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제10장
“아......”
갑자기 열기를 머금은 거센 바람이 불어와 소녀의 얇은 후드가 흩날렸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소녀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모래가 눈에 들어간 탓이었다.
“붉은 바람이야.”
페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손을 길게 뻗었다.
“네? 붉은 바람이요?”
“이것을 사람들은 붉은 바람이라고 불러. 사막에 인접한 지역에 자주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지. 하지만 최근엔 전쟁 탓에 서쪽에서 불어오는 피비린내를 머금은 바람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 같아.”
“페리도 바람에서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아니. 난 뮌, 저 사람 같은 짐승이 아니거든. 하지만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이 바람은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잖아.”
그저 흙냄새가 나는 메마른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면 그녀의 말대로 피비린내를 머금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쟁에서 죽은 자의 원혼이 일으키는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레이루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바람이 불어오는 서쪽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끝도 없이 이어진 산과 나무뿐이다.
저 산 너머, 아니면 동쪽의 저 커다란 계곡 너머에 그가 있을까.
예르네이, 그는 지금쯤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살아서 이 대륙에 있다면 아마 자신과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저 맑고 푸른 하늘을.
“가자, 레이루.”
“네.”
그래. 그가 이 대륙에 있는 한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자신이 그를 기억하는 한, 자신의 머릿속에 남은 그의 모습이 애달픈 모습을 하고 있는 한, 언젠가 그와 만날 수 있을 거야.
* * *
한쪽 눈은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묻자, 그는 침묵했다.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한 천을 갈기 위해 안대를 풀었을 때 토오르는 할 말을 잃고 미간을 좁혀야 했다.
깊게 함몰된 구덩이.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피딱지가 말라붙은 구멍밖에는 남아 있질 않다. 상처는 그럭저럭 아물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아픈지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작게 소리 냈다.
대체 누가 이 남자의 눈을 이렇게 만든 거지?
칼로 안구를 그대로 도려내거나 하지 않았으면, 자연적으로 이렇게 안구가 예술적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았을 테고.
“제대로 된 약을 사야겠어. 이대로라면 상처 부위가 곪아서 터질지도 몰라.”
다행히 마을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약초는 충분히 챙겨 왔지만 이 찌는 듯한 무더위가 문제다.
“어떤 인간인지 몰라도, 정말 예술적으로 짓이겨 놨네.”
눈의 상처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예르네이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상처를 만든 그 누군가에 대해 일절 입 밖으로 꺼내는 법이 없지만, 그의 일그러지는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의 한쪽 눈에 서려 있는 감정의 빛은 분노의 남색이다.
증오하고 있는 것인가. 이 엄청난 상처를 만든 사람을. 하지만, 그것만이라고 보기엔 그의 눈동자 속에 잠겨 있는 감정은 너무 복합적이다.
분노의 남빛을 띠었다가 이내 슬픈 듯 차가운 초록빛으로 일그러지고, 다시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서린 눈이 된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
“볼일이라니?”
“사막을 가로질러 가려면 필요한 게 엄청 많아. 당신도 알잖아? 게다가 사막으로 접어들기 전에 체력을 비축해 두지 않으면 위험해.”
예르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처럼 버려진 그를 주운 것은 사막에서였다. 그래서 어느새 자신은 제멋대로, 예르네이를 사막에 은거하는 전사쯤으로 단정지어 버린 것 같다.
“하긴 길거리에서 이러고 있는 건 좀 그런가?”
성치 않은 몸으로 힘든 여행을 해서인지 예르네이의 구릿빛 얼굴은 말 그대로 우유를 끼얹은 듯 밀크빛으로 변색돼 있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낼 생각도 못한 채 그는 가끔 미간을 좁히거나 입술을 지그시 깨물 뿐이었다.
“이곳에서 며칠간 쉬다 갈까? 어차피 마을에서 벗어난 이상, 급할 건 없잖아.”
“나 때문에 너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어.”
예상했던 반응이다.
이 사람은 두 다리가 절단되어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경우엔, 두 팔로 기어서라도 갈 길을 가고야 말 그런 사람이다.
“이러다가 중간에 당신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 어쩌라고? 오히려 그게 더 민폐인 거 알고나 있어?”
황소고집이지만, 남한테 폐 끼치는 건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족속이기도 하다. 이런 타입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예르네이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그리고 말야, 당신의 이 머리 말인데.”
천으로 아무렇게나 감싼 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토오르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역시 비장의 히든카드답게, 그의 몸이 일순 경직되었다.
“천으로 가리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어? 아성초를 사다가 제대로 염색하지 않으면 사람들한테 들키고 말걸?”
“이틀. 이틀이야. 그 이상은 안 돼.”
토오르는 속으로 승리의 V 자를 그리며 미소지었다.
마을 구석의 그늘에 자리 잡고 있던 구릿빛 피부의 야수가 일어서자, 거친 야성의 냄새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야성적인 남자의 체취, 햇살에 비친 조각 같은 얼굴, 완벽한 몸.
한쪽 눈을 가린 안대 덕분에 그는 타지에서 온 뱃사람 같기도 했고, 떠돌이 용병 같아 보이기도 했다.
잠시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예르네이를 넋 잃고 바라보던 토오르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거의 뛰듯이 그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토오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는 듯하더니 곧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걸어간다. 그리고 토오르는 금세 따라잡힌다.
어느새 듬직한 체구의 사내가, 토오르의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그리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역시 체격 차인가. 대체 뭘 먹으면 저렇게 완벽한 근육이 생길 수 있지?
온몸이 근육으로 똘똘 뭉쳐 있는데도 전혀 둔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날렵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당장이라도 저 긴 팔다리를 이용해 고양이처럼 훌쩍 뛰어나갈 것 같아.
“이 마을은 무척 조용하군.”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예르네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름이잖아. 특히 이 지방은 사막과 인접해 있어서 엄청 무덥거든.”
“그렇다고는 해도, 마치 무덤 같아.”
“그럼, 저기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유령인가?”
어느 마을이든지 그렇듯 선술집 앞에는 사내들로 북적인다.
바닥에 녹인 버터처럼 늘어져 있는 게 좀 보기 흉하긴 하지만.
보통 낯선 이방인이 등장하면 마을의 터줏대감들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경계를 하기 마련이지만, 바닥에 늘어진 살아 있는 시체들은 눈을 치뜨고 흘겨보는 것조차 귀찮은 모양이다.
선술집의 문을 열자 이번엔 테이블 위에 늘어진 사내들이 그들을 맞았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등장하자 땀에 전 얼굴을 들어올리는 정도의 반응은 보여주었다.
“어서 오세요.”
가게의 손님들만큼이나 의욕이 없는 여자아이가 손을 팔랑이며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어딘지 마을에 놔두고 온 세라, 그 버릇없는 계집애를 닮은 아이다. 한 가지 그 아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애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예르네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는 거다.
이것이야말로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들의 앞에서 보여야 하는 어린 계집애의 당연한 반응 아니겠는가.
죽었다 깨나도 겁에 질린 여자애를 위해 미소지어 주는 일은 없을 예르네이 대신 토오르는 단내가 풀풀 풍기는 달짝지근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아가씨, 쓸 만한 방 있어? 한 이틀 정도 머물 예정인데.”
“저... 저기, 침대 두 개짜리 방은 없어요. 남아 있는 건 침대 하나짜리 방밖에 없는데......”
이런 더운 여름날, 게딱지만 한 시골구석의 여관방이 꽉 들어찼다는 게 말이 돼?
“그럼 다른 여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가?”
“아마 그럴 거예요. 그나마 남아 있는 방은 여기 종업원이 쓰던 방이에요.”
“어째서지? 이런 때 그렇게 손님이 많이 올 리가 없을 텐데.”
“얼마 전에 타지에서 엄청 많은 손님들이 왔거든요.”
건성으로 얘기를 듣고 있던 예르네이가 한쪽뿐인 눈을 부릅뜨는 바람에, 여자애는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려야 했다.
“타지에서 온 손님?”
“저... 저분처럼 상처 입고, 더러워진 남자들이었어요.”
차마 무서워서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는 못하고, 눈을 굴려 예르네이를 바라보며 여자애는 몸을 달달 떨었다.
과연 예르네이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허공에서 토오르와 예르네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설마겠지.
이런 코딱지만 한 시골구석까지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입김이 불어오진 않았을 거야.
“저... 저기 손님들도 페르티잔 쪽의 군인인가요? 듣기로는 히이토의 군인들은 거인이라면서요?”
여자애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토오르는 절벽 끝으로 곤두박질쳐야 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예르네이의 주먹은 무엇이든 부술 기세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히이토의 군인들에 이어, 이번엔 페르티잔인가.
히이토나 페르티잔이나 예르네이에게 있어선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일 뿐.
그가 스칸데르인인 이상, 어딜 가든 안전한 장소는 없는 것이다.
“이 마을에 머물고 있는 사내들은 모두 페르티잔의 군인인가?”
“소문대로 히이토의 군인이 거인이라면요. 우리 여관에 머물고 있는 손님 말로는 그 사람들은 전부 용병이래요. 역시 전쟁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에요.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에도 탈영병들로 넘쳐나고 있다더라구요.”
소년 같은 해사한 얼굴의 토오르 덕분에 예르네이의 존재를 망각했는지 여자애는 되는 대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젠장, 그놈의 빌어먹을 전쟁! 전쟁!
기껏 히이토의 탈영병을 피해 사흘 밤낮을 자지도 먹지도 않고 도망쳐 왔는데 이젠 페르티잔이라니! 식료품도 사야 되고, 예르네이의 머리카락도 염색해야 하고, 또 그의 상처가 더 이상 곪지 않게 약도 사야 되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우리 할머니 말로는 군에서 탈영하면 사형이라면서요? 그럼 이젠 어쩔 거예요? 다른 사람들처럼 멘스터 지방이나 아주 먼 곳으로 도망칠 거예요?”
쓸데없이 말이 많은 아이다.
이런 깡촌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늘 궁금한 게 많은 법이다.
‘귀찮아.’
토오르는 갑자기 격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겨우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사막을 지나가려면, 이 마을에서 충분히 휴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상태로 사막의 이글거리는 태양에 노출되었다가는 지쳐 쓰러져 바싹바싹 말라죽기 십상이다.
예르네이는 말이 없었다. 하긴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긴 했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결코 입에 담는 법이 없는 남자니까.
그는 미안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같이 오지 말아야 했어. 봐. 역시 나와 함께 있으면 위험해지잖아.
허공을 맴돌고 있는 그의 한쪽뿐인 눈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기... 침대 하나짜리 방이라도 드릴까요?”
“아니, 됐어.”
토오르는 여자애의 눈앞에서 손사래를 쳐 보였다.
“하지만 다른 여관에는 아예 방이 없을 텐데......”
여자애는 피곤에 지쳐 있는 자신들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푹신한 침대에 뛰어들어 늘어지게 자고 싶지만 별수 없지. 빌어먹을, 냄새나는 페르티잔의 개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어디 맘 편히 잠들 수나 있겠어?
“방은 됐고, 시원한 맥주랑 먹을 것 좀 줘.”
“요즘 낮에는 너무 더워서 고기가 없어요. 저녁이 되면 꽤 시원해져서 고기 요리를 드실 수 있지만요.”
“뭐든 좋으니 배를 채울 만한 걸로 듬뿍듬뿍 담아와 줘.”
예르네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토오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뜨고 싶다는 눈치 같다.
“여관에 묵고 있는 녀석들은 지금 이곳에 없어. 아마 저녁이 돼야 슬슬 기어 들어오겠지. 그러니 일단은 든든히 먹어둬.”
이쯤 되면 한마디라도 무뚝뚝한 얼굴로 툭 던질 텐데,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릴 생각을 않는다.
미안한 거겠지. 아주 미안해 죽을 것 같을 거야. 자신이 스칸데르인만 아니었더라면, 침대 하나짜리 방에서라도 두 다리 쭉 뻗고 쉴 수 있었을 테니까. 페르티잔이건 히이토건 겁날 게 뭐 있었겠어.
“식사를 하고, 대충 필요한 걸 사서 이 마을을 빠져나가자.”
그에게 몸을 가까이하고 속삭이기가 무섭게 한 무리의 사내들이 선술집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금세 가게 안은 사내들의 시큼한 땀 냄새와 우렁찬 목소리로 가득 찼다.
예르네이는 잔뜩 몸을 굳히고 경계한다. 적을 만난 살쾡이처럼 온몸의 털을 곧추 세우고.
사내들은 셋.
그 중 하나는 40대 정도의 중년이고, 나머지 둘은 모두 젊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에, 가게를 지키고 있던 마을의 터줏대감들이 꼬리 내린 개처럼 눈치를 슬슬 살핀다.
훤히 드러난 두터운 팔,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건강한 피부, 호쾌한 웃음소리.
한눈에 봐도 그들이 잘 단련된 전사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군인이거나 용병. 그것도 페르티잔의.
“이봐, 꼬맹이! 여기 맥주 네 잔 부탁해!”
“꼬맹이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난 어엿한 숙녀라구욧! 그리고 내 이름은 메이예요!”
주방에서 여자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내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웃었다.
“고향에 놔두고 온 딸이 너만 하다, 이 녀석아!”
“발육 부진의 어린애 같은 몸매를 하고서, 뭐라고? 어엿한 숙녀? 하하핫! 차라리 12살짜리 내 여동생이 더 성숙해 보이겠다!”
나갈까? 나가야겠지.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무척 마시고 싶긴 하지만, 괜히 저들의 눈에 띄어봤자 좋을 거 하나 없지.
“엉? 네놈들은 뭐냐?”
하지만 결국, 어쩔 새도 없이 저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았다.
중년의 사내가 여전히 미소 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토오르와 예르네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머지 세 사내의 시선도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
그들의 얼굴에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선, 자신들을 아군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더러운 페르티잔과 같은 족속으로 보인다는 게 무척 밸 꼴리는 일이긴 하지만, 날도 덥고, 고된 여행에 몸은 지쳤고, 또 배도 무지 고프고 하니 저들의 비위를 슬슬 맞춰주는 게 상책......
“어쭈? 이 자식. 왜 그런 기분 나쁜 눈으로 사람을 노려보는 거야!”
하지만 예르네이, 저 남자가 누구던가.
어디에서건 사람들의 시선-그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지-을 한 몸에 받는 불세출의 스타 아니시던가!
그냥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시비를 거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으로 보인다는 건 일종의 재주일지도.
토오르는 필사적으로 예르네이에게 눈빛을 보냈다.
제발 부탁이니,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 줘. 아무리 저들이 철천지원수 같은 페르티잔의 군인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맞붙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잖아?
그 역시 이번만은 토오르와 같은 생각인지, 다행히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한쪽뿐인 매서운 눈은 아무리 비굴한 척하려 해도 안 되는 건가.
할 일도 더럽게 없는지 한 사내가 일어섰다.
군인이나 전사나 용병이나, 그런 족속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
하루라도 주먹을 휘두르지 않으면 온몸이 근질근질해지는 족속들. 군에서 탈영한 주제에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야수의 피는 어쩔 수 없는지, 사내는 목을 까딱여 댄다.
너 오늘 잘 만났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어.
사내뿐만 아니라,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사내도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인지 서커스 구경을 하는 어린애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제 동료가 상처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말입니다. 양해해 주세요.”
리거가 이 모습을 봤다면 아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테지.
천하의 토오르가, 남에게 허리를 굽실대며 간신배처럼 웃다니! 세상 말세야! 따위의 말을 지껄이면서.
“아냐. 저놈은 노골적으로 우리를 무시하고 있는 거라고.”
기어이 몸 좀 풀어보겠다 이건가?
토오르는 둥근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고, 가게의 여자애에게 했던 것처럼 달콤하다 못해 찐득거리기까지 하는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우린 이미 한 배를 탄 동지 아닙니까?”
“뭐?”
“군에서 탈영한 죄는 큽니다. 그래도 참수형이라면 좀 낫지요. 전쟁 때문에 라자르 왕의 심기가 영 불편한 탓에, 아마 이대로 수도로 호송되면 극살 내지는 화형이겠지요.”
페르티잔의 시민이라면 토오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다.
라자르 왕은 악마, 그 자체다.
그들이 군인이라면, 페르티잔의 수도 광장에서 벌어지곤 했던 죄인들의 사형 장면을 두 눈 뜨고 똑똑히 보았을 터.
사람이 죽는 장면은 수도 없이 봐왔지만, 페르티잔의 수도에서 보았던 그 장면은 정말 눈뜨고 볼 만한 게 못 되었다.
나무 기둥에 거꾸로 묶인 채, 죽을 때까지 온몸의 내장을 머리 밖으로 쏟아내던 죄인들의 모습.
바닥을 적시던 피와 내장, 죄인들의 그 얼굴. 고통에 몸부림치며 새된 비명을 내지르던 그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탈영병 신세인 그들은 오죽하겠는가.
“넌 뭐냐? 설마 군에서 보낸 자냐?”
과연 효과가 있는지, 사내의 얼굴은 독한 살기 대신 두려움으로 일그러진다.
설마, 전쟁이 한창인 지금 탈영병 따위를 잡기 위해 소중한 군인들을 파견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 커다란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찬 거냐.
“그럴 리가요. 저희들 역시 탈영병입니다. 애국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나라를 위해 죽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서 말이죠.”
그렇지. 그건 너희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그 악마 같은 왕에게 충성하고픈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겠지.
돈 몇 푼에 팔려온 용병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군에서 돈이 지급된다. 하지만 그 몇 푼의 돈에, 그들은 갈기갈기 찢기고 정신까지 피폐해진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게다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는 히이토의 전사들.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거인들.
그들이 한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수많은 아군들이 죽어나가고 일대는 순식간에 피로 물든다.
히이토의 전사라는 놈들은 그야말로 싸움을 하기 위해 태어난 족속이다.
그들의 앞에서, 그래도 자기 마을에서는 힘깨나 쓴다고 자부했던 장정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깨닫고 절망하면서 그들의 칼에 목이 잘리고, 동료의 시체 위로 덧없이 그 육신을 포개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군에서 탈영해 중립지역으로 향하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군인이란 족속들은 서글프다. 그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더 가치가 없으며, 전쟁터에서 그들은 이름도 없는 가축들일 뿐.
“식사를 하고 나면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날 겁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주세요.”
사내는 눈을 끔뻑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바탕 근사하게 저지를 생각으로 일어서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섣불리 손을 댈 수는 없는 것이다.
토오르의 말대로 자신들은 그들과 한 배를 탄 ‘죄인’이니까.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자리에 앉아요! 맥주 가져왔으니까!”
어디를 가나 여자들이란, 어찌 보면 전쟁터의 히이토 전사들보다 강한 존재다.
메이라는 이름의 조막만 한 여자애는 앙칼진 목소리 하나로 어정쩡하게 선 전투견을 말 잘 듣는 애완견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침 잘됐다 싶었는지, 사내는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어슬렁어슬렁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당신들도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줬음 좋겠어요. 당신들이 전쟁터에서 얼마나 용맹하고 대단한 군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긴 전쟁터가 아니에요. 우린 평화를 사랑한다구요.”
평화...... 그 말은 참 오랜만에 듣는 것이라, 예르네이의 입술 사이로 작은 실소가 터져나왔다.
이런저런 사내들과 부딪치다 보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듯한 당돌한 계집애도 예르네이의 행동 하나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토오르는 알고 있었다.
흠칫 몸을 떨면서도 여자애의 두 눈은 줄곧 예르네이를 향해 있다는 것을.
어딘가 굉장히 무섭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을 게다.
이 마을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 탈영병들과 다를 바 없는 강인한 체구의 사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라는 것은 어린 소녀에게 있어 독과도 같은 것일 터.
“자, 어서 먹어. 잘 먹어야 상처도 빨리 낫지.”
토오르는 여자애가 내온 빵 바구니를 예르네이의 앞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일부러 의자를 끌어 예르네이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덥군.”
그가 몇십 분 만에 최초로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좀처럼 앓는 소리를 하지 않는 그가 이런 소리를 할 정도면 정말 덥긴 더운 모양이다.
게다가 상처 때문에 어제부터 미열이 있었던 것 같으니, 그가 느끼는 더위는 거의 살인적이겠지.
“덥다면서 그 더러운 두건은 왜 쓰고 있어요? 밥 먹을 때라도 벗고 있어요. 내가 빨아줄게요.”
기다렸다는 듯, 자신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여자애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예르네이의 머리를 싸맨 천을 풀어내려 하는 게 아닌가!
토오르는 마시던 맥주를 역으로 내뿜었다.
“그만둬!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맥주로 범벅이 된 손으로 천을 풀어내려는 여자애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예르네이 쪽이 한 발 더 빨랐다.
그의 눈이 섬뜩하게 반짝인다 싶더니, 순식간에 그의 커다란 손은 여자애의 가는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꺄악―!”
쓸데없는 호의를 베풀려 했던 여자애는 팔이 뒤로 꺾여진 채 비명을 내질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자애는 두 눈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몸을 떨었지만, 예르네이는 그녀를 봐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예르네이, 그만둬......!”
역시 몸을 단련한 사람들에겐 이길 수 없는 건가. 비록 머리에 들어찬 거라곤 똥밖에 없는 군인이라 할지라도.
이번에도 토오르보다 그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뛰어들어 여자애에게서 예르네이를 밀쳐낸 사내.
그건 테이블에 앉아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누던 탈영병도 아니었고, 마을 터줏대감도 아니었다. 그는 간단한 짐을 등에 이고 밝게 웃는 얼굴로 막 선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어, 메이. 오늘도 엄청나게 덥지? 날도 더운데 그 거추장스런 드레스는 벗지 그래?”
따위의 음담패설을 지껄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일 여자애는 낯선 남자에게 팔을 붙잡혀 끙끙대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웠을까.
그러나 당황한 순간도 잠시, 여자애의 팔이 부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재빨리 뛰어든 그의 순발력은 높이 살 만하다.
“이봐, 아직 어린 여자애한테 너무하잖아!”
사내는 하얗게 질린 여자애를 감싸고, 예르네이를 쏘아보았다.
예르네이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사내가 감싼 여자애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의 앞이다.
그것도 페르티잔 탈영병들의 앞이었다.
돈에 굶주린 비굴한 군인들.
아성초로 염색을 하기 전이라 그의 머리카락은 까만색 그대로다. 만에 하나, 천이 벗겨져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다면 자신이 저 여자애에게 달려들어 목을 비틀어 버렸을지도.
“괜찮아, 메이?”
“다행히 팔은 부러지지 않은 것 같네.”
“너 이 자식!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내들이 뒤늦게 우르르 달려와 여자애를 감쌌고, 방금 전 싸움을 걸러 왔던 전투견은 다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이 애는 호의를 베풀려던 것뿐이었어!”
“쓸데없는 호의야.”
어지간히도 화가 났는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예르네이가 잔뜩 가라앉은 음성으로 사내의 말을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래봤자 불난 데 기름 붓기 격이지.
“이 자식!”
사내는 인상을 구기며 예르네이의 멱살을 움켜잡고, 주먹 쥔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빠르기라면 예르네이가 한 수 위인 듯 그의 손목은 허공에서 잡혔고, 여자애의 팔목을 부러뜨리려 했던 괴력으로 예르네이는 사내의 팔을 한껏 잡아올렸다.
“크윽!”
사내의 입에서 얕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순간의 고통에 그의 몸이 휘청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예르네이는 움켜쥔 주먹을 사내의 드러난 복부에 쑤셔박았다.
분노를 담은 철의 주먹이었으니 예르네이와 비슷한 체구의 덩치는 소리도 내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야 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배를 움켜잡고, 사내는 바닥에 다량의 타액을 질질 흘렸다. 별다른 반격 한번 못 해본 채,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던 젊은 군인은 맥없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개처럼 끙끙대며 바닥을 기는 사내를, 예르네이는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 눈을 들어 사내의 동료들을 쳐다본다.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듯한 냉정한 눈빛.
싸움에 굶주린 미친 황소 같은 그의 눈빛에, 사내들은 섣불리 그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같은 냄새를 풍기는 거친 짐승이기에 눈빛이나 분위기만으로도 누가 더 강한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휘유~ 새로 온 신입은 엄청 다혈질이군그래.”
이런 부류를 뭐라고 해야 할까.
간사하게 남의 먹이를 가로채는 하이에나? 강한 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한 그런 비열한 족속?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최소한 여자애한테는 상냥하게 대해 줘야지?”
군인이라기보다는 뺀질뺀질한 외모로 여자들을 후리고 다니는 날제비 같은 사내다.
가게에 들어선 순간, 땀에 젖어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로 웃어 보이며 깡마른 여자애에게 추파를 던지던 그 모습처럼 사내의 얼굴엔 그리 상쾌하지 못한 미소가 걸렸다.
일단 여자애를 함부로 대하는 무뢰한에게 대들어 보긴 했지만, 덤벼봤자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임을 눈치 채고 꼬리를 내린 것이다.
토오르 역시 여자와 아이에게는 상냥하게 대해 주도록 교육받았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슨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다시 한 번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다간 내가 직접 네 녀석의 목을 비틀어주겠어.”
토오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아이에게 쏘아붙였다.
믿었던 아군에게 배신당한 듯한 기분인지 여자애의 지저분한 볼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똑같이 버릇없는 여자애의 맥락으로 볼 때 저 여자애보다는 세라 쪽이 조금쯤은 나을지도.
최소한 그 애는 눈물을 무기로 사람들에게 동정을 사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 어린애가 한 짓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냐?”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우는 여자애를 끝까지 감쌀 생각인지, 사내가 느물느물한 미소를 입에 걸친 채 두 사람 앞으로 다가섰다.
아직도 바닥을 뒹굴고 있는 저 사내나 이 남자나 예르네이와 비슷비슷한 체구들이다. 그들과 나란히 선 토오르는 어린애처럼 작고 유약해 보였다.
“어차피 당신들도 이 마을에 머물 거 아냐? 그렇다면 머무는 동안에는 이곳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잖아.”
“우린 당장 이곳을 떠날 거야.”
“떠나? 지금 이런 때에 사막을 건너겠다고? 제정신이야?”
“꽤 덥긴 하겠지만 못 갈 건 없어.”
“쯔쯔,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구만. 고작 덥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들이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겠어? 한시가 바쁜 이 마당에?”
“뭐?”
“지금은 붉은 폭풍이 오는 시기라고. 게다가 서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서 올해는 더 심각해.”
들은 적이 있다.
일년에 한 번 사막을 뒤덮는 붉은 바람. 말 그대로 피비린내를 머금은 붉은 폭풍이 서쪽에서부터 불어와, 사막을 죽음의 지대로 만든다는 것이다.
“괜히 사막에서 개죽음당하기 싫거든 이 마을에서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머무는 게 좋을 거야. 이 여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마을 광장 쪽의 여관에 가봐. 내가 방금 전에 방을 비웠으니 빨리 가면 방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사내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애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여자애의 흙 묻은 옷을 탁탁 털어주기까지 한다.
“그런데 메이, 그 여관에 있던 미인이 여관 주인의 마누라라는 건 미리 말해 줬어야지.”
여자애는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사내를 흘겨보았고, 사내들은 왁자하게 웃어젖혔다.
“그 여자도 그래. 남편이 있으면서 왜 그런 야시시한 차림으로 내 방에 기어 들어오는 거냐고! 몸이 뜨거워서 잠이 안 와요,라고? 몸이 뜨거우면 냇가에 가서 멱이나 감아!”
타고난 분위기 메이커인 듯한 사내의 등장에, 가게 안은 어느새 사내들의 걸쭉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지방의 아성초는 수도의 물건보다 훨씬 더 좋다우. 멀리서 아성초를 사러 오는 상인들까지 있으니까.”
확실히 염색 효과는 탁월했다.
풀을 짓이겨 붙여놓는 것만으로도 예르네이의 까만 머리카락이 금세 붉게 물들었으니.
게다가 시골이라 값도 싸고 말이지.
“그래, 총각도 군인이유? 어디 그런 비리비리한 몸으로 칼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겠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엔 그저 미소로 답하는 게 상책이다.
“이 마을이 워낙에 작아서 말이지. 만날 그 얼굴에 그 얼굴이었는데 그래도 요즘엔 좀 살 만하다우. 덩치 좋은 젊은 남자들로 복작이니 이제야 살아 있는 마을 같아.”
“그런데 마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오후가 되면 전부 어딜 가는 거랍니까?”
토오르는 중년 여인이 내민 아성초가 든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전쟁터를 제 집 정원처럼 누비고 다니던 사람들이잖수. 이런 좁아터진 마을에 붙어 있으려니 좀이 쑤셔도 한참 쑤시겠지. 마을 뒤쪽의 산이나 호수에서 사냥을 하거나 멱을 감거나, 자기들끼리 검술 훈련을 하거나 한다우.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하나둘씩 숙소로 기어 들어오는 거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웬 아성초를 그렇게 많이 사가지고 가시우? 어제 사간 아성초는 벌써 다 썼수?”
반은 예르네이의 머리를 물들이고, 반은 고이고이 모셔두었지.
사막을 건너고 여행을 계속하다 보면 예르네이의 까만 머리카락이 스물스물 다시 모습을 드러낼 테고, 그때마다 새로 염색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다른 지방에서는 이 정도 품질의 아성초를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고향에 두고 온 애인한테 선물이라도 하려는 거유? 그래, 그 아가씨는 예쁜가?”
이번에도 역시 토오르는 미소로 대답했다.
이래서 아줌마들은 딱 질색이라니깐!
“얘기하시는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동료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여관방에 틀어박혀, 이 더운 여름날 오후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몸을 단련하고 있을 예르네이를 핑계 삼아 토오르는 중년 여성에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얘기 상대가 없어진 중년의 여자는 살찐 돼지 같은 몸을 길게 늘이며 무료한 얼굴로 손을 팔랑였다.
“이젠 약을 사러 가볼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토오르는 곧잘 허공에 대고 떠들곤 했다.
이 시골구석의 하나뿐인 약사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영감으로, 최근에는 더위에 절어 뒷산의 나무 그늘이나 호숫가에 붙어산다고 한다.
가끔 내킬 때마다 가게 문을 한 번씩 열지만 문을 여는 시간이나 닫는 시간이 늘 일정치 않아 약을 지으러 가게를 찾는 사람들은 번번이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서성이게 되고 만다.
그런데도 불평불만 하나 없이,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이 마을 사람들의 성격이란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토오르였다.
전에 살던 마을도 그랬다.
사람들은 늘 느릿느릿, 여유롭게 살아갔다.
애써 재산을 모으지도 않고 남의 것을 탐내지도 않으며 이웃은 곧 나의 가족,이라는 이상한 신념을 지닌, 천하태평인 멘스터 사람들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짜증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한구석에선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진다 해도, 그곳이나 이곳이나 더위에 늘어진 한심할 정도로 천하태평인 인간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페르티잔의 군인들이 단체로 탈영해서 마을에 숨어들어도 이곳 사람들은 그들을 경계하는 기색도 없다.
저들이 언제 어디서 음험한 야수의 본성을 드러낼지 모르는데 말이다.
“정말 한심한 인간들이야.”
이번에도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이며, 토오르는 콧잔등을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마을 구석에 위치한 조그만 약사의 가게는 다행히 문을 연 것 같다.
활짝 열려진 쪽문 사이로 의자에 길게 늘어진 쥐알만 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토오르는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노크도 없이 좁은 가게 안에 들어섰다.
하지만 하필 이런 데서 이 인간을 만날 건 또 뭐람.
“여어~!”
이런 유의 인간들이 제일 싫은 점은 바로 이거다. 얼굴만 한 번 마주친 타인에게조차도 느물느물한 미소를 띠고, 친근한 척 접근한다는 점.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의 친구, 세상 여자들은 모두 나의 연인이라는 썩어빠진 사고방식을 지닌 짜증나는 인간들.
“약사 양반, 약 좀 지어줘요.”
토오르는 사내의 웃는 얼굴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래도 사내는 포기하지 않고, 토오르의 곁으로 다가와 자기 존재를 어떻게든 인식시키려 한다.
“이봐, 나 기억 안 나? 전에 여관에서 만났었잖아.”
왜 기억이 안 나겠어.
예르네이가 버릇없는 여자애의 팔목을 잡아 비틀려는 순간에 나타나 여자애를 구하고 정의의 히어로가 된 그 재수 없는 인간의 얼굴이.
“역시 떠나지 않았군. 하긴 이런 때에 사막으로 나간다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니까. 내가 쓰던 방, 침대가 하나뿐인데 어떻게 지내고 있어? 한 사람은 바닥에서 자는 건가? 아니면 둘이 꼭 붙어 자?”
토오르는 끝까지 그를 무시했다.
옆에서 시끄러운 개 한 마리가 떠들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이 빌어먹을 약사 영감은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반쯤 감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시체처럼 늘어진 채로.
설마 졸고 있는 거야? 이 망할 놈의 영감!
“약을 사러 온 건가? 누가 아파? 하긴 같이 왔던 동료가 얼굴색이 안 좋은 것 같았어. 그런데 말이야, 이 영감은 한번 잠들면 옆에서 누가 죽어 나자빠져도 몰라.”
사내는 여전히 그 재수 없는 미소를 입에 달고는 봐, 이 영감을 깨우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라고 하더니 그 커다란 손으로 사정없이 노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퍼억, 하는 꽤 큰 소리가 나고 노인의 어린애같이 작은 몸은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짐짝처럼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여간해선 놀라지 않는 토오르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노기 띤 얼굴로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었다.
“드디어 날 봤네~”
사내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어 보인다.
어이가 없어서! 설마, 내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죄 없는 노인을 후려갈긴 거야?
“그런데 이렇게 보니, 꽤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잖아? 이런 얼굴로 어떻게 군인이 된 거지?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이런 약해빠진 어린애까지 그 지옥으로 보내다니, 너무한 거 아냐?”
“누가 어린애란 거지?”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사내의 눈 밑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확실히 웃는 얼굴 하나는 봐줄 만한 사내다. 여자들 여럿 후리고 다녔을,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얼굴이라고나 할까.
“망할 놈의 자식, 네놈이 기어이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러나 쌍 코피를 쏟으며 시체처럼 바닥에 늘어져 있던 노인이 멀쩡한 얼굴로 일어섰을 때, 토오르는 진심으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저 엄청난 손으로 있는 힘껏 맞고 나가떨어진 노인이 앓는 소리 하나 없이, 태연히 일어서다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감은 절대 깨지 않잖아요.”
“한참 끝내주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망할 자식.”
구부정한 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노인은 단추 구멍처럼 작은 눈으로 사내를 흘겨보았다.
낮잠 자는 걸 깨우겠다고 다 늙은 영감을 있는 힘껏 후려갈기는 사내나, 그런데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약사 영감이나, 대체 저 인간들은 뭘로 만들어진 놈들이야?
“잉? 넌 또 뭐냐?”
“뭐긴 뭐겠수. 약을 지으러 온 손님이지.”
“이놈도 군인이냐? 미쳤군. 이런 어린애까지 전쟁터로 내보낼 정도로 너희들 나라가 타락했었냐? 쯔쯔, 세상 말세군.”
영감의 그 말에, 사내는 키들키들 소리 내 웃었다.
과연 약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영감은 토오르가 일러준 증상에 맞는 약을 찾아 좁은 가게 안을 한참 동안 돌아다녔다.
몇십 분간의 기다림 끝에 약을 들고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서쪽 하늘이 석양으로 물들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서쪽 저편의 대지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과 피가 솟구쳐 오른 듯, 눈이 부실 정도로 붉은 하늘이다.
“온 세상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것 같군.”
언제 따라나왔는지 등 뒤에서, 꿈에서조차 듣기 싫은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얼굴도 보기 싫은 지긋지긋한 남자가 죽자 사자 쫓아다녀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은 처녀의 마음이랄까.
“어이, 잠깐 기다려!”
눈치껏 알아서 사라져주면 좋으련만, 사내는 집요했다.
끝내 사내는 토오르의 앞을 막아서고 돌처럼 굳은 얼굴로 위협하기까지 한다.
“대체 뭐야? 왜 사람을 벌레 보듯 하는 거야? 기분 더럽게!”
매번 믿음직스럽지 못한 미소 띤 얼굴을 봐와서인지, 눈앞에 버티고 선 사내의 얼굴은 어색하기만 하다.
눈초리에 잔주름을 만들며 웃을 줄만 아는 바람둥이, 날건달인 줄 알았더니 군인은 군인인 모양이다. 쏘아보는 눈매나 얼굴 표정 같은 것이 꽤 험악하다.
“비키시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피할 것까진 없잖아. 난 그저 너희들과 친해지고 싶은 것뿐인데.”
“굳이 우리와 친해지지 않아도, 당신한테는 동료들이 있잖아.”
“머리에 든 거라곤 여자와 섹스밖에 없는 얼간이들?”
의외다.
그 골 빈 사내들과 한패거리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이 사교성 좋은 남자가 알고 보니 그들의 원 안에서 따로 노는 아웃사이더였다 이 말인가.
“이곳에서의 생활은 아주 따분해. 한마디로 정말 개똥 같아.”
“난 당신이 더 개똥 같아.”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사내는 주인의 뒤를 따르는 개처럼 토오르의 뒤를 따랐다.
“내가 그렇게 싫어?”
“싫다고 말하면, 따라오지 않을 건가?”
“날 그렇게 싫어하진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너희들은 말이야, 왠지 다른 녀석들과는 달라 보이거든. 특히 네 동료 말이야. 그 남자는 뭐랄까, 굉장히 이질적이고 신비로워 보여서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진 것 같더란 말이야.”
그렇겠지. 신비로울 수밖에. 내 동료란 사람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후손인걸.
토오르가 아무 말도 없자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으아아! 빨리 붉은 폭풍이 지나가야 할 텐데! 그래야 좀더 멀리 튈 수 있잖아!”
이번에도 대놓고 무시하자, 사내는 토오르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섰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뱀같이 집요한 인간.
토오르는 거칠고 투박한 손을 앞으로 척 내미는 사내의 미소 띤 얼굴을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밀어 사내의 손을 맞잡았다.
“내 이름은 긴이다. 이래봬도 한때는 네프 왕자님의 호위병 중 하나였지.”
네프 왕자? 그건 또 누구야.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쳐다보자, 사내는 맞잡은 토오르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 * *
사내는 기분이 나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여버린 것이다.
동료들 사이에선 주먹깨나 쓴다고 정평이 나 있는 그였기에, 더 더욱 그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복부에 파고들던 엄청난 힘. 덕분에 아직까지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내장이 끊어질 듯 시큰거린다. 그 고통에 잠시 잊고 있던 치욕감이 되살아나면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젠장, 그 빌어먹을 자식. 죽여버리겠어.”
“이젠 그만 좀 해라. 잊을 때도 됐잖냐.”
보다 못한 동료가 입을 열면, 그는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고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녀석.
거기까지 상황이 진척되면 동료들은 자기들끼리 작게 속삭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오늘도 멀쩡히 낮잠 잘 자던 녀석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씩씩대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폭발한 것이다.
“내가 방심한 사이에 그 자식이 날 공격했어. 비겁한 놈 같으니라고. 제대로 했더라면 그런 자식 따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었는데!”
나무 그늘 아래로 모여든 사내들 사이에서 어이없는 코웃음이 간간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흥분 상태가 최고조로 달해 있는 덕에 그들의 비웃음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럼 한번 제대로 붙어볼래? 그 녀석들도 붉은 폭풍이 사라질 때까지 이 마을에 머물 테니까 우리들이 자리를 주선하지.”
“그 자식이 그런 제의에 응할 것 같아?”
일 대 일로 맞붙었다간 또 그때와 같은 상황에 처해질 게 뻔하기에, 사내는 재빨리 동료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그렇게 비겁한 녀석으로 보이진 않던데.”
“그때 너도 봤잖아! 그 자식, 메이의 팔을 부러뜨리려 했다고!”
“그건 메이가 먼저 그 남자의 두건을 벗기려 했으니까......”
“겨우 그 정도 일로 어린 여자애를 그렇게 함부로 대한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되긴 하지. 오랜 동안의 힘든 여행 탓에 몸은 지쳐 있지,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지, 그런데 그 눈치 없는 계집애가 그런 짓을 했으니 자기도 모르게 과잉방어를 했을지도 몰라.”
“넌 대체 누구 편이야!”
나왔다. 수세에 몰렸을 때 나오는 사내의 주특기.
이것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빽 지르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켜 버리는, 사내만의 가공할 만한 특기인 것이다.
그 모습이 꼭 심통 난 어린애 같아, 동료들은 키들키들 웃으며 풀밭 위를 뒹굴었다.
“덩치는 큰 주제에 정신 연령은 완전 어린애라니까.”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담배를 말아 피우던 중년의 사내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어린애란 겁니까!”
거 봐. 어린애 맞잖아. 아니, 금세 온몸의 털을 곧추세우고 캬앙캬앙 대는 게 덩치만 큰 고양이인가?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지 못하고, 복수 어쩌고 하는 것만 봐도 네 녀석은 어린애야.”
“그건 정당한 승부가 아니었어요!”
“정당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네 녀석은 그 남자와의 기 싸움에서 밀린 거다. 네놈이 아무리 작정을 하고 덤벼도 그 남자한테 이길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전 인정 못 해요!”
“인정 못 하면 어쩔 건데? 결투 신청이라도 하려고? 적이 무서워 전쟁터에서 도망친 비겁한 놈이 뭘 하겠다고. 우린 모두 패배자야. 동료들을 배신하고 도망친 몹쓸 놈들이기도 하지.”
“하지만!”
“닥치고 짜부라져 있어! 괜히 날도 더운데 땀 빼지 말고!”
역시 말 안 듣는 개를 다루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니까.
사내들 중 하나가 작게 속삭이자 소리를 죽인 실소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젠장!”
“심심하면 저 녀석들처럼 미친 척하고 뛰어다녀 봐. 한바탕 땀을 쫙 빼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걸?”
“나보고 저 미친 짓거리를 하라고?!”
드넓은 초원 위를 종마처럼 뛰어다니는 사내들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사내는 시집 못 간 노처녀처럼 앙칼지게도 소리친다.
“딴에는 생각해 주느라 한 말인데.”
“젠장! 이놈이나 저놈이나!”
이런 놈들을 친구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사내는 결국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이런 비웃음 속에서 잘도 버텼군.
사내의 동료는 자기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며 언덕을 가로지르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혀를 찼다.
그건 정말 정당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거다. 그러니 얌전히 패배를 인정해.
동료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다.
분명 그 남자는 대단한 힘을 지녔고 재빠르기까지 했지만, 그때 자신은 흥분한 상태라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므로 그건 패배가 아니다.
그 남자가 운 좋게, 요행한 수를 써서 승리자로 보인 것뿐이지.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한 마을은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다.
지옥의 대마왕 같은 끔찍한 한낮의 태양이 저물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거리로 나와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미소를 머금은 여유 만만한 얼굴이라니!
게다가 그 한심할 정도로 평화로운 얼굴을 한 사람들 사이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놈의 얼굴이 보인다.
긴이다.
늘 미소를 입에 달고 다니는 바람둥이 자식. 그런 주제에 자신들을 더러운 벌레 보듯 깔아보는 기분 나쁜 녀석.
저 자식을 보는 것만도 기분 더러운데, 저건 또 뭐야? 저 어린애같이 비리비리한 녀석은 그때 그 남자와 함께 있던 녀석이잖아? 재수 없는 것들. 뭉쳐도 끼리끼리 뭉치는군.
“어서 와요. 시원한 맥주 한잔 드릴까요?”
하지만 여관에 돌아오니 꽤 사근사근한 계집애가 엉덩이를 살랑이며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지만, 애교 하나는 그 어떤 미녀 못지않다.
이 발육부진의 말라비틀어진 여자애를 그렇게 잔인하게 대하다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애처로운 소리를 내지르던 그때 여자애의 얼굴을 떠올리자, 맥주 맛도 뚝 떨어진다.
빌어먹을!
분명 잘못한 건 그 자식인데, 어째서 모두들 그 남자를 두둔하려 드는 거지?
그 일 이후로 난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됐고, 여자애를 함부로 대한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그놈은 전설 속의 신 같은 존재로 추앙받고.
“이건 불공평해!”
“네?”
“메이! 그때 그 자식 말이야!”
“아아, 그분 말이에요?”
“그분? 그놈은 네 팔을 부러뜨리려 했단 말이다.”
“하지만 그땐 제가 실수한 거잖아요.”
억! 소리가 절로 난다. 모두 단체로 약이라도 먹은 걸까?
“언제 한 번 정식으로 사과드리러 갈 거예요.”
여자애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어린애의 것이 아니다.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머리끝을 매만지며 여자애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대체 뭐야. 이게 대체 뭐야!
어째서 모두들 그 남자를 좋게 보려는 거지?
그 눈! 드러난 하나의 눈동자가 얼마나 차갑게 빛나고 있었는지! 그 눈에는 명백한 증오의 감정이 그대로 녹아 있었건만! 섬뜩할 정도로 빛을 발하던 살기를, 모두 느끼지 못한 걸까?
군인이라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탈영한 군인이라면 그런 눈을 하고 있진 않다.
그 남자에게는 전쟁터가 어울린다.
피를 갈구하는 그 눈에는, 죽음의 무거운 정적이 지배하는 그곳이 더 어울린다.
그렇게 느낀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을 텐데.
“그분 말이에요, 멋있지 않아요?”
사랑에 빠진 소녀는 제멋대로 지껄이며 얼굴을 붉혔다.
“아앗! 어딜 가요? 곧 저녁 식사시간인데!”
여자애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윙윙댔다.
사내는 어두워진 거리를 달렸다.
초원이나 호숫가에서 하루를 보낸 무능력한 군인들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뭔가에 쫓기듯 어딘가로 내달리는 사내를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미친 건가?”
“겨우 그깟 일로?”
“저놈은 자존심 빼면 시체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아아, 젠장. 시끄러워!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어이! 어딜 그렇게 급하게 달려가는 거야?”
개중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사내는 땀으로 흠뻑 젖어 흐물거리는 머리로 생각이란 걸 했다.
어딜 달려가느냐고? 글쎄. 나도 몰라. 내가 왜 이렇게 미친 듯이 뛰고 있는지.
“이봐!”
누군가의 억센 팔이 사내의 팔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대체 왜 그래? 어이!”
그 말발만 센 빌어먹을 늙은이다.
중년의 사내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넋이 나간 듯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사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쳤다.
“괜찮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한참만에야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중년의 사내뿐 아니라, 모처럼의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사내들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뭘 말이야?”
“그 남자 말이에요.”
“그 남자가 뭐?”
“어딘가 우리와 다르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사람마다 분위기란 게 있고, 그 분위기가 우리와 맞지 않았던 걸 테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사내는 무겁게 굳은 얼굴로 중년의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자넨 신경이 너무 예민해져 있어. 그래, 자네 말대로 그건 공정하지 못한 싸움이었어. 그렇게 정당한 승패를 가르고 싶다면 언제든지......”
“당신들은 왜 모르는 겁니까! 그 남자의 그 이질적인 분위기,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당신도 봤을 겁니다. 당신은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그 사람 곁에 붙어 있었으니까.”
“그건... 왕자를 말하는 거냐?”
순식간에 섬뜩하도록 차가운 공기가 모두의 몸을 감쌌다.
라자르 왕의 유일한 후계자.
얼마 전 왕궁에서 정식으로 의식을 치르고 전쟁터로 출격했던 왕자.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현란한 은빛 머리카락과 무섭게 굳은 아름다운 얼굴. 그 처연할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
그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면 으레, 여름 공기 속에 녹아든 부패한 시체의 냄새와 피비린내가 콧속에 스며든다.
“처음 봤을 때부터 기분이 나빴어요. 왠지 그 남자는 그 사람을 무섭도록 닮았으니까! 당신은 분명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봤을 거예요. 왕자가 전쟁터에서 어떤 모습으로 적을 쓰러뜨리는지. 난 아직도 잊지 못해요.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자신이 쓰러뜨린 적의 시체를 굽어보고 있는 왕자의 얼굴이었어요. 차라리 미소라도 띠고 있었다면, 그가 차라리 미친 듯이 웃으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면 탈영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두들 무섭도록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은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전쟁터를 누비면서 그 괴물과도 같은 거인들을 쓰러뜨리던 아름다운 남자.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름이 길게 여운을 남기며 허공을 맴도는 것만으로도, 사내들은 겁에 질린 초식동물마냥 무력하게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그 녀석들... 군에서 보낸 첩자일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수긍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전쟁이 한창인 지금, 첩자를 보낼 정신이 어딨겠어?”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 녀석들도 우리와 마찬가지 신세라고. 모두 너무 예민해져 있는 거 아냐?”
그렇다면 좋겠지만.
사내들은 불안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삼켰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매일 밤, 그들은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말을 탄 은색의 악귀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덩치를 한 거인 족, 히이토가 무서웠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무서운 건 자신들의 위에 군림한 남자, 라자르 왕의 혈육, 바로 그였다.
그 남자가 무서워서, 그 악마와도 같은 사내를 피해 도망쳤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어. 이렇게 하루하루를 여기서 지내느니 차라리 사막에서 말라 죽는 편이 더 낫겠다!”
그 은색의 악마에게 붙잡혀 산 채로 씹어 삼켜지는 것보다는, 확실히.
암청색 빛을 띤 하늘 위로 얇은 달이 떴다.
달빛에 비친 마을의 정경이 오늘따라 모두의 눈에 음울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하루 종일 여관 방 안에 갇혀 지내야 하는 예르네이 역시 그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토오르가 시장에 간 사이, 잠깐 여관 밖으로 나가보긴 했지만 여관 주인이나 늦은 식사를 하고 있던 손님들이나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군인들에게 익숙해진 사람들로선 덩치 좋은 젊은 사내의 모습이 그리 신기할 것도 없겠지만, 이런 좁아터진 마을에선 비밀이란 게 없는 법이다.
“저 녀석, 갑자기 메이한테 달려들어서 그 애를 죽이려 했다지?”
“글쎄, 목을 졸랐대.”
하지만 역시 소문이란 건 신빙성 제로의 물건이다.
졸지에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어린 여자애에게 달려들어 죽이려 한, 미치광이 살인미수범으로 낙인찍히고 만 것이다.
“원래 시골 사람들이 좀 그래. 쓸데없이 소문이란 것에 집착하는 법이거든. 그런데 웃기지도 않아. 이런 코딱지만 한 시골 마을에 퍼질 소문이란 게 어디 있다고.”
그의 말대로 이런 코딱지만 한 시골 마을에서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저녁이 다 돼서야 돌아온 토오르는 식당에서 가져온 저녁을 우물거리며 발을 까딱였다.
“내일은 호수에 가서 멱이라도 감자. 이놈의 마을은 왜 이리 더운지 모르겠어.”
“사람이 많은 곳은 내키지 않아.”
“좀 멀긴 해도, 녀석들이 가지 않는 호수를 알아뒀어. 마을 근처에 있는 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넓다더군.”
“그런데 어째서?”
지독히도 말을 아끼는 남자다.
그러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런 좋은 장소를 녀석들이 가지 않느냐고, 그렇게 묻고 있는 거지?
“거긴 납골당이래.”
“납골당?”
“이 마을은 멘스터식으로 시체를 화장해서 그 재를 호수에 뿌리나 봐. 그런 용도로 쓰이는 곳이겠지.”
“흐음......”
예르네이는 말없이 알맞게 구워진 오리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니 어디 재수가 없어서, 수영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밑에서 누가 발목을 잡아끌지도 모르는데.”
“섬뜩하군.”
“당신 그거 알고나 있어? 가끔 당신이 하는 말이랑 얼굴 표정이 반비례한다는 거?”
예르네이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기름이 묻은 입가를 닦아냈다. 토오르는 빈 식기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침대에 걸터앉은 예르네이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무릎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탄탄한 무릎 위에 팔을 올려놓고는, 얘기를 조르는 어린애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본다.
“예르네이.”
그의 깊은 눈매가 옅게 빛을 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얘기 좀 해줘.”
“얘기?”
“그냥 아무 얘기나 좋아. 나랑 이름이 비슷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좋고, 당신 고향 얘기도 좋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예르네이는 자신의 얘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가끔 털어놓는 단편적인 말들만이, 그에게 들은 얘기의 전부였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일까.
창틈으로 보이는 얇은 달이 무척이나 예쁜 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하나뿐인 눈을 가늘게 접고,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애에게는 그저 미안한 감정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전후 설명 없는 애매한 저 말이라니.
토오르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안 그래도 쏟아질 듯이 크고 둥근 눈을 더욱 크게 치뜨고 기다린다.
“조금이라도 그 애의 감정에 응해 주었다면... 아니, 그렇게 했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겠지. 내가 그 애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레이루, 그 애는 분명 그렇게 했을 거야. 그 애는 그런 애니까.”
“당신도 그 애를 좋아했어?”
“가족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 애는 죽은 건가?”
“아니. 살아 있다, 분명.”
“당신이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건 그 애를 찾기 위해서야?”
그는 침묵했다.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교차했다.
“말해 줘. 내게는 알 권리가 있잖아.”
“모르겠어.”
그의 양미간에 굵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모르겠어. 이젠 목표가 불확실해졌어. 대체 무엇을 위해 내가 길을 떠났는지. 무엇을 위해 늘 방황을 하는지. 이젠 모든 게 다 흐리멍덩해졌어. 난 늘 무엇에 쫓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
“무엇에게 쫓긴다는 거야?”
“내 운명, 내 몸속에 녹아든 저주받은 피, 그런 것들.”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어느 순간 이 굵은 손가락, 염색한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그런 것들이 하나씩 타들어가 재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다.
“난 있잖아. 살아 있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던, 쓰레기 같은 놈이었어. 부모도 없었고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더러운 시궁창을 전전하며 살아남더군. 내겐 아무런 목표가 없었는데, 하루하루 사는 게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콱 죽어버리고 싶었는데, 주제에 명줄은 질긴지 죽기도 쉽지가 않더라고.”
토오르는 무릎 위에 놓인 예르네이의 투박한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봐. 난 지금까지 살아남았잖아.”
그의 손을 가볍게 움켜쥔 채 들어올려, 까칠한 손등 위에 입술을 갖다댔다.
상처가 가득 들어찬 흉한 손.
늘 흙 비린내가 나고 피가 마를 날이 없는, 딱한 남자의 손.
“세상이란 건 말야, 그럭저럭 살아볼 만해. 이 세상엔 나쁜 사람도 많지만 좋은 사람도 많더라고. 마음속의 빈 자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메워지게 돼 있어. 당신이 외롭고 힘들다면, 두말 않고 달려와 줄 소중한 사람도 생길 테고, 당신이 스칸데르인이란 걸 숨기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곧 올 거야.”
위로하는 데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아직 앳된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남자는.
하지만 다시 반복될 뿐이다.
가족과도 같은 소중한 사람들이 생기고, 괴로운 일을 잊고 행복한 기분에 젖어들 때 즈음에는 또다시 그 조그만 행복은 산산조각으로 깨진다.
운명이란 건 그리 녹녹치 않다는 걸, 이미 숱한 경험으로 깨닫지 않았는가.
“내 몸속에 흐르는 저주의 피는 주위 사람들까지 불행의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내뱉듯 꺼낸 그 말에, 토오르의 고운 아미에 가느다란 주름이 자리 잡는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거지?”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쯧, 하고 토오르는 혀를 찼다.
대화를 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예르네이의 자기 비하로 대화는 중단된다.
토오르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예르네이, 그때 여관에서 만났던 그 남자 말이야.”
그날 그 제비 같은 남자 말이군.
미소 띤 느끼한 면상을 떠올리며 예르네이는 습관처럼 붕대로 감아놓은 눈의 상처 부분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오늘 그 남자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어.”
토오르는 잠시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말을 이었다.
“라자르 왕의 유일한 후계자가 전쟁터로 출격했대.”
상처 부위를 매만지던 예르네이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긴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환장할 정도로 예쁜데 상태가 무지 안 좋은 소가 엉망으로 갈아엎은 밭처럼 엉망진창의 뇌 속 구조를 지닌 미치광이래. 이 마을에 있는 녀석들도 그런 왕자에게 환멸을 느끼고 탈영한 거라던데?”
탁월한 언어 구사력이다.
엉망진창의 뇌 속 구조를 지닌 미치광이.
그래, 광인이라고밖에 부를 수가 없다. 라자르 왕이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광기만을 쏘옥 주입시킨, 악마의 유일한 후계자.
은빛으로 빛나는 화사한 머리카락, 납빛을 띤 창백한 얼굴, 선홍빛으로 물든 입술, 쨍쨍하게 얼어붙은 자수정빛 눈동자.
저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긴 은발을 흩날리며, 머리카락 사이로 금수와도 같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던......
“난 그 왕자란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은 어때?”
토오르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물론 봤지. 이곳에서 하릴없이 빈둥대는 녀석들보다 훨씬 더 많이 봤다고 자부할 수 있지.
“예르네이?”
토오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의 끔찍했던 고통이 다시금 생각나, 예르네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멀쩡한 한쪽 눈마저 시큰거려 토오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괜찮아? 상처가 아파? 새로 사온 약을 발라줄까?”
“됐어.”
예르네이는 간신히, 손을 뻗어 토오르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곁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애같이 맑은 눈을 하고 있는 저 남자는 보기와는 달리 무척 눈치가 빠른 편이다.
“당신,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있지?”
“멀리서 잠깐 얼굴을 봤을 뿐이다.”
바람 난 아내를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자신의 불륜을 극구 부정하는 조신하지 못한 여자의 형상이다.
뻔히 드러나는 거짓말이지만, 그는 일단 속아주기로 한 걸까.
머리 위에서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목덜미 아래로 늘어진 예르네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붉게 물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얼마 전까지는 새까만 색을 하고 있던 머리카락이다. 손가락을 둥글둥글 굴려, 붉게 탈색된 머리카락을 감아올리자 손끝에 목덜미의 피부가 닿았다.
“그렇게 가슴속에 꽁꽁 쟁여놓고만 있으면 나중에 병나.”
“미안하다.”
“미안하다니, 뭐가?”
토오르는 어린애같이 둥글둥글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사과하지 마. 그런 얼굴로 날 쳐다보지 않아도 돼. 난 내 멋대로 당신을 따라나선 거야. 내가 귀찮아지면 사막에 던져버리고 가도 돼. 난 날 차버린 사람의 궁둥짝을 쭐래쭐래 쫓아갈 만큼 구차하진 않아.”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다.
이래서야 미안하다,라고 사과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어린애에게 하듯, 토오르는 예르네이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슬쩍 긁었다.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란 건 없다고 했어. 리거, 그 녀석은. 늘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한심한 주정꾼도, 하는 일이라곤 남편 바가지 긁는 일밖에 없는 돼지 같은 여자도, 모두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예르네이의 손에서 그가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있던 스푼이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당신도, 이 세상에는 꼭 필요한 존재야.”
어이구, 유치해라.
토오르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애무하듯 만지작대던 머리칼에서 손을 떼고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쳐다보자 예르네이는 미간에 굵은 주름을 만들고서 마주 쳐다봐 줬다.
얼마나 인상을 쓰고 다녔는지, 콧잔등에 벌써 굵은 주름이 내려앉았다. 아직 젊은 사람이, 쯧쯧.
“좀 웃어봐, 이 사람아.”
토오르가 보다 못해 예르네이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장난기 가득한 어린애 같은 그의 태도에, 예르네이의 얼굴에 애매모호한 표정이 번졌다.
“웃으라니까, 왜 또 인상을 쓰는 건데?”
밝고 쾌활한 사내다.
자기 멋대로 따라나섰으니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웃으면서 말하는 남자다.
토오르라는 사내의 쾌활함에, 예르네이는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그 역시 그걸 기대하고 고향 같던 마을을 등진 것은 아닐 게다.
“예르네이.”
심장 박동 소리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바싹 몸을 붙이고, 토오르는 눈초리를 둥글게 만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오늘 같이 잘까?”
타액에 젖은 남자다운 입술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네자, 과연 예상했던 대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납빛으로 변했다.
“이런 스산한 밤에, 혼자 자면 외롭잖아.”
“더 늦기 전에 씻으러 가야 될 것 같군.”
사람 무안하게, 예르네이는 돌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토오르의 어깨를 밀쳐내고 도망치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누가 들으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졸도할 말을 지껄이며 토오르는 침대 위를 뒹굴었다.
창문 너머로 보니, 예르네이가 어둠 속 어딘가로 향하는 게 보였다.
밤도 되고 사람들도 없으니 기분 전환이라도 하러 가는가 보지.
그는 매정하게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뭐가 그리 바쁜지 자기 갈 길만 묵묵히 간다. 미끄러지듯 어둠 속을 가르는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란 도둑고양이 같다.
예르네이는 호숫가 근처에 앉아,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수면 위에 비치는 탁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더욱 비참해 보이는 얼굴이다.
게다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라니.
누가 봐도 전쟁에서 패한 패잔병의 모습이 아닌가.
무자비하게 손가락을 찔러넣어 동공을 잡아 빼던 그 남자가 수면 위에 떠올랐다.
수면 위에 찬 달빛과도 같은, 달콤한 실버 브론드를 한 남자. 제비꽃 색 눈동자를 요사하게 빛내던, 아름다운 사내.
때때로 날카로운 단검이 되어 가슴을 도려내는 잔악무도한 야수.
그토록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했으면서, 결국 권력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인가.
토오르의 말대로라면, 그 남자, 네프는 이 나라의 이름을 건 왕국의 왕자로서 전쟁에 출전했다.
그토록이나 자신의 몸속에 흐르던 페르티잔의 피를 저주하던 그 남자가.
원래 인간이란, 자신과 닮은꼴을 본능적으로 경계하기 마련이다.
그 남자, 네프는 분명 자신을 닮아 있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를 저주하며 살아온 지금까지의 인생도, 인생 자체를 냉소적으로 대하는 그 태도도.
그 남자가 거울 안쪽의 인물이라면, 자신은 거울 반대편의 인물.
하지만......
두려워서 도망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토오르의 말처럼,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건가.
그의 끝도 없는 광기? 자신을 향한 비뚤어진 호감? 폐부를 찌르는 듯한 그 차가운 눈동자?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열에 들뜬 역병 환자처럼 몇 번이고 뇌까리던 네프, 그 남자의 말.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알 수가 없어졌어, 이젠. 지쳐버린 것도 같고, 약해진 것 같기도 해.
이젠 차라리......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수면 위의 달이 형체도 없이 바스러진다.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이고, 달과 함께 부서진 수면 위의 얼굴은 보고 있기가 무서울 정도로 참혹하다.
이젠 차라리... 차라리 뭘 어쩌겠다는 거지?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네프라는 사내에 대한 분노에 이가 갈린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면, 주저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그래. 차라리, 말이야.
* * *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생지옥의 현장에서, 오직 그만이 황금빛 태양 아래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피에 물든 남자의 은빛 머리카락이 떨어진 빵 부스러기보다도 가치 없는 왕국의 찢어진 깃발처럼 어지럽게 나부꼈다.
“이... 이겼다......!”
누군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붉은 내장을 드러낸 채 참혹하게 쌓인 시체들 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자들의 입에서 그 단어가 불이 번지듯 퍼져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기쁨과 절망, 슬픔, 그런 것들이 뒤섞인 환호성으로 변했다.
“이겼다! 우리들이... 우리들이 이겼어!”
“와아아아―!”
상처 입고 지친 그들의 얼굴에 참으로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 더러워진 그들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부어터진 목구멍 사이로 나오는 외침은 피보다도 붉고 뜨거웠다.
사내들은 살아남은 동료들과 서로 껴안으며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것에 안도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발아래 죽어 널브러진 아군의 시체가 내뿜는 악취와 허공을 맴도는 피비린내에, 승리의 기쁨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한때 자신들의 동료였으며, 가족과도 같은 전우였던 그들.
자신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패색이 짙었던 전투에서 끝끝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남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겹겹이 쌓인 적의 시체 위에, 동상처럼 버티고 선 젊은 사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앞에 버티고 선 돌덩이와도 같은 적을 별 어려움 없이 베어나가던 영웅이라고도 칭할 수 있는 남자.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 그를 단순히 영웅이라고 칭할 수만은 없었다.
적의 거대한 몸 아래 죽어 나자빠진 전우들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살아남은 사내들도, 모두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달빛과도 같은 오만한 은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피투성이의 지옥을 누비고 다니던 그의 모습을.
피와 살육에 굶주린 저 히이토 족의 군인들을 약해빠진 초식동물처럼 벌벌 떨게 만들며 송곳처럼 파고들던 싸늘하고도 잔인한 그의 살기. 끝도 없이 꾸역꾸역 적의 피와 살을 먹어 들어가던 게걸스런 그의 살육에의 집착!
-저건... 악마다.
-인간이 아냐. 지옥에서 빠져나온 악귀야. 저것은......!
사내들은 죽음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눈앞에 버티고 선 순간에도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뇌까렸고, 그리고 죽어갔다.
두 눈 가득, 자신들의 선두에 선 그가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담은 채......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공포. 그런 것들이 적이든 아군이든, 살아 있는 인간 사이에서라면 어디든지 짙게, 그리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네프 왕자님.”
수많은 시체의 들판 위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내들 사이에서, 왕자를 대신해 모든 군인들을 통솔하고 지휘했던 사령관이란 사내가 모두에게 거리낌 없이 악마라 불리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악마라 하기엔 너무도 완벽한 얼굴의 남자는 손등으로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내며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입술을 열었다.
“이겼군.”
“네. 하지만 그만큼 희생도 많았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어쨌든 이겼으니 된 거 아닌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남자가 동료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면, 어울리지 않겠지.
피와 땀, 먼지로 더러워져 있지만 여전히 왕자의 미모는 빛을 잃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처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왕자는 고개를 돌려 핏빛 석양이 진 하늘을 쳐다보며 잔뜩 쉰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좀 후련해지는군.”
“네? 무슨 말씀이시온지.”
“가슴을 꽉 막고 있던 썩은 종양 덩어리가 깨끗이 사라진 느낌이야. 덕분에 이제야 확실히 결심이 서는군.”
그 결심이란 게 뭔지 사내는 묻지 않았다.
일부러 캐물어 봤자 어차피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
그러나 왕자의 목에 걸린 페르티잔의 보물은 저토록 영롱하게 빛나고 있건만, 무사귀환을 환영하는 시민들의 환호성도, 왕의 특별 포상도 없이 폐허가 된 쓸쓸한 도시만이 자신들을 반겨줄 것이다.
아직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다.
순수하게 승전고에 취해 큰 소리로 웃고 떠들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난 이제 남쪽으로 간다.”
처음 사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수도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먼저 찾아야 할 것이 있어.”
대체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당연히 수도로 돌아가, 왕을 도와 전쟁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일개 평민인 자신들과 함께 전투에 임했지만 그는 엄연한 차기 국왕의 신분이거늘.
“찾아야 할 것이라니요?”
“이런 고철 덩어리보다 훨씬 더 값비싼 보석이지.”
왕자는 목에 걸린 왕실의 보물인 펜던트를 가리켜 보였다.
“네?”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 원래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었지.
왕자는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닫았다.
“이번엔,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아.”
혼잣말과도 같은 작은 소리만이, 말이 향해야 할 주인을 잃은 채 섬뜩한 핏빛의 하늘 위로 허망하게 맴돌다 흩어졌다.
아직 서쪽으로 채 기울지 못한 저녁의 태양에, 왕자가 옷 밖으로 꺼낸 왕실의 보석이 반짝반짝 빛나며 살아남은 자들의 지친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반짝임은 여인의 가늘게 뜬 눈처럼, 혹은 먹구름에 가려져 있던 이지적인 초승달처럼, 교만한 은빛을 띠고 피투성이 지옥 위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