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가만있자.
그러니까 이놈의 이름이... 케일이었나, 홀덴이었나. 뭔가 과일 이름이랑 비슷했던 것도 같은데.
안 그래도 간밤에 악몽을 꾼 탓에 잠을 설쳐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데, 아침부터 다짜고짜 짜증나는 목소리로 쨍알쨍알 대는 놈.
“뭔가 알아낸 게 있다면 말 좀 해봐.”
“그러니까 뭘 말이야? 홀베인?”
“누구더러 젖소라는 거야!”
쓰읍. 아닌가 보군.
긴은 미간을 좁히고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뭔 놈의 사내자식이 이렇게 신경질적이래. 월경 중인 여편네처럼 아침부터 바락바락 소리나 지르고.
“젖소든 수퇘지든 아무렴 어때.”
“내 이름은 헤이즐리다!”
“아아, 그래. 개암나무 군.”
“누구 멋대로 이름을 바꾸는 거야!”
“아! 거 참 되게 시끄럽네! 그러니까 아침부터 내 방으로 쳐들어와서 이 긴 님의 기분을 엿같이 만든 이유가 뭐냐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또 몰라, 시꺼먼 사내자식이 아침 댓바람부터 말야. 재수 없게.”
벼락 맞은 노인네마냥 끊임없이 구시렁대며 긴은 정체 모를 허연 덩어리가 둥둥 떠 있는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젠장. 오늘 아침은 메이, 저 녀석이 했구만.
“방에서 얘기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침부터 땀 냄새 풀풀 풍기는 사내자식이랑 좁아터진 방안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진 않아, 난.”
“바람둥이 자식.”
개암나무 군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자기 몫의 수프를 떠먹다가 아예 똥 씹은 얼굴이 되어 눈을 부릅떴다.
긴이나 헤이즐리, 두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여자와 아이에게는 약한 족속으로서, 아무리 이 여관 주인집 딸내미가 가끔 인간이 먹지 못할 가공할 음식을 만들어낸다 해도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그저 조용히 스푼을 내려놓을 뿐.
얼마 전 마을에 온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한눈에 반해 버린 사춘기 소녀가, 사랑하는 그이를 떠올리며 수프 냄비에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할 재료를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다.
아아... 사내라는 불쌍한 족속이여.
“늘 느끼는 거지만, 저 녀석은 어떻게 이런 엄청난 걸 만들어낼 수 있는 거지?”
개암나무 군, 헤이즐리는 냄새조차도 야리꾸리한 수프를 한쪽에 치워두고는 텁텁한 빵을 우물거렸다.
“이것도 일종의 재능이지 싶어.”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짓이 먹는 걸 남기는 것,이라고 배운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 가족 5남 3녀의 막내아들로 자란 긴은 아예 코를 막고 수프를 물처럼 후룩후룩 삼켰다.
“어제 저녁, 너와 그 녀석이 같이 있는 걸 봤다.”
“그 녀석이라니? 건너편 여관의 예쁘장한 유부녀가 아니라?”
헤이즐리가 진짜 살기등등한 눈으로 흘겨보는 바람에, 긴은 그저 조용히 입 닥치고 수프의 야릇한 뒷맛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기 위해 물을 들이켜야 했다.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배는 부르다.
“그 계집애 같은 자식 말이다.”
“아아, 토오르?”
“벌써 이름까지 알 정도로 친해진 게냐? 동료인 나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던 놈이.”
“지금 그 덩치로 질투하는 거냐? 너 같은 놈의 사랑은 줘도 안 받아.”
쾅―! 테이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녀석이 먹다 남긴 수프가 반쯤 쏟아졌다.
거 참, 성질도 더럽긴.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서, 뭘 알고 싶은 건데?”
“그 녀석에게 알아낸 게 있다면 말해.”
“지금 그 말 무지 기분 나쁜데?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냐?”
“명령이 아니란 건, 말투만 들어도 알 텐데?”
그랬지. 자존심 세고, 그만큼 허풍도 센 개암나무 군. 어린애처럼 귀여운 토오르 군의 친구인 예르네이에게 된통 깨지고 매일 밤 이를 부득부득 갈며 밤잠 못 이루고 있는 불쌍한 친구.
남한테 절대 고개 숙여 부탁할 만한 성격이 아니지, 네놈은.
“지금 네놈이 벌거벗고 내 앞에서 아양을 떤다 해도, 가르쳐줄 건 아무것도 없어.”
“정말 그렇게 나올 거야?”
“하지만 진짜야. 난 토오르와 그냥 얘기를 나눴을 뿐이야. 내가 무슨 심문관도 아니고, 녀석한테 뭔가를 알아내야 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네놈도 그래. 같은 배를 탄 동료를 무슨 죄인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말투가 뭐 그러냐?”
“같은 배를 탄 동료? 누가? 그 녀석들이?”
긴은 노골적인 적의를 담은 헤이즐리의 어투에,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어지간히도 쌓인 게 많나 보다. 눈앞에 토오르의 친구인 그 사내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다.
“긴, 너도 알 텐데? 그 녀석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확실히 우리들과는 분위기가 다르지.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시치미 떼지 마. 너도 본 적 있을 텐데.”
“누구 말이야?”
“네프 왕자.”
이런이런. 순간 얼굴 근육이 경직돼 버렸다. 지금까지 그럭저럭, 전쟁터에 가기도 전에 탈영해서 왕자의 옷자락도 본 적 없다고 시치미를 뗐지만.
하지만 어쩌라고.
그 남자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곧추서는데.
“그래. 아주 멀리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어. 그런데 왕자가 뭘?”
“어딘가 닮았어. 왕자와 그 남자. 외모가 닮았다는 게 아니라,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살기, 그런 게......”
조금 놀랐다.
좋지 않은 느낌에 대한 반응은 동물이라면 누구에게나 같은 색을 띠고 전달되는 것인가.
헤이즐리는 빵 부스러기를 테이블 위에 잔뜩 흘리면서 자신의 얘기에 열중해 있었다.
“처음 그 남자를 봤을 때 느꼈던 위화감은 그거였어. 그 남자는 뭐랄까, 불길해. 기분이 나쁘다고.”
그런 사람이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불행을 몰고 오는 그런 엿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이.
불길해 보인다는 건 인정한다. 괜히 이쪽에서 먼저 친하게 접근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 그런 사내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분명 그 남자와 네프 왕자는 닮았다.
헤이즐리의 말대로 손을 뻗는 것만으로 상처가 날 정도로 날이 잘 선 살기나, 뭐 그런 것들은 확실히.
하지만 헤이즐리, 네 녀석도 왕자를 봤다면 알 텐데.
왕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였는지. 지저분한 사내들 속에서 그가 얼마나 눈에 띄는 미인이었는지.
투명한 피부와 보석처럼 빛나던 자수정빛 눈동자, 길게 늘어뜨린 은색의 머리카락. 그런 것들이 얼마나 사내들을 황홀하게 했는지 말이다.
위험한 만큼 왕자는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길들이지 못할 맹금류가 그렇듯, 깎아지른 절벽 아래 피어 있는 고원의 꽃이 그러하듯.
아름답기에 무서운 것이다.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던 무표정한 왕자의 얼굴, 적의 피를 뒤집어쓴 참혹한 얼굴까지도 그렇게 아름다웠기에 그들은 이를 다각다각 부딪칠 정도로 왕자라는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악의 산물.
라자르 왕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상상도 못 할 광기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강인함, 그런 것들을 모두 지닌 그는 악마.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렵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의 그 야릇한 이중성은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확실히... 예뻤지.”
“예쁜 건 왕자의 겉모습뿐이야.”
“왕자가 아니라.”
“......설마 그 남자?”
헤이즐리의 얼굴이 불쌍하게도 구겨진 종이마냥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드디어 미쳤군! 긴!”
“너도 그랬잖냐. 그 남자와 왕자는 어딘가 닮았다고. 그게 무시무시한 살기나, 뭐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하냐?”
말조차 걸기 머뭇거려질 정도로 지독히도 음울한 분위기를 지닌 남자. 하지만 그 역시도 남자든 여자든, 모두의 눈을 잡아끈다.
“왕자처럼 환장할 정도로 예쁘고 화사한 건 아니지만 어딘가 묘하게 매력 있지 않냐고.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는 거지.”
개암나무 군이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 정확히는 두 뺨이 발갛게 물든다. 얼굴 표정과 발그스름한 양볼의 조화가 기가 막힐 정도로 언밸런스해서 긴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참 이상하지? 상대는 우리만 한 덩치를 한 시꺼먼 사내자식인데, 왜 그런 사내자식을 보고서 가슴이 벌렁벌렁거리는 걸까?”
“누... 누가......!”
귀까지 시뻘겋게 물들이고 그런 말을 해봤자 별 신빙성은 없어 보여.
긴의 얼굴에 개구쟁이 소년 같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린다.
더 이상 떠들어봤자 이 남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헤이즐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어젯밤, 모두 모여 앉아 얘기해 봤어.”
“네 녀석들의 골 빈 머리를 맞댄 결과나 한번 들어보자.”
“아무래도 그 녀석들은 우리들 같은 탈영병은 아닌 것 같다라는 결론이 났다. 그리고......”
“그리고?”
“혹시 네프 왕자, 그 빌어먹을 왕실 놈이 보낸 첩자가 아닐까 하는......”
“푸캬하하핫―!”
예상치도 못했던 긴의 박장대소에, 헤이즐리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긴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웃어댔다.
자신이 비웃음당하고 있다는 생각보다,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건가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푸하학! 뭐? 누가 뭘 보내? 왕자가 첩자를? 역시 그 텅텅 빈 머리들을 맞대봤자지! 하하하!”
긴은 손가락으로 눈가에 비어져 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숨을 헐떡였다.
“이... 이... 빌어먹을 자식!”
그제야 그의 발작적인 웃음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는 걸 깨달은 헤이즐리는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면서도 그는 여전히 헐떡이며 웃는다.
“이 자식! 죽여버리겠어!”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헤이즐리는 무방비상태로 바닥에 엎어진 긴에게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쌩쌩 내뿜으며 발길질을 퍼부었다.
“첩자... 히익... 첩자라니... 쿠크크......”
욕설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해대는 자와, 맞으면서도 몸을 떨며 웃는 자.
두 사람의 기묘한 연극은 뒤늦게 아침을 먹으러 온 동료들에 의해 커튼콜을 고했지만, 그 배우 중 한 명은 여기저기 멍들고 터진 얼굴을 한 채 구석의 테이블에서 꽤 오랫동안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터뜨리며 같은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골 빈 자식들, 첩자라니......!”
“이봐, 긴.”
개암나무 군을 진정시킨 뒤, 놈들의 우두머리가 가까이 다가와 주름투성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아직 40대라고 하는데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가. 엄청 삭아 보이는구만.
“자네는 왕자를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말이야.”
중년 사내의 그 말에, 긴은 코웃음을 쳤다.
겪어보지 않았다고? 이래봬도 난 그 왕자님의 호위 기사 중 하나였다, 이거야!
“자네가 우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어.”
이번에도 긴은 픽, 실소를 흘렸다.
“어쨌든 우리에게 협조해 줘. 우린 그들을 마을 밖으로 쫓아낼 생각이야.”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이 마을 사람들도 이방인인 우릴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는데.”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우린 살기 위해 그곳을 빠져나온 거니까.”
“웃기는군. 만약 그들이 저 바보 같은 놈 말대로 왕자가 보낸 첩자라면 어쩔래? 추방해 봤자 귀신처럼 쫓아올 텐데.”
“그땐 죽여버리는 수밖에.”
하......!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그 순간 나타난 그의 존재는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와도 같았다.
정말 그랬다.
열려진 문틈으로 아침부터 이글대는 태양 빛이 새어 들어오더니, 황금빛 태양보다 더 찬란한 천사가 그 아름다운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어이, 긴!”
별로 아름답지는 않은 말투였지만.
“오오! 토오르! 아침부터 웬일인가~ 이 친구야~!”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은 식당의 분위기를 은근히 즐기며, 긴은 과장되게 팔을 붕붕 흔들며 소년 같은 체구의 사내에게 달려갔다.
“놀고 있네.”
이 친구의 단순명료하다 못해 유쾌하기까지 한 언어구사력은 매번 레퍼토리를 달리해 색다른 재미를 준다.
“그래도 녀석들은 나름대로 고심한 모양이야.”
자못 심각한 얼굴로 이들을 마을에서 쫓아내겠다느니, 죽여버리겠다느니 따위의 결론을 도출한 사내들의 고심의 흔적을, 토오르는 단 한마디로 요약해 말한다.
“멀쩡한 밥 처먹고, 아주 주접을 떠는군그래.”
그리고 그의 걸출한 입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마디를 더 내뱉는다.
“바닥에 떨어진 개똥보다도 못한 놈들.”
푸핫!
긴은 참다못해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토오르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눈치다.
“우리들이 첩자라고? 웃기는군.”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그의 앳된 얼굴은 가면 갈수록 험악해졌다.
“아무래도 켕기는 게 많은 놈들이잖아. 그러니 큰불이 될 만한 불씨는 미리미리 꺼두자는 거겠지.”
“누가 불씨라는 거야!”
드디어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는지, 그는 죄 없는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렸다.
저 가는 팔목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장정 팔뚝만 한 두께의 나뭇가지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뚝뚝 잘도 부러진다.
“그런 더러운 놈들의 개라니......”
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는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너희들이 페르티잔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
토오르의 등 뒤에서 그렇게 말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거들먹거리며 친구,라며 농담 따먹기나 해대는 자신도 그 더러운 족속 중 하나일 테니까.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 몸 속에 흐르는 페르티잔의 피는 4분의 1도 안 되는데 말이야.
“그나저나 어딜 가는 거야?”
“납골당으로 쓰이는 호수.”
“거... 거긴 뭐 하러!”
“거긴 조용하니까.”
뭐, 조용하기는 하지.
물에 들어가면 머리 풀어헤친 물귀신이 발목을 잡아당길 것 같은 음침한 분위기가 좀 그렇긴 해도.
“이젠 어쩔 거냐?”
“뭘?”
“놈들이 너희들을 마을 밖으로 쫓아내거나 죽여버린다잖냐.”
토오르는 대답 대신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도 않아. 누가 누굴 쫓아낸다는 건지.”
“하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전에 너희들이 먼저 마을 밖으로 떠나는 게 좋을 거 같아. 어차피 너희들은 우리들과 달라서 꼭 사막을 넘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알고 있었군.”
“용병은 아무나 되는 줄 아냐?”
“그런데 어떻게 너 같은 놈이 차기 국왕이 될 왕자를 보필할 수 있었던 거지?”
“이래봬도 꽤 실력이 좋아서.”
“하지만 왕자에게서 도망치고 말았지. 미친 왕자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이 친구도 아침부터 기분이 영 별로인 것 같군.
“그래서? 알고 싶은 게 뭐야?”
“뭐?”
“뭔가 알고 싶은 게 있으니까 붕어 똥마냥 졸졸 따라온 거 아냐. 그냥 얘기나 나누자고 귀하신 몸께서 나 같은 놈을 찾아왔겠어?”
토오르는 갑자기 등을 돌려 긴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까지. 더 이상은 못 가.”
“설마 애들 영역 싸움이라도 하려는 거?”
“어제, 넌 예르네이와 페르티잔의 왕자가 어딘가 닮았다고 했었지?”
“헤에~ 그 친구 이름이 예르네이였냐?”
“묻는 말에나 대답해.”
“뭐, 그랬지.”
“자세히 말해 봐.”
“그러니까 뭘?”
“왕자에 대한 얘기.”
“그나저나 꼭 그 얘길 이런 땡볕 아래에서 들어야겠냐? 호숫가에 가면 나무 그늘이 있잖아.”
“여기서 해. 멋대로 날 따라온 건 당신이니까.”
필사적으로 가로막아서는 저 폼을 봐선, 분명 호숫가에 뭔가가 있는 거다.
또 모르지. 동네 아낙네들이 낯선 사내들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와서 목욕을 하는지도.
그런 좋은 구경거리를 이 긴 님이 놓칠 수야 없지!
“아앗!”
빠른 거 하나만큼은 남부러울 거 없다 이거야.
긴은 눈 깜짝할 새에 날렵하게 몸을 틀어 토오르를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늦게 토오르가 눈을 부릅뜨고 쫓아왔지만 이미 긴은 언덕 위까지 달음질쳐 올라간 상태였다.
하지만 토오르 역시 만만치 않게 재빠르다.
“이 자식!”
핏발 선 눈으로 겨우 놓친 미꾸라지를 따라잡는 데 성공한 토오르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전력을 다해 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너무 흥분한 탓에 바로 아래에 언덕의 내리막이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일까.
“우아아!”
두 사람 분의 비명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두 명의 사내는 사이좋게 한데 뒤엉켜 언덕을 굴렀다.
하지만 가장 먼저 눈앞에 보인 것은, 늘씬한 미녀의 쫙 빠진 다리가 아닌 끝이 약간 둥글게 마모된 칼끝.
게다가 그것은 긴이 조금만 움직여도 사정없이 찌를 기세로 겨누어져 있었다......
“이 녀석은 뭐지, 토오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여성의 가늘고 우아한 목소리가 아닌 굵고 둔탁한 남자의 것. 눈앞에 펼쳐진 것이 아름다운 여인들의 목욕 장면이 아니라 무례하게 칼끝을 겨눈 남자의 벗은 몸.
“뭐긴 뭐야. 남자가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려던 변태지.”
토오르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탈탈 털며 일어서 긴을 흘겨보았다.
“뭘, 변태씩이나.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바람둥이라고 해줘.”
긴은 어색하게 식은땀을 죽죽 쏟으며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적은 아니군.”
정나미 떨어지는 무뚝뚝한 말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달랑달랑 춤을 추고 있던 칼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예르네이라고 했던가. 꽤나 고풍스런 이름을 한 사내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몸 위에 옷을 하나씩 꿰어 입었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구만. 우리 셋이서 사이좋게 수영이나 할까?”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려 딴에는 재롱을 피워본 것이건만. 저 쳐다보는 시선 좀 보라지.
“그럼 얘기나 할까, 친구? 아까 자네가 질문했던 왕자에 대한 얘기 말인데.”
그러자 토오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너 이 자식! 죽여버린다!
그의 커다랗게 확대된 동공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예르네이라는 사내의 얼굴도 심상치 않다. 아직 옷이 채 마르지 않았는지 상반신은 벗은 채로 늘 쓰고 다니던 두건을 뒤집어쓰던 그는 갑자기 엄청난 얼굴로 긴을 쳐다보았다.
어라라. 나 뭔가 잘못한 건가?
“왜 그래? 알고 싶어했잖아? 왕자에 대해서.”
토오르를 보며 동정을 구해 봐도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지기만 할 뿐. 토오르의 저 굳어진 얼굴은 그래도 좀 낫다.
세상에. 온몸에서 풍기는 저 엄청난 살기라니.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마을 사람들의 유령이 그의 머리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다.
얼음처럼 쨍쨍하게 얼어붙은 푸른 벽. 날카롭게 온몸을 파고드는 명백한 살의. 그것에 무색할 정도로 붉게 타오르고 있는 금수의 눈동자.
“너......”
그냥 친근하게 말이나 걸기 위해 운을 띄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푸른 벽에 균열이 생기고, 살기를 내뿜는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려 할 때, 긴은 한심하게도 흠칫 몸을 떨며 뒷걸음질쳤다.
근데 말이야.
어째서 꼭 이런 상황에 처하면, 뒤에 돌덩이가 콱 박혀 있거나 잡초가 아무렇게나 뒤엉켜 덫을 만들어 사람을 물 먹이는 걸까?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끝에 채인 뭔가에 의해 말 그대로 엎어져버리고 말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띠까지 느슨하게 풀어져 허리춤에 매어놨던 돈이며 칼, 그런 것들이 풀밭 위에 흩어졌다.
사내는 하나만 내놓은 눈을 가늘게 뜨고, 풀밭 위에 나뒹구는 자신의 소지품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너 이 자식!”
그리고 어찌할 새도 없이, 긴은 성이 잔뜩 난 들짐승에게 멱살을 움켜잡힌 채 이리저리 휘둘려야만 했다.
“우... 와악! 대... 대체 뭐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거... 이건 대체 어디서 난 거지!”
“대체 뭘!”
예르네이가 들어올린 것은 칼이었다.
은색의, 세밀하게 세공된 단검.
그놈의 왕자라는 족속이 공주님 같은 얼굴을 해서 관심이 가긴 했지. 뭐, 바로 옆에 반짝반짝 빛나는 공주님이 함께이니까 별로 힘든 출정이 될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놈의 왕자라는 게 미쳐도 단단히 미쳤더라고.
이도저도 다 지겨워지기도 했고, 그 미친 왕자님이 좀 무섭기도 해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결심했는데 말이야.
솔직히... 일개 용병이 돈이 어디 있겠어.
그래서 왕자가 자는 사이에, 뭔가 돈 될 만한 걸 쓱싹 훔쳐나왔지.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제일 비싸 보이는 단검 하나밖에는 안 훔쳤다고!
“이걸 어떻게 네 녀석이 가지고 있는 거지! 대체 어디서 난 거야!”
“모... 몰라! 길 가다가 주웠어!”
역시...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줄 알았다.
금세 눈앞에 날이 잘 선 칼끝이 아른거렸고, 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사내의 암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젠장! 그래! 훔쳤다! 그 왕자한테서 훔쳤다고! 그런데 주인도 아닌 당신이 왜 화를 내는 건데! 엉?”
“이것은 내 것이다.”
“엥―?”
이 남자가 더위를 먹었나.
아님, 저 붕대를 친친 감아놓은 눈의 상처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건가?
“이것은 원래 내 물건이었다.”
“......”
본시, 저런 타입의 사내는 거짓말을 못 하는 법이다.
긴은 눈을 깜빡이며 한참 동안, 눈앞에 놓인 단아한 남자의 얼굴과 그의 손에 들린 은색의 단검을 번갈아 쳐다보아야 했다.
그러니까 왕자에게서 훔쳐온 이 단검을, 이 정신 나간 놈이 자신의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원래 자신의 소유였다고......?
설마... 겠지만 말이지.
긴은 빠르게 사내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두건을 벗기고 물에 젖은 붕대를 찢듯이 치켜올렸다.
드러난 것은 햇빛에 반사된 붉은 머리카락과, 보고 있기가 안쓰러울 정도의 엄청난 상처.
참혹하게 뻥 뚫린 동공 안.
전쟁터에선 이보다 더 심한 상처를 입은 녀석들을 수없이 봐왔다. 하지만 동공이 없는 뻥 뚫린 구멍을 보는 긴의 얼굴은 시퍼렇게 변색됐다.
“어... 어라라......”
예르네이의 손은 금세 긴의 팔목을 움켜잡았고, 팔목의 고통보다 더한 충격에 그는 넋을 잃고 짧은 단음만을 반복해 뇌까렸다.
이 돌대가리를, 맷돌처럼 굴려 생각이란 걸 해보자.
네프 왕자.
그 환장할 정도로 예쁘지만, 완전히 미칠 대로 미친 우리들의 왕자님께선 묘한 취미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가끔씩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고 앵두빛 입술로 쪼옥 입을 맞추는 버릇이었다.
-애인이 준 선물인가 보지.
-어떤 골 빈 여자가 저딴 미친놈을 좋아해?
사내들은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떠들었다. 하지만 긴은 호기심이 왕성한, 죽어도 곱게 못 죽을 그런 사내였다.
왕자 몰래 곁으로 다가가자, 왕자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예의 그것을 꺼내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긴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여인의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도, 세공이 잘된 귀고리도, 빗도 아닌 신체의 일부분.
작은 유리병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던, 누군가의 안구......
“커... 커커걱!”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긴은 기이한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두 사람을 향해, 정확히는 한쪽 눈이 없는 불쌍한 청년을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어이 어이없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다... 당신... 네프 왕자의 노예......?”
예르네이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맞는가 보다. 그러니까, 저런 타입의 사내는 거짓말을 못 한다 이거다.
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은 있다. 이 나라의 썩어빠진 귀족들이 평범한 놀이에 질려 자기 소유 노예들의 몸을 산 채로 절단하며 즐긴다는 얘기.
끝까지 죽지 않게, 적당한 치료를 해주는 것이 포인트다.
처음엔 손가락, 팔, 다리. 몸뚱이만 남겨놓은 채 무슨 장식물이라도 되는 양 새장 안에 가두고, 서로 누가 더 예술작품처럼 노예의 몸을 난자했느냐를 자랑한다던 그런 무시무시한 얘기.
‘미친 변태 왕자!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그딴 짓을 하나 했더니, 왕자, 당신이었냐―!’
우선 첫 번째 나온 외침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터져나온 절규를 마지막으로, 긴은 도망치듯 언덕을 달음질쳐 올라갔다.
‘아비나 아들이나 하나같이 왜 다 그 모양이야! 그딴 변태 새끼들이 왕이랍시고 앉아 있으니,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거 아니냐고!’
젠장, 제기랄! 역시 점쟁이 할멈 말대로 난 지지리 복도 없는 놈인가 봐.
어느 날 갑자기 내린 폭우에 살던 집이 무너져 내려, 어린시절 먹고살기 위해 영주댁 일꾼으로 팔려 가질 않았나, 처음으로 사랑했던 성의 하녀는 싸구려 버터를 처바른 듯한 영주의 아들에게 홀라당 잡아먹혀서는, 덜컥 임신을 하질 않나.
할멈이 땅 파먹고 사는 일은 네놈 적성에 안 맞아,라길래 용병에 지원했더니 다행스럽게도 싸움에 재능이 있었는지 꽤 유명해졌는데, 좀 먹고 살겠다 싶더니 전쟁이 터지질 않나!
제기랄―!
전쟁이 터진 것까지는 좋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면 꽤 많은 포상금을 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호위를 맡았던 그 왕자란 놈이 완전 미친놈이라서, 겨우 목숨만 건지고 튀고 말았지.
이젠 적성에 안 맞아도 전쟁 없는 평화로운 마을에 정착해서 땅 파먹는 농부나 되려고 했더니, 어쭈! 이젠 그 또라이 왕자의 심심풀이 노리개용 노예를 만나고 말다니!
재수가 없을래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보면 모르냐? 짐 싼다.”
“에에? 왜요, 갑자기?”
“난 당장 여길 뜬다. 여긴 도통 재수가 없어.”
“사막에는 지금쯤 붉은 폭풍이 한창일 텐데요?”
“차라리 사막에서 폐 속까지 모래 먼지 가득 쌓여 뒈지는 게 낫지! 그 미친놈한테 산 채로 사지를 절단당하고 싶진 않다고!”
메이에게 지금까지의 방값이라며 동전 몇 개를 던져준 후, 긴은 사막을 건너기 위해 그동안 비축해 두었던 물품들이 든 가죽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빠르게 여관방을 나섰다.
“어딜 가려는 건가?”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개암나무 군, 아니, 헤이즐리였다.
“입 아프게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귓구녕이 막히지 않았다면 다 들었을 거 아냐.”
“지금 사막을 건너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란 걸 알 텐데?”
“어딜 가든 여기보단 안전하겠지! 굳이 멘스터로 가지 않아도 해안 국가로 가서 노예 상인으로 전업하든가, 도둑이 되든가 어떻게든 먹고살 수는 있어!”
“어째서 그런 험한 방향으로 돌아가려는 거지? 조금만 기다리면 사막을 넘어서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을 텐데.”
“바로 앞에는 굶주린 들짐승, 바로 뒤에는 깎아지른 절벽. 무기도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넌 어떻게 할래? 산 채로 짐승에게 뜯어 먹히는 게 낫겠냐? 아니면 차라리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편하게 죽는 게 낫겠냐?”
개암나무 군이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코웃음을 쳤다.
“도망치는 거냐?”
“그래, 도망친다!”
긴은 헤이즐리의 몸을 밀쳐내고는 도망치듯 여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우리도 저 녀석을 따라 어디론가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긴의 뒷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사내들 중 누군가 입을 열자 헤이즐리는 작게 소리를 내 사내의 의견을 단번에 묵살했다.
“우리가 왜?”
“하지만 긴, 저 녀석은 동물적인 감이 좋은 녀석이라서.”
큰 폭풍이 오기 전 동물들은 불안하게 서성이며 곧 오게 될 재앙을 예고한다.
갑자기 짐을 챙겨들고 뭔가에 쫓기듯 도망친 긴의 모습은, 사내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긴 헤이즐리 말이 맞아. 어차피 지금 마을 밖으로 나가봤자 갈 곳 없이 헤매게 돼. 그냥 어젯밤 의논했던 것처럼 그 녀석들을 마을 밖으로 내쫓으면 되는 거야.”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사내들 사이에서, 영문을 모르는 여자애 하나만이 더러워진 앞치마 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그들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자라면 가슴이 납작한 말라깽이도 마다 않는 바람둥이 긴이 던져준 동전은 그동안의 방 값보다 많은 액수였다.
그 돈을 부모님 몰래 넣어두었다가 폭풍이 끝나고 사막에서 상인이 오면 드레스나 한 벌 사 입을까. 하지만 그때가 되면 건너편 여관의 그 남자도 여길 떠날 텐데, 따위의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다운 잡상들 말이다.
그리고 소녀에게 피 같은 돈 몇 푼을 더 던져준 바람둥이 긴은 마을 어귀에서 돌처럼 굳은 채 또 한 번 경악해야만 했다.
“아까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허어억!”
그건 토오르였다. 건물의 그늘 아래 숨어 있던 그는 긴이 나타나자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긴은 주책 맞게 소리를 빽 지르며 두 팔을 허우적거렸고, 당황한 그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토오르는 그를 몰아붙였다.
“말해. 아까 호숫가에서 했던 말, 그게 대체 무슨 의미야?”
“젠장! 몰라! 모른다고! 이제 네놈들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아!”
잠시 잊고 있었다.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한 그가 엄청난 힘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돌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드는 신기와도 같은 장면을 긴에게 보여주었다.
손에 돌을 들고 있길래, 여차하면 저걸로 머리를 후려갈기려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용도였군.
“난 지금, 네놈을 이것처럼 가루로 만들 수도 있어.”
“알고 싶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며 묻자 토오르 역시 노기 띤 눈을 깜빡였다. 긴은 눈을 가늘게 뜨고 토오르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보통 인간이라야 상대해 볼 만도 하지. 그 사람은 완전히 미쳤어. 그러니 살고 싶으면 당장 그 남자 곁에서 떠나라. 그 남자 곁에 붙어 있다간 죽어도 곱게 못 죽어.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다.”
“그 남자?”
“네프 왕자.”
안 그래도 커다란 토오르의 눈이 툭 치면 굴러 떨어질 것처럼 크게 확대되었다.
눈치 빠른 녀석이니까 대충 의미는 파악했겠지.
“그 단검은 내가 왕자한테서 훔친 거야. 그런데 네 친구라는 남자는 그걸 자기 거라고 했잖아. 분명 왕자가 소중하게 품속에 넣어 다니던 물건인데 말이야. 그리고......”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라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왕자가 그 값비싼 왕실의 보석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 하나 더 있었어. 생각날 때마다 왕자는 그걸 꺼내서 입 맞추거나 손으로 쓰다듬는다고. 고향에 놔두고 온 사랑해 마지 않는 여인을 떠올리는 듯한 얼굴로 말이야.”
“그래서? 대체 그게 뭐란 말이야?”
“그게 뭘까?”
“기어이 머리가 부서지고 싶나 보군.”
“자, 힌트. 네 친구는 한쪽 눈이 없다.”
“......설마.”
“그래, 그 설마야. 왕자가 가끔씩 꺼내보곤 했던 건, 분명 누군가의 안구가 든 병이었단 말이지.”
긴은 눈초리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게 예르네이의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물증은 없어. 하지만, 내 별명은 메기 긴이었다.”
토오르가 일그러진 얼굴로 긴을 쳐다보았다.
“내 동물적인 감은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이 말씀이야.”
“미친......”
눈치 빠른 긴은, 그 욕설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닌 정신 나간 왕자님에게 향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떠나려는 거야. 원래 미친놈일수록 뭔가에 대한 집착이 강한 법이거든. 그렇게 소중하게 품에 안고 쪽쪽 입 맞추던 걸로만 봐도 보통이 아냐. 왕자가 눈 한쪽을 병에 넣어 품속에 넣어 다닐 만큼 집착했던 노예를 순순히 놔줬을 리는 없을 테고. 분명, 네 친구는 도망친 거야.”
긴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나, 다른 녀석들처럼.”
공주님 같은 예쁘장한 외모의 왕자님을 모두 마음에 들어했었다.
한편으론, 가녀린 몸으로 전쟁터로 끌려가는 왕자의 신세를 딱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밤, 왕자가 호위 기사 하나를 죽였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저녁식사 후 근처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온 일행들이 발견한 것은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체 한 구와 왕자.
창백한 피부 위로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형형하게 눈을 빛내던 야수.
왕자는 죽어 나자빠진 사내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연신 칼을 푹푹 찔러넣고 있었다.
모두들 경악했다. 아무도, 한때 동료였던 시체를 욕보이는 왕자의 행동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피를 뒤집어쓴 왕자의 그 아름다운 얼굴이 웃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인의 그 어떤 이유도 왕자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날이 더워서 미쳐버렸는지도. 어쩌면, 그냥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는지도.
그때부터 사내들은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이었지만 생경한 어떤 위압적인 존재 앞에선 주저 없이 겁에 질린 초식동물이 되었다.
“마...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뭐, 귀족들에게 그런 취미가 있다는 건 새삼 놀라울 일도 아니잖아.”
“그게 아냐. 절대...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토오르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스칸데르를 파멸로 이끈 남자의 아들, 그리고 살아남은 유일한 스칸데르인.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증오와 분노라는 감정 이외의 다른 무엇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적어도, 적어도 예르네이는 그런 것 같았다.
왕자의 이름이 거론되자 온몸에서 분출되던 섬뜩한 살기는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왕자는?
페르티잔의 국왕이 될, 그 미치광이 왕자는?
예르네이의 단검과 그의 한쪽 눈. 그것을 품에 안고 연인을 애무하듯 상냥한 얼굴로 입 맞춘다거나 한다는 그 남자는?
“이봐, 토오르. 괜찮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이다.
이런 우스운 농담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페르티잔의 유일한 왕의 후계자와 스칸데르의 유일한 생존자.
대체 그런 구도가 가당키나 한 건가?
“어이! 토오르! 이봐아!”
긴이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길게 울려 퍼졌다.
토오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긴의 외침 따윈, 지금의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득달같이 여관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텅텅 비어 있었다.
아직 그 수중 납골당이라 불리는 호수에 있는 건가? 황급히 등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예르네이가 계단을 오르는 게 보였다.
“예르네이!”
이름을 부르는 긴박한 외침에 예르네이의 얼굴이 굳었다.
긴 녀석이 풀어놓은 탓에 아무렇게나 둘둘 감긴 붕대 때문인지 그가 왠지 작아 보였다.
그는 휘적휘적 긴 팔을 건들거리며 여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방 안에 들어선 토오르는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그 녀석에게 들었나?”
머리 위에서 울리는 굵은 목소리에, 토오르는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거, 진짜야?”
“뭐가 말이지?”
“당신, 진짜 네프 왕자의 노예였어?”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어찌 됐든 그 왕자란 녀석과는 관계가 있는 거지?”
그는 부정할 생각도 없이,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당신 눈을 그렇게 만든 거, 왕자가 한 짓이야? 그래서 그 미치광이 왕자한테서 도망친 거였어?”
이번에도 어색한 침묵. 약간의 거짓말도 일종의 처세술이건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놈은 페르티잔의 차기 왕이잖아. 그리고 당신은 스칸데르야.”
토오르는 어이가 없어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진짜로 미쳤군. 진짜 미쳐도 완전히 미쳤어.”
“노예나,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 뭐야?”
“동료였어. 처음엔. 친절함을 가장하고 다가와서는 어느 순간 검게 변색된 손을 불쑥 내밀더군.”
토오르는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예르네이를 쳐다보았다. 네프 왕자의 얘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었다. 목소리도 딱딱하고 가시가 박혀 있다.
“난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준 누군가를 너무 쉽게 믿어버린 거다.”
결코 약한 소리는 하지 않는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배신당했다. 그는 내 신의를 저버리고 나를 지옥 밑바닥으로 추락시켰지. 이상하더군. 더 이상 떨어질 곳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래, 그랬겠지. 대충 이해는 돼. 아성초로 머리카락을 염색하면, 누구도 당신이 스칸데르인이란 걸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네프 왕자한테 당신은 단순한 흥미거리였을 거야. 어쩌면 부친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부친이 멸망시킨 종족의 유일한 생존자를 자신의 곁에 둠으로써 부친에게 대항하고 싶었는지도.”
유창하게 흐르는 토오르의 말에, 예르네이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멍청하게 끔뻑였다.
아아...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그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토오르는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졌어.”
“뭐가 말이지?”
“네프 왕자란 그놈, 죽을 때까지 당신을 쫓아올걸?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스칸데르인이니... 쫓아오겠지. 나라도 그런 진귀한 보석이라면 다시 손에 넣고 싶겠다.”
토오르는 부산하게 방 안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는 낡은 가죽 주머니에 그동안 사 모은 약품과 식료품을 주섬주섬 챙겨넣었다.
“뭐 해? 당장 떠날 준비 하지 않고.”
“넌 여기 남아 있어라.”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토오르는 픽, 콧등으로 예르네이의 말을 흘려 넘기며 물건을 챙겨넣은 가죽 주머니를 던졌다.
“잔말 말고 짐이나 싸!”
토오르에게서 가죽 주머니를 받아든 예르네이는 한참 동안 다람쥐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곧, 그 커다란 몸을 꿈틀꿈틀 움직여 주머니를 채우기 시작했다.
“난 여러모로 꽤 쓸모가 있을 거야. 무엇보다 난 사람 찾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그 레이루라는 여자애를 찾는 일에, 나만한 적임자는 없을걸?”
어린애같이 젖살이 오른 토오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레이루, 그 아이도 가끔씩 저렇게 믿음직스러워 보였던 적이 있었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작은 손으로 자신의 손을 움켜잡은 채,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예르네이를 지킬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아이.
하지만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나.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킨 그 가련한 아이는......
한평생, 뭔가에 쫓기며 살아온 인생이다. 솔직히 이제, 더는 지겹다. 완전히 지쳐버렸다.
누군가를 지켜내기에 이 몸은 너무 많이 쇠약해졌다.
땀이 배어나온 예르네이의 손에서 토오르가 사다 놓은 약품통이 떨어졌다. 마룻바닥 위를 구르던 그것은 곧 먼지투성이의 거친 발에 의해 움직임이 멈췄다.
“그렇게 빵빵하게 짐을 싸면 안 되지. 우리가 경치 좋은 휴양지에 놀러라도 가는 거라고 생각해?”
긴이었다.
그는 유들유들하게 웃는 얼굴로 예르네이의 손에서 가죽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예르네이가 아무 생각 없이 우겨넣은 물품들을 하나씩 잡아빼기 시작했다.
“왜 다시 온 거야? 그대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혼자 여행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토오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긴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환장하게 아름다운 왕자님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게다가 나이가 드니 외로움이 사무쳐서 말이야.”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이는 긴에게 토오르는 코웃음과 함께 놀고 있군,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 * *
진심인가? 설마 너무 지친 탓에 헛소리를 하는 거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히이토와의 끈질긴 싸움에서 승리한 기적과도 같았던 그날,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말을 돌렸다.
군인들은 모두 왕자의 그런 행동에 어리둥절한 상태였고 그 누구도 그의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함께 전투를 치르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샌님 왕자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사내들 사이에서 범접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악의 존재로 변해 버린 것이다.
“대체 무얼 찾으러 가시겠다는 겁니까?”
황급히 주인을 잃은 말을 붙잡아 올라타고, 사내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고삐를 움켜잡고 말을 달렸다.
치열한 전투로 극도로 지쳐 있을 텐데, 주인이나 저 말이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파워를 자랑하고 있다.
“네프 님! 왕자님―!”
사내의 허망한 외침만이 적막이 내려앉은 들판 위에 울려 퍼졌다.
“대... 대체 뭡니까?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죠?”
보다 못한 누군가가 사내의 곁으로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찾아야 할 게 있다는데.”
“네? 찾다니요? 무엇을요?”
“그게 뭔지 알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지.”
멀어지는 뒷모습조차 고운 왕자님이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운 암청색으로 물들어가고, 곧 시체뿐인 들판 위에는 섬뜩한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와 비명 소리, 서로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들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이곳이었는데.
이제 눈을 가늘게 뜨고 보지 않으면 허공에 흩날리는 왕자의 긴 은발조차 보이질 않는다.
“자네, 이름이 뭔가?”
“게일입니다. 보르그너의 게일입지요.”
“그래. 보르그너의 게일. 넌 지금부터 나 대신 책임지고 저들을 수도로 데려가도록.”
“네?”
“난 특별히 티토 님께 네프 님의 호위를 부탁받았다. 그러니 이대로 왕자를 혼자 보낼 순 없어. 왕자를 무사히 수도로 데려가는 게 내 임무니까.”
“자, 잠깐... 사령관님!”
워낙 알 수 없는 미치광이 같은 왕자라, 왕실에서 보낸 왕자의 호위 기사들은 이제 저 사내 하나밖에 남아 있질 않았다.
이름도 없는 천민 용병의 외침을 애써 무시하고, 사내는 말고삐를 감아쥐었다.
지친 말은 두어 번 푸레질을 하며 주춤하더니 이내 속력을 내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금세 왕자의 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슴푸레한 초저녁의 어둠 속에 왕자의 망토가 어지럽게 흩날리고 페르티잔을 상징하는 붉은 용이 살아 숨쉬는 듯 꿈틀댔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곁으로 다가가 그렇게 말하자, 왕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자수정빛 눈동자를 굴려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그럴 순 없습니다.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왕자님을 지켜드리는 게 제 임무입니다.”
“바보 같은 충성심이군.”
계속 속력을 내 달리던 말은 어느 순간 속력을 늦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그 무렵엔 이미 주위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에 뜬 달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며 두 사람의 앞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여기서 쉬지 않고 반나절 이상을 달리면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히이토의 혼혈이라, 히이토의 군인들은 아마 그 마을을 거점으로 삼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전투는 끝났고, 히이토의 혼혈이라 해도 이방인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라 지낼 만은 할 겁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깨보려고 꺼낸 말이었건만 왕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앞을 향하고만 있다.
“그렇게 급한 일이 아니라면 마을에서 며칠 푹 쉬다 가는 게 어떠신지요.”
“자네는 왕을 뭐라고 생각하나?”
한참만에야 왕자가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어떤 방향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걸까, 이 남자는. 좋은 쪽이라면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온갖 미사여구를 섞어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해야 할 말은 단 하나다.
“대답 여하로, 전 반역자로 몰려 즉시 처형되는 겁니까?”
왕자의 창백한 얼굴 위로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그 얼굴에 미소가 번진 것이다. 비록 그것이 미소라고 하기엔 위화감이 드는, 기분 나쁜 표정이라 하더라도.
“말 한마디로 반역자로 몰렸다면, 유그는 벌써 몇 번이나 처형됐어야 했겠군.”
“유그라면 오시예크 가의 막내아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고 있나, 그 아이를?”
물론이다.
오시예크 같은 대귀족의 자제분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게다가 대대로 군인 집안으로서 오시예크 가의 주인을 섬겨왔던 자신의 가문으로선 더 더욱.
하지만 솔직히 말해 오시예크 가의 막내아들은 피가 잘못 섞인 불량품으로 보였다.
평민과 다를 바 없는 남루한 옷차림에 지저분한 얼굴, 행동이나 말투에 기품이라곤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던 그 무례한 남자.
그 망나니 같은 놈이라면, 충분히 대역죄로 몰릴 만한 엄청난 얘기를 아무렇게나 지껄여댔을 게 분명하다.
그것이 왕의 유일한 후계자인, 왕자 앞에서라도 말이다.
“말씀하신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사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철이 들면서부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응어리진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라자르 왕은, 빌어먹을 미치광이입니다. 이번 전쟁도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벌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미치광이 왕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게 우리의 생각입니다. 모두들 이젠 평화롭고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갑자기 어둠 속에서 칼이 날아와 목을 치는 건 아닐까. 노한 왕자가 길길이 날뛰며 자신을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죽이려 할지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왕이 한 짓 중 가장 미친 짓거리가 뭔지 아나?”
너무 긴장을 하고 있던 터라, 어둠 속에서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사내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왕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 말을 잇는다.
“그건 자신의 핏줄을 남긴 일이지.”
“......”
“언젠가는 자신을 똑 닮은 미치광이가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사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지친 병사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수도로 돌아갈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지만, 그래도 왕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사내는 말고삐를 감아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왕자의 창백한 얼굴이 천천히 사내에게로 향했다.
“왕을 치려는 겁니까?”
“그런 노쇠한 악마에게 이 나라를 더 이상 맡길 수 없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 하지만......”
당신 역시 그 미치광이의 피를 이어받은 악마지 않습니까!
젊고 잔악무도하며 늘 피를 갈구하던, 젊은 시절의 라자르 왕과 다를 게 없다.
또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혈기 넘치는 악마에 의해 이 나라는 다시 한 번 수천, 수만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그 지긋지긋한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차라리 전투 중에, 왕자가 죽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왕의 직계자손이라 하더라도 이번만은 안 됩니다. 결코 왕의 피를 이어받은 그에게 왕좌를 넘겨주어선 안 되오!
커다란 원탁 테이블에 모여 앉아 늙은 장로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회의실 안의 그 누구도 그들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사내는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이미 작은 쿠데타였다.
“너희들은 스스로를 무고하다고 자위하지. 하지만 페르티잔의 피가 섞인 자라면 누구나가 다 살인자다.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고 짓밟은 왕과 다를 바 없어. 그러니 너희들도 그 죗값을 받아야겠지.”
사내는 처음으로 극한의 공포를 경험했다.
자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남자의 뒤를 따라나선 걸까.
라자르 왕이 물러나고 국민과 장로들이 뽑은 새 왕이 왕위에 오르면 그럭저럭 좋은 자리를 꿰찰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비록 부모와도 같은 자의 부탁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페르티잔엔 관심 없어. 하지만 내겐 절대적인 권력과 막강한 힘이 필요해. 왕이라는 직책은 그런 사항을 모두 만족시켜 주더군.”
왕자를 태운, 원래는 눈부시게 새하얀 말이었을 피투성이의 말이 사내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사내는 뒤로 물러서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사로잡혔다. 형형하게 빛나는 왕자의 자수정빛 눈동자에,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얼굴에.
“그리고 내 아버지가 그랬듯, 난 썩은 내를 풍기는 이 나라를 짓밟는다. 아버지의 만행을 팔짱을 끼고 지켜본, 냄새나는 살인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난 새로운 왕국의 지배자가 된다.”
왕자의 제비꽃 색 눈동자가 사내에게 향했다.
사내는 흠칫 몸을 떨었다. 왕자의 두 눈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동반자가 필요하다. 내가, 내 아버지처럼 이성을 잃고 미쳐버리게 됐을 때 내 목숨을 끊어줄 사람이 필요해.”
“......찾고 계시다는 게, 바로 그 사람입니까?”
“찾고 있다는 표현은 옳지 않아. 난 잡으러 가는 거다. 새장 속에서 놓쳐버린 새를.”
왕자는 아주 잠깐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러워진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고독하군.”
음유시인의 노랫가락처럼 낮게 늘어진 왕자의 목소리가 사내의 귓가를 간질였다.
“네프 왕자......”
일부러 왕자라고 호칭했다.
이 어두운 길 위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곤 왕자와 자신 둘뿐.
사내는 허리춤의 칼로 경직된 손을 움직였다.
여전히 왕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상념에 잠긴 상태다. 이때가 기회다.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쉽게 왕자의 목을 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가 허리춤의 칼을 빼내기도 전에 섬뜩한 쇳소리를 내며, 수많은 적들의 피로 더럽혀진 왕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사내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몸을 피했지만 이미 늦었다. 왕자의 검이 사내의 어깨를 스치고, 뒤이어 허공을 날았던 검날이 사내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으아악!”
재빨리 몸을 틀어 목이 날아가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사내는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왕자의 두 눈이 금수의 눈처럼 빛났다.
명백한 살기를 띤 그 눈은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에게 향해 있던 것이었다. 그것이 똑바로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어째서 아군임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이 그의 독한 살기에 몸을 떨었는지, 사내는 아프도록 절감할 수 있었다.
“알고 있었다. 네가 왕실 놈들이 보낸 자객이란 사실을.”
이 사내만이 끝까지 왕자의 곁에 붙어 있었다.
가끔씩 느껴지곤 하는 사내의 살기를, 왕자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다.
“이 더러운 미치광이―!”
드디어 사내가 본색을 드러내고 허리춤의 검을 빼내 달려들었다.
하지만 왕자는 말을 탄 상태였고 사내는 바닥에 떨어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간혹 말에 탄 장수의 목을 베어내는 자도 있지만 불행히도 사내는 그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니진 못했다.
왕자의 두 눈과도 같은, 날카로운 검광이 어둠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이렇다 할 공격 한번 펴보지 못한 채 맥없이 축 늘어졌다.
“허... 어억......”
엄청난 양의 피가 사방으로 치솟고, 그 현란한 핏줄기 속에서 사내는 천천히 바닥 위로 쓰러졌다.
밤이슬을 머금은 초원의 잡초들이 다량의 피를 머금고 몸을 떨었다.
사내의 몸이 풀밭 위로 허망하게 쓰러지고 간헐적으로 꿈틀대던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될 때까지, 사내를 그 지경으로 만든 잔혹한 살인자는 싸늘한 눈으로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성 요세핀의 축복이 함께하길―”
네프는 아직도 뜨거운 피를 쏟아내고 있는 사내의 시체를 향해 그렇게 말해 보이곤 엷게 입술을 말아올렸다.
새로운 제국? 전쟁 없는 평화로운 나라?
그런 것이 오리라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이미 페르티잔이라는 이름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피투성이의 시체들을 밟고, 부패한 그들의 썩은 내를 은근히 즐기며 살아온 것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페르티잔인, 자신들 아닌가.
-이제 더 이상 그런 미치광이 왕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게 우리의 생각입니다. 모두들 이젠, 평화롭고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미치광이 왕에 의해 페르티잔은 대륙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했고, 그 누구도 페르티잔을 함부로 넘보지 못했다. 그들이 악마라 칭하는 왕 덕분에 넓은 대륙과 그럭저럭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공범자다.
페르티잔의 피가 섞인 자라면 누구든지, 라자르 왕과 다를 바 없는 지옥의 악귀다!
전쟁에 출전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
그리고 그 결심은 꽤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길고도 끔찍했던 히이토 전사들과의 전투 끝에,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
마음속으로만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가고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수수방관하던 주제에 평화를 운운하는 위선자들. 그들을 저주할 게 아니라, 모두 쓸어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내 아버지가 스칸데르라는 나라, 이름도 없는 작은 소국에 닥치는 대로 칼부림을 했듯이 난 내 아버지를 치고, 내 종족을 살육한다.
새로운 제국? 전쟁 없는 평화로운 나라?
모두 좋다. 하지만 그것을 함께하는 것은, 최소한 페르티잔의 국민은 아니다.
군인들은 망설임 없이 자신을 악마라 칭했다. 피에 굶주린 인간 백정이라고까지 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몸속에 흐르는 아버지의 피가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만 간다.
점점 더 짙고 깊게, 자신을 좀먹어 들어간다.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광기가 어느 순간 폭발해 버린 것은, 그래......
그를 만났던 그날부터였을 게다.
매끄러운 갈색 피부에 푸석푸석한 붉은 머리카락을 한 남자.
늘 자신에게 향해 있던 분노에 찬 암갈색 눈.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갖고 싶은 것도 없었고,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가슴 한구석에 이빨을 감춘 분노와 광기만을 담아두고,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을 뿐.
시골구석의 이름 없는 몰락한 귀족이라는 신분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별로 이렇다 할 불만은 없었고 그럭저럭 지낼 만도 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으로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단단한 껍질로 감싸져 있던 그것은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깨지고 말았다.
예르네이.
분노, 슬픔, 애잔한 그리움, 그런 것들이 한데 뒤섞인 그 이름.
그 이름을 지닌 사내를 손에 넣기 위해 기꺼이 악마가 되었다.
그가 곁에 있어야만 이 마음속의 응어리가 씻은 듯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라자르의 뒤를 이은, 희대의 살육자가 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예르네이, 그다.
하나뿐인 그 눈에 어떤 감정이 서려 있든지 그 눈이, 그 얼굴이 자신의 등 뒤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된다.
네프는 말고삐를 감아쥐고 사내의 시체를 뒤로했다.
습기를 머금은 여름 공기 속에 뭔가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뒤섞여 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기분 나쁜 살기의 냄새일 것이다.
* * *
“키스는 해봤냐?”
덩어리째 감자를 넣은 수프를 젓고 있던 토오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긴을 흘겨보았다. 저럴 땐 영락없이 새침데기 계집애다.
토오르는 무시했다.
저 자식의 농지거리에 일일이 반응해 줄 필요는 없다.
“하긴 아무리 오줌 질질 싸고 다닐 것 같은 어린애라도 해볼 건 다 해봤겠지.”
누가 오줌 질질 싸고 다닐 것 같은 어린애냐.
감자 수프를 젓던 토오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아, 젠장. 키스하고 싶어라아. 폭신폭신, 말랑말랑한 누님 품에 안겨서 잠들고 싶어어.”
“너 지금 나한테 수작 거는 거냐?”
그러자 긴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니 됐고, 가슴은, 뭐 발육부진의 어린 계집애라고 생각하면 된다지만... 그 아래는 도저히 감당 못 하겠다, 난.”
긴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찌 됐든 긴이란 사내는 여자들에게 확실히 인기가 있을 타입이다. 귓가에 녹아드는 알맞은 쇳소리가 섞인 저음이라든지, 생각보다 꽤 맑게 빛나는 깊은 눈이라든지, 미소가 확실히 매력적이긴 하다. 여자들이라면 누구든 이 남자의 매력에 넋을 잃으리라.
하지만 토오르에게 있어 눈앞에 위치한 긴의 얼굴은 느끼한 바람둥이의 얼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는 게 무척 유감스런 일이었다.
“어디 끝내주게 싱싱한 여자 하나 없나.”
“저기 있잖아.”
토오르가 무성의하게 던진 말에, 긴이 펄쩍 뛰듯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어디!”
토오르가 수프가 묻은 나뭇가지로 가리킨 곳에는 새하얀 털을 가진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척 보니까 암컷이네. 살도 적당히 올랐고 저 정도면 끝내주게 귀엽지 않냐?”
“이봐, 토오르......”
“왜? 키스하고 싶다며?”
“날 그 정도까지 타락시키진 말아줬으면 하는데......”
풀숲에 숨어 있던 토끼가 고 작은 몸을 흠칫 떨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젠 슬슬 멀건 감자 스프도 완성되어 간다.
“차라리 나무를 깎아서 하나 만드는 게 낫지. 내가 만드는 나무 인형 여인은 꽤 사실적이거든. 다 만들면 너도 빌려줄 테니까......”
이번엔 토오르가 던진 돌덩이에 정통으로 맞았다.
긴의 이마를 명중시킨 돌멩이가 자갈 수준이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긴은 벌겋게 부어오른 이마를 붙잡고 엄살을 피워댔고, 토오르는 어디서 미친개가 짖나, 하며 이미 다 익다 못해 감자가 불어터진 스프를 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난 것은, 혼자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긴이 배가 고파졌는지 슬쩍 스프가 든 냄비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울창하게 우거진 수풀이 바스락거리며 소리를 내고 인기척이 느껴졌을 때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뜬 예르네이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이어 들린 울림이 깊은 목소리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어라? 이게 뭐야? 이런 곳에 웬 꼬맹이들이지?”
토오르와 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경직된 얼굴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버티고 선 낯선 존재에 입을 쩌억 벌려야 했다.
엄청나다. 그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정말 엄청난 덩치였다.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인이었다. 제법 체격이 큰 긴조차도 그의 앞에선 코흘리개 어린애 정도로 보였다.
“히... 히이토......”
긴의 입술 사이로 약하게 떨리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래, 히이토다.
게다가 저것은 일반 평민이 아닌 히이토의 군인. 한 명으로도 수십 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전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
“페르티잔의 개들인가?”
“우... 우린 그냥 지나가던 여행자거든요?”
이럴 땐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도와주는 길이다, 이 바보 같은 인간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긴이 용기를 내 말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화가 된 듯했다.
“맞군. 탈영한 페르티잔 녀석들이 꽤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런 데서 그 비겁한 녀석들을 만날 줄이야.”
적에게 비겁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게 긴 같은 탈영병의 신세였다.
히이토의 전사는 천천히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땅바닥이 진동을 한다.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젠장! 좀 힘들지 몰라도, 상대하지 못할 건 아니다. 저 녀석 하나라면 어떻게든......’
긴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허리춤의 칼에 손을 뻗었다. ‘바람둥이 긴’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는 용병들 사이에선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늘 그랬다.
긴의 머리 위로는 늘 불행의 여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으니, 이번에도 예외 없이 여신의 축복은 긴과 함께했다.
나타난 것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거인 족들이.
하나도 아니고 넷이다! 하나로도 겨우겨우 상대할 저 괴물 같은 놈들이 넷!
“뭐지, 이 녀석들은?”
“아무래도 탈영한 페르티잔의 찌꺼기 같습니다.”
긴은 슬쩍 토오르의 앞을 막아섰다. 힘만으로 볼 때 토오르가 오히려 자신보다 우위일지는 모르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 이 녀석은 눈 깜짝할 새에 당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아무래도 가운데 선 저 사내가 놈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그는 복부에 피가 배어나온 천을 감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것일까. 저런 괴물 같은 놈들의 우두머리를, 어떤 간 큰 놈이 상처 입혔다는 거지?
“이 두 녀석뿐인가?”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긴과 토오르를 쳐다보았다.
곰 같은 덩치만큼이나 목소리도 울림이 깊다.
“여자는 없군. 하는 수 없지. 처리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들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저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자신들을 씹어 먹을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은, 제일 처음 두 사람을 발견한 사내인 듯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찢어 죽여주마.”
긴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냈다. 그래봤자 곰 같은 덩치의 사내 앞에선 쇠꼬챙이 하나를 쥔 어린애 정도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저들 역시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 상대하기엔 역부족일지 모르지만 타격은 입힐 수 있다.
“내가 저 녀석을 맡으마. 넌 그 틈을 타서 도망가.”
딴에는 죽음을 결심하고 비장한 어투로 말한 것이건만 곧 등 뒤에서 토오르 특유의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혼자서 쇼를 하는군.”
그게 죽음을 각오하고 네놈을 지켜주려는 친구에 대한 태도냐!
“그래, 친구! 죽어도 같이 죽자. 저승길도 혼자 가면 심심하잖냐.”
“죽긴 누가 죽어! 죽는 건 저 녀석이지, 우리가 아냐.”
하지만 사내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입을 쩌억 벌리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폼이 영락없이 미친 곰, 그 자체다.
저 어마어마한 손에 붙잡히면 사내의 말대로 산 채로 사지가 찢겨 죽을 게 분명하다. 히이토 놈들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사람을 산 채로 비틀어 그 피를 받아 마시고도 충분할 그런 녀석들이니까.
“크윽―!”
아슬아슬하게 긴은 사내의 공격을 피했지만, 토오르는 미처 피하지 못한 모양이다. 무기랄 것도 없이 손에 작은 단검만을 들고 휘두르던 그는 너무도 쉽게 히이토 족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한쪽 팔을 잡힌 채, 그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고통스런 얼굴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보통 사람보다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에게나 통용되는 일이다.
“토오르!”
긴은 토오르를 인형처럼 다루고 있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빠른 발, 정확하게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검을 휘두르는 민첩성.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최고의 용병, 긴의 공격에 사내는 어찌할 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봤자 검날 끝이 옆구리를 살짝 스친 정도다.
“이... 자식......!”
사내는 분노로 이성을 잃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하지만 긴을 씹어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사내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그만둬라.”
“뭡니까!”
“그만둬. 이 녀석들을 처리하는 건 나중이다.”
“네?”
사내의 갑작스런 태도의 돌변에 놀란 것은 그의 동료들뿐만이 아니었다.
긴은 검을 든 채로 어정쩡하게 서서 사내의 행동을 주시했고, 또 다른 히이토 족의 손에 의해 허공에 매달린 토오르는 자신에게 향한 사내의 시선에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사내는 동료에게서 토오르를 낚아채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들어올려서는 허리춤에서 칼을 빼냈다. 그리고 검날을 토오르의 목덜미에 갖다대고 당장이라도 그 가는 목덜미를 꿰뚫을 기세로 소리쳤다.
“숨어만 있지 말고 나오시지! 네 동료의 목이 날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행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풀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인영이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예르네이였다.
사내는 그의 인기척을 눈치 채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리라.
“일행이 하나 더 있었군그래.”
사내의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번졌다.
“무기를 버려. 거기 네놈도. 너희들이 이 녀석을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지.”
토오르는 발버둥쳤다. 자신이 짐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했다.
하나뿐인 예르네이의 눈은 도전적으로 곰 같은 덩치의 적들을 향해 있었지만, 그는 순순히 사내의 말에 따랐다. 허리춤에서 검이 떨어지고 그는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긴 역시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고는 검을 집어 던졌다.
무기를 버리자마자, 그가 상처 입힌 인상 더러운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긴의 몸을 찍어 눌렀다.
“어쩔까요? 이젠 죽여도 됩니까?”
하지만 그들 두목의 관심은 예르네이에게 쏠려 있는 듯했다.
사내는 발버둥치는 토오르를 짐짝처럼 내던지고 천천히 예르네이에게 다가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인 그들이지만 예르네이의 얼굴에는 두려움의 감정 따위는 전혀 내비쳐지지 않았다.
“이건 꽤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군.”
사내는 털로 뒤덮인 커다란 손으로 예르네이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무척 잘생긴 사내였다.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와 깊게 패인 눈 속의 헤이즐넛빛 눈동자가 절묘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 쭉 뻗은 콧날이라든지, 신경질적으로 맞물린 입술이 금욕적인 수도승처럼 보이기도 한다.
“군인은 아니군.”
사내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걸치고는 예르네이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노예도 아니고.”
예르네이는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향해 뻗었지만, 내뻗은 손은 사내에게 너무도 손쉽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내는 예르네이의 팔목을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의 두건을 벗겨냈다. 허공으로 윤기 없는 붉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그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속으로 사내의 커다란 손이 비집고 들어가, 손가락 사이에 잡히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스칸데르인이란 건 꽤 고가의 물건인 데다, 길들이기도 쉽지 않을 테니.”
아아... 토오르의 입가에서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럼 그 녀석이, 녀석들이 말한 스칸데르인이란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머리카락 색이 붉잖아요.”
“머리카락 색이란 건 염색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 하지만......”
사내의 손이 우악스럽게 예르네이의 머리를 짓누르고, 목덜미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그러자 쭉 뻗은 뒷덜미 정중앙에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무언가가 드러났다.
색이 바래 있긴 하지만 모양은 확실하게 남아 있는 초록색의 별.
“세상에......”
이번엔 긴의 입에서 경악에 찬 탄성이 새어나왔다.
목 뒤의 초록색 별.
그건 스칸데르인이 가진 증표다. 검은색의 머리칼과 함께, 스칸데르를 증명하는 일종의 표식인 셈이다.
노예시장 같은 데에서 암암리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거금으로 거래되곤 하는 스칸데르 혼혈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세상에. 초록별이라고! 순도 100%의 스칸데르라 이거야!
“운이 좋군.”
“설마 사실일 줄은. 그 계집애는 끝까지 사실이라 우겼지만요. 분명 그 계집애가 꾸며낸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그 계집애, 입은 시끄러워도 안는 맛은 좋았어. 죽는 순간까지 그 앙칼진 눈으로 날 쳐다보더라니까.”
“꼴에 그 계집애를 지키겠다고, 주제도 모르고 덤비던 놈도 꽤 재미있었어. 산 채로 배를 가를 때 내지르던 비명이 죽여주더라고.”
토오르의 두 팔을 붙잡고 선 사내는 짐승처럼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사내들이 주고받는 단편적인 대화만으로 토오르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자들. 입이 더럽고 성깔 있는 계집애. 주제도 모르고 덤비던 마을 사람들.
그것은, 분명 자신이 얼마 전 등지고 떠난 그곳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가족과도 같았던 사람들이 있던 그곳.
자신들이 떠나오기 전 마을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히이토의 군인들. 그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란 말인가.
“그 마을 사람들은, 그들은 어떻게 됐어!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한 거야!”
“모두 죽였다. 아주 성가신 녀석들이었지.”
토오르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은 무척 권태로워 보였다.
개미 떼를 밟아 죽인 아이 같은 표정 같기도 하다.
머릿속이 일순 새하얗게 비워졌다.
‘리거......’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던 바보 같은 녀석.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는 비겁한 녀석도 친구라고,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던 녀석.
당신이 좋아,라고 귀찮게 졸졸 쫓아다니던 주근깨 가득 박힌 거센 계집애, 세라.
“아아아악―!”
토오르는 울부짖었다. 달을 향해 포효하는 늑대처럼 목에서 피가 들끓을 정도로 울부짖으며 발버둥쳤다.
“다 죽여버리겠어! 이 개자식들! 다 죽여버릴 거야!”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았을까.
그 자식들이 무기를 가지고 덤벼봤자 이들의 상대도 되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만 챙겨서 조용히 마을을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불쌍한 녀석들을, 그 바보같이 착하기만 했던 녀석들을, 이 냄새나는 살인귀들은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능욕하고, 죽였다.
“조용히 시켜.”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토오르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날아들었다.
그 손은 정확히 급소 부분에 떨어졌고, 토오르는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사내의 품 안에 맥없이 늘어졌다.
“이제 어쩌지요, 두목?”
“값나가는 희귀한 보석을 손에 넣었으니, 그걸 팔러 가야겠지. 한 몫 두둑하게 챙겨서 떠나자.”
“그럼 이 두 떨거지들은요?”
“일단은 데려가. 이 녀석들의 목숨은 담보다. 값비싼 보석이 스스로의 몸에 흠집을 내거나 하면 안 되니까.”
사내의 손안에서 예르네이는 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그 압도적인 힘은 그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 커다란 손에 붙잡힌 채, 머리 위에서 떠도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기만 할 뿐.
젖은 얼굴로 축 늘어진 토오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난... 이렇게도 나약한 인간이었던가.’
사내들 틈으로 보이는 긴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을 탓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충격을 받은 것일까.
저자도 자신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날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공에서 잠깐 긴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먼저 고개를 돌려 예르네이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의 그런 행동은 예르네이를 지옥 밑바닥,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이 나뭇가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사내들의 저녁식사는 푸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에 있는 식량이란 식량은 전부 가지고 왔을 테니까.
토오르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았다.
죽는다는 건 이렇게 쉬운 것이었구나. 죽음이란 건 이토록 허무한 것이었어.
저 구석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긴의 두 눈이 고양이 과의 동물처럼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바보 같은 자식들, 상대도 되지 않는 주제에 싸움을 걸긴 왜 걸어? 그냥 무조건 손바닥에 지문이 닳을 때까지 빌었어야지. 제발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세요, 하고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어야지.
저놈들은 곰 같은 외모만큼이나 단순무식해서 조금만 비위를 맞춰줬더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상처가 하나둘쯤 났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것과 죽는 것은 엄연히 다르잖아.
죽어도 그건 싫었겠지. 리거, 네놈은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었으니까. 하여튼 그런 유의 녀석들은 다 그래. 남 앞에서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할 바에야,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말지.
그따위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놈들은 다 그 모양이야.
결국, 그렇게 개죽음을 당하게 마련이라고.
-토오르, 잘 살아라. 어디를 가서도 죽지 말고 끈질기게 살아남아라.
그렇게 말하던 리거 녀석에게 웃어주었다.
아주아주 옅은 미소를 지어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울부짖는 못생긴 여자애 하나, 그 애를 껴안고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던 사내.
아마 그때 한 번이라도 뒤돌아봤다면, 리거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웃어 보였을 것이다. 그 얼굴이 비록, 험악하게 일그러져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안녕이라는 말을 고하지도 못했는데. 세라, 그 못생긴 여자애에게 단 한 번이라도 상냥하게 대해 주지 못했는데. 나 같은 한심한 녀석을 그렇게 좋아해 주던 여자애였는데, 난 늘 그 애의 눈에서 눈물을 쏟게 만들었지.
“우울하구만.”
어느새 긴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뒤로 팔목이 묶여진 채 애벌레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온 모양이다.
그가 상처 입힌 히이토 녀석이 두목이 안 보는 사이 쥐어 패기라도 했는지, 긴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퉁퉁 부어 있었다.
“네 녀석의 고향이었냐? 저 먹성 좋은 멧돼지 같은 녀석들이 머물렀다던 그 마을 말이야.”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모여 앉아 미친 듯이 음식을 먹어대는 히이토 녀석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긴이 말했다.
“아니, 하지만 친형제와도 같은 녀석들이었어.”
“흐음......”
이런 쪽으론 꽤나 배려가 깊은 듯, 긴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뒤로 팔이 묶여져 있어 움직임이 자유롭지도 않은 주제에, 엉덩이를 이용해 토오르와 어깨를 맞대고 몸을 비벼댄다.
이런 우스꽝스런 스킨십을 위로라고 하는 건가, 이 남자는?
“동정은 필요 없어.”
“동정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래서 대체 뭐가 말하고 싶은 거야?”
“잘도 속였구나 싶어.”
뭐? 주어 없는 그 애매모호한 말에 토오르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저 남자 말이야.”
긴의 시선은, 따로 떨어져 앉은 예르네이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 같기도 하다. 아니, 이미 그는 오래전부터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인은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스칸데르의 혼혈은 본 적이 있지만 순혈종은 처음 봤다. 생김새 같은 건 확실히 별 차이 없지만, 역시 달라도 뭔가 다르다 싶었어.”
그것은 스칸데르인이라서가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쩐지 저 붉은 머리카락이 너무 천박해 보이더라. 어울리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은 그 정도뿐이냐?”
“응?”
마을 사람들처럼, 모든 불행이 스칸데르인인 예르네이에게서 비롯되었다느니, 역시 검은색은 재수가 없다느니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모든 죄를 예르네이에게 뒤집어씌우진 않느냐 이거지.
하지만 긴은 부어터진 얼굴로 멍청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다.
가끔, 이런 녀석들도 있다.
희귀한 동물이란 녀석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어 엄청난 상처를 입혀도, 씨익 웃으며 “이야~ 역시 귀한 녀석답게 엄청 야무지게 무네?” 하고 상처를 손으로 문지르는 그런 녀석들이.
어떤 면으로는 남들과는 아주 다른 사상을 보이는,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부류 말이다. 그런 부류의 녀석들은 대부분 자신들을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라고 표현하더라.
“그런데... 우린 이제 어떻게 될까? 저 남자한테 짐이 되는 건 싫은데.”
“나도 마찬가지야.”
“그냥 저놈들이 안 보는 사이에 절벽으로 뛰어내리거나, 혀 깨물고 콱 죽어버릴까?”
토오르는 엉망으로 짓이겨져서 형태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 그의 미간이 좁아진 것도 같다.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저래보여도, 이 녀석은 용병들 사이에선 알아주는 실력자라고 했으니까.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건지도.
“우리까지 죽어버리면......”
토오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머릿속에 눈물 가득한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짓던 리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버릇 고약한 못생긴 세라, 유쾌하고 성격 좋은 녀석들.
“우리까지 죽어버리면, 예르네이도 죽어.”
말뜻을 이해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긴이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녀석들한테 소나 말처럼 질질 끌려다녀야 되나.”
“기회를 봐서 탈출하면 돼.”
“말이 쉽지.”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없어. 인간이란 누구나 약점이 있는 법이야.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마.”
긴은 코웃음을 치며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짜식, 생긴 것답지 않게 터프하다니까. 별수 없지. 도망치는 건 내 특기니까 어떻게든 한번 해보지.”
“그래.”
“그럼 자자. 너무 피곤해서 눈물이 다 난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긴의 두 눈은 여전히 똑바로 앞을 향해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음식에 이어 술잔치를 벌인 히이토 녀석들에게 향했다가 이내 예르네이에게로 향한다.
긴의 시선을 쫓다보니, 어느새 긴과 함께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예르네이를 쏘아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허공에서 예르네이의 시선과 마주쳤다.
“저런 눈을 했던 녀석이 있었는데 말이지.”
옛 추억을 얘기하는 노인처럼 긴은 아련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전쟁 포로들 말이야. 그 녀석들은 딱 두 부류가 있는데. 한쪽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놈들이고, 다른 한쪽은 모든 걸 체념해 버리는 놈들이야. 저 남자의 눈은, 음......”
“후자 쪽에 가깝다는 말이지?”
“그렇기도 하지만, 조금 달라. 그러니까... 그래, 노예시장 쪽이 더 어울리겠군. 어쩔 수 없이 돈에 팔린 시골 처녀들 말이지. 저건 돈 많은 호색한 늙은이들에게 팔리는 처녀 같은 눈이야. 한때 알고 지내던 여자애도 노예시장에서 팔려 가기 전 마지막 순간에 저런 눈을 하고 있었어.”
“마지막 순간?”
“늙은 귀족의 성에서 독극물을 먹고 자살했거든.”
바보 같은 긴은 퉁퉁 부어터진 흉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손이 자유로웠다면 아침 인사를 하듯 가볍게 손을 흔들기까지 했을 게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는 긴의 어이없는 행동이 열 마디 말보다 더 효율적인 위로일지도 모른다.
곧 긴은, 예르네이를 향해 떠벌리기 시작했다.
“어이, 이 친구야. 우린 괜찮다고. 뭐 얼굴이 이 지경이 되긴 했어도 아직 목숨은 붙어 있지 않겠어? 우리 몸은 우리가 챙길 테니까, 당신은 당신 몸이나 잘 추스리라고. 그런 다 죽어가는 얼굴로 괜히 사람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들리기나 하겠어?”
“그래도 뭐, 일단 말해 보는 거지.”
“바보 같은 자식.”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
긴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어느 순간에도 긴장감 없이 행동하는 이 녀석이나, 리거 그 녀석이나, 그리고 나 자신이나, 다 바보 같고 한심하기만 해.
토오르는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말았다.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릎을 웅크릴 수는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여전히 일렁이는 불꽃 저 너머에서 예르네이,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그가 이런 자신의 행동에 상처받는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다.
그의 절망을, 그의 깊은 슬픔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이미 리거 녀석,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일만으로도 몸이 산 채로 으스러지는 것처럼 슬프고, 또 슬프니까.
“일이 이렇게까지 되니까 말이지, 차라리 미친 왕자님이 너무 보고 싶은 거 있지?”
“그 사람이 무서워서 도망친 주제에.”
“그래도 왕자는, 이성이 있는 인간이잖아. 저놈들처럼 단순무식한 짐승이 아니라.”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토오르의 말에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것인지, 긴은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툴툴댔다.
“피곤해. 난 잔다.”
“뭐야? 삐쳤냐? 화가 나는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임마.”
자신의 몫을 다 먹은 히이토의 군인 하나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긴을 노려보았다.
네놈한테 당한 상처가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쑤셔 미칠 것만 같다, 빌어먹을 자식.
누런 기를 띤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긴은 필사적으로 얼굴 근육을 이완시켜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쪼잔한 자식, 겨우 스친 상처 정도로 아직까지 꽁해 있다니.”
어색하게 미소 띤 얼굴로, 긴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구시렁댔다. 그리고 잔뜩 웅크린 토오르의 곁으로 다가가, 비스듬히 누워 그의 귀에 속삭였다.
“토오르, 가만히 듣고만 있어. 지금이라도 관절을 빼내서 돌리면 이까짓 포박쯤은 쉽게 풀 수 있어. 하지만 기회를 만들어야 되겠지. 내가 어떻게든 그 기회를 만들어보마. 그때를 이용해서, 넌 네 친구를 데리고 달아나.”
토오르는 긴의 말대로 작은 몸짓 한번 하지 않았다.
“넌 그래도 꽤 예쁘장한 얼굴이라서, 노예 상인한테 팔 수나 있지. 난 저 녀석들에게 있어서 쓸모없는 짐일 뿐이거든. 저딴 녀석들한테 짐덩이 취급당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라 말이지.”
장황하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고는 있지만, 원체 머리가 단순해서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 말의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난 도망치는 것 하나는 예술이니까.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면 뭐,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인연이 닿게 된다면......”
단순무식한 바람둥이 용병. 입만 살아 나불대는, 실속 없는 남자.
그래도 꽤 멋있어 보인다.
오렌지빛 불꽃이 비친 그의 퉁퉁 부운 옆얼굴이 무척이나 근사해 보여서 가슴 한쪽이 시리다.
“죽는다 해도 별로 후회는 없어. 어차피 쓰레기 같은 인생이었으니까. 살아 있는 동안 스칸데르인도 만나봤고, 왕자님의 호위 기사도 해봤고, 또 입은 더럽지만 엄청 터프한 괜찮은 녀석과 친해지기도 했고... 뭐,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여자들을 다 내 품에 안아보지 못한 게 후회가 되긴 하지만.”
어설픈 위로의 말이나, 우리를 위해 네 목숨을 걸지 마, 따위의 말을 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는 건, 도저히 낯간지러워서 못 하겠다.
그래도 나중에 후회할 게 뻔하니까 좀더 용기를 내보자. 리거, 그 녀석에게 상냥한 말 한마디 못 해준 것을 지금 이렇게 후회하고 있으니까.
“긴......”
“오오, 웬일로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부르냐?”
“우린......”
우린 괜찮아.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이 기껏 용기를 내 입을 열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방해꾼이 토오르의 말허리를 끊었다.
“어이, 너!”
곰 같은 덩치만큼이나 우렁찬 목소리로, 기억에 남을 정도로 추하게 생긴 사내가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분명 저 단추 구멍 같은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으니, 긴이나 나를 부른 것이겠지?
“아~ 예~ 왜 그러시나요?”
어느 순간에도 특유의 뺀질뺀질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는 긴이, 이번에도 사내에게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너 말고, 저 자식!”
긴은 어깨를 움찔 떠는 토오르를 흘끗 바라본 뒤, 아까보다 더 밝게 웃으며 토오르의 앞을 슬쩍 가로막았다.
“이 녀석은 지금 기분이 영~ 별로라서요.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상대해 드리면 안 될까요?”
사내에게 허리를 굽실거리고는 있지만, 긴의 목소리는 어딘지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이리 와서 재롱이라도 떨어봐라, 페르티잔의 개들아.”
술을 마셔서 그런지 사내들의 눈은 위험할 정도로 풀어져 있었다.
긴은 특유의 유연함으로 사내들의 술주정을 웃음으로 넘어가려 했다.
술주정뱅이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짓도 없다.
하지만 토오르는 온몸의 털을 곧추세우고 콧잔등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말 그대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나름대로 꽤 위협적인 얼굴이긴 하지만 저들에겐 어린애의 귀여운 재롱쯤으로 보일 게 분명해.
“차라리 끌고 오는 게 더 빠르겠어.”
짐승들의 무리에서 한 마리가 이탈해 어슬렁어슬렁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긴은 생각만 해왔던 일을 시행해야 할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재빨리 손목을 틀어 관절을 빼내고, 헐렁해진 손목을 이용해 포박을 푼다. 벌써 몇 번이나 빼고 끼워넣었던 관절이라 이젠 별 고통도 없다.
“이리 와. 얌전히만 있으면 뼈 한두 개 부러지는 정도로 봐주마.”
전형적인 변태 늙은이의 대사를 지껄이며, 사내가 토오르에게 그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손을 뻗었다.
“미친놈들!”
토오르가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했다.
위에서 말했듯, 술주정뱅이를 화나게 하는 것만큼 무식한 짓도 없다고 했다. 그게, 막강한 힘을 지닌 짐승 같은 놈일 때는 더 더욱. 긴은 속으로 끄으응, 하고 길게 앓는 소리를 내야 했다.
“이 쥐새끼 같은 자식이!”
워낙 재빠른 데다가 작기도 작아서 손을 뻗을 때마다 품 안에서 달아나버리기만 한다.
“고거 참, 귀엽게도 노는구만!”
“어이, 고생하는군!”
술에 취한 사내들의 집단이란 건 정말이지, 전부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보 같다.
별것도 아닌 일에 배를 잡고 뒹굴고, 광대처럼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고, 꼭 덩치만 커다란 골 빈 원숭이들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발광하는 것만 같다.
“으앗―!”
하지만 아무리 날다람쥐처럼 재빠른 토오르라 할지라도, 손이 뒤로 묶여 있어서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을 터. 얼마 안 가 그는 성난 곰에게 우악스럽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
콧김을 쌩쌩 내뿜으며, 사내는 손안에 잡힌 포획물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놔! 이 미친놈! 놓으라고!”
“이 자식이!”
무식하게도, 사내는 그 솥뚜껑만 한 손으로 발버둥치는 토오르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한 번의 매질에 토오르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얼굴 한쪽은 안쓰러울 정도로 붉게 부어올랐다.
그런데도 사내를 노려보는 토오르의 눈은 여전하다.
“미친놈들... 다 죽여버릴 거야......”
저주와도 같은 말을 반복해 중얼거리며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크게 두어 번 끔뻑였다.
어린애같이 둥근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고, 입가에서 흐른 피는 턱을 타고 흘러 그의 옷깃을 적셨다.
아아... 정말이지, 저 녀석은......
긴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누군가에 대한 이런 맹렬한 증오로 몸이 떨려왔던 적이 있었던가.
아주 오래 전, 딱 한 번 있었다.
여자애. 별로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덧니가 무척이나 귀여웠던 여자애.
-사랑해. 이번 출장에서 돌아오면, 나와 결혼해 주겠어?
그러자 그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잘게 어깨를 떨던 여자애. 싸구려 도금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자, 덧니를 살짝 드러내 보이며 눈부시게 웃던 여자애.
-그 애는 중앙의 류 공작 댁에 하녀로 가게 되었다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고, 그녀의 부모들 역시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납득하고 그렇게 믿으려 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 호색한 늙은이,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한 늙은 공작의 노리개로 팔려가는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늙은 귀족이 보낸 호화찬란한 마차를 타고 가던 그녀의 모습은 어땠던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녀의 커다란 눈은 초점을 잃고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물고기의 눈, 딱 그것이었다.
그때 뛰쳐나가서 그녀를 끌어내렸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공작의 노리개로 전락했던 그녀는, 그 쓰디쓴 독약을 입 안에 집어삼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붉은 선혈을 하얀 드레스 가득 흩뿌리며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용서 못 해.』
그때 느꼈던 맹렬한 증오, 살기가 다시금 들끓어 오른다.
『용서 못 해. 저 개자식들!』
긴은 눈을 빛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녀석들이 전부 회수해 갔지만, 무기 대신으로 쓸 나뭇가지 같은 것은 다행히 주위에 널려 있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의 싸늘한 시신을 품에 안고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을 다시 한 번 끄집어 내본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복수해 주겠어. 널 이렇게 만든 그 자식을, 꼭, 기필코, 화염이 들끓는 지옥으로 가게 해주겠어.』
긴은 마침 근처에 있는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움켜쥐었다.
사선으로 부러뜨리면, 이것은 무딘 칼보다 더 쓸 만한 무기가 될 것이다.
“놔! 이 자식들! 더러운 손 치워!”
품 안에서 바르작대는 무력한 생물을 사내들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하앗―!”
긴은 우렁찬 기합과 함께, 허리를 숙여 목표물을 향해 돌진했다.
다 죽여버리겠어. 오직 그 일념만으로,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무기랄 것도 없는 나뭇가지 하나만을 달랑 든 채―
“어엇―!”
“긴―!”
사내들의 입에서 나온 의미불명의 외침과 토오르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 자식! 언제 밧줄을......!”
누군가가 당황해 그렇게 외치는 순간, 긴은 이미 가장 바깥쪽 사내의 머리 위로 무기를 높이 쳐든 상태였다.
사내들의 경악에 찬 눈이 모두 긴에게 집중되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시간이 멈춘 듯 얼어붙어 있었다.
그들 중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오직 모닥불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고 있는 앳된 얼굴의 토오르. 자신의 얼굴처럼 엉망으로 짓이겨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
“하앗!”
하지만 그들 역시, 군인이었다. 그것도 타고난 전사라고 일컬어지는 히이토 족의 군인.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그들이 아니다.
막 긴의 공격으로 두개골에 나뭇가지가 박힐 뻔한 사내는, 거의 본능적으로 허공에서 긴의 팔을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뼈가 그대로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악력이었다.
“으으윽―!”
절망적이었다.
유일한 무기였던 나뭇가지가 바닥 위로 떨어지고, 긴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자식이 기어코!”
마침 공격했던 녀석이 낮에 상처를 입혔던 그 녀석일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두목이 무슨 말을 해도, 사내는 긴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바꿀 의사가 없어 보였다. 핏발 선 눈을 커다랗게 뜨고 사내는, 무식하게 크기만 한 칼을 들어올렸다.
그 칼이 그대로 긴의 머리를 짓이겨 버릴 듯 날아드는 찰나―
“그만! 공격을 멈춰!”
구원의 종소리와도 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들짐승의 우두머리 것이었다.
잔뜩 경직된 우두머리 곰의 바로 뒤에는 너무도 낯익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무기를 버려. 그러지 않으면 이 녀석의 목숨은 보장 못 한다.”
예르네이―! 오~ 이 빌어먹을 친구야―!
긴은 정말, 진심으로, 저 무식할 정도로 과묵한 스칸데르인 청년에게 달려가 품에 안고 볼을 마음껏 부벼대고 싶었다.
우두머리 곰의 등 뒤에 서서, 그는 검날로 우두머리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 날카로운 검에 우두머리의 목이 날아가 버리리라.
“젠장―!”
아무리 머리에 든 거 없는 광포한 들짐승 떼라고는 해도 의리라는 게 조금쯤은 존재하는지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우리가 방심했군. 이 녀석들이 훈련이 잘 된 군인이란 걸 잊고 있었어. 게다가 한쪽은 그 유명한 스칸데르의 핏줄이란 걸 말이야.”
언제 목을 베어버릴지 모르는 사신을 등 뒤에 대롱대롱 매단 채 들짐승의 우두머리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씨익 미소지었다.
“게다가 이런 독한 살기를 띤 적이 등 뒤까지 오게 놔둘 정도로 내 감이 무뎌지다니, 이거 충격이구만?”
원래 술이란 건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이라도 일단 술에 취하면 밧줄 타는 법조차도 까먹는단 말씀이야.
긴은 사내에게 붙잡혔던 손을 탈탈 털며, 사내가 떨어뜨린 검을 들어올렸다.
꽤 무겁고 쓸데없이 크긴 하지만 사용하지 못할 것은 없다.
날이 부러진 검이든, 녹이 슬어 사과 한 조각 자를 수 없는 검이든 긴의 손에만 들어오면 그 어떤 명검보다도 멋진 무기가 된다. 그것이 긴이 가진 유일한 재주였다.
“어이, 토오르.”
내민 손이 무안하게, 토오르는 인상을 잔뜩 쓰고 스스로 일어나 몸을 탈탈 털어냈다.
“빌어먹을. 언젠가 죽이고 만다.”
긴을 못 죽인 게 한이 되는지, 사내는 핏발 선 눈을 긴에게 향한 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토오르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져주고, 긴은 모닥불 근처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자신의 낡은 가죽 가방을 주워 올렸다.
이제는 무사히 도망치는 것만 남았군.
예르네이가 저 두목 녀석을 없애고, 내가 어떻게든 날 씹어 삼킬 듯이 노려보는 저놈을 없애고 나면, 남은 녀석은 둘이 된다.
둘이라도 워낙에 짐승 같은 놈들이라 버거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뭐 어떻게든 하면......
“긴.”
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르네이, 그였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그것이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긴의 눈이 별이 뜬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토오르를 데리고 달아나라.”
하지만 뒤이어 그의 굵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다.
“멀리, 되도록이면 아주 멀리 달아나. 히이토는 집념이 강한 종족이다.”
“자... 잠깐 예르네이!”
긴은 토오르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흘겨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스칸데르의 전사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칸데르의 핏줄은 이렇게 말했다.
“토오르를 부탁한다.”
긴은 빠르게 이해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질긴 인연의 고리. 그 바깥에 선 것은 다름 아닌 자신.
그는 자신을 믿고 있다. 믿고, 신뢰하고 있다.
자신이라면, 품 안에서 발버둥치는 이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한 사내를 무사히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진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부탁한다.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저며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알았어. 맡겨두라고.”
긴은 옅은 미소와 함께 토오르의 몸을 짐처럼 어깨 위에 짊어졌다. 그래도 달릴 거 다 달린 사내자식이라고 꽤나 묵직하다.
“놔! 내려놔!”
토오르는 갓 건져 올린 은어처럼 발버둥쳤다.
긴은 일부러, 예르네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한쪽뿐인 눈에 드러나 있을 복잡미묘한 감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미쳤어! 미쳤냐고! 그를 두고 갈 순 없어. 이거 놔!”
긴은 달리기 시작했다. 등을 두드리며 머리카락을 잡아뜯는 성질 나쁜 고양이를 안고서.
“예르네이! 예르네이―!”
토오르의 갈라진 목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숲속에 울려 퍼졌다.
끝도 없이 이어진 숲. 길게 이어진 나무, 풀. 어둠, 은색의 달빛이 교교하게 내려앉은 밤의 숲.
마지막, 그래. 마지막 부탁이었다.
그 스칸데르인 사내가 자신에게 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
“젠장... 젠장, 빌어먹을 자식... 이런 식으로 살아남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제풀에 지쳤는지, 토오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토오르의 절규에 긴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밤의 숲은 아름다웠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