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휘르곤의 눈물 8 (9/16)

휘르곤의 눈물 8

“저거 사람 아냐?”

“설마 이런 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런 사막 한가운데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풀 한 포기조차 살지 못하는 죽음의 지대에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시체이거나 신기루일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동료는 대열에서 이탈해 모래 언덕 너머로 달려가더니 돌아오질 않는다.

간혹 모래 속에 숨어 상인들이 지나가길 기다려 달려드는 도적들이 있긴 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사내는 말을 달려 동료에게로 달려갔다.

“이것 봐! 내 말이 맞잖아.”

하지만 모래 언덕 너머에서 자신을 맞아준 것은 도적들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료와 그의 품에 안긴 남자였다.

파리하게 굳은 얼굴에 맥없이 늘어진 팔다리.

“뭐야, 시체잖아.”

“아냐, 아직 숨은 붙어 있어.”

“그냥 내버려둬.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하지만 불렀다구.”

도대체 동료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내는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곤 한다.

머리가 어떻게 됐거나, 단순히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사내는 수통의 물을 남자의 바싹 마른 입술에 흘려보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두건 밑의 두 눈이 태양에 반사된 모래처럼 반짝인다.

“내 이름을 불렀어.”

역시 머리가 어떻게 됐다는 동료들의 말에 한 표를 던지겠다.

이 녀석은 정상이 아냐.

“그냥 내버려두고 가자.”

“이 녀석 데리고 가면 안 될까?”

지금 제정신이냐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머릿속으로 ‘이놈은 원래 미쳤다.’라고 몇 번이고 되뇐다.

가만히 버티고 서서 노려보자 여전히 바보 같은 미소를 만면에 걸치고는 덧붙여 말한다.

“깨끗이 씻기고 단장시켜 놓으면 꽤 그럴 듯할 것 같지 않아? 그럭저럭 비싸게 팔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우락부락한 사내를 원하는 고객은 없어.”

“하지만 왠지 이런 데서 죽게 내버려두기엔 너무 아깝잖아.”

어차피 한번 마음먹은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마는 그런 사내다. 사막의 모래를 다 뒤집어엎는다 하더라도 저 고집이 꺾이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더위와 피곤에 지친 동료들이 짜증을 내며 자신들을 부른다. 그리고 사내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덩치가 클 법한 사내의 머리를 껴안고 놔줄 생각을 않는다.

“젠장!”

이럴 땐 욕설밖에는 나올 게 없다.

‘젠장! 빌어먹을! 다 죽여버릴 거야. 마을로 가면 저 자식의 빤질빤질한 면상을 사정없이 후려갈겨 줄 테다!’

“마음대로 해! 대신 마을까지 그 사내는 네놈이 책임지는 거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뒤덮은 모래를 걷어찼다. 그렇게 해봤자 모래 바람이 생겨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이지만.

축 늘어진 건장한 사내를 어깨에 가뿐하게 짊어지고 모래 언덕을 기어 올라온 사내를 보며 동료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저 말라비틀어진 몸 어디에서 저런 괴력이 나오는 건지.

“저 시체 같은 놈은 뭐야?”

“상품.”

“에에?”

남자는 취급하지 않는다느니, 저런 떡대를 누가 사냐느니, 따위의 불평불만을 무시하고 사내는 수통의 물을 급하게 들이켰다.

사막은 싫다.

떳떳할 것 없는 자신들 같은 존재들에겐 사막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은신처일 테지만 차라리 정글 쪽이 더 낫겠다.

아무것도,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은 ‘죽음의 지대’라는 말 그대로다. 이곳을 걷다 보면 지옥을 떠도는 망자(亡者)가 된 기분이다.

“밤이 되기 전에 서두르자!”

모래로 뒤덮인 죽음의 땅, 크게 숨을 들이쉬자 모래가 폐 속 가득 쌓여만 간다.

사내들 중 누구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는 않은지 말의 고삐를 당기는 손길이 부산스럽다.

사막의 밤은 두렵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기에 더 더욱.

사막에 사는 부족들은 밤의 고요를 신이 내린 축복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축복 따위가 아니라 저주다. 이곳은 모래로 뒤덮인 저주받은 땅이다.

사내들이 지나간 곳은 뱀의 궤적처럼 모래가 길게 패여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불어오는 모래 바람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사람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래 바람과 내리쬐는 태양, 끝도 없이 이어진 모래 언덕.

또다시 사막에는 정적이 찾아든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전부터 계속되었을 그 무덤 속과도 같은 적막이......

“뭐야아? 누가 누굴 데려와!”

역시나... 이래서 이 가게에는 오지 않으려 했었는데.

모른 척 무시하고 밥그릇에 코를 박고 있으려니 또다시 그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리거! 숨어도 소용없어! 그 커다란 덩치가 가려지기나 하는 줄 알아?”

저 여자는 내가 정글에 숨어든다 해도 단박에 찾아낼 그런 짐승 같은 시력을 자랑하는 여자다.

내가 인정하고 있는 짐승과의 인간들 중 단연 최고로 꼽히는 존재이기도 하고 말이야. 시력도 좋고 청각도 최고, 머리 회전도 빠르고, 무엇보다......

“자세히 좀 말해 봐, 리거! 대체 무슨 말이야, 이게!”

몸놀림이 예술이지.

별로 뛰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언제 저 구석에서 여기까지 다가온 건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여자는 정말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 남자였다면 잔머리를 굴려 고위 관리가 됐거나 대륙을 주름잡는 대 도적이 됐을 텐데.

“딴생각하지 마!”

빈말로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평범한 얼굴이긴 해도 상기된 얼굴로 빽빽 소리를 지르는 게 꽤 귀엽긴 하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제대로 정리하고 저런 사내 녀석 같은 남루한 옷이 아닌 드레스를 갖춰 입힌다면 그럭저럭 예쁠 법도 하다. 헐렁한 옷 사이로도 그 크기를 충분히 알 수 있는 풍만한 가슴도 그렇고, 허리도 꽤 가늘었던 것 같고......

“리거 ─ !”

“나 귀 안 먹었어, 세라.”

문제는 저 고양이같이 앙칼지고 막무가내인 성격이다. 뭐 그런 점도 나름대로 매력이리라. 요즘엔 시대가 변해서 얌전한 요조숙녀보다도 앙칼진 악녀 타입이 인기니까.

“말해 봐! 그 녀석이 사막에서 여자를 데려왔다며? 그거 정말이야? 정말 그런 거야?”

그놈의 소문이란 정말... 언제 그 우락부락한 덩치가 여자로 변했는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세라.”

“뭐?! 이젠 남자한테까지 손을 댄 거야, 그 망할 자식이?”

“손대지도 못했어.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걸 주워온 거니까.”

“그러니까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왜 그딴 걸 주워오냐고! 차라리 여자를 주워왔으면 팔기라도 하지, 남자가 무슨 필요가 있다고!”

“이젠 슬슬 남자도 팔아볼까 하고.”

순간 길길이 날뛰던 암고양이가 얌전해졌다. 그것은 오랜만의 음주가무에 취해 흥청망청 놀아나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리거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엔 남자들도 그럭저럭 잘 나간다 하더라고.”

“이... 이봐, 리거. 우리들이 취급하고 있는 노예들이란 게 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이 바닥에서 굴러먹으려면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 되는 거 아니겠어?”

“안 그래도 거지 같은 인생, 아주 엿같이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하셨구만?”

“말만한 처녀가 말하는 폼 좀 보라지! 그러니까 니 녀석이 아직 애인 하나 없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라의 주먹이 리거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온 힘을 실은 것 같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여자 손인지라 그리 아프진 않았지만, 이건 사나이 자존심 문제다.

“제엔장! 아프잖아!”

“그럼 아프라고 때렸지, 간지러우라고 때렸겠냐!”

“너 진짜! 내가 함부로 주먹 날리지 말랬지!”

“어디 있어!”

“뭐?”

“그 자식 어디 있냐고!”

‘그 자식’이란 게 사막에서 주워온 죽어가는 놈을 말하는 건지, 그놈을 주운 그 정신 나간 놈을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성질 나쁜 들고양이가 손톱을 세우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럴 때엔 그저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눈앞에서 쫓아내는 것이 상책.

“버려진 오두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라는 엄청난 기세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저 성질 나쁜 고양이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오랜만이군. 그 녀석, 속 좀 썩겠어.”

“세라가 좀더 분발해서 그 녀석을 확실히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 녀석한테 어울리는 여자는 세라밖에 없다고 생각 안 해?”

“하하! 그렇지! 그 녀석은 보통 여자는 감당 못 해!”

동료들과 실실 웃으며 농담을 해대고 있는데,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암고양이에게 들볶이고 있을 그 정신 나간 장본인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게 아닌가.

그의 등장에 소란스러웠던 가게 안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쩌엉, 얼어붙었다.

“어... 어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손에 뭔가를 주렁주렁 사들고 콧노래를 부르던 남자 ─ 토오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 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 있어?”

그리고 한참만에야 방긋 웃으며 입을 연다. 무슨 일을 해도 늘 한 박자씩 늦는 게 이 남자의 특기다.

“너 어디 갔다 온 거냐?”

“약이랑 옷 좀 사러.”

“그럼 오두막에는 그 남자 혼자 있는 거냐?”

“응.”

남자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들은 일제히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핫! 그놈 세라한테 된통 깨지겠구만.”

“그 날카로운 이빨에 물려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하하하!”

“응? 왜 세라가 그 남자한테 화가 난 건데?”

그래, 둔한 것도 이 녀석의 주특기 중 하나였지.

사내 중 하나가 끅끅대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라 그 녀석이 널 좋아하니까. 질투심에 눈 먼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에에......?!”

“너 같은 이상한 놈을 좋아해 주는 기특한 애잖냐. 다른 놈팡이한테 뺏기기 전에 알아서 기라고.”

토오르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대더니 이내 미간을 좁히고 볼멘소리로 중얼댄다.

“귀찮아.”

예상했던 반응에 사내들은 배를 붙잡고 파안대소했다.

토오르라는 저 사내는 매사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여자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생사가 달려 있는 중대한 문제조차에도 “귀찮아!”라는 단 한마디만으로 모든 걸 표현하는, 그야말로 사회 부적응자의 좋은 예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남자다.

그런 주제에 여자들에겐 또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어디를 가나 끝내주는 미녀들이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녀석의 품으로 달려든다, 이 말이다.

코피가 터져나올 정도로 매력적인 미녀의 나신을 앞에 두고도 “귀찮으니까 빨리 해치워.”라고 말하는 게 토오르라는 사내건만 어째서 여자들은 저 녀석에게 그렇게 목을 매는 걸까?

“아무래도 여자들은 전부 눈이 어떻게 됐나 봐. 저 녀석의 어디가 그렇게 좋냐고. 내가 보기엔 얼빵하게 생긴 정신병자인데.”

술잔을 기울이며 비꼬듯 말하자 토오르는 미간에 세 개의 굵은 주름을 만들며 자신을 노려보았다.

딴에는 꽤 성깔 있게 보이고 싶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겠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이 작은 개가 시끄럽게 짖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저 녀석은 알기나 하는 걸까?

“리거,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지. 요즘 여자들은 꿀을 처바른 것 같은 달콤한 외모의 남자를 좋아한다고. 토오르, 저 녀석이 좀 이상하긴 해도 여자들이 딱 좋아할 얼굴이잖아.”

끝이 처진 커다란 눈에 끝이 뭉툭한 콧날, 얇고 작은 입술, 동그란 얼굴. 여자들은 남자다운 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저 어린애 같은 얼굴을 좋아한다, 이거지?

그래서 세라, 그 애도 순진한 외모를 한 저 녀석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거고.

하지만 세라, 그 애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의 어린애같이 유순한 얼굴은 단지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토오르라는 사내의 취향이란 건 좀 유별나서 가냘프고 여린 여자보다는 근육이 넘실대는 우락부락한 여자들 ─ 물론 남자를 포함해서 ─ 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애는 아마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매일매일 혹독한 훈련을 통해 근육을 키우려 들지도 모르지. 그 애는 보기와는 달리 ─ 사실 보기에도 그렇게 보인다. ─ 집념이 강한 애니까.

끈질긴 훈련의 결과로 근육으로 뒤덮인 몸을 자랑하듯 내보이는 세라, 황홀한 얼굴로 그 애의 우람한 몸을 만져보는 토오르.

와하하핫! 상상만 해도 뒤집어진다!

“그런데, 리거!”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갑자기 실실 웃음을 흘리며 눈물까지 닦아내는 리거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섰던 토오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리거는 미소가 걸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본다.

“그 남자 말이야. 정말 팔 거야?”

“물론! 너 이제 와서 그놈을 우리 동료로 삼겠다느니 네놈 것으로 하겠다느니 따위의 말을 지껄이면 죽여버린다.”

“아니... 팔아도 되긴 되는데......”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문제?”

“온몸이 상처투성이야.”

“그 정도는 괜찮아. 여자도 아니고 사내자식인데 뭘.”

원래 돈 많은 변태 놈들이란 취향이 이상한 놈들이 많아서 일부러 흉터투성이인 전사들을 원할 때도 있다. 그런 강인한 남자들을 자신의 발 밑에 깔아뭉개는 재미가 쏠쏠하다나 뭐라나.

“또 눈이 하나 없더라고.”

“흐음......”

사막에서 봤을 때도 좀 막 굴러먹은 놈 같긴 했어도 한쪽 눈이 없다는 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결정적인 단점이다.

얼굴엔 흠집이 없는 편이 더 비싸게 팔 수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아.

상처 입은 야생의 짐승, 따위의 말로 머리에 들어찬 거라곤 똥밖에 없는 귀족 변태 영감탱이, 할망구들을 유혹하면 더 비싼 값에 팔릴지도 모르지.

“그리고......”

“......또 있냐?”

“아무래도 그 남자, 스칸데르인 같아.”

오늘로서 벌써 세 번째다.

연중무휴로 떠들썩한 분위기를 자랑하던 선술집이 쨍하게 얼어붙은 게.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예전의 분위기로 돌아오는 건 쉽지 않을 듯하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자도 있었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자도 있었다. 선술집 주인은 닦고 있던 컵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리거는 마시던 맥주를 주르륵 흘렸다.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멈춘 시간 속에서 오직 토오르만이 긴장감 없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러니까... 지금 저놈이 뭐라고 한 거지?

스칸데르? 그 남자가 스칸데르인?

그놈들이 사막에 아무렇게나 나뒹굴 정도로 흔해 빠진 그런 종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역시 더위를 먹은 건가?

아니, 저놈은 원래 미쳐 있었으니까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겠지.

하지만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완전히 미쳤어!

“리거?”

리거는 토오르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너 죽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그런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하지만 진짠데.”

“농담으로라도 그 빌어먹을 말은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알았냐!”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내리치며 리거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 사나운 기세에도 토오르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고집스럽기로 따지자면 황소보다도 더한 남자다.

노려보자 웃음기 가신 굳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본다. 묘하게 박력 있는 사나운 눈빛이다.

‘농담이라고 말해,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놈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놈이란 건 알지만 이건 아니야. 차라리 농담이었다고 말하고 웃으라고!’

“리... 리거... 우리 엄청 위험한 걸 주워온 거 아냐?”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어떤 용기 있는 놈이 먼저 입을 열자 일제히 수군수군 댄다. 가게 안은 이미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원래 이 녀석 정신 상태가 안 좋았잖아. 너희들도 알다시피 그놈들이 어디 그렇게 흔해 빠진 종족이냐?”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불안하면 재빨리 팔아버리고 한몫 잡아 튀면 되잖아?”

애써 웃으며 과장된 어조로 지껄여봐도 사내들은 불안하게 눈을 뒤룩뒤룩 굴릴 뿐이다.

“젠장! 내가 확인해 보고 올게.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절대 함부로 입 열지 마. 알았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리거는 토오르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선술집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저... 리거!”

마을의 반 정도를 가로질렀을 때에야 짐승처럼 자신의 손에 질질 끌려오던 토오르가 느릿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네놈이 살 길이다.”

“하지만 리거......”

“주둥이를 확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 !”

말 잘 듣는 개처럼 토오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맑고 고운 음색.

토오르의 노래를 그 누구보다도 좋아하던 자신이었지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것도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 노래를 부를 수가 있는 걸까?

게다가 더 가관인 건 놈이 부르고 있는 노래가 이 지방 대대로 내려오는 장송곡이란 점이다. 녀석의 말로는 장송곡이란 건 신이 내려주신 최고의 노래란다.

지금까지 머물렀던 그 어떤 지방의 장송곡보다 길고 지루한 노래는 마을을 한참 벗어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즈음에야 끝이 났다.

마을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곳, 버려진 오두막이라 불리는 낡은 통나무집.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아 지붕 한쪽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고 집 근처에는 잡초들이 무성하다.

집 뒤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지형 탓에 대낮에도 볕이 들지 않아 음산하기만 한 이곳을 토오르는 자신의 아지트 겸 숙소로 삼았다.

가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들, 즉 유령도 나타난다고 하는 이곳을 토오르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동료들은 그저 저 녀석은 머리가 좀 어떻게 된 녀석이니까,라고 웃으며 넘어갔지만 리거만은 달랐다.

토오르의 정신병자 같은 취향과 행동에는 진저리를 치던 리거였지만 언젠가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찾아왔던 이곳, 버려진 오두막에 발을 처음 내디딘 그 순간, 이 집의 음산함과 어두운 실내, 녹녹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기마저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이곳은 멋진 곳이었다.

이곳에 대한 것만큼은 ‘머리가 어떻게 된’ 토오르와 생각을 같이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귀족의 방도, 심지어 왕이 머무는 침실도 이곳만큼 완벽한 자연미를 이루고 있진 않을 것이다.

집 뒤에 들어선 커다란 나무들.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 위에 누워 있으면 구멍 난 지붕 사이로 바람결에 살랑이는 나뭇잎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구름, 태양.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풀 냄새를 머금은 상쾌한 바람......

눈을 감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사락사락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 이름 모를 새 소리, 근처에 위치한 작은 냇가에서 들려오는 물 소리, 그리고 창가에 기대앉아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는 토오르의 감미로운 노랫소리.

그래서 늘 일을 핑계 대고 따뜻한 이불과 좋은 술이 있는 숙소를 빠져나와 이곳에서 토오르와 함께 밤을 지샜다.

그리고 아침이 되고 점심때가 되어서 동료들이 자신들을 찾아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마룻바닥 위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리거는 이곳을 사랑했다.

이곳에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볼을 스치는 바람은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사락사락 바람에 부대끼는 풀 소리는 음산하기만 하다.

그것은 아직까지 장송곡을 흥얼거리고 있는 토오르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저 정겨운 나무문을 열기가 두렵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끼익 소리가 나는 계단을 오르기조차 겁이 난다.

“리거.”

동료에게서 풍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이제야 눈치 챘는지 토오르는 노래를 멈추고 리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봐, 토오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동료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며 토오르는 대답 대신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 밤에 우리 둘이서 이곳에서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잖냐?”

“그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왜 그때 말이야, 시장에서 제프 족 여자 노예들을 팔고 왔던 그날......”

“아아!”

“너한텐 말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에 말이다. 숲 쪽으로 나 있는 창문에서 여자를 봤어. 창가에 서서 허옇게 뜬 얼굴로 우리들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더라고. 그땐 그냥 헛것을 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 혹시 목이 반쯤 잘려서 덜렁거리지 않았어?”

“......”

“그 여자 가끔 그래. 어떻게 죽은 건지는 몰라도 가끔 창가에 서서 나를 가만히 노려보더라고.”

“그럼 그 여잔 역시......”

“유령이야. 그 여자 말고도 꽤 있어. 머리가 반쯤 터진 아저씨도 있고, 팔다리가 없는 어린애도 있고, 제일 끔찍한 건 전신에 화상을 입은 여자 유령이지.”

리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창가에 서서 한 손을 창틀에 걸치고 술판을 벌이던 자신들을 쳐다보던 여자.

만약 그때 자신이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소리를 지르며 토오르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데서 잘도 사는구나, 네놈은.”

살짝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토오르는 어린애처럼 사심 없이 웃어 보인다.

리거는 한참 동안 말없이 토오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소 띤 얼굴로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애 같은 얼굴을.

유령이든 뭐든 좋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 현존하지 않는 허상의 존재이며,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진 않으니까.

“토오르.”

“응?”

“지금이라도 거짓말이라고, 장난이었다고 말해라.”

지금 저 안에 있는 것은 유령 따위가 아닌 인간이다.

저 바보 멍청이 토오르의 말에 따르면 그건 스칸데르인이라는, 유령 따위보다 질이 나쁜... 그 세계 식으로 말하자면 악마와도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난 거짓말 못 해.”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소년의 얼굴을 한 동료는 경쾌한 어조로 대답한다.

차라리 목이 반쯤 잘린 여자 유령이라면 좋겠다. 불에 타 죽은 여자의 유령이라도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오케이다.

하지만......

“가자, 리거.”

토오르는 갑자기 기척도 없이 일어나 생각에 잠겨 있는 리거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딜?”

“염색 직공 아저씨한테.”

언제나처럼 용건 이외의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 토오르의 성격에 화가 치밀었지만 혼자서 저 오두막으로 들어가 진실을 확인할 용기가 나질 않았기에 리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놈들은 말이야. 아주 나쁜 놈들이야. 처녀들을 잡아다가 돈 많은 귀족들에게 파는, 그런 악독한 놈들이니까......』

그놈들과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도록 하라는 둥, 그놈들이 오면 방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둥, 그런 말들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어느 때부터인가 처녀들을 잡아 돈 많은 귀족들에게 파는 그 나쁜 놈들이란 게 바로 노예 상인이며, 그리고 가끔 마을에 찾아오는 남자들이 그 일당들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른의 말에 순종하는 다른 여자애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마을에 들어서면 또래의 여자애들은 집 밖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 안에 틀어박혀 인형 놀이를 하거나 그림책을 읽는 또래의 여자애들과는 달리 세라는 밖에서 놀기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를 집 안에 가둬둔다는 것은 성난 곰을 칼 하나로 잡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은 늘 가게 일로 바빴다. 그래서 세라는 늘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그들, 노예 상인이 머문다는 선술집으로 달려간 세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본 것은 방 안의 조그만 창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무척 커다랬고 들짐승처럼 사나워 보였다. 하지만 선술집 안에서 웃고 떠들며 맥주를 마시는 그들은 마을의 어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자들은 곰처럼 커다랬지만 마을의 어른들과는 달리 젊고 또 야성미가 넘쳤다. 그리고 어린 소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그들은 멋있었다.

“어? 웬 여자애지?”

창턱 밑에 숨어 선술집 안을 훔쳐보다가 머리 위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발을 받치고 있던 맥주통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야!”

먼지투성이가 된 채 엉덩이를 슬슬 문지르고 있으려니 목소리의 주인공이 손을 내밀었다. 내뻗은 그의 손은 달빛에 비쳐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척 고운 손이었다. 크고 긴 손가락, 굵은 손목. 하지만 자신보다 더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를 가진.

“일어나. 엉덩이 아프잖아.”

내밀어진 그 손을 잡고 일어서자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눈동자가, 얼굴이 소녀의 눈 속 가득 들어찼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단아한 얼굴이었다. 창백한 이마 위에서 살랑이는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 밑에서 빛나는 부드러운 눈동자......

발갛게 홍조를 띤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는 하얗고 예뻤다.

열일곱 소녀가 사랑에 빠진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첫사랑이었다.

그 남자는 어른들이 말하던 악독한 노예 상인들 중 하나였지만 사랑이라는 말 앞에선 그런 조건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눈매가 처진 소년 같은 얼굴을 한 토오르라는 이름의 사내에게 소녀는 무작정 빠져들고 말았다. 또래의 사내애들보다도 더 활기차고 당찬 그녀였지만 그의 앞에선 수줍은 열일곱 소녀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망할!

벌써 이 애끓는 마음으로 그를 보아온 것이 2년째건만 그 둔탱이는 내 맘을 알아주지도 않고......

이번에는 뭐? 사막에서 남자를 데려와?

그들은 절대 ‘상품’을 이 마을에 데리고 오진 않는다.

그들은 어른들의 말대로 처녀들을 잡아다 파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노예들을 공수해 와 노예시장에 파는 이른바 중간 도매상이었던 것이다.

그 ‘상품’이란 게 생선이나 야채 같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란 게 문제가 되긴 하지만 뭐 어떠랴.

어쨌든 그들은 절대 아무나 잡아들이진 않는다.

그걸 알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세상이란 게 다 만족스러울 수만은 없는 법.

어쨌든, 여자라면 ‘상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남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줄 알지만 난 이미 다 알고 있어. 토오르의 취향이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한 여자란 사실을. 물론 남자도 포함된다는 사실에 욕지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래서 매일매일 훈련을 거듭해 보지만 근육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점점 풍만해지고 마니 어쩌란 말이야! 몸매가 망가질까 봐 식사를 거르기가 일쑤인 언니는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핀잔을 주곤 하지만 난 불룩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가 싫단 말이야!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토오르가 조금쯤은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을까? 근육이 넘실대는 그런 멋진 남자였다면 토오르를 나만의 것으로 할 수 있었을 텐데......

선술집에서 토오르라는 사내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열일곱 소녀는 이제 열아홉의 성숙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일부러 사내아이 같은 옷을 입고 다니지만 오히려 헐렁한 옷 위로 드러나는 잘 여문 몸의 곡선이 남자들의 음험한 욕망을 부추긴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나이가 찬 마을의 총각들이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 또한 말이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일부 청년들이 그녀의 마음을 가져가 버린 토오르의 인형을 기둥에 묶어놓고 매일 밤마다 저주를 퍼부으며 못질을 해댄다는 사실은 이미 마을에선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여어, 세라.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마을의 ‘세라 Only Love’ 멤버 중 한 명 ─ 그 멤버들은 매일 밤마다 모여 토오르 인형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더 유명하다. ─ 이 씩씩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세라를 발견하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을 빛내며 그녀를 향해 말 그대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청년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바로 그런 점이 청년들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점이었다.

“세라!”

하지만 여기에서 포기하고 물러선다면 세라의 열혈 추종자가 아니다. 청년은 세라에게 달려가 그녀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매섭게 치켜 올라간 그녀의 두 눈이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 응시당하는 것만으로도 청년의 몸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아아... 어쩌면 저렇게 섹시할까?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이 못 견딜 정도로 사랑스러워. 이대로 껴안고 저 도톰한 입술에 키스할 수 있다면!’

“너......”

“응? 왜, 왜?”

“마침 잘됐다.”

“......?”

청년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세라는 청년의 팔을 움켜잡고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갔다.

팔에 와닿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향긋한 냄새에 청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내가 이성을 잃고 날뛰게 된다면 날 좀 막아줘. 알았냐?”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맡겨줘. 세라, 너의 부탁이라면 산 위의 무덤에서 시체라도 꺼내다 줄 수 있으니까!’

헤실헤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은 마을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오두막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은 버려진 오두막이다.

한낮에도 집 옆의 커다란 나무 탓에 볕이 비치지 않아 음습한 분위기를 더하는, 일명 유령의 집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지만 유령이 나오건 말건 어른들 말은 죽어라 듣지 않는 비행 청소년들이 모여 야한 짓을 벌이는 그런 비밀의 장소인 것이다. 물론 그 빌어먹을 토오르라는 녀석이 이곳에 터를 잡기 전까지의 일이지만.

“들어가자.”

“에엣! 이곳은 이제 토오르 자식, 아니 토오르 씨의 집이잖아.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건......”

“한 대 후려갈기기 전에 빨리 들어와!”

야단맞은 아이처럼 청년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늘이 져서 그런지 이곳은 싸늘하기만 하다.

뚫린 천장 틈 사이로 보이는 나뭇가지, 금이 간 벽, 구석진 곳 창가에 놓인 낡은 침대 하나,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이 음산한 분위기를 더한다.

그리고 침대 곁 구석진 곳에 그것이 있었다. 이곳에서 자주 나온다고 하던 유령.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유령이 말이다!

“당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역시 세라다. 유령한테까지 말을 거는 저 담대함이라니.

‘새삼 반해 버렸어, 세라.’

하지만 보통 유령이란 건 허공에 둥둥 떠다니거나 하는 거 아니었던가. 그런데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저건 움찔움찔 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유령이라기보다는 뭐랄까. 덫에 걸린 들짐승 같다고나 할까.

“구석에서 청승 떨지 말고 나와. 당신과 할 얘기가 있으니까.”

세라가 다가서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댄다. 가만히 보니 저건 유령이나 들짐승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다.

건강한 갈색 피부에 커다란 덩치를 한, 남자.

그 얼굴이 낯설긴 해도 눈, 코, 입 다 붙어 있는 인간이란 건 확실히 알겠다.

“세라, 저 남자는 뭐야?”

조심스럽게 묻자 세라는 청년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토오르가 주워온 남자.”

토오르. 그 이름을 가진 남자는 청년과 같은 목적을 지닌 사내들에게 있어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는 존재.

청년은 눈을 번뜩 빛냈다.

빌어먹을 노예 상인 주제에 감히 자신들의 마돈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씹어 삼켜도 시원찮을 놈.

그놈이 주워온 남자란 말이지, 저게?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그놈들은 여자만 팔지 않았던가?”

“닥치지 않으면 그 주둥아리를 확 찢어버리겠어!”

네... 네에. 쓸데없이 나선 제가 죽일 놈입니다.

여자의 일갈에 잔뜩 주눅이 들어 조개처럼 입을 다문 이 모습을 청년의 부모가 봤다면 아마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통의 사내들보다도 강하고 당찬 여자란 것은 마을의 코흘리개 어린애도 알고 있는 사실. 그녀가 화가 났을 땐 그저 닥치고 있는 게 목숨 보전하고 오래오래 사는 방법이라는 걸, 숱한 경험으로 알게 된 청년이었다.

“나보다 덩치도 큰 주제에 왜 이렇게 겁이 많아? 내가 무서워? 그냥 얘기 좀 하자고 하는 거잖아.”

허리를 굽히고 조심조심 다가서는 폼이 성난 들개를 진정시키는 것 같다.

눈, 코, 입 다 달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해도 그녀가 다가설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는 것도 그렇고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것도 그렇고 영락없는 들짐승이다.

‘그 망할 노예 상인 녀석. 대체 어디서 저런 상태가 안 좋은 물건을 주워온 거야?’

“으이씨! 자꾸 내 성질 건드릴래? 모가지를 붙잡고 끌고 나와야 되겠어?! 그 면상을 확 불로 지져줄까!”

그녀로선 정말 많이 참고 있는 것이란 걸, 청년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한 끗발만 잘못 나가면 그야말로 그녀는 미친 곰이 된다.

아까 세라가 자신이 날뛰면 막아달라던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세라, 난 아직 죽기 싫거든?

미쳐 날뛰는 널 막았다간 난 아마 죽어도 곱게 못 죽을 거야.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할 생각도, 달려들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구석에 처박혀 으르렁대기만 할 뿐이었다.

이쯤 되면 성질 더러운 암고양이가 미친 살쾡이가 되기에 충분한 요소를 갖춘 셈이다.

“크아악! 죽여버린다!”

‘히익! 드디어 터졌다. 드디어 터졌어!’

엄청난 소리를 내지르며 세라의 발길질에 낡은 침대가 날아가고 몸을 가려주고 있던 방해물이 없어지자 사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설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다.

청년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것은 세라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손을 뻗으면 금방 사라질 신기루 같았다. 뚫린 천장의 틈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받아 빛나는 정령, 눈부시게 아름다운 꿈속의 존재.

뭐라고 해야 할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이미지다. 화사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결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눈에 확 띄는 미인은 아니지만......

‘흐음...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정령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덩치가 크고, 들짐승 같기도 하고, 또 엄청 남자답고 야성적이고......’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눈을 번쩍 떴다.

‘그래, 매력적이다. 신비롭다. 지독히도 관능적이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사내는 숨이 막힐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같은 남자인 자신조차도 마른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묘한 색향이 그의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자처럼 몸이 가는 것도, 그렇다고 예쁜 얼굴도 아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상처투성이의 피에 물든 전사다.

하지만 적당히 자리잡힌 근육 때문인지 몸을 웅크리고 있는 탓인지 덩치가 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약해 보이지도 않는다.

저것은 남자다.

남자, 그 자체다.

그렇기에 더 더욱 사람을 흡입시킨다. 빨아들인다.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저 매서운 눈에, 관능적인 입술에, 몸에.

갑자기 하반신이 불끈 달아오르는 것을 곁에 선 세라 때문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청년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 덕분에 세라 역시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부릅뜨고 성큼성큼 사내에게 다가선다.

“당신 대체 뭐야?”

사내는 그녀를 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는다. 그저 한쪽 눈을 들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당신, 토오르를 유혹한 거지? 그 자식은 당신 같은 근육질한테 사족을 못 쓰니까.”

토오르, 그놈의 취향이 그랬단 말이지?

하지만 저 정도의 남자가 웃으며 유혹한다면 굳이 그런 취향을 가진 남자가 아니더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게 분명하다. 원래 남자란 생물이란 건 위험한 색기에 약하므로.

“말해 두지만 토오르는 내 거야! 그리고 뭐 때문에 토오르한테 빌붙어 왔는지는 몰라도 당신은 곧 팔릴 몸이라고. 알아?”

남자의 눈이 아주 잠깐 흐려졌다.

흐트러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오래돼서 흉터가 생긴 것도 있지만 아직 새빨갛게 부어오른 상처도 보인다. 게다가 한쪽 눈은 천에 감겨 있다.

‘저런 몸으론 유혹을 할래야 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라? 그냥 그 변태 놈이 길 가다가 자기 취향이다 싶으니 주워온 거라고 생각되는데?’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가는 역시 목숨 보전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강하고 매력적인 자신들의 마돈나도 여자였다. 질투에 미쳐 어린애같이 상처 입은 사내를 몰아붙이는 저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역시 사랑의 힘이겠지.

“난......”

상처 때문인지 사내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첫 음절을 떼는 것만으로도 메마른 입술이 쩌억 하고 갈라터질 정도다.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해야 할 거 아냐!”

“난... 아무것도 몰라......”

더위라도 먹은 건가. 동문서답도 정도가 있지, 다짜고짜 난 아무것도 모른다니.

“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아무것도 몰라. 아는 게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묻지 마. 더 이상 날 귀찮게 하면......”

─ 죽여버리겠어.

꿈틀거리는 입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분명 입 안으로 눌러 삼킨 말은 그것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니까!”

참다못한 세라가 신경질적으로 남자의 옷깃을 잡고 흔들자 그 몸이 맥없이 흐느적거린다. 길게 뻗은 두 팔이 마룻바닥에 쓸려 사락거리는 묘한 소리를 냈다.

저 남자는 세라를 다른 누군가와 착각을 하는 듯하다.

푸석푸석한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한쪽뿐인 눈이 청년에게로 향했다. 잠에서 덜 깬 듯한 나른한 눈이다.

그 눈에 응시당한 순간 뭔가 덜컹,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주문을 외우듯 말라터진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언젠가 보았던 연못에 빠져 죽은 여자의 시체처럼 파리한 얼굴을 하고 맥없이 흔들린다. 물결에 따라 일렁이는 수초처럼. 짙은 암갈색 눈동자가 유혹하듯 자신을 응시한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그 지친 듯한 얼굴에, 움직이는 메말라터진 입술에 자연스럽게 흡수당한다. 메마른 대지가 물을 그대로 빨아들이듯 그렇게.

“뭐 하는 거야, 세라!”

갑자기 들려온 날카로운 음성에 청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대체 뭐야, 저 남자는?’

아직도 터져나올 듯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을 청년은 위아래로 쓸며 얕게 숨을 내쉬었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한테 너무 심하잖아!”

자근자근 밟아 죽여도 시원찮을 연적 놈이랑 저 덩치 큰 놈, 그 망할 노예 상인 떨거지들의 우두머리라고 했던가.

‘흐음... 저놈 이름이 뭐더라.’

“뭐야, 리거? 내가 이 남자를 죽이기라도 했을까 봐 달려온 거야?”

그래, 리거였다.

두 사람의 등장으로 오두막 안에 눌러붙어 있던 이질적인 공기가 순환된다. 남자들의 땀 냄새를 머금은 녹녹한 바람, 썩은 나무 냄새, 그런 것들로 꽉꽉 들어찬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섬뜩할 정도로 차갑다는 것만 빼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더운 여름날에 벌어진 소란스런 일상이다.

늘 선술집 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멤버들이 타지에서 온 짐승 같은 남자를 가운데 두고 티격태격 다투고 있다는 것도 평소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확실하게 아프도록 인식된다.

안개가 잔뜩 낀 늪지대에 서 있는 것 같다.

온몸에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그것이 여전히 저 남자의 초점 없는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청년은 알 수 있었다.

‘기분 나빠.’

청년은 미간을 좁히고 애써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뱀이 궤적을 그리고 지나가듯 온몸에 그의 시선이 박혀 축축한 물기를 머금고 지나간다.

“어쨌든 모두 나가. 우린 해야 할 일이 좀 있으니까.”

“당신들끼리 이 남자한테 뭔 짓을 하려고!”

“하긴 뭘 해! 토오르 놈은 몰라도 난 여자가 좋단 말이다! 사람을 멋대로 변태로 만들지 마!”

“그럼 그건 또 뭐야?”

“알 거 없어.”

“그게 뭐냐니깐! 사람 말이 개 짖는 소리쯤으로 들리나 보지?”

또 시작됐다.

암고양이와 능청스런 곰의 한 판 승부.

두 짐승의 싸움은 웬만해선 끝나지 않는다. 게다가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토오르와 청년은 가만히 서서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싸움을 관망했다.

세라는 리거의 손에 들린 나무통 속의 내용물이 궁금한 모양이었고 늘 그렇듯 리거는 그게 뭔지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다.

세라의 쓸데없는 호기심과 리거의 고집이 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젠장, 그만둬! 쏟아진단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거의 손에서 나무통이 떨어졌고 통 속 가득 담긴 무언가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옅은 주홍빛의 액체였다.

과일즙이라고 하기엔 냄새가 너무 고약했고 끈적끈적 달라붙는 느낌이 욕지기가 절로 나올 정도로 불쾌하다.

청년의 아버지는 염색 직공이었다. 덕분에 사방으로 튄 이 액체가 염색할 때에 쓰이는 약품이며, 요즘 머리카락 염색약으로 유행하는 아성초의 성분을 희석시키는 용액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젠장, 이젠 난 몰라!”

오두막 안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홍빛 액체를 뒤집어쓴 채 침묵을 고수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어떤 용도에 쓰이는 것인지 따위는 이미 세라에게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독한 냄새에 코를 막은 채 넋 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를 망연히 응시하고 있었고, 청년 역시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설마... 잘못 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떠도 눈앞의 영상은 여전하다.

주홍빛 액체를 뒤집어쓴 채 남자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몸에 쏟아진 액체가 불쾌한지 조각 같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린다.

손가락 사이로 덩어리져 올라가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방금 전까지 천박한 붉은색이었던 그것은 짙은 밤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저것은 갈색 따위가 아니라 어둠, 밤의 색이다. 검정, 흑영과도 같은 까만색의......!

“서... 설마 스... 스칸데르......?”

청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리거와 세라는 거의 동시에 청년에게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연속 동작으로 사건의 심각성을 새삼 절감하게 해주는 두 사람이었다.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입에 바느질이라도 좀 해둬라, 알았냐?”

“만약 이 사실을 발설했을 경우 두 번 다시 서서 소변 누는 일은 없을 거다!”

좋아하는 여자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이 행복한 순간에 지옥 끝까지 추락한 것 같은 절망감을 느껴야만 하다니.

한 남자와 여자가 청년 하나를 깔아뭉개고, 밑에 깔린 청년은 호흡 곤란으로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발버둥치는 우습지도 않은 광경을 내려다보며 토오르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거 봐, 내 말대로 정말 스칸데르지?”

“망할 ─ !”

리거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토오르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네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

“어째서?”

“네놈이 사막에서 저놈을 주워오지만 않았다면 괜찮았을 거 아냐! 이젠 어쩔 거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노예시장에 비싼 값으로 팔아 치우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한몫 챙기려다가 도리어 우리가 당해!”

“그럼 할 수 없지. 좀 아깝긴 하지만 이대로 죽여서 사막에 갖다 버리고 오자.”

“끄아아악 ─ !”

참다 못한 리거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자신이 리거였다면 아예 토오르란 놈의 목을 따서 사막에 던져버리고 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청년은 세라의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몸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리거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고 토오르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세라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의 중심이 된 인물은?

“그런데 말이에요. 저 사람, 도망가려고 하는데요?”

혼란한 틈을 타 탈출하려는 남자를 발견한 청년이 입을 열자 리거와 세라가 방금 전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것처럼 재빨리 남자의 몸을 덮쳐 눌렀다.

덩치가 덩치인만큼 쿵 소리와 함께 남자가 쓰러지자 움직이지 못하게 리거가 그 몸 위에 버티고 앉았다. 마룻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은 주홍빛 액체와 뒤섞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검다. 칠흑같이 어두운 색이다.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건강한 갈색 피부를 지닌 스칸데르인은 밤의 어둠에 숨어들면 좀처럼 찾기 힘들다고, 할머니는 어린 자신에게 말씀해 주셨던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은 그래도 사람인데 어찌 찾을 수 없겠냐고 웃으며 말했었지만 늘 그랬듯 할머니의 말씀은 언제나 옳다.

‘물론 찾을 수 없겠지. 이 남자 자체가 밤의 어둠이니까.’

청년은 반항할 기력도 없는지 리거의 밑에 깔려 늘어진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처음 이 남자를 봤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위화감은 머리카락 색 때문이었나.

이 남자에게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색이라고 생각했었다.

천박한 붉은색이 이 남자의 야성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이다.

이 남자에게는 어둠의 색이 어울린다.

처음 봤을 때도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뭐랄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젠 어쩔 거야?”

세라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토오르의 말대로 죽여서 사막에 갖다 버리기라도 할 거야?”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냐, 이게? 저 바보 같은 놈 때문에 선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다시 저놈 머리카락을 염색시킨 뒤에 갖다 버리면 되는 거지.”

“그렇다면 토오르 말대로 죽여버리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

“난 살인은 안 해.”

리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남자의 몸 위에서 일어섰다. 움직일 기력도 없는지 바닥에 축 늘어진 남자를 안아 일으켜 손으로 더러워진 그의 얼굴을 슥슥 문질러 닦아준다.

“이봐, 당신 어디서 도망쳐 왔어?”

대답 대신 남자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리거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웅얼웅얼 입 안에서 혀를 굴리고만 있는 것이다.

몸 상태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도 안 좋은 듯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꽤 고급품인데, 어느 돈 많고 할 일 없는 귀족 나부랭이의 노예였나. 그렇다면 그 변태 같은 놈, 얼굴 좀 보고 싶군. 대체 정신이 어떻게 박힌 놈이길래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거냐고. 아무리 자기 노예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감정 없는 굳은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리거는 미간을 좁혔다.

이 남자는 늘 그랬다.

노예 상인들은 빈민가에서 헐값에 젊은 여자들을 사들이거나 갈 곳 없이 떠도는 어린아이들을 잡아들인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인들에겐 사람이 곧 돈이고, 돈 없는 빈민들에겐 어린 자식들이 곧 돈이다. 이 빌어먹을 나라는 그렇게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리거는 절대 다른 상인들의 악행을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도매상인들에게 넘겨받은 노예 중 돈에 팔려온 소녀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늘 말한다. 어째서 하필 이런 일을 하느냐고 본인에게 물으면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벌어먹고 살 재주가 이것밖에는 없으니까,라고.

하지만 이 업계에 발을 내디딘 이상 좀더 잔인해지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힘들다. 아직 어린 세라조차도 리거의 쓸데없는 동정심이 언젠가 화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토오르의 말대로 죽여서 사막에 갖다 버리고 오면 될 것을......

“그런데 리거, 어떤 간 큰 놈이 스칸데르인을 노예로 데리고 있었겠어.”

“스칸데르인 혼혈이 귀족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아냐? 가끔 시장에 스칸데르 혼혈이 한 번씩 나오면 아주 난리가 난다고. 한동안 단속이 엄청 심하더니 전쟁 때문인지 요즘엔 단속 자체가 아예 없어져서 전보다 더 성황이야.”

“그럼 노예시장에 갖다 팔아도 단속이 없으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거잖아.”

“너 지금 이 남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 남자는 혼혈 따위가 아니라 100% 순혈종이라고. 봐, 이 품질을 증명해 주는 낙인을!”

리거는 사내의 목을 움켜잡고 앞으로 눌러 보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뒷목엔 초록색 별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뭐......?”

“이 낙인은 타 종족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스칸데르 순혈종에게만 있는 거란 말이다.”

세라는 눈을 끔뻑이며 사내의 뒷목에 자리잡은 초록색 별의 낙인을 노려보았다.

스칸데르... 말로만 들어왔던 전설의 종족.

게다가 순혈종이란다.

사내에게서 느꼈던 지독할 정도의 위화감은 그래서였던가.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되지요?”

“으... 젠장.”

청년의 말에 리거는 대답 대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부터 이 오두막 근처에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게 하지 마.”

“어차피 이 근처엔 아무도 안 와.”

“세라, 너도! 함부로 이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그리고 저 바보 같은 녀석 입단속 좀 제대로 시켜.”

“그건 걱정 마.”

세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청년을 노려보았다.

이 일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꺼냈단 봐라.

네놈은 내 친히 잘게 썰어서 들짐승의 먹이로 뿌려주마.

매서운 그녀의 두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절대 말 안 해요. 사랑하는 세... 아니,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세라와 리거가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청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난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다구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아무것도 못 해보고 죽고 싶진 않아요.”

이건 진심이었다.

왕이 보내는 수비대보다도, 소문으로 들어왔던 끔찍한 고문보다도 세라라는 여자의 광포함이 더 더욱 두려운 청년이었다. 게다가 저 리거라는 놈은 입으로는 살인 따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악당의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

‘죽어도 말 안 해. 이 일은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갈 테다.’

물론 저 남자를 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던 일도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어떻게든 좋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이 남자는 토오르, 네가 데리고 있어라.”

“딱 당신 취향이라고 이상한 짓만 했단 봐라. 그땐 내가 저 남자의 목을 쳐버릴 거야!”

세라의 사나운 말투에도 토오르는 눈을 크게 껌벅이기만 했다.

세라가 계속 쫑알쫑알 시끄럽게 떠들어댄다면 미간을 잔뜩 좁히고 퉁명스런 목소리로 귀찮아,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그럼 일단 나는 숙소로 돌아가서 녀석들을 진정시킬 테니까 토오르, 허튼짓 하지 말고 잘 부탁한다.”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리거는 재빨리 세라의 어깨를 감싸안고 문 쪽으로 떠밀었다.

불만스러운 듯 세라는 잔뜩 부은 얼굴로 리거를 노려보았지만 날카롭게 쏘아붙일 상황이 아니란 걸 아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청년도 머뭇거리며 일어서 도망치듯 오두막 밖으로 빠져나갔다.

모두가 빠져나간 오두막 안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적막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아무도 찾지 않는 이 버려진 오두막 안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또 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형처럼 늘어져 꼼짝도 하지 않고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상처투성이의 사내, 아름다운 검은 털의 들짐승 같은 남자가.

악몽의 연속이었다.

뭔가에 쫓겨 벼랑 밑으로 떨어져서 온몸이 산산조각났는데, 뼈까지 다 보일 정도로 망가진 몸으로 자신은 또 뛰었다.

그 무언가는 물 속에 빠져도, 들짐승에게 씹어 먹혀서 팔 하나가 날아가도, 내장이 뜯겨도 끈질기게 자신의 뒤를 쫓아왔다.

밤새도록 꿈에 시달린 탓으로 아침에 눈을 뜨자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눈 밑엔 검은 기미가 꼈고 얼굴은 까칠까칠하고, 큰 병에 걸린 환자 같은 몰골로 식당에 내려가자 동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뭐야? 어제도 잠을 설친 거냐? 머리만 대면 코를 골고 자던 네가 웬일이냐, 리거.”

“어디 아픈 거 아냐?”

리거는 흙빛이 된 얼굴로 억지로 미소지어 보였다.

벌써 같은 꿈을 꾼 지 사흘째다. 그 전에도 잠자리에 들면 온갖 상념이 떠올라 잠을 설치곤 했는데 이 악몽을 꾸게 된 이후로는 잠을 설치는 정도가 아니다.

“자, 어쨌든 많이 먹으라고. 먹어야 병도 빨리 나아.”

동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 몫의 음식을 리거의 앞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수면 부족 탓에 아침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동료들의 성의를 마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곧 바흐티 지방으로 떠나야 하는데, 이래서야 갈 수 있겠어?”

“커어헉!”

억지로 떠넘긴 스프가 갑자기 목에 걸려 리거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동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등을 두드려주고 물을 갖다 바치며 역시 큰 병이 난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래, 이것도 병이라면 병일 수 있겠지. 사람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걱정을 해도 몸 상태가 안 좋아진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시니까.’

동료들의 말대로 곧 이곳을 떠나 바흐티 지방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제법 큰 규모의 노예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사막이 인접해 있는 험난한 지형 탓에 수비대의 단속이 미치지 않아 공공연하게 노예를 사고 파는 곳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노예들을 원하는 대 부호나 귀족들이 손님의 대부분이라, 노예들을 꽤 비싼 값에 처분할 수 있다는 게 그곳의 최대 장점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각지의 노예 상인들이나 다른 자들보다 좀더 특별한 노예를 원하는 귀족들, 싼값에 많은 수의 노예를 원하는 상인들 역시 사막의 모래 바람과 태양에 시달리면서 굳이 그곳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리거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도매상인이기 때문에 쓸 만한 노예들을 큰 시장에서 공수해 와야만 한다. 그 말인즉슨, 바흐티 노예시장이 서는 날까지 때맞춰 도착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는 것.

“괜찮나, 리거?”

“미안, 아침 식사는 너희들끼리 해.”

리거는 서둘러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여관 식당을 빠져나왔다.

10년 만에 찾아온 지독한 더위로 대지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땀이 주르륵 흘러 셔츠를 적신다.

리거는 여관 뒤에 있는 나무 그늘에 벌렁 드러누웠다. 수면 부족에 식사까지 거르다 보니 아주 하늘이 샛노랗다.

차라리 이대로 피익 쓰러져버릴까?

그럼 이번 바흐티에는 가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그랬다간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게 뻔했다.

동료들은 분명 리거 소년은 뜨거운 태양이 무서워서 소녀처럼 픽 쓰러져버리고 말았네, 따위의 노래를 만들어 일 년 내내 불러댈 거다.

“어이, 리거 아가씨.”

암만 봐도 못생긴 저 고양이 얼굴에 싸가지없는 말투는 세라다.

“더위 먹었냐, 너? 내 어디가 아가씨로 보이는데?”

“맞잖아, 아가씨. 곱디고운 귀족 아가씨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 나서면 아앙∼ 소리를 내면서 피익 쓰러지고 말지. 그뿐인 줄 알아? 아가씨는 더위를 먹어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내가 이렇게 된 게 더위 때문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세라는 말없이 리거의 곁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가져온 바구니를 뒤적여 뭔가를 꺼내 리거의 눈앞에 내민다. 금방 씻어왔는지 물방울이 그대로 맺혀 있는 마멜로 열매다.

“우선 이거라도 좀 먹어. 냇가에 계속 담가뒀으니까 엄청 시원할 거야.”

아무리 성질 더럽고 우악스런 애지만 저 불룩한 가슴이 그냥 달린 건 아닌가 보다. 안 그래도 입맛이 없는데, 아침부터 닭고기 구이 같은 걸 내미는 동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어, 세라.”

열매를 받아들고 웃어 보이자 세라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입술을 삐죽이 내민다.

“당신은 너무 느끼해. 어떻게 그런 쪽팔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

“뭐, 이런 것도 다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 중 하나 아니겠냐?”

열매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시원하고 달콤한 과즙이 입 안 가득 고인다. 마멜로 열매가 이렇게 달고 맛있었는지 새삼스럽다.

세라, 네가 원한다면 사랑한다는 말까지 해줄 수 있어.

“곧 떠난다며? 그럼 그 남자는 어떻게 할 거야?”

리거는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반쯤 파먹은 마멜로 열매를 노려보았다.

“쓸데없이 눈에 힘만 주지 말고 어쩔 거야? 노예시장에 갖다 팔 거야?”

“그, 그... 래야겠지.”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지 마. 그 시장은 특이한 노예를 주로 파는 곳이라며. 그러니까 그 남자도 그냥 팔아버리고 홀가분하게 돌아와.”

“......”

“리거!”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아.”

“왜? 처음부터 시장에 팔 거라고 했잖아. 그냥 상품이라고 했잖아!”

“이봐, 세라. 물론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그 녀석이 쉽게 승낙할지도 문제고......”

“거짓말쟁이! 허풍 대마왕!”

세라는 리거에게 빈 바구니를 던지며 악을 썼다.

물론 세라의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 여자애의 어리광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떼쓰지 마. 지금 너만 힘든 거 아냐. 넌 자신이 힘들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타입이지. 그게 얼마나 사람을 열받고 짜증나게 하는지 알기나 해? 그러니까 토오르가 널 봐주지 않는 거야.”

적당히 타이를 생각이었는데 그만 본심이 나와버렸다. 세라는 붉게 상기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거친 숨결을 토해 냈다.

‘이런, 설마 울려버린 건가.’

“다... 다 죽여버릴 거야. 내 손으로 직접 그 자식의 목을 쳐버릴 거야!”

세라는 눈물이 터져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기 위해 땀이 밴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 어이, 세라.”

“당신이 못 한다면 내가 할 거야! 그 재수 없는 낯짝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 놓을 거라고!”

“세... 세라! 잠깐 기다려! 세라!”

사내아이처럼 주먹을 움켜쥐고 달리는 세라를 붙잡아 보려고 해보았지만 그것은 헛된 시도였다. 세라는 금세 언덕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고,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 대신 매미 소리가 고막을 후벼팠다.

설마 저 녀석, 진심은 아니겠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에 묻은 과즙을 핥아보지만 이마에 맺히는 이 식은땀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저 제발 부탁이니 세라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그 남자가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랄 뿐.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토오르가 사막에서 주워온 그 남자가 스칸데르인이건 뭐건 다 좋다. 동료들에겐 몇 번이나 그건 토오르의 농담이었다고 말해 놓았고 만에 하나 그때 오두막 안에 함께 있었던 청년이 입을 함부로 놀린다고 해도, 이런 시골구석에까지 왕의 수비대가 상주하진 않으므로 당장 큰일이 벌어질 염려는 없다.

근처의 영지에 영주 관할인 조그마한 부대가 있긴 하지만 그나마도 전쟁 탓에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전쟁은 꽤 규모가 큰 것이라 불패의 왕 라자르조차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정신 나간 왕이 두려운 게 아니다. 물론 끔찍한 고문과 사형 방법에는 모두들 치를 떨지만, 사람들의 두려움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하얀 것은 선, 검은 것은 악이라는 인식만큼이나 확실하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는 인식. 일종의 미신과도 같은 그것에 사람들은 주체 없이 흔들리고 만다.

스칸데르인을 상징하는 검은색, 밤의 어둠.

그들은 저주받은 존재다.

그들에게 흐르는 진하고 독한 저주스러운 어둠의 피는 불행을 부른다. 그들의 곁에는 늘 독한 피비린내와 죽은 자의 망령이 떠돌아다닌다. 그들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다.

리거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미신을 광신하는 자 중 하나였다.

분명 큰일이 일어나고 말 거다.

버려진 오두막 근처에 흐르는 불온한 공기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리거는 그곳의 삐걱대는 마룻바닥이 정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아도 아름다운 새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 남자가 머문 뒤로 버려진 오두막이 사람들 말처럼 저주받은 유령의 집으로 변했다는 것을 토오르는 알고나 있는 걸까.

차라리 그때 사막에서 토오르가 반대를 하건 말건 그 남자를 버려두고 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만사가 귀찮다는 듯 되는 대로 살아왔던 그 바보가 그 남자에게 그토록 애정을 쏟을 줄 알았더라면, 지금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예견했었더라면 밤마다 얼굴 없는 귀신과 생쇼를 벌이지 않아도 됐겠지.

좀더 모질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고, 또 콧속으로 파고드는 뜨거운 공기가 불쾌해서 리거는 신경질적으로 잡초를 한 움큼 뜯어 허공에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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