었다. 긴 다리를 가진 사슴이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몸은 애처로울 정도로 작았다.

몸은 더러워져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커다란 두 눈은 맑았다. 맑게 갠 하늘처럼 깨끗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작은 동물은 꿈틀거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저 그 동물을 쳐다보기만 했다.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며 결국 축 늘어져 죽을 때까지, 커다란 그것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것의 두 눈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치며 도와달라고 소리쳐도 아무도 구해 주지 않았던 그 동물의 모습은 자신과 똑같았다.

힘이 없으면 결국 도움을 요청하다 쓰러져 죽고 만다. 그래서 힘을 키웠다. 고된 훈련에 쓰러지면, 진창 속에서 발버둥치다가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일어나 칼을 쥐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그렇게 질문하자 남자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냉정한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뿐이야.”

이번에는 자신이 웃을 차례였다.

그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뿐이라니. 농담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여 말했다.

“젊은 시절의 난 강렬한 불꽃이었다. 물을 끼얹어도 다시 살아나고, 오히려 전보다 더 불타올랐지. 그때 날 살아가게 해준 것은 분노였다. 하지만 이젠 아무것도 없어. 몸속에서 타들어 가던 불꽃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작아. 지금의 난 그저 쓸모없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시체에 불과해. 결국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거다.”

늙은 육신은 필요 없다. 몸을 태우던 강렬한 불꽃은 이제 겨우 그 모습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몸은 왜소해 보였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는 그토록 커 보이던 몸이 이제는 작고 볼품없어 보였다.

─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뿐.

단지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자신은 그 남자에게로 달려간 것인가.

뭔가 더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던 ‘확실한 대답’이란 대체 무엇이었는가.

어쩌면 유그의 말대로 도망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의문이 생긴다. 대체 무엇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인가.

이것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두려웠다. 자신의 몸을 태우는 불꽃이. 그리고 자신을 탓하며 노려보는 그의 눈이.

하지만 두려운 만큼 그립다.

고작 몇 시간 정도를 떨어져 있었지만 아득히 먼 기억을 떠올리듯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리운 마음이 든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남자를 용서해 줄 리는 없겠지만 성으로 돌아가면 그를 안고 속삭여 볼까 한다.

그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불쾌한 기분부터 들겠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만약 그가 떠나게 되면, 영원히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어도 조금쯤은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비록 분노의 형태를 띤 악몽이라 할지라도.

몸에 들러붙은 재가, 죽은 자의 찌꺼기가 콧속을 간질인다. 몇 번이나 얕게 기침을 해도 괜찮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으로 가는 내내 네프는 불쾌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순간 선뜻한 무언가가 눈앞으로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이 떨려온다. 그는 이곳에 자신 혼자뿐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깨닫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이었다.

오늘은 왠지 진창 늪에 빠진 작은 동물을 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만약 보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동물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줘야겠다. 몸과 마음은 지치고 황폐해졌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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