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휘르곤의 눈물 12 (14/16)

제12장

모두가 경직돼 있었다.

하루 종일 왁자지껄한 사내들의 웃음소리와 얘깃소리로 조용할 날이 없던 선술집이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것이다.

한 손에 하나씩 맥주잔을 손에 쥔 젊은 청년들도,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가게의 주인도, 뱃속에 두 번째 아이를 밴 가게 주인의 마누라도 모두 다 똑같은 얼굴로 어느 한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란 건,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갈겨서 엄청난 욕설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다 봤는데 거기에 성의 영주가 떠억 하니 버티고 있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들의 수십 개 눈이 향해 있는 곳은 식당 구석, 오후의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였다.

여름이라 그 자리는 오후 시간엔 늘 비워져 있었다.

일부러 그 자리를 찾는 사람은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 둘 중 하나였다.

젊은 남자였다. 최근 들어 몰려들기 시작한, 탈영병 내지는 군인들과 다를 바 없는 행색을 한. 하지만 그 남자는 결코 조금도 평범하지 않았다.

우선은 그 외모가 그랬다.

오후의 강렬한 태양빛 속에 녹아든 부드러운 실버 블론드, 눈부시게 빛나는 대리석과도 같은 피부, 보석처럼 빛나는 자수정빛 눈동자, 음식을 오물거리는 붉은 입술까지.

남자는 아름다웠다.

이 근방 저속한 건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거기가 꼴리도록, 겁나게 예쁜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 결코 여성스럽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남자답게 잘생겼다거나 한 것도 절대 아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성적인 매력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끄는 것이다.

결코 가녀리다고는 할 수 없는 몸, 허리춤에 찬 무시무시할 정도로 번쩍이는 검,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로.

“저건 어디서 떨어진 공주님이지?”

“공주가 아니라, 군인 아냐?”

“하지만 저렇게 예쁜 군인이라니,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어. 분명 어딘가의 귀공자이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거나 둘 중 하나야.”

“정신 나간 놈. 저렇게 더러운 천사가 어디 있냐.”

그렇게 지껄이는 사내의 머리를 그의 동료가 쥐어박으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내 역시, 솔직히 아직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살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인간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남녀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는 대륙에서 내로라 하는 장인들 여러 명이 몇 년에 걸쳐 혼신의 힘을 쏟아 만든 조각상과도 같았다.

손을 뻗어 건드리면 소리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신기루일 게 분명해. 원래 환영이란 건 대부분 저렇게 아름다운 법이거든.

“주인장!”

하지만 사내의 기대를 배반하고, 환영이라 생각했던 남자가 손을 들어 가게의 주인을 불렀다. 외모와는 달리 꽤 낮고 끝이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것조차도 천상의 음악소리로 들리는 것은 아마 모두가 타지에서 온 그 아름다운 이방인에게 홀려 있기 때문일 게다.

“주인장!”

“아... 네... 네엣......!”

넋이 나가 있던 가게 주인은 두 번째의 부름에야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방을 드릴까요? 아니면 음식을 좀더 드릴까요?”

“아니, 그것보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네에 네에,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쇼.”

“혹시 붉은 머리카락에, 한쪽 눈이 없는 사내가 이 마을에 머물지 않았었나?”

가게의 주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다면 이 아름다운 손님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인상착의를 한 남자는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그런 남자는 기억에 없는뎁쇼?”

“흐음......”

정말이지 애석한 일이다.

이 아름다운 남자에게 알려줄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 보라색 눈동자가 밝게 빛나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자기 자식을 돌보는 일조차도 귀찮다는 이유 하나로 마다하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온 마을을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그 붉은 머리 남자를 찾아낼 의지가 있었다.

이 남자는, 뭐랄까.

상대를 굴복시키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냥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처럼 눈빛 하나로 사람을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게 하는, 귀족 특유의 몸에 밴 그런 거만함 같은 것 말이다.

“그런가.”

섬세한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는 그 행동에, 가게 주인은 좀더 참견하고 싶어졌다.

“찾고 계시는 분이, 친구분이신가요?”

가게 주인은 남자의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가 가늘게 접히는 것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친구는 아니지.”

“그럼......?”

주제넘은 참견이었던가.

남자의 얼굴이 약하게 일그러진다. 주인은 비굴할 정도로 웃으며 애써 여러 가지 말을 늘어놓았다.

“아... 그게, 요즘 탈영병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 녀석들이라면 손님이 찾고 계시는 분을 본 사람도 있을지 모르고, 또......”

“탈영병?”

“그 왜, 어떤 상황에서든 꼭 적응을 못 하고 낙오되는 놈들이 있잖습니까. 자기 나라의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원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닙니다.”

“탈영병... 그래, 그랬었군.”

문득 지금에서야 생각이 났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데 전쟁터를 이탈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라고 호들갑을 떨던 어떤 사내의 말이.

“대부분의 탈영병들은 사막을 넘어 중립 지역인 멘스터로 도망치려고 하죠. 하지만 요즘은 붉은 폭풍이 들이닥치는 기간이라, 모두 사막 근처의 마을에서 은신하고 있을 겁니다.”

쓸데없이 말이 많은 사내다.

어디를 가나 이런 타입의 인간은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칼로 위협하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필요 이상의 정보를 비굴하게 허리를 굽실대며 술술 불어놓는 자들 말이다.

“붉은 폭풍? 그건 뭐지?”

“사막에 불어오는 일종의 태풍 비슷한 겁지요. 올해에는 폭풍이 더욱 거세졌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한번 폭풍에 휘말리면 끝장이기 때문에, 아무도 폭풍이 오는 기간에는 사막에 들어서지 않아요.”

그런가. 그래서였군.

어째서 보잘 것 없는 이런 좁아터진 시골 마을이 수도 못지않게 활기찬 것일까 싶었는데.

마을을 가득 메운 젊은 남자들 대부분이 평범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그랬군.

네프는 직감했다.

자신의 본능적인 육감이 옳았음을.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육감이란 건 들짐승의 그것과도 같았다.

결코, 단 한 번도 자신의 육감이 틀렸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도 분명 맞아떨어질 것이다.

“손님도 사막을 넘으실 겁니까?”

이 풍채 좋은 가게의 주인은, 자신 역시 저들과 다를 바 없는 탈영병 신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가문의 명예를 위해 귀족의 자제들은 전쟁터에 내던져지고 만다. 죽음이 두렵고 전쟁이 싫은 것은 일개 군인뿐 아니라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귀족도 마찬가지다.

“찾으신다는 그분도 사막을 넘을 거라면, 아마 이 근방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사막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을에 가 있는지도 모르죠.”

졸지에 자신과 그는 탈영병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네프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주인장.”

“네에.”

“방을 하나 주게.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러야겠어.”

“예이, 알겠습니다.”

사실 사막을 넘으려는 탈영병들로 가득 차 가게의 방은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다. 하지만 벌써 며칠째 방값을 내지 않고 빈둥대는 녀석들 중 하나를 내쫓으면 그만이다.

저 아름다운 남자는 귀족 같은 섬세한 외모만큼이나 비싸 보이는 고급 옷을 걸치고 있고, 그의 하얀 목에는 척 보기에도 꽤 값이 나갈 것 같은 보석 목걸이가 걸려 있지 않은가.

혹시 또 모른다. 페르티잔의 정부에서 보낸 첩자일지도.

그렇기에, 가게 안의 손님들이 저렇듯 이방인의 외모에 감탄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탈영병이든 그들을 잡으러 온 사냥개든 손님은 모두 똑같은 손님.

긴 은색 머리카락의 손님은 다시 아무 말 없이 식사를 끝낸 뒤, 들어왔을 때와 같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가게를 나섰다.

흩날리는 그의 은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쳐 눈부시게 빛났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쥐 죽은 듯 고요했던 가게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휘유... 정말 죽여주는군.”

“척 보기에도 귀족 같은데, 왜 사막을 넘으려는 걸까?”

“알 게 뭐야. 워낙에 썩어 있잖아, 이 나라가. 그러니 돈도 명예도 다 필요 없어졌겠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 나라를 위해, 그 미치광이 왕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걸겠냐? 하지만 그대로 돌아가면 분명 그 미치광이 왕이 가만히 놔둘 리 없을 테니, 우리처럼 멘스터 행을 택한 거겠지 뭐.”

“그런가.”

“그렇다니까.”

“하지만 말이야. 어쩐지 저 남자, 낯이 익어.”

“그게 네 특기 아니냐. 좀 예쁘다 싶은 여자가 있으면 쪼르르 달려가서, 아가씨. 우리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않던가요? 하고 느끼하게 웃는 거.”

“아냐.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어디선가 긴 은발 머리를 늘어뜨리고 제비꽃색 눈동자를 한, 시골 처녀를 꼬셨었겠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언성을 높여 보지만, 동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분명 기억에 있다.

그동안 사귀었던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 저만큼이나 완벽한 외모를 한 여성이 있었던가. 아니, 아니다. 여자가 아니다. 순진한 시골 처녀, 그런 것도 아니다.

“대체 어디서 봤더라?”

동료의 고뇌 따위는 아랑곳없이 사내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새롭게 등장한 아름다운 이방인에 대한 얘기로 정신이 없었다.

* * *

새벽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오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말 위에서 잠깐 졸다가 눈을 떠보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었다.

코를 쑤시는 물비린내와 어디선가 음산하게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 어딘가의 늪지대인 모양이었다.

두꺼운 커튼을 친 것처럼 안개는 짙었고 그 안에서 방향을 알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말고삐를 움켜쥐고 몇 번이나 같은 길을 맴돌았던가.

그러던 중,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개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그 무엇.

그것은 새였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아, 그것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울부짖으며 날아올랐다.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새의 깃털이 눈처럼 떨어졌다.

그것은 까만색이었다. 밤의 어둠의 색.

네프는 망설이지 않았다.

말고삐를 잡아당겨 새의 깃털이 허공에서 아른거리는 방향으로, 어딘지 알 수 없는 그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방향으로 가고 또 가다 보면, 만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를 만나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한심할 정도로 떨리지는 않을까 싶어서.

품 안의 유리병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그것에 몇 번이고 입 맞추었다.

유리병 속에 든 것과 똑같은 색의 눈을 한 그 남자를 만나면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눈을 마주칠 수 있게.

이 마을에서도 그에 대한 소식은 알아낼 수 없었지만 이젠 거의 다 왔다는 막연한 생각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필 이런 때에 식량이 떨어질 게 뭐야.”

“그러게. 메이 녀석, 우릴 부려먹어도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두세 명의 사내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네프는 본능적으로 어두운 골목 속으로 몸을 숨겼다. 딱히 이 큰길을 가로질러 가야만 하는 건 아니었기에, 되도록이면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몰래 가는 길을 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하필 골목길 끝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이대로 골목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네프는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낡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이곳에 숨어 있기로 했다.

“제길. 대체 붉은 폭풍은 언제 끝나는 거야? 올해는 평소보다 더 긴 것 같지 않아?”

“불안해 죽겠어. 긴 녀석이 그들이랑 떠난 뒤부터 계속 악몽에 시달려.”

“아무래도 불안해. 갑자기 그 녀석들이 마을을 떠난 것도 그렇고... 어쩌면 말이야, 우리가 헤이즐리 녀석 말만 믿고 헛다리를 짚은 거 아닐까?”

“솔직히 그래. 어쩌면 진짜 우리 같은 탈영병일 수도 있었는데. 나도 긴 녀석과 함께 그 녀석들을 따라나설 걸 그랬어.”

“아서라. 어디 그 남자가 널 동료로 끼워줬겠냐? 사방으로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하고, 한쪽 눈을 빛내며 킁! 하고 코웃음을 쳤을걸?”

“붉은 폭풍이건 뭐건 간에, 나도 하루 빨리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어. 아무래도 불안......”

사내의 말은 채 끝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순간, 자신들 근처의 어두운 골목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고 그것이 자주 행인들을 놀래키곤 하는 들고양이 따위가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내의 목에는 이미 은색으로 빛나는 검이 겨눠져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 자식!”

작렬하는 오후의 햇빛 아래에서 그는 더러워진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망토 사이로 드러난 팔은 눈부시도록 희었고, 언뜻언뜻 보이는 가녀린 턱선이라든지, 호리호리한 체구. 더러워진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남자의 화사함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움직이지 마. 친구의 목이 날아가 버리는 끔찍한 장면을 목도하고 싶지 않다면.”

후드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한겨울의 공기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사내의 동료는 막 검을 뽑으려던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서, 갑자기 나타난 자객을 노려보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대낮에 대로변에서 칼침을 맞을 정도로 원한을 진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날카로운 칼끝이 사정없이 목을 꿰뚫을 것 같았기에, 사내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남자는 어디에 있지?”

두 번째로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영문 모를 질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남자라니?”

“방금 전 너희들이 말하던, 긴이라는 사내 말이다. 그가 붉은 머리의 사내와 함께 떠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내와 그의 동료는 허공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지 않은 예감에 두 사람의 얼굴에서 피가 싸악 빠져나갔다.

“넌 대체 누구야?”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라!”

따끔한 고통과 함께, 사내는 검날에 피부가 살짝 베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피가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리는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다.

“우리도 몰라. 그 녀석들, 갑자기 마을에서 빠져나갔어.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도망치듯이 말이야! 어쩌면 다른 루트로 해서 멘스터로 가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다른 루트?”

“사막을 가로지르면 사나흘 안에 멘스터에 도착할 수 있지만, 그 루트를 이용하면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려. 게다가 산세도 험하고 요즘 같은 때에는 산적에다 탈영한 히이토의 군인들까지 들끓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아무도 그곳으로 가려고 하진 않지만.”

“흐음......”

그것은 기회였다.

아주 짧은 순간,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내의 동료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고 민첩하게, 우선 동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남자의 살벌한 무기를 빼앗는다. 그것이 목적이었지만, 남자는 결코 녹녹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동료의 목에 겨누었던 검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그 바람에 먼지투성이 망토가 펄럭 소리를 내며 벗겨지고, 오후의 태양 아래 남자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허억―!”

그 순간, 두 사람 다 동시에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것처럼, 두 사람의 눈은 튀어나올 듯 확대되었고, 그들의 얼굴은 누구랄 것도 없이 납빛을 띠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그 단어가 새어나오는 순간, 죽는 순간에도 듣고 싶지 않았던 그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네... 네프 왕자......”

두 사람은 극한의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

햇빛 아래 녹아든 긴 은발, 핏줄까지 비치는 투명한 피부, 선명하게 빛나는 자수정빛 눈동자, 꿈결처럼 아름다운 얼굴, 결코, 절대로 꿈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았던 그 얼굴.

그 아름다운 악마의 얼굴이 두 사람의 눈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자네들은 날 알고 있는 모양이군.”

왕자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

“호오. 그래. 자세히 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군. 나와 함께 서쪽 변방에 파견되었던 군인들이었던가. 아니, 이젠 군인이 아니겠지. 자네들은 군을 버렸으니까.”

네프는 자수정색 눈을 가늘게 떴다.

“낙오자군. 부패한 쓰레기의 일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가 자신들을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 자신들이 이 남자에게 있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왕자는 손수 검을 높이 치켜들고 사형 집행인의 의무를 대신했다.

피는, 한 치의 더러움도 없는 맑은 색깔을 띠고 있다.

독한 피비린내도 적응이 되면, 그 어떤 여인네의 향수보다도 달콤하고 감각적인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어억......”

고통을 줄 생각은 아니었다.

단 한 번에 명줄을 끊어놓을 생각이었다. 이것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천천히 찢어 죽이는 데서 쾌감을 찾는 히이토의 군인들과 그가 다른 점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허리춤에 찬 검을 빼들기도 전에 왕자의 검에 목이 꿰뚫렸다. 깊숙하게 박혀 있던 검을 빼내자 분수처럼 피가 쏟아지며, 사내는 자신이 쏟아낸 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시바!”

죽음은 이토록이나 허무한 것이었다.

살기 위해,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그래서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나라를 위해 죽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자신들은 돈 때문에 허울 좋은 군인이라는 이름으로 팔려간 노예와 다름없지 않았던가.

함께 멘스터 어딘가에 땅을 사서 텃밭을 일구며 살자고 다짐했던 친구의 몸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역시, 검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왕자의 검에 당하고 말았다. 친구의 바로 곁, 아직 채 식지 않은 피 웅덩이 위로 또 하나의 몸이 덧없이 스러졌다.

“꺄아아악!”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였다.

마침 길을 지나던 마을의 여자는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떨어뜨리고는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네프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보라빛 눈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아름다웠다. 투명한 피부 위를 더럽힌 선명한 붉은색의 핏자국까지도 기가 막힐 정도로 남자의 비장한 아름다움과 어울렸다.

그렇기에, 여자는 울며 목이 터져나가라 비명을 질러댔다.

대로 위에 쓰러진 두 남자.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는 여자의 발밑에 고여갔고, 그들을 이렇게 만든 자임에 틀림없는 한낮의 살인자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네프는 등을 돌려, 후드를 뒤집어쓰고 도망치듯 골목길의 인공적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사내들이 나타나자, 그제야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여자는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내의 품에서 졸도했다.

“이게 뭐야! 누가 이렇게 한 거지?”

“자기들끼리 싸움이라도 한 건가?”

그들 중에는 방금 전 선술집에서 낯선 이방인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던 사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시체를 봐왔던 그들이었기에 아직도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는 두 구의 시체를 에워쌌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군대는 것이다.

“아...! 생각났다!”

구경 나온 사람들 틈에 서 있던 사내 중 하나가, 특유의 멍청한 얼굴을 활짝 펴고 손뼉을 탁 쳤다. 그리고 그는 어린애같이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이제야 기억해 냈어. 왕궁에서였어! 그래! 그 녀석, 네프 왕자였어!”

* * *

“처음엔 공주님인 줄 알았지.”

맥주잔을 들이키며, 사내는 그렇게 운을 띄웠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거든. 아버지는 군에 지원할 녀석을 뽑는다는 공문을 보고 당장 날 군인으로 복속시켰지. 군에 지원하면 조금이라도 선금이 나오잖아. 어차피 줄줄이 딸린 게 애새끼들이라서, 놈팡이 아들 하나쯤 전쟁에서 죽는다 해도 별 상관 없었지.”

사내가 그렇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사내의 말에 공감한다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자기 배 아파 낳은 아들이라고, 엄마는 내가 궁성으로 떠나기 전날 밤, 내 곁에 앉아 밤새도록 울더라고. 어린 동생들도 줄줄이 달라붙어서 펑펑 울고. 뭐, 조금 감동받았지. 기왕이면 살아서 더 많은 돈을 벌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더라고.”

“그래서 최전선에 지원한 거지?”

“그렇지. 전방에 지원할수록 살아 돌아갔을 때 받는 돈의 액수가 커지니까. 그런데, 전방의 지휘권을 왕자가 손수 맡게 됐다, 이 말씀이야.”

“결국 왕궁에서 본 왕자님이란 게, 그때 가게에서 본 이방인이라 이거냐?”

“그렇다니까. 내가 원래 여자가 아니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거든. 암만 예뻐도 남자니까 금세 기억에서 지워버린 거야.”

“그 녀석 둘을 살해한 건 설마... 왕자인가?”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자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던 사내가 까뭇까뭇한 수염이 앉은 턱을 슬슬 쓸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닐걸?”

“어째서?”

“생각해 봐. 왕자가 녀석들을 살해할 이유가 어디 있어?”

“우린 탈영병이니까.”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 말에,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여기 왕자님을 직접 본 사람이 몇이나 되지? 왕자를 봤다면 알 거야. 어디, 우리 왕자님께서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이나 쓰실 분인지.”

사내가 말한, 왕자를 직접 본 사내들의 무리는 말없이 그의 말에 수긍했다.

네프 왕자의 맑고 투명한 제비꽃 색 눈동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적에 대한 살의도, 그렇다고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절망조차도.

“게다가 왕자는 혼자야. 혈혈단신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할까, 그 머리 좋은 사람이?”

“혼자가 아닐 수도 있잖아.”

“주위엔 다 적들뿐이었어.”

사내는 맥주잔을 마저 비우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왕궁에서도, 길을 떠난 후부터도, 왕자의 주위엔 전부 적이었어. 내가 아는 자객만도 벌써 네 명이나 되는걸. 각기 다른 반란분자들로부터 보내진 자객들 말이야. 뭐, 그 네 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왕자한테 살해당했지만.”

가만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들이 문득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왕자가 일행 중 하나를 죽였던 적이 있었어.”

“자객이야, 그놈. 쓸데없이 살기를 풀풀 날리고 다니니까 그 꼴이 난 게지.”

순간 사내들은 당황했다.

은색의 악마라 칭하며 손가락질했던 왕자에 대한 이미지가 삽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언제 어디서, 왕자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들을 죽일까 두려워 도망쳤다. 하지만 이유 없는 살인이 아니었다. 목숨을 노리는 자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을 뿐.

가게 안에 모인 사내들은 외모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이유로 군을 탈출한 신세였다. 대부분은 지긋지긋한 전쟁이 싫어서였지만 그 중에는 미치광이 왕자의 횡포가 두려워서 도망친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어찌 됐든 네프 왕자는 미쳐 있었어. 그렇지?”

사내의 말에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당신들 말이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무슨 낯짝을 하고 돌아가? 돌아가 봤자 돈은커녕 가족들까지 몽땅 처형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래, 우린 탈영병이지. 하지만 말이야. 이번 전쟁으로 라자르 왕은 완전 이빨 빠진 괭이가 되었을 거라 이 말이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 사람들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마침 내가 있던 팀에 왕자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놈들이 그러더군. 전쟁이 끝날 때 즈음에는 쿠데타가 일어나 라자르 왕권을 갈아엎을 거라고.”

“뭐―!”

사내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라자르 왕은 완전히 신용을 잃었어. 국민들이고 뭐고, 그 미친 노친네를 살 떨리게 증오한다 이거지. 그런데, 애새끼 하나 없을 것 같던 라자르, 그 노친네한테 숨겨놓은 아들내미가 있었다는 게 문제였지. 그래서 왕실의 반란분자들은 대가리 맞대고 앉아 생각해 낸 거야.”

사내가 잠시 말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쳤다.

그 소리에 놀란 몇몇 사내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비리비리한 아들 새끼 따위 없애버리면 그만이지!”

단순명쾌한 사내의 말에 누군가 신나서 박수를 쳤다. 듣기만 해도 호쾌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 새끼가 때마침 이 나라를 위해 전쟁에 출전하여, 히이토, 개놈의 새끼들을 없애고 오겠소! 하고 선언을 해버린 거야! 반란분자들은 얼쑤! 아주 신이 났지. 자객을 시켜 왕자를 죽여도, 유감스럽게도 왕자님은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다가 전사하셨소, 하고 고해 바치면 그만이니까. 뭐, 히이토 개놈의 자식들이 왕자를 없애주면 더 더욱 좋은 일이고!”

“하지만......”

누군가 소심하게 사내의 말허리를 끊었다. 사내는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 있는 청년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하지만, 우리의 왕자님은 그 빌어먹을 라자르 노친네의 혈육답게 징하게도 강했다, 이거지. 자객들도 연이어 실패, 게다가 달려드는 히이토 짐승들도 우습지 않게 해치웠고. 어디, 악마란 놈이 그리 쉽게 죽을 존재겠어?”

“그래서, 결국 결론이 뭐냐?”

“우리가, 왕자를 죽이는 거다.”

그 순간 가게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가게 안을 분주하게 움직이던 메이도 행동을 멈추고 사내를 쳐다보아야 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기나 해? 그건 반역죄야!”

“반역죄가 아니지. 우리들은, 이 나라를 좀먹는 폭군 왕의 자손을 없애는 아주 숭고한 작업을 하는 거야.”

경악이 한바탕 지나가고 사내들 사이에서 느른하게 풀어진 음산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생각해 봐. 라자르 왕이 반란세력에 의해 축출되고, 우리들은 왕의 유일한 혈육을 없앤다. 그럼 새 세상이 열리는 거야.”

“과연...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겠군.”

누군가 손으로 볼을 북북 긁으며 말하자, 사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지! 저 빌어먹을 사막을 건너 도망치지 않아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거지!”

사내들의 눈이 굶주린 들짐승마냥 형형하게 빛났다.

그들은 역적모의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스스로의 결심을 굳게 다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어마어마한 범행을 계획한 사내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길게 의자에 늘어졌다.

-저 사람들, 미쳤어.

사내들의 사이에서 메이는 발소리를 죽여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가게 안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겁고도 음울한 것이었다.

전쟁을 겪어본 군인들은 사람을 죽이는 데 비상한 재주를 가진 자들이다. 처음엔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망설이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두 번 세 번 자꾸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진다.

근육을 찢고, 내장을 가르는 그 느낌에.

콧속을 파고드는 비릿한 혈향까지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무더운 날씨다. 이곳에 머무는 사내들은 모두 호수나 시원한 숲속에 가서 낮 시간을 소일하면서 보낸다. 그것은 왕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사내들은 밤을 노렸다.

사내들은 셋씩 짝을 지어 한 무리는 방에 침입하는 조로, 다른 몇 무리는 퇴로를 차단하는 조로 나누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들은 전쟁터에서의 파르르 떨리는 듯한 긴장감을 무척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세 명의 사내 중 하나가 굳게 닫힌 문에 귀를 댔다. 방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문 양쪽에 붙어 선 사내들에게 번갈아 눈짓을 보냈다. 오른편에 선 사내가 손가락으로 카운트를 셌다.

하나, 두울, 셋―

사내의 발길질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짝이 날아가고 양쪽에 붙어 서 있던 두 명의 사내가 재빨리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가 침대에서 누군가 서서히 일어나는 게 보였다. 은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창백한 낯빛을 띤 청년은 방 안에 침입한 사내들의 존재에 흠칫 놀라 몸을 사렸다.

두 명의 사내가 동시에 침대 위의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하나는 청년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명은 발버둥치는 청년의 배를 칼로 쑤셨다.

“허... 허어억......”

짓눌린 신음 소리와 함께 청년의 새하얀 속옷이 금세 핏물로 젖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두 번째의 칼날이 청년의 명치를 쑤셔박았다. 청년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며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침대 위의 시트가 청년이 흘린 피로 축축하게 젖었다.

“은색 악마 어쩌고 하더니. 뭐야? 너무 시시하잖아.”

사내들 중 하나가 피로 물든 칼을 침대 시트에 문질러 닦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진 청년의 은빛 머리칼을 움켜쥐고 얼굴을 들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사내가 힘을 주어 움켜쥐자 은빛 머리칼이 통째로 덜렁 들어올려졌다.

사내들 셋의 눈이 어둠 속에서 휘둥그레 커졌다.

사내의 손 안에서 덜렁이는 은빛 머리칼은, 가짜였다. 여자들이 쓰곤 하는 가발이었던 것이다.

“설마......”

탄식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아직도 간헐적으로 몸을 떨고 있는 시체를 뒤집어엎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참혹하게 일그러진 그 얼굴은 과연 왕자의 것이 아니었다.

주근깨가 점점이 박힌,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청년의 것이었다.

“이런 젠장!”

“참 깜찍하게도 노는군!”

무고한 청년의 목숨을 앗았다는 죄책감보다도 사내들은 왕자에게 속은 것이 더 분했다.

망연하게 방 안에 선 사내들의 귀에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것으로, 오감을 모두 칼날처럼 세우고 있던 사내들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비명 소리는 아래층에서 난 소리였다.

“속았군. 아주 멋지게 속았어!”

사내들 중 하나가, 창밖 너머,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서 벌어진 작은 활극을 쳐다보며 잇새로 말을 씹어 내뱉었다.

여관 뒷문을 지키고 있던 팀이었다.

둘은 죽었는지 부상당했는지 몰라도, 하나만이 누군가와 칼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다.

달빛에 비쳐 너울대는 한 마리 나비처럼도 보였다.

일렁이는 긴 은색 머리칼과 유연하게 대처하는 화사한 몸.

멀리서 봐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 그것은 네프 왕자였다.

귀족들의 심심풀이용 무투 대회라도 하듯, 허리를 꼿꼿하게 편 우아한 동작으로 왕자는 적과 맞서고 있었다.

누가 봐도 왕자 쪽의 실력이 우위였다.

무엇보다 분노에 차 이성을 잃은 짐승은 제 실력조차 내지 못하는 법이다.

“크윽!”

왕자의 칼날이 허공을 휙 가르더니 적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귀족의 무투 대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칼을 놓친 상대를 웃음 띤 얼굴로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앗아간다는 점이다.

눈이 아릴 정도로 화려한 솜씨였다.

정확히 급소를 노린 칼질로 싸늘한 바닥에 적을 무릎 꿇게 만든 왕자의 실력은 적이라도 박수갈채를 퍼붓고 싶을 정도였다.

“무시무시하군. 저 정도 실력에, 머리도 좋고. 왕이 되기엔 저만한 재목도 없을 거야. 라자르 노친네. 아들 농사 하나는 잘 지었구만.”

“뭐 하는 겁니까!”

동료의 채근에 서둘러 여관 밖으로 나갔지만, 사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세 구의 처참한 시체뿐이었다.

사내들은 새삼 절감했다.

왕자 역시, 군인임을.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 속을 구르던 전사라는 사실을.

그는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더 냉철하고 잔혹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였다.

“조를 나눈 게 실수였어. 떼로 덤벼들었어도 당해 내지 못할 상대였건만.”

분하지만 모두들 수긍했다.

자신들이 활 대신 검을 든 사냥꾼이라면, 왕자는 대륙에서 가장 잡기 힘든 야수일 것이다.

“어차피 사막으로는 나가지 못해. 그러니 이 마을을 빠져나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해. 어차피 좁아터진 시골 마을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좁아터진 시골 마을이라도 쥐새끼 한 마리 숨을 공간은 충분히 있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 시각이었기에, 네프 왕자는 어느 인가로 숨어들 수 있었다. 워낙 시골구석이라 마을 사람들은 밤에도 문단속을 게을리 했다.

아니, 인가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그가 숨어든 곳은 선술집 안이었으니까.

어둠이 내려앉은 가게 안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열기 품은 바람에 네프 왕자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씻겨졌다.

충분히 예상은 했었다. 그들은 군을 이탈한 탈영병이었고,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다. 가게에 그대로 얼굴을 내비친 탓에 분명 자신을 알아본 사내들이 있을 테고 그들은 머리를 짜냈을 것이다.

여기서 왕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해치우자고.

수도를 떠난 날부터, 지겹게도 달려들던 자객들과 다를 바 없는 사내들인 게다.

“후우......”

왕자는 벽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엔 짙은 피로감이 역력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은 늘어지기만 하는데, 이상하게도 정신은 맑게 깨 있다.

새벽의 숲을 산책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둠 속에서, 네프의 보라색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엉덩이에 닿는 마룻바닥의 딱딱한 감각마저도 아프도록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한 번에 떼로 덤벼들면 당해 내지 못한다. 오합지졸뿐인 자들이라 해도 일단은 군인이다. 그들이 살기를 내뿜고서 한꺼번에 달려들면 도저히 승산이 없는 것이다.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바보 같은 처사였다.

첫 번째, 탈영병들이 드글드글한 대낮의 가게에서 모두에게 얼굴을 내보인 것.

두 번째, 길을 걷던 사내들 둘을 살해한 것.

세 번째는, 방금 전 세 명의 사내들을 해치운 일이다. 마지막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손 쳐도, 위의 두 가지 행동은 자신답지 않은 처사임에 분명했다.

더위와 피곤 탓에 판단력이 무뎌진 것인가.

네프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목이 말랐다. 그리고 적의 피가 튄 얼굴을 씻고 싶었다.

마침 숨어든 곳이 선술집이었다는 것은 꽤 다행스런 일이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 주방으로 향하면 목을 축일 물과 맥주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네프가 물을 들이키고, 적신 천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있을 때였다.

“거기... 누... 누구세요?”

들려온 소녀의 가녀린 목소리에, 네프의 몸이 그대로 경직되었다.

어둠 속에 하얀 잠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땋고서.

달빛에 비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보이는 소녀가 이 선술집 주인의 딸이라는 사실은 곧 알 수 있었다.

“도... 도둑......”

소녀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내뱉자마자 네프는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말라비틀어진 소녀의 몸은 쉽게 네프에게 붙잡혔다. 그는 소녀의 입을 틀어막고 팔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혹, 다른 누군가가 또 있을까 봐 네프는 소녀를 끌어안은 채로 주방의 후미진 곳에 몸을 숨겼다.

“조용히 한다고 약속하면, 거칠게는 하지 않겠다.”

귓가에 속삭여지는 낮은 음성에 소녀는 커다란 눈을 굴렸다.

시선 끝에 슬쩍 보이는 침입자는, 도둑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고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프의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이 소녀의 얼굴을 간질였다.

“약속하겠는가?”

소녀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자의 음성에선 도도하면서도 우아한 기품마저 느껴졌다. 이런 목소리를 한 자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소녀의 본능은 말하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은 손을 놓아주자, 소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슬쩍 네프에게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네프와 마주보는 형상으로 맞은편 벽에 웅크려 기대서는 눈을 디룩디룩 굴렸다.

“아......”

하지만 곧 소녀의 작은 입술에선 공포에 찬 신음 대신 얕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눈앞의 남자는 살아 있는 조각상과도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윽한 자수정빛 눈동자, 더러워져 있고 무척 피곤해 보이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사내.

소녀, 메이는 알 수 있었다. 그때, 가게에서 본 그 남자였다.

“다... 다쳤어요?”

아름다운 사내의 외모에, 메이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었다. 보통 나쁜 사람이란 건 수염이 숭숭 난 우락부락한 사내를 지칭하는 거라고 배웠다. 저렇게 예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할 리는 없을 거라고 메이는 생각했다.

“이건 내 피가 아니다.”

얼굴이며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더니 네프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메이는 무릎을 웅크려 말고 앉아 네프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몸에 묻은 저 피는 그렇다면 누구의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긴 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조각 같은 사내의 외모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메이였다.

“저기......”

“뭐지?”

“왕자님이라면서요?”

네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벽에 완전히 머리까지 기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근데, 왕자님이 이런 데서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것저것 캐묻는 소녀의 존재가 무척 거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너무 피곤했다.

“우락부락한 오빠들이 가게에 모여서 왕자님을 죽인다고 했어요. 왕자님을 죽이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희희낙락 떠들더라구요.”

메이는 무릎을 웅크려 말았다. 가뜩이나 작은 소녀의 체구가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듯 더욱 왜소해졌다.

“미쳤죠? 완전 미쳤어요. 비겁하게, 전쟁이 무서워서 도망친 죄인 주제에.”

“넌 페르티잔인인가?”

“반은요. 엄마가 멘스터인이니까 하프죠. 하지만 우리 아빠는 자기가 페르티잔인이란 걸 되게 싫어했어요. 여기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랑 나랑 같이 멘스터로 가자고 했는걸요.”

네프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얘기 상대를 만나 신이 났는지 소녀는 쉴새없이 재잘댔다.

“솔직히, 나도 페르티잔이 싫어요. 아빠한테서 들은 페르티잔은, 으음... 썩은 돼지 시체 냄새를 풍기는, 그런 나라 같았어요. 전쟁에, 전쟁 또 전쟁. 정말 질리지도 않나 봐요. 이런 나라 따위 확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요.”

“전쟁은, 한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특효약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얘기 상대를 만난 것은 네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수도에서 떨어진 시골에 유폐되어 있을 때 얘기 상대가 되어주었던 건 유그, 그 아이뿐이었다.

유그와 순종적인 집사 데일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에 출전한 그때부터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주위엔 시도 때도 없이 칼날을 들이대고 목숨을 앗으려 하던 적들뿐이었다.

“전쟁에서 이기면 진 나라를 삼킬 수 있게 되지. 전쟁에서 이겼다는 대의명분으로 말이다. 그렇게 나라는 더러운 지방 덩어리를 비축해 가는 거다.”

메이는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고는 네프를 쳐다보았다.

네프의 은유적인 표현을 알아들을 만큼 메이는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늘 유그와 수수께끼 같은 말로 대화를 하곤 했었기에, 하는 수 없다. 그 외의 대화법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전쟁은 나쁜 거잖아요.”

“그렇지.”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일이잖아요.”

소녀의 입술이 뿌루퉁하게 나왔다.

“그러니까, 페르티잔의 왕도 나빠요.”

은유적인 표현을 쓴 것도, 미사여구로 치장한 말도 아닌 직설적인 두 가지의 문장만으로 소녀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이런 결론 도출법도 존재하는 것이구나.

네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페르티잔의 왕은 스칸데르 나라 사람들을 모두 죽였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죽였어요. 사람 하나를 죽인 것만으로 지옥의 유황불에서 100년이랬어요. 아마 페르티잔의 왕은 천년, 만년, 억만년까지 지옥의 유황불에 구워지고 또 구워질걸요? 아냐. 내가 지옥의 문지기라면, 그런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무척 유쾌하게 말을 꺼내는 소녀였다.

적들에게 쫓기는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이 소녀를 수도로 데려가 유그와 함께 셋이서 대화를 나누고픈 심정이었다. 이 소녀의 직설적인 화법에, 아마 유그는 눈을 빛내며 말을 풀어나갈 것이다.

“저기요, 왕자님.”

소녀의 부름에 네프는 슬슬 감겨오는 눈을 힘겹게 떴다.

“왕자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쪽이다.”

“스스로를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정말로 악한 사람은 없다고 아빠가 그랬어요.”

소녀가 콧잔등을 찡그린 얼굴로 웃었다. 솔직히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를 한 아이였지만, 네프는 소녀가 예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왕자님.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서, 꼭 페르티잔의 왕이 되세요. 좋은 왕이 되어서요, 사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 좀 그만 하게 해주세요.”

악마, 라자르 왕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숙청 대상이 됐다.

그 남자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공공의 적이 됐다.

“제가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는 샛길을 아니까 안내해 줄게요.”

소녀는 잠옷 바람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척 오랜만에 느껴보는 호의였다.

냉랭한 살기가 아닌 푸근한 온정으로 소녀는 자신을 대하고 있다.

그 사소한 것에, 네프의 얼어붙은 심장 한구석이 뜨뜻하게 저며왔다.

네프는 발소리를 죽여 소녀의 뒤를 따랐다. 소녀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가게 구석의, 나무판자를 덧댄 부분을 힘을 주어 밀어냈다. 그러자 나무판자 사이로 어둠에 가려진 공간이 나타났다.

“발목에 뭔가 닿는다고 해서, 놀라서 소리 지르거나 하지 마세요?”

소녀의 충고가 끝나기 무섭게, 네프의 발목에 선뜩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것은 습기를 머금은 파충류의 피부와도 같았다. 겨우 앞을 분간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어둠이라, 발목을 간질이는 존재의 정체를 알 순 없었지만 그것은 곧 사라졌다.

“저 숲속으로 쭈우욱 걸어가다 보면 마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어요. 사막을 지나지 않고서 멘스터로 갈 수 있는 길이에요. 사막으로 가면 일주일 걸릴 거리가 이리로 가면 한 달 이상이 걸리긴 하지만, 뭐 어때요?”

어둠의 터널을 지나 가게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자 소녀가 손가락으로 수풀이 우거진 숲길을 가리켰다.

“고맙다.”

네프가 인사하자 소녀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도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유그에게 늘 무언가를 아낌없이 주곤 했던 것처럼, 이 소녀에게도 고마움의 표시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네프는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에서 작은 돌 조각 하나를 꺼냈다.

가죽 주머니 안에는 약간의 돈과 유사시에 쓸 보석 몇 개가 들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크고 비싼 보석을 꺼낸 것이었다.

“이러지 마세요.”

소녀에게 보석을 건네자 소녀는 손을 붕붕 내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프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소녀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억지로 손을 움켜쥐게 했다. 네프가 그렇게까지 하자 더 이상 거절하기도 그런지, 소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폈다.

“어머나, 예뻐라.”

손바닥 안의 작은 돌은 달빛에 비쳐 영롱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소녀의 주근깨 박힌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바라보며, 네프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한밤의 사냥꾼들은 집요했다.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마을을 빠져나가려면 이 길밖엔 없다고.”

한 무리의 사내들이 어두운 숲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땀에 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검을 쥐고 있다는 것은, 이제 두 번 다시 왕자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뭐예요?”

“메이, 요 깜찍한 것. 네 녀석이 설마 배신할 줄 누가 알았겠냐.”

“처음부터 난 당신들 편이 아니었으니까 배신은 아니죠!”

자그마한 체구를 이용해 바락바락 대드는 소녀를, 사내들은 우악스럽게 쳐내고 앞으로 나섰다. 네프는 숲길을 오르려던 그 자세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밤의 사냥꾼들을 굽어보았다.

“눈 깜짝할 새에 셋이나 쓱싹했더군요, 왕자님?”

사내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선 조금의 장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먼저 날 죽이려 했으니까.”

“낮에 녀석들 둘을 죽인 것도 당신이죠?”

대답 대신, 네프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대었다.

눈앞에 포진한 사내들은 모두 다섯. 방금 전 해치운 세 명만큼 어설픈 실력을 가진 초보라면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냥 얌전히 죽어줬으면 우리들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잖습니까.”

“난 내게 칼날을 들이대는 자들을 가만히 두고 볼 만큼 너그럽진 않다.”

허리춤의 검을 뽑는 즉시 왕자는 어둠을 갈랐다.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린, 민첩하고도 정확한 동작이었다.

갑작스런 왕자의 공격에 사내들은 당황했다. 자세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왕자의 매서운 칼날은 사내들의 연약한 피부를 찢고 베어나갔다. 뒤늦게 부상당한 몸으로 검을 빼들어 흔들어 보지만, 이미 사내들은 왕자가 내뿜는 어마어마한 살기에 기가 죽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는 어린애 하나 베지 못한다.

“뭐 하는 거야! 고작 하나잖아!”

누군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고작 단 한 명의 적 때문에 다섯 명의 장정들은 나무 대가 꺾어진 허수아비 인형처럼 비틀댔다. 춤을 추듯 휘청댔다.

별 볼 것 없는 자들이었다. 곡괭이로 밭을 일구다가 얼떨결에 군에 자원한 애송이들일 게 분명했다. 적어도 다섯 중의 셋은 그랬다.

“현란하네요, 왕자님.”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육중한 검날이 휙 지나갔다. 재빨리 몸을 숙여 피하지 않았다면 목이 잘려나갔을 엄청난 공격이었다.

하지만 몸을 숙여 피한 순간 오른편에서 날아든 두 번째의 공격에 네프의 은빛 머리카락이 잘려 허공에 흩날렸다.

다섯 중의 셋은, 보잘 것 없는 애송이였다. 하나 다섯 중의 둘은 용병이었다.

그들은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수많은 실전 경험으로 자신만의 검술을 터득하고 있는, 전쟁터에선 가장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전쟁터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 네프도 꽤 곤란을 겪고 있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듯 두 명의 사내는 죽이 척척 맞았다. 하나가 오른편에서 공격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재빨리 다른 하나가 왼편을 노리고 공격한다.

네프의 창백한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여러 번 허공을 가른 검날에 몸 여기저기가 찢어져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정신없이 사내들의 공격을 피하며 나름대로의 공격을 퍼붓다 보니 체력은 금세 바닥이 났다. 네프가 중심을 잃고 휘청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옆구리를 베었다.

“크윽......”

약한 신음과 함께, 네프는 이리저리 휘청거리다가 풀밭에 주저앉았다. 거친 숨결과 함께 흐려진 시야에 검을 들고 서 있는 두 명의 사내가 보였다.

“지금 당신이 보기에 우리들은 적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살기 위해서 그랬듯, 우리도 살기 위해서 당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는 분명 승자의 입장에 서 있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먼저 지옥에 가 계십시오. 살 만큼 다 산 뒤에, 당신이 계시는 지옥으로 찾아가 뵙도록 하겠나이다.”

의외로 초연해졌다.

머리 위에서 빛나는 서슬 퍼런 검날을 아무렇지 않게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동안 너무도 죽음이란 존재와 친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중요한 순간 소녀, 메이가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의 허리춤에 안겨서는, 애원했다.

“왕자님을 죽이지 말아요!”

“비켜라, 메이.”

“왕자님! 빨리 도망치세요!”

사내의 곁에 서 있던 또 다른 그의 동료가 소녀의 몸을 우악스럽게 잡아떼려 했다. 하지만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메이를 허리춤에 매단 채로는 생각하고 있던 동작을 실행에 옮길 수 없어, 사내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네프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손에 검을 다잡았다. 기력이 다할 대로 다한 터라, 쏘아보는 눈빛이 더욱 매섭다.

“이놈의 계집애! 떨어지지 못해!”

드디어 사내의 동료가 소녀를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악스런 손길에 소녀는 풀밭 저편으로 나동그라졌다. 두 명의 사내가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 것을 보자, 메이는 황급히 일어나서 달려갔다.

그것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에서 소녀가 달려드는 줄 상상조차 못한 사내들은 공격을 하기 위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마침 검날이 향한 끝에 소녀의 몸이 있었다는 건 유감스런 일이었다.

“메이!”

사내 중 하나가 그렇게 소리쳤다. 검날에 꽂힌 소녀의 빈약한 가슴이 붉게 물들었다. 소녀는 그대로 몸을 떨며 주저앉았다. 소녀의 작은 입술 사이로 핏덩이가 터져나왔다.

“아... 아파......”

피를 한 웅큼씩 쏟으며, 소녀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젖은 소녀의 두 눈은 비스듬히 버티고 선 네프를 향해 있었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나선 거야!”

“흐윽......”

사내들은 당황했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소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사내들은 소녀를 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흐르는 피를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 메이, 정신 차려!”

소녀의 눈이 서서히 감겨들었다. 사내들에게 안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희미한 고통과 사내들의 절규. 그런 것들 속에서 소녀, 메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은빛 갈기를 풀어헤친 야수가 다가오는 것을.

헝클어진 갈기 사이로 자수정빛 눈동자를 빛내며, 야수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앞발을 쳐들었다. 검을 쳐들었다.

짧은 순간의, 검무(劍舞).

찰나의 비명.

은빛 야수는 순식간에 두 명의 사내를 먹어치웠다. 깨끗하고 정확하게, 단칼에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왜인지 몰라도, 소녀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뿜어져 나왔다.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광포한 은빛 야수의 두 눈이 애처로운 색을 띠고 빛나고 있었기 때문일까.

“미안하다.”

은빛 야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소녀가 듣게 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소리였다.

찌르르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느른하게 피부를 감쌌다. 어느새 밤하늘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완벽한 어둠에 휩싸인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네프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밤의 색을 한 머리칼을 지닌, 거친 야생마 같은 사내를.

너무 피곤했다. 옆구리의 상처가 쿡쿡 쑤셔와 입술 사이로 얕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무 기둥에 기대 네프는 눈을 감았다.

이 밤의 숲속에서 자신은 역시, 혼자였다.

꿈속에서 늘 눈 내리는 산길을 외로이 걷던 것처럼.

“고독하군.”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한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네프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낮의 태양보다 더 밝고 찬란한 황금빛 갈기를 지닌 사자는 검은 악당의 커다란 발밑에 깔려 버둥댔고, 검은 악당은 그 아름다운 사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황금의 사자여, 그대가 알다시피 난 어둠일세.

어둠은 내 어미와도 같고 친구와도 같은 존재이나, 가끔 난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곤 한다네. 그때마다 난 내가 내 친구와도 같은 탐욕스런 어둠에게 잡아먹히는 게 아닐까 두려워지곤 해.

황금의 사자여. 그대가 내 빛이 되어주면 안 되겠는가.

내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그 아름다운 황금빛 갈기로 내 앞을 비춰주면 안 되겠는가. 황금의 사자는 그렇게 하겠노라 했고, 검은 악당은 그날 이후 빛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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