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언제였던가.
그래, 그때였다.
사방에서 썩은 내가 풍기던, 붉은 지옥.
하늘에선 피처럼 붉은 눈이 내렸다. 스칸데르 지방에 50년에 단 한 번 내린다는 기적의 붉은 눈.
하지만 모두 죽어 있었다. 그곳은 완벽히, 죽은 땅이었다.
한때 아버지라 불렀던 사내, 어머니라 불렀던 자애로운 여인, 어린 동생들, 어린 친구들, 그들은 모두 싸늘한 고깃덩이가 되어 조용히 붉은 눈을 맞고 있었다.
그들 위로 붉은 눈은 덧없이 쌓여만 갔다.
“아......”
차라리 그것이 악몽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잠에서 금방 깬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 있던 영상들이 가족들, 친구들, 그들의 시신과 함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살육자. 그들은 짐승을 도축하듯, 그들을 베어갔다.
용맹한 스칸데르의 전사들은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힘없는 어린아이, 여자, 노인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그들은 악마였다.
피바람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던, 그 남자는 악마였다. 그랬기에 평범한 인간이었던 자신들은 어이없이 당하고 말았다.
-도망쳐! 너만이라도 살아남아라, 예르네이!
어린 누이를 품에 안고, 어머니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들이 던져놓은 불꽃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집을 태우고, 아이들, 여자들을 태우던 그 불꽃은 얼마나 선명한 붉은빛이었던가.
-너만이라도 살아남아!
어미는 그렇게 말했다.
살아남는 것,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어미는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고 죽어갔는가.
“그쪽은 위험하니 더 이상 들어가지 마십시오!”
적막만이 내려앉아 있던 광활한 대지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은 자들의 세계 위로 그 목소리가 윙윙대며 메아리쳤다.
눈 때문에 그리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박자박, 말발굽 소리, 사람의 숨소리, 그런 것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죽은 자의 세계에 발을 디딘 이방인은, 아직 어린애였다.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작고 연약한.
히지만 검은 말 위에 올라탄 그 자태는 무척이나 당당했고 꿈속의 여인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이건 역시 꿈이구나,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작은 몸을 감싼 옷,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망토, 거기엔 피처럼 붉은 용이 살아 숨쉬듯 꿈틀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저 죽여버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똑똑히 보았다.
지난밤, 잔악한 살육자들의 선두에 선 그 사내.
그 사내의 몸을 휘감은 검은 망토.
거기에도 저 아이의 것처럼 붉은 용이 꿈틀대고 있었다.
“하앗―!”
스칸데르인은 강했다.
그러나 용맹하고 강인한 전사의 핏줄을 타고난 자신이었지만, 아직은 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무력한 어린애일 뿐.
그리고 그 아이는 검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기세 좋게 달려들긴 했지만 호되게 얻어맞고 바닥 위로 쓰러졌다.
아이는 싸늘한 자수정빛 눈동자로 그런 자신을 쳐다보았다.
눈처럼 하얀 얼굴에선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랍군. 이런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녀석이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어린 녀석이 말이야.”
“죽여버리겠어.”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아이의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냉정했기에, 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엇이든지 이 손으로 잡아 비틀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무기도 없는 애송이가 이 나를 죽이겠다고? 웃기는군.”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아이는 강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검을 빼내, 지난밤의 살육자들처럼 사정없이 자신의 목을 꿰뚫을 수 있을 것이었다.
“기적의 붉은 눈이라......”
아이는 붉은 눈이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창백한 아이의 얼굴은 왠지 무척 고되고 지쳐 보였다.
“어디 계신 겁니까!”
아이의 동행인 듯한 성인 남자의 목소리에, 자신은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던가.
“어디 계신 겁니까, 대체!”
“난 여기 있다!”
죽는다!
허공을 향해 뻗은 아이의 하얗고 섬세한 손은 마치 사신의 거대한 낫과도 같아 보였다.
죽는다! 어머니처럼, 내 아버지처럼,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울며 죽어갔던 어린 동생들, 내 친구들처럼!
겁에 질려 몸을 떠는 자신이 흥미로웠던 건가.
아니면, 그런 자신을 동정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자신을 그 시체뿐인 붉은 눈밭에 내버려두었다. 비록 사정없이 머리를 후려갈겨 기절시키긴 했어도 정신이 들었을 때 어쨌든 목숨은 붙어 있었다.
“한 명쯤 살아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것은 비웃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주 가끔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기억은 조금씩 색을 달리한다. 예를 들면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이의 얼굴, 눈, 그런 것들이 말이다.
처음엔 그저 자신에 대한 경멸뿐이었던 그 얼굴이, 그 눈이, 기억을 떠올리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음울한 청회색 빛으로 물든다.
그때 그 아이의 옆얼굴이 왠지 슬퍼 보였다고 단정지은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기억 속의 그 아이를 떠올리면 애틋한 감정에 가슴 한쪽이 시려왔다.
알 수 없는 그리움과도 비슷한, 그런 감정에 말이다.
* * *
그들은 야생 곰 같았다.
육중한 덩치만큼이나 먹는 양도 엄청났는데, 그들은 주로 야생 동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 둘씩 짝을 지어 사냥을 나갔다 오면 멧돼지나 노루 같은 것들을 두세 마리씩은 잡아오곤 했다. 활 대신 검으로 성난 멧돼지를 잡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잡아온 야생 동물들도 이틀 정도면 바닥이 났다.
멧돼지 하나를 통째로 구우면 앉은 자리에서 뼈까지 싹싹 발라먹기 때문이었다.
“자, 먹어라.”
포로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리 가혹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시장에 팔아 한몫 단단히 건질 수 있는 상품이라고 그들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스칸데르, 그것도 혼혈이 아닌 순도가 확실한 순혈종이니 한몫 단단히 챙겨 호위호식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예르네이는 히이토 사내가 내민 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 익은 멧돼지의 넓적다리 부분이었다. 게다가 물과 과일도 있다. 이 정도면 포로 대우가 아니라 귀빈 대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잘 먹여서, 적당히 보기 좋게 살이 올라야 더 비싼 값에 팔 수가 있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키들대며 웃는 사내의 손에서 예르네이는 고기를 받아 들었다. 잘 먹인다는 그들의 말대로, 손에 쥔 고기는 보통 사람이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다.
약간 누린내가 나긴 했지만 예르네이는 말없이 고기에 입을 댔다.
이런 때일수록 먹어서 체력을 비축해 두어야 한다.
주는 음식조차 받아먹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노예시장에 내놓기 전에 약초쟁이한테 먼저 가봐야 되는 거 아닐까요? 생김새도 괜찮고, 몸도 좋고, 다 괜찮은데 어디 눈이 저래서야......”
“도망간 그 쥐새끼 놈의 가방에 필요한 약이 있을 게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정도 상처를 입은 동료를 데리고 다니려면 약이 필요한 게 당연하지. 그것 때문에 마을에 머물렀을 게 뻔하잖아.”
우두머리는 괜히 우두머리가 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하나같이 야생 곰 같은 무리인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우두머리는 최소한 머리라는 걸 쓸 줄 아는 족속인 듯했다.
“어디 보자.”
사내들 중 하나가 육즙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토오르의 가죽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토오르가 사서 모아놓은 약과 아성초, 약간의 음식, 그런 것들이 들어 있었다.
문득 토오르와 긴의 생각이 났다.
그들은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긴이라는 그 사내가 같이 있다면 토오르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다.
자신이 무슨 가축도 아닌데, 이런 썩어빠진 동아줄로 발이며 손에 족쇄를 채워놓는단 말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예르네이를 짐승처럼 나무 기둥에 묶어놓거나 했다. 그러나 이 동아줄이란 게 꽤 질겨서 혼자의 힘으로는 풀 수가 없다. 밤새도록 발버둥쳐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싶으면, 아침에 사내들은 다시 느슨해진 줄을 동여맸다.
“이건가?”
사내가 드디어 약초 비슷한 통을 꺼내 들어 보였다.
빌어먹을, 그건 아성초를 짓이긴 가루다.
“이 멍청한 놈아! 그건 머리를 염색하는 약초다!”
결국 놈들의 우두머리가 보다 못해, 직접 가죽 주머니를 뒤적여 약초 통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수 약초 통을 들고서 예르네이에게 다가왔다. 거대한 덩치와는 달리, 사내의 동작은 나긋나긋한 고양이 같았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자만이 낼 수 있는 움직임이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이 사내만큼은 당해 내기 어려울 것 같다고 예르네이는 생각했다.
“두목, 이런 난리통에 노예시장이 열리긴 할까요?”
“전쟁통이니까 더욱 성황일 게다. 포로로 잡은 녀석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싶어할 테니까.”
“저 녀석을 팔아서 돈이 생기면 어쩌실 겁니까, 두목은?”
“뭘 어째.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쁜 마누라 얻어 떵떵거리며 사는 거지.”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우리 같은 놈들이랑 결혼해 준답디까?”
“돈이 있으면 여자가 꼬이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선 돈이 최고야.”
사내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붕대를 벗겨내고, 깨끗한 물에 적신 천으로 환부를 닦아낸 뒤 약초를 발라주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토오르의 손길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그나저나 어떤 미친놈이 이렇게 해놨대요?”
“우리 같은 미친놈이겠지.”
사내의 말에, 그의 동료들은 키들대며 웃었다.
히이토의 군인들은 그야말로 야수다. 산 채로 적의 사지를 잡아 찢거나 비틀어 죽이는 건 그들의 특기다.
“설마 스칸데르의 고귀한 혈통께서 전쟁에 참전한 건 아닐 테고.”
약초를 바르고 토오르의 가방 안에 있던 새 붕대로 환부를 동여맨 뒤 사내는 예르네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렇게 무릎을 굽혀 앉아도 예르네이가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커다란 덩치다.
“너도 참 안됐군.”
다른 누구도 아닌, 히이토의 군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페르티잔의 그 미친 국왕 덕분에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잖냐. 뭐, 우리들 히이토도 마찬가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 미친 국왕도 라자르 왕한테 당해서 미쳐버린 거니까, 나쁜 건 라자르, 그놈 하나뿐이지.”
사내는 눈을 지그시 뜨고는 아들에게 하듯 예르네이의 푸석푸석한 붉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눈 밑의 굵은 주름과 패색이 짙은 표정으로 보아, 사내는 꽤 나이가 많은 듯했다.
사내가 다시 동료들의 틈으로 돌아간 후, 예르네이는 먹다 남긴 고기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아직 반도 채 먹지 않은 멧돼지의 넓적다리에서 역한 누린내가 훅 풍겨왔다.
밤새 줄을 느슨하게 하느라 팔을 비틀어댔던지라 손목 주위의 살갗이 벗겨져 욱신댔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 우두머리라는 사내는 피가 배어나온 손목에 약초를 발라주고 붕대를 감은 다음 다시 줄을 묶는다.
사내는 세심하게 예르네이를 배려했다.
잔악무도한 야수라고만 일컬어지던 히이토의 군인이었기에, 그런 사내의 태도는 당혹스러웠다.
“오늘은 근처 호수에 가서 목욕이나 할까? 어때?”
마지막 고기를 뜯으며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사내들이 일제히 뼈만 남은 고기 조각을 들고 아우성쳤다.
예르네이는 남은 고기 대신 물과 과일을 먹었다.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랬다. 이런 날, 나무 그늘에 앉혀놓은 배려도 남다르다.
문득 지금 이렇게 빠져나가려 아등바등 설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히 할 일은 없다. 이들에게서 도망쳐 봤자 가야 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엔가 살아 있을 레이루, 그 애를 찾아나서야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좀 자두자.
* * *
살기 좋은 곳이었다.
사시사철 따뜻하고 늘 꽃내음이 풍겨왔으며 사람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용맹하고 강인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전사들의 나라.
스칸데르는 그런 나라였다.
그랬기에 주위 열강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나라는 작지만, 어린 여자아이조차도 검을 들고 싸울 줄 아는 국민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실 스칸데르의 역사가 그런 식으로 끝날 것이란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강한 나라에게 약한 나라가 집어 삼켜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페르티잔이라는 거대한 야수는 스칸데르를 집어 삼키는 것뿐만 아니라 형체도 남김없이 씹어 삼켰다.
잇새에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서.
도시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극도의 피로감에 지쳐 사람들은 여기저기 시체마냥 늘어져 있었다.
도시의 이름은 바흐티라고 했다. 토오르의 동료들이 말했던 대규모의 노예시장이 열리는 지방이었다.
토오르는 긴과 함께 떠나고, 토오르의 동료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마을 사람들을 살해한 장본인인 히이토들과 함께 이 지방을 찾은 것 또한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노예시장이 열린다고 들었는데.”
히이토 족 사내가 약간 허리가 굽은 중년의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지쳐 늘어진 사람들과 달리 그는 꽤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살이 적당하게 오른 두툼한 얼굴은 혈색이 무척 좋았다. 한눈에 봐도 그가 부유한 상인임을 알 수 있었다.
“이틀 뒤에 열린다네.”
사내는 히이토의 거인 족을 눈앞에 두고도 특유의 거만함을 잃지 않았다.
이 도시 어디에서든 히이토의 거인 족들을 볼 수 있었기에,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거, 팔 건가?”
사내가 육중한 뱃살을 출렁이며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히이토의 사내 뒤에는 빛을 피하기 위해 어두운 색의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가 있었다. 줄로 손발이 묶여 히이토의 사내에게 끌려 다니고 있었지만, 그리 험하게 다룬 흔적은 없어 보였다.
“덩치도 꽤 좋고, 어디 보자.”
사내는 뒷짐을 지고, 후드를 뒤집어쓴 청년을 이리저리 살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완고한 턱선과 모양 좋은 입술만 봐도 그가 꽤 그럴듯한 외모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페르티잔 군인 포로인가?”
“아니.”
“어디서 멀쩡한 민간인 하나 잡아왔나 보구만. 기왕 노예시장에 갖다 팔 거, 여자가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노예시장은 이틀 뒤에 열린다고 했지? 상품 접수는 어디서 하는 거지?”
“멀리 갈 필요도 없수. 내가 접수 담당이니까.”
사내는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는 펜촉 끝에 침을 묻혀서는 종이에 무엇인가를 갈겨썼다.
“20세 전후의 신체 건장한 청년. 정확히 어디 국적이지? 페르티잔? 멘스터?”
“스칸데르.”
스칸데르, 그렇게 웅얼거리며 펜으로 후려갈기던 사내가 어느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히이토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건가?”
“농담 따위가 아냐.”
음산하게 말하는 히이토 사내의 눈빛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야생 곰 같은 덩치로 쏘아보는 위압감에 주눅이 들 만도 하건만, 사내는 뱃살을 출렁이며 히이토 사내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업계에서 썩어 지낸 것만도 30년이오, 30년! 페르티잔이 스칸데르를 먹어치우고 나서, 종종 스칸데르의 피가 섞인 혼혈을 거래해 왔다, 이거야!”
“그래서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우선, 머리카락 색이 붉잖아!”
“머리카락 색이야 염색으로 쉽게 변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히이토 사내를, 상인은 찡그린 낯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그가 스칸데르인이라 했던 청년 주위를 기웃거리며, 슬쩍 후드를 올려보기도 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머리카락 색이야 염색으로 빼면 그만이다.
후드 아래의 남자다운 얼굴과 매처럼 빛나는 눈. 외모면 외모, 체격이면 체격, 이 정도면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물건이 아닌가.
지금까지 종종 스칸데르 혼혈을 거래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 상태 좋은 상품은 또 처음이었기에, 사내는 몇 번이고 청년 주위를 알짱거렸다.
“여기 와서 다른 중개업자한테 이 청년을 선보인 적 있나?”
“아니, 당신이 처음이다.”
“그럼 됐수. 값은 가장 후하게 쳐줄 테니, 다른 중개업자를 찾느니 나랑 거래합시다. 4대 6 어떻수?”
“3대 7이다.”
“바흐티 노예시장에선 나만한 장사꾼도 없수! 내 손에 걸린 노예는 매번 가장 비싼 값에 팔려나가곤 했다, 이 말이야!”
“그렇다면 다른 중개업자를 알아보는 수밖에.”
“자... 잠깐! 그리 성질이 급해서 어찌 사누!”
사내는 재빨리 히이토 족 사내의 앞을 막아서고는, 종이에 아래 사항을 써넣었다.
《나이 20세 전후의 신체 건강한 스칸데르 혼혈.》
평소 버릇대로 종이에 글자를 적어넣으면서 입 밖으로 중얼대는 사내의 말을, 히이토 족의 사내가 정정해 주었다.
“스칸데르 혼혈이 아니라, 순종.”
이번에는 사내의 손에서 펜이 툭 하고 떨어졌다.
“뭐... 뭐라고 해... 했수?”
“혼혈이 아니라, 순종이라 했다.”
“수... 수... 순조옹......?”
“왜? 이번에도 믿지 못하겠는가?”
“자... 자... 잠깐.”
사내는 식은땀이 비어져 나온 얼굴로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마을 앞 광장 맞은편에 코로로라는 여관이 있을 거유. 거기 가서 셀마너스의 비로가 보냈다고 하면 제일 좋은 방을 줄 거유. 거기서 시장이 열릴 때까지 쉬도록 하슈!”
“뭘 좀 아는 친구군그래.”
“그리고 내일, 광장으로 나오슈. 그가 정말 스칸데르의 순종인지 아닌지 품평할 테니까.”
“마음대로.”
히이토의 사내는 손에 움켜쥐었던 줄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줄에 묶여 있던 청년이 비칠거리며 끌려갔다.
“세상에... 스칸데르의 순종이라니......”
사내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손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여자,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거리로 몰려나와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눈을 빛냈다.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온갖 추잡한 말들과 우스운 농담, 걸걸한 웃음, 그런 것들이 오고 갔다.
“세상에. 저게 진짜 ‘그거’란 말야?”
“난 혼혈은 본 적 있어도, 순종은 처음 봐.”
“그런데 보통 인간과 다를 게 없잖아? 저 자식들 사기 치는 거 아냐?”
누군가의 걸출한 욕설에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어떤 것’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던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갓난애조차도 망설임 없이 베어버린다는 악명 높은 히이토 전사의 눈빛에, 그들을 사기꾼 취급한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봐. 저기 후드 바깥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붉은색이잖아. 역시 저건 아냐. 돈이 궁하니까 사기를 치려는 거라고.”
평생 속고만 살았는지 사내는 사람들 틈으로 몸을 숨기고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그들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스칸데르의 순종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오전부터 여관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 덕에 진땀을 빼야 했다. 그 셀마너스의 비로라는 놈이 일부러 소문을 흘렸을 거라고, 히이토의 사내들은 생각했다.
그 골수까지 장사꾼인 녀석.
이렇게 소문을 내는 것으로 광고를 대신하려는 게다.
뭐, 그렇게 해서라도 더 비싼 값에 팔아주면 고맙지만 당하는 쪽 입장도 좀 생각해 줬으면 하는데.
“이거 원, 그 빌어먹을 놈은 왜 안 오는 거야?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가 서커스단의 광대가 된 것 같잖아?”
주위를 에워싸고 수군대는 군중들의 물결 속에서, 히이토의 군인 중 하나가 인상을 확 구겼다.
“이렇게 덩치 큰 광대 봤냐? 광대가 아니라 서커스단의 명물, 성난 야생 곰이겠지.”
머릿속에 든 거라곤 싸움, 여자, 그런 것밖에 없을 거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야만족, 히이토 사내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야만족이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에게도 인간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지 그들은 아이처럼 농담을 하거나 손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더러운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결코 작은 체구가 아니었지만, 워낙 히이토의 군인들이 무식한 체구를 자랑하는 탓일까. 우락부락한 어른들 사이에 외따로 버려진 어린애처럼 보였다.
“이제야 엉덩이 무거운 늙은이가 왔군.”
정말 그랬다.
우두머리의 농담처럼 그들은 정말로 엉덩이가 무거워 보였다.
화려하다 못해 천박하기까지 한 옷을 몸에 두르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두 명의 사내. 그들 중 하나는 어제 본 셀마너스의 비로라는 사내였다. 그들은 한 형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체구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딱 그 짝이다.
물돼지 같은 사내들의 출렁이는 뱃살과, 뱃살이 출렁일 때마다 함께 덜렁이는 어른 주먹만 한 루비 목걸이, 그런 것들이 기가 막힌 부조화를 이루고 있어, 정말이지 할 말이 없어진다.
어제 봤던 셀마너스의 비로가 물돼지들의 대장인 듯한 사내에게 무어라고 작게 속삭였다.
혹시 당신들 형제 아니냐고 진심으로 묻고 싶어진다.
“자네들이 ‘그걸’ 가져왔다는 상인인가?”
물돼지들의 대장이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들의 선두에 섰다.
살찐 목에 걸린 저 루비는 진품이다.
피처럼 붉은 색과 섬세한 세공, 게다가 저 크기라니. 저거 하나라면 아마 별 볼일 없는 소 국가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듯싶다.
“호오, 이게 그 물건인가?
물돼지들의 우두머리가 감히 겁도 없이 귀하디귀한 상품에 더러운 앞발을 들이민다.
어이구, 저러다가 호되게 물리고 말지.
“얼굴을 좀 자세히 봐야겠어.”
사내는 손을 뻗어 청년의 머리를 감싼 더러운 망토를 벗겨내려 했다. 하지만 망토 밖으로 굵은 팔이 뻗어나와 살이 통통하게 오른 물돼지의 손을 할퀴었다.
그것 봐, 조심성 없이 건드렸다간 물릴 거라고 했잖아.
손목의 상처가 더 심해졌길래 줄을 좀 느슨하게 묶어놨거든.
“이... 이런 무례한!”
그래봤자 돈 좀 많은 상인인 주제에 말투는 꼭 어느 도시의 밥맛없는 귀족 같다.
“이거 미안하게 됐수다. 오랜 여행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군요. 워낙 예민한 녀석이라서요.”
히이토의 우두머리가 싱글싱글 웃으며 물돼지에게 말했다. 스칸데르 청년에게 손등을 긁힌 물돼지는 허연 지방 덩어리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빽 소리쳤다.
“자네 손으로 망토를 벗겨봐!”
여기가 전쟁터가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 빌어먹을 자식.
히이토의 우두머리가 애써 힘겨운 미소를 짓고는 청년의 머리를 덮고 있던 천을 벗겨냈다. 머리 위의 장막이 사라지자, 청년은 무척 눈이 부신지 하나뿐인 눈을 가늘게 치떴다. 귀까지 벌겋게 물들이고서 꿀꿀대던 물돼지의 눈이, 순식간에 냉철한 상인의 그것으로 변했다.
“외모는 그럭저럭 괜찮군.”
상인의 입에서 그럭저럭이란 단어가 나왔을 땐 속으로 쾌재를 불러도 좋다.
상인이란 놈들은 무척이나 인색한 놈들이라 아무리 대단한 물건을 봐도, 뭐, 그럭저럭 괜찮군, 따위의 말을 지껄인다 이거지.
살이 두툼하게 오른 물돼지의 손이, 방금 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칸데르 청년에게로 뻗어왔다. 과연, 청년은 눈을 부릅뜨고는 물돼지의 손을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댔다.
“보통 가죽 족쇄를 채우는 게 기본 아닌가! 이렇게 허술하게 묶어두었다가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당신, 우릴 뭘로 보는 거요?”
그나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비교적 양호한 것이었다.
히이토 사내의 서슬 퍼런 살기에, 물돼지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어제 셀마너스의 비로가 그랬던 것처럼 스칸데르 청년의 주위를 알짱알짱 댔다.
어느새 광장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 역시, 상인처럼 스칸데르 청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는 청년이었다.
비록 손과 발은 낡아빠진 줄로 묶여 있지만, 그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야생의 맹금류와도 같아 보였다.
“나쁘진 않아. 확실히. 그런데 이 눈은 어떻게 된 게야?”
상인은 오늘 아침 새 붕대를 감아놓은 청년의 한쪽 눈을 가리켰다.
“없수다. 아예 안구 자체가 뻥 뚫려 있어. 아! 그건 이 녀석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그랬던 거요!”
“머리카락은 아성초로 염색한 것일 테고, 확실히 골격이나 생김새는 스칸데르의 것이 맞군. 하지만 이 남자가 혼혈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증거는?”
“크윽!”
상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히이토 사내가 청년의 목을 움켜쥐었다. 히이토 사내의 털이 숭숭 난 커다란 손은 스칸데르 청년의 목을 길게 잡아빼 뒷덜미를 드러나게 했다.
상인의 두 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약간은 색이 바랜 별의 문양.
분명 처음에는 짙은 초록색을 띠고 있었을 그것.
“어떻소?”
“맞군. 확실히......”
상인의 허연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곁에 서서 알짱대던 셀마너스의 비로 역시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허옇게 됐다.
모여선 군중들 사이에선 탄성이 터져나왔다. 히이토 전사들을 사기꾼이라 몰아붙였던 말 많은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네들 정말......”
“엉?”
“정말 이자를 노예시장에 내놓을 건가?”
“설마 겁나는 거요? 페르티잔은 이미 완전히 힘을 잃었어. 페르티잔은 이제 찢어진 종이호랑이에 불과하잖소.”
찢어진 종이호랑이건 뭐건 간에, 거의 20년 이상 페르티잔의 라자르 왕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해 왔다.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 탓인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페르티잔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뭐, 됐어. 비합법적으로 열리는 노예시장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자... 잠깐!”
하지만 상인이란 족속들은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 속에서도 자기 물건을 팔, 그런 족속들이지.
히이토의 우두머리는 싱긋, 웃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저 물돼지가 자신들을 잡은 이상 흥정은 끝.
“그럼 우선 얼마를 줄 거요?”
히이토의 우두머리는 손으로 연신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닦아내는 상인을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뭐지?”
“중화제. 시장이 열릴 때까지 본래의 색으로 만들어놓으라는군.”
손에 잡히는 윤기 없는 붉은 머리카락을 마음껏 헤집으며,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게 어지간히도 기분 나빴는지 이 까만 털의 야수는 매정하게도 손을 쳐낸다.
“그리고 말이야, 덤으로 이것까지 주더군.”
철컹, 소리를 내며 사내가 뭔가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가죽으로 된 족쇄였다. 길게 이어진 끈이 사슬이 아니라 역시 가죽으로 되어 있는 것만 봐도 돈깨나 주고 샀을 고급품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것을 쳐다보는 스칸데르 청년의 눈에선 붉은 살기가 넘실댔다.
그러니까 이딴 걸 채우려 했다간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뒤로 꼴깍 넘어가 버릴 태세였다.
“두목! 시장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물돼지 상인에게서 받은 선금을 좀 떼어줬더니, 당장 시장에 나가겠다고 저 난리다.
동전 한 닢 꼭 쥐고서 방방 뛰는 어린애 같은 그들의 모습에, 사내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오랜만에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 실컷 즐기다 와.”
“되도록이면 빨리 들어올게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밤이 꼴딱 새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을 녀석들이란 거 다 안다.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여관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셀마너스의 비로라는 이름을 대자, 여관 주인은 가장 좋은 방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 물돼지 형제들은 이 지방에선 알아주는 유지인 듯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평판도 꽤 좋은지 여관 주인은 연신 셀마너스의 비로와 물돼지 형님의 찬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히이토의 우두머리인 사내는, 꽤 기분이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바닥에 주저앉은 스칸데르 청년을 안고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굴러 들어온 호박이란 말은 분명 이런 때 쓰는 것일 게다.
그 물돼지 상인은 저런 더러운 꼴로는 손님들이 동전 한 닢조차 내지 않을 거라고, 손수 골라 산 옷까지 보내주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보니,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다.
“페르티잔이 쇠했다고는 해도 말이야. 스칸데르인이 살기엔 세상이 너무 각박해. 한몫 건져보려는 사냥꾼한테 쫓겨다니다가 호된 꼴을 당할 수도 있고, 평생 도망치면서 사는 건 너무 비참하잖아?”
여관 주인이 특별히 마련해 준 질 좋은 포도주를 쭈욱 들이키며, 히이토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너무 원망은 하지 마라. 또 아냐, 젊고 예쁜 여주인 만나서 평생 행복하게 살게 될지.”
어이구, 저 쳐다보는 눈초리 좀 보라지.
주정하는 노인네처럼 히이토의 사내는 포도주 병을 든 채 키들댔다.
“이제, 오늘이 마지막인데 말야. 무슨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너무 맛있어서 연거푸 들이키다 보니 벌써 한 병을 다 비웠다. 다행히 여관 주인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사람들 숫자대로 포도주 병을 구비해 놓았다.
“레이루라... 그건 누구지?”
지금에서야 생각났다는 듯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내자, 스칸데르 청년의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 거지?”
“밤에 잠꼬대를 해대더라고. 레이루, 안 돼, 어쩌고 하면서. 애인 이름인가? 청춘이구만~”
두 병째의 포도주에 얼큰하게 달아오른 히이토의 사내가 묘하게 콧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 남자와 마주보고 앉아서 고향에 놔두고 온 애인 얘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실패였다.
그 이후로, 스칸데르 청년은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럼 네프는 또 누구야?”
대답 없이 스칸데르 청년은 고개를 홱 돌렸다.
히이토의 사내는 포도주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포도주는 최상이고, 알딸딸하게 취한 이 느낌도 좋다.
이제 저 녀석을 팔아 잔금을 챙겨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런 무식하게 큰 덩치에 어울리는 덩치빨 끝내주는 여자 하나 잡아서 결혼하고, 인간다운 삶을 한번 살아보자.
“이제 전쟁은 질렸어. 피비린내라면 이제 신물이 나.”
물 만난 고기처럼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적을 베어가던 히이토의 전사들이었다. 모두들 그들이 살육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타고난 체구 탓에 할 줄 아는 거라곤 싸움질뿐. 유일하게 남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점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일뿐이기에 그랬다. 나름대로 히이토의 전사들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죽고, 죽이고 또 죽이다가 어느 날 봤어. 페르티잔의 애송이 왕자를 말이지.”
술에 취한 김에, 사내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고해성사를 하듯 풀어놓기 시작했다.
“거 참, 예쁘더군. 성화에서 보던 천사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더라고. 그 피비린내 풀풀 풍기는 더러운 전쟁터에서 말이야. 우리들이야, 전쟁터에선 죽이는 걸 즐거워하는 것처럼 연기하지만 페르티잔의 왕자는 표정이 워낙에 없어서 꽤 섬뜩했지.”
스칸데르 청년은 그런 사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줄에 묶인 그의 손이 경련하듯 약하게 떨리는 것을 사내는 보지 못했다.
“뭐랄까. 그 페르티잔의 왕자란 녀석은 사는 게 되게 힘겨운 것 같더라 이 말씀이야. 무슨 자기에게 주어진 고행이라도 하듯 적을 죽이더라고. 하나, 둘, 적을 죽여도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기계적으로 칼을 휘두르는데, 솔직히 보는 내가 다 질리더라.”
사내는 세 병째의 포도주 병을 땄다. 오랜만에 마시는 최상의 술이라 취기가 평소보다 빨리 오른 탓인지 코르크 마개를 따는 사내의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래서 탈영했지. 페르티잔의 왕자란 녀석을 보고 있으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을 똥 다 싸면서 전쟁을 치르나 싶더라고.”
천이 부딪치며 갈리는 소리를, 사내는 밖에서 들려온 소음 정도로 생각했다.
겨우 힘을 주어 코르크 마개를 따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포도주 병을 들어올린 순간, 사내의 손에서 포도주 병이 떨어졌다. 그 귀한 적색 빛의 술이 마룻바닥 위로 흘러내렸다.
“크으윽......!”
사내의 충혈된 두 눈은 보았다.
바로 눈앞에서 일렁이는 붉은색 살기.
푸석푸석한 붉은 머리카락.
하나뿐인 암갈색 눈이 끔뻑인다 싶더니, 사내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사내의 명치 끝에는 세공이 아름다운 칼자루가 꽂혀 있었다.
그것은 사내의 피부 깊숙이 박혀 덜렁거렸다.
원래는 스칸데르 청년이 품속에 소중히 넣어서 가지고 다니던 단검이었다. 귀족 나부랭이가 들고 다닐 법한 섬세한 세공의 은색 단검. 그것이 사내의 명치를 꿰뚫은 것이다.
“네... 네놈......”
사내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내의 심장 깊숙이 박힌 단검을 스칸데르 청년은 무성의하게 잡아 뺐다.
그러고는 난도질했다. 말 그대로 고기를 저미듯, 청년은 거대한 히이토 전사의 몸 여기저기를 찔렀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사내의 비명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사내의 몸이 완전히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청년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피투성이가 된 거대한 몸이 간헐적으로 꿈틀대며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내 피 냄새는, 왠지 꽃향기 같군......”
그것이 히이토의 사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유언이랄 것도 없는 시시한 말장난이다.
그 자세 그대로 스칸데르의 청년은 여관방의 열린 창틈으로 보이는 하늘을 응시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청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뻥 뚫린 한쪽 눈이 시큰시큰 아파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머, 오빠. 뭐야? 이런 데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우리 가게에서 놀다 가지 않을래?”
커다란 도시라면 어디든 그렇듯, 뒷골목에서 배회하고 있으면 여지없이 윤락가의 여성들이 달라붙는다.
나른한 미소가 매력적인 그녀는 예르네이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그럴 여유 따위 없다.”
예르네이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밀쳐냈다. 여자와 아이에게는 늘 상냥하게 대하라고 배웠다. 하지만 여자는 집요했다.
“그러지 말고, 놀다 가.”
그녀는 이 남자가 마음이 동할 때까지 놔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쪽 팔을 붙잡고 늘어진 여자를 예르네이는 거칠게 잡아뗐다. 여자는 어지간히 약이 올랐는지 눈을 치뜨고는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 돈이 없으면 없다고 말하면 되잖아!”
예르네이는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여자는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로 예르네이의 망토 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깊게 눌러 쓴 후드가 벗겨지며 그 얼굴이 드러나자, 여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아... 아아......”
남자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온통 피로 물든 그 얼굴에서 한쪽 눈이 매섭게 빛났다. 여자는 덜덜 떨며 뒷걸음질쳤다.
그대로 거리로 뛰쳐나가 비명이라도 내지르면 곤란하다 싶어, 예르네이는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기절이라도 시켜서 골목 귀퉁이에 방치해 두면 될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미친 듯이 발버둥쳤고, 여자의 뭉툭한 신발 끝에 정강이를 차인 탓에 예르네이는 붙잡고 있던 여자를 어이없이 놓치고 말았다.
“꺄아악! 살려줘요! 살려줘요!”
여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거리로 뛰쳐나가 비명을 질렀다.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 서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예르네이가 숨어든 골목의 어둠 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남자가 날 죽이려 했어요!”
예르네이는 달렸다.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길 사이로, 고삐가 풀린 야생마처럼.
졸지에 거리의 창녀를 살해하려던 살인범의 죄를 뒤집어쓴 채 말이다.
“어이! 그쪽으로 갔을지 몰라!”
사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좁은 골목길 틈으로 퍼져나갔다.
“저기다! 저기에 있어!”
공허한 비명,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허망한 외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살아야 하는 걸까.
-자네는 강하지만, 한편으론 어린애처럼 나약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은빛 갈기를 지닌 사자.
자수정빛 눈을 지그시 뜨고는 자신을 쳐다보던 남자.
그는 붉은 입술을 열어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은 한편으론 어린애처럼 약하다고.
“모두 그 녀석을 에워싸!”
그곳은 커다란 중앙의 무대와도 같았다.
사방은 낡아빠진 집으로 막혀 있고 퇴로는 오직 하나뿐인 천연의 함정.
누군가 그렇게 소리치자,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와 예르네이의 주위를 에워쌌다.
“간도 크군. 감히 우리들의 구역에서 일을 벌이려 하다니!”
사내들은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고 있었다.
예르네이는 그 여관방에서 가지고 나온 히이토 족의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피가 말라붙은 손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앗!”
사내들의 기합 소리와 함께 여러 개의 검들이 붉은색으로, 혹은 어두운 암청색으로 빛났다.
이렇게 힘겹게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마 레이루, 그 아이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있잖아요, 예르네이. 이 세상에 하찮은 목숨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저 벌레의 목숨까지도 소중한걸요.
토오르, 그는 늘 힘겹게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었지.
-쓰레기 같은 목숨이지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사는 거 아니겠어?
자수정빛 눈동자를 한 은빛 머리칼의 그 남자, 그 남자는 어땠지?
-자넨 날 죽일 수 없어.
그래.
죽일 수 없었다.
그때 그 남자의 심장에 칼끝을 박아넣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난 계속 눈이 내린 산길을 헤매고 있어. 꿈속에서 나는 늘 혼자더군. 하지만 외롭다고 느끼진 않아.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의 보라색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으아악!”
“빌어먹을―!”
새된 비명 소리와 신선한 피의 향취.
손끝에 느껴지는, 살갗이 베어지는 섬뜩한 감촉과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
사내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그나마 심심풀이로 끼어든 페르티잔의 탈영병들은 그를 상대로 꽤 활약해 보였지만, 결국 시체더미 위에 덧없는 몸을 하나씩 더해 갈 뿐이었다.
허공으로 날아든 누군가의 검에 의해 망토가 찢겨져 나가고, 피가 말라붙은 예르네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저 자식! 스칸데르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자, 사내들은 광분했다. 족쇄를 풀고 도망친 살아 있는 보석을 손에 넣기 위해, 사내들은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예르네이에게 달려들었다.
하늘은 이미 짙은 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넓게 퍼진 청색 하늘 구석에 여인의 가늘게 뜬 실눈처럼 얇은 초승달이 걸렸다.
사내들의 피가 사방으로 솟구치고, 손바닥 안에 감긴 검의 손잡이 부분이 부르르 떨리는 그 느낌에, 문득 살아야겠다는 본능적인 욕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죽지 않기에 살아남았다.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은 오늘도 이 손을 더러운 피로 물들인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머릿속에 각인된 일종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그 얼굴, 레이루의 작고 유약한 얼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자수정빛 눈동자를 지닌 그 남자의 얼굴처럼.
* * *
어째서 개들은 눈이 오면 저렇게도 좋아하는 걸까.
늘 그것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마냥 신기한 게 아닐까.
하늘에서 내리는 뽀송뽀송하고 하얀 결정체가 하늘하늘 움직이는 그 모양새가 말이다.
하지만 개도 아니고, 인간, 하물며 말만한 처녀가 어쩌면 저렇게 주책 맞게도 방방 뛰어다니는 건지.
“와하하하핫! 바다여! 이게 얼마 만이냐!”
상인들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웃어대는 여자를 애써 외면하고, 소녀는 여자가 이곳 특산품이라며 손에 쥐어준 정체불명의 음식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생긴 건 이래도 생선이라 이건가.
생선치고는 비릿한 맛도 없고, 고소한 풍미가 아주 일품이다.
“이것 좀 먹어봐요.”
소녀는 주저 없이 다른 한 손에 들린 생선-이라고 하기엔 역시 엄청난 모양이다- 꼬치를 자신의 뒤에 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사내에게 내밀었다.
“이 흉물스러운 건 대체 뭐지?”
“생선 구이인 모양이에요. 보기엔 그래도 꽤 맛있네요.”
사내는 굵은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한참 정체불명의 생선 꼬치를 노려보았다. 이내 마지못해 한 입 베어 물고는 그 험악한 얼굴이 조금 풀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군.”
말은 그렇게 해도 꽤 식성에 맞는 모양이다.
우적우적, 눈 깜짝할 새에 생선 꼬치를 입 안에 털어넣는 사내에게 소녀는 재빨리 그 빈 손에 꼬치 하나를 더 쥐어주었다.
“우와아아앗! 이게 누구얏!”
한동안 꽤 잠잠하다 싶더니, 아는 누군가를 만났는지 여자의 엄청난 고함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허어어어억! 페... 페리!”
하지만 상대는 여자의 존재가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아? 정말정말 저엉~ 말 보고 싶었어. 널 만나면 그 뱀 같은 간사한 혀를 뽑아 네놈한테 먹이고 싶을 정도로.”
미소짓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엄청난 말에 사내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애써 미소지었다.
“나... 나도야. 페리, 너의 그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 그리웠어.”
“이 빌어먹을 자식―!”
드디어 마녀가 본성을 드러냈다.
소녀와 그의 보호자 격인 사내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을 때는, 이미 마녀가 검을 뽑아들고 사내의 앞에서 화려무쌍한 검무를 춘 뒤였다.
“으... 으으... 페리.”
“웃기고 자빠졌네! 그리워? 이 개 같은 자식! 네놈이 그 더러운 주둥이로 그딴 말을 지껄일 자격이나 있어?!”
피가 흐르는 한쪽 뺨을 움켜쥔 사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어,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하지만 페리,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거 잘 알잖아?”
“이번엔 그 뻔뻔한 말을 지껄이는 입을 확 찢어줄까!”
“그만둬요, 페리!”
여자가 검을 들고 사내를 찢어죽일 기세로 덤벼드는 순간,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레이루.”
“진정해요!”
“비키라고 했잖아!”
철썩!
파도 소리도 아니고, 아녀자 궁둥이를 후려갈기는 소리도 아닌, 날카로운 마찰음이 짠내 가득한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여자는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한쪽 뺨을 손으로 감쌌다.
세상에! 지, 지금 저 벌레 하나 못 죽일 것 같은 계집애가 내 뺨을 후려갈긴 거야?
“이 사람과 당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폭력은 좋지 않아요!”
게다가 안 그래도 굴러 떨어질 것같이 커다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노려보기까지?
“피는 피를 부른다는 말도 있잖아요!”
“하하하하핫―!”
저 여자가 미쳤나?
모여선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군댔다.
갑자기 한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칼을 휘두르던 마녀가 이번에는 목이 터져라 웃는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라는 게 누군가가 내린 결론이었다.
“뺨을 맞아본 건 10년 전 죽어 나자빠진 아버지한테 맞은 이후로 처음이야, 푸하하!”
“아... 저......”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는 소녀였다.
“페리?”
너무 충격이 커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레이루는 조심스럽게 페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피는 피를 부르지. 폭력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손가락으로 눈초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페리는 사건의 원흉이 된 사내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막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비칠거리며 일어서던 사내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내 그 얼굴에 비굴한 미소가 번졌다.
“어찌 됐든, 마침 자알~ 만났어, 믹터.”
“어... 어?”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자안~뜩 있거든?”
페리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믹터라 불린 사내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페리, 나한테서 정보를 알아내려면 그만한 대가를... 허억!”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페리의 검이 사내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뭐어? 내가 어렸을 때 열병을 하도 심하게 앓아서 가는귀가 먹었걸랑?”
“아... 아니. 그러니까, 묻고 싶은 건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하하!”
페리의 얇은 입술이 비끌어져 올라갔다.
“우선, 내 동료들은 어디 있지?”
“어라라? 전령을 받지 못했어? 최근 벌어지고 있는 페르티잔과의 전쟁 탓에 멘스터 지방으로 모두 이동했는데?”
“뭐어어―!”
“소문 못 들었어? 히이토와 페르티잔의 군인들이 멘스터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는 소문.”
“군인? 탈영병?”
“명분 없는 전쟁이잖아, 어차피. 두 나라의 미친 대왕 두 마리가 서로 으르렁대다가 벌인 싸움인걸. 그딴 전쟁에서 목숨을 잃느니, 탈영병이 되어 다른 지역에 가서 정착하려는 심산이겠지.”
멘스터는 꽤 살기 좋은 곳이다. 게다가, 멘스터는 중립 지대다.
“그런데 그게 내 동지들이 멘스터로 이동한 것과 무슨 상관이야?”
“그곳에 가서 동지들을 늘리려는 거야. 그곳에 모이는 탈영병들 대부분이 나라에 대한 불만이 많을 테니까.”
그들을 모아놓고 이 나라는 썩었다, 우리들의 왕은 미쳤다, 우리 손으로 직접 그 미치광이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말발 좋은 동지 중 누군가가 그들을 설득한다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히이토의 짐승들은 우어어! 괴성을 내지르며 무기를 쳐들 게다.
“나한테는 그딴 말도 안 되는 임무를 맡겨놓고 자기들끼리 영웅이 되겠다 이거야? 젠장.”
“그런데 페리, 너한테 맡겨진 임무가 뭐였더라?”
믹터, 이 사내도 한때는 동지였다.
하지만 워낙에 자기밖에 모르는 간사한 놈이라, 저만 살겠다고 동지들을 배신하고 도망친,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기도 하다.
“아! 맞다! 네 임무는 그거였지! 감옥에 갇힌 스칸데르의 후예를 빼내 그들의 성지를 찾아낼 것. 그런데 스칸데르인은 어디 있어? 설마 천하의 페리가 임무에 실패할 리는......”
“이 빌어먹을 자시이익―!”
페리는 사내에게 달려들어 사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동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그런 놈이라면 차라리 낫다.
이 남자가 페리뿐만, 아니, 동지들 사이에서도 밟아죽여도 시원찮을 놈 취급을 당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 입!
물에 빠져도 동동 뜰 이 저주받은 주둥이!
“우우웁!”
“제기랄! 이번에야말로 혀를 뽑아버릴 거야, 이 자식!”
어느 상황에서건 비밀이고 뭐고 없이 되는 대로 지껄이는 이 녀석 때문에 조직 내의 특급 비밀이 외부로 새어나간 것도 여러 번. 동지들 모두가 정부의 암살자들에게 몰살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던 것도 셀 수 없지.
다행히 항구의 사나이들은 바쁘다. 그들에게 언제까지고 버티고 서서 이 특이한 녀석들을 구경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으으... 숨막혀어어......”
“이대로 질식해 죽어버리지 그래?”
“놔, 놔줘어... 놔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정보를 알려줄게......”
하지만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녀석이 어떻게 지금껏 살아남았느냐 하면, 그가 누구나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엄청난 기억력.
몇 년 전 누가 누구의 옷에 물을 엎질렀는데, 그때 그 누군가가 입고 있던 옷의 색깔이 어땠는지,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도 정확히 기억하는 그의 기억력 덕분이었다.
“젠장!”
페리는 신경질적으로 사내의 몸을 밀쳐냈다.
사내는 두어 번 격하게 기침을 해대며 엄살을 피우더니, 페리가 눈을 번뜩이며 주먹을 치켜올리자 흠칫 놀라 입을 열었다.
“네가 맡은 그 임무에 대한 일이야, 페리.”
“뭐?”
“네가 찾는 그 스칸데르인 말야.”
일순 세 사람은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었다. 경직된 페리 대신 레이루가 사내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스칸데르인이라뇨? 스칸데르인이라면 페리가 찾는 순종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보통 희귀한 게 아니라면 그곳이 그렇게 시끌벅적해지진 않았을 테니까.”
“그곳이라뇨?”
“바흐티의 노예시장. 원래 그곳은 비합법적인 노예시장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거든. 그곳에 한 무리의 히이토 탈영병들이 한 청년을 끌고 왔는데, 그게 스칸데르의 순종이었다고 들었어.”
“거짓말......”
“허어. 이 애 좀 보게?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냐?”
“거짓말! 노예시장이라니. 노예라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처음이었다. 레이루, 이 아이가 이렇게 흥분한 것은.
아이의 보호자 역할을 자청한 과묵한 히이토의 군인은 잘게 떨리는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세하게, 이 돌머리로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낱낱이 까발려주겠어, 믹터?”
페리가 잇새로 말을 씹어 내뱉자, 믹터는 기다렸다는 듯 술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는 아주 자세히, 항구에 드나들던 상인들에게서 엿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말이지, 껍질만 요란하게 두꺼운, 지독히도 맛없는 과일 같은 이야기였지만 어찌 됐든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바흐티의 노예시장에, 스칸데르의 순종이 출현했다.
그 청년은 레이루와 페리가 찾고 있는 그 녀석인 것 같다.
그날 저녁, 문제의 스칸데르 순종이 있다는 바흐티로 떠나자는 페리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또 며칠이 걸리고 걸려 힘겹게 바흐티 지방에 도착하자 페리의 입에선 곱지 않은 욕설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뭐어! 이 빌어먹을 자식! 지금 뭐라고 했어!”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작달만한 몸을 부르르 떨며 깜짝 놀랐다.
“귓구녕이 막혔어? 도망쳤다고 했잖아.”
“도망? 도마앙―? 어디로!”
“알 게 뭐야. 데리고 왔던 히이토 놈 하나를 살해하고 도주한 모양이더라고.”
“우와악!”
“어이구! 귀청 떨어지겠다, 페리!”
“제엔장!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말이지, 마을 공터에서 일곱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어. 어느 창녀가 범인의 얼굴을 본 모양인데, 붉은 머리카락에 한쪽 눈엔 붕대를 감고 있었다더군.”
“붉은 머리카락? 붕대?”
무슨 쓸데없는 얘기를 하느냐는 듯 일그러진 페리의 얼굴에 파이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중년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게, 달아난 스칸데르 녀석의 인상착의랑 일치한다, 이거지.”
배가 고플까 봐 시켜준 닭고기 스프를 건드리지도 않은 채, 레이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년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은 손이 달달 떨리는 게, 어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 애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히이토의 미친 국왕의 소굴에, 머리카락 색을 검게 물들이고 기어 들어온 간덩이 큰 계집애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아주 난리가 났어. 이 근방에서는 제법 유명한 상인이 이미 시장에 내놓을 스칸데르 청년에 대한 홍보를 대대적으로 해놨거든. 스칸데르 녀석이 계획대로 시장에 나와주지 않으면 꽤 곤란하겠지? 덕분에 그 물돼지 같은 놈, 눈에 불을 켜고 스칸데르 녀석을 찾고 있다고. 게다가 우두머리를 잃은 히이토 놈들까지 가세해서 이 근방은 아주 지옥이야, 지옥.”
믹터, 그놈한테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 사나흘 정도 늦게 도착한 것뿐인데,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구만. 바흐티로 달려오면 이 지방에 있는 동지들을 만나 그 스칸데르 놈을 파바박! 잡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래서?”
“그래서 뭘?”
“잡았어? 그 스칸데르 녀석.”
“아직 못 잡았으니까 이 난리가 난 거 아니겠냐.”
그 말에 레이루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하여튼 표정이 너무 솔직해서 곤란한 계집애라니까.
“그나저나 소문으로 들었다. 너, 히이토의 국왕에게 쫓기고 있다면서?”
“무슨 소리! 쫓기는 건 내가 아니라 이 녀석들이라고!”
페리의 말에, 중년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페리의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가냘픈 소녀 하나에, 덩치가 꽤 좋은 사내 하나. 덩치는 좋지만 보통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걸로 봐선, 군인이 아닌 그럭저럭 고위급에 해당되는 간부, 그런 거겠지.
“저 녀석이냐? 히이토의 국왕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간 큰 녀석이?”
중년 사내의 눈이 하얗게 질린 레이루에게 머물렀다. 페리는 이미 뜨끈하게 데워진 맥주를 들이키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한 대 후려갈기면 픽 쓰러질 것같이 생긴 주제에 제법인데? 그리고, 히이토의 국왕은 또라이냐? 어딜 봐서 이 녀석이 스칸데르인 같아 보인다는 거야?”
“바보 맞아, 그놈.”
“그렇게 따지면, 라자르 그놈은 정말 적도 많아. 내 살다살다 그런 또라이는 처음 봤다니까?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는 어쩜 그렇게 하는 짓마다 엽기적인지. 그놈 낳은 어미를 한번 보고 싶다니까.”
이 중년의 사내는 페르티잔의 궁성에 하인으로 변장해 숨어들었던 헌터의 동지 중 하나였다.
“그러게. 아마 뒈져도 곱게 못 뒈질걸, 그 남자는?”
“게다가 그 미친 왕한테 숨겨놓은 아들이 떠억하니 있었다는 거 아니냐!”
“숨겨놓은 아들? 그 남자, 미혼이지 않아?”
“알 게 뭐야. 그놈도 남자니까 어떤 여자랑 뒷구멍에서 쿵짝쿵짝 눈이 맞았는지.”
“......대체 어떤 여자인지 얼굴 한번 보고 싶네.”
“어쨌든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라는 놈이 갑자기 툭 떨어졌으니, 왕실이 아주 발칵 뒤집어졌지. 라자르 왕에게는 자식이 없으니 공포정치는 그놈의 대에서 끝이다. 그렇게 마음 턱 놓고 있던 귀족들이 아주 지랄발광을 하더라고.”
“그 핏줄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면 만만치 않은 미친놈이겠구만.”
“그렇다니까! 생긴 것 하나만큼은 눈이 휙 돌아갈 정도였는데.”
예쁜 시골 처녀를 떠올리는 듯한 사내의 음흉한 얼굴에, 페리는 코웃음을 픽 치며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어찌 됐든 난 그 도망친 스칸데르 녀석을 찾으러 가봐야겠어.”
페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레이루가 쭈뼛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일어선 히이토의 간부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당연한 듯, 레이루라는 소녀의 뒤에 버티고 섰다.
그 남자가 소문의 ‘국왕 앞에서 욕설을 퍼붓고 나라를 배신한 대역죄인’이라는 것을 사내는 알 수 있었다.
“이봐, 페리.”
페리는 얼굴만을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남은 동지들은 내일 이곳을 떠난다.”
“에에? 뭐어? 어째서?”
“이곳에 더 이상 있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또, 곧 이곳에 피바람이 몰아닥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페리는 미간을 좁히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겨우 그딴 이유로 목숨을 걸고서 투쟁했던 헌터의 동지들이 꼬리 내린 개처럼 도망친다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다.
“그 스칸데르인은 너무 많이 알려졌다. 페리, 너에게 맡겼던 임무는 없었던 것으로 해라. 조속히 조직으로 복귀해 새 임무를 전달받도록... 이상, 대장님께서 페리 고양이님에게 전하는 특별 메시지.”
“제멋대로군.”
“그 사람은 페리, 널 여동생처럼 아끼고 있으니까 네가 위험에 처하는 게 싫은 거야.”
“웃기네!”
“저... 페리......”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선 레이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가세요, 페리.”
페리가 그 자리에 멈춰 서자,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오던 소녀의 움직임도 멈췄다.
“이제는 우리와 함께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돌아가세요.”
“레이루.”
“네... 네엣?”
“도와주세요, 페리 언니이~ 하고 말해 봐.”
“네에?”
“도와주세요오~ 하고 애원해 보라고.”
레이루는 무척 놀란 듯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알짱대는 모습이 꽤 귀엽기까지 하다.
“만나고 싶지? 스칸데르의 그 녀석.”
“아... 저기......”
레이루는 뒤에 버티고 선 뮌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도와줄게. 그 녀석을 찾는 일. 도와주세요, 하고 말한다면.”
레이루는 한참 동안 머뭇머뭇대더니, 결국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일단 말을 꺼내자 용기를 얻었는지 레이루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페리를 바라보았다.
“도와주세요. 부탁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제야 페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도와주긴 하겠는데.”
순식간에 레이루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까 그 식당은 솔직히 음식 맛이 형편없었어. 우선 제대로 된 밥이나 먹지 않을래?”
레이루는 페리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페리 녀석, 나중에 대장한테 혼나도 난 몰라.’
사내는 파이프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었다.
며칠째 페리와 그 일행은 사라진 스칸데르 청년을 찾겠다고 도시를 이 잡듯이 뒤졌다. 꼭 보물찾기라도 하는 어린애처럼 페리의 얼굴은 지나치게 밝았다.
임무고 뭐고를 떠나, 그저 흥미가 생긴 것일 게다. 그리고 임무가 취소되었음에도, 해볼 데까지 해보자라는 심산인 듯도 했다.
사내는 담배 연기 탓에 젖은 눈을 깜빡이며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역시 환영인가?
환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
밤하늘 정가운데 떠서 음울한 빛을 발하던 달이 어둠에게 먹혀들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그럴 때마다 달을 집어삼킨 어둠의 양은 점점 많아졌다.
어둠은 탐욕스럽게 달을 잠식해 들어갔다.
별조차 없는 암청색 하늘에, 이윽고 달은 시골 처녀의 가락지만큼이나 가늘고 얇아졌다.
“믿을 수 없어.”
사내의 입에서 약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늑대의 형제 중 아우인 하티가 드디어 달을 입 안으로 집어 삼켰구나.
사내의 아버지는 박식한 남자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스콜과 하티라는 늑대 형제가 있었는데, 형인 스콜은 해를, 아우인 하티는 달을 집어 삼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쫓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해님과 달님을 겨우 따라잡으면 게걸스럽게 해와 달을 입 안에 집어 삼키는데, 그때마다 해와 달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지금 저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해와 달이 늑대 형제에게 따라잡히는 그날이야말로 이 세상이 종말을 고하는 때지.
하긴 신도 허구한 날 전쟁이다 뭐다 해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못난 인간들에게 질렸겠지.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거리엔 우왕좌왕,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군중들로 엉망이었다. 사내는 사람들을 헤치고 비교적 한산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어차피 모두 죽을 건데 저리 바쁘게 도망쳐봤자 뭘 하누.”
스쳐 지나가는 노파의 말에 사내는 픽 코웃음을 쳤다.
겨우 저 정도의 자연현상을 가지고 종말이니 뭐니, 웃기지도 않는다. 어차피 달이 본래 모습을 찾게 되면 이 소동도 곧 진정될 게다.
사내는 골목 어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소동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 파이프 담배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을 때 주름이 내려앉은 사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어라라.”
사내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군중 속에서 뭔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마냥, 사내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마치 혼란에 빠진 군중들 속에 강림한 여신과도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찌 저 얼굴을 잊을 수가 있을까.
지금도 가끔씩 꿈속에 등장하는 미녀의 얼굴이건만.
습기 머금은 더운 바람에 흩날리는 긴 은색의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 쓸어올리는 우아한 손길, 눈을 깜빡이는 작은 동작조차도 아름다운 남자.
사내의 파이프 담배에서 재가 떨어졌다.
그는 말에 올라탄 채 거만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겁에 질려 어디론가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중들 틈에서, 말에 올라탄 하얀 천사는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다.
그렇기에 위화감마저 느껴졌다.
은색의 악마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페르티잔의 왕자.
그를 처음 본 것은 왕궁에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를 보는 것이 왕궁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 혼돈 속의 아수라장이라니.
젠장, 일진 한번 더럽게 사납군.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보다도 더 믿기 힘든 존재에, 사내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페르티잔의 왕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 위의 기현상 따위 관심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왕자는 곧 말고삐를 잡아당겨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그라도 말에 탄 채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속으로 섞여들 만한 배짱은 없는 듯했다.
사내는 왕자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그 역시 골목 속으로 숨어들었다.
페르티잔의 왕궁에 숨어들었을 때 왕자와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왕자가 과연 수많은 하인들 중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역시 그랬군.”
하지만 곧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사내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골목 바로 앞 어둠 속에서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왕자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은빛 오라를 일렁이며.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다 싶었건만.”
제길, 하고 사내는 미간을 좁혔다.
왕자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수많은 하인들 중에서 자신의 얼굴을 말이다.
저 정도면 머리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섬뜩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넌 왕궁의 하인이었지? 그런데 어째서 이런 데서 마주친 걸까?”
싸늘한 왕자의 자수정빛 눈이 반짝 빛났다.
외따로 떨어진 숲속에서 굶주린 야수를 만난 듯한 기분에 사내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거,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처음 본 나에게 넌 어째서 존대를 하는 건가?”
이런......
사내는 웃는 얼굴 그대로 경직 상태가 되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사기꾼이라도 왕자의 앞에선 정체가 탄로나고 말 것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었으면 했는데.
사내는 품 안의 무언가를 손에 움켜쥐었다. 채찍 형식의 무기로, 사내는 헌터 조직 내에서도 알아주는 암살자였다.
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왕자는 적이었다. 스파이로 페르티잔의 왕궁에 잠입했던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신 한 사람의 희생만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별수 없지.
“마침 잘 만났어. 물어보고 싶은 게......”
왕자가 말고삐를 잡아당겨 앞으로 상체를 내민 순간, 사내의 품 안에서 채찍 형태의 무기가 튀어나갔다. 왕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매섭게 날아드는 갈퀴 모양의 무기를 피했지만 왕자가 탄 말은 불상사를 면치 못했다. 말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요동쳤고, 왕자는 말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내는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사내의 손에는 어느새 살상 목적의 작은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작은 체구를 이용한 재빠른 몸놀림으로, 사내는 왕자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기도 전에 그의 몸 위에 올라탈 수 있었다. 하지만 단도가 왕자의 목을 노리고 허공을 가른 순간, 눈앞에서 은색 빛이 작렬했다.
어느새 왕자도 검을 꺼내 사내의 단도를 막아낸 것이다.
“실력 좋군, 왕자.”
사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째서지?”
사내의 단도를 막아낸 왕자의 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깔린 왕자의 창백한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어째서 날 죽이려고 하는 건가?”
“내 한 몸 지키기 위해서지.”
“난 그저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다. 지금껏 난 그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한 적 없이 살아왔어. 그런데 어째서 모두들 날 죽이려 드는 건가?”
“그거야......”
사내가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악독한 라자르 왕의 후손이니까, 공공의 적이 된 게지.”
왕자의 제비꽃 색 눈이 가늘어졌다.
바닥 위에 퍼진 왕자의 은색 머리칼이 뱀처럼 꿈틀댔다.
“명쾌한 대답, 고맙네.”
......뭐? 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지금껏 손을 파르르 떨며 사내의 내리누르는 힘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던 왕자가, 너무도 쉽게 사내의 단도를 밀어냈다.
스르릉.
검과 검날이 부딪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작은 몸은 어이없이 왕자의 몸 위에서 휘청거렸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듯한 형상을 한 사내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푸른 검광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본 것이 먼저였다.
왕자의 검은 용서가 없었다.
사내의 피로 물든 검을 거두어들이는 왕자의 창백한 얼굴은 어딘지 음울하고 피로해 보였다.
* * *
잡힐 듯,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
과연 그가 이곳에 있기는 한 걸까. 혹시 그들이 쫓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유령이 아닐까.
“세상의 종말 좋아하네! 달이 밤하늘에 좀 가려진다고 해서 종말이 올 거 같으면 벌써 열댓 번도 더 왔겠다!”
페리는 짜증스럽게 사람들을 밀쳐내며 소리쳤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사람들 틈에 멀뚱히 서서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조차도, 그녀는 매정하게 밀쳐냈다.
하지만 레이루는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었다.
그대로 놔뒀다가는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주겠다고 나설 것 같아, 페리는 소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랬지!”
“하지만 저대로 놔두면 위험해요.”
“으이그, 이 화상아! 니가 지금 부모 잃어버린 애새끼 뒤치다꺼리나 할 때냐!”
페리는 요 며칠간 짜증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도와준다고 큰소리는 탕탕 쳐놨지만, 그놈의 빌어먹을 스칸데르 녀석은 대체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 건지 코빼기도 내비치질 않았다. 어느 구석에서 죽어 나자빠진 건 아닌지, 믿을 만한 동지들이나 이곳 터줏대감들의 도움을 빌어 찾아볼 만한 곳은 다 찾아봤지만 없었다. 그놈의 녀석, 붉은 머리카락 한 웅큼 찾을 수 없었던 게다.
“그런데, 페리.”
한참을 페리의 손에 질질 끌려가던 레이루가 드디어 자기 발로 걷기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달이 어둠에 먹혀버린 거죠?”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
“어릴 때 딱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땐 대낮이었고, 해가 까만 그림자에 가려졌었거든요.”
“뭐? 해도 저딴 식으로 가려졌다고?”
“네. 해가 가려진 걸 더 보려고 아이들이랑 서성거리다가 어른들한테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나요. 우리 마을에서는 해가 그림자에 가려지면 모두 집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거든요.”
말을 꺼내자 고향 생각이 나는지 레이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요, 페리.”
오늘따라 이놈의 계집애, 말도 참 많다.
“그 사람, 이곳에 있기는 한 걸까요?”
뭘 먹지도 않았는데 사래가 들려, 페리는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드디어 나왔다.
은근히 사람을 책망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 못 살게 구는 저 녀석의 특기.
“왠지 우리들, 실체도 없는 유령을 쫓고 있는 것만 같아요.”
“케... 케켁! 유령은 무슨! 유령 하나 때문에 온 도시의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뛰어다니냐!”
“하지만......”
미안하다. 그래, 더럽게 미안해.
그러니까 그런 울 것 같은 얼굴은 집어치워라.
사람들 틈에서 헤매고 있는 또 하나의 미아를 발견한 레이루는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이번에는 그냥 놔두기로 했다.
착해빠진 저 계집애의 천성이다, 저건.
“너무 그렇게 뭐 씹은 듯한 표정 하지 마.”
소리도 없이 버티고 선 뮌에게 페리는 웃는 낯으로 쏘아붙였다.
“내 얼굴이 어쨌다는 거지?”
“어이구, 거울이라도 있으면 한번 보여주고 싶네. 지금 당신 얼굴이 어떤지.”
뮌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페리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나잇살 먹어서 한참 어린 여자애한테 포옥 빠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게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목숨 걸고 지켜준 남자는 나 몰라라 하고, 스칸데르의 뭐시기인지 하는 놈만 애타게 찾고 있으니.
사랑 놀음은 이래서 귀찮다. 짜증이 난다.
“비켜! 죽고 싶지 않거든 냉큼냉큼 물러 서!”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서도 유독 큰 목소리에 레이루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고 뒷걸음질쳤다.
말을 탄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노예시장을 위해 타지에서 온 상인들이었다.
하늘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현상 탓에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군중을 멈춰 서게 하고 뻥 뚫린 길을 만드는 것은 말의 울음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랫동안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상인들은 하늘의 기현상 따위엔 관심조차 두지 않는 듯했다.
한데 뒤섞인 사람들 속에서 레이루는 불안한 얼굴로 계속 주위를 살폈다.
보이는 건 사람들뿐이다.
달이 어둠에 먹히는 것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기도를 올리는 노파,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떠들며 뛰어다니는 남자.
자연현상에 무지한 사람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도시 곳곳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유독 레이루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까마귀 무리 속에서 빛나는 백로 같은 존재였다. 지금 어둠에 먹히고 있는 달을 녹여 만든 듯한 은색 머리칼에 창백한 얼굴을 한 그 사내는 아름다웠다.
레이루는 지금껏 저렇게 아름다운 사내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척 지쳐 보였다. 하지만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사내는 우아한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고고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거만함이 느껴지는 그 자태에 레이루는 한 사람을 생각해 냈다.
모습은 완전히 다르지만 왠지 닮았다.
무리들 틈에 섞여들려 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 주위를 경계하는 듯한 매서운 눈빛, 그런 것들이.
“레이루!”
뒤늦게 소녀를 발견한 뮌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사람들 틈을 헤치고 어디론가 달려간 뒤였다.
“뭐야, 저 망할 계집애는!”
“말에 치여 죽기 싫으면 비켜!”
뻥 뚫린 대로 한복판을 지나던 상인들의 말이, 길을 가로지르는 소녀의 존재에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발버둥쳤다. 여기저기서 상인들 특유의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작은 몸으로 달렸다.
그리고 소녀의 뒤에는 그 뒤를 따라나선, 이성을 잃고 날뛰는 어미 곰이 한 마리 더 있었다. 뮌은 행여 자기의 소중한 꼬맹이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뛰쳐나갔다.
“우와악!”
“다 밟아버려! 저 망할 놈들!”
하지만 뮌 역시 상인들의 동요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일대 소란이 인 대로 한복판의 광경에, 페리만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서 있을 뿐.
젠장, 내가 정말 못 살아!
“저 계집애, 대체 어느 집 애야?”
네에네에, 미안합니다. 저 바보 같은 녀석은, 우리 집 애예요......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페리는 못난 딸을 둔 어미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레이루가 뛰어간 곳은 비교적 한산한 골목 어귀였다.
소녀는 골목 어귀에 버티고 선 한 사내에게로 달려가더니, 머뭇거리며 멈춰 섰다.
헝클어진 은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사내는 눈에 띄는 미남으로, 앞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녀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넌 뭐지?”
말라터진 사내의 입술 사이로 말이 튀어나오자 레이루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저기......”
하지만 일단 입을 열자 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사내다. 풍기는 분위기 같은 것이 닮아, 한 순간 이 사내의 모습에서 예르네이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그래서 무작정 달려오긴 했지만, 눈앞의 존재는 예르네이와는 완전히 다른 타인이었다.
“내게 뭔가 용건이 있는 건가?”
사내는 달콤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루는 비로소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손가락을 꼼질댔다.
어째야 하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레이루!”
그러나 늘 그랬듯 적절한 순간에 구원의 여신이 나타나주었다.
구원의 여신이라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어찌 됐든 뮌이 달려와 레이루의 뒤에 섰다.
“레이루.”
그 낮은 저음이 뮌의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사내의 목소리란 걸 깨달은 순간, 레이루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쩌면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 걸까.
이런 순간에서도 레이루는 순수하게 경탄했다.
“레이루... 레이루라......”
몇 번이나 사내는 그 이름을 되뇌며 미간을 좁혔다.
“레이루, 괜찮나?”
“아, 네에......”
뮌은 레이루의 가는 팔을 움켜잡았다.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뮌의 두 눈은, 눈앞의 미청년을 도전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히이토인가. 그것도 꽤 고위급의 간부군.”
자연스레 배어나온 거만한 말투에서 레이루는 사내가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네 일행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뮌 역시 히이토의 귀족이었다. 상대의 하대에 뮌 역시 하대를 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아이도 히이토인가?”
질문을 한 의도를 알아챌 수가 없어서 뮌은 잠시 망설였다.
어딜 봐도 히이토의 특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김새다. 그렇다고 혼혈이라고 둘러대기엔 너무......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으리! 제 동생의 결례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번에 등장한 구원의 여신은 페리였다.
그녀는 방금 전 손등을 꼬집어서 겨우 만들어낸 젖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레이루의 몸을 안았다. 이때 소녀의 어깨를 놓칠세라, 꼬옥 껴안고서 몸을 잘게 떠는 것이 포인트다.
“이 애는 어렸을 때 큰 병을 앓아서 머릿속은 세 살배기 어린애랍니다. 아직 자식이 없어서 바깥양반이 이 애를 자기 자식처럼 예뻐하다 보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나으리!”
졸지에 뮌은 페리의 남편이, 레이루는 큰 병을 앓고 어린애의 정신연령을 가진 페리의 동생이 된 것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촌극에, 사내는 자수정빛 눈을 가늘게 뜨고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내의 보라색 눈이 잠시 페리에게 안긴 레이루에게 머물렀다.
레이루는 홀린 듯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미모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향기마저도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렬하다.
사내는 일단 페리의 연기에 속아 넘어가 주기로 한 듯했다.
자수정빛 눈이 거두어지고, 사내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 그대로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레이루는 사내의 아름다운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으이그!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그리고 사내가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페리는 소녀의 뒷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래도 자기 잘못은 아는지 소녀는 머리를 감싸 안고는 움찔움찔 떨면서 페리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냐!”
“미안해요......”
“한 번만 더 멋대로 행동해 봐! 그땐 정말 용서 안 해!”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레이루는 허리를 굽실댔다.
“저것 봐! 달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어!”
누군가 밤하늘을 향해 그렇게 소리치자, 사람들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저마다 외쳤다.
페리와 뮌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거짓말처럼 달이 본래 모습을 하고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페리.”
페리는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레이루의 부름에 대답했다.
“왜?”
“아까 그 남자가 제 이름을 불렀어요.”
“그거야, 아까 이 남자가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으니까.”
페리는 자신의 철없는 남편-나중에 이 일로 뮌에게 어떤 보복을 당하게 될지 모르지만-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웃어 보였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뭐랄까. 왠지 날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듯해서......”
페리는 레이루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감쪽같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달을 올려다보며, 호오, 호오오~ 하는 탄식 섞인 콧소리를 내는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라.”
등 뒤에서 들려온 뮌의 저음에, 레이루는 말없이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날, 이곳에서 만났던 페리의 동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그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말에, 페리는 한참 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만 있었다. 그녀가 조금쯤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어째서 동지들이 이동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 사람들이 원래 동물적인 직감을 자랑하거든. 분명 눈치 챘던 거야. 미리 짐작하고서 이렇게 되기 전에 달아난 거라고.”
페리는 불안한 것 같았다.
신경이 예민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녀는 평소와 달리 어쩔 줄 몰라 끊임없이 뭔가를 말하며, 아무한테나 욕설을 퍼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동지가 죽었다.
늘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던, 인상 좋은 중년의 사내가.
“젠장.”
그녀는 다시 한 번 욕설을 퍼부었다.
“페리, 미안해요.”
“미안하다니, 뭘! 뭐가 미안하지? 왜 네 녀석이 미안해 하는 건데!”
그녀의 발작적인 외침에 레이루는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푸욱 수그렸다.
“젠장. 제기랄―!”
그녀는 주먹으로 나무 벽을 탕탕 내리찍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말은 이제부터 안 들을 거야.”
한참 만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나마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페리.”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랬잖아!”
“그 사람은 더 이상 이곳에 없을 거예요.”
태연한 척 그렇게 말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울고 싶지 않았는데도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레이루는 얼른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지금 가장 울고 싶은 것은 페리일 것이다.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레이루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떠나자. 이 지긋지긋한 곳을 어서 떠나버리자고.”
두려운 것이다.
알고 있다.
아무리 강한 척해도 그녀 역시 인간인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 없다.
두려운 것은 레이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히이토의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짓밟고 마을에 불을 질렀을 때, 혼자서 얼마나 울며 몸을 떨었던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이가 죽는다는 슬픔과 절망, 두려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레이루였다.
“도시 외곽에 동지들이 이용하곤 하는 마구간이 있어. 뭐 아직까지 말이 남아 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 없다면 걸어서라도 가자.”
페리의 얼굴이 그나마 부드럽게 펴졌다.
뭐랄까. 그런 그녀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늘 강한 모습만을 보였던 그녀였기에, 지금의 경직된 얼굴, 가늘게 떨리는 어깨, 그런 것들이 무척 낯설었다.
거절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이상, 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이내 먼저 고개를 떨군 것은 레이루였다.
“좋아, 가자.”
평소와는 달리 패기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이루는 섣불리 그녀의 뒤를 따라나서지 못했다.
뮌도,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절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게 위안이 됐다.
그의 마음을 이용하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이런 때에는 늘 그의 존재가 힘이 되어준다.
“어떻게 해야 하지요?”
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몸을 움직여 레이루의 곁으로 다가섰을 뿐이었다.
“나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페리의 말대로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듯하다.”
조용히 그는 레이루의 가는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의 무게가 오늘따라 더욱 그 비중을 더해 간다.
“너에겐 그 사람이 소중할지 모르지만, 내겐 너라는 존재가 가장 소중하다.”
이것 봐. 이 사람은 늘 이래.
가장 적절한 순간에, 정말로 듣고 싶어했던 말들을 늘어놓지.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의지해 버리면, 곤란해. 혼자서 해나가기로 마음먹었잖아. 이 사람의 말대로 소중한 건 예르네이, 그 사람뿐이니까.
“널 더 이상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다.”
하지만 기대버리게 된다.
차라리 이런 때에 곁에 아무도 없다면 버텨나갈 수 있겠지만, 이렇듯 자상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의지해 버리고 만다.
사람들의 행렬에 혹여 레이루가 휘말려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는 몸으로 거대한 벽을 만들어 소녀를 감쌌다.
자상한 사람. 자신을 위해 나라를 배신하고 왕을 배신한 남자.
혼자 가려고 했는데, 이 남자가 쫓아와 주었다.
그 믿음직스런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쫓아와 주었으니, 자신에게 그를 뿌리칠 권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두 사람!”
벌써 저만큼이나 앞으로 나간 페리가, 사람들 속에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줄곧 세 사람이 함께였다.
그래서 그녀도 자신과 뜻을 같이한 동료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들과 사정이 비슷한 동지라고.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성질 나쁜 고약한 여자였지.”
마침내 그녀가 멀리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녀를 보내고, 우리도 이곳을 떠나자.”
뮌은 그렇게 말했다.
평소였다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씩씩대며 달려왔을 그녀지만, 우두커니 선 그녀의 모습은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레이루는 손을 흔들며 바보같이 웃었다.
그녀는 무척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뮌과 함께 나란히 서서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는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알아챘을 것이다.
정말 같이 가지 않을 거냐?
멍청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우는 것일까. 그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일그러진 얼굴로 멀리서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이내 등을 홱 돌렸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는 웃는 얼굴을 보여줬으면 했는데.”
저리도록 흔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어느새 페리의 모습은 사람들 사이로 묻혀 사라졌다.
그녀는 어른이니까 결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니까 우리들에게 미련 따윈 두지 않을 거다.
“우리도 가자, 레이루.”
그녀가 사라지자, 뮌이 레이루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 뮌......”
하지만 소녀는 반항했다. 잡아끄는 힘에, 힘겹게 저항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잘 알고 있기에 더 더욱 놔줄 수가 없다.
“아까 너도 그렇게 말했잖나. 그 사람은 더 이상 여기에 없을 거라고.”
일부러 매정하게 쏘아붙여 보지만 아이는 납득하지 않았다.
아직 미련이 남은 것이다. 설사 그가 이곳을 떠나는 걸 봤다는 사람이 나온다 할지라도 이곳을 다시 한 번 샅샅이 뒤져봐야 겨우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헛된 노력이야.”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는걸요.”
자신의 팔을 뿌리치는 그 힘이 너무 완고해서, 뮌은 걸음을 멈췄다.
“난 포기할 수가 없어요. 겨우 이곳까지 쫓아왔는데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떠난다면 너무 분하고 억울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뮌, 난 이곳에 남아서 좀더 그를 찾겠어요.”
“그래서 넌 지금 페리처럼 날 보내버리려는 건가?”
아이는 고집스레 치뜬 눈을 깜빡였다.
“지금 날더러 널 두고 혼자서 가라는 거냐?”
“당신을 위해서예요.”
“나를 위해서? 그게 나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거냐?”
소녀의 동그란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울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는.
“너와 함께여야만 한다, 레이루.”
스스로 구차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눈물을 쏟으며 매달리고 싶다. 이 아이가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사랑한다, 레이루.”
이런 고백 따위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말로써라도 표현하고 싶다. 소녀에 대한 자신의 연민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사랑해.”
소녀의 젖어 있는 커다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사랑스런 소녀의 몸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루 역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는 눈을 치뜨고는 언제까지고 뮌을 쳐다보았다. 소녀의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은 열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놀고들 있네.”
등 뒤에서 들려온 빈정거림에, 가장 놀란 것은 뮌이었다.
그곳엔 방금 전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던 페리가 있었다.
그녀는 손에 낡은 가죽 주머니를 들고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사람을 그딴 식으로 보내놓고 저들끼리 연애 놀음이나 해? 거 참, 기가 막혀서.”
“페리......”
“닥쳐, 아무 말 하지 마. 난 지금부터 귀머거리야.”
그녀는 늘 그랬듯 앞서 걸었다.
그러다가 곧 안 되겠는지 레이루와 뮌 사이를 파고들어, 한 팔에 하나씩 팔짱을 끼고는 그들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버리지 마.”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온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희들마저 날 버리지 말라고.”
레이루와 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는 것 대신,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입술을 내밀고 있는 페리의 표정에, 레이루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레이루......』
작은 아이였다.
소녀의 작고 둥근 얼굴은 사랑스러웠고, 커다랗게 치뜬 두 눈은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그런 아이를 본 기억은 없다.
또 모른다.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일는지도.
하지만 그 이름, 레이루라는 그 이름만은 낯설지가 않다. 자신에게 의미를 가진 이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린시절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싫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페르티잔의 피조차도 증오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가장 증오한 것은 아버지였다.
페르티잔 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광포한 왕, 그게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 것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에요, 왕자님.
유모는 착한 여자였다. 상냥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순수한 페르티잔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싫지 않았다.
어린시절에는 솜털처럼 보드라운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따스한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게 무척 좋았다.
언제였던가.
아버지란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차가운 생김새만큼이나 냉랭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혈육의 정 같은 것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유모에게서 혈육간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넌 그녀를 빼닮았구나.”
그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아버지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녀와 같은 색이군.”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은 차가웠다. 물속에서 건져 올린 시체처럼.
그 눈에 아주 잠깐이지만 부드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연민이었다.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아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보여준 아버지의 애틋한 눈빛은 어린 아들을 똑 닮은 누군가에게 향한 것. 타인의 것이었다.
-그분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그분은 외로운 분이시랍니다.
늙고 병든 유모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띤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적이라고 주입교육을 받은 것처럼, 아버지란 단어를 떠올리면 으레 분노라는 감정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
증오, 적의, 그런 것만이 그 당시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사실 그랬다.
아버지를 미워한 것도, 페르티잔을 증오한 것도, 누군가를 미워해야만 토기 치밀어 오르는 외로운 유폐 생활에서 견뎌낼 수 있었기에 그랬다.
네프는 힘을 주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 안쪽이 시큰거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모는 그랬다. 아버지란 사람은 외로운 사내였다고.
하지만 자신도 그랬다.
외로웠다. 고독했다.
꿈속에서 눈이 내린 산길을 걷고 또 걷고, 걷다가 지쳐 쓰러지면 몸 위로 소리 없이 눈이 쌓여만 갔다.
그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다 겨우 잠에서 깨면, 주위엔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커다란 침대 위에 혼자서 덩그마니 누워 몸을 끌어안고, 소리죽여 울던 어린아이가 그 꿈속의 눈 내린 산길을 넘어지지 않고 걷기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괴로운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 괴로운 시간이 다시 반복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유년 시절 살아왔던 은둔지를 떠나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 모든 고통, 다 짊어진 듯한 얼굴 하지 말아요.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으로 대우해 주었던, 유그.
늘 버릇없이 말하며 웃던 만년 개구쟁이 같은 녀석. 그리고 늘 잔소리만 늘어놓던 깐깐한 집사, 데일.
그들은 자신을 위해 주었다.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하지만 네프는 늘 혼자였다. 마음속에서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에 혼자였다.
“나으리.”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와, 네프는 고개를 수그렸다.
눈앞에는 더러운 계집애가 서 있었다.
때에 절어 다 낡은 원피스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그 아이는 바짝 야윈 고양이 같았다.
“혼자세요? 외롭지 않으세요?”
더럽고 냄새가 났지만 계집아이는 제법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프가 바라보자, 소녀는 몸을 살짝 비틀며 웃어 보였다.
그것은 어른 여자들에게서 배운 교태일 것이다.
“잠시 쉬었다 가시겠어요, 나으리? 저희 집이 바로 저기예요.”
그것이 매춘부들이 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네프는 알 수 있었다.
고작 열네 살 정도나 되었을까.
낡은 원피스 위로 살짝 솟아오른 가슴과 스커트 아래 드러난 빼빼 마른 다리. 그런 것들은 아직 여자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으리,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네프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소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신을 열두 살이라 밝힌, 가슴조차 나오지 않은 어린 계집아이가 능숙하게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래서 더 더욱 애처로웠다.
네프는 손으로 소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헤집었다. 소녀는 크게 몸을 떨며 네프의 손길을 거부했다. 얼마나 오래 머리칼을 빗지 않았는지 손가락이 제대로 나아가질 않는다.
“나으리......?”
그것이 승낙의 의사인 줄 알고, 소녀는 슬슬 네프의 눈치를 살폈다.
“몇 살이냐?”
“열다섯, 아니 열여섯이에요.”
네프는 소녀가 예상했던 열네 살보다 더 어리다는 것을 알았다.
바짝 말라 부러질 것 같은 소녀의 체구가 멘스터 국경지대에서 만난 메이라는 소녀와 어딘지 닮아 있었다.
주근깨가 점점이 박힌 그 아이는 무척이나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다. 그 아이를 떠올리자 눈 안쪽에 버석버석 모래가 걸리는 것 같아, 네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넌 살고 싶나?”
네프의 질문에 소녀는 크게 눈을 깜빡였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녀는 몸을 비틀어 머리칼을 가볍게 움켜쥐는 네프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죄송해요, 나으리.”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소녀는 용서를 구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온몸을 애처롭게 떨었다.
“살고 싶어?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가고 싶은가?”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나으리.”
소녀는 계속 바르작댔지만 네프는 소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의 머리칼을 쥔 손에 약간 힘을 주어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네프는 순간 생각했다.
이대로 이 소녀를 죽인다면 어떨까.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도 못한 육체로, 몸을 팔며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소녀를 이 손으로 죽인다면...... 생각해 보면, 이대로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이런 인생은 너무 절망적이지 않은가.
“누나!”
골목 어귀에서 소녀보다 약간 작은 체구의 소년이 뛰어왔다.
역시 비쩍 마른 고양이 같은 소년은 벌벌 떨면서도, 소녀의 머리칼을 움켜쥔 네프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누... 누나를 놔줘요!”
겁에 질려 잔뜩 눈물이 고인 소년의 눈은, 지나치게 맑았다.
네프가 가볍게 손을 떼자 소년은 두려움에 못 이겨 비틀대는 소녀를 부축했다.
부모 잃은 야윈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를 의지하는 꼴이었다.
소녀와 소년은, 그렇게 서로의 손을 꼬옥 움켜쥔 채 달려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쭈욱 골목길의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군.”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의 어둠을 응시하며 네프는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이내 습기 머금은 축축한 벽에 등을 기댔다.
몸을 팔아 살아가야만 하는 어린 계집애에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남동생. 그리고 그런 누나를 끔찍이 위하는 어린 동생.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다쳐서 피가 흘러도 서로의 상처를 핥아 보듬어주며......
순간, 네프는 고양이처럼 튕겨 일어서서 걸었다.
골목을 벗어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로변을 걸어 허름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그리고 깨끗이 목욕을 한 뒤 저녁식사도 했다. 잠들기 전에 주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구한 포도주까지 마셨다.
‘살아가야 할 이유 따위, 만들면 그만이다.’
네프는 창틀에 기대앉아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어떤 일이 있어도 품속에서 꺼내놓지 않는 무언가를 꺼내 입을 맞추었다.
작은 유리병 안에 특수 약품을 채우고 넣어둔, 안구였다.
유리병 안에 둥둥 뜬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로 눈앞에서 그가 살기 띤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잠들기 전, 그의 안구가 든 유리병에 입을 맞추는 것은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었다.
* * *
국경지방에선 아직 간간이 페르티잔과 히이토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국이었지만, 노예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성황이었다.
주로 페르티잔과 히이토 군인 포로들이 많았고, 탈영병들이 어디선가 납치해 온 민간인들도 더러 끼어 있었다.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노예를 사러 왔던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던 전과 달리, 이번의 노예시장은 주로 상인들이 많았다. 쓸 만한 노예들을 사서 다른 지방으로 데려가 다시 되팔려는 속셈이었다.
어찌 됐든 노예시장은 아주 훌륭하게 치러졌다.
소문의 스칸데르 순종이 없이도, 셀마너스의 비로와 그 형뻘 되는 물돼지는 상황을 잘 무마시켰다. 그들이야말로 대륙 최고의 상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칸데르 청년을 데리고 왔던, 살해당한 히이토 사내의 동료들은 미리 받은 선금을 내놓으라는 비로의 말에 난동을 피우며 마을에서 빠져나갔다. 죽은 두목은 불쌍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죽은 사내의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고 도망친 것이다.
스칸데르 청년에 의해 살해당한 히이토 사내의 시체는 젖은 짚단 사이에 끼워져 마을 외곽의 숲속에 버려졌다. 그날 밤, 굶주린 들개와 짐승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진 사내의 시체는 그나마도 이틀째 되던 날 완전히 사라졌다.
화가 난 셀마너스의 비로가 죽은 히이토 사내의 시체를 두 번 욕보인 것이다.
사람들은 도망친 스칸데르 청년이 벌써 이 지방에서 벗어났을 거라고 단정지었다. 수색 닷새째 되던 날, 더위와 피곤에 지친 수색조들은 그렇게 말하며 포기했다.
셀마너스의 비로는 분노에 못 이겨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결국 스칸데르 청년을 찾지 못했으니 대금을 지불할 수 없다고 버텼고, 수색조원들은 대금을 받아내기 위해 버텨 일대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곧 수완 좋은 비로가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한 덕분에 소란은 사그라들었다.
노예시장이 끝나고, 다음 달에 또 있을 대대적인 시장 전까지 바흐티 지방에는 다시금 고요가 찾아들었다.
원래 이 지방은 토박이 출신보다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었다.
요즘은 페르티잔과 히이토의 군인들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을의 여러 선술집에선 크고 작은 싸움들이 일어났다.
페르티잔과 히이토는 오래전부터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기에, 서로 동료들과 모여앉아 맥주를 마시다가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오늘도 마을 광장 구석의 작은 선술집에선 한 무리의 페르티잔과 히이토 군인들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이길 것인가를 두고 서로 내기를 할 정도로 사람들은 이런 일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 아저씨......”
놈들이 가게 집기를 부수건 말건, 식당에 앉아 컵을 닦고 있던 몸집 좋은 중년 사내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생겼다.
한낮의 더운 날씨임에도 더러운 망토를 푹 눌러쓴 깡마른 소년이 비틀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소년은 손에 꼬옥 움켜쥔 동전 몇 개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소년에게서 풍기는 쉰 냄새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늘 가지고 가던 걸로 주면 되지?”
사내가 구멍이 숭숭 난 주머니에 빵이며 고기 같은 음식물을 넣어주었다. 솔직히 동전 두 개의 양치고는 꽤 많은 것이었다. 사내는 손님에게 팔다 남은, 반쯤 남은 포도주까지 끼워 넣어주었다.
“고... 고맙......”
주머니를 받아들고, 소년은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망토 아래 소년의 땟국이 낀 더러운 얼굴에는 참혹한 흉터가 있었다. 입 한쪽이 찢어져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페르티잔의 민가를 덮친 히이토의 군인들은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능욕했다. 겨우 살아남은 아이들은 저 소년처럼 크게 상처 입고 졸지에 부모 잃은 고아가 돼버리는 것이다.
히이토의 군인이 그랬던 것처럼, 페르티잔의 군인들 역시 히이토의 민간인들을 짓밟고 능욕했다. 히이토가 적이기 때문에 히이토의 사람들 역시 모두 적이라는 억지 이론이 당연시되는 게 전쟁이었다.
“아... 안녕히 계세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소년이 허리를 굽히며 가게 밖으로 도망치듯 뛰어나갔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리에도 부상을 입었는지, 소년은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소년은 절뚝절뚝,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더러운 망토 아래로 땀이 흘러 소년의 얼굴을 적셨다. 소년은 선술집에서 산 식료품 가방을 소중한 듯 껴안고 한참 동안 마을 아래로 내려갔다.
마을 아래쪽에는 냇가가 있는데, 그 아래로 쭈욱 내려가다 보면 썩은 내 진동하는 다리가 있다. 그 아래의 무너진 틈 지하에 부모 잃은 아이들이나 부랑아들이 모여 살았는데, 소년은 그들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다리 저 바깥쪽의 은둔처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나무와 돌 벽에 가려져 있어 보통 사람은 찾지 못할 자연 동굴이 소년의 은신처로, 한여름에도 적당히 서늘해서 지내기엔 그리 나쁘진 않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동굴 바로 아래가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냇가 근처라서 밤이 되면 몰래 씻으러 나갈 수도 있었다.
“다... 다녀왔어요.”
소년은 대낮임에도 어두운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동굴 벽에 기대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움직였다. 상당히 몸이 좋은 성인 남성으로, 사내는 한쪽 눈에 더러워진 붕대를 감고 있는 부상자였다.
“배... 배고프죠? 밥... 사왔어요.”
소년은 그제야 쓰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드러난 소년의 얼굴은 한쪽 입이 찢어져 올라가, 보기에도 참혹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선술집 주인이 싸준 음식을 소년은 웃는 낯으로 사내에게 내밀었다.
사내는 하나뿐인 눈으로 멀뚱히 음식들을 바라보더니, 빵 하나를 들었다. 사내가 빵을 우적거리며 씹자, 소년도 더러운 손으로 고기를 들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마을 상황은 어떻지?”
사내가 빵을 우물거리며 묻자, 소년은 웅웅거리며 말했다.
“조... 조용해요. 노... 노예시장도 끝났고, 사... 상인들도 다 갔어요.”
“흐음.”
또 다른 빵을 반으로 잘라 고기와 함께 씹으며, 사내는 포도주를 들어올렸다. 팔다 남은 거라 반밖에 없지만 확실히 동전 두 개로 사기엔 너무 호화스런 식단이다.
“비... 비... 비이로, 아니 비로 아저씨도 조용해요. 차... 찾는 걸 그만뒀대요.”
입가의 큰 상처 탓에 말은 어눌하지만, 소년은 꽤 똑똑한 아이였다. 그날, 히이토의 사내를 살해하고 쫓겨다닐 때 이 소년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수색꾼들에게 붙잡혀 노예시장의 무대에 올랐을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쫓기는 스칸데르인이란 걸 알면서도 숨겨주었다.
닷새째 계속된 수색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공짜로 얻어온 술이라곤 하지만, 맛은 그리 나쁘지 않다.
“가... 갈 거예요?”
소년이 빵을 씹으며 눈을 끔뻑였다. 사내는 말없이 동굴의 벽에 기댔다.
“가... 갈 데는 있어요?”
“글쎄.”
소년의 커다란 눈은 레이루를 연상케 했다. 그래서 그날 밤 소년을 발견한 순간, 순순히 소년의 뒤를 따랐다.
“가... 가지 말아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는 소년의 말에 사내의 가슴이 저며왔다.
벌써 포도주를 다 비워버렸다. 포도주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사내를 바라보던 소년이 고개를 푸욱 수그렸다.
문득 사내는 생각했다.
이 아이를 데려갈까, 하고.
어딘지 레이루를 연상시키는 이 아이를 그냥 놔두고 가기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저......”
사내가 막 그 말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이름, 가르쳐줘요.”
“예르네이다.”
“예... 예르네이......”
소년은 늘 쓰고 다니던 망토 안을 뒤적이더니 다 낡아빠진 종이 하나와 쥐기에도 힘이 들 것 같은 흑영을 꺼내, 귀퉁이에 사내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이...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소년은 귀퉁이에 쓴 사내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사내는 말없이 소년에게서 흑영을 받아들고 글자 앞의 Y를 J로 고쳐 적었다.
소년은 다시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망토 안에 집어넣고는, 확인이라도 하듯 탁탁 쳤다.
“오... 오늘 밤... 가요.”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한번 쳐다보더니,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돌렸다. 물을 뜨러 가겠다며 소년은 동굴 밖으로 나갔다.
태양 아래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깡마른 소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물을 뜨러 간다며 나간 소년은 그날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없을 때 떠나라는 의미였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내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은 동굴을 둘러보다가, 사내는 곧 동굴 밖으로 나와 가파른 길을 내려가 냇가에서 목을 축였다.
여름이라 그런지, 해가 졌음에도 밤하늘은 너무 밝다.
-갈 데는 있어요?
아이는 물었었다.
그런 곳 따위 있을 리가.
살던 고향은 황무지가 되었고, 누구에게나 쫓기고 있는 죄인에게 그런 곳이 있을 리 없다.
어디엔가 안주하고 싶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무척 피곤했다. 입 안이 까끌까끌 말라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어딘가에 편안히 몸을 눕히고 잠들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아이, 왜 이래?”
“앙탈 부리긴. 좋으면서 괜히 그러는 거지?”
냇가 아래에서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적 없는 숲속에서 사랑을 확인하려는 젊은 커플인 듯했다.
사내는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얼굴을 닦아내고, 짐승처럼 숲속의 어둠으로 숨어들었다.
사내는 숲길을 걸어 마을 밖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을 근방의 숲속에는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사내는 변장을 하고 마을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변장이라고 해봤자 더러운 천으로 얼굴을 감싸는 정도였지만, 어두운 밤이라 어설픈 변장이라도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 주었다.
“어이쿠!”
“미안하오.”
지나던 취객 하나와 몸이 부딪치자, 예르네이는 먼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좀 잘 보고 다니지 못해!”
먼저 부딪친 쪽은 그쪽이면서 되려 큰소리다. 하지만 예르네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소년의 말대로 마을은 비교적 한산했다. 자신을 찾는 수색조들도 없는 듯했고, 상인들이 한바탕 빠져나간 마을엔 페르티잔과 히이토의 군인, 피난민들만 간간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말 한 필을 훔쳐야 했다. 말이 있어야 단시간에 좀더 멀리 도망칠 수 있다.
히이토의 사내들에게 붙잡혀 왔을 때, 말을 담보 삼아 돈을 빌려주는 가게를 본 기억이 있다. 예르네이는 곧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큰 대로변이 아닌 크고 작은 골목길을 이용한 탓에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골목 어디에나 눌어붙은 하수구의 악취에 후각이 마비될 지경이 되었을 무렵, 예르네이는 가게 앞 골목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일단 골목에 숨어 가게의 상황을 살폈다.
밤인데도 가게는 불을 밝혀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전당포라고 쓰인 낡은 간판을 단 가게는 말뿐만 아니라 군인들의 검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려주는지, 탈영병으로 보이는 페르티잔의 사내들이 가게 앞에 한 무리 포진하고 있었다.
말이 매어져 있는 마구간은 가게 뒤쪽에 있었다.
“거 참, 이 칼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하냐고! 이 칼을 만든 장인이 그 유명한......”
“장인 브레킬이라고?”
“그래, 브레킬이 만든 명검이란 말씀이야!”
“호오오, 그러셔?”
작달만한 체구의 전당포 주인은 그렇게 우기는 군인의 검을 받아들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오늘만도 장인 브레킬이 만든 검이라고 박박 우기는 놈이 다섯이었어, 다섯! 뭘 모르나 본데, 브레킬은 벌써 5년 전에 죽은 영감이란 말이야! 5년 전에 죽은 영감이, 저 세상에서 검을 만들었나 보지?”
전당포 주인의 말에, 군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하지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곧 저자세로 굽실대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돈이 궁한 쪽에서 숙이고 나가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겨우 얼마간의 돈을 받아들고 한 무리의 군인들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가게 문을 닫을 생각인지 전당포 주인은 허리를 툭툭 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곧 인적이 끊긴 길가로 손님 하나가 더 찾아들었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인색한 장사꾼이었던 가게 주인이 손뼉을 탁 치며 환대하는 것으로 보아 보통 손님은 아닌 듯했다.
예르네이는 빡빡한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저 손님이 마지막이어야 주인이 가게 문을 닫을 테고, 말을 훔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번엔 어떤 물건을 파시렵니까!”
전당포라는 말이 무색하게,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아예 물건의 값을 매겨 파는 곳인 듯하다.
뜨고 있는 눈에 하루살이가 날아들어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예르네이는 하마터면 큰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가게에 찾아든 마지막 손님이라는 게, 무척 낯이 익었다.
그도 그럴 것이 뻥 뚫린 안구 안쪽이 시큰거릴 때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인 것이다. 뒤를 쫓는 악몽 속 귀신의 얼굴, 떠올리면 분노로 이를 갈게 되는 그 얼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달의 여신보다도 화사한 외양을 한, 은색의 악마를―
“이건, 루비입니까?”
“말이 필요해. 그리고 간단한 여행 장비와 옷도.”
“아이고, 물론입지요! 저희 가게에서 제일 좋은 놈으로다 챙겨드리겠습니다!”
가게 주인은 행여 손님의 마음이 바뀔세라, 가게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마지막 손님이 내민 루비는 작은 성 하나 정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이었다.
사내는 기다림이 지루한지 한쪽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그때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사내는 아름답고 우아했다.
성에서 보았을 때의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함은 그간의 피로로 인해 빛을 잃은 것 같지만 오히려 거칠게 다듬은 듯한 매력이 한층 더 살아난다.
어째서, 저 남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처음으로 치밀어 오른 것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두 번째로 치밀어 오른 것은, 본래 의미와는 약간 다른 두려움이었다.
분명 저 사내에게서 도망쳐왔다. 저 미치광이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뛰어왔다.
우연이라도, 이런 식의 우연은 결코 달갑지 않다.
“아이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한참 후에야 가게 주인이 무언가를 한 아름 들고 뛰어나왔다.
“말은, 떠나시기 전에 마구간에서 언제든지 골라 가십시오.”
사내에게 커다란 주머니를 안겨주고 전당포 주인은 지나칠 정도로 허리를 굽실거렸다. 사내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가죽 주머니를 짊어지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터벅터벅,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와는 달리 살랑거리는 우아한 자태는 고양이와도 같았다.
예르네이는 사내의 뒤를 몰래 따라나섰다.
열기를 머금은 바람에 사내의 길게 늘어뜨린 은색 머리칼이 살랑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고고한 자태와 썩은 하수구 냄새가 풍기는 거리의 풍경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세 번째로 떠올라 예르네이의 정신을 깨운 것은 분노였다.
뻥 뚫린 안구의 시큰거림, 열기 머금은 도시 속에 홀로 선 외로움, 갈 곳 없이 쫓겨다녀야 했던 세월.
그런 것들을 떠올리자, 참을 수 없는 살기에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예르네이는 유일한 무기인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가져갔다.
15년 전, 페르티잔의 라자르 왕에게 나라가 짓밟힌 그날부터 줄곧 자신은 도망자였다. 그랬기에 어둠 속에 몸을 숨겨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 것에는 능숙했다.
스르릉, 하고 검집에서 작은 단도가 뽑아져 나왔다.
세공이 세밀한 은색의 단검은 레이루, 그 아이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한 번 눈앞의 저 은색 악마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손에 들어온 이것. 이것으로 저 남자의 목숨을 빼앗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제 슬슬 모습을 나타내지 그러나.”
한참 길을 걷던 사내가 걸음을 딱 멈추었다.
버티고 선 그에게서 새어나온 싸늘한 목소리에, 골목 어귀에 숨어들었던 예르네이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저 남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미행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죽이기엔 더없이 좋은 밤 아닌가.”
사내가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지나치게 밝은 밤이다.
달은 오만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예르네이는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들짐승처럼 네프에게 날아들었다. 그가 움켜쥔 단검에 비친 달이 번쩍 빛났다.
사내가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주머니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과 검날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두 사람의 고막을 찢었다.
얼굴 전체에 두건을 쓴 괴한은 잘 단련된 몸을 하고 있었다. 검을 밀어붙이는 힘도 보통이 아니다.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네프는 생각했다.
“하앗!”
얕은 기합 소리와 함께 네프는 맞붙어 있던 괴한의 검을 떨쳐냈다. 허공에서 튀어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는 솜씨 또한 일류다. 두건 아래, 괴한의 살기 띤 눈이 번쩍 빛났다.
“어떤 사내가 그러더군. 난 공공의 적이라고.”
불어오는 열풍에 흩날린 은빛 머리칼이 네프의 창백한 얼굴을 덮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질문하는 것도, 그렇다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아닌 묘한 울림이었다.
예르네이는 문득 궁금해졌다.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저 사내는 아름답지만, 풍겨오는 분위기는 자신이 알던 그 사내가 아니었다.
감정 없는 자수정빛 눈동자로 자신을 짓밟던 은색의 야수는 한층 더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듬어지지 않은 피비린내 나는 아름다움이 아닌 절제된 냉기다.
그동안 저 사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내는 확실히 변해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랬다.
지금의 저 사내는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더없이 좋은 재목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난 더 이상 쓸데없는 살상은 하고 싶지 않다.”
사내, 네프가 그렇게 말했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새어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한 순간, 예르네이는 쓸데없는 살상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내의 제의에 흔들릴 뻔했다. 하지만 곧 예르네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공격을 재개했다.
일단, 상대방이 협상에 응할 생각이 없는 듯하자, 네프도 검을 다잡았다.
몇 번 허공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고 두 사람의 몸이 어둠 속을 날아다녔다.
네프의 곧은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져 맺혔다.
이렇게 그를 힘겹게 하는 상대는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적이라도 이 정도 실력을 가진 것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고, 네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적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마침 발밑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불행이었으리라. 다시 공격을 위해 뛰어들려던 괴한의 커다란 몸이, 발밑의 돌출된 부위에 걸려 크게 휘청거렸다.
그 기회를 놓칠 네프가 아니었다.
네프의 긴 검이 괴한의 얼굴을 스쳤다.
정확히는 목줄기를 노리고 뻗은 것이지만, 비틀거리는 와중에서도 괴한이 몸을 틀어 방향이 비껴간 것이다.
네프의 검날 끝에 괴한이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의 한쪽 귀퉁이가 찢어졌다. 찢어져 벌어진 틈으로 괴한의 각진 턱선이 보였다. 그러자 곧 어설프게 묶어두었던 천이 벗겨져 괴한의 얼굴이 드러났다.
달 아래 드러난 괴한의 얼굴에, 네프는 잠시 넋을 잃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은 눈이었다.
“이럴 수가......”
네프의 입술 사이로 터져나온 것은 탄식이었다.
그의 자수정빛 눈동자는 놀라움과 경악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예르네이......”
마침내 넋이 나간 듯한 네프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괴한이 달려들었다. 괴한의 발길질에 네프는 들고 있던 검을 놓쳐버렸다. 목숨과 결부된 검을 놓치는 것은 검사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을 놓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괴한은 네프의 몸을 그대로 밀어붙여 벽에 짓눌렀다. 그러고는 억센 팔로 네프의 목을 누르고 다른 한 손에 움켜쥔 검을 그의 얼굴 앞으로 겨누었다. 발길질도 퍼부을 수 없게 밀착되어, 괴한이 칼로 몸 어느 곳을 찌른다 하더라도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
공간도 없이 맞닿은 피부에서 열이 일었다.
괴한의 시큼한 땀 냄새가 네프의 콧속을 간질였다.
“날 노리던 괴한이 자네였을 줄이야.”
예르네이는 처음으로 이 사내가 웃는 것을 보았다. 붉은 입술을 살짝 말아올려 웃는 그 얼굴은 어딘지 위화감이 들었다.
“왜 웃는 거지?”
“그저, 반가워서.”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그런 말투였다. 변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이 사내는 결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찾아다녔네.”
예르네이는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줄곧 찾아다녔어. 자네가 날 버리고 떠난 그날부터. 난 지금까지 계속 자네를 찾아다녔어. 꿈속에서조차도 말이야.”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예르네이의 외침은 수컷 사자의 포효와도 같았다.
성난 야수의 얼굴을, 아름다운 은색 털의 짐승은 맑은 보라색 눈으로 지켜보았다. 여전히 그 눈에선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 말과는 달리, 그리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다.
“아픈가?”
밀착된 상태라 하더라도 손은 움직일 수 있다.
네프는 손을 들어올려 더러워진 붕대 아래 가려진 예르네이의 눈 부위를 건드렸다. 피부 위에 닿는 사내의 손가락은, 물속에서 건져 올린 시체마냥 차가웠다.
“내게 손대지 마.”
예르네이는 낮게 으르렁대며 네프의 목을 짓누른 팔에 힘을 주었다. 꽤 괴로울 텐데도 그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피가 통하지 않아 창백한 얼굴이 약간 붉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날 죽일 건가?”
쏘아보는 자수정빛 눈에 빨려들 것만 같았다.
예르네이는 땀이 배어나와 자꾸만 미끄러지는 검을 움켜쥐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이 남자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자넨, 날 죽일 수 없어.”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사내는 단정지었다.
그 말에 발끈해 예르네이는 검을 쥔 손을 휘둘렀다. 검날 끝을 정확히 사내의 명치에 겨누고서.
“크윽......”
사내는 크게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칼날이 사내의 연약한 피부를 찢고 깊숙이 박힐 때, 그저 입술 사이로 둔탁한 신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실패했다.
사내의 급소를 노리지 못했다.
하지만 사내의 근육에 박힌 칼날을 뽑아내려는 순간, 사내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예르네이가 공격을 위해 몸을 살짝 뗀 순간을 이용해 네프는 있는 힘껏 그의 몸을 밀쳐냈다. 그러고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려는 예르네이의 복부를 팔꿈치로 사정없이 쳤다. 이번에 신음을 토하며 휘청거린 것은 예르네이 쪽이었다.
그가 휘청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네프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발길질을 퍼부었다. 발끝에 턱을 맞고 나가떨어진 그는 꽤 타격이 컸는지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가 그랬잖나, 자네는 날 죽일 수 없다고.”
네프는 그렇게 말하며 복부 약간 위쪽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상처 부위를 손으로 막았다. 꽤 고통스러운지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네프는 복부에서 뽑아낸 검을, 정통으로 턱을 얻어맞아 벽에 기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예르네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박아넣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오른쪽 어깨였다.
“크으윽!”
굵은 신음이 예르네이의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네프는 박아넣었던 검을 다시 뽑아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서로 피를 뿜어내며 대치하고 선 상황이었다.
“아픈가?”
약간 미간을 좁힌 채 네프가 그렇게 물었다.
그에 예르네이 역시 콧잔등에 굵은 주름을 만들었다.
“나 역시 아파.”
그러나 네프가 아프다며 손을 가져다 댄 곳은 복부가 아니라 가슴 부근이었다.
“줄곧 여기가 아팠어. 어릴 때부터 계속 말이지.”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슴 부근을 두어 번 쳤다.
“의사 말로는 마음의 병이라고 하더군.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 전에는 통증이 완화되지 않는다고도 했어.”
예르네이는 바닥에 떨어진 두 자루의 검을 흘끗 바라보았다.
하나는 네프가 떨어뜨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단검이다. 그나마 가까이 있는 것은 네프의 검이다.
“우습게도, 이 가슴의 통증 탓에 매번 살아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더군.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은 분노의 덩어리였지. 결국 분노가 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어.”
네프는 발끝으로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검을 치워버렸다.
얘기를 하면서도 예르네이를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에게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나?”
뜬금없는 질문에 얼굴을 들자, 바로 눈앞에 네프의 납빛을 띤 하얀 얼굴이 있었다.
자수정빛 눈동자를 끔뻑이는 그는 꽤 힘겨워 보였다.
“자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는가?”
그 질문에 예르네이의 하나뿐인 눈이 커졌다.
말을 더듬는,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있는 그 아이는 물었다. 어디, 갈 데가 있어요?라고. 냇가에서 얼굴을 씻으면서 생각했다. 마음 편히 몸을 눕히고 쉴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살아가야 할 이유?
그저, 살아 있는 목숨이기에 겨우겨우 유지하며 살아왔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유?
그건 네프, 저 사내와 같지 않을까.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분노. 자신을 홀로 남게 만든 라자르 왕에 대한 복수심, 그런 것들.
“나와 함께하지 않겠나.”
느릿느릿, 제비꽃 색 눈동자를 끔뻑이며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나에 대한 분노, 그런 것들이라도 좋아. 자네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겠어.”
“미쳤군.”
예르네이는 잇새로 말을 씹어 내뱉었다.
“난 지금껏 내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살아왔어. 하지만 내 아버지가 노쇠하고 나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져버렸지. 그때, 자네가 나타났어. 그래서 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자네로 바꾸었어.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지.”
현기증이 일었다.
지금 이 남자는 뭐라고 지껄이는 건가.
미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사내가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지껄이는지, 예르네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네가 날 죽일 수 없는 이유를 가르쳐줄까? 그건 내가 자네와 닮아 있기 때문이야. 거울 속의 자신을 죽일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예르네이는 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내의 말이 맞다.
그랬기에, 늘 이 남자를 죽이는 데 주저했던 것이다. 정곡을 찔리자 괜히 서글퍼져 눈 안쪽이 시큰시큰 아려왔다.
“많은 자들이 날 죽이려 했어. 그들은 내가 라자르 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라 하더군. 자네 역시 그런 이유로 날 죽이려 했던 건가?”
네프는 힘없이 떨구어진 예르네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숙였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위로 치뜬 그의 자수정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예쁜 빛으로 빛난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 날 증오해. 라자르 왕의 아들 네프가 아닌, 네프라는 한 남자를 미워하고 저주해. 자네에게 미움 받기 위해서라면 하나 남은 눈마저도 뽑아버리겠어. 자네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자네의 눈앞에서 죽여버릴 수도 있어. 내게 몇 번이고 검을 겨누어도 상관없어. 자네의 그 분노가, 그 증오의 감정이 나에게만 향해진 것이면, 난 만족하네.”
냉철하고 총명하며 카리스마마저 갖춘, 리더의 재능이 돋보이는 재목.
이 사내는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다.
하지만 비뚤어져 있다.
그토록 증오하고 있다는 아버지, 라자르 왕처럼 어느 한 부분이 완전히 왜곡되어 있다.
외로운 아이들은 누구에게든 사랑받고 싶어 일부러 못된 짓을 해댄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나와 함께하세나.”
사내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 끝을 말아올린 그 미소는 섬뜩했다.
얼굴을 덮었던 은빛 머리칼이 스르륵,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지금 바로 이 남자를 밀쳐내고 눈앞에 보이는 검을 다잡아 쥘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이 남자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예르네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뿐인 눈으로, 무릎을 굽혀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얼굴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눈 안쪽이 빡빡해져 하나뿐인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것이 흐르지 않게, 예르네이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악마의 핏줄인 이 사내의 곁이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닐까 하고.
이 남자는 결코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그 남자의 목숨을 빼앗으려 칼을 들이대는 한이 있어도.
습기가 눌어붙은 밤공기 속으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녹아들었다. 두 사람분의 피비린내에 흥분하기라도 했는지, 짐승의 울음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우렁찼다.
* * *
“전하, 이제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저녁식사 후 줄곧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라자르 왕에게 그의 충신 티토가 보다 못해 말을 건넸다.
이미 꽤 늦은 밤이었다. 벌써 며칠째 라자르 왕은 잘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있었다.
성에서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충신 티토뿐이었다.
“됐네. 자네야말로 자러 가게나.”
“전하가 침소에 드실 때까지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라자르 왕은 퀭한 눈으로 집무실 앞에 버티고 선 티토를 바라보았다. 온화한 성격과 달리 그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자신이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겠다면, 저 자리에 선 채로 밤을 지새울, 그런 사내였다.
라자르는 하는 수 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 전에 잠시 정원을 산책하고 싶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혼자서는 위험하옵니다.”
대신들 사이에 라자르 왕의 암살계획이 오고 가는 것을 티토는 들은 적이 있었다.
“자네는 날 무어라고 생각하는 건가?”
라자르 왕의 뜬금없는 질문에, 티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이 나라의 왕이시지요.”
명쾌한 그 대답에 라자르 왕은 픽 실소를 터뜨렸다.
“아직 날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은 자네뿐이야.”
“전하......”
“어차피 나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던 참이었어.”
라자르 왕은 티토의 어깨를 한번 치고는 휘적휘적 빈 복도를 걸어나갔다.
“전하!”
“따라오지 말게. 이건 명령이야!”
왕의 엄명을 거부하고 따라나설 만한 배짱은 없었다. 티토는 라자르 왕이 복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이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침소로 향했다.
여름밤의 정원은 꽤 상쾌했다.
바람은 여전히 열기를 머금고 있지만 콧속을 파고드는 꽃향기는 절품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손은 주름투성이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가끔씩 놀라곤 한다.
언제 이렇게 늙었던가.
마음은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던 그 순간 정지된 상태인데.
폭풍이 오려는지 바람이 꽤 거셌다. 거칠게 흩날리는 옷자락 탓에 야윈 라자르 왕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때 자신은 폭풍 속을 헤쳐나가는 짐승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정도 바람에도 몸을 휘청거리는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손질한 정원의 나무들이 부딪쳐 내는 소리가 귓가에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그 음악 소리 속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라자르 왕은 알 수 있었다.
대신들은 아직도 겉으로는 썩은 미소를 보내며 자신에게 아부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꺼먼 마음속에는 자신을 죽여버리겠다는 생각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나무를 헤치고 나아가는 그것은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라자르 왕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잠옷 바람이라 이렇다 할 무기도 없다.
나무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건장한 체격을 한 사내였다.
사내는 매끄러운 갈색 피부를 하고 있었고, 한쪽 눈에는 고급스런 문양이 수놓아진 안대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라자르 왕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사내의 머리카락 색이었다.
사내는, 밤의 어둠처럼 새까만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헝클어져 사자 갈기처럼 날리는 까만 머리칼은 염색한 것은 아닌 듯했다.
아니, 사내가 다른 색으로 머리칼을 물들이고 있다 하더라도 라자르 왕은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사내가 스칸데르인이란 것을.
“날 데리러 온 건가. 네가, 이 친구야.”
라자르 왕이 미소지으며 말하자 사내는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사내가 검을 다잡아 쥐었다. 거센 바람에 사내의 검은 머리칼이 날렸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매서운 표정의 얼굴은, 곧 온화한 미소를 띤 옛 친구의 얼굴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칼을 날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던 네가.
결국 질투라는 추한 감정으로 미워하고야 말았던 그 남자.
상자에 담겨진 그의 머리. 피가 말라붙어, 창백하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
사내의 얼굴이 상자 안에 담겨져 있던 네가의 얼굴처럼 보였다. 창백하게 질려 섬뜩한 외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사내가 검을 들어올렸다. 라자르 왕의 눈에는 사내가 들어올린 검이, 뻗어진 손처럼 보였다.
-데리러 왔습니다, 라자르.
거센 바람 소리에, 꿈결처럼 상냥한 네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라자르 왕은 미소를 띤 채 네가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의 상냥한 손이 아니라 날카로운 칼날의 감촉이었다. 살갗을 꿰뚫은 검이 쑤욱 뽑아져 나가고, 다시 한 번 살갗을 꿰뚫었다.
얕은 신음 소리와 함께 피가 튀고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라자르 왕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핏물이 배어나온 눈으로 암살자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칼의 암살자는 그리운 옛 친구가 아니었다.
냉정한 눈, 일말의 동정심 없는 눈을 한 자객일 뿐.
“너무 쉽군.”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인물이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달을 부어 만든 듯한 머리칼과 맑은 자수정빛 눈동자. 라자르 왕의 핏물 배인 눈이 크게 떠졌다.
“네프......”
새어나온 그 이름에, 버티고 선 사내의 시선이 라자르 왕에게 향했다. 달콤한 외모를 한 아들은 검은 머리칼을 한 자객에게서 피로 더러워진 검을 낚아챘다.
“원망은 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던 일 아닙니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버지를 벤다는 죄책감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라자르 왕은 허공을 가르는 은빛 칼날을 똑똑히 보았다.
피로 물들어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바람 앞에 버티고 선 두 사람의 모습 위로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은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누이, 세리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상냥한 미소를 띤 네가.
그래도 이 정도면 꽤 만족할 만한 최후가 아닌가.
풀밭 위로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 라자르 왕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향기가 진한 꽃이 날려 허공에 흩날렸다. 연한 보랏빛을 띤 꽃잎이 눈처럼 팔랑이며 떨어져, 싸늘하게 식어가는 라자르 왕의 시체를 덮어갔다.