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휘르곤의 눈물 9 (10/16)

휘르곤의 눈물 9

완전히 미쳤다는 게 주위 사람들의 평이었다.

간혹 뭔가에 홀린 게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때가 때인만큼 마음 놓고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을 거라고 혀를 차며 말하는 현실주의자들도 더러 있었다.

부채를 들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대는 귀부인들이나 노골적으로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는 귀족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두려움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이 모아진 한가운데, 바로 그가 있었다.

찬란한 저 태양빛만큼이나 현란하게 빛나는 은색의 머리카락, 긴 속눈썹 아래 자리잡은 보석 같은 자수정빛 눈동자.

바람에 그의 화사한 몸을 감싼 검은 망토가 물결치듯 펄럭이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는 망토에 그려진 붉은 용이 꿈틀대며 청년의 몸을 휘감았다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은 아름다웠다.

은색 갑옷으로 둘러싸인 그의 모습은 그림 속에 나오는 고대의 정령과도 같았다. 하지만 똑바로 앞을 향한 보랏빛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고 햇빛에 더욱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는 죽은 자의 그것처럼 납빛을 띠고 있었다.

꿈처럼 아름다웠기에 그만큼 두려웠다.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그 아름다운 얼굴에 표정이 없었기에 더 더욱.

처음 사람들은 청년의 섬뜩하기까지 한 아름다움에 놀라워했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한 살기를 내뿜는 두 눈에, 무섭도록 굳은 얼굴에 서서히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공포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자신들의 두 눈은 악마와도 같은 아름다움의 소유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저 남자는 위험한 존재다. 그는 이빨을 감춘 거대한 야수다.

그런데도 끌리고 있는 것이다. 저 무섭도록 위험한 청년에게 어느새 정신을 완전히 빼앗겨 버리고 마는 것이다.

청년을 태운 왕이 가장 아낀다던 명마(名馬)가 갑자기 뭔가에 놀랐는지 울부짖으며 앞발을 쳐들자, 그제야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두 눈은 청년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고정되었다.

침착하게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진정시키고 아맛빛 갈기를 쓰다듬는 그 작은 동작, 눈을 깜빡이는 사소한 행동에서도 세련된 우아함이 묻어난다. 결코 과장되지 않은 절제된 행동이 어느 때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아름다운 외모와 강렬한 눈빛, 그것만으로 이미 청년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두려움에 기인된 비틀린 관심이라 할지라도.

덩그러니 의자 하나만이 놓여 있던 계단 위의 단상에 제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들어서자 군중들의 웅성거림은 거의 극에 달했다. 그것은 늙은 제사장의 뒤에 선 군인이 두 손으로 받쳐 든 상자 때문이었다.

페르티잔을 상징하는 붉은 용이 그려진 작은 상자. 그 안에는 오직 이 나라의 왕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보석이 들어 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노쇠한 제사장은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청년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 늙은이의 손으로 직접 전하의 후계자가 되실 분께 이 보석을 드리게 되다니요. 이제 이 늙은이, 곧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검버섯이 핀 얼굴로 제사장은 힘겹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청년의 얼굴엔 변함이 없었다. 늙은 제사장은 그저 조용히 웃으며 군인의 손에 옮겨진 상자의 뚜껑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열었다.

붉은 벨벳 천에 감싸인 은색의 물체. 그것은 목걸이였다.

길게 늘어진 은색의 줄 아래엔 여자의 얼굴이 섬세하게 세공된 펜던트가 달랑이고 있다.

과연 그것은 이 나라 최고의 보석다웠다.

장인의 솜씨로 섬세하게 세공된 여인의 얼굴은, 오래전 페르티잔을 건국했던 영웅의 목숨을 적에게서 구해 주었다던 용감한 여인의 것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 탓에 은색의 줄은 고리 부분에 약간 녹이 슬긴 했지만 펜던트의 찬란한 빛은 그대로였다.

햇빛에 비추면 그 극채색의 빛이 천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보인다던 클로둔 광물은 이제 대륙에선 찾아볼 수 없는 전설의 광물이다. 이것은 더러워져도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에 씻기만 하면 새것처럼 그 영롱한 빛을 발한다고 한다. 아마 100여 년이 지나도 이 펜던트의 아름다운 빛깔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제사장은 몸을 낮춘 청년의 목에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어깨 아래로 늘어진 청년의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펜던트의 화사한 빛은 군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라자르 전하께서는 2년 전부터 이 보석을 상자에 넣어 제게 보관해 두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분은 이 보석을 물려줄 후계자를 찾고 계셨던 거겠지요.”

늙은 제사장은 뒷짐을 지고 선 채 두꺼비처럼 눈을 끔벅였다.

청년은 자신의 이야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의 보랏빛 두 눈은 이미 저 너머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부디 살아 돌아오셔서 그 늠름한 모습을 이 늙은이가 다시 한 번 지켜보게 해주십시오, 네프 님.”

제사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년은 귀부인처럼 하얀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청년의 뒤로 열을 맞춰 늘어서 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의 울음소리와 뽀얀 흙먼지 속에서도 청년의 존재는 희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뚜렷하고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킨다.

마치 구름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내려와 은색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청년을 비추는 듯, 거친 군인들 사이에서도 결코 그 빛을 잃지 않는 것이다.

“성 요세핀 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제사장이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한 군인들의 선두에 선 청년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자 그를 호위하고 있던 군인들도 머리를 숙여 전쟁터로 출격하는 이들의 무운을 빌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나라의 왕 라자르는 한 청년을 모두에게 선보였다. 긴 은발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남자였다.

라자르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고, 그에 거세게 반발하던 철없는 귀족 청년은 왕의 후계자라는 남자의 칼에 헛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마치 자신에게 등을 돌린 귀족들을 모두 잡아들여 피의 숙청을 감행했던 젊은 시절의 라자르 왕을 보는 듯한 모습에 귀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가 라자르 왕처럼 전쟁터로 출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을 때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더 이상 라자르와 같은 악마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그가 라자르와 함께 사이좋게 전사(戰死)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자객을 보내 그들을 암살하고 ‘전사’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는 방법도 있다.

백성들에게 전쟁이란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을 앗아가는 저주스러운 것이겠지만 라자르 왕을 밀어내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는 자들에겐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일이었다.

이 전쟁에서 한 나라와 종족을 완전히 이 대륙에서 사라지게 했던 악마 ‘라자르’와 그의 후계자는 사라진다.

더 이상 이 대륙을 피로 물들게 할 수는 없다. 광인(狂人)의 피는 이 세상을 어지럽게만 할 뿐이다. 그렇기에 성에 모인 급진적인 세력들은 허리를 숙여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 두 부자(父子)에게 죽음의 신(神)이 늘 함께하시길.

머리 위에서 태양이 불타오른다.

이대로 저 황금빛 불꽃에 타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시야가 흐리다. 한 손으로 말고삐를 거머쥐고 다른 한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출발은 좋았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을 나서는 군인들의 얼굴은 이미 전쟁에서 이기고 온 영웅처럼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폐허가 된 수도를 벗어나 산길에 접어들면서부터 사내들은 개처럼 혀를 내빼물고 말 위에서 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끔찍한 더위다.

이런 날씨에 보호 장비까지 챙겨입었으니 군인들이 느끼는 더위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다.

끓는 물 속에 목까지 푸욱 담가진 것 같다고, 한 사내가 보호 장비를 벗으며 말하자 사내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지금 우린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나 다름없지.”

“이대로 푸욱 삶으면 정말 맛있을 거야.”

“간도 제대로 맞고 육질에 적당히 탄력도 있겠다, 시장에 갖다 팔면 최고로 비싼 값에 팔리겠는걸.”

“그래, 나라에서 주는 돈보다는 훨씬 우리들의 몸값을 많이 쳐줄 거야.”

사내들은 하나둘씩 약속이라도 한 듯 보호 장비를 벗었다. 어떤 이는 아예 윗옷을 벗어던지기까지 했다.

군인이라기보다는 일에 지친 일꾼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무리 사이에서 노골적인 말들이 오간다.

결국 저 말들은 모두 자신에게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자신을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든 반역죄에 해당하는 왕에 대한 저주를 퍼붓든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네프는 고삐를 당겨 무리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내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이제는 비난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인 욕설의 도배다.

라자르 왕은 폭군이었다. 독재자였으며 희대의 살인마였고, 미치광이였다. 아마 이 나라 백성 중에 라자르 왕을 좋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남자의 피가 흐르는 자신마저도 그를 아버지 대신 악마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하지 않았던가.

라자르 왕의 공포정치에 몸을 사리던 백성들이 이번 전쟁을 통해 움츠러들었던 등을 곧게 펴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그들은 울부짖으며 라자르 왕을 저주하고 또 저주한다.

모든 게 그가 초래한 일이라며,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은 그 악마의 횡포를 두고 볼 수 없다고 소리를 높여 말한다.

전쟁 탓에 흉흉해진 민심.

겉으로 하나둘씩 불거져 나오는 왕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들.

그것은 쿠데타로 이어질 것이다.

이 나라에 기생하고 있는 급진파 곤충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개를 퍼덕이며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새 시대를 부르짖으며 새로운 왕조를 내세울 것이고, 그들의 쿠데타는 아마 별 어려움 없이 성공할 것이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던 부패한 라자르 왕국은 무너진다, 완전히!

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이 대륙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출 것이다.

─ 비록 전쟁 때문에 잃은 것은 많지만 앞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 힘을 합쳐 평화로운 페르티잔을 만듭시다!

새롭게 왕위에 오른 왕은 지친 백성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외칠 것이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왕국의 건설이라는 청사진을 내건 새로운 왕조는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는 중요한 진실이 하나 있다.

그 사인이 전사(戰死)든 암살(暗殺)이든 악마 라자르는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출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죽지 않는다.

페르티잔인은 악의 종족이다. 고대에서부터 대륙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불러왔다. 결국 페르티잔인 모두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형체가 없는 무형물을 암살할 수는 없는 노릇. 피의 역사는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그 옛날부터 페르티잔의 역사에 피비린내가 사라질 날이 없었듯이.

그리고 네프, 그의 마음속에도 악마가 살고 있다.

알고 있다. 이런 전시(戰時)에도 하얗게 분을 바르고 고급 드레스를 차려입는 귀부인들과 썩어빠진 이 나라의 대신들이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뭐라고 수군대는지.

그들은 자신을 광인(狂人)이라 했다. 악마라고도 하고 정신 나간 백정이라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자신은 미치광이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더러운 피는 인정하긴 싫지만 라자르, 그 악마의 것이다. 그 남자처럼 자신도 피와 살육을 좋아하는 굶주린 짐승이다.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는 불꽃을 잠재울 수 없는데. 심지어 자신조차도 이젠 어찌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불꽃은 타오르고 있는데.

“이보슈, 왕자님!”

한데 있던 짐승의 무리에서 사내 한 명이 떨어져 나와 네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왕자님이 맞긴 하신 건가? 암만 봐도 덩치 좋은 공주님으로밖엔 안 보이는데.”

가볍게 무시했다. 술주정뱅이의 주정이나 다름없는 사내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네프의 태도에 사내는 수염이 난 턱을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왕자님, 말은 하실 줄 아는 건가? 표정 하나 없이 그렇게 있으니까 꼭 무슨 도자기 인형을 말 위에 앉혀놓은 것 같아서 기분이 영 그렇네.”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보통 이 정도로 약간의 미동도 없이 무시하면 먼저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지금부터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울 동지인데 아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되나? 하긴 당신네 귀족들은 우리 같은 평민을 더러운 벌레 보듯 하니까. 그래도 말이야, 당신네 귀족들이 성에서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전쟁터에서 이를 악물고 싸운다고. 뭐 당신도 어떻게든 점수를 따려고 출전할 마음을 먹었겠지만 괜히 우리들의 짐은 되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어이, 듣고 있긴 한 거유! 사람 말이 말 같지......”

사내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라 왕자의 곧은 어깨를 붙잡은 순간, 목덜미에서 예리한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귀공녀 같은 우아한 얼굴의 왕자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어느새 자신의 목에 겨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사내는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과연 그 악마 라자르의 핏줄이 흐르는 왕자님답게 자신에게 향한 자수정빛 두 눈은 매섭기 그지없다.

자신의 목에 칼 끝을 겨눈 것이 단지 위협용이 아니라는 것을 사내는 알 수 있었다. 왕자의 맑고 투명한 보라색 눈 안엔 오직 살기만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다.

“하... 하하! 그냥 농담 좀 한 것뿐인데 이건 너무 심하잖습니까.”

“죽고 싶지 않다면 두 번 다시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사내는 말없이 웃는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어야 했다. 이번엔 다행히 왕자의 검은 피를 부르는 일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면 아마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참담한 심경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제 와서 왕의 아들이라고 나선 저 남자를 사기꾼이라고 매도했다가 헛된 죽음을 맞이했다던 이름 모르는 귀족 청년도, 지금의 자신과 같이 저 남자의 겉모습만을 보고 만만히 봤을 게 분명하다.

악마의 새끼 역시 악마, 그 자체라 이건가.

살기를 내뿜는 자수정빛 눈동자가 거두어지고 왕자의 화사한 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내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 위에 맥없이 늘어졌다.

“괜찮나, 자네?”

“뭐, 일단은.”

“정말 성질 한번 더러운 왕자님일세. 겨우 그 정도 농담에 검을 뽑다니.”

“곱게 자란 철부지 도련님들이 다 그렇지, 뭐.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아서 말이지.”

동료들은 또다시 눈을 빛내며 왕자의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그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저들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저 조각상처럼 표정이 없는 매력적인 왕자님은 보통이 아니란 것을. 자신들의 말처럼 곱게 자란 철부지 도련님 따위가 아니라 라자르 왕, 그 남자의 피가 그대로 섞인 포악하고 잔인한 본성을 숨긴 야수라는 것을.

어느새 라자르 왕의 후계자, 네프라는 이름의 왕자는 귀족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품고 있는 민간인 용병들 사이에서도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등을 꼿꼿이 편 채 한눈 파는 일 없이 똑바로 앞을 향해서만 나아가는 왕자의 모습은 권력과 명예에 물든 귀족이나 피에 굶주린 광포한 군인, 그 무엇과도 닮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 자수정빛 두 눈은 저 산 너머, 아주 먼 곳을 향해 있었고 언젠가부터 군인들은 그를 ‘집요하게 먹이를 찾는 매’에 빗대어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집요하게’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는 끝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뜨거운 열기 탓일까. 아니면 또다시 시큰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한 상처 때문일까.

눈 안쪽이 시큰시큰 아려온다. 손끝으로 눈을 비비자 뻑뻑하게 굳어 있던 동공 안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왈칵 쏟아졌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손가락 끝에 혀를 갖다대자 씁쓰레한 소금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그 짠맛에 묘한 기분이 되어 눈을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손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새삼 눈물의 짠맛이 생경하다고 느끼고 있다. 짜고, 쓰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눈물의 맛을 머금은 타액은 지독히도 쓰다.

“유그 님.”

등 뒤에서 들려온 정중한 목소리에 유그는 흠칫 놀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아냈다.

데일이었다. 그도 며칠 새 많이 야위었다. 움푹 꺼진 그의 눈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또 눈 안쪽이 따끔하게 아파온다.

“간단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가 가져온 식기에는 야채 조림과 감자 몇 개뿐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간단한 메뉴의 식사였지만 지금 나라는 전쟁 중이다. 이 정도 음식도 대단한 사치인 것이다.

“고마워.”

유그는 발갛게 부어오른 눈을 가늘게 접고 간신히 웃어 보였다. 데일은 말없이 음식을 집어삼키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수리 부분에 꽂히는 그의 시선이 무겁기만 하다.

“데일, 아침은 먹었어?”

대답은 없었다.

“굶는 건 좋지 않아. 끼니마다 뭐든 먹어둬.”

“당신은 늘 이런 식이지요.”

눈을 들어 데일을 바라보자 그는 수척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잘게 떨리는 그의 입술을 가만히 주시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식사를 하실 수가 있는 겁니까? 당신 때문에 모든 게 틀어져버렸는데 어째서 당신은......”

“데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중년 남성의 이름을 불렀다.

“난 살아 있어.”

그의 깊게 패인 눈매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난 살고 싶어. 데일, 난 살고 싶다고. 당신 말대로 나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져버렸으니까... 내가 살아 있어야 어긋난 퍼즐을 다시 맞출 수 있을 테니까.”

민감해진 눈물샘이 자극당해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두두후두두.

정말 잘도 쏟아져 내린다. 데일은 자신의 눈물을 닦아줄 생각도, 위로할 마음도 없는 듯했다.

“이런 젠장! 한심하게 이게 뭐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 보지만 피부 위로 고였다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다.

“그만 울어요. 상처가 덧납니다.”

“눈물엔 소독 작용이 있어서 오히려 더 빨리 나아.”

“그건 정확한 근거가 있는 처방입니까?”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나 지금 엄청 꼴사나워 보이지? 내가 아주 한심해 죽겠지? 욕하려면 마음대로 욕해.”

“어른인 척해도 당신은 아직 어린애군요.”

“그래, 당신 말대로 난 아직 어린애야. 난 무능력하고 힘없는 코흘리개 철부지였던 거야.”

평정을 가장하려 해도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다. 데일의 말대로 자신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모든 일이 완벽하게 해결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쯤은 용해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쯤은 물에 희석돼 전보다는 나아질 거라고, 그렇게 믿고 행동했다.

하지만 조금도 용해되지 않았다.

그저 전보다도 더 견고하고 두꺼운 껍질에 둘러싸인 채 물속 깊은 곳까지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는 사람의 손으로 그것을 건져내거나 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그것은 심연(深淵)의 늪, 저 깊숙한 곳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였다.

“네, 당신은 어린애입니다. 그러니 강한 척하지 않아도 돼요.”

데일은 깨끗하게 빤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내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내 주며 끊임없이 눈물이 새어나오는 눈가를 꾹꾹 눌러주었다.

그 어머니같이 포근한 손을 살며시 잡았다. 뜨거운 손의 온기와 돌출된 뼈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체온이 높군요. 당신은.”

“어린애니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무척이나 힘들고 지쳐 보이는 미소였다.

“자, 그럼 식사를 하시지요, 유그 님. 살고 싶다고 하셨지요? 조촐하지만 이거라도 어떻게든 위 속에 쑤셔넣어야 살 거 아닙니까.”

과연 이 성의 호랑이 집사 데일답다. 우는 자신을 부드럽게 위로해 주면서도 마지막엔 온 힘을 실은 어퍼컷을 날려버리는 저 멋진 성격이라니!

어느새 눈물은 멈춰 있었다. 대신 실소가 터져나온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고 했던가. 뭐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데일은 문가에 기둥처럼 서서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쓴웃음을 띤 그의 초췌한 얼굴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봐, 데일. 말해 봐.

당신은 현명하고 침착한 어른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에게 말해 줘.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가족과도 같았던 내게 망설임 없이 칼 끝을 겨누고 상처 입혔던 그 사람을 위해 나 역시 서로 죽고 죽이는 그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발을 내디뎌야 하는 걸까.

데일, 그렇게 나를 탓하는 눈으로 바라보지만 말고 얘기를 해줘.

내가, 우리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럼, 유그 님.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으응......”

“유그 님, 네프 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손잡이에 손을 댄 채 데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물론 아프도록 생생히 기억한다.

네프가 왕궁에서 돌아온 것은 자신들의 도움으로 그 남자가 성을 빠져나간 지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광분한 짐승처럼 눈을 벌겋게 뜨고 미쳐 날뛰었다. 그를 말리던 하인 중 몇 명은 그가 휘두른 칼에 맞아 큰 상처를 입었고 그 중 하나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상처 입고 말았다.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던 그는 이미 악마, 그 자체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피가 쏟아져 내리는 얼굴을 움켜잡고 주저앉은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분노와 살기에 찬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하자 온몸이 경련하듯 떨려왔다.

그는 피로 물든 검날을 자신의 목에 겨눈 채 입을 열었다. 쇳소리가 섞인 무척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는 어디에 있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네프에게 있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쭈욱 함께 지내온 자신과의 관계를 그는 일체 부정해 버린 것이다.

“네가 그를 놓아준 거냐?”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라고 극구 부인해도 목에 겨누어진 그의 검날이 거두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네놈이 기어이......!”

유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그와 함께했던 지난 시절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네프 님! 안 됩니다!”

하지만 그가 검을 쥔 손을 높게 쳐든 순간, 하인들 틈에 서 있던 데일이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해 허공을 가른 검날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데일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데일, 너도 공범자인가?”

데일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네프의 노기를 띤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한동안 네프는 거칠게 숨을 내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헝클어진 은발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수면 위에 비친 달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표정 없이 굳은 그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광인(狂人)의 얼굴로, 부모를 잃은 어린애같이 탄식에 잠긴 얼굴로, 그리고 절망에 빠진 지치고 늙은 중년 사내의 얼굴로.

“크윽......”

그는 잇새로 뒤틀린 신음 소리를 내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예르네이......”

유그는 이를 악물었다. 볼의 상처에서 예리한 고통이 느껴졌다. 사실 상처의 아픔보다는 마음의 고통이 더 심했다.

언제부터 저 사람의 마음속에 예르네이라는 그 남자가 들어차게 된 것일까? 가족이었던 나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저 사람에게 있어선 그 남자가 소중한 것일까?

네프는 불쌍한 사내였다. 고독하고 외로운 들짐승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상처 입은 몸을 감싸안고 눈이 쌓인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째서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는지, 어째서 자신은 혼자인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외로움이란 것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무리에서 떨어진 상처 입은 짐승은 결국 맥없이 눈밭에 쓰러져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슬픔, 기쁨, 즐거움, 절망, 그런 것들 역시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가면을 뒤집어쓴 채 살아왔을 것이다.

그는 혼자였다. 지금까지 쭉 그는 혼자였다.

곁에 있는 자신과 데일, 그런 사람들의 존재는 인식하지도 않은 채 그는 “나는 혼자야.”라고 굳은 얼굴로 말해 왔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아무도 없는 눈 쌓인 산길을 정처 없이 걷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일까? 눈이 내리는 적막한 풍경 속에서 새삼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이 사무치도록 슬퍼진 것일까?

그래서 그는 예르네이, 그 남자와 함께 눈이 내리는 산길을 걷고 싶었던 걸까?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묻자 그 작자는 죽지 못해 살아간다고 말했었지.”

네프는 얼굴을 감싸쥐었던 손을 떼고 약하게 떨리는 자신의 손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것은 오히려 내 쪽에서 해야 할 말이었다. 살아가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어.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갈 뿐이었지. 하지만......”

자신에게로 향한 네프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자수정빛 눈동자는 절망이라는 감정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난 살고 싶어.”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전 네프 님, 오직 그분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그렇게 만든 그 야만인이 증오스럽습니다. 차라리 그 남자가 어딘가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길 바라는 제가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건 당연한 거야.”

데일은 한동안 가만히 문틈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소리를 죽여 문틈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스푼으로 반을 갈라 입 안에 우겨넣은 감자는 거의 생감자나 다름없었다. 주방장까지도 성을 떠난 탓에 데일이 유그의 식사 준비까지 도맡아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의 요리 솜씨는 삼류 여관의 돼지죽 같은 스프를 만들어내는 주방장만큼이나 형편없었다.

“살아가야 할 이유라......”

그런 것이 나에게도 있던가.

소중한 가족도 없고 뭔가 뚜렷한 신념도 없고......

나도 데일처럼 네프를 위해 살아왔고, 살고 싶어하는 건가.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모두 한 남자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건 너무 비참하다.

모든 일이 해결되면 그 말 많고 탈도 많은 칙 녀석이랑 카이라, 그녀를 데리고 바다가 보이는 평화로운 섬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운 생각만 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럼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얼빠진 칙과 카이라인가?’

끝도 없이 이어진 수평선과 맑은 하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자고, 뭐 그런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아무리 털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음울한 공기가 조금쯤은 상쾌하다고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카이라의 예쁘지만 바보 같은 얼굴이 떠올라서 유그는 실풋,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웃을 때마다 아직 채 아물지 않은 볼의 상처가 당겨져 곧 입가에서 미소를 지워버리게 된다.

네프가 남기고 간 상처, 이것은 늘 자신을 괴롭히는 가슴의 통증과 함께 자신을 감시하는 듯하다.

아마 볼의 상처가 다 아물고 흉터가 희미해져도 이 예리한 고통은 변함없이 자신을 옭아매고, 어느 때건 절망적인 기분이 들게 할 것이다.

“너 또 거리로 나갔었지! 내가 거리는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니!”

딴에는 몰래 나갔다 온다고 한 것이었건만 집으로 돌아오자 마티 아줌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거리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꼭 적이 있어야만 위험한 거라고 생각하니? 때론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이 더 무서운 법이야. 멍청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다가 강도를 만나거나 몹쓸 짓을 당하기라도 하면......”

마티 아줌마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먼지투성이가 된 손으로 그녀는 눈가를 훔쳤다.

그녀도 여자다. 전쟁으로 평생을 지켜왔던 가게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폐허가 돼버렸고, 친하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히이토의 군인들이 갑작스럽게 쳐들어 왔던 그날 ─ 그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날 밤 ─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가족의 죽음에,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나마 이를 악물고 버텨낸 사람들은 피난길에 올랐고,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수도의 폐허 더미에 남아, 살기 위해 빵 한 조각과 약간의 돈을 위해 약탈하고 살인을 했다. 왕궁에서 매일 한 번씩 급식을 나눠주었지만 그마저도 요즘엔 나오지 않는 탓에 마을은 그야말로 무법천지로 변해 버렸다.

“울지 말아요, 마티 아줌마.”

카이라는 마티의 둥근 어깨를 감싸안았다.

자신마저 잃는다면 그녀는 순식간에 무너져내릴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보에다 멍청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들개처럼 거리를 방황하던 자신을 거둬주고 가족처럼 대해 준 그녀를 슬프게 하고 싶진 않다. 그녀의 늙고 초췌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매일 한 번씩 폐허가 된 거리에 나가게 된다.

잿더미가 된 상점, 여관들.

그 안에 파묻혀 있을 마을 사람들의 시체들.

몸을 웅크리고 그늘에 앉아 잿더미가 된 자신의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인, 굶주림에 지쳐 맥없이 늘어진 아이들.

히이토의 군인들이 습격했던 그날 밤 자신은 마티 아줌마와 함께 지하의 창고에 숨어 있었던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늘 그렇게 자신은 끈질기게 살아남았었다. 별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건만 하늘은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주정뱅이의 노랫소리, 크레임 거리의 창녀들이 지어 보였던 지친 미소. 그런 것들로 꽉꽉 들어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다. 태양만이 무심하게 폐허 더미 위로 내리쬐고 있을 뿐.

거리의 정경, 좌절한 사람들, 코를 찌르는 악취, 그런 것들을 일부러 보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뭔가를 찾기 위해서다. 그게 뭔지는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자신은 멍청하고 바보 같으니까.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거리로 나가 마티 아줌마의 여관이 있던 곳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내리쬐는 햇볕 탓에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카이라, 이제 우리도 이곳을 떠나자꾸나.”

“태양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천국으로요?”

잿더미 위에 가족의 무덤을 만들고 작은 가방 하나만을 들쳐 멘 채 피난길에 오르던 청년은 그곳으로 간다고 했다. 사람들과 함께 전쟁도 없고 폭군 왕의 독재 정치도 없는 평화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천국, 그곳으로. 그곳은 태양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

“그건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야, 카이라. 나와 함께 내 고향으로 가지 않으련? 그곳은 그리 풍요롭지는 않지만 살 만해.”

“그렇군요.”

“카이라.”

“네?”

“아무리 기다려도 그분은 오지 않는단다.”

“아......”

그랬구나.

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구나.

혹시 자신을 찾으러 왔다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여관 터를 보고 상심해서 돌아갈까 봐, 그래서 매일 같은 시간에 여관 앞에 앉아서 기다렸다.

유그, 대 귀족 오시예크 가의 아들인 그를.

값비싼 향료나 보석 같은 것을 선물하던 다른 남자들과 달리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 같은 것을 사들고 와서, 어린애 같은 얼굴로 여행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선물을 안겨주던 남자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갈 때도 그는 늘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는데.

그래서 그를 기다렸던 거구나.

나 왔어,라고 수염 자란 지저분한 얼굴로 웃으며 말할 그를 만나기 위해 매일매일 잿더미로 변한 여관 터 앞에 앉아 있었던 거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서.

“그분은 오시예크 가의 아드님이셔. 분명 오시예크 님과 함께 격전지로 출전하셨을 게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만약 그분이 성에 남아 계신다 할지라도 일부러 널 찾아오실 리는 없잖니.”

“그럼... 나 이제부터는 유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마티 아줌마는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어깨를 쓸어주었다. 자신은 바보라서 전쟁이 뭔지, 어째서 사람들이 서로 칼을 들고 싸우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는 없지만 전쟁이란 건 너무 싫다고 생각한다.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마티 아줌마가 슬퍼하고, 또 유그가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으니까. 더 이상 그가 사다주는 맛있는 과자도 먹을 수 없고, 그의 따뜻한 몸을 껴안을 수도 없으니까.

땀에 젖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고양이처럼 가르랑 소리를 내면 유그는 키들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헤집어 놓았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의 어린애 같은 웃음소리도 들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니 아주 많이 슬펐다.

“마티 아줌마...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무슨 소리니? 얘, 카이라 ─ !”

절망스럽다거나 하는 감정 따위는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그냥 조금 슬프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세분화시키는 것 같지만 어차피 자신은 단순한 바보라 슬프면, 그냥 슬플 뿐인 거다.

이곳을 떠나면, 마티 아줌마의 뒤를 따라 아줌마의 고향으로 떠나면 유그와는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될 테지.

만약 내가 떠난 뒤에 그가 찾아와 나를 찾아 헤매면 어떻게 하나?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슬퍼할지도 몰라.

내게 주려고 가져왔던 건포도를 잔뜩 넣은 쿠키가 축축하게 젖어서 잘게 바스러질 때까지 울지도 몰라.

그 수염이 난 지저분한 얼굴이 보고 싶다. 그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 갑자기 너무나 그리워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유그......’

머리가 나쁜 탓에 몇 번 불러보지도 못했던 그 이름. 자신을 찾는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뻔뻔했던 남자.

동공이 축축하게 젖어들어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하나, 둘 방울져 떨어졌다.

“저... 괜찮아요?”

머리 위에서 낮지만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색이 초라한 걸로 봐선 전쟁 고아인가?

고아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음영이 진 그 얼굴은 무척이나 앳돼 보인다.

“그냥 가자니까. 쓸데없이 관심을 가졌다간 골치 아파진다고.”

“하지만......”

“젠장! 네 녀석이 무슨 성녀(聖女)라도 되는 줄 아냐!”

여자였다.

날카로운 목소리를 한 젊은 여자.

폐허가 된 거리에 주저앉아 죽은 아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거나 넋이 나간 채 늘어져 있는 마을의 여자들과는 다르다.

여자는 살아 있었다. 살아서 활기차게 긴 팔다리를 움직이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카이라는 생각했다. 그들에게선 전쟁에 시달린 사람들 특유의 절망감이나 우울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기... 당신들... 군인이에요?”

카이라가 느릿느릿 볼을 적신 눈물을 닦아내며 묻자 언성을 높이고 길길이 날뛰던 여자와 소녀가 거의 동시에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군인이라. 맞는 말이기도 하지.”

“아! 군인이라면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오... 시미르, 아니다. 오시... 그래, 오시예크 가문의 막내아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세요?”

“오시예크? 알게 뭐야. 그 가문의 막내아들이 어디서 뭘 처먹고 살고 있는지.”

별로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깨가 축 처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 또래, 아니 자신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녀와 젊은 여자, 과묵한 중년의 사내.

전쟁터로 출격하는 군인이라기엔 너무도 이상한 집단이지만 돈을 위해선 어디라도 달려간다는 용병들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딘가 등 붙이고 잘 데가 있다면 더 어두워지기 전에 기어 들어가는 게 좋아. 곧 국경으로 향하는 용병 부대가 이곳을 지날 예정이니까 죽을 만큼 당하고서 아비도 모를 애새끼를 주렁주렁 낳고 싶지 않다면 어디든 숨어 있으라고.”

여자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카이라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추파를 던지는 술주정뱅이 같아서 카이라는 실소를 터뜨렸다.

“페리 말대로 어딘가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요. 그럼......”

“빨리 안 오면 확 놔두고 가버린다, 레이루! 우리랑 가기 싫으면 그 얼빠진 계집애랑 여기 남아서 인생에 대해 상담해 보든지!”

“알았어요!”

─ 레이루......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린다. 아니,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그래! 그 남자다!’

유그가 여관으로 데려왔던 그 남자. 상처를 입고 맥없이 늘어진 그 야수 같은 사내!

어째서 그들 일행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여자가 다그쳐 불렀던 그 이름, 소녀의 이름, 그건 그때 유그가 데려왔던 사내가 밤새 불렀던 그 이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그들은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였다.

카이라는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결국 하늘이 짙은 암청색으로 물들어 갈 무렵, 그들이 사라진 언덕 너머 쪽에서 그들 대신 마티 아줌마가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해 비틀거리며 뛰어왔고, 결국 카이라는 마티 아줌마에게 호된 꾸중을 듣고 나서 팔목을 잡혀 끌려가고 말았다.

전쟁이라고 한다. 히이토와 페르티잔의 두 미치광이 왕이 드디어 격돌을 한 것인가.

불패의 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페르티잔의 왕, 라자르. 그렇지만 그는 늙고 노쇠했다. 게다가 광포한 미치광이 독재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군인은 없을 것이다.

아마 싸움은 히이토의 승리로 끝이 날 것이다.

히이토의 국왕은 라자르 왕이 그랬듯 악귀처럼 웃으며 페르티잔이라는 나라를 이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라자르 왕의 시신을 꼬챙이에 걸어 모두가 볼 수 있는 광장에 걸어두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벌레들의 말살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명목 아래 페르티잔인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겠지.

그건 모두 그 악마, 라자르가 자초한 일이다.

하나, 피는 피를 부른다. 그 단순 명쾌한 이론을 어째서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전쟁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든 말든 이곳은 따분할 정도로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하루 종일 사내들은 선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고 왁자하게 웃고 떠든다. 간혹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술주정뱅이들 특유의 걸쭉한 농담으로 바뀐다. 정말이지 속도 좋은 사람들이다.

“리거, 그래서 언제 떠날 거야?”

이른 아침부터 흑맥주통을 자기 마누라처럼 끌어안고 있는 사내들 중 하나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내일이나 모레 정도.”

“에에? 평소보다 너무 이른 거 아냐?”

“이봐, 지금 페르티잔과 히이토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그렇다고 하더군. 하여튼 그놈들은 허구한 날 싸움질이지.”

정말 욕밖에는 나올 게 없구나.

아무리 시골 깡촌이라서 전쟁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고는 해도, 이곳 또한 페르티잔의 영역이란 것을 이놈들은 알기나 하는 걸까?

리거는 혈관이 불끈 튀어나온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 전쟁 중이라서 노예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 이 말이다. 그러니까 다른 때보다 좀더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이번 장사는 공치는 거라고.”

“참 내, 전쟁이 나도 어차피 살 놈은 다 사고, 팔 놈은 다 팔 텐데 뭐가 문제람.”

정말 이 자식들을 그냥! 아무리 네놈들이 머리에 든 건 술, 여자밖에 없는 바보 천치라고 해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쓸 만한 남자 노예들은 모두 전쟁에 투입됐으니까 그렇지!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결국 참다못해 테이블을 탕, 치며 언성을 높여도 녀석들의 멍청한 얼굴엔 변함이 없다. 어디서 뉘 집 개가 이리 시끄럽게 짖나, 딱 그런 얼굴들이다.

“하지만 리거, 쓸 만한 남자 노예가 없으면 여자 노예만이라도 팔면 되는 거잖냐.”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남자 노예가 없으니 여자 노예만 팔면 장땡 아니냐고? 그게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 빵이 없으면 쿠키를 먹으라고 싸가지없이 말했던 어느 귀족 여자의 말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이런 위급한 시국에 노예시장이 열린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다. 그리고 이런 때에 노예시장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자신들 역시 한심한 인생들이다.

사실 전쟁이라고는 해도 별로 실감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심각하게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나저나 전쟁 때문에 노예시장이 열리지 않는 거 아닐까?”

과연 리거 혼자서 길길이 날뛴 덕에 꽤 심각한 얼굴로 의문을 제기하는 녀석이 생겨났다.

“바흐티 지방은 멘스터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거기까지 전쟁의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대륙에서 페르티잔과 히이토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겠어? 아무리 중립을 고수하는 멘스터라 할지라도 어수선하지 않을까?”

“이 마을은 엄연히 페르티잔에 속한 영지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맥주를 마시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어. 이 마을은 페르티잔이기도 하지만 멘스터이기도 하지. 오히려 멘스터의 국경이 페르티잔의 수도보다 가까우니까.”

그 말이 맞다. 이곳은 페르티잔이기도 하지만 멘스터이기도 하다. 아니, 오히려 멘스터 쪽에 더 가깝다.

이 마을 사람들의 몸속엔 페르티잔의 피가 흐르지만 사람들은 멘스터인 특유의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집을 짓는 양식이나, 의복 같은 것들도 멘스터 식의 흐르는 듯한 자연미를 중시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 이점 탓에 자신들은 이곳을 아지트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까 리거, 쓸데없이 신경 곤두세우지 마. 분명 우리는 페르티잔인이긴 해도 나라에 대한 애국심 따위는 먹고 죽으려 해도 없고, 그딴 정신병자 같은 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도 없잖냐.”

“그래, 전쟁이라 해도 우리들과는 상관없잖아. 페르티잔이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 아냐?”

리거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 생각 없이 밤낮으로 술만 퍼마신다고 생각했더니 조금쯤은 전쟁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긴 했나 보다. 하지만 그 생각이란 게 어쩌면 저렇게 낙천적인지.

동료들의 말이 맞다. 자신은 분명 페르티잔인이지만 단 한 번도 페르티잔인으로 태어나서 잘됐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애국심 따위는 물론 없었고 미치광이 왕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전쟁이 났다고 해서 없던 애국심이 생겨날 턱이 없다. 동료들의 말대로 전쟁은 자신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그냥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만 생각하면 그만이다.

“어쨌든 아무 상관 없는 전쟁 얘긴 그만두고 좀더 현실적인 얘기를 나누자고.”

“그래, 예를 들면 토오르가 요즘 들어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는 얘기나, 토오르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두막의 그 남자 얘기 같은 거 말이지.”

사내들은 빨래터에 모여 앉아 남편 흉을 보는 아낙들처럼 낮게 키들대며 요즘 이 마을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일명 ‘질투와 애증의 삼각관계’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토오르와 그 녀석이 사막에서 데려온 남자, 세라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세라라는 여자아이는 조금 정신 상태가 이상한 토오르라는 남자를 좋아했지만 그 남자는 도무지 세라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토오르가 사막에서 다 죽어가는 남자를 데려오고, 토오르는 그 남자에게 애정을 쏟기 시작하는데......

그토록 관심을 쏟았던 남자를 여자도 아닌 남자, 그것도 들짐승을 연상시키는 매서운 눈을 한 덩치에게 빼앗긴 소녀, 세라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대강의 스토리인 것이다.

정말이지 유치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다 늙어빠진 삼류 작가도 이젠 그런 스토리 따위는 써먹지 않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 눈물겹도록 유치한 로맨스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단지 소설 속의 식상한 캐릭터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사건의 발단이 된 토오르, 그 자식은 뭘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정신병자에다, 놈이 애지중지 품안에 끼고 도는 그 남자가 사실은 빌어먹을 스칸데르인 순혈종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남자에게 뺏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캐릭터 세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과도 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토오르도 그래. 온갖 쭉쭉빵빵한 미녀들이 저 좋다고 훌렁훌렁 벗고 달려들어도 콧방귀조차 뀌지 않던 놈이 결국 고른 게 그런 곰 같은 사내 자식이라니.”

“고르고 고른 게 아니라, 그저 그 남자가 토오르의 까다로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라니까 그러네.”

“세라만 불쌍하게 됐지, 뭐.”

“하지만 그 남자 말이야. 묘하게 사람 눈을 잡아끄는 데가 있지 않냐?”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사내들은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높여 호들갑을 떨었다.

“에엑! 미쳤냐!”

“너까지 토오르, 그 자식한테 물든 거냐!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려!”

“그래도 잘생기긴 했지. 눈 한쪽이 그 모양이 되고도 그 정도인데, 두 눈 다 멀쩡하게 붙어 있었을 땐 어느 정도였을까.”

막 흑맥주를 주문하던 마을 사람 하나가 입을 열자 이번엔 어색한 침묵만이 흐른다. 사내들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결국엔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이렇게 입을 모아 말한다.

“특이한 거 좋아하는 토오르, 그 자식이 홀딱 반할 만하지, 뭐.”

“으아아!”

그 순간 주방에서 엄청난 괴성이 들리더니 여자아이 하나가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씩씩대면서 달려나간 소녀는 바로 삼류 로맨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세라였다.

빌어먹을!

대낮부터 맥주나 퍼마시는 주정뱅이들 주제에 뭐......?

단체로 독이 든 음식을 주워먹은 건가!

세라는 단숨에 언덕을 달음질쳐 올라갔다. 그녀를 발견하고 마침 길을 지나던 마을의 청년들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런데 당신은 늘 다른 여자들과 놀아났었지. 당신은 미간을 좁히고 귀찮아,라고 말하지만 여자들은 그런 시니컬한 점이 오히려 더 좋다며 불에 모여드는 나방들처럼 잘도 꼬여들더군.

일 때문에 당신들이 다른 지방으로 떠날 때면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알아?

당신들 일행이 그 지방의 최고 미녀가 당신에게 옷을 훌렁훌렁 벗고 달려들더라는 말을 지껄일 때, 내 기분이 얼마나 거지 같았는지 당신은 알기나 해?

세라는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리거는 내일이나 모레, 이곳을 떠난다고 했다.

어떻게든 그들이 바흐티의 노예시장에서 그 남자를 팔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토오르는 분명히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하지만 토오르가 노예시장에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리거도 스칸데르인은 재수가 없는 종족이라며 그 남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 같으니까, 토오르를 이곳에 붙잡아 두고 그 남자를 리거 일행에게 딸려 보내면......

“여어, 세라∼!”

땀이 눈으로 흘러 들어온 탓에 눈을 비비는 순간, 뭔가 둔탁한 물체가 세라의 몸에 부딪쳐 왔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던 청년과 정면으로 부딪쳐 버린 것이다.

“악! 누구얏!”

“하... 하하. 안녕, 세라∼”

세라의 기세에 식은땀을 쏟으며 웃는 저 멍청한 얼굴은 분명 기억에 있다. 염색 직공 아저씨네 아들이다.

별다른 능력도 없는 게을러터진 녀석. 그러니까 그때, 토오르가 데려온 남자가 스칸데르인이란 걸 목도한......

“비켜.”

“어딜 그렇게 바쁘게 뛰어가던 중이었어?”

“귀찮게 얼쩡거리지 말고 꺼져!”

“혹시 버려진 오두막으로 가는 중이었어?”

그때부터 이 멍청한 녀석은 날파리처럼 자신의 주위를 맴돌았다. 같은 비밀을 공유한 것만으로 자신과 굉장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딜 가나 이런 녀석이 하나둘씩은 꼭 있지. 쓸데없는 계기를 만들어 친한 척 앞에서 알짱대는 그런 밥맛 없는 녀석들 말이야.

“어어! 세라!”

청년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하자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붙는다.

이런 걸 사람들은 친화력이 강한, 성격 좋은 녀석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세라에게 있어 청년은 헤프게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마을의 다른 청년들과 다를 바 없었다.

─ 귀찮아.

어째서 토오르가 늘 뚱한 얼굴로 그 말을 중얼거리는지 조금쯤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어느새 버려진 오두막이 시야에 들어온다.

‘언제 봐도 음산하고 기분 나쁜 곳이야.’

세라는 미간을 좁혔다.

이곳에 부는 바람은 한여름에도 기분 나쁜 냉기를 품고 있다. 마을의 어른들은 오두막 뒤에 빽빽하게 들어선 오래된 나무들 때문이라고 했지만, 세라를 비롯한 마을의 젊은 녀석들은 그것이 오두막 근처를 떠도는 죽은 자의 망령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리거도 그 오두막에 있을 때 창가에 서 있던 여자 유령을 봤다고 하고, 왠지 오두막 뒤의 저 버드나무 잎은 바람에 흔들리면 목을 매단 여자의 몸처럼 흐느적흐느적......

“세라∼”

“아악!”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버드나무 잎이 흔들리는 데다가 눈의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오두막의 지붕 위로 하얀 무언가가 떠다니는데, 타이밍 좋게 기척도 없이 곁에 서서 말을 시키다니!

세라는 눈을 부릅뜨고 곁에 선 청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청년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다가 계속 그녀가 자신을 노려보자 무안해졌는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하하, 놀랐어?”

“어째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넌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응? 나도 버려진 오두막에 용건이 있는데.”

“뭐? 네놈이 무슨 용건으로!”

“그놈, 아니 토오르 씨가 이걸 갖다달라고 했었거든.”

청년은 웃는 얼굴로 손에 들린 나무통을 들어 보였다.

“이게 뭐야?”

“염색약. 우리 아버지가 만든 염색약은 대륙 최고거든.”

인정은 한다. 아저씨가 만든 염색약은 색도 곱고 선명도가 오래 가서 수도의 상인들이 일부러 와서 사갈 정도다. 그리고 토오르가 이것을 갖다달라고 한 이유도 알겠다. 그 남자의 머리카락을 염색하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말이야.

“......너희 아버지가 만드는 염색약은 직물 전용 아니었냐?”

“그래도 별다른 부작용은 없겠지.”

“너희 아버지, 실력은 있지만 가끔 가죽마저도 녹여버리는 엄청난 독성을 지닌 약을 잘못 만들어 판 적도 있지 않았냐?”

청년은 대답 없이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이내 어린애처럼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다.

“뭐, 괜찮겠지∼”

으이구, 저 빌어먹을 낙천적인 성격이라니.

멘스터 국경이 인접한 탓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멘스터인처럼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저 녀석처럼 “뭐∼ 괜찮겠지.”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웃는다.

페르티잔인의 성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세라는 마을 사람들의 그런 점이 가끔 못 견디게 싫었다.

하지만... 뭐∼ 괜찮겠지. 그 염색약이 피부를 녹이거나 화상을 입힌다고 해도 상처를 입는 건 바로 그 남자인걸.

염색약의 독성이 너무 강해 특이한 걸 좋아하는 토오르조차 정이 뚝 떨어질 정도로 그 남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다 해도, 뭐∼ 괜찮겠지.

“그런데 세라는 오두막엔 무슨 일로 온 거야?”

차마 그 빌어먹을 남자의 면상을 후려갈기기 위해 달려왔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세라는 청년의 시선을 피하며 입 안으로 우물우물 변명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청년은 세라가 오두막을 찾은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세라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이야기를 하며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날아갈 듯이 기쁜 그였다.

오두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세라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툭툭 차며 툴툴대자 청년은 그녀가 흩어놓은 옷들을 주워 침대 위에 가지런히 개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뭐, 날도 좋으니 그 사람이랑 데이트하러 나갔나 보지.”

그야말로 자기 무덤을 판 격이었다. 딴에는 농담이라고 말한 뒤에 껄껄 소리까지 내며 웃었지만 그녀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청년을 노려볼 뿐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책 맞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청년은 성난 코뿔소처럼 달려든 그녀에게 얼굴이 완전히 돌아갈 정도로 얻어맞는 것으로 자신의 죗값을 치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이 자식아! 두 번 다시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간 죽여버릴 거야!”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힘껏 자신의 얼굴을 후려갈긴 살쾡이는 카아앙, 하고 길게 울부짖더니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청년은 한동안 얻어맞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쥐고 망연하게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또 화나게 해버렸다. 어째서 늘 자신은 이 모양인 걸까?

청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눈을 감자 매미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서늘한 바람이 기분 나쁘게 들러붙어 있던 땀을 말끔히 씻어내 준다.

나뭇잎이 부딪쳐 내는 작은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흙냄새, 풀냄새, 그런 것들을 머금은 바람. 귀신이 나오는 기분 나쁜 집이긴 하지만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청년은 차가운 느낌이 드는 마룻바닥 위를 이리저리 뒹굴다가 이내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이 들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청년 역시 낙천적인 멘스터인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남자인 것이다.”응? 뭐야, 갑자기.”

어딘가에 붙어 있을 토오르와, 그 남자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던 세라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매미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오두막 뒤의 커다란 버드나무 위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뭔가에 놀란 듯 새들은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숲의 다른 나무 위에 내려앉는다.

원래 새들이란 건 바람 소리나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놈들이다.

“젠장, 뭐야? 불안하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세라는 두 팔로 몸을 감싸고서 새들이 날아오른 오두막 쪽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새들이 하늘 저편, 어딘가로 날아가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불길한 예감의 정체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리거 일행이 모여 앉은 선술집으로 달려와 가축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알린 것은 바로 그날 밤의 일이었다.

역시 재수가 없다.

옛날부터 검은색은 불길한 색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어둠의 색은 불행을 초래한다.

그래서 악마를 숭배하는 정신 나간 신도들은 검은색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어둠의 신이여, 밤을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신이여, 그따위의 주문을 지껄이며 악마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지.

그래, 페르티잔의 높으신 분들도 밤을 상징하는 검은색의 바탕에 피처럼 붉은 용을 그려넣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구나.

그건 라자르 왕이 정신 나간 악마 숭배자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남자 자체가 악마였던가.

어쨌든! 검은색은 재수가 없다!

기분이 나쁘다고!

그 남자가 이 마을에 오고 나서부터 계속 불안한 기분이 들더니만 결국엔 이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닐터 아저씨네 마구간에 매어두었던 가축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창고에 쟁여둔 식량들이 모조리 사라지기도 했다.

“또 야생 멧돼지가 내려온 건가?”

“멧돼지 정도가 아니라 호랑이나 뭐 그런 거 아닐까?”

“어이, 너희들 설마 진심으로 들짐승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 그럼 아니란 말이야?”

아이고 머리야, 내 이런 멍청한 놈들을 동료라고!

“그래, 창고의 식량을 가져간 호랑이는 인간처럼 두 발로 서서 걷고, 앞발을 이용해 자물쇠를 열 줄 아는 돌연변이인 모양이지?”

“아, 그러고 보니!”

“역시 리거는 대단해!”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그런 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잖냐!’

“그러니까 닐터 아저씨네 가축을 훔쳐간 것도, 창고의 식량을 가져간 것도 모두 같은 놈의 소행 같다, 이 말이다.”

“에에? 하지만 이런 시골 깡촌에서 대체 누가?”

그게 누군지 모르니까 다들 불안에 떨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분명 들짐승의 소행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마을 사람들의 소행도 아니다. 모든 게 풍족한 이곳에서 굳이 남의 물건을 훔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도, 들짐승도 아닌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낯선 자의 소행이라는 건데......

“그거 혹시 토오르가 데려온 그 남자가 한 거 아냐?”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세라가 기다렸다는 듯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이봐, 세라. 그 남자한테는 늘 토오르가 붙어 있다고. 그건 너도 알잖냐.”

“토오르가 거짓말을 했을지 누가 알아!”

‘또 성질을 건드렸군.’

리거는 미간을 좁히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어대는 암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 남자에 관련된 일이라면 어느 때건 저렇게 히스테리를 부리니, 짝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긴 그녀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그녀의 행동은 도를 넘어선 상태다.

“그래, 그래. 만약 토오르가 그 남자를 감싸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치자. 하지만 어째서 그가 그 많은 양의 식량을 훔쳐야 했던 거지?”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겠지.”

“세라, 닐터 아저씨네서 없어진 가축이 몇 마리인지 알고 있냐? 자그마치 말 열 마리다, 열 마리! 그건 우리가 바흐티로 타고 갔어야 할 말이었단 말이다. 그 남자 혼자서 어떻게 열 마리나 되는 말을 훔칠 수 있었겠냐!”

“우......”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어졌는지 세라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구시렁구시렁 댄다. 분명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리거, 이제 우린 뭘 타고 바흐티로 가지?”

“가긴 어딜 가!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이놈들, 결국 내 입에서 욕이 나오게 만드는군.’

“그럼 우린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건가?”

“말이 없으니 그 도둑이 나쁜 마음을 먹고 마을을 점령하려 든다면 우린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거네.”

“하하! 쓸데없는 걱정은. 단 몇 명의 도둑이 어떻게 한 마을을 점령할 수가 있겠냐? 마을 사람들도 있고, 또 우리들도 있는데.”

“그러니까, 말 열 필을 다 도둑맞았다고.”

일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두막에서 며칠째 나오지 않는 토오르를 합해 봤자 자신들은 고작 다섯. 이 따분하기조차 한 마을에서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청년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저기 말이야, 닐터 아저씨네 말이랑 식량을 훔쳐간 사람들이 단순한 도둑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냥 도둑이라면 뭔가 돈이 될 만한 걸 가져갔을 텐데 없어진 건 말과 식량뿐이야.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어색한 침묵을 깨고 사내 하나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자 선술집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긴 그래, 한꺼번에 많은 양의 식량이 없어진 것도 그렇고, 마치 굶주린 들짐승 같잖아.”

“하지만 말이 없어진 건 왜지?”

“탈영병......”

리거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작게 소리를 냈다. 혼잣말을 하듯 작게 속삭인 그 말에 다시 한 번 주위가 꽁꽁 얼어붙었다.

“군에서 탈출한 탈영병일 수도 있어.”

“하지만 탈영병이 이런 시골구석까지 올 이유가 없잖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히이토 국경 지방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잊었냐? 이 마을은 멘스터의 국경과 인접해 있다는 걸?”

한 번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무단으로 대열에서 이탈할 수 없다. 왕의 명령이 있거나 시체가 되어 고향으로 유골이 옮겨지지 않는 이상 군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고 탈영하는 자는 사형, 아무리 좋게 봐줘도 종신형이다. 그것이 페르티잔의 국왕이 정해 놓은 빌어먹을 군법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리거의 말대로 탈영병들이 맞다면 아마 중립 국가인 멘스터로 밀입국하기 위해 이곳까지 숨어든 것일 수도 있다.

“근데 그 탈영병이란 게 어느 나라의 군인인 걸까? 페르티잔? 히이토?”

평소엔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로 멍청한 녀석들이건만 어째서 이렇게 쓸데없는 데서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건지.

선술집 안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밤부터 식량 창고를 교대로 감시하자. 그리고 모두들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라. 그 도둑들이 제발 히이토의 탈영병들이 아니기를......”

이제야 사건의 심각성을 이해했는지 동료들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리거는 경직된 입술을 억지로 말아올렸다.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쉽지가 않다.

마을 사람들, 동료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히이토라는 종족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들의 잔인한 습성과 신체적 특성, 그리고 히이토의 군인들이 거인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역시 그 빌어먹을 스칸데르인이 불행을 몰고 온 거야.’

리거는 초조함을 견딜 수 없어 피가 배어나올 때까지 입술을 잘근 잘근 물어뜯어야 했다.

청년은 퉁퉁 부어오른 볼을 어루만지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한테 쥐어터지면서 간신히 빼앗아온 천을 소중한 듯 끌어안고 청년은 얼굴을 비벼댔다.

이것은 아버지의 최고 역작 중 하나다. 무지갯빛의 꽃이 커다란 천 가득 물들어 있는 귀부인 용의 숄. 이건 말라비틀어진 귀부인들보다 세라의 건강한 어깨에 더 잘 어울릴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매끄러운 갈색 피부에 이것을 걸친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울 게 분명하다. 어쩌면... 어쩌면 너무 감격해서 자신의 품에 안겨 감사의 키스를 해줄지도......

“아아∼! 세라∼ 세라∼”

청년은 혼자만의 망상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천을 껴안은 채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쓸데없이 시도 때도 없이 과장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별종으로 통하는 그런 사내였다.

이미 한밤중이지만 한시라도 빨리 선물을 받고 기뻐할 세라를 보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 몰래 도망쳐 나온 것이었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마을 어른들은 해가 지면 밖으로 나돌지 말라고 했지만, 그깟 위협에 겁을 집어먹을 사내가 아니었다.

그 역시 남들이 보기에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였건만 스스로는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그 나이 때 젊은이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의 충고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도둑들은 리거의 생각대로 군의 탈영병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페르티잔인지, 히이토 족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냥 단순히 도둑이 식량을 훔쳐갔다는 정도의 사실만을 알고 있는 청년으로선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길게 늘어진 천을 세라로 생각하고 얼마나 춤을 추며 걸어 내려갔을까.

갑자기 뭔가가 자신의 앞을 빠르게 가로질러 가는 바람에 청년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간혹 밤이 되면 들짐승들이 사람들의 앞을 지나다니는 때가 있다.

“어어, 뭐야? 놀랬잖아!”

이미 수풀 사이로 숨어 들어가고 없는 정체불명의 들짐승에게 화풀이를 해대며 청년은 바닥에 떨어진 천을 집어올려 먼지를 털었다.

“세라에게 줄 소중한 선물인데 더러워지고 말았잖아.”

화풀이를 해대며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청년은 돌을 집어들고 아직까지도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는 어둠 속의 수풀 쪽을 향해 집어던졌다.

하지만 동물의 신음 소리 대신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커다란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어둠 속에 숨어서 먹이를 노리던 야수라고 생각했다.

그것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고 달빛 아래 드러난 송곳니는 맹수의 그것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저 어마어마한 덩치다.

그냥 맹수 정도가 아니라 설마 성난 곰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둠 속에서 털로 뒤덮인 팔이 쭉 뻗어나왔다. 그것이 얼마나 길고 두꺼운지 어둠 속에서 자신의 팔을 움켜잡을 정도였다.

“으아아!”

청년은 기겁을 하며 그것에게서 팔을 잡아 빼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아프게 자신을 옥죄어 올 뿐이었다.

세라에게 줄 숄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꽃잎처럼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청년이 자신의 팔을 움켜잡은 손이 들짐승의 것이 아닌 인간의 것이란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입에서 다량의 피를 내뿜으며 맥없이 비틀거려야 했다.

어둠 속에서 뻗어나온 것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검이었다. 청년은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뒤덮은 그것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빛내며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다. 사자 갈기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인간? 하지만 인간이라기엔 너무 크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뒤이어 모습을 나타낸 사람 역시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고 흉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 동물의 포효가 아닌 인간의 말이 새어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청년은 완전히 목이 비틀린 채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늘어졌다.

“쓸데없이 일이 커지지 않게 잘 치워둬.”

사내의 냉정한 그 말에, 목이 비틀리고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로 끊임없이 피를 쏟는 청년의 흉측한 시체는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수풀 저편으로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얘기를 나누더니 이내 다시 자신들이 숨어 있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적을 물어 죽인 들짐승이 유유히 자신의 안식처로 돌아가듯.

불어오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진 천이 길 저편으로 날아갔다. 무지갯빛으로 곱게 물든 천의 한구석에는 장인의 솜씨로 정성들여 그려넣은 듯한 붉은 빛깔의 동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의 피로 물든 그것을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청년의 아버지였다. 몰래 집 밖으로 나간 아들이 걱정돼서 찾으러 나온 것이었다.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은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온 마을을 샅샅이 찾아다녔고, 누군가가 수풀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청년의 시체를 찾았을 때는 이미 하늘 저편으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것으로 명확해졌다.

마을에 숨어든 것은 히이토 족이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나뭇가지를 꺾듯 사람의 목을 비틀지 못한다.

리거는 망연하게 아들의 시체를 바라보는 염색 직공을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결국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리거,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 우리도 언제 저렇게 죽을지 모르니까.”

이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전쟁은 먼 나라 얘기였다. 하지만 마을에 숨어든 히이토 족으로 인해 이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도 전쟁의 바람이 불고 있다. 독한 피비린내를 머금은 끈적끈적한 바람이.

“정말 잔인한 놈들이야. 어떻게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 수가 있는지.”

“소문으로만 들었지 놈들을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앞으로도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리거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동료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서로 술렁이며 얘기를 나누다가 기둥에 기대선 자신의 눈치를 슬슬 살피는 걸로 봐선, 저들도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뭔가 확실한 대책을 세워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언젠가 딱 한 번 히이토의 군인들을 본 적이 있다.

어디에선가 열린 노예시장에서였다.

그들은 성노(性奴)를 사러 온 히이토의 귀족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군인들이었다.

우선은 그 어마어마한 덩치에 놀랐고 그들의 무자비함에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짐승이었다. 하지만 그런 들짐승에게 보호받고 있는 히이토의 귀족은 자신들과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다른 종족에 비해 조금 체구가 큰 것을 빼면, 상석에 거만을 떨고 앉은 그는 노예시장에 온 다른 대륙의 귀족들과 다름없어 보였다.

거인 족이라고 불리는 것은 히이토의 군인들뿐이다. 분명 막강한 힘을 가진 군대를 만들기 위해 히이토의 선조들이 군인 될 자질이 있는 자들에게 뭔가 술수를 썼을 거라고, 다른 노예 상인과 웃으며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거대한 덩치를 한 흉포한 야수 앞에 겁을 집어먹고 몸을 떠는 마을 사람들은 눈앞의 먹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저 청년 역시 아무 이유 없이 살해당했지 않은가.

세라를 그렇게나 좋아하던 청년이었다. 그때 오두막에서 토오르가 데려온 남자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 남자이기도 했다.

조금 경박해 보이긴 했지만 청년은 자신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결국 죽는 순간까지 그 비밀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이다. 리거는 진심으로 청년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 남자 때문이야!”

가라앉은 선술집의 분위기를 깨고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세라였다. 그리 친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좋아해 주던 청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참 동안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그녀였다.

지금까지 울다가 왔는지 눈가가 새빨갛게 부어 있다.

“이게 모두 그 남자 때문이라고! 히이토 족이 이 마을에 온 것도, 저 녀석이 저렇게 죽은 것도 다 그 남자 탓이야!”

사람들은 일제히 세라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그야말로 울부짖고 있었다.

“세라, 네 기분은 이해하지만 무조건 그 남자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아냐! 히이토의 군인들은 아마 그 남자를 찾아왔을 거야. 분명해!”

“이봐, 그런 억측이 어디 있냐!”

세라가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분노로 눈을 번뜩이면서, 손등으로 눈물에 젖은 얼굴을 훔쳐내며 그 비밀을, 자신들만이 알고 있기로 한 그것을 입 밖에 내려고 한다!

리거는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기도 전에 그녀는 결국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는 스칸데르인이니까!”

아... 젠장......

리거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저 빌어먹을 계집애가 이런 때에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러고 보니 전에 토오르도 그랬었지. 그 남자가 스칸데르인 같다고......”

“하지만 리거는 토오르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했어.”

“그야 그 녀석은 늘 엉뚱한 데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이번에도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리거를 향했다가 다시 세라에게 집중되었다.

“그 남자는 스칸데르인이었어! 그때 그 남자의 머리카락이 까맣게 변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히이토의 군인들은 그를 찾기 위해 이 마을로 숨어든 거야. 그런 거라고!”

숨도 쉬지 않고 열변을 토하는 세라의 모습은 혁명을 주도하는 여전사와도 같아 보였다. 그리고 우매한 시민들이 여전사의 연설에 감동해 일제히 싸우자, 쟁취하자, 따위의 구호를 외치듯 선술집에 모여 선 사람들 역시 일제히 소리를 높였다.

“하긴 어쩐지 그 남자는 기분이 나빴어.”

“그렇다면 그 남자를 히이토의 군인들에게 던져주면 사건은 모두 해결되는 건가?”

“그럼 뭘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가서 그 자식을 끌어내야지!”

“그래! 가자!”

리거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람들의 하나가 된 외침은 달을 향해 포효하는 늑대들의 울음소리 같았다.

‘세라, 이 멍청한 계집애야.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이게 네가 사랑하는 토오르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

흥분에 겨워 울부짖는 마을 사람들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 무리 속에서 세라는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하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승리에 도취된 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더라면 당장 달려가 그녀를 때려 눕혔을 것이다.

“리거,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토오르는, 그 녀석은 어떻게 되는 거야?”

자신의 동료들도 마을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우르르 오두막으로 향했지만, 유달리 마음이 여린 동료 하나가 옆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다그친다.

“어떻게 좀 해봐, 리거. 당신은 우리들의 리더잖아.”

젠장, 이럴 때만 리더 타령이지.

리거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뜯었다.

“어쩌긴 뭘 어째! 마을 사람들이 오두막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가서 두 사람을 피신시켜야지!”

사내는 머뭇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자신의 뒤를 쫓아왔다. 오두막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면 알고 있다. 그곳을 이용해 달려간다면 최소한 몇 분가량은 마을 사람들보다 빨리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두막으로 가서 뭐라고 해야 할까? 마을 사람들이 너희들을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오고 있으니 어디로든 피하라고?

하지만 어디로, 대체 그들을 어디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 바보 같은 토오르 자식은 쓸데없는 데서 정이 많은 녀석이라 그 남자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면 결코 그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을 텐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악물고 리거는 전속력으로 여관 뒤의 언덕을 달음질쳐 올라갔다. 하지만 오두막으로 향하는 지름길은 굳게 막혀 있었다.

여관 뒤의 숲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다. 하지만 그곳에 자물쇠가 잠겨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 마을 주민들이 불안한 마음에 얼마 전에 자물쇠를 매단 것이 분명했다.

힘을 주어 손으로 뜯어보려 하지만 굵은 쇠사슬로 몇 겹이나 둘러 쳐진 그것이 그렇게 쉽게 떨어질 리 없다.

“빌어먹을 ─ !”

리거는 신경질적으로 굳게 닫힌 울타리를 발로 걷어찼다.

하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갈 수밖에. 하지만 등을 돌린 순간 그 앞에는 세라의 무섭게 굳은 얼굴이 있었다.

“비켜!”

“토오르에게 가서 뭘 어쩌려는 거야? 마을 사람들이 그 남자를 끌어내기 전에 어디론가 피신시키려고?”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난 지금 네 얼굴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니까!”

겨우 이 정도의 협박에 굴할 여자가 아니란 건 안다.

세라는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며 두 팔을 벌려 자신의 앞길을 막아섰다.

“아무 데도 못 가. 그 남자만 건네주면 히이토의 군인들은 순순히 물러날 거야.”

“어째서 그들이 그를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여긴 아무것도 없는 시골 깡촌이야. 그들에게 이상한 힘이 있지 않은 이상, 이런 시골에 스칸데르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들이 이곳을 지나치게 된 건 우연이라고!”

“아무래도 좋아. 리거, 당신 말대로 그 남자는 재수가 없어. 그 남자가 온 이후로 계속 나쁜 일만 일어났잖아.”

“너의 그 꼴같잖은 질투 때문에 죄 없는 한 남자가 죽게 됐어. 넌 그래도 좋냐? 그 남자가 사라지면 토오르의 마음이 네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녀석이 이렇게 흉한 모습만 보이는 이상, 그 녀석은 절대 너한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손이 자신의 뺨을 후려갈겼다. 어찌나 그 힘이 센지 얼굴이 완전히 돌아갔을 정도다.

‘젠장, 보자보자 하니까 이 계집애가 잘한 게 뭐 있다고 사람을 때려!’

리거는 사정없이 세라의 멱살을 움켜잡고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 눈을 부릅뜬 채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얼굴에 어떻게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알아! 알고 있어! 내가 어떻게 해도 토오르는 날 봐주지 않겠지. 난 당신 말대로 못난 여자니까. 예쁘지도 않고, 성질도 더러운데다 여자다운 구석이라곤 없는 애니까! 하지만 싫어! 토오르가 그 남자 앞에서 어린애처럼 웃고, 끊임없이 얘기를 늘어놓고, 그 남자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도 싫어! 그 남자 앞에선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미소짓고 있는 토오르도! 바보같이 야밤에 나한테 선물을 주겠다고 위험한 산길을 달려왔던 그 멍청한 자식도! 다 싫어!”

“울지 마. 어린애처럼 울면서 떼를 쓴다고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넌 엄청난 일을 저지른 거야. 알아? 너 때문에 그 남자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나,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토오르까지도 죽을지 모른다고.”

세라는 눈물에 젖은 눈을 크게 치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어린애다. 이제서야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깨닫고 겁에 질려 떠는 저 모습이라니.

“토오르가 죽어?”

“그 녀석은 의외로 잔정이 많은 녀석이니까.”

“나 때문에 토오르가 죽는 거야?”

그 녀석이 확실히 죽는다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래서 어린애는 귀찮다.

그렇다. 아직 누구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순한 양들도 계기란 것이 있으면 난폭해지기 마련이다.

이미 마을의 청년 하나가 죽었다. 그것이 계기다. 오두막을 향해 달려가는 마을 사람들은 순한 양이 아니라 성난 들소다.

“넌 여기서 세라를 돌보고 있어!”

데리고 가봤자 짐만 될 게 뻔한 동료에게 훌쩍이고 있는 세라를 떠넘기고 리거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내리려는지 하늘 저편으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다.

그것이 앞으로 닥칠 엄청난 사건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 더욱 불안하다.

토오르, 그 녀석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오두막으로 향하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광포한 들짐승의 무리 같았다.

다행히 무기를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오두막을 둘러싼 그들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순식간에 장정 몇 명이 오두막 안으로 침입해 들어왔고, 그들은 망설임 없이 예르네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들을 맨손으로 무력화시켰지만, 오히려 그것이 역효과가 된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광분한 들짐승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너나 할 것 없이 오두막 안으로 쳐들어왔고 어찌해 볼 수도 없이 예르네이는 그들에게 짓눌려 몸을 구속당하고 말았다.

“대체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마침 약초를 캐러 갔던 토오르가 달려와 예르네이에게서 사람들을 떼어내려 했지만 흥분한 그들을 당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세라에게서 들었다. 이 녀석은 스칸데르인이라면서?”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알고 있나? 어젯밤 염색 직공 아저씨의 아들이 히이토의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그것과 지금 너희들이 저 사람을 짓누르고 있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데?”

“스칸데르인은 재수가 없어!”

사람들에게 팔을 붙잡힌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던 토오르는 사내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뭐야? 너희들도 리거에게 물든 거냐?”

“히이토 군인들은 이 남자를 찾기 위해서 이 마을로 온 게 분명해. 스칸데르인은 어둠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띠고 있으니까! 그 불길한 냄새를 맡고 그들이 이곳까지 찾아온 거야!”

“웃기지 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어디 있어!”

토오르는 거세게 반항하며 자신의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예르네이에겐 더 이상 반항할 기력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끔 자신조차도 몸속에 흐르는 스칸데르의 피를 저주하곤 한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신들, 대륙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왔던 평화를 사랑하던 자신들 스칸데르인은 언젠가부터 저주받은 종족으로 낙인 찍혀 버리고 말았다.

“그 녀석을 창고에 가둬!”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힘없이 늘어진 예르네이의 몸을 오두막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마치 짐짝을 옮기듯, 그들은 더 이상 그를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마을에 숨어든 히이토의 군인들에게 던져줄 거다.”

“말도 안 돼! 그렇게 하면 그들이 순순히 물러나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젠장! 이거 놔!”

토오르의 목소리는 오두막 밖의 길게 이어진 길 저편까지 울려 퍼졌다.

“예르네이! 도망가! 당신이라면 그 정도 녀석들 한둘은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잖아!”

그 말에 예르네이를 결박해 끌고 가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 그에게서 물러선다.

토오르의 말대로다. 무장도 하지 않은 평민들을 상대하는 건 그에게 있어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예르네이는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물먹은 솜처럼 기다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폭도들의 무자비한 손에 의해 결박당하고 감금당했다.

“어째서... 너희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을 죄인으로 몰 수 있는 거지?”

토오르의 목소리는 물속 깊이 가라앉은 모래처럼 낮게 침잠되어 있었다. 리거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까.”

“지금도 충분히 괴롭고 힘든 사람이야. 너희들이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알고 있다. 그 남자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리거는 작게 웅크린 토오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다시 한 번 더 시도해 본다. 이번에도 뿌리치면 두 번 다시 그에게 손 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는 얌전히 자신의 손길을 받아들인다.

작고 가녀린 어깨다.

그 남자도 충분히 불행해 보였지만, 토오르, 그도 결코 행복한 것 같지는 않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메마른 미소에 끌렸다.

어린애처럼 맑고 순수하지만,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흩날릴 것만 같은 메마르고 갈라진 그의 미소에 자신은 그를 받아들였다.

“그를 놔줄 거야. 너희들이 뭐라 해도 난 그를 보내줄 거야.”

“......”

“그리고 나도 떠날 거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 어린애같이 웃는 얼굴로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 주지 않겠냐고 말할 거라고 쭉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최후의 동료는, 파트너는 스칸데르, 그 남자인 것 같다.

“그 남자를 따라갈 거냐?”

토오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이 녀석은 그를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상처 입은 그 들짐승을 차마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이곳을 떠난다고 한다.

“매정한 녀석, 이곳엔 널 그토록 사랑해 주는 여자도 있고, 널 가족처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뒤로하고 넌 그 남자를 따라가겠다는 거냐.”

리거는 말없이 자신의 시선을 회피한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유약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고집 센 녀석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이 녀석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진 않을 게다.

“알았다.”

그의 어깨를 강하게 힘주어 움켜쥐었다가, 아이에게 하듯 다정하게 그 어깨를 툭툭 치며 리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되면 내가 창고로 가서 그 남자를 빼오마. 넌 완전히 준비를 다 마치고 숲 쪽으로 나와 있어. 그리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뭔가가 오두막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토오르를 향해 달려가 덥석 안겨들었다.

“어딜 간다는 거야! 절대 못 보내! 보내지 않을 거야!”

세라다. 밖에서 자신들의 얘기를 몰래 엿들었는지 토오르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벼대며 징징댄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어리광이 아니라 협박이다.

“세라, 이젠 그냥 보내줘라.”

“싫어! 나도 함께 갈 거야! 절대 토오르 혼자 가게 놔둘 수 없어!”

“세라!”

아무리 어르고 달래봐도 막무가내다. 고집 센 걸로 치자면 토오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여자다. 토오르는 그녀를 밀쳐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의 품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귀찮아......”

그리고 미간을 좁히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을 입에 담는다. 그 말에 세라의 어깨가 약하게 경련했지만 겨우 그 정도로 뜻을 굽힐 세라가 아니었다.

“귀찮아해도 좋아. 나한테 막 욕을 퍼부어도 좋아. 그러니까 토오르, 이곳을 떠나지 말아줘. 모두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곳에서 모두와 함께 살아. 응?”

“귀찮아, 너. 늘 시끄럽게 떠들면서 옆을 맴도는 게 아주 불쾌해. 너의 그 날카로운 목소리도,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도, 네 그 주근깨투성이 얼굴도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세라의 얼굴에서 일순 피가 싸악 빠져나갔다. 그녀의 주근깨투성이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토오르는 있는 힘을 다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그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툭툭 먼지를 털며 일어나 망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너같이 곁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철없는 어린애는 딱 질색이야!”

그 말을 뒤로하고, 그는 매정하게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한참 동안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토오르의 뒷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눈물을 쏟았다.

“세라......”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소리를 죽여 우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그녀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분명 미소짓고 있었다.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자식,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웃는 얼굴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중얼대다가, 이내 감정이 복받쳐 오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손목을 타고, 갈색으로 그을린 건강한 팔목을 지나 팔꿈치에 고였다가 그녀의 더러워진 치마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리거는 더 이상 그녀를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이것으로 그에 대한 자신의 부질없는 감정을 완전히 씻어버릴 수 있겠노라고, 치마를 적시는 저 눈물이 말해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오두막 밖으로 나가자 집 근처의 플라타너스 나무 기둥에 토오르가 서 있었다. 야단맞은 어린애처럼 두 손을 뒤로 한 채 발로 바닥을 툭툭 차며,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저 얼굴을, 저런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조금 서글픈 기분이 된다.

오래전에 죽은 귀신이 떠도는 이 집도 예전처럼 폐허가 될 것이다.

리거는 사건이 무사히 해결되면 이곳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쓸데없는 추억들이 앙금처럼 쌓이고 만다. 눈을 감고서도 마을 곳곳의 풍경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다.

자신 같은 떠돌이 방랑자에게 있어 추억이란 건 스스로를 구속하는 족쇄와도 같은 것이니까.

“토오르, 잘 살아라. 어디 가서도 죽지 말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제야 토오르의 얼굴에 옅게 미소가 번졌다. 리거는 그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그의 노래를 기억 속에 확실하게 담아두고 싶어서였다.

토오르는 대답도 없이 낮은 허밍으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리거는 나무 기둥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 노래는 그와 처음 만났던 날, 그가 분수대에서 불렀던 노래였다. 그때처럼 자신은 어머니의 품속 같은 따스하고 아련한 기분에 휩싸여 미소지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노랫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감미롭고 달콤했으며, 서글픈 기분이 들게 했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져 리거는 얼굴을 매만지는 척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비어져 나온 눈물을 닦아냈다.

여전히 그것은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창고 기둥에 묶어둔 채 나무통에 든 무언가를 끼얹었다. 그것은 얼마 전 토오르가 자신에게 쏟아부었던 그것과 같은 냄새를 띠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 새까맣게 변하는구나.”

“이렇게 까만 머리카락은 처음 봤어.”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건대 이것은 염색한 머리카락 색을 본래의 색으로 변하게 하는 특수한 용액인 모양이다.

완전히 머리색이 빠진 것을 확인하자 사람들은 이번엔 자신에게 물을 끼얹는다. 자신의 몸을 적신 주홍색 액체가 완전히 씻겨질 때까지 몇 번이고.

우매한 사람들.

스칸데르인인 자신을 그들에게 공물로 갖다 바치면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공물을 받아 챙기고 이곳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우습지도 않다.

“잘 감시해. 보통 놈이 아니니까.”

창고의 문이 닫히고,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자물쇠까지 걸어 잠그는 듯했다.

불안하겠지. 분명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울 게다.

상대는 히이토의 군인이다.

자신조차도 그들을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존재인 것이다.

벌써 마을의 청년 하나가 죽었고 언제 어디서 그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의 목을 차례로 비틀지 모른다.

어떤 외부의 침입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평화로운 마을이었기에 사람들의 혼란은 더욱 규모가 크고, 폭풍처럼 거세고, 바람처럼 빠르게 모두에게로 전파된다.

예르네이는 기둥에 묶인 손을 움직여 보았다.

풀지 못할 것은 아니다. 손목의 관절을 잡아 빼 결박을 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창고 밖에서 걸어 잠근 자물쇠다.

잠시 그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식량 창고답게 지붕 위쪽으로 통풍 구멍이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자신은 통풍 구멍 사이로 길게 이어진 거미줄을 주시하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눈은 시력을 맞추기가 어렵다.

가끔 사람의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앞이 침침해질 때도 있다. 안압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서인가.

예르네이는 눈을 깜빡여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거미줄의 작은 선 하나하나까지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산 채로 눈을 잡아 뜯긴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이다. 하지만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려 하면 그저 아팠다는 것 정도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저 아팠다.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그뿐이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고통이라느니 따위의 기억은 없다.

단지 눈알을 파고들던 손가락의 느낌만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남자의 손은 뜨거웠다.

그의 하얀 손은 히이토 자객들의 피로 더러워져 있었고, 그것은 곧 자신의 피로 뒤덮였다. 그의 섬세한 손가락이 눈가에 닿았을 때, 불에 덴 듯한 뜨거운 감각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저 동공을 건드리던 손톱, 눈 안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던 손가락, 그런 느낌만이 남아 있다.

그를 상념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고막을 자극하는, 미약한 어떤 소리였다. 하지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기분 나쁜 소리다. 쇠로 된 벽을 손톱으로 긁어내는 듯한.

설마... 반복적인 그 소리가 얼마쯤 들려왔을까.

철컹,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져 있던 창고의 문이 삐죽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온 것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토오르가 아닌 낯선 얼굴의 남자였다.

벌써 자신을 끌어내려 온 건가.

“이대로 창고 밖으로 나가서 오두막 뒤의 호숫가로 달려가. 거기서 토오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작게 속삭이는 사내의 목소리에 예르네이는 움켜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풀어야 했다.

설마 이 남자는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인가.

“뭘 그렇게 멀뚱하게 보고 있어? 곧 교대 시간이란 말이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예르네이는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는 두 팔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창고를 달려나가 어두운 숲길로 접어든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리도 없이 빠르게 달려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는 몸놀림이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 저건 영락없는 들짐승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말대로 그는 어느새 완전히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의 어둠은 그를 기꺼이 감싸안은 것이다.

리거는 쓰게 웃으며 식량 더미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는 될 대로 되겠지.

창고 앞을 지키던 녀석을 때려눕혀 기절까지 시킨 데다가 그 남자를 풀어주기까지 했으니, 성난 마을 주민들의 분노가 이번엔 자신에게 집중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처럼 지내왔던 그들이 날 죽이기야 하겠어?’

통풍구 틈으로 보이는, 임산부의 배처럼 불룩하게 배가 나온 달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창고 앞에서 인기척이 난다.

늘어진 보초 녀석에 대해 중얼중얼, 뭔가 말을 늘어놓더니 이내 창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래, 저 녀석 다음에 보초를 서게 되는 건 누구였지? 여관 집 둘째 아들이었나?

“이거 고맙군.”

하지만 여관 집 아들이 저렇게 쇳소리가 가득 섞인 기분 나쁜 목소리의 소유자였던가. 불길한 예감에 상반신을 일으키자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열려진 창고 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완전히 막고 선 두 짐승.

천장에 닿을 듯 거대한 체구와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푸른빛을 띤 흰자위.

짐승은 인간처럼 두 발로 서거나, 인간의 말을 하진 못한다.

저들은 인간이다!

거인, 그 빌어먹을 거인 족! 히이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우리들을 맞아주는 건가? 이 마을 사람들은 예의가 바르군그래.”

‘젠장! 빌어먹을! 하필 이럴 때 저 녀석들이 창고에 침입할 건 또 뭐야!’

리거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등에 닿는 건 서늘한 나무 벽뿐,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허리 뒤춤에 찔러넣었던 단도를 그들 몰래 움켜쥐고 숨을 가다듬어 본다.

침착하게 생각하자, 리거. 저들이 아무리 크고 강하다지만 저들 역시 인간이다.

“걱정 말게. 아픈 건 잠깐이야. 이 친구는 기술이 좋아서 단숨에 사람의 목을 비틀 수 있거든.”

인간의 말을 능숙하게 하는 사내는 위압적인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저 조금 정신 나간 군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반해, 그가 소개한 목을 비트는 기술이 좋다는 친구는 아무리 봐도 성난 불곰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콧김을 쌩쌩 내뿜으며 잇새로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소리나 내는 저 남자를 어떻게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있으랴.

애써 침착하게 가다듬었던 마음이 일시에 흐트러지고 만다. 저 엄청난 앞발에 붙잡히면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염색 직공 아저씨네 아들처럼 목이 홱 돌아가고 말 테지.

방해가 되는 자신의 처리를 동료에게 맡겨놓고, 다른 한 명의 히이토 족은 허리를 굽혀 창고의 식량을 어깨에 짊어졌다.

“서둘러. 사람들이 오면 골치 아파지니까.”

이런 빌어먹을!

교대하기로 한 여관 집 아들 녀석은 왜 오지 않는 거야!

리거는 속으로 우는 소리를 해대며 좁은 창고 안을 헤집고 다녔다. 덩치가 큰 탓에 사내는 움직임이 둔했다.

느릿느릿 뻗어오는 손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는 있지만 퇴로가 저들에게 막혀버린 이상 언젠가는 붙잡힐 게 뻔하다.

“어... 어라? 이 녀석이 왜 이렇게 대 자로 뻗어 있는 거지? 게다가 창고 문도 활짝 열어놓고......”

하지만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린다고 했던가. 그토록 기다렸던 여관 집 아들의 목소리였다.

“야! 멜더!”

“어라? 리거 씨가 이 밤중에 여긴 웬일이세요?”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그는 열려진 창고 문 틈 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창고 안을 가득 메운 두 마리의 들짐승을 발견하고 요란하게 소리를 내지른다.

아주 잠깐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으아악! 뭐예요! 저건! 괴... 괴물이야!”

“이 자식아! 소리지를 시간이 있으면 빨리 가서 내 동료들을 데리고 와! 어서!”

하지만 눈을 번뜩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 야생의 짐승과는 달리, 식량 꾸러미를 짊어진 사내는 재빠른 몸놀림의 소유자였다.

눈 깜짝할 새에 그는 문가에 선 채 호들갑을 떠는 청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청년은 멱살을 움켜잡힌 채 허공에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괴물이라니.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

“으윽... 리거, 도... 도와줘요.”

네 눈엔 지금 내가 널 도와줄 만큼 한가해 보이냐!

“너희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모든 걸 가늠하려 하지.”

아무래도 무식한 힘으로 사람 목을 졸라 질식사시키는 게 저 사내의 특기인 모양이다. 청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팔다리는 태엽을 빨리 감은 인형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들짐승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사내가 성큼성큼 구석에 몰린 자신에게 다가왔다.

사내의 길고 두터운 팔 사이로 공중에 매달린 채 맥없이 늘어진 청년의 다리가 보였다. 그것은 간헐적으로 꿈틀대기만 할 뿐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죽음, 그건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그런 문제였다.

사람이 죽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자신과는 별개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나자빠진다고 해도 그것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진 조금 특별한 사건일 뿐.

하지만 목이 비틀리고 복부에 구멍이 난 채 수풀 속에 버려져 있던 청년, 그는 어땠던가. 그리고 짐짝처럼 창고 바닥에 버려진 저 녀석은. 그들의 이름도, 그들의 나이도, 심지어는 그들이 누굴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고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는지,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지내던 놈들이었다.

“으아악!”

리거는 품에 숨겨두었던 단도로 자신에게로 불쑥 뻗어나온 사내의 손등을 찍어 눌렀다.

사내는 괴성을 내지르며 피가 흐르는 손등을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리거는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몸을 이용해 사내에게서 벗어났다.

이들에게 자신들의 목숨은 벌레의 목숨처럼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었다. 지금까지 스스로의 목숨을 소중히 생각해 왔다.

리거라는 이름으로 이십 몇 년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목숨이 하찮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들이 벌레를 죽이듯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게 놔둘 수는 없다. 한순간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십여 년 간의 인생을 짓밟히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눈앞에 버티고 선 거인의 존재도 우습게 보였다.

리거는 이를 악물고 들고 있던 식량 꾸러미를 내려놓는 또 다른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움켜쥔 단도를 사내의 품안에 박아넣었다. 자신의 손이 닿는 부분에 마침 사내의 복부가 있었으므로, 날카로운 칼 끝은 사내의 부드러운 피부를 가르고 복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으으윽!”

배를 움켜쥔 채 사내는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이내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쿵, 하는 커다란 소리와 진동이 피비린내를 머금은 공기 속으로 녹아든다.

리거는 창고를 나서기 전, 식량 더미 위에 짐짝처럼 버려진 청년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강한 힘에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간 그의 시신을......

‘미안하다. 도와주지 못해서.’

은색 달빛이 대지를 교교하게 비추고 있었다. 풀벌레가 찌르르 울며 날고 있고, 불어오는 바람에 잡초들은 스산한 소리를 내며 흩날리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밤의 풍경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위의 모든 것은 특유의 평온함으로 자신을 맞아주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은 피로 더럽혀져 있다. 등 뒤에는 피비린내가 따라붙어 있고, 눈 안쪽은 시큰거리며 아파온다.

리거는 달리기 시작했다. 괴로운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일부러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은 녹녹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마 비가 쏟아질 것이다.

모든 것을 말끔하게 씻어 내려줄 큰 비가.

잊고 있던 게 하나 있었다.

닐터 아저씨네 마구간에서 없어진 열 필의 말과 엄청난 양의 식량...... 그들이 아무리 거인 족이라 할지라도 단 두 사람이 한꺼번에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치우진 못한다.

마을에 숨어든 히이토 족은 그 두 사람만이 아닌 것이다.

아직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선술집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히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눈으로 자신을 주시한다. 다행히 자신의 생각대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여관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모두들 무기를 들어! 죽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키라고!”

“리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여관 집 아들 멜더가 놈들에게 당했다.”

일순 주위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리거, 자네 손에 그건 뭔가!”

누군가 붉게 물든 자신의 손을 발견하고 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그 돼지들의 피다. 리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창고에서 히이토 놈들 둘과 난투극을 벌였어. 그들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아마 단단히 화가 나 있을 거야.”

“창고? 그럼 그 안에 있던 스칸데르인은?”

“풀어줬어.”

스스로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였다. 동료 중 하나가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멱살을 움켜쥔다.

“결국, 결국 네놈이 우릴 배신했구나!”

리거는 냉정한 얼굴로 사내의 손을 잡아뗐다. 자신에게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는 원망과 분노, 두려움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당신들은 지금 뭐가 중요한 건지 모르고 있어. 아니, 알려고 들지도 않고 있어! 모든 죄를 그 남자에게 뒤집어씌우고 이런 데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밤새도록 불안한 얘기를 주고받으면 모든 게 알아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 웃기지 마! 상대는 성난 악마 따위가 아니라 아주 질 나쁜 들짐승들이야! 제물을 던져줘 봤자 제물의 목을 물어뜯고, 피로 물든 혀로 입가를 핥으며 당신들에게 달려들, 그런 놈들이라고!”

그 누구도 자신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알고 있다.

저들은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일 뿐이다.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 하지도 않고 지레 겁을 집어먹은 채 방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만 있는 그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바보들이다.

그것이 인간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모든 걸 뒤엎고 겁에 질린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떨고만 있는 저들에게 달려들어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다.

“싸워! 죽고 싶지 않다면 무기를 들고 싸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주지 않아! 당신들이 자신들만이 살기 위해 그 남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듯 지금 당신 곁에 앉아 있는 친구가, 당신의 가족이, 언제 어디서 당신을 희생양으로 삼게 될지 몰라. 아무도 믿지 마. 아무에게도 의지하려 하지 마! 믿어야 할 건 자신뿐이라고!”

조금쯤은 효과가 있는 것인가. 자신의 동료들을 시작으로 조금씩 사람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저런 우매한 인간들을 세뇌시키는 건 간단하다.

저들은 그저 조금 큰 소리를 낼 줄 아는 리더가 있으면 꼭두각시처럼 흐느적흐느적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지금 저들을 선동시켜야 할 리더는, 다름 아닌 자신이다.

“그래요! 싸웁시다! 여긴 우리들의 마을이에요! 그런 야만족 따위가 마음대로 활개치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

이 마을에선 오히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용감하다.

뚱뚱한 중년 부인 하나가 일어서 소리치자 마을 청년들이 하나둘씩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쟁취하자, 싸우자 따위의 구호를 외친다. 그때 세라의 말에 모두가 그 남자를 죄인으로 몰았듯이.

“크... 큰일났어요! 마구간을 지키고 있던 센류가......!”

분기탱천한 마을 사람들은 청년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선술집 안에 들이닥친 것을 계기로 눈을 번뜩이며 이를 드러낸다.

한심한 사람들.

당신들은 벌써 몇 명째의 소중한 가족을, 친구를 잃었는가.

조금만 더 빨리 용기를 냈더라면 죄 없는 불쌍한 청년들이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을.

“마구간에 침입했던 건 몇 명이었지?”

“둘... 아니, 제가 도망치기 시작하자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따라붙었던 남자까지 합하면 셋이었어요!”

“그들 중 상처를 입은 자는 없었나?”

청년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세차게 저어 보였다.

그러니까 마구간에 침입했던 놈들은 창고에 침입했던 놈들과는 별개의 인물이란 말이 된다.

그렇다면 놈들은 모두 다섯.

그 어마어마한 괴물이 모두 다섯이나 된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사지가 멀쩡한 채 살아남을 수 있긴 한 걸까?

리거는 땀으로 흥건히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리거.”

옷깃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세라였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얼굴에선 평소의 표독스러움이 사라지고 내성적인 소녀처럼 유약해 보였다.

“토오르는......?”

“아마 그 남자랑 이곳을 떠났을 거야.”

“으응... 그래.”

그녀도 조금쯤은 성숙해진 듯, 말끝을 얼버무리며 치맛자락을 움켜쥐는 모습이 작은 아이처럼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되긴! 그 돼지 같은 녀석들을 해치우고 다시 예전의 평화로운 마을로 돌아가는 거지.”

“토오르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어디서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리거는 웃으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세라, 이번 사건이 무사히 해결되면 우리 데이트하자.”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고집 세고, 남자들보다도 더 씩씩하고 강한 여자아이.

뾰족뾰족한 가시가 완전히 걷힌 그녀의 주근깨투성이 얼굴은 그 어떤 미녀보다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랑 함께 이곳을 떠나자, 세라.”

“농담하지 마.”

“농담이 아냐. 토오르가 떠나고 나니까 엄청 외로워졌거든. 애인을 만들고 싶어도 질 나쁜 나를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으니까, 세라 네가 날 책임져 줘라.”

그녀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붉어졌다.

바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던 토오르가 그 남자에게 안주했듯이 자신도 한 사람의 품에서 쉬고 싶다.

그것이 세라, 너였으면 좋겠어.

매일 눈만 뜨면 서로 이를 드러내고 싸우던 너밖에 없어.

생각해 보면 나 같은 놈팡이를 진심으로 상대해 주는 여자는 너 하나뿐이었는걸.

리거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손을 움켜잡고 그 거칠고 투박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느끼한 짓 좀 하지 마!”

이제야 그녀의 얼굴이 본래의 성질 사나운 암고양이 세라의 얼굴로 돌아왔다. 매몰차게 자신에게서 손을 빼며 그녀는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치마에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그럼 세라, 금방 다녀올게!”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처럼 리거는 세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것은 자신들만의 작은 전쟁이다.

적은 다섯, 어쩌면 더 있을지 모르는 흉포한 히이토 족의 군인. 쓸 만한 무기도, 그렇다고 그들을 상대할 만한 실력은 더 더욱 없다.

어쩌면, 이 마을이 나의 무덤이 될지도 모르지.

“리거! 이 바보 같은 자식아! 죽지 마! 절대 죽지 마! 알았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는 세라를 뒤로하고 리거는 마을 사람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선술집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곧 모든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동료들은 언덕 아래 나무 기둥 옆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들이 내민 손을 소리가 나도록 치고는, 모두 함께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이 닥치든 용기를 잃지 않고 싸우겠다는 자신들만의 비장한 결의였다.

[ 3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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